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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文書를 통해 본 蘇亭 慶州李氏家의 家系와 社會經濟的 기반 - 金鶴洙(한국정신문화연구원 전문위원)
Ⅰ. 머리말
본서에 수록한 고문서는 경상북도 경주시 九政洞(蘇亭) 소재 慶州李氏 德峯宗宅 소장 고문서로 原所藏者는 李相杰 선생이다.
蘇亭의 경주이씨는 고려후기의 대학자 李齊賢(益齋)의 후손으로 조선시대에는 驪州李氏·慶州崔氏·延日鄭氏·淸安李氏·英陽南氏·安東權氏 등과 함께 경주를 대표하는 명가로 성장·발전해온 가문이다.
韓國精神文化硏究院 國學資料硏究室에서 慶州李氏 德峯宗宅 소장 고문서를 조사한 것은 1999년이었는데, 당시 이 고문서는 동국대학교 경주도서관에 기증 상태에 있었다. 德峯(李鎭宅)의 宗孫이며 자료의 원소장자인 李相杰(蘇瑚) 선생은 慶州鄕校 典校를 역임하는 등 경주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이 깊었고, 위선의식 또한 남달라 선대의 家藏文獻을 보존·관리하는 데에도 심혈을 기울여 왔다.
이런 노력의 결과 종가의 서고에는 德峯 이래의 고문서 약 3000여점, 고서 약 1000여책이 온존히 보존될 수 있었다. 그러나 개명한 식자였던 선생은 항상 이 전적들을 사물로 여기기보다는 공적으로 관리되어야 할 문화유산이라는 판단에서 대학 또는 학술 기관에 영구 기증하여 한국학연구의 기초자료로 활용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때마침 동국대학교 경주도서관에서는 경주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연구할 수 있는 문헌자료를 집성하는데 박차를 가하며 지역 대학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만전을 기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접한 선생은 珍藏文獻의 기증을 흔쾌히 결심하고 1998년 7월과 1999년 2월 두 차례에 걸쳐 집안의 모든 전적을 同 도서관에 일괄 기증하게 된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기증된 전적들은 현재「蘇瑚文庫」에 소중히 보관되어 있다.
註1)
한국학연구자의 관심어린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이런 가운데 기증업무의 실무를 담당했던 경주도서관의 박장승 과장과 이상걸 선생의 종제인 이상필 선생은 본원에서 전국에 산재한 고문서를 수집·정리하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음을 알고 자료조사를 의뢰하였다. 이에 본원에서는 안승준·김문택·김학수 등으로 구성된 조사팀이 경주로 내려가「소호문고」의 전적들을 정밀 검토한 결과 자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는 평가를 내리고, 본원에 한시적으로 대여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평소 자료의 공익성을 강조했던 이상걸 선생의 배려와 경주박물관의 적극적인 협조에 힘입어 고서를 제외한 고문서·성첵고문서 일괄을 한시적으로 대여하여 본원의 정리공정에 따라 1999년 9월에서 2000년7월까지 마이크로필름 촬영을 완료한 뒤 2000년 9월 同 도서관에 반납하였다.
이 과정에서 박장승·이상필 두 분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본원의 정리작업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특히 이상필 선생은 본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차례에 걸친 遠行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누락된 자료를 꼼꼼히 챙겨주셨는데,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Ⅱ. 蘇亭 慶州李氏의 가계와 인물
본서의 주인공인 경주 蘇亭의 경주이씨는 고려 후기의 대학자이며 정치가인 李齊賢(益齋)의 후손으로 조선초 이래로 경주의 方於里·九政里(蘇亭) 일대에 세거하며 사환과 학문을 지속해 온 양반가문이다. 경주이씨는 이알평을 시조로 하는 성관으로 고려시대 이래로 상경종사하며 사환가로서의 문호를 확대하였고, 고려 후기에는 李齊賢(1287-1367)이라는 걸출한 인물을 배출하며 가문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蘇亭의 경주이씨는 이제현의 장자 李瑞鍾의 3자인 李元益의 후손 계열로서 조선 초기에 고향인 경주로 落南한 경우였다.
註2
영남 사림파의 주요 가문 중에는 조선 초기에 사환·혼맥 등을 매개로 낙남하여 후일 영남학파의 핵심 가문으로 성장·발전한 집안이 많았다. 그 대표적인 경우로 固城李氏(安東), 載寧李氏(寧海), 全州柳氏(安東) 등을 들 수 있는데, 蘇亭의 경주이씨는 관향지로 되돌아 왔다는 점에서 위의 가문들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圖1】〈慶州李氏家系圖1〉
李齊賢은 3남「瑞種·達尊·彰老」 5녀를 두었는데, 이 중 장자 瑞鍾이 소정 경주이씨의 직계 선조가 된다. 이제현은 81세를 일기로 사망하기까지 7朝를 섬기며 4번이나 재상에 올랐으나 그의 학문적 지위와 정치적 위상이 아들들에게 그대로 계승되지는 못했다.
장자 瑞種은 문음으로 출사하여 宗簿寺副令을 지내는데 그쳤고, 3자 彰路는 開城尹. 密直使를 지냈다. 그나마 2자 達尊이 18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여 문명을 떨치고, 寶文閣 直提學을 역임하며 장래가 촉망되는 관료로 성장하였으나 1340년(충혜왕 1) 원나라로 使行하다 28세로 단명하고 말았다.
이처럼 이제현의 세 아들은 李達尊을 제외하고는 사환적으로 크게 현달한 인물은 없었지만 부조 이래의 사회적 지위는 탄탄하여 당대 굴지의 집안과 혼인하였다. 우선 장자 서종은 직제학 洪侑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홍유는 이제현의 지우로서 詩에 능했던 洪侃(洪厓)의 아들이었다.
차자 달존은 한국 유학사에서 커다란 위치를 점하고 있는 白頤正(頤齋:1247-1323)의 사위였으며, 3자 彰老의 처부 韓公議(淸城君)는 우정승 韓渥의 아들이었다. 韓公議의 아들 韓脩(柳巷)는 고려 말기 문장가·명필로 명성이 높았다.
이서종의 세 아들 중 장자 寶林은 益齋의 장손으로 대사헌·정당문학을 지내는 등 관계에서 활약이 컸고, 사후에는 文肅이란 시호가 내렸다.『高麗史』에 따르면, 그는 사람됨이 엄격하고 품행이 방정하였으며 정치적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차자 實林은 그 행적이 문헌으로 전하는 것이 없고, 후사마저 없어 族譜에도 이름만 올라 있는 정도이다.
3자 元益이 바로 蘇亭 慶州李氏의 선대인데, 그 역시 大司成을 지낸 것으로만 기록되어 있을 뿐 다른 행적은 상고할 수 없다. 元益의 외아들 李瑄은 號가 正軒이고, 벼슬이 兵曹判書로 기록되어 있으나『高麗史』나 『朝鮮王朝實錄』에서의 그의 행적이 확인되지 않으며, 配位도 실전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그가 正軒이란 雅號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상당한 학식을 지녔던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로서는 더 이상의 행적은 알 수 없다. 이처럼 蘇亭 경주이씨의 선대는 益齋 이후 3대 동안 사환과 학식에 있어 침체기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계속적으로 중앙 관계에 진출하여 현관을 배출하던 李達尊·彰老 계열과는 상당히 대조적인 현상이었다.
註3)
한편 경주이씨는 李瑄의 아들 李之帶 대에 이르러 커다란 변화가 수반되었다. 이선의 차자였던 이지대는 벼슬이 漢城府判尹에 이르렀는데,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할 조짐이 보이자 落南하여 경주의 九良里(中里)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지대가 구량리에 정착하게 된 지역적 배경은 자세하지 않지만 그가 정란을 피해 관향지로 이주한 것은 분명하다.
이지대 역시 행적이 상세하지는 않으나 武班職에 종사한 것으로 보인다. 1394년(太祖 3) 당시 경상도 수군만호였던 이지대는 왜선을 포획한 공으로 음식과 비단·명주를 하사받은 바 있었고
註4)
족보에는 慶尙道水軍節制使를 거쳐 한성판윤을 지낸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런 정황을 고려한다면, 이지대는 경상도 수군만호 또는 수군절제사 재직 시절에 九良里 일대를 점지해 두었을 가능성이 크고, 계유정란의 기미가 보이자 솔가하여 이거한 것으로 생각된다.
註5)
사실 구량리는 경주 관할이지만 지역적으로는 울산에 치우쳐 있어 이런 추측을 더욱 가능케 한다. 이지대는 구량리에 입거하면서 손수 은행나무를 심었는데, 수백년이 지나도록 무성하게 자라고 있으며, 1865년(고종 2)에는 후손들에 의해 遺墟碑가 건립되기도 했다.
이지대는 비록 무관이었지만 학식을 지닌 인물이었다. 우선 그는 竹隱이란 아호를 사용하고 있었으며, 영남사림파의 영수 김종직과는 忘年之交를 맺었다는 족보의 기록이 이를 방증하고 있다. 이지대는 경주부 동쪽 明活山 아래의 阿陪洞에 묻혔는데, 그는 方於里·楊月·蘇亭 일대에 세거하는 경주이씨들의 공동의 조상으로 무한한 추모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런 맥락에서 후일 阿陪洞에는 그의 산소를 수호하기 위해 阿洞齋舍가 건립되기도 했다.
한편 경주이씨는 낙남 후에도 碩學이나 高官을 배출하지는 못했다. 이지대는 아들 셋을 두었는데, 장자 點은 生員을 거쳐 府使를 지냈고, 차자 黙은 벼슬이 없었고, 3자 然(退憂堂)은 하급직인 建元陵參奉을 지내는데 그쳤다.
이점은 슬하에 碩林·元林·亨林과 韓淑老·李壽會에게 출가한 딸을 합해 3남 2녀를 두었다. 이 중 2자 李元林이 蘇亭 경주이씨의 선대이고, 3자 亨林의 후손들은 현재 경주시 안강읍 楊月里에 세거하고 있다.
註6)
李元林 형제 대에 이르러 경주이씨는 무반가문으로서의 색채가 더욱 강해지고 있었다. 이런 정황은 이원림이 무과에 합격하여 兵馬僉節制使·載寧郡守·泰安郡守 등을 지내고, 李亨林의 官階가 宣略將軍이라는 점에서도 분명하게 확인되고 있다.
그런데 李點 대에서 주목할 사실은 婚脈과 거주지의 변화이다. 李點은 여주이씨 출신의 李壽會(參奉)를 사위로 맞았는데, 이수회는 곧 후일 영남학파의 명유로 성장한 李彦迪(晦齋)의 조부이다. 물론 여주이씨의 가격이 급격히 신장된 것은 李彦迪 이후의 일이지만 이수회의 아들 李蕃이 孫昭(鷄川君)의 사위가 되어 良洞에 입거한 사실을 고려할 때 여주이씨도 이 때부터 서서히 기가의 조짐을 보인 것은 분명하다.
어쨌든 李點의 딸과 이수회의 혼인은 후일 경주이씨와 여주이씨가 세의를 유지하며 통혼을 지속하게 되는 중요한 고리가 되었음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하겠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경주이씨가 경주 九良里로 낙남한 것은 이지대 때이지만 이지대 당대 내지는 그 아들 이점 대에는 九良里에서 方於里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로서는 이를 입증할 만한 명확한 근거는 없으나 李壽會가 혼인 후에 방어리에 거주하였다는 家傳에 입각할 때 적어도 이점 대에는 방어리에 정착한 것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이 곳 방어리는 후일 李鎭宅(德峯)이 蘇亭으로 이거하기 전까지 경주이씨의 수백년 世居地로 자리매김되었으며, 지금도 상당수의 경주이씨들이 거주하고 있다.
【圖2】〈慶州李氏家系圖2〉
이원림의 외아들인 李光曾은 생원을 거쳐 察訪을 지냈을 뿐 별다른 행적이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경주이씨는 이광증의 아들 李升亨 대에 와서 다시 한번 무과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이승형은 무과에 급제하여 晉州鎭 兵馬節度使를 지냄으로서 조부 李元林과 매우 유사한 환력을 지니게 되었다.
한편 이승형은 夢龍·夢麒·夢星·夢杰과 申鵬·金虎에게 출가한 딸까지 4남 2녀를 두었다. 지금까지 서술한 蘇亭 경주이씨의 先代 세계 중에서 益齋를 제외하고는 族譜에서 生年 또는 卒年이 부분적으로 확인되는 것도 이들 형제부터이다. 이 중 3자 夢星이 소정 경주이씨의 직계 선대이다.
이승형의 네 아들의 공통점은 모두 임진왜란에 공을 세워 宣武原從功臣에 책훈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이들은 郭再祐의 의진에서 활동하여 火旺山同苦錄에 이름이 올라 있다. 이러한 군공으로 인해 장자 夢龍은 通政에 오르고, 차자 夢麒는 守門將, 3자 夢星은 工曹參議에 추증되었고, 4자 夢杰은 尙衣院主簿를 지냈다.
사실 경주지역은 왜군의 주요 진군로가 됨으로써 임란 초기부터 피해가 컸지만 거기에 따른 의병활동도 왕성하게 전개되었다. 당시 方於里에 세거하던 경주이씨 일문도 대거 의병활동에 참여하였는데, 이들 4형제 및 夢麒의 아들 弘幹, 夢星의 아들 厚根 외에도 4촌인 李安國과 그의 아들과 손자인 李彦春·尙立, 李元林의 아우 李亨林의 증손인 李景漢·景海·景湖, 李點의 아우 李黙의 현손인 李福重·鶴·鴻 등 12촌 범위 내에서 무려 15명의 인사가 의병에 참여하였다.
註7)
여기에 아버지 金虎와 함께 임란에 창의하여 공을 세운 이승형의 사위 金以忠까지 포함한다면 온 집안이 勤王活動에 참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중 李夢麒·夢星, 李景漢, 金以忠은『慶州邑誌』 . 『忠義條』 에 등록되어 있다.
참고로 金虎는 경주김씨 출신으로 선조조에 무과에 합격하여 봉사를 지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崔震立과 함께 창의하여 크게 공을 세워 權復興·李彭壽·李希龍·李文軫과 함께 東都五節의 한사람으로 칭송된 인물이다. 이후 釜山鎭僉使로 재직하던 중 鷄淵에서 전사했고, 형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두 아들 金以忠·以寬 역시 임란시에 크게 활동하였다. 이승형과 金虎가 사돈관계를 맺은 것도 같은 무과 출신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임진왜란의 와중에서 보여준 경주이씨 일문의 대대적인 義兵·勤王活動은 이들 가문이 경주지역에서 사회적 지위를 보다 공고히 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경주이씨는 무과 또는 戰功을 통해 門戶를 유지하는 가문이란 인식에서 벗어나기 어려웠고, 文翰에 바탕한 문호의 확충은 여전히 다음 시대의 과제로 남게 되었다.
李夢星의 아들 李厚根(東皐齋:1579-1659) 역시 임란 당시 아버지와 함께 창의하여 군공을 세워 陰城訓導를 지냈다. 그에 관한 사적은『東京誌』 . 『火旺山同苦錄』 . 『壬亂義士錄』등에 전한다. 이후근은 4남「之薰·元薰·亨薰·利薰」 3녀를 두었는데, 소정 경주이씨의 선대인 장자 李之薰(東湖堂:1625-1654)은 通德郞이다. 이지훈 형제 대에서 한가지 주목할 점은 당대 석학들과의 학술적 交遊이다.
이지훈은 30세로 단명하였지만 아우 元薰은 同宗 李得胤(西溪)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학행으로 명성이 있었고, 여러차례 소명이 내렸으나 부임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득윤은 앞에서 언급한 李達尊의 8세손으로 八鼈의 막내 李鯤의 손자이다. 金長生·鄭斗源 등과 교유하며 학문을 토론하였고,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거문고에 관련된 銘·賦·記·詩·書·樂譜 등을 집대성하여『玄琴東文類記』를 남겼다. 청주의 莘巷書院과 淸安의 龜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조선 초기 이래로 武班家의 전통을 이어오던 경주이씨에 있어 李元薰의 西溪門下 입문은 일문에 文風을 진작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였지만 이원훈의 학문은 子姪들에게 계승되지는 못했다. 도리어 이지훈의 장자 李璡(1642-1693)과 3자 李璿은 여전히 무과를 통해 발신하였다. 특히 이진은 존주의리에 충실하여 항상 북벌의 의지를 불태웠고, 肅宗朝에 무과에 합격하여 용양위부호군을 지냈다. 李璿 역시 용양위 부호군을 지냈다.
이처럼 경주이씨는 17세기 중후반까지도 무반가로서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사회적 기반은 견고하여 李之薰·李璡 대에는 통혼권이 크게 향상되었다. 우선 이지훈은 경주지역 굴지의 명가인 驪州李氏·慶州孫氏와 사돈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장자부 驪州李氏와 막내 사위 李德邵는 李彦適(晦齋)의 아우 李彦适(聾齋)의 현손녀와 5세손이었고, 큰 사위 李塤은 이언적의 현손이었다.
그리고 둘째 사위 孫汝發은 孫仲暾(愚齋)의 후손이었다. 蘇亭 경주이씨의 직계에 한정할 때 李壽會가 이점의 사위가 된 이래 여주이씨와 경주이씨 사이의 통혼은 李之薰 대에 와서야 비로소 재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후 두 집안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혼인관계를 지속해 오고 있다.
【圖3】〈慶州李氏家系圖3〉
이런 바탕 위에서 李璡은 南九明(寓菴,1661-1719)이란 뛰어난 文士를 사위로 맞이하게 된다. 비록 남구명은 사위에 지나지 않았지만 경주 입향 이후 단 한 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지 못했던 경주이씨에 있어 남구명의 급제와 출사는 커다란 자극이 아닐 수 없었다. 더욱이 이진의 두 아들 胤錫과 晩錫이 아무런 관직을 지내지 못한 상황에서 사위의 문과 합격은 李氏家의 지역적 기반을 강화하는데 일정한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영양남씨 가문에서 태어난 남구명은 1687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693년 문과에 급제했다. 이후 10여년간 향리에 은거하다 성균관 전적을 거쳐 1711년에는 제주판관으로 부임하여 구휼에 노력하였다. 최종 관직은 順天府使이며, 순천에 銅碑가 세워지고 제주의 竹林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寓菴集』이 있다. 조상 대대로 영해에 세거했던 남구명은 이진의 사위가 되면서 경주로 이거하였는데, 현재 보문관광단지가 조성된 普門里 일대가 그의 정착지였다. 후일 보문리에서는 南景羲(痴菴:1748-1812)라는 걸출한 문인·학자가 배출되었는데, 남경희는 곧 남구명의 증손이었다.
한편 李璡의 장자 李胤錫(1671-1709)은 아들이 없어 再熙의 아들 雲培를 양자로 들였다. 이운배(1694-1737)는 號가 聲翁으로 학행이 널리 알려지면서 道薦으로 여러번 遺逸로 징소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재야의 處士로 살았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儒學的 소양은 아들 대로까지 이어졌고, 특히 5자 鎭宅(德峯)이 문과에 합격하여 승지를 지냄으로서 비로소 경주이씨는 文班家門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이운배의 장자 相宅과 3자 洪宅(退憂堂)은 학행이 있어 鄕望이 높았으나 생진이나 문과 출신이 아니었고, 벼슬길에 나아간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막내였던 李鎭宅이 1780년 문과에 합격하고 持平·掌令 등의 요직을 지내고 丁若鏞·蔡弘遠 등 당대의 석학들과 교유하는 과정에서 경주이씨의 가격은 비약적으로 상승하게 되었다.
특히 이진택은 말년에 조상 대대의 터전인 方於里를 떠나 蘇亭으로 이주함으로써 경주이씨 蘇亭 입향조가 되었다. 본서에 수록한 고문서의 原所藏처인 德峯宗宅도 바로 그의 종가를 말한다. 李鎭宅은 正祖~純祖年間에 활동한 인물인 만큼 가계의 연륜이 깊지 못한데, 그의 종가에 소장된 고문서의 시기적 상한 역시 18세기 중반을 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진택의 字는 養重, 號는 德峯으로 1738년(英祖 14) 경주 방어리에서 李雲培의 5자로 태어났다. 益齋 李齊賢의 15세손이며, 조선초 정란을 피해 경주 九良里로 낙남한 判尹 李之帶의 11세손이다.
註8)
그는 어려서 李晉遠(南厓:1721-1782)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경사를 읽으면 곧 외워 막힘이 없었다고 한다. 이진원은 영남의 명유 李玄逸(葛菴)의 증손으로 원래 寧海 출신이었으나 당시 경주 乾川에 우거하고 있었다. 이진원과의 사승관계를 고려할 때 이진택은 영남학통 중에서도 李滉(退溪)→金誠一(鶴峯)→張興孝(敬堂)→李玄逸(葛庵)→李栽(密菴)로 이어지는 鶴峯系列의 학통을 계승했다고 할 수 있다.
이진택은 43세 되던 1780년(正祖 4) 식년문과에 합격하여 승문원부정자, 성균관전적, 예조정랑, 사헌부·지평,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쳐 1790년(正祖 14)에는 정조의 특지로 사헌부장령에 임명되었다. 1792년에는 임오의리를 밝히기 위해 기획·추진된 嶺南萬人疏(義理疏)에 적극 가담하였고, 그 연장 선상에서 金尙魯·洪啓禧가 임오화변에 책임이 있다는 이유로 그들의 剖棺斬屍를 강경하게 주장하였다.
특히 그는 경세론에도 조예가 깊어 1793년 臺諫으로 재직할 때는 寺奴婢革罷를 주장한 상소를 올려 寺奴婢革罷에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 개혁적인 사상가이기도 했다. 1801년(純祖 1)에 단행된 공노비해방이라는 역사적 사건도 사실상 그의 노력에 바탕한 것이었다.
이처럼 이진택은 뛰어난 학식, 탁월한 견해 그리고 정조의 신임을 바탕으로 중진 관료로 성장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지만 관운이 없어 고관에 오르지는 못했다. 도리어 정조가 사망하고 노론 집권이 강화되면서 1802년(순조 2)에는 서유방을 두둔하고, 李家煥에 탁적했으며, 丁若鏞과 밀부했다는 이유로 三水甲山에 유배되었다가 2년 뒤에 해배되었으나 이듬해인 1805년(純祖 5)에 68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교유의 범위가 넓었던 그는 蔡濟恭·丁若鏞·李家煥·南景羲·李守仁·崔璧·李鼎揆·李鼎德·金翰東·申大顯·成彦楫·李仁行·蔡弘遠·柳{氵+奎}·李集斗·金熙周 등 근기·영남의 명사들과 두루 교유하였다. 고종연간 영남 진신·유생들의 노력 속에 1899년(광무 3) 秘書丞에 추증되었다. 묘갈은 이조판서 李裕承이 찬했고, 묘지는 徐相祖가 지었다.
이처럼 이진택은 자신의 직계로는 李齊賢 이후 최초의 문과 합격자로서 당대에 이미 가문의 격을 한층 높혀 놓았음은 물론 향후 그의 후손들이 경주 또는 영남학파의 주요 가문으로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진택 이후 蘇亭의 慶州李氏들이 무반가의 면모를 일신하고 생원·진사시를 통해 학행을 지닌 선비를 다수 배출할 수 있었던 것도 그에 의해 마련된 文翰的 기반에 바탕하는 것이다.
한편 이진택 대에 이루어진 중요한 변화는 거주지의 이동이었다. 여기서의 거주지 이동이란 선대의 세거지이며 자신의 생장지인 方於里를 떠나 蘇亭으로 이거한 것을 말하는데, 소정이 경주이씨의 새로운 세거지로 자리할 수 있었던 배경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거의 시기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우선 후손에 의해 정리된「德峯年譜」
註9)
李鎭宅의 나이 64세 되던 1801년(순조 1) 11월에 蘇亭으로 이거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移居를 위해 이보다 한 해 전인 1800년부터 新第 건립에 따른 家役을 진행하여 1801년 11월 19일에 入宅한 것으로 되어 있다. 소정은 大德山 남쪽 자락에 위치한 마을로 예로부터 길지로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소정에 대한 애착이 깊었던 이진택은 손수 新第의 상량문을 지어 가문의 번영과 자손의 복록을 기원하였으며,
註10)
11월 19일 入宅하던 날 밤에는 정조가 왕림하는 꿈을 꾸었다고 자술할 정도였다. 그런데 본서에 수록된 戶籍類를 살펴보면 연보의 내용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1729년(영조 5)에 작성된 李雲培의 호구단자에는 거주지가 方於里로 기록되어 있어 이운배까지는 방어리에 살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진택의 현존하는 호적 중 가장 시기가 이른 1771년(영조 47) 호구단자에는 이미 거주지가 府東面 九政里(蘇亭)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 이하 모든 호적류의 거주지도 이와 같다. 그렇다면 이진택은 적어도 1771년 이전에 蘇亭에 복거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는 그의 나이 30대 중반으로 과거에 합격하기 이전이다. 이처럼 호적과 연보의 기록이 30년의 격차를 보이는 것은 주택의 건립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즉 이진택은 蘇亭에 복거한 이후 한동안 寓居의 형태로 草堂을 짓고 지냈을 가능성이 크고, 본가인 方於里와 蘇亭을 왕래하며 생활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다 1780년 문과에 합격하여 사환하는 과정에서 경제력이 축적되면서 1800년 경 蘇亭에 가옥을 건립하기 시작하였고, 1801년 新第가 落成되자 소정에 영주하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의 서술을 종합할 때 경주이씨의 蘇亭 이거 沿革은 1770연대로 소급하여 이해하는 것이 합당하다.
【圖4】〈慶州李氏家系圖4〉
이진택은 1남 2녀를 두었는데, 외아들 李復漢(1768-1837)은 號가 宜樂堂이며 通德郞이었다. 그는 아버지 德峯과는 달리 林泉에 은거하며 학문에 열중하여 사우간에 重望이 있었다. 이복한의 장자 李宜發(1804-1837)은 초명이 世發인데, 천성이 純篤하여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여 향리 사람들이 감복해마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積善의 바탕 위에서 경주이씨는 이의발의 아들 李祐榮, 손자 李圭一, 증손 李鍾文까지 3대 동안 사환과 학식을 바탕으로 다시 한번 家勢가 신장되기에 이른다. 원래 이의발은 아들 4형제를 두었으나 차자 以榮과 3자 仁榮은 출계하였다. 장자 李祐榮(1822-1913)은 초명이 徽源이고, 雅號는 野隱이다.
덕행으로 일세의 추중을 받았던 그는 1892년(고종 29) 천거로 義禁府都寺에 임명된 이래 1893년 敦寧府都正을 거쳐 1902년에는 嘉善大夫에 승자되고, 1904년에는 嘉義大夫에 올랐다. 나아가 그는 瓢巖의 始祖碑閣과 입향조 李之帶(判尹公)의 齋室인 阿洞齋舍를 중수하는 한편 증조 李鎭宅의 文集인『德峯集』을 간행하는 등 위선사업에도 만전을 기하였다.
한편 이우영의 장자 李圭一(櫟下:1840-1905)은 어려서 외조 崔氵嚴에게 수학하여 文藝가 숙성하였고, 1888년(高宗 25) 49세의 나이로 生員試에 입격하였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는 않았다. 원래 그는 어려서부터 재능이 출중하여 李鍾祥(定軒)·南基栢(海蒼) 등 당대의 석학들로부터 才士라는 칭송을 들었고, 중년에는 柳疇睦(溪堂)과 許傳(性齋)을 종유하여 견문을 넓혔다.
그는 또 1888년(高宗 25) 小明谷(暗洞里)에 정자를 건립하여「小有亭」이라 편액하고 그 곳에서 琴書泉石과 더불어 자적하였다. 저서로『櫟下文集』(筆寫本) 3冊이 전한다. 아버지 李圭一이 선대의 비각 및 재실의 중수와 덕봉집을 간행할 수 있었던 것도 이규일의 열성적인 보필에 힘입은 바 크다.
이우영·규일 부자의 學識과 文才는 규일의 독자 李鍾文(荷潭:1873-1962)에게 고스란히 전수되었다. 중시하에서 엄한 교육을 받은 이종문은 1891년(고종 28) 19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입격하여 지방의 재지사족으로서는 드물게 양대 司馬의 영광을 누렸다.
그는 1962년 90세를 일기로 사망하기까지 선비요 지역의 유지로서 다양하게 활동하며 德峯 이래의 가성을 유지하는데 성혈을 다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아들 李福雨(汶樵)와 손자 李相杰(蘇瑚) 선생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世守되고 있다.
특히 현 종손이신 이상걸 선생은 83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祖先에 대한 向念이 남다르고, 무엇보다 조상 전래의 文獻을 소중하게 간직하여 본서가 발간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데 대해 무한한 사의를 표하는 바이다.
Ⅲ. 古文書의 현황과 내용
1. 敎令類
敎令類에는 紅牌·白牌·告身(勅命)·任命狀·有旨·差定帖 등이 수록되어 있다. 紅牌는 1780년(정조 4) 李鎭宅이 文科 丙科 21인으로 합격할 당시의 것인데, 蘇亭 경주이씨의 직계에 한정할 때 李之帶가 경주에 입향한 이후로는 유일한 紅牌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白牌는 李圭一(生員)과 李鍾文(進士) 부자의 것인데, 부자간에 3년 간격으로 생원·진사시에 입격한 것이 자못 흥미롭다. 이규일은 39세에 생원이 되었고, 이종문은 19세에 진사가 되었다. 원래 생원·진사는 각기 정원이 100명인데, 이종문은 3등 342인으로 입격하였다. 이는 조선말기에 과거제도가 다소 문란해지면서 정원을 늘인데 따른 것이지만 19세의 젊은 나이로 입격한 사실에서 이종문의 文才를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다.
告身은 모두 29점이 수록되어 있는데, 대부분 李鎭宅과 관련된 것이며, 李祐榮·李圭升·李仁榮·李祺榮의 고신도 일부 포함되어 있다. 이 중 李圭升·李仁榮·李祺榮은 소정 경주이씨의 종통계열이 이니다. 李圭升은 이우영의 차자이며, 이인영·이기영은 이의발의 3자와 4자이다. 이들의 고신이 여기에 포함된 것은 종가에서 일괄 관리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告身 중에서 주목할 것은 1899년(光武 3) 이진택을 通政大夫 秘書院丞에 증직한 고신이다. 비록 이것은 추증 고신이지만 영남의 振紳과 儒生들의 협찬 속에 얻어낸 결과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有旨 2점은 모두 正祖가 李鎭宅에게 내린 것으로 이진택에 대한 정조의 신임을 엿볼 수 있다.
하나는 1790년(정조 14) 정조가 이진택을 사헌부지평에 임명하고 부임을 종용하는 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1792년(정조 16) 사헌부 장령에 임명하면서 내린 것이다. 이진택은 뛰어난 학식과 예리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여러 차례 개혁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는 과정에서 정조로부터 크게 신임을 받았다.
평소 李鎭宅을 눈여겨 보던 정조는 남인의 영수 蔡濟恭에게 이진택에 대해 하문하였고, 이 자리에서 채제공이 그를 두고 名祖(益齋)의 후손이며, 영남의 大族이라 답하자 정조가 이를 가상히 여겨 司憲府掌令에 임명하였다. 차정첩은 1780년 4월 25일 문과에 新及第한 이진택을 權知承文院副正字로 分館할 때 작성된 것이다.
2. 疏箚啓狀類
疏箚啓狀類에는「上疏」,「戶籍類」,「所志類」를 수록하였다. 상소 중에서 주목되는 것은 1799년(정조 23)에 올린 5條疏인데,『德峯集』에는「應旨進農務五條疏」란 제목으로 실려 있다. 이 상소는 이진택이 開城 경력으로 재임할 때 정조의 求言에 응하여 올린 것인데, 民隱을 목도하는 과정에서 온축된 그의 經世觀이 집약된 장문의 上疏이다. 5조는 곧「財成輔相」,「不違農時」,「博世斂」,「農者有田」,「重農民之策」으로 실학에 바탕한 애민사상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
戶籍類는 모두 51점을 수록하였는데, 시기적으로 가장 이른 것은 1729년(英祖 5)에 작성된 李雲培의 戶口單子이고, 가장 후대의 것은 1905년 李祐榮의 戶籍表이다. 본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호적류는 경주이씨의 蘇亭 이거 연혁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다.
家傳 등에는 1800-1801년 경에 방어리에서 소정으로 이거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戶籍類를 분석한 결과 李鎭宅이 蘇亭에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적어도 1771년 이전임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호적상의 정확한 주소지는 慶州府 府東面 九政里 3統 2戶였다. 1771년(英祖 47) 이진택의 戶口單子에는 九政里 16統 2戶로 되어 있으나 그 이후의 모든 호적류에는 3統 2戶로 등재되어 있다.
호적류에서 알 수 있는 또 다른 사실은 李祐榮의 改名 과정이다. 현재 족보상에는 이우영의 개명 내력이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지만 호적을 통해 그가 무려 세 번이나 개명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우영의 초명은 李徽運이었으나 22세 되던 1844년(憲宗 10)에 徽文으로 개명했고, 49세 되던 1870년(고종 7)에는 다시 徽榮으로 개명하였으며, 58세 되던 1879년(고종 16)에 족보상의 이름인 祐榮으로 개명한 것을 알 수 있다.
당시의 법제로는 改名을 위해서는 매 식년마다 사유를 갖추어 행정계통에 따라 이조에 상신하면 이조에서는 藝文館에 이관하여 개명인준서(帖)를 발급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현재 경주이씨가에는 이우영의 개명과 관련된 帖이 소장되어 있지 않다.
한편 호적류 중에는 李鎭宅~李圭一에 이르는 이진택의 宗統이 아닌 지파 인물들의 호적이 일부 포함되어 있다. 戶籍류 No.14의 호주 李復春은 이진택의 형 李洪宅의 아들이다. 이 가계는 이복춘의 아들 李家發이 무후하여 李祐榮의 아우 李以榮이 양자로 들어갔는데, 거주지는 九政里 3統 1戶이다. 그리고 戶籍류 No.33의 戶主 李澋春의 가계는 暎泰-景龍-以憲-澋春으로 이어지는데, 그 이상의 소자출은 미상이고, 거주지도 東海面 八助里로 기록되어 있다.
이들의 호적이 德峯宗家에 소장된 경위는 미상이다. 戶籍류 No.42의 호주 李秀榮은 李祐榮의 아우 李仁榮의 初名이다. 이인영은 족숙 李英發을 계후하였는데, 이영발은 李夢麒의 8세손이다. 무려 19촌이란 遠寸 출계에도 불구하고 거주지는 九政里 8統 2戶로 德峯宗家와 매우 인접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戶籍류 No.44의 호주 李範榮의 인적사항은 미상이고, 호적류 No.45·47·50의 호주 李圭升은 李祐榮의 2子이다.
호적류는 노비명단이 등재되어 있어 해당 가문의 노비규모를 파악하는데 매우 효과적이다. 호적류에서 확인되는 경주이씨의 노비규모는 비교적 작은 편에 속한다. 李雲培 대인 1729년(英祖 5) 방어리 호구단자에는 비교적 많은 수의 노비가 등재되어 있으나 九政(蘇亭)으로 이거한 이진택 대의 노비규모는 매우 單弱하다.
1771년 호구단자에는 단 1口가 등재되었을 뿐이며, 이후 이진택이 문과에 합격하여 사환하던 시절에도 노비의 수가 10口를 넘지 않고 있다. 이런 경향은 아들 이복한 대에도 그대로 유지되다가 손자 李祐榮 대에 와서야 노비가 2배 규모로 증가되는 추세에 있었다.
德峯宗家의 노비규모가 이처럼 작았던 것은 이진택의 경세관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인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이진택은 人本主義에 바탕한 愛民論者였고, 관념적인 道學보다는 현실의 모순을 개선하여 부국강병과 민생안정을 주장한 사람이었다.
그 일환에서 그는 1793년(정조 17)「辭臺職兼陳寺奴革罷疏」를 올려 시노혁파를 과감하게 주장하였고, 그의 이러한 주장은 후일 공노비가 해방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노비규모의 단약함은 그의 경세관의 구체적인 실천과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며, 그의 인식은 후손들에게도 그대로 계승되었다고 할 수 있다.
所志類는 총 96점이 수록되었는데, 明文 다음으로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여느 가문과 마찬가지로 山訟·債訟이 민원의 요점을 이루고 있다. 이 중 소지류 NO.1~13은 東海面 自里田에 소재한 경주이씨 선영과 관련된 산송 소지인데, 內東面 坪里의 權得銖란 인물이 그 어미를 투장하면서 산송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이에 1824년(純祖 24) 李復漢·元發·世發 등이 투장자의 처벌과 투장묘의 굴거를 요청하는 소지를 경주부윤과 순찰사에게 계속해서 올리게 되었는데, 1826년(純祖 26)까지 무려 13차에 걸쳐 개진된 것으로 나타난다.
한편 소지류 중에서 흥미를 끄는 것은 所志류 NO.14이다. 이 소지는 경주이씨의 始祖 事蹟인 瓢巖碑閣과 관련된 것이다. 소지에 따르면, 표암비각은 益齋 당시에 비각이 건립되어 자손들에 의해 수호되어 왔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퇴락하자 1792년(正祖 16) 李敬一(1734-1820:鰲恩君) 등에 의해 중수된 바 있었다.
이후 1846년(憲宗 12) 경상감사로 부임한 후손의 주선으로 비각수호를 위한 契金이 조성되었고, 이를 放債하여 담장의 수리와 花樹契員들의 춘추 계회 자금으로 사용할 계획으로 東面 馬洞里에 거주하는 鄭聖浩에게 4양을 대출한 바 있었다.
그런데 부채 상환이 어려웠던 정성호는 전답을 저당하고 상환을 연기하였고, 나중에 다시 저당한 전답은 가형 정성철과 반작경식하는 대신 정성철이 부채를 상환하기로 약조했다고 했다. 이 무렵 부채는 6양으로 불어 있었고, 정성철이 부채 상환을 거부하자 경주부윤에게 진정하게 된 것이다.
이 소지가 덕봉종가에 소장된 것은 李徽文(李祐榮)이 비각 수호에 따른 제반 실무를 관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외 다른 소지들도 山訟·川防·學田 등과 관련된 내용들로서 소정 경주이씨들의 사회경제적 실상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들이다.
Ⅲ. 牒關通報類
牒關通報類에는「帖」·「關」·「傳令」·「書目」·「甘結」을 수록하였다. 帖(諭民帖)은 경주부윤이 內東面 九政里塾長에게 내린 訓諭의 글인데, 壬午年은 1882년(고종 19)으로 추정된다. 이 유민첩은 부국강병을 위해 인재의 選拔과 登用을 골자로 하고 있다.
말미에 부기된 節目에 따르면, 각 里에는 塾長, 각 鄕에는 庠長, 鄕校에는 序長을 두어 學識과 才行을 지닌 인재를 발굴하여 관에 보고하고, 각 官에서는 이를 종합하여 조정에 보고하는 체제로 되어 있었다. 이 문서가 덕봉종가에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九政里의 塾長은 李祐榮(1822-1913)·李圭一(1840-1905) 부자 중 한 사람으로 추정된다.
關文 No.1은 1880년(高宗 19) 예조에서 경상도관찰사에게 내린 것으로 원본이 아닌 사본이다. 내용은 표암비각의 중수와 관리에 따른 재정확충과 관련된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표암비각은 정조연간에 李敬一 등의 주선으로 중수된 바 있었으나 1878년(고종 15) 수해를 입어 퇴락하자 경주 인근의 후손들에 의해 瓢巖의 정상으로 이건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공역의 비용이 막대하여 완공을 보지 못하자 이채영·이기영 등이 예조에 정문하여 도내의 경주이씨 일문이 동참할 수 있도록 행정지원을 요청했던 것이다. 이에 예조에서는 경상도관찰사에게 이 관문을 보내 도내 열읍에 산거하는 경주이씨 인사들을 파악하여 工役에 동참하게 함으로써 위선사업이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문서는 당시 표암비각 중수를 주관했던 李祐榮 부자가 필사해 둔 것이다.
傳令은 모두 5점이 수록되어 있다. 傳令 NO.1은 1863년(哲宗 14) 경주부윤이 川北面主人에게 勿川里의 後麓에 勒葬한 孫永恒과 營羅 4-5人을 사문하기 위해 붙잡아 오라는 내용이다. 손영항과 물천리 주민 사이의 송사 내용은 소지를 참고하기 바란다.
傳令 NO. 2는 1884년(高宗 21) 掛陵洞任에게 발급된 것인데, 조선 후기 매관매직의 실상이 반영된 흥미로운 자료이다. 괘릉리에 거주하는 李普榮·朴基邱의 통정대부 교지가 서울서 내려오니 해당자는 각기 禮木錢 25兩을 준비하여 교지를 수령해 갈 것을 통지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 후기에 매관매직이 성행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이처럼 공식적인 절차를 통해 受領이 통지되고, 관품에 따른 金額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자료는 많지 않다. 傳令 NO.3은 1898년(光武 2) 경주군수가 內東面 時來里의 上任과 頭民에게 내린 것으로 홍수로 인해 끊어진 堤堰을 근동의 주민들과 협력하여 수축할 것을 지시하는 내용이다. 傳令 No.4는 경주부윤이 東海面 風憲에게 하달한 것인데, 동해면 感恩坪의 洑堤와 관련된 것이다.
전령의 내용에 따르면, 감은평의 洑는 3000餘斗落의 수리를 책임지고 있는 洑堰으로 주변의 洑藪는 수백년 동안 禁養處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蘇亭의 李班이 순영으로부터 이를 매득했다는 이유로 洑藪를 斫伐하고, 洑堰을 개간하자 주변의 작인들이 민원을 제기하게 되었고, 이를 수용한 경주분윤이 동해면의 風憲에게 이씨들의 작벌과 기반을 금지시키는 전령을 발급한 것이다. 말미에 “만약 李氏들이 당초의 계획을 강행하여 다시금 백성들의 呈訴를 야기시킨다면 응당 착치하여 엄벌할 것이니, 이러한 뜻으로 엄칙하라”는 내용이 부기되어 있다.
傳令 No.5는 1895년(高宗 32) 경주부윤이 川北面의 風憲과 勿川里의 上任에게 투장묘의 굴거를 지시한 내용이다. 신원을 알 수 없는 누군가가 勿川里의 洞山 主脈에 해당하는 빈집(空家)의 마당에 투장한 사실이 발각되어 동민들의 정소가 있자 경주부윤이 20일 이내에 투장묘를 굴거할 것을 지시한 것이다. 이 전령이 德峯宗家에 소장된 경위는 미상이다.
傳令 No.6은 1901년 慶州郡守가 內東面의 執綱과 각 里의 洞任에게 하달한 것인데, 군수로서의 행정적인 처분과는 무관한 내용이다. 즉 당시 경주이씨들은 大同譜의 간행을 계획·추진하고 있었는데, 修譜에 따른 名錢의 수납이 용이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에 경주이씨 출신이었던 군수가 각면의 執綱과 洞任에게 전령을 발송하여 명전의 수납을 채근하였는데, 이 전령은 경주 관할 諸面에 발송된 것 중의 하나로 파악된다. 명전의 액수는 旣冠者가 2兩, 童子는 1兩으로 책정되어 있었으며, 기한을 넘길 경우 該洞의 上任을 捉囚하여 督納하겠다는 강제 조항까지 부기되어 있다.
말미에 부기된 명단은 내동면에 거주하는 경주이씨로서 名錢을 납부해야 할 사람들의 명단인데, 矢里·鵲洞·時來里·德洞·明谷·梅谷·蝦洞·牙洞·馬洞·九政(蘇亭) 등 대략 140여명의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 書目은 모두 5점이 수록되어 있다. 書目 No.1은 外東面 執綱이 慶州府尹(郡守)에게 보고한 것인데, 蘇亭 李進士宅과의 송사와 관련하여 外東面 開谷里에 거주하는 吳億禮의 捉上을 지시받았으나 그가 관령을 완강히 거부하자 이를 보고한 것이다.
書目 N0.2는 川北面 風憲 崔아무개가 公政里 孫時東(奴)의 呈狀과 관련하여 府尹의 지시 사항을 査實하여 보고한 것이며, 書目 N0.3은 人家 場中의 투장과 관련하여 투장자의 탐문을 지시받은 천북면 풍헌이 부윤에게 올린 것이다. 書目 No.3은 傳令 No.4의 관련 문서로서 慶州府尹은 투장자의 탐문이 여의치 않자 勿川里의 洞山 主脈의 人家에 투장한 산소를 즉시 굴거할 것을 지시하였다.
書目 No.4는 1896년(建陽 1) 川北面 面任이 勿川里의 산송과 관련하여 경주군수에게 보고한 것이고, 書目 No.5는 1897년(光武 1) 경주군수 權相文이 경상도 관찰사에게 勿川里 산송관련 죄인 黃日守·崔在河의 치죄와 관련하여 관찰사의 제음에 따라 笞刑 15度를 가한 결과를 보고하는 내용이다.
Ⅳ. 證憑類
證憑類에는 完文·路文·照訖帖·侤音·手標 등을 수록하였다. 完文은 東海面에 거주하는 海民(漁戶)들의 권익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나 문서의 후반부가 탈락되어 있어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路文은 모두 2점인데, 하나는 1790년(정조 14) 李鎭宅이 司憲府持平에 임명되어 승소부임할 때 작성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1792년(정조 16) 이진택이 司憲府掌令에 임명되어 승소부임할 때 작성된 것이다.
원래 노문은 大君·王子君·大臣·國舅·宗親·儀賓·重臣·宰臣·承旨·三司·春坊·六曹參議·赴燕三使臣·通信三使臣 등에게 발급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진택의 경우는 사헌부, 즉 三司 관원의 자격으로 발급된 것이다. 이진택에게 부여된 권한을 정리하면, 1790년의 경우는 奴子 6명, 羅將 1명, 吹手 2명, 騎卜馬 2필, 驛人夫 6명이었고, 1792년에는 奴子 7명, 羅將 1명, 吹手 2명, 騎卜馬 2필, 驛人夫 6명으로 노자만 1명 추가된 셈이다.
照訖帖은 1888년(高宗 25) 學禮所에서 幼學 李圭一이 照訖講에 통과했음을 증명해 주는 문서로 당시 이규일이 조흘강에서 택한 과목은 小學이었다. 일반적으로 조흘첩은 照訖所에서 발급하는 것이 상례인데, 여기서는 學禮所로 되어 있다. 참고로 이규일은 이 해에 설행된 生員試에서 3等 61人으로 입격하였다.
侤音(다짐)은 3점이 수록되어 있는데, 모두 山訟과 관련된 다짐이다. 侤音 No.1은 1824년(순조 24) 산송에서 낙송한 權得銖가 투장묘를 동년 7월 20일까지 굴이할 것을 官庭에서 다짐하는 내용이다. 권득수는 동해면 소재 경주이씨 선영에 투장하여 물의를 야기하였고, 李復漢 등이 진정서를 올리는 등 강경하게 대응하여 이런 결과가 있게 된 것이다.
侤音 No.2는 1824년(순조 24) 柳得守(權得銖)가 소정에 거주하는 이복한의 선영에 偸葬한 자신의 아버지 산소를 동년 9월 17일까지 이장할 것을 다짐하는 내용이다. 柳得守는 侤音 No.1의 權得銖의 오기로 보여진다. 결국 권득수는 7월 20일까지 이장하겠다는 다짐을 어김으로써 이복한 등이 다시 진정하자 재차 관정에서 이장을 다짐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所志에 따르면, 권득수와 소정 이씨와의 산송은 1826년(純祖 26)까지 지속되고 있어 이 때에도 제대로 마무리가 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관련문서로 所志 No1-13을 참고하기 바란다. 侤音 No.3은 丙午年에 孫永恒이 천북면 물천리 주민들과의 산송을 중지할 것을 다짐하는 내용이다. 손영항은 물천리에 妻를 안장하는 과정에서 주민들과 산송이 야기되었는데, 관련문서는 소지 No.15·16·22 등이다. 丙午年은 1846년(憲宗 12)으로 추정된다.
手標는 모두 4점이 수록되어 있다. 手標 No.1은 李德舟(奴) 錢文 70양을 차용하는 대신 後坪員 소재 자신의 畓 4두락지를 典當하는 내용이다. 작성 연대인 庚寅年은 1830년 또는 1890년, 수급자는 德峯宗家로 추정된다. 手標 No.2는 孫晉表가 물천리 주민과의 사이에서 야기된 산송에 대해 상호 화해한 뒤 다시는 起訟하지 않겠다는 것을 약속하는 내용이다. 標主 孫晉表는 孫永恒의 아들 또는 손자로 추정된다.
手標 No.3은 金鳳儀가 李芳洞「李邦東」에게 빌려준 錢文 190양을 소정이씨 문중으로부터 代徵했음을 확약하는 내용이다.(☞ 甘結 참조) 手標 No.4는 勿川里의 主龍 山麓에 조부모를 투장한 辛泰根이 투장묘를 先破할 것을 확약·다짐하는 내용이다.
Ⅴ. 明文文記類
明文은 모두 153점인데, 단일 문서로는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수록연대는 1838년에서 1914년까지로서 이 시기는 경주이씨가 方於里에서 蘇亭으로 이거하여 정착의 기반을 확고하게 다지던 때다. 현재 德峯宗家에는 1914년 이후에 작성된 明文(契約書)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지만 분량의 제약상 1914년 이전의 것만 수록하였다.
수록된 명문은 土地·家垈·山野 등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하나 奴婢賣買明文은 전무한 실정이다. 여기에 수록된 명문들은 경주이씨가 蘇亭에 정착하여 경제적 기반을 확충해 나가는 과정을 자세하게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들이다. 명문문기류의 대표적인 문서는 明文과 分財記인데, 경주이씨가에는 단 한 건의 分財記도 남아 있지 않다.
Ⅵ. 書簡通告類
書簡通告類에는「通文」·「請牒狀」·「望記」·「牌旨」·「婚書」·「簡札」을 수록하였다.
통문은 모두 3점인데 모두 原本이 아닌 抄本이다. 通文 No.1은 丹溪壇所에서 儒林僉尊에게 享禮 參席을 촉구하는 내용이고, 通文 No.2는 屛虎是非와 관련된 내용이며, 通文 No.3은 瓢巖碑閣의 중수와 관련하여 同宗들에게 경제적 지원을 요청한 것으로 이것은 榮州 葛山에서 개최된 종회에서 의결된 사안이었다.
청첩장은 1906년(光武 10) 株式會社農工銀杏設立委員長인 경주군수 閔泳晩이 위원회의 개최와 株式金을 모금하기 위해 參奉 李俊明에게 회의에 참석해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의 문서. 李俊明의 인적사항은 미상이다. 望記는 모두 5점인데, 望記 No.1은 1921년 東岡壇所에서 進士 李鍾文을 有司로 위촉하는 내용이다.
동강단소의 전신은 1707년(肅宗 33)에 건립된 東岡書院으로 孫仲暾(愚齋)의 제향처이다. 玉山書院·龜岡書院·西岳書院 등과 함께 경주의 대표적 院宇의 하나로 기능하였다. 望記 No.2는 1940년 李鍾文(進士)을 景山書堂 堂長에 위촉하는 내용이며, 望記 No.3은 1941년 李鍾文(進士)을 金山齋 春享時의 獻官으로 위촉하는 내용이다. 景山書堂은 1840년(憲宗 6) 李宜潤(無忝堂)의 제향처로 건립된 景山齋의 새로운 이름으로 추정되며, 金山齋의 연혁은 미상이다.
望記 No.4는 1941년 丹溪壇所에서 李鍾文(進士)을 단장에 위촉하는 내용이며, 望記 No.5는 1945년 李鍾文(進士)이 玉山書院 원장에 위촉될 때 작성된 것이다. 옥산서원은 경주의 수원일 뿐만 아니라 안동의 陶山書院 진주의 德山書院(德川書院)과 더불어 영남의 三山書院으로 불린 유서 깊은 서원이다.
李鍾文이 玉山書院의 원장에 임명된 사실에서 그의 학식과 사회적 지위를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 패지는 辛未年에 鄭아무개가 奴 春深에게 瓦家 9間半 및 空垈 10間을 2錢 30兩을 받고 다음해 봄까지 傳貸(賃貸)할 것을 지시하는 문서이다. 辛未年은 1871년(高宗 8)으로 추정되는데, 당시 경주지역의 家舍 賃貸料를 알려주는 중요 자료이다.
婚書는 모두 6점이 수록되어 있다. 덕봉종가에는 이 6점 외에도 상당한 분량의 혼서가 소장되어 있으나 본서에서는 분량의 제약상 6점만 수록하였음을 밝혀 둔다. 婚書 No.1은 1819년(純祖 19) 李世發(李宜發)과 여주이씨의 혼례시에 작성된 納徵文書이고, 婚書 No.2 역시 이의발 혼례시의 혼수물목이다. 李世發은 李宜發의 初名이며, 부인 驪州李氏는 李彦迪(晦齋)의 후손 李牧祥의 딸이다.
婚書 No.3은 1885년(高宗 22) 李鍾德과 慶州崔氏의 혼례시에 작성된 納徵文書이다. 婚主는 이종덕의 조부 李祐榮이다. 문서상에는 李鍾德이 이우영의 장손으로 되어 있으나 계통상 이우영의 장손은 李鍾文이고, 족보상의 李鍾德은 이우영의 차자 李圭升의 장자이다.
그러나 본 문서의 수급자가 崔進士임을 고려할 때 이종덕은 이종문의 初名이 아닐까 싶다. 물론 족보에는 이러한 개명 사실이 보이지 않지만 이종문은 慶州崔氏 進士 崔晩喜의 딸과 혼인하였고, 이규승의 아들 이종덕은 1880년생으로 당시 6세로 婚齡이 아니었다.
婚書 No.4는 1944년 李鍾文이 손자의 혼사와 관련하여 査家에 보낸 涓吉文書인데, 여기서의 손자가 장손 相杰인지 아니면 그의 아우 相漢·相淵인지는 미상이다. 婚書 No.5는 No.4의 관련 문서이다. 婚書 No.6 역시 이종문의 손자 婚禮時 문서인데, 구체적으로 누구의 혼사인지는 미상이다.
참고로 장손 相杰(1920년생)은 慶州孫氏(愚齋家門) 孫明鎭의 딸과 혼인하였고, 相漢(1921년생)은 密陽朴氏 朴長甲의 딸과 혼인하였으며, 相淵(1929년생)은 順興安氏 安鎔薰의 딸과 혼인하였다. 簡札은 낱장 簡札과 簡帖으로 구성되어 있다. 낱장 간찰은 32점을 수록하였는데, 대부분 李鎭宅에게 발급된 것이다. 2건의 簡帖 역시 이진택과 관련된 것이다.
현재 덕봉종가에는 李鎭宅·李復漢·李宜發·李祐榮·李圭一·李鍾文 대에 걸쳐 무려 2000점에 달하는 간찰이 소장되어 있다. 이 중 가장 큰 빈도를 차지하는 인물은 역시 李鎭宅·李圭一·李鍾文이다. 그러나 본서에서는 분량의 제약상 주로 이진택과 관련된 간찰 일부를 수록하였다.
낱장 간찰은 李鎭宅이 사환에 종사하던 1780연대에서 그가 사망하던 1805년까지 왕래된 것인데, 그 중에서도 1797년에서 1800년 사이에 왕래된 것이 절대 다수를 이룬다. 간찰의 與授관계는 교유관계와 직결되는데, 이진택의 경우 간찰을 통해 蔡弘遠·黃昇源·趙有善·洪大龜·李集斗·李時秀 등 당대의 명사들과 교유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簡帖(1)에는 李鼎揆·洪良浩·丁若鏞·蔡弘遠 등, 簡帖(2)에는 張瑞奎·柳鎭赫·李集斗·趙有善·洪良浩·洪時溥·李憲愚 등 京鄕의 명사들이 망라되어 있었다. 이들 간찰들은 대체로 이진택이 開城 經歷에 종사하던 1798년을 전후하여 왕래된 것으로 나타난다.
Ⅶ. 置簿記錄類
置簿記錄類에는 執事記·物目·時到記·契案 등 각종의 成冊古文書를 수록하였다. 덕봉종가 소장 고문서 중 자료의 범위가 가장 넓고 분량도 가장 많다. 집사기는 모두 9점인데, 이진택과 관련된 것이 대부분이다. 執事記 No.1은 1901년(光武 5) 이진택의 追贈(秘書丞)에 따른 焚黃을 행할 당시의 집사분정기이다. 원제는「德峯李先生貤贈焚黃時執事爬錄」이다. 이진택이 秘書丞에 추증된 것은 이보다 2년 전인 1899년인데, 분황은 이 때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집사분정은 都執禮 金奎華, 相禮 李能吾 이하 祝·奉板·贊引·初獻·亞獻·終獻·題主·宣勅·讀勅·判陳設·奉爐·奉香·奉爵·奠爵·謄黃·煬黃·直日·公事員·曹司에 이르기까지 21개 직임에 걸쳐 이루어졌고, 80명의 인사가 집사로 참가하고 있다.
집사의 대부분은 유생이지만 게중에는 전직관료와 生員·進士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으며, 대체로 경주·영천·울산 등 경주권에 거주하는 인물들로 파악된다. 이진택의 추증에 따른 焚黃이 이처럼 성대하게 거행될 수 있었던 것은 이진택의 학덕과 소정 경주이씨의 사회적 지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執事記 No.2는 1837년(憲宗 3) 李復漢 初喪時의 시도기인데, 이복한은 이 해 4월 8일 辰時에 70세를 일기로 고종하였다. 執事記 No.3은 1962년(壬寅) 李鍾文의 초상시 집사기이다. 이종문은 한말의 진사로서 일제시대를 거쳐 최근에 이르기까지 지식인으로서 다양하게 활동하다 90세로 고종하였다.
執事記 No.4는 1901년(光武 5)『德峯集』간행시의 집사기 原本으로 原題는「德峰李先生文集營刊所執事爬錄」이다. 그러나 이 문서는 校正有司인 前注書 崔鉉弼의 이름까지만 수록되어 있고, 후반 후는 탈락되어 있다. 執事記 No.5는 『德峯集』간행시의 집사록이나 원본이 아닌 사본이다. 執事記 No.4의 원본 집사기의 형태가 불완전하여 내용의 파악을 위해 사본을 전재하였다.
집사기에 따르면, 직임은 都都監·都監·都廳·校正都監·校正有司·寫字·監印·印出·校監·直日·公事員·曹司 등으로 역할 분담이 이루어졌는데, 都都監은 前參奉 金奎學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德峯集』(木板本)은 7卷 3冊으로 간행되었고, 序文은 李晩燾(響山), 跋文은 金道和(拓菴), 後識는 徐相祖가, 遺事後小識는 아들 李圭一이 찬하였다.
執事記 No.6 역시 『德峯集』 간행과 관련된 집사기이며, 執事記 No.7·8은 公事員 分定記이나 구체적인 연대와 역할은 미상이다. 執事記 No.9는 고종연간 慶州 일대의 유생들이 斥邪疏를 기획할 당시의 疏儒爬任錄으로 原題는「斥邪疏疏儒爬錄」이다.
원본이 아닌 사본이다. 掌議·疏色·製疏·擇疏·寫疏·陪疏·管行·鄕都廳·京都廳·直日·公事員·曹司에 이르기까지 200명에 가까운 유생들의 명단이 보인다. 이 상소가 고종에게 상달되었는지는 미상인데, 高宗實錄에는 이들의 上疏 기사가 없다. 物目 6점은 모두 혼례시의 婚需物目單子이다.
『竹林堂竪碑時時到記』는 이진택이 개성 경력에 재임하던 1798년(정조 22) 6월 선조 익재선생의 유허에 유허비를 건립할 당시 來訪한 인사들의 명단이다. 유허비의 공식 명칭은 先祖益齋先生遺墟碑文으로 이진택이 찬했으며,
註11)
글씨는 명필 韓宗樂이 썼다. 현재 德峯宗家에는 당시의 비문이 拓本帖으로 전해지고 있다. 시도기의 명칭이 『竹林堂竪碑時時到記』인 것은 益齋의 遺址가 있던 개성의 子男山 東麓이 세칭 竹林堂舊基로 불렸기 때문이다. 시도기에는 前郡守 趙有善, 敎授 李翼相, 敎官 趙有憲, 前掌令 許鍒, 前佐郞 朴聖鉉 등 66명의 전현직 관료와 유생들의 명단이 열서되어 있고, 그 아래로 前僉使 金始泳, 前五衛將 成就仁 등 20명의 명단이 따로 적혀 있다.
그 아래로 白尙億 등 16명의 서리 명단이 있는데, 모두 개성부 소속으로 파악된다. 그 다음으로 〈役所供饋〉라 하여 碑役時 음식제공을 담당했던 府軍官廳 등 개성부 소속 각 廳의 명칭이 열서되어 있다. 이를 통해서 볼 때 당시의 石役은 開城府로부터 상당한 지원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分賑文記는 德峯宗家에서 지손들의 진휼을 위해 宅戶別로 人口數를 조사한 장부이다. 表題는 『九政李氏門賑抄記冊』이고, 內題는 『 己丑正月日蘇亭李氏門賑抄記冊』이다. 己丑年의 정확한 연도는 미상이나 1889년(高宗 29)으로 추정된다.
조선 후기에는 饑饉時에 門中·宗中 차원의 진휼사업이 실시된 경우가 있었는데, 安東 水谷의 全州柳氏 門中에서도 1756년(英祖 32)년 宗家의 주선하에 지손에 대한 구휼사업이 대대적으로 펼쳐진 바 있었다.
註12)
제목과는 달리 蘇亭(九政)에 거주하는 門親 뿐아니라 芳旨·掛陵·新院·蝦洞·賓幕·屯田·院洞 등 범위가 비교적 넓다. 다만 宅號와 인구수만 간단하게 되어 있어 족보를 통해 人名과 연결시키기는 어렵다. 44개 宅에 179口가 조사되었는데, 이것은 규휼을 위해 대상 家戶와 인구의 현황을 파악한 것일 뿐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로 진휼이 이루어졌는지는 이 문서를 통해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문서는 宗契·門契 등과 함께 조선후기 향촌사회에서의 門中의 기능 또는 역할과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 契案은 모두 3건을 수록하였다. 契案 No.1은 原題가 『歸厚契案』으로 李夢星의 자손들이 선대의 奉祭를 위해 1753년(英祖 29)에 결성한 일종의 門契이다.
맨 앞에 1753년(英祖 29) 李運鵬(1711-1779, 防意齋)이 찬한 序文이 있고, 그 다음에 座目, 맨 마지막에 계의 운영 규칙인 節目이 붙어 있다. 座目은 原案과 追案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원안은 1753년 11월 26일에 작성된 것으로 李運蕃 이하 28명이 수록되어 있다.
추안은 동년 12월 10일에 추입된 3명, 1756년(영조 32) 11월 25일에 추입된 2명, 1757년 10월 3일에 추입된 1명, 1759년 10월 4일에 추입된 5명, 동년 10월 15일에 추입된 1명, 동년 10월 17일에 추입된 1명, 1763년(영조 39) 10월 13일에 추입된 3명, 1766년(영조 42) 3월 3일에 추입된 2명, 1767년 3월 18일에 추입된 3명, 동년 3월 19일에 추입된 1명, 1773년(영조 49) 1월 12일에 추입된 6명, 동년 1월 20일에 추입된 2명까지 20년 동안 12회에 걸쳐 30명이 추록되었다.
계원 중 李運鵬은 계통상 李夢星의 형 夢麒의 5세손이지만 조부 李琛은 夢星의 증손으로 태어나 夢麒의 손자 時薰을 계후하였고, 아버지 命錫은 夢星의 현손이었으나 후사가 없었던 李琛을 계후함으로써 혈통상으로는 夢星의 후손이었다. 그가 계의 서문을 찬하고 계원의 일원으로 활동한 것도 이러한 배경 때문이었다. 節目은 모두 7개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를 정리하면,
○ 家戶마다 正租 2斗를 수합한다.
○ 有司 2인이 이를 맡아 취식하되, 임기는 1년에 한하고 반드시 11월에 인수인계한다.
○ 담당 유사가 爲先의 본의에 어긋나게 계금을 함부로 운용하면 중벌에 처한다.
○ 계금은 先代의 祭需 비용 외에는 달리 사용할 수 없고, 만약 爲先의 일이라면 수용한다.
○ 자질 중에서 성인이 되어 契案에 참여할 경우는 本穀 2斗를 납부한다는 내용 등이다.
契案 No.2는 표제가 탈락되어 정확한 명칭을 알 수는 없지만 계원의 인적 구성으로 보아 영남지역 명가 자제들의 친목계안임을 알 수 있다. 다른 계안과는 달리 서문이나 절목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座目에는 黃蘭善 등 모두 394명의 명단이 연령순으로 수록되어 있다.
蘇亭 경주이씨의 인물로는 李祐榮(1822-1913)의 이름이 다섯번째로 등재되어 있다. 좌목의 작성 방식은 먼저 성명을 기록하고, 그 아래에 字와 生年을 記錄하였고, 그 아래에 本貫·居住洞里와 郡縣을 표기하였다.
이들은 영남 列邑의 名家의 자제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풍산유씨(西厓家門), 안동김씨(川沙家門), 경주이씨(德峯家門), 여주이씨(晦齋家門), 의성김씨(鶴峯家門), 연일정씨(湖叟家門), 안동권씨(花山家門), 고성이씨(臨淸閣), 한산이씨(大山家門), 청주정씨(藥圃家門), 전주유씨(岐峯家門), 진성이씨(周村家門), 의성김씨(拓庵家門), 진성이씨(退溪家門) 등 이루다 매거할 수 조차 없다. 李祐榮이 이 契案에 입록될 수 있었던 것은 德峯 이래 경주이씨의 가격 신장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다.
契案 No.3은 原題가「小有亭契案」이다. 小有亭은 李圭一(櫟下)이 1888년(고종 25) 府東面 小明谷(暗谷里)에 세운 정자인데, 지금의 德洞이 이곳이라 한다. 이규일은 1885년 客의 권유로 이곳을 점지하게 되었고, 1887년 2월 草屋 4間을 지어 直所로 활용하는 가운데 그 해 8월부터 정자 경영에 착수하여 1888년에 낙성한 것이다.
曲尺 형태로 건립된 소유정은 2간의 室은 東으로 蒼壁을 마주 대하였고, 북쪽 2間 아래로는 폭포가 내려다 보였으며, 서남의 각 1간의 室과 樓는 멀리 朱砂山을 조망하는 아름다운 정자였다.
註13)
바로 여기서 李圭一은 세사를 잊은 채 자연과 함께 藏修遊息하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 후기 영남유림들은 학덕을 지닌 선비를 위해 집안 사람들과 문인들을 중심으로 계를 결성하는 관행이 있었다. 이렇게 설립된 계는 당사자의 사후에는 碑碣 건립 및 文集 간행의 중심 기구로 역할하였다.
소유정계 역시 이규일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1920년 10월에 자질과 후학들이 설립한 것인데, 이 계안은 친목도모보다는 出資 帳簿의 성격이 강하다. 계원은 孫黙永 이하 99명이며, 성명과 인적사항 아래에 출자금액이 명기되어 있다. 錢文 1兩에서 10兩까지 출자하고 있는데, 2양이 가장 보편적이다. 자신에게 배당된 금액을 납입한 경우에는 금액 하단에 「入」이라 적고 있는데, 미납자의 수는 극히 적다.
계원들은 蘇亭·楊月·新里 등의 경주이씨를 위시하여 月城孫氏, 英陽南氏, 驪江李氏, 慶州崔氏, 密陽孫氏, 牙山蔣氏, 淸安李氏, 烏川鄭氏, 金海金氏, 密陽朴氏, 利川徐氏, 豊川任氏 등 경주일원의 명망가문들의 자제들로 구성되어 있고, 맨 마지막에 수록된 李敎秀는 경주지역에서는 매우 드문 眞城李氏 출신이다.
小有亭契案의 후반부는 契案 본래의 내용과는 관계가 적은 輓詞·祭文·詩文·通文·序文 등이 부기되어 있는데, 물론 관련 인물은 李圭一이다. 이 중에는 이규일의 글과 다른 사람의 글이 섞여 있는데, 각 글의 제목 상단에 『當入』이라 표기를 통해 『櫟下遺稿』 편집시에 수록 여부를 판단한 흔적이 보인다.
만사는 鄭錫祜·李圭復·金秉璜이 이규일의 초상시에 지은 것이고, 『慕德齋十景』(7언율시 10수)과 『暗谷近雲齋』는 이규일의 시이다. 通文(通太學館文) 및 몇 수의 시고와, 『金石錄後識』 역시 이규일의 글이다. 이 외 『追序櫟下居士李極元』(李敦九撰), 『送櫟下序』(崔蓍述撰)는 지우들의 송별서이다.
慕德齋十景 등 시고 일부는 『櫟下遺稿』에 수록되어 있으나 『金石錄後識』은 수록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當入』이라 표기된 『追序櫟下居士李極元』 . 『送櫟下序』도 附錄에 보이지 않는다. 『龜岡書院良下典案』은 2건으로 1864(高宗 1)에 작성된 것이다.
이것은 구강서원의 하전명단으로 『龜岡書院良下典案 』
(1)은 『官上』이라 하여 관청 보관용이고, 『龜岡書院良下典案』
(2)는 『院上』이라 하여 서원 보관용이다. 둘 다 내용은 동일하며, 서원 齋任이 경주부윤에게 보고하여 下典名單을 확정받은 것이다.
매 장마다 경주부의 관인이 날인되어 있고, 마지막 장에 보고자 齋任(李)과 지방관인 경주부윤의 手決이 있다.
下典은 廟直(1인)·都色(1인)·良丁(8인) 등 총 10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良丁의 경우 성명 하단에 倉里·神光·本里 등의 거주지가 표기되어 있다. 本里는 구강서원 소재지인 楊月里를 말한다.
龜岡書院은 현재의 경주시 安康邑 楊月里에 있는 서원으로 1692년(숙종 18)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경주이씨의 顯祖 李齊賢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과 함께 경주 일대 경주이씨들의 정신적인 구심점으로 기능해 왔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高宗 5)에 훼철되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1917년 지방유림에 의하여 복원된 것이다.
구강서원에 있어야 할 이 문서가 德峯宗家에 소장된 경위는 미상이다. 다만 서원훼철시에 문서가 흩어지면서 益齋의 후손가인 德峯宗家에 소장되었을 가능성도 있고, 아니면 李祐榮이 당시의 齋任으로 院事를 주관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집에 보관했을 수도 있으나 전자의 가능성이 높다.
『龜岡書院儒生案』역시 『院上』과 『官上』을 합해 2점이다. 하전안과 작성 목적과 연도가 같다. 그런데 여기서의 유생은 신분상 양반 유생이 아닌 양인 계층으로 보이며 공식명칭은 影幀儒生이다. 朴三伊 이하 30명의 명단이 등록되어 있는데, 군역 면제를 위해 託籍한 것으로 이들에게 주어진 역할은 益齋 影幀의 수호로 여겨진다.
이 문서 역시 『龜岡書院良下典案』과 같은 경로로 德峯宗家에 소장된 것이다. 『水只谷九政小冊』은 戊子年(1828·1888)에 작성한 水只谷 九政里員 소재 전답의 量案(抄)로 內題는 『慶州東二同水只谷九政里員小冊』이다. 대상 전답의 字號는 信~當字이며, 양안의 작성 체제에 따라 地番, 田畓與否, 地積, 耕作者의 이름까지 상세하게 적혀 있다.
『榮問錄』은 1891년(고종 28) 李鍾文이 19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입격했을 당시 축하한 인사들의 명단이다. 일반적으로 영문록은 해당 科擧의 명칭을 제목처럼 쓰고, 그 다음에 恩門이라 하여 당시 試官의 관직 · 성명을 열서한 다음 내방 또는 下人(대리인)을 보내 축하한 인사들의 명단을 열서하는 것이 상례인데, 이 영문록 역시 이런 체제로 되어 있다.
영문록에는 판서 李裕承 등 모두 63명의 명단이 적혀 있다. 李裕承·李裕寅 외에는 모두 경주 또는 영남 인사들이다. 서울이나 경주 인물인 경우에는 洞里名을, 여타 영남지역 인물은 군현명을 적고 있다. 63명 중에는 명사들이 적지 않는데, 張錫龍(判書), 鄭佑黙(承旨), 張承遠(校理), 徐相祖(參判), 李晩由(參議), 李中斗(參議)이 대표적이다.
장석룡·장승원은 인동장씨(旅軒后) 출신이고, 이만유·이중두는 진성이씨(退溪后) 출신이며, 정우묵은 진주정씨(愚伏后) 출신이다.
그리고 이유승은 덕봉의 墓碣을 찬했고, 서상조는 德峯의 墓誌와 德峯集 後識를 찬할 정도로 덕봉가문과 교유가 깊었던 인물이다.
『新行時扶助記』는 1952년(壬辰)에 작성된 최근 자료이지만 근대의 혼례문화를 알려주는 자료라는 점에서 수록하였다.
『雅洞齋舍奠掃時到記』(乙未) . 『阿洞齋舍重建簿』(乙丑) . 『阿洞齋舍重建費排定記』(乙丑) . 『阿洞齋舍建築費排定記』(乙丑)는 阿洞齋舍와 관련된 종합 치부기록이다.
아동재사는 경주 입향조 李之帶(判尹公)의 墓所 수호를 위해 건립된 재사로 예전부터 건물이 있었다고 하나 초창 연대는 미상이다. 이후 李祐榮이 중건하면서 齋舍로서의 규모와 기능을 갖출 수 있었지만 이 또한 세월이 경과함에 따라 퇴락하여 1925년(乙丑)에 李祐榮의 손자 李鍾文이 다시 중수하게 된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重建記·排定記는 모두 이 때 작성된 것으로 재사의 연혁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자료가 된다. 특히 重建簿에는 收支內譯이 자세하고, 용도에 따른 지불액이 적기되어 있어 일제시대 물가사를 연구하는 데에도 매우 중요하다.
『雅洞齋舍奠掃時到記』(乙未)는 재사를 奠掃한 후손들의 명단으로 1955년(乙未)에 작성된 것이다. 앞 부분에 명단이 있고, 말미에 派定記라 하여 都有司·總務·財務 등의 역할 분담표가 부기되어 있다. 이 문서 역시 최근의 자료이지만 阿洞齋舍를 종합적으로 이해하는데 필요한 자료로 판단되어 수록하였다.
『애감록』은 안동권씨 喪禮時의 조문록으로 수록범위는 1812년 5월 1일에서 1813년 5월 8일까지이다. 안동권씨는 이진택의 두번째 부인이다. 李鎭宅은 初娶로 蔚山李氏를 맞았으나 슬하에 자식을 두지 못하고 사망하자 權達規의 딸을 再娶 부인으로 맞아 1남 2녀를 두었다.
이후 덕봉종가의 종통계열을 모두 안동권씨 외손이다. 1812년은 이진택이 사망한지 7년째 되는 해로서 부인의 사망일시는 5월 1일 戌時였다. 哀感錄에는 사위 李鼎學·徐相揆 등 무려 수백명에 달하는 조문객의 명단이 적혀 있는데, 부인상으로서는 엄청난 숫자가 아닐 수 없으며 李覲吾(正郞) 등 전현직 관료의 이름도 적지 않게 보인다. 참고로 부인의 산소는 馬洞에 있다.
Ⅷ. 詩文類.
시문류에는 『試券』 · 『記序跋』 및 詩帖을 수록하였다.
시권은 李鎭宅 · 李宜發 · 李圭一 · 李鍾文 · 李鍾德 · 李能免 등의 시권을 수록하였는데, 이 중 試券 No.2는 제술이 아닌 講經試券이다. 이것은 李鎭宅이 문과에 합격하던 1780년(正祖 4)에 작성된 것인데, 文科 初試에서의 시권이다.
講經試券은 매우 드물게 발견되고 있으며, 간혹 있다 하더라도 고종연간의 것이 대부분인데 이것은 정조연간의 試券이란 점에서 古文書學적 가치가 높다. 강경은 책을 보고 강하는 臨文講經과 책을 보지 않고 강하는 背講으로 구분되는데, 이것은 후자에 해당한다.
講經試券은 試紙 위에 鑄字로 인쇄된 書名을 날인하고, 그 아래에 講한 대목과 채점 결과를 기록하였다. 채점은 通(大通·純通)·略·粗로 구분하여 기록하되 총점은 分으로 환산하였다. 이진택은 4서 3경 중 周易에서 5通2略, 書傳에서 4通3略, 詩傳에서 5通2略, 論語에서 4通3略, 孟子에서 2略5粗, 中庸에서 純通, 大學에서 6通1略을 받아 합계 14分半의 점수를 받았다. 다른 과목에 비해 맹자의 성적이 유난히 저조한 것이 이채롭다.
試券 No.3은 1780년(정조 4) 이진택이 문과 覆試에서 작성한 시권이다. 이진택의 성명과 인적 사항 하단에 『講劃十四分半』이라 하여 初試(講經)에서 받은 점수가 기록되어 있다. 試券 No.4는 이진택이 1780년 문과 전시에서 작성한 시권인데, 바로 이 시권으로 인해 文科 丙科 제21인으로 합격하였다. 현재 덕봉종가에 소장된 시권 가운데 가장 귀중한 것 중의 하나이다.
이 외의 시권들도 모두 중요한 것인데, 試券 No.5는 1891년 李鍾文이 進士試에서 3등 161인으로 입격할 때 작성한 것이며, 試券 No.6은 이규일이 1888년(高宗 25) 생원시에서 3등 63인으로 입격할 때 작성한 것이다. 한편 試券 No.13은 이종문의 시권인데, 거주지가 榮川(榮州)로 표기되어 있다. 경주의 오기인지 아니면 이종문이 榮川으로 이주한 바가 있는지는 미상이다.
試券 No.16~25는 李能免의 시권이다. 이능면은 李圭一의 처부로서 본관은 驪州이다. 이 시권이 어떤 경로로 德峯宗家에 소장되었는지도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記序跋은 모두 3점을 수록하였다. 記序跋 No.1은 原題가 德峯先生故宅記로 1922년 李在緝이 찬하였다.
현재 德峯宗家의 연혁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호적류에 따르면 이진택이 소정으로 이거한 것은 1771년(英祖 47) 경이지만 현재의 종택이 건립되어 입택한 것은 1801년(순조 1)이었다. 그런데 德峯先生故宅記에 따르면, 덕봉종택은 이진택이 圖面을 제작하여 京匠으로 하여금 건립케 한 것이었다.
1797년 開城府 經歷으로 부임한 이진택은 자신의 鄕第(在蘇亭)가 개울가에 위치하여 항상 수해 등으로 인해 훼손되는 것을 우려하여 新第 건립을 도모하게 되었다. 이에 도면을 제작하고 京工을 보내 원래의 家基에서 조금 북쪽으로 자리를 옮겨 건립하게 하여 1801년 11월에 낙성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이진택은 이로부터 두 달 후인 1802년(순조 2) 1월에 삼수갑산으로 유배됨으로서 신제에 거처할 겨를이 없었다. 그가 신제에서 생활한 것은 해배된 1803년(순조 3) 2월부터 고종하던 1805년(순조 5) 6월까지 2년 4개월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후 덕봉종가는 復漢→宜發→祐榮 대를 거치면서 퇴락이 되었고, 임종에 즈음한 李祐榮은 손자 鍾文에게 중수를 하명하게 되었다. 이에 이종문은 집을 대대적으로 수리하는 가운데 奉祭祀와 接賓客을 위해 外舍의 서쪽에 남향으로 4間을 신축하였는데, 공역이 완료된 것은 1916년 경이었다. 현재의 덕봉종가는 바로 이 때에 정비된 형태이다.
記序跋 No.2의 原題는 判尹公齋舍記인데, 흔히 阿洞齋舍記로 불린다. 이 기문은 1925년 阿洞齋舍를 중수한 전말을 기록한 것으로 1926년 李能允이 찬하였다. 記序跋 No.3은 所有亭重修記로 1925년 所有亭의 중수 내력을 서술한 것이다. 찬자는 李鍾瀅이다. 소유정은 1888년 李圭一이 小明谷(德洞)에 건립한 정자이다.
『晬宴韻』은 1900년(光武 4) 李圭一 회갑시의 祝賀詩帖으로 李圭升 · 李圭顯 등의 집안 사람들과 李邁久(小菴) · 李在晳(愚軒) 등 지우들의 시가 중심을 이룬다. 『蓮臺山櫟下公竪碣韻』은 1920년 이규일의 墓道竪碣을 기념하여 지은 친지와 사우들의 詩帖이다. 禮安의 진성이씨 출신인 李中業(起庵)의 시도 보인다. 李中業은 李滉의 후손으로 순국의사 李晩燾(響山)의 아들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