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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주유고 제15권 / 묘갈(墓碣)
부사 봉래 양공 묘갈명병서(府使蓬萊楊公墓碣銘 幷序)
봉래(蓬萊) 양 선생(楊先生)의 아들 종정공(宗正公)이 선생의 시집을 간행하여 세상에 유포하고, 또 비석감을 마련하여 그 고을 출신고공 원외랑(考功員外郞)인 내게 선생의 행장을 가져와 묘갈명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선생의 빛나는 이름이 어찌 비명을 새겨야만 후세에 전해지겠습니까. 선생께서 가정(嘉靖) 정축년(1517, 중종 12)에 태어나 만력(萬曆) 갑신년(1584, 선조 17)에 돌아가셨으니, 지금 50년이 지났습니다. 우리 고을의 아녀자며 어린아이며 농부들은 선생이 살던 마을을 지날 때면 반드시 ‘선생의 마을이다.’라고 하고, 선생의 무덤을 지날 때면 반드시 ‘선생의 무덤이다.’라고 하는데, 이것이 어찌 가리키며 알려 주었기 때문이겠습니까.
우리 고을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 중에 선생의 성명을 모르는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는 비유하자면, 상서로운 기린과 아름다운 봉황이 수천 년 동안 빛을 감추어도 그 아홉 색깔 깃털과 울음소리를 마치 보고 들은 것처럼 사람들이 모두 사모할 줄 아는 것과 같다고 하겠으니, 선생의 훌륭한 이름이 과연 비명에 새겨져야만 전해지겠습니까.”하니, 종정공이 말하기를,
“그렇기는 하지만 우리 선친의 효우와 치행, 관력의 자초지종을 모두 후세에 알리지 않을 수는 없다네.”하였다.
이에 내가 사양해도 어쩔 수 없어 비명을 짓는다. 선생의 휘는 사언(士彥), 자는 응빙(應聘), 호는 봉래(蓬萊) 또는 해객(海客)이다. 그 선조는 본래 한(漢)나라 태위 양진(楊震)의 후예이다. 7세조 기(起)는 원(元)나라 성종(成宗) 때 상국(相國)의 신분으로서 충렬왕(忠烈王)과 혼인하는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를 모시고 고려로 왔는데, 충선왕(忠宣王)이 상당백(上黨伯)에 봉하였기 때문에 청주 양씨(淸州楊氏)가 되었다.
휘 진(振)은 본조에 들어와 개국 공신에 녹훈되고 공조 전서에 올랐으니, 선생의 고조이다. 이 분이 황해도 절도사(黃海道節度使)를 지낸 휘 치(治)를 낳았고, 절도사는 선교랑을 지낸 휘 제달(悌達)을 낳았고, 선교랑은 돈녕부 주부를 지낸 휘 희수(希洙)를 낳았다.
주부는 첨사를 지낸 문화(文化) 유위(柳湋)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선생과 두 아우 사준(士俊)ㆍ사기(士奇)를 낳았는데, 모두 문장과 경술이 뛰어나 세상에서 삼걸(三傑)이라 부르며 미산(眉山) 소씨(蘇氏)에 비하였다.
선생은 태어날 때부터 용모가 수려하였고 정신이 매우 고매하였기에 선생을 본 사람들은 묻지도 않고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여겼다. 스물네 살에 〈단사부(丹砂賦)〉를 지어 진사시에 합격하였는데, 방방(放榜)하기도 전에 함께 응시했던 자들이 입에서 입으로 서로 전하여 널리 퍼졌다.
부모상을 당해서는 6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상을 마치고 나서 병오년(1546, 명종 1)에 문과에 급제하여 대동도 찰방(大同道察訪)에 제수되었는데, 이곳에서 〈열운정기(閱雲亭記)〉를 지어 당시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차례로 삼등(三登), 함흥(咸興), 평창(平昌), 강릉(江陵) 네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였는데, 선생이 떠난 뒤에 모두 송덕비가 세워졌다.
내직으로 들어와 성균관 사성과 종부시 정을 지내고, 또 회양(淮陽)과 철원(鐵原)의 수령으로 나갔는데, 이는 선생이 그곳의 산수를 즐기기 위하여 자원한 것이다. 여러 해 동안 회양 부사로 있으면서 늘 작은 교자를 타고 금강산(金剛山)을 오가며 초연하게 속세를 벗어나려는 뜻을 품었다.
금강산 만폭동(萬瀑洞)에 여덟 자를 크게 써서 새겼는데, 사람들이 평하기를, “지리산(智異山) 쌍계사(雙磎寺) 석문의 최고운(崔孤雲 최치원(崔致遠))의 글씨도 여기에 못 미친다.”하였다. 그 후 안변 부사(安邊府使)로 나갔는데, 안변은 북관의 큰 도회지로 풍속이 거칠고 사나웠다.
선생이 다스리면서 효제(孝悌)로 교화하는데 힘써 교화가 널리 행해졌으니, 지금도 그 곳 백성들은 선생께서 가르치신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외우기를 그치지 않고 있다. 감사가 도내 최상의 고과로 조정에 상주하여 통정대부에 올랐다.
선생께선 어느 날 갑자기 큰 연못을 파고 말먹이를 비축하게 하였는데,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훗날 군마(軍馬)가 주둔할 것에 대비하는 것이다.” 이듬해 계미년(1583, 선조16)에 오랑캐가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고자 대군(大軍)이 북쪽에 왔다.
다른 여러 읍에서는 물자를 공급하느라 곤란을 겪어 심지어 이민(吏民)들 중에 책임을 다하지 못해 죽임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안변부만은 태연하였다. 이에 사람들이 ‘진짜 신인(神人)’이라고 더욱 탄복하였다. 얼마 후 지릉(智陵)에 화재가 일어났는데, 선생은 수령으로서 끝내 법에 저촉되어 해서(海西)에 2년간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풀릴 무렵 병으로 생을 마감하였으니, 향년 68세였다. 그 해에 영평현(永平縣) 금조산(金鳥山)으로 모시고 가서 장사 지냈는데, 이곳은 선생께서 직접 점지한 자리였다. 선생은 세상에 보기 드문 뛰어난 인재로 통달하지 않은 학문이 없고 읽지 않은 서적이 없으며 식견이 고매하고 행실이 깨끗하였다.
효성과 우애를 타고났으며 남보다 뛰어난 품성을 지녀 형을 섬기고 아우를 사랑하는데 그 도를 다하였다. 형이 위독할 때엔 똥을 맛보아 생사를 가늠하였고, 아우가 역질에 숨이 넘어가려 하자 울부짖으며 흐느꼈는데, 이에 감응하여 솔개가 쥐를 떨어뜨려 주어 이것으로 약을 써서 마침내 살아났다. 이는 모두 예전에 없었던 일이니, 안함(顔含)과 유곤(庾袞)의 무리와 비교해도 어떨지 모르겠다.
선생께선 벼슬길에 올라 40년 동안 이름난 고을을 여덟 번이나 맡았지만, 재물 한 푼 늘리지 않았고 제대로 된 말 한 필이 없었다. 처자를 위해선 털끝만큼도 계획하지 않았으며 항상 이렇게 말씀하였다. “나는 사지금(四知金)의 후손으로 우리 선조를 욕되게 할 수 없다.”
또 남격암(南格庵)에게 배워 임진왜란을 예측하였으며, 선조(宣祖) 40년간의 일을 점친 것이 부절처럼 꼭 맞았다. 풍악(楓岳) 동쪽 다섯 군데 경치 좋은 곳에 모두 작은 정자를 지었다. 시를 지을 때에는 이 공봉(李供奉)을 으뜸으로 삼아 시어를 조탁하지 않고 감정을 자연스럽게 드러내었으며, 때때로 기이한 시구를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글씨는 해서(楷書)와 초서(草書)에 모두 뛰어나 완법(腕法)을 깊이 터득하여 거의 노공(魯公)과 장진(藏眞)의 경지에 이르렀다.
선생이 일찍이 ‘비(飛)’자를 크게 써서 족자를 만들어 놓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이상한 바람이 불어와 족자가 바람에 날려 바다로 들어갔으니, 이 날이 바로 선생이 세상을 떠난 날이었다. 태학사 서경(西坰) 유근(柳根)이 그 사실을 기록하여 놓았다.
아, 한 가지 선(善)과 한 가지 기예(技藝)만 있는 사람도 당시에 출세하여 높은 벼슬까지 이를 수 있는데, 모든 선을 지니고 모든 기예를 익힌 선생과 같은 분이 어찌 지위가 이 정도에 그치고 도가 여기에서 막혔단 말인가. 그러나 세상의 작록과 부귀가 어찌 감히 선생의 마음에 들어올 수 있었겠는가. 선생이 지닌 것 중에 매우 작은 것을 덜어서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으로 바꾸어 준다 하더라도 선생이 어찌 한 번이라도 승낙하겠는가. 작록과 부귀는 진실로 선생을 위해 말할 거리도 못 된다.
선생의 초취(初娶)는 음성 박씨(陰城朴氏)로 아들이 없다. 후취는 간성 이씨(杆城李氏)로 정승 이지방(李芝芳)의 5대손이다. 조부 종손(宗孫)은 진사이고, 부친 시춘(時春)은 과거 공부를 하였으나 급제하지 못했다. 아들 셋과 딸 셋을 낳았는데, 아들 둘과 딸 둘이 일찍 죽었다.
아들은 종정공(宗正公)만 남았는데, 이름은 만고(萬苦)이다. 계묘년(1603, 선조36)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경술년(1610, 광해군2)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뛰어난 재능이 있어 그 집안을 계승하였으나 아들이 없어 숙부의 손자 두신(斗新)을 후사로 삼았다.
딸은 충의위 이흔(李訢)에게 출가하여 아들 극준(克峻)을 낳았다. 서자(庶子)는 만세(萬世)ㆍ만선(萬善)ㆍ만춘(萬春)ㆍ만상(萬祥)인데, 만세와 만춘은 자녀가 있고, 세 명의 서녀(庶女)도 모두 자녀가 있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천지가 정기를 배태하여 / 元精胚胎
뛰어난 분을 세상에 내셨네 / 篤生異人
방내(方內)와 방외(方外)로 / 方之內外
그 정신이 노닐었다네 / 游斯其神
동방삭은 해학을 가까이했고 / 朔近於誹
양웅은 현묘한 도에 빠졌지만 / 雄溺於玄
공은 해학도 않고 현묘한 도에 빠지지도 않아 / 不誹不玄
태허의 경지에 충분히 들었어네 / 優入寥天
일상에서 지은 뛰어난 시편이 / 糠粃詩篇
인간 세상에 널리 흩어졌네 / 散落人間
내가 선생의 명을 짓지만 / 我銘先生
일부분도 드러내지 못했네 / 未足一斑
<끝>
[註解]
[주01] 부사 …… 묘갈명 : 이 글은 저자가 이조 좌랑으로 있던 1630년(인조8)에 지은 것으로 양사언(楊士彦, 1517~1584)에 대한 묘갈
명이다. 양사언의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응빙(應聘), 호는 봉래(蓬萊)이다.
[주02] 종정공(宗正公) : 양만고(楊萬古, 1574~?)로,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도일(道一), 호는 감호(鑑湖)ㆍ돈호(遯湖)ㆍ비로도인(毘
盧道人)이다.
[주03] 선생의 시집 : 《봉래시집(蓬萊詩集)》은 1626년경에 간행된 것으로 추측되는데, 한국문집총간 36집에 수록되어 있다.
[주04] 그 고을 출신 : 저자와 양사언은 모두 고향이 포천(抱川)이다.
[주05] 고공 원외랑(考功員外郞) : 이조 좌랑을 칭하는 말이다.
[주06] 아홉 색깔 깃털 : 원문의 ‘구포(九苞)’는 《초학기(初學記)》 권30 〈논어적쇠성(論語摘衰聖)〉에는 봉황이 지닌 9가지 특징으로 설
명하였는데, 여기서는 아홉 색깔의 깃털로 풀이하였다.
[주07] 울음소리 : 원문 ‘귀창(歸昌)’은 《송서(宋書)》 〈부서지중(符瑞志中)〉에는 ‘저녁에 우는 소리’라고 되어 있고, 《설원(說苑)》 〈변
물(辨物)〉에는 ‘모여서 우는 소리’라고 되어 있다.
[주08] 미산(眉山) 소씨(蘇氏) : 송(宋)나라 사천성(四川省) 미산 출신으로 당송팔가(唐宋八家)에 든 소순(蘇洵)과 그의 두 아들 소식(蘇
軾), 소철(蘇轍)을 말한다.
[주09] 단사부(丹砂賦) : 《봉래시집》 권3에 실려 있다.
[주10] 열운정기(閱雲亭記) : 열운정(閱雲亭)은 평양부(平壤府) 대동관(大同館) 북쪽에 있는 정자이다. 〈열운정기〉는 《봉래시집》 권3
에 실려 있다. 《東國輿地勝覽 卷51 平安道》
[주11] 여덟 자 : “봉래풍악원화동천(蓬萊楓嶽元化洞天)”이라고 쓴 이 글씨는 아직도 남아 있는데, ‘만폭동 경관의 값이 천 냥이라면, 그
중에 오백 냥은 양사언의 글씨 값이다’라는 말이 전해질 정도라고 한다.
[주12]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 부모의 은혜가 한량없이 크고 깊음을 설하여 그 은혜에 보답할 것을 가르친 불교 경전으로 《불설대보부
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이라고도 한다.
[주13] 계미년에 …… 왔다 : 1583년 발생한 니탕개(泥湯介)를 중심으로 한 여진족의 반란을 말한다. 온성 부사(穩城府使) 신립(申砬)과
첨사 신상절(申尙節) 등에 의해 토벌되었다.
[주14] 지릉(智陵) : 태조(太祖)의 증조부인 익조(翼祖)의 능으로 안변부(安邊府) 서곡현(瑞谷縣) 봉용역(奉龍驛) 북쪽에 있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49 咸鏡道》
[주15] 안함(顔含) : 진(晉)나라 사람으로 자는 홍도(弘都)이다. 형이 병이 들자 13년 동안이나 집밖을 나가지 않으면서 간호하였다.
둘째 형수 번씨(樊氏)가 병으로 실명하였는데, 이무기 쓸개로 약을 써야 한다고 하였다. 어느 날 푸른 옷을 입은 아이가 와서 푸른
주머니를 주고는 푸른 새가 되어 날아가 버렸는데, 열어보니 바로 이무기의 쓸개였다. 《晉書 卷88 孝友列傳 顔含》
[주16] 유곤(庾袞) : 진(晉)나라 사람으로 자는 숙포(叔褒)이다. 전염병으로 두 형이 죽고 셋째 형 비(毗)가 위독하자, 부모와 아우들마저
모두 밖으로 나가 거처하였으나 유곤만은 형의 곁을 떠나지 않고 간호하였다. 백여 일 동안 죽은 형들의 관을 어루만지며 통곡하면
서 병든 형을 간호하였지만 끝내 병에 전염되지 않았다고 한다. 《晉書 卷88 孝友列傳 庾袞》
[주17] 사지금(四知金) : 양사언의 선조 양진(楊震)을 가리키는 말이다. 양진이 동래 태수(東萊太守)로 부임하던 도중 창읍(昌邑)에 이르
렀을 때, 창읍 영(昌邑令) 왕밀(王密)이 밤중에 찾아와 금 10근을 바치며 “밤이라 아무도 알 자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양
진이 말하기를 “하늘이 알고 귀신이 알고 내가 알고 자네가 아는데, 어찌 아는 자가 없다고 하는가.”라고 하였다. 《後漢書 卷54 楊
震列傳》
[주18] 남격암(南格庵) : 남사고(南師古, 1509~1571)로,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경초(景初), 호는 격암이다. 역학(易學)ㆍ참위(讖緯)
ㆍ감여(堪輿)ㆍ천문(天文)ㆍ관상(觀相)ㆍ복서(卜筮) 등 모든 학문에 두루 통달하였다. 도참서로 《남사고비결(南師古祕訣)》과
《남격암십승지론(南格庵十勝地論)》 등의 저술이 있다.
[주19] 이 공봉(李供奉) : 당(唐)나라 시인 이백(李白)을 말한다. 이백이 일찍이 한림 공봉(翰林供奉)에 임명된 적이 있어 이렇게 말한 것
이다.
[주20] 완법(腕法) : 글씨 쓸 때 팔의 자세를 말하는데, 현완법(懸腕法), 제완법(提腕法), 침완법(枕腕法)이 있다. 침완법은 왼손으로 종
이 위를 덮은 다음 그 손등에 오른쪽 손목을 얹고 쓰는 법으로 소자(小字)를 쓰는 데 적당하다. 제완법은 오른쪽 팔을 책상에 대고
쓰는 법으로 중자(中字)를 쓰는 데 적당하다. 현완법은 팔을 어깨높이로 들어 운필하는 법으로 대자(大字)를 쓰는 데 적당하다.
[주21] 노공(魯公) : 당(唐)나라의 서예가 안진경(顔眞卿, 709~785)을 말한다. 일찍이 노군개국공(魯郡開國公)에 봉해졌기 때문에 노공
으로 불렸는데, 해서ㆍ행서ㆍ초서의 각 서체에 모두 능하였다.
[주22] 장진(藏眞) : 당나라 때의 서예가 회소(懷素, 727~785)의 자이다. 승려이자 서예가로서 특히 초서(草書)를 잘 썼다.
[주23] 태학사 …… 놓았다 : 유근(柳根)이 지은 〈비자기(飛字記)〉는 《봉래시집》 권3에 실려 있다.
[주24] 방내(方內)와 …… 노닐었다네 : 방내는 인간 세계를 말하며 이것을 벗어난 것을 방외라 한다. 《장자》 〈대종사(大宗師)〉에 “공자
가 ‘그들은 이 세상 밖에서 노니는 사람들이고, 나는 이 세상 안에서 노니는 사람이다.〔孔子曰, 彼遊方之外者也, 而丘遊方之內者
也.〕’라고 하였다.” 하였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이라나 김하라 (공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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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府使蓬萊楊公墓碣銘 幷序
蓬萊楊先生后子宗正公梓先生詩行于世。又具樂石。以先生狀問銘於其鄕考功員外郞趙絅。絅曰。先生之赫赫盛名。奚待夫銘諸片石而后傳於后歟。先生生於嘉靖丁丑。卒於萬曆甲申。今且五十年矣。吾鄕之婦孺田畯過先生里者。必曰先生里也。過先生墓者。必曰先生墓也。是豈有指告哉。微吾鄕。四方之人有不知先生姓名者乎。譬如祥麟彩鳳雖閟光屢千載。而九苞之毛。歸昌之音。人皆知慕。而若或見而聞之也。先生盛名之傳。果待於片石之銘歟。宗正公曰。雖然。吾先人孝友行治歷官始終。不可不一二詔來世。某辭不獲則曰。先生諱士彥。字應聘。號蓬萊。又號海客。其先本漢太尉楊震之后。七世祖起。當元成宗時。以相國陪齊國長公主釐降高麗。忠宣王封上黨伯。故爲淸州楊氏。有諱振。入國朝錄開國功。爲工曹典書。先生高祖也。是生諱治。爲黃海節度使。節度生諱悌達。宣敎郞。生諱希洙。敦寧主簿。主簿娶僉使文化柳湋之女。生先生及二季士俊,士奇。俱有文章經術。世號爲三傑。譬之眉山蘇氏。先生生而秀朗。神精霞擧。人見者不問知非世上人。年二十四。作丹砂賦。成進士。未坼號。同進者口相傳藉藉。遭內外艱。廬墓六年。喪除。乃擧丙午文科。擢拜大同丞。著閱雲亭記。一時稱賞。歷宰三登,咸興,平昌,江陵四邑。有去後碑。入爲成均館司成,宗簿寺正。又出爲淮陽,鐵原守。樂其有山水而求也。居淮有年。每以肩輿往來金剛山。超然有遺世之志。大書八字于萬瀑洞石而刻之。評者以爲崔孤雲雙溪石門之書斯下云。其後又出爲安邊。安邊北關一都會也。俗悍而羯羠。先生爲政。務以孝悌敎化。化大行。至今民誦先生父母恩重經不衰。監司奏一道考爲第一。陞通政。忽鑿大池積蒭茭曰。備他日軍馬之屯。翌年癸未翟亂。大兵赴北。列邑困於挽汲。吏民至有受責死者。而府獨晏然。人益服其爲眞神人也 。無何。智陵災。以守土竟中文法。謫海西二年。將還病卒。年六十八。其年歸葬于永平縣金鳥山。先生自卜也。先生以曠世逸才。學無所不通。書無所不讀。識見高邁。操履皎潔。孝友全天。至性過人。事其兄愛其弟。各極其道。兄嘗病革。至嘗其矢驗死生。弟嘗患痘絶。號泣感飛鳶墜鼠。藥之遂甦。此皆古未嘗有者。不知顏含,庾衮輩何如耳。自始第。四十年典名邑者八。不嬴一錢。不全一馬。不爲妻子毫髮計。常曰。吾四知金後。不可忝吾祖。且師南格菴。預策壬辰變。卜宣廟四十年如符契。占楓岳東五佳處。皆作小亭。爲詩祖李供奉。不事雕飾。天然沖夷。間出奇傑語驚人。作字。楷草俱至。深得腕法。駸駸乎魯公藏眞之域矣。嘗大書飛字作障。一日異風忽起。挾入海中。卽先生觀化日也。大學士柳西坰根爲之記其事。嗚呼。人有一善一藝者。自能騁於時。炫煌爵位。若先生何善不有。何藝不游。而位止於是而道尼於是歟。然世之爵祿富貴。豈敢宅先生心。雖升先生所有若緇銖者易世人所好。先生安有一頷。腐鼠固不足爲先生道也。先生前配陰城朴氏。無子。後配杆城李氏。政丞李芝芳五代孫 。王父宗孫。進士。考時春。業文不第。生三男三女。而二男二女皆夭。男宗正公獨存。名萬古。癸卯司馬。庚戌文科。有大才能嗣其家。無子。擇叔父孫爲后。曰斗新。女適忠義李訢。生子克峻。庶子曰萬世,萬善,萬春,萬祥。萬世,萬春有子女。庶女三人。皆有子女。銘曰。
元精胚胎。篤生異人。方之內外。游斯其神。朔近於誹。雄溺於玄。不誹不玄。優入寥天。糠粃詩篇。散落人間。我銘先生。未足一斑。<끝>
龍洲先生遺稿卷之十五 / 墓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