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심을 내어주다
2024.06.09.(성령강림후제3주)
선한목자교회 김 명 현 목사
1/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다가와서 물었다.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2/ 예수께서 어린이 하나를 곁으로 불러서,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3/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돌이켜서 어린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큰 사람이다. 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 하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 (마태 18:1-5)
들어가는 말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다가와서 물었다.”(1) 여기서 ‘그때’는 언제인가요?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은전 한 닢을 물고 있는 물고기 이야기를 들려준 때입니다. 그때는 베드로가 물고기 입에서 나온 은전 한 닢을 가지고 성전세를 바치고 난 뒤가 아닙니다. 마태에게 예수님의 신비한 능력을 드러내려는 의도가 있었다면, 동화가 현실이 된 내용을 기록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태는 제자들이 등장한 시점을 예수님이 베드로와 대화한 바로 다음으로 연결시킴으로써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는지는 숨기고 있습니다. 동화와 실제 사이에 정말 적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물고기를 잡으러 나서는 발걸음 말입니다.
고향 갈릴리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과 재차 드러내셨습니다. 제자들에게는 믿기 힘든 현실이 점점 더 명확해 지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가 따랐던 주님은 결국 아무 것도 아니란 말인가!’ 위로받을 수 없는 슬픔이 그들에게 닥쳐왔습니다. 덧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유일한 희망은 ‘하지만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날 것이다’라는 선포였습니다. 성전세를 대신 납부 해주는 정도로는 위로받을 수 없었던 제자들이 희망을 둘 곳은 예수님이 살아나셔서 완성할 하늘나라뿐이었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1) 그들의 질문은 ‘누가 예수님을 잘 따른 믿음이 큰 사람인가요?’ 라는 것입니다.
희망과 위로를 찾아서
그런데 제자들이 다가올 하늘나라에서 찾고자 하는 것은 지금 현실에서 찾았던 것과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잘 믿고 따라서 예수님이 왕으로 등극할 때 높은 자리에 앉기를 바랐던 제자들은 이제 시기와 장소를 바꾸어서 하늘나라에서 그러한 자리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크게 성공해 보려는 제자들의 못 다 이룬 기대가 시기와 장소를 바꾸어 하늘나라로 옮겨 갔습니다. 결국 이들이 미래에서 찾고자 한 위로는 세상에서 이룬 성취가 줄 수 있는 위로와 다를 바 없습니다. 적은 믿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도 괜찮다는 주님 앞에서 그들은 여전히 큰 믿음을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어 찾는 희망과 위로 역시 성공하는 것, 잘 사는 것, 이름을 드높이는 것이 아닌가요? 우리는 성공을 바라며 기도했고 부자가 되기를 간절히 빌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가 이루어졌을 때 감사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기도하는 우리에게는 언제나 믿음이 추가로 요구되는데, 이 추가되는 믿음은 바로 거짓 선지자들이 강요하는 믿음입니다. ‘설사 현실에서 그렇게 되지 못해도 슬퍼하거나 실망하지 말아라. 다가오는 하늘나라에서는 다 이루어질 것이다!’ 슬픔에 찬 제자들의 질문은 이런 믿음을 드러냅니다. 그들은 바라는 모든 것을 다가오는 하늘나라에서 얻을 수 있다는 대답을 원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교인들은 세상에서 얻지 못한 것을 교회를 통해서 얻을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통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닌가! 우리가 굳건한 믿음을 가진다면 교회에서는 분명하게 통할 수 있는 성공 비법이 있을 것이다.’ 교인들은 세상 속에서 실패한 것에 대한 위로를 교회에서 찾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의 기대를 저기로 옮겨놓거나, 현재의 기대를 미래의 기대로 옮겨놓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한 가지 사실을 드러냅니다. 세상은 변하여도 자신은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하늘나라를 말하면서도 우리가 기대하고 있는 것은 똑같습니다.
중심을 내어놓기
변하지 않음은 늙었다는 것입니다. 늙음은 나이가 많아짐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대로 있을 지라도, 시대가 우리를 빠르게 지나쳐 간다면, 우리는 고집만 남은 채 아무 것도 받아들이지 않는 노인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느 한 시점에 머물면서 다가오는 시대의 가치를 놓친다면, 그것은 영생이 아닌 정지, 곧 죽음일 것입니다. 우리는 다가와 있는 영원한 하늘나라가 우리를 지나쳐가도록 내버려 두면서 영원한 생명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다가올 세상을 꿈꾸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스스로 변해야 합니다.
스스로 변해야 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누군가는 다가오는 시대와 그 중심이 되는 세대를 이해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이해하는 만큼 새로운 세대와 함께 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아닙니다. 다가오는 미래의 세대는 자신들을 이해한다는 구세대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것을 눈치 챈 구세대들은 다가오는 신세대를 자신의 구시대적 가치에 종속시킴으로써 자신의 시대를 연장시키려고 합니다. 그들에겐 신세대보다 강한 힘과 많은 돈이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구세대의 편이 아닙니다. 그들은 결국 사라질 것이고 새로운 세대는 등장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시대 앞에 선 구세대는 어떻게 변해야 할까요? 그것은 중심을 비우는 것입니다. 현 시대에서 중심은 기성세대라고 불리는 사람들입니다. 새로운 세대가 다가오면 그들은 그 중심에서 발을 떼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변으로 물러나야 합니다. 새로운 세대의 가치관을 이해해 보려는, 소용도 없는 노력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새로운 세대에게 중심을 넘겨주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차지했던 중심을 다가오는 세대에 기꺼이 양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린아이를 중심에 데려다 놓으면 됩니다. 그리고 그들의 말을 듣고 그에 따라 행동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겸손과 환대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1) 라는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한 어린아이를 그들 ‘가운데’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행동은 앞에서 설명한 모든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너희가 차지했던 중심을 비워라. 그리고 그 중심에 어린아이, 가난한 자를 세워라.’ 우리가 중심이었을 때 주변이라고 생각하면서 어린아이 취급한 사람들을 중심에 세워야 합니다. 다가오는 신세대에게 우리는 중심을 넘겨주고 주변으로 물러나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다가오는 세계는 하늘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나라의 주인 된 어린아이와 소외된 이들에게 중심을 넘겨주고 주변으로 물러나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주변으로 물러날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 어떤 덕목이 필요할까요?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따름과 믿음이 이 세상에서 자신들을 위대하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적어도 다가오는 하늘나라에서는 자신들을 위대하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따름과 믿음은 누군가를 위대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도래한 하늘나라는 오히려 제자들에게 완전히 다른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겸손입니다. 그것은 크고 위대한 것이 되려는 의지가 아니라, 작아지고 물러나려는 자세입니다. 그것은 주인의 자리에서 종의 자리로 내려오는 것이며, 종을 주인으로 맞아들이는 환대입니다.
예수님은 어린이 하나를 곁으로 불러서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 말씀하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돌이켜서 어린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3) 우리 어른들의 특징은 끊임없이 타인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늙어가면서 배우는 것들이란 우리 주변에 있는 것들을 판단하는 능력입니다. 이렇게 습득된 능력을 가지고 타인을 판단할 때면, 부족한 부분이 보이는 타인은 자신보다 늘 어린아이처럼 보일 것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는 이상, 타인을 판단하는 어른의 습성을 버리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나가는 말
우리는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기에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해란 거의 일방적일 뿐, 타인은 대부분 이해받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처럼 된다는 것은 겸손하다는 것입니다. 겸손은 우리로 하여금 타인에 대한 판단을 멈추고 높이고 환대할 수 있게 합니다. 겸손할 때,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어린아이에게 중심을 내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어린아이처럼 여겼던 사람들이 차지하는 것을 진심으로 환영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큰 사람이다.”(4)
우리는 겸손과 환대, 두 가지를 통해서 다가오는 하늘나라를 맞아들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하늘나라에서 찾고자 했던 위로를 해주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하늘나라를 세워 주인이 되라고 히지도 않습니다.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 하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5) 제자들은 겸손하게 뒤로 물러나서 어린아이들과 같은 이들을 환대하면 됩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때 하늘나라는 도래해 있을 것이며, 제자들은 그 안에서 참된 위로와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누려야 할 위로는 겸손하게 타인을 환대할 때 찾아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