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꽃처럼 살자!
창 33장 1~10절 / 고후 2장 12~17절
가을은 아름답지만
저에게는 잔혹한 계절입니다.
알러지 비염의 고통을 아는 사람은
저의 말에 실감이 날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아름답기 원하는 것은
가을 만큼이나 원하는 일입니다.
봄에 벚꽃을 보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집채만 한 나무에
수북이 피어 있는 꽃들은 너무 황홀하여
꽃 속에 나를 묻고 셀카를 들이댑니다.
저는 그 꽃을 볼 때
깨달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 나무에는 수 만 송이의 꽃들이 있지만
어떤 꽃은 이쁘고 어떤 꽃은 이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꽃과 꽃들이 어울려 있는 꽃은
모두가 아름답습니다.
좀 시든 게 있고 덜 시든 것도 있지만
꽃들이 함께 뭉쳐져 있기 때문에
모든 꽃이 다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밥 속에 돌이 한 두 개 있으면
돌밥이라고 인상을 찌푸리지만
꽃들 속에 못난 꽃이 있으면
옥의 티라 하면서 따내거나
인상을 찌푸리는 법이 없습니다.
꽃은 꽃입니다.
그래서 모든 꽃은 다 아름답습니다.
저는 이것을 보면서
사람도 이렇게 보아야 하겠구나 생각했습니다.
모든 사람을 꽃으로 보아야 겠구나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들 마음속은 어떤 상태인가요?
누구는 싫고 누구는 좋고
누구는 나쁜 사람이고 누구는 좋은 사람이고
누구는 내 편이고 누구는 저 편이고
누구는 나와 함께 갈 사람이고
누구는 나와 함께 가지 못할 사람이고
많은 사람들이 내 안에서 이 편과 저 편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마음은
내 자신 안에 있는 내면뿐만 아니라
이 사회를 이 나라를 또한 그렇게 갈라놓고 있습니다.
특히 어려운 시국일수록
이러한 갈등은 더 심화되어져 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마음 속에는
닫혀 있는 것이 있고 열려 있는 것이 있습니다.
열려 있는 것은 그나마 평안하지만
닫혀 있는 것은 늘 우리 마음을 괴롭게 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을 꽃으로 보지 못하는
우리 자신을 볼 수 있습니다.
가을 단풍을 보면 이해가 됩니다.
이제 나뭇잎 끝에서부터 물들기 시작했습니다.
노란 색으로 붉은 색으로 물들기 시작했습니다.
가을 단풍이 절정에 이르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우리는 그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
저 멀리 설악산을 가고 내장산을 갑니다.
하지만 단풍이 너무 아름답다 해서
가까이 가 보면 어떻게 생겼습니까?
색이 바랜 것, 구멍난 것, 모양이 찌글어진 것.
먼지 때가 묻은 것은 등등 많은 것이 있습니다.
책갈피 속에 하나 간직하고 싶어서
가장 완벽한 단풍 하나를 골라 보려면
그 하나 고르기가 어려운 것이 단풍입니다.
그래서 단풍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인생의 쓸쓸한 아픔과 상처라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아픔과 상처로 어울려진 단풍은
가을의 가장 아름다운 산으로 사랑을 받습니다.
인생이 아름다운 것은
꽃들 속에 내가 있고,
무르익은 가을 단풍 속에 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속에 있는 내가 바로
꽃이고, 내가 바로 아름다운 단풍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꽃이라 생각하신 분이 있습니까?
가을이 되면 난 아름다운 단풍이야 라고 생각하신 분이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꽃이라 생각하고
아름다운 단풍이라 생각해도 좋습니다.
여기에 모인 모든 분들이 다 꽃이십니다.
그 중에 여러분 자신은 가장 돋보이는 꽃이십니다.
나는 ‘꽃이다’는 자긍심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나는 ‘가을에 가장 빛나는 단풍이다’ 여기며 사시기 바랍니다.
왜 우리는 꽃이길 원하는 것일까요?
왜 우리는 아름다운 단풍이길 원하는 것일까요?
요즘 시대를 보면 너무나 힘듭니다.
지난 연말부터 시작된 코로나 19는
처음에는 독감 정도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무증상으로도 감염이 되고
기저질환자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쉽지 않은 전염병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집단 감염이 이루어지면서
의료체계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적극적으로 차단하려고 했지만
코로나19는 아마존의 정글까지 퍼져 나갔습니다.
이 바이러스를 막기 위해
최상의 비방책은 사회적 거리두기를 해야 했습니다.
사회주의 국가 같은 경우는
아예 외출을 금지시키는 봉쇄 조치를 할 수 있지만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회적 거리두기로
서로의 생명을 지켜주자 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도 그리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루 이틀에 끝날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코로나 19의 장기화는
사회적 고립으로 인한 스트레스 증가와
많은 자영업자들의 폐업을 줄 잇게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일자리를 잃고
폐업을 하는 사람들의 눈물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제 친구가 해군 소령으로 전역을 한 다음에
서울에 아파트 한 채를 사서 이사를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동생의 식당이 너무 잘 되어서
제2호점을 내려고 형한테 돈을 좀 빌려 달라고 해서
대출을 받아 돈을 대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코로나19가 터지면서
장사가 안되어 결국 가게 문을 닫게 되었고
동생이 갚을 능력이 없으니
친구는 아파트라도 팔아야 되겠다고 하는 소리를 했습니다.
평생 동안 고생고생하면서 이루었던 삶들이
하루 아침에 무너지는 것을 불 때에
그들의 눈물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상상할 수 없는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요즘 우리는 너무나 힘듭니다.
코로나19는 조용한 암살자처럼
우리의 목을 조금씩 조금씩 죄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각박한 세상 속에서
우리 믿는 사람들은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우리 자신을 어떻게 추슬러 나가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인간다움의 아름다움을 갖자 하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시대일수록
스트레스가 잔뜩 올라 폭발하고 싶은 마음이 차면 찰수록
우리 믿는 사람은 인간의 아름다움을 계속해서 유지해 가고자
기도하면서 자신을 성찰하고
말씀을 보면서 자신을 다듬어 가야 할 것입니다.
내가 꽃이면 상대방은 무엇입니까?
내가 꽃이면 상대방도 꽃입니다.
내가 아름다우면 상대방도 아름답습니다.
나를 꽃으로 보고, 상대도 꽃으로 보고
우리 모두를 아름다운 꽃으로 보면서
나의 아름다움을 추슬러 갈 때에
눈물이 많은 이 세상이 치유가 되고
코로나19로 난 상처를 우리 모두가 보듬어 주게 될 것입니다.
상대방이 소리를 지를 때에 같이 소리지르고
상대방이 돌을 던질 때에 같이 돌을 던지면
똑같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픔에 아픔을, 상처에 상처를 더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는 나는 꽃이고 나는 아름답기 때문에
비바람 치는 폭풍우 속에서도
나는 꽃이고 나는 아름다운 사람이다는 것을
끝까지 붙잡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비온 뒤의 꽃은 더 빛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곱이 자기 형님을 어떻게 봅니까?
자기 형님을 하나님의 얼굴로 보고 있습니다.
어떻게 야곱은 자기 형님을
하나님의 얼굴로 볼 수 있을까요?
야곱은 자기 형님을
하나님의 얼굴로 보기까지 2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야곱은 형 에서와 쌍둥이 형제로
어려서부터 경쟁 상대였습니다.
특히 야곱은 욕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형의 장자권을 자기고 갖고 싶었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를 속인 문제로
형제는 서로 원수지간이 됩니다.
그래서 야곱이 외삼촌의 집에 가서
20년을 살게 됩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형은 두려운 존재였습니다.
형님에 대한 두려움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자기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400명의 무사를 데리고 나온 형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전날 야곱은 얍복강 나루터에서
특별한 체험을 합니다.
그 체험은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뒤에 야곱은 확실히 달라집니다.
사람을 보는 눈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형님을 뵈는 순간
몸을 땅에 일곱 번 굽히는 절을 합니다.
타인을 하나님과 같이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형님께 가까이 가서
형님의 얼굴을 뵈니 하나님의 얼굴을 뵌 것 같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형제 사이의 불화는
깔끔하게 청산이 됩니다.
프랑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윤리의 문제를
한 문장으로 압축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당신이 나와 절대적인 그 사이에 끼어든다.
그것이 타자의 얼굴이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는 다른 사람이 끼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이가 바로 배우자 일 수 있고
친구일 수 있고, 우리 주변의 이웃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끝없이 하나님을 직접 보고 싶지만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웃의 다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얼굴과 표정과 몸짓을 느끼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려고 한다면
내 이웃을 하나님의 얼굴처럼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좋은 사람이고
그런 사람이 아름다운 꽃이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과 나 사이에 당신이 있다고 하면서
당신의 얼굴을 뵈니 마치 하나님의 얼굴을 뵌 것 같다고 말입니다.
말씀을 결론 맺겠습니다.
지금 세상은 너무나 힘듭니다.
하지만 이런 세상에서
힘든 자들의 위로가 되고
슬픈 자들의 눈물을 닦아 주는 사람은
꽃들 속에 내가 꽃으로 있고
내가 꽃으로 있는 그 주변의 모든 사람이 꽃이라 하면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는 것이
마치 당신의 얼굴을 뵈는 것 같다고,
나는 항상 당신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입니다.
다시말해서 어려운 삶의 여건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의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사람이
바로 세상에 위로가 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좋은 사람이 되고자 애쓰고
좋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파트너스 활동을 통해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을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