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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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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 尊賢養士 스크랩 치술령 이야기(1) / 충신 박제상의 치산서원
이장희 추천 0 조회 57 14.04.01 17:5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치술령 이야기(1) / 충신 박제상의 치산서원

 

간의 본성(本性)에 관한 이론을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하면, 맹자(孟子)의 성선설(性善說) , 순자(荀子)의

성악설(性惡說) , 고자(告子)의 성무선악설(性無善惡說) 또는 백지설(白紙說)이라고 한다.

 

성이 선하고 악하던, 아니면 이도저도 아닌 백지상태라 할지라도 살아가면서 형성된 품성(品性)을 선악의

정도에 따라 조합(combination)을 하면, 그 경우의 수(數)는 충신효제(忠信孝悌)에서 극악무도(極惡無道),

또는 신(神)의 경지에서 짐승같은 수준까지 빛의 스펙트럼(spectrum)처럼 무수히 많은 분류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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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분류목록의 어디쯤에 속해 있어 어떤 빛깔로 나타날 것인가를 가장 정확히 아는 사람은 자기 자신일 것이고

지난 삶에 대한 후회와 반성 없이 망각(忘却)이란 편리한 지우개에 의존하는 사람의 빛깔은 하늘의 기준에

따라 하늘이 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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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적 상황에 따라 그 평가가 엇갈리는 경우도 더러 있긴 하지만, 우리 역사에 많은 충신열녀(忠臣烈女)가

있다. 물론 그들은 선(善)의 최상부(最上部)에 분류될 것이고,그런 연고로 전설이나 설화를 통해 본 그들의

삶이 거울이 되어 좋은 일,착한 일,의(義)로운 일이라 하면 거울에  반사되듯《본받고 따라야 될 모범》으로

그들이 떠올려 지게 되는 것이다.

 

고충신(萬古忠臣) 박제상(朴提上)과 망부석(望夫石)이 되었다는 그의 부인의 경우도 이와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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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지 않은 일 이지만 쇠고기 때문에 온나라가 시끄러웠다.

없어서 못 먹던 시절을 생각하면 배부른 소리라고 일축하고도 싶지만, 먹어야 할지 말아야 될지... 이렇듯 모순

되고 대립되는 두 가지 상황의 이원적충돌에서 한발 비껴 서 있는 곳이 있다. 

경주와 울산의 경계지점에 정부가 『 한우 불고기특구』로 지정한  "봉계(鳳溪)"라는 마을이 그곳이다.

경부고속철도 2단계사업의 내 현장사무실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계(鳳溪) 버스터미널에서  "박제상유적지" 란 도로표지판을 따라 3km 정도 가다보면 "상월평마을"의 표지석

이 보인다. 박제상유적지 문화해설사의 말씀에 의하면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실린 내용들을 미루어 짐작컨데

박제상의 부인 금교부인 김씨의 친정이 있던 곳이라 추정되는 곳이다.

 

곳에서 유적지까지는 약 5km, 유적지에서 치술령 정상까지는 3km를 더 올라가야 한다. 길은 여러 갈래가

있겠지만 20리 산길을 오르내리며 왜국쪽 동해바다를 바라보며 지아비의 무사귀환과 안녕을 기원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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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산시 울주군 두동면 만화리에 있는 박제상유적지. 치산서원(致山書院)

 

    박제상(朴堤上)의 본관(本貫)은 영해(寧海)이며 호(號)는 관설당(觀雪堂)이다

      "방아타령"으로 유명한 백결선생(百先生) 박문량(朴文良)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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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적지 입구에 서 있는 박제상과 김씨부인을 기리는 비(碑) 

 

라 눌지왕 1년(418년) 그가 삽량주(지금의 경남 양산)의 태수로 있을 때 고구려에 볼모로 잡혀있던 눌지왕의

첫째 동생 복해(卜海, 또는 보해)를 고구려 장수왕을 설득하여 탈출시켜 귀국시켰으며, 집에도 들르지 않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신라를 탈출하였다고 거짓으로 왜국왕을 안심 시킨 뒤, 볼모로 잡혀있던 눌지왕의 둘째 동생

미사흔(未斯欣, 또는 는 미해)을 탈출시켜 귀국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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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산서원의 홍살문

 

신은 체포되어 발바닥 가죽이 벗긴 채 갈대를 벤 그루터기 위를 걷고 끌려다니며, 쇠를 달구어 그 위에

세우는 등의 고문을 당하며 왜국의 신하가 될것을 강요 당하였으나 "신라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가

되지는 않겠다."며 거절하고 목도 (木島 : 대마도)에서 화형을 당해 죽었다.

 

                                            끓는 물도 차다시고 모진 매도 달다시네
                                            살을 찝는 쇠가락도 헌 새끼만 여기시네
                                            비수(匕首)가 살을 오려도 태연 자약하시다.

                                            온 몸에 불이 붙어 지글지글 타오르되
                                            웃음 띤 환한 얼굴 봅바람이 넘노는 듯
                                            이 몸이 연기 되거는 고국으로 날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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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원의 정문 삼강문(三綱門).

 

 치산서원은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 1호이며, 울주군 두동면 만화리 산 30-2번지에 위치해 있다.

 삼강문은 세종때 발간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박제상의 충절을 소개해 놓은 데서 유래된 이름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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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학당인 관설당(觀雪堂)

 

이미 수백 년간 사람들은 치술신당을 세워 박제상과 부인, 자녀들의 제사를 지내왔다. 치산서원은 조선 영조

21년 1745년 최초로 세워져 박제상과 그 부인의 제를 올렸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폐쇄되었다.

1992년 복원 공사가 시작되어 지금에 이르렀다. 치산서원 내에는 충렬공 박제상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충렬묘

와 국대부인, 치산신모로 추앙받는 박제상의 부인 금교 김씨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신모사(神母詞), 박제상의

장녀 아기(阿奇)와 삼녀 아(阿慶)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쌍정려가 있다. 매년 음력 2월에 치산사 춘향대제가

있으며 이때 박제상과 그 부인, 딸들에게 제례를 봉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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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학당 내부

 

강학당은 박제상과 관련된 사진과 글들을 유리액자로 만들어 벽면에 걸어 놓았다. 1,600년이 지난 자료들을

모으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울산광역시에서는 박제상의 충절을 테마로 한 유적지 정비에 힘을 쏟고 있다.

조급한 성과는 일을 그르치기 쉽다. 고증을 통한 객관성이 확보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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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치산서원의 동재와 서재

 

서원의 강당 앞이나 뒤쪽 좌우로는 유생들의 기숙사에 해당하는 2개의 재실을 놓는다.

치산서원도 이와 같은 서원의 일반적인 건축양식에 따랐다.

강당에서 볼 때 왼쪽 것을 동재(東齋), 오른쪽 것을 서재(西齋)라 칭한다. 강당과 동서 양재는 서로 직각으로

놓여 강당마당을 형성하게 되어 서원의 가장 중요한 장소이며,서로 마주보면서 유생 서로간의 격려와 감독을

통한 긴장과 각성을 유지시킨다.

 

서원의 마당주위에는 철따라 바뀌는 꽃이나 나무를 심어 심신의 휴식과 안정에 도움을 주고자하나 치산서원의

마당에는 이러한 고려가 미흡해 보여 조금은 황량하다는 느낌이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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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제상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충렬묘의 정문 성인문

 

강당을 중심으로 한 강학(講學)공간과 사당을 중심으로 한 제향(享)공간이 결합한 기능적인 형식을 기본으로,

강학 공간을 앞에 놓고 제향 공간을 뒤에 놓는 이른바 '전학후묘(前學後廟)' 의 건물배치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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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렬묘에 모셔져 있는 박제상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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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교부인 김씨와 두딸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신모사와 쌍정려

 

편 박제상의 아내 금교부인 김씨는 고구려에 특사로 파견된 지아비의 무사귀향을 노심초사 기다리고 있던

중에 있었는데, 박제상이 집에도 들르지 않고 적국인 왜국으로 다시 들어간다는 소식을 듣고 경주 망덕사 앞

남천(南川)의 백사장에서 망연자실 목놓아 울다가 사지가 굳어지며 혼절하고 말았다. 이후 치술령에 올라 왜국

쪽 동해바다를 바라보며 남편의 무사함을 지극정성으로 기원했으나, 남편의 사망소식을 듣고 두 딸과 함께 몸은

망부석(望夫石)이 되고 혼(魂)은 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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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울산광역시에서는 기념물 1호로 지정한 유적지에 많은 힘을 쏟아 정비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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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준공을 눈 앞에 둔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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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제상유적지 치산서원을 둘러본 며칠 후,박제상이 울부짖는 아내를 뒤로하고 죽음이 기다리는 적국으로

떠나기 위해 배를 띄운 발선처(發船處)를 찾아 보기로 하였다. 경주에서 불국사가는 도로를 지나 울산공항쪽

으로 방향을 잡고 울산 정자항을 찾아 나선다. 정자삼거리에서 좌회전해서 100여m정도 감포쪽으로 가다가 

좌측에 유심히 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쉬운  "유포석보(柳浦石堡)"라는 작은 안내판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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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포석보(柳浦石堡) 오르는 길

 

"박제상"이라는 글씨가 쓰인 안내판은 어디에도 없다. 처음에는 발선처를 지나쳐 한참을 올라갔다가 좌우를

유심히 살펴며 다시 내려오는 길에 "유포석보"의 안내판을 발견하고 혹시 저곳에 발선처의 표시가 있지 않을까

하고 들린 것이 찾게된 행운이었다.

 

안내판의 화살표방향으로 진입한 나그네는 당황하기 쉽상이다.  잡초 우거진 공터와 식당, 가옥 몇 집이 보일

뿐이다.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찾아낸 길은 그야말로 잡초방초 우거진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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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포석보(柳浦石堡)와 발선처표시석

 

석보(石堡)란 돌로 쌓은 작은 성(城)을 일컫는다. 이곳에서 동해를 건너 가로지르면 왜국이다. 그래서 옛날부터

왜구(倭寇)의 출현이 극심하자 조선 세조때 이곳에다 성을 쌓은 것이 "유포석보"다. 둘레 약 900m, 높이 2.2m인

석보는 현재 동쪽부분만 남아있다. 일제강점기때 정자항 방파제를 축조하면서 석보의 큰 돌들을 빼다 써버렸기

때문이다.

제놈들 선조의 노략질을 막고자 쌓은 것을 우리 어민들의 파도피해를 막으려 훼손시킨 역사의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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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제상발선처 표시석

 

 1989년 10월. 문헌에 나타난 당시의 "율포"로 추정되는 정자 앞바다가 훤히 보이는 이곳 작은 언덕에 박제상이

 배를 타고 왜국으로 떠난 곳이라는 흔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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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로변에서 본 발선처 

 

가혹한 형벌에도 적국의 신하되기를 거부하며 죽임을 당한 박제상의 곧은 충절을 알고 있음인가, 발선처언덕
정수리에 둥글게 퍼진 잘 생긴 소나무가 갖은 풍파를 견디며 고고히 서있다.

박제상(朴堤上)은 임금이 근심하거나 굴욕당하는 것을 보면 신하로서 생명을 바쳐 풀어야 하는 책임을 강조하고,
임금의 명령이 쉽고, 어려운지, 안전하고, 위험한지를 가리지 않는 충성과 용기를 역설하며, 그 자신 일본에 가서
죽음을 당하면서도 굴복하지 않는 충절(忠節)정신을 실천하여 ‘충’의 모범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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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의 정자항

 

 1,600년 전 박제상이 왕의 동생을 구하고자 왜국으로 떠난 "율포"는 한국제일의 공업도시로 번성한 울산광역시

 의 일부가 되었다. 가늘게 내리는 빗속에서도 삶의 현장은 쉴 새 없이 뜨겁다. 정자포구의 해안선을 따라

 줄지어 선 횟집에서 나그네의 여장을 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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