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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8 - 장기판의 원형인 항우와 유방의 초한쟁패(楚漢争覇) 전쟁!
초한쟁패는 기원전 206년 진나라 멸망 이후 유방의 한(漢)과 항우의 서초(西楚)가 대립한 끝에
기원전 202년 12월 항우의 패배로 한나라의 승리와 천하 통일로 끝나는 전쟁으로
초한전쟁(楚漢戰爭) 이라고도 하며 중국에서 '초한상쟁(楚漢相爭)' 이라는 표현도 많이 씁니다.
당대 중국의 모든 세력이 얽혀들어간 대전중의 대전이며, 진나라 멸망 후 당대 최강자였던 항우는
여러차례의 괴물 같은 맹활약에도 불구하고 결국 패배자가 되었는데 이로 인해 유방은 중국
역사상 최초로 평민 출신으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사상 초유의 업적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워낙 항우와 유방의 존재감이 막대하여 그 두명이 중국 땅을 갈라놓고 붙은 문자 그대로
2파전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으나..... 실제로는 항우와 유방 외에도 여러 왕들과
독자 세력들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특히 조나라나 제나라, 그리고 후반부에
반독립세력으로 성장한 한신 등은 충분히 삼파전 구도를 시도해 볼만한 세력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군소 세력들은 항우의 세력권에 속했거나 유방과의 협력관계에 놓여 있었으므로,
양대 세력의 결전으로 보아도 큰 무리는 없는데 중국 역사상 분열기가 많긴 하지만
이렇게 완전하게 양대로 나뉘었던 전쟁사례가 상당히 특이하며 또한 항우와 유방은 출신
계급부터 정책과 능력이며 성격등 모든 것이 완벽하게 상반되는 상대니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강렬한 개성으로 인해 이 전쟁은 인기도 많은 편이며 《삼국지연의》 와 마찬가지로 《초한지》
와 같은 소설이 존재하며, 항우와 유방의 강렬한 개성, 그리고 한삼걸(漢三傑) 등의
존재로 인해 중국사의 중일전쟁을 제외한 여러 전쟁중 수많은 사람들에게 《삼국지》 시대
다음으로 많이 회자되고 미디어화되는 대결이기도 하며 한국 장기는 초한전쟁이 배경입니다.
《정사 삼국지》와 《삼국지연의》 에 나타나는 이야기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많이 알고 있는데
비하여, 실제 기록상에 나타나는 초한전쟁과 소설인 《초한지》의 내용에 대한 차이점은
모르는 경우가 많으며 또 하나의 특징은 초· 한 양국의 지도자의 출신 성분 차이에 있습니다.
먼저 한나라 지도자이자 승자인 유방은 대대로 패현 지역의 평민 출신으로 당시로 보면 개천에서
용난다는 셈인 하층민 출신이었던데 비해 서초의 지도자이자 패배자인 항우는 초의 명장
항연의 후손으로 초나라 엘리트 집안 출신이었으니 이렇게 양자의 신분 차이도 엿볼 수 있습니다.
유방의 한나라는 진나라의 곡식 창고 오창(敖倉) 을 점령하여 기반으로 전쟁을 이어나갔으니
오창의 곡식은 황하와 회수에서 운반해 온 것이며..... 황토 구덩이 안에 곡식을 파묻어서
저장하니 온도가 적게 변하는 땅속에 묻어서 보존을 쉽게 하는 것이며 인근의 형양과는
용도로 연결이 되어 있었는데 황토고원에 땅을 깊게 파고 곡식을 묻는 방법은 오래된 것입니다.
진 (秦) 나라에서는 국가적 차원에서 대규모 세곡 집적지를 만들었으니.... 유사시에는 수만 단위를
넘는 대규모 군대가 보급기지로 쓸 수도 있었는데 초한전쟁에서 각 세력들에게는 보급의 핵심이
되었으니 이미 진나라가 쌓아둔게 많아서 약탈만으로도 단기결전에는 충분했던 것이라 여겨집니다.
춘추시대(春秋)와 전국시대(戰國) 대혼란을 겪은 중국은 진(秦)나라에 의해 하나로 통일되었으니
법가(法家)의 학문을 받아들이고 원교근공의 외교 정책으로 열국을 분열시킨 진나라는 백기,
왕전, 몽염 등의 장수를 앞세워 기원전 230년에는 한(韓)나라를 멸망시켰고, 불과 10년여 만에
한(韓)나라· 조(趙)나라· 위(魏) 나라· 초(楚)나라· 연(燕)나라· 제(齊)나라의 순으로 6국을 통일합니다.
중국 통일이라는 전대미문의 업적을 이룬 진시황은 황제로 즉위하며 제국의 시대를 열었고,
군현제(郡縣制) 를 실시하여 전국을 36개 군으로 하고 각종 통제 정치를 단행
해서는 획일적인 문화를 창조하였으니 이른바 중앙 집권적 전제 군주제가 완성된 것입니다.
시황제는 몽염을 파견해 북쪽의 흉노를 쫓아내어 만리장성을 구축하고 남쪽은 임효와 조타를 보내
광둥성(廣東省)· 광시성(廣西省)에서 베트남 북부까지 정복하였으니 진나라의 위명은
해외에까지 뻗쳐 해외에서는 중국 이름을 China, Chine 등 진나라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부릅니다.
시황제의 거대한 대외 정책과 대토목 공사는 결국 국민의 부담이 되는 것이어서 말년에는
민심이 동요하자 극단적인 탄압 정책이 시작되었으니..... 전국칠웅 중에 진을 제외한
다른 여섯나라는 모두 멸망하였지만, 망국(亡國)의 주민들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었고..... 진나라는 억압만 했지 그들을 보듬어줄 어떠한 정책도 펼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러한 온갖 억압과 부담 속에 백성들의 분노와 불만은 한계 수위까지 차오르고
있었는데, 시황제의 뒤를 이어 이세 황제로 즉위한 호해(胡亥)는 아버지 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할건 전혀 없는 막장이었으니 호해는 정치는 조고(趙高) 에게
맡겨둔 채 술과 여자와 유희로 세월을 보냈으니 제국은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진승이 왕이 되어 초나라는 크게 일어날 것이다.(大興楚, 陳勝王)" "공(公) 등은 기한을 넘겼으니
참수를 당할 것이고, 가령 참수가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수(戍) 자리 서면서 죽는 자가
열명 가운데 여섯 일곱 명일 것이다. 또 장사(壯士) 란 죽지 않는다면 그만이지만, 죽는다면
큰 이름을 드러내야 할 뿐이다. 왕(王), 후(侯), 장(將), 상(相) 의 씨가 어찌 따로 있더란 말이냐!"
상앙(商鞅) 이래 진나라의 법치주의는 진시황 때에 이사(李斯)를 거치면서 절정에 달했으니
법률은 지나치게 가혹한 면이 많았는데 시황제가 죽은 이듬해인 기원전 209년,
하남성 출신 진승(陳勝)은 동료 오광등 징용된 900여명과 함께 베이징 부근인 어양(漁陽)
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대택향(大澤鄕)에 이를 무렵 큰비가 내려 도로가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진나라의 법률은 목적지까지 정해진 시간 안에 도착하지 못하면 목을 베어버리게 되니,
도망쳐도 죽고 늦게 가도 죽게 되는 상황이 되자..... 진승과 오광은 결국 자포자기
하는 심정으로 인부들을 선동하기 시작했고 인부들도 동조하여 인솔 관리들을 모두
죽여버린 다음에 반란을 일으켜 진승은 장초(長楚)라는 국호를 세우고 왕위에 오릅니다.
만일 가혹한 법률이 없었다면 진승·오광의 난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며 또한, 진나라의
지배력이 강고하다면 진승과 오광이 들고 일어났다고 해도 초기에 쉽게 진압됐겠지만
그러나 진승과 오광이 들고 일어서자.... 바로 전국에서 이에 호응하는 움직임이 퍼져
나갔으니 당시 진나라 36개 군과 그 밑의 현에는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있었습니다.
혹독한 관리들에게 고통받던 백성들은 불만이 폭발하여 들고일어나 그들을 죽이고 난에 동참하기
시작했으니 반란군은 순식간에 어마어마한 규모로 불어났는데 호해가 상황 파악이 늦기도
했지만 계포의 평가에 따르면 진시황이 흉노 원정 등으로 국력을 축내놓은 탓에 제대로 대응
하지 못했던 면도 있었으니 장한만 해도 수도에서 당장 동원할 군대는 죄수 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진승은 농민 출신이었기 때문에 여러 반군 세력을 통합하여 하나로 통솔할 수 있는 권위가 없었으며
육국의 후손들은 진승에게 복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부하들도 진승을 이탈하는데 괴철은
무신이 성 수십개를 함락시키자 '이 기회에 진승의 군사를 훔쳐서 독립해버리자' 며 사주하니
무신은 진짜로 독립했다가 자기도 똑같은 수법으로 군사를 도둑맞은후 어이없게 부하에게 죽습니다.
결정적으로는 함곡관을 넘어 진나라의 수도 함양으로 진군하는 진승의 부하 장군
주문(周文) 의 병력을 진나라의 명장 장한(章邯) 이 격파하면서 장초국왕인
진승의 지위는 크게 흔들리게 되니 기세를 탄 장한은 대대적인 반격을 가해 옵니다.
진승과 오광의 난은 진승의 죽음으로 좌절됐지만 지방에서 반란들이 계속해서 일어났기에 진
제국은 중국 전국의 통제력을 상실한 상태였으며 그리고 항우가 이끄는 초(楚)의 부흥군이
기원전 207년에 거록대전에서 장한의 군대를 격파하면서 진은 멸망의 기로에 놓이게 됩니다.
그 사이 패현에서 거병했던 초한대전의 또다른 주역 유방은 함양 남쪽 무관(武關)을 넘어 진나라
군사를 물리치고 진나라의 수도 함양을 제후들 중 가장먼저 함락시켰고 진나라 왕 자영의
항복을 받았지만..... 그러나 곧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한 항우는 함곡관을 뚫고 유방을 치려했습니다.
위기에 처한 유방은 연회를 가장한 암살위기였던 홍문연에서 탈출해 서촉땅으로 물러났고 이후
항우는 함양을 재차 함락시키고 진왕 자영을 비롯, 왕족을 멸족시키고 대학살을 벌이며
함양을 불태웠으며 항우는 서초(西楚)의 패왕(覇王)을 자칭하며 팽성에 도읍을 두고
초 회왕 미심을 황제인 의제로 높였으나 그후 진을 멸한 후에는 침현으로 추방 후 살해합니다.
항우는 각지의 유력자들이 세운 나라들을 초나라 아래에 편입하고 자신을 따라 함께 진나라를 멸한
장군들을 각지에 봉건하여 봉건제를 부활시켰는데, 세부 사항에서 보자면 문제가 많은
조치였으니 항우는 주로 자신에 협력한 세력에는 좋은 땅을 분봉했고, 자신에게 협력하지
않은 세력은 그 지방 중심지에서 벽지로 쫒아냈기 때문에 봉건으로 인한 분쟁이 수없이 발생합니다.
한왕(漢王) 유방(劉邦): 한중, 파, 촉 일대. 수도는 남정.
옹왕(雍王) 장한(章邯): 함양 이서. 수도는 폐구(싱핑시).
새왕(塞王) 사마흔(司馬欣): 함양 동쪽에서 황하 사이. 수도는 약양.
적왕(翟王) 동예(董翳): 상군(上郡) 전역. 수도는 고노(옌안시).
이상은 옛 진(秦) 나라의 영역을 갈라서 받은 제후들 입니다.
대왕(代王) 조헐(趙歇), 상산왕(常山王) 장이(張耳): 장이는 진여(陳餘)와 함께 조헐을 조왕(趙王)
으로 옹립하고 있었는데 항우는 장이가 함께 진을 공격한 공적이 있다 하여 조헐을 대왕
으로 쫓아내고 장이에게 조나라 땅을 주어 상산왕에 봉했는데 후(侯)로 격하된 진여는 이에
분노하여 장이를 공격하고 조헐을 다시 조왕으로 옹립하자 갈 곳 없던 장이는 유방에게 붙어
버려서 유방의 패업에 큰 역할을 했으니 이상은 옛 조나라의 영역을 갈라 받은 제후들 입니다.
구강왕(九江王) 영포(英布): 구강, 형산, 임강은 오초(吳楚) 지역.
형산왕(衡山王) 오예(吳芮): 영포의 장인.
임강왕(臨江王) 공오(共傲): 영포의 부하. 이상은 서초패왕
항우와 함께 옛 초나라의 영역을 갈라서 받은 제후들 입니다.
요동왕(遼東王) 한광(韓廣): 원래 연왕이었는데 장도에게 밀려납니다.
연왕(燕王) 장도(臧荼): 항우를 따라 관중에 들어갔으며, 연왕 한광을
요동왕으로 몰아낸 다음 공격해서 완전히 멸망시키는데 이후 한신
에게 항복하는데..... 이상은 옛 연나라의 영역을 갈라 받은 제후들 입니다.
교동왕(膠東王) 전시(田市): 원래 제왕으로 전영(田榮)에게 옹립되었으나 항우에 의해
교동왕으로 밀려나니 분노한 전영은 항우편을 드는 전시를 살해하고 자신이 제왕이
되자 항우는 제나라를 공격해서 전영을 죽였으나 유방의 공격으로 제대로 진압하지
못했고 결국 동생 전횡(田橫)이 전영의 아들 전광(田廣)을 제왕으로 모시고 끝까지 싸웁니다.
제왕(齊王) 전도(田都): 항우에게 협력한 장군이라 제왕에 봉해집니다.
제북왕(濟北王) 전안(田安): 제의 왕족으로 항우와 친했기 때문에 제북왕에 봉해집니다.
이상은 옛 제나라의 영역을 갈라 받은 제후들 입니이다.
서위왕(西魏王) 위표(魏豹): 사촌형 위구(魏咎)가 진승 오광의난 때 위왕이 되었으나
장한에게 패배해 죽었으며 항우에게 협력하여 위왕이 됩니다.
은왕(殷王) 사마앙(司馬卬): 하내(河內) 지방을 봉지로 삼아 은의 옛 수도 조가를
도읍으로 했으니 하내 사마씨 일족으로 훗날 사마의의 조상입니다.
이상은 서초패왕 항우와 함께 옛 위나라의 영역을 갈라 받은 제후들 입니다.
하남왕(河南王) 신양(申陽): 낙양에 봉해졌습니다.
한왕(韓王) 정창(鄭昌): 본래 한왕으로 봉했던 한왕 성(成)이 유방과 친했기
때문에 성을 죽이고 자신의 부하 장수 정창을 한왕으로 삼았습니다.
이상은 옛 한(韓)나라의 영역을 갈라 받은 제후들입니다.
제나라는 반진전쟁에서 초나라에 은혜를 입은 적도 없고, 따라서 제후국도 아닌 자신들이 내정
간섭을 당할 이유가 없다며 분봉 조치에 반발하며 들고 일어나 3개월후 군사를 일으키면서
진여나 팽월 등까지 부추겨서 혼란스럽게 만드는 와중에 유방이 삼진을 뚫고 나와 관중쪽의
영향력도 사실상 상실하니 순식간에 제, 진, 조, 대 등 영토에서 절반 이상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항우는 제나라부터 해결하고자 항복한 적군을 산채로 구덩이에 파묻으라는 명령을 내려 원성을 산 탓에
시원하게 진군하지 못하는 사이 유방은 진나라의 잔류 초군이 정리되자 동진을 개시하여 초나라의
수도 팽성까지 점령하니 3만 정예병력으로 회군한 항우는 팽성대전에서 수십만 유비연합군에 대승을
거두었지만 오창의 곡창지대를 포함한 형양의 방어선까진 탈환하지 못했고 전쟁은 예상외로 길어집니다.
팽성대전(彭城大戰) 은 203년 항우가 3만여명으로 유방의 60만명 군사를 거의 전멸시키는
괴력을 발휘한 전투인데, 한신의 지휘로 관중 지방의 3왕을 쓰러뜨린 한왕 유방은
각지의 9 제후왕들을 불러 모아 56만에 이르는 군사를 거느리고 초나라를
치기위해 진군했는데.... 항우는 제나라를 공격하다가 성양성에서 수렁에 빠져 고전합니다.
유방이 56만 대군을 이끌고 초의 수도 팽성을 기습하자 팽성을 지키던 장수 팽월은 항복했고 다른
초나라 장수들은 성에서 재보와 항씨 족중, 미녀등을 이끌고 제나라로 도망쳐오자 항우는
격분해 정공, 정도, 용저와 항타를 불러 유방을 치기로 마음먹었으니 항우는 3만 강동
자제 기마군사로 천리길을 달려와서 서쪽 소현에서부터 밤중에 자는 한나라군을 야습해 죽입니다.
호릉에서는 번쾌가 3만 군대를, 외성인 소성에서는 조참, 관영, 위표가 10만 군사를 이끌고 가지키고
있었고 북쪽에 군사 10만을 풀어놓고 동쪽에 약탈하러간 군사가 10만이 크게 넘고 팽성 수비 병력
은 10만이 넘었다는데 먼저 항우는 팽성 근처 호릉에서 번쾌의 군사 3만명을 전멸시키고 소성의
군사 10만도 괴멸시켜 살아남은 군사들은 팽성으로 도망치고 팽성 북쪽 군사들도 성안에 들어갑니다.
이미 유방에게 항복했던 옛 항우의 부하 사마흔과 동예의 배신으로 팽성은 함락되었으니 유방은 마지막
승부로 제후군을 모두 불러 결전을 치르나 항우의 괴력 앞에 사마앙이 죽고 위표도 부상을 입는데
항우는 동쪽의 제후군 10만을 사수가에 도륙해 시체가 많아 강이 흐르지 않을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한신은 영벽으로 가서 패잔병 25만을 모아 진지를 구축하지만 항우의 돌진으로 수수가에서
또 다시 10만명이 죽어 여기서도 강이 흐르지 않을 지경이었으며 또 한신은 살아남은
군사로 뒤에 배수를 등지고 죽기살기로 싸워 살아남아 배를 구해 도망치는데 이것은 뒷날
조나라를 정벌하던 중 배수진이라는 형태로 만들어져 한신은 병가의 명성을 일세에 떨칩니다.
30만이 죽은 이 전투의 패배로 유방은 일시적인 위기에 몰리게 되어 동맹을 약속한 제왕 전광,
조왕 헐, 서위왕 위표 등도 유방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는데, 그러나 이 전투로 너무 큰 자만심
을 가지게 된 항우는 훗날 유방에게 엄청난 대패를 당함으로써, 유방은 항우에게 복수할 수
있었으니 결과적으로 한나라를 멸망시킬수 있는 최고의 기회를 가졌으나 살리지 못했습니다.
항우는 한과의 전투에서 언제나 승승장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안대학살 등 민심을 잃는등 정치에
있어서는 무지했으며 인재 기용에도 적들이 비웃을 만큼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냈으니 부하들이
숱하게 이탈하고 소하가 형양으로 필사적 보급과 팽월의 유격전으로 악착같이 버티는 한나라에
결정타를 날리지 못한채 승리만 쌓아가는 도중 별동대로 출발한 한신이 북방을 모조리 평정합니다.
결국 광무산 대치에 이르러 초군의 군량은 바닥을 드러냈지만 적은 약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강해지며 천하에 항우의 적만이 남게 된 상황이 되자 스스로 더는 전쟁이 불가능하다는 것
을 깨닫고 좌절한 항우는 유방 못지않은 원수지간이었던 제나라와 동맹을 맺거나, 한신을
회유하거나 유방과 화평하려고 하는등 뒤늦게 외교적 수단을 시도해 보았으나 전부 실패합니다.
해하 전투에서 한나라 연합군에 패배한뒤 한군이 초나라 노래를 부르는 심리전을 펴자 남아 있던 군사들
도 동요를 일으키고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으니 그 결과 해하 전투 직전까지만 해도 10만이 넘었던 병사
는 불과 800명만 남게 되었는데 항우는 모든 것을 잃고 도망가는 신세가 되고 회수를 건널 즈음에는
100명으로, 중간에 길을 잘못 가르쳐준 노인으로 인해 늪지대에 빠지면서 다시 28명으로 줄어듭니다.
이들은 동성 언덕에서 네 갈래로 갈라져서 죽을힘을 다해 오강 나루에 도착하지만, 항우는 고향에
돌아갈 면목이 없다는 이유로 다시 강동에서 군세를 일으켜 재기하자는 권유를 물리치고 배를
타지 않는 대신 뱃사공에게 오추마를 선물했는데 그때까지 따라온 사람들도 배를 타지 않고
말에서 내린뒤 그대로 항우와 함께 한군 추격대를 향해 돌격했으니 항우는 싸움 끝에 자살합니다.
항우의 패배와 죽음은 한나라가 새 중원의 패자가 되었음을 의미했으니 초나라가 항복하는 와중에
한때 항우의 봉토였을 뿐인 노나라만이 끝까지 유방에게 저항했으나, 항우의 수급을 보여주며
항우를 노왕으로서 안장할 것을 약속하자 결국 항복하였고 중원은 한 제국으로 통일되니
마침내 긴 싸움을 끝낸 유방은 여러 가지 감정이 북받쳤는지 항우의 장례식에서 울었다고 합니다.
항우가 봉건한 왕들 가운데 회남왕 영포, 형산왕 오예, 연왕 장도는 유방에게 투항하는데, 초한전쟁
과정에서 유방은 유력한 군벌들을 왕으로 봉건하였는데 초왕 한신, 양왕 팽월, 조왕 장이,
한왕 한신 등이었으니 천하에는 유방을 포함하여 8명의 왕이 있게 되었는데, 고제 5년인 기원전
202년에 다른 7명의 왕이 유방에게 황제의 존호를 바치는 형식으로 유방의 우위를 인정하게 됩니다.
초왕(楚王) 한신(韓信): 제왕(齊王)에서 바뀌어 봉해졌는데 기원전 201년 회음후로 격하되고 기원전
196년 진희의 반란에 연루되어 사형에 처해집니다. 회남왕(淮南王) 영포(英布): 구강왕
(九江王)에서 봉국의 이름이 바뀌었는데 한신, 팽월이 차례차례 숙청되자 기원전 195년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해 사망하는데..... 그러나 유방 또한 영포 진압전 때의 부상으로 그해 사망합니다.
양왕(梁王) 팽월(彭越): 기원전 196년 진희의 반란에 연루되어 사형에 처해집니다.
한왕(韓王) 한신(韓信): 옛 한나라 땅에 세워졌으나 태원에 옮겨 봉해졌는데 침입한 흉노와 화친을
시도하였으나 한 제국의 의심을 사게 되자 오히려 흉노로 투항하게 되고 한나라를 공격하다가
196년에 전사했지만 이 사람의 후손들이 다시 한나라로 귀순한 후 한나라의 명문 귀족이 됩니다.
조왕(趙王) 장오(張敖): 초한 쟁패기 중에 왕위 계승을 받은 드문 사례로 2대 조왕 장이의 아들이며 유방의
딸 노원공주(魯元公主)와 결혼하여 사위가 되었는데 기원전 200년 유방이 흉노에게 참패하고 돌아
올 때, 식객 관고(貫高)가 유방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민 것에 연루되어 선평후(宣平侯)로 강등당합니다.
딸 장언(張嫣)은 혜제의 황후가 되었고, 아들 장언(張偃)은 여태후 시기에 노왕(魯王) 에
봉해졌으나 여씨 일족이 몰락한 뒤 열후로 강등되었는데.... 장오는 이 때 유방
에게 자신의 측실인 조미인(趙美人)을 바쳤는데, 조미인은 유방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며 유방은 경포를 제압한 뒤 조미인에게서 얻은 아들 유장(劉長)을 회남왕으로 봉합니다.
연왕(燕王) 장도(臧荼): 기원전 202년 유방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가 유방이 친정하여
정벌당하고 그 아들 장연(臧衍)은 흉노로 도주하자 유방은 친구 노관을 연왕에 봉합니다.
연왕(燕王) 노관(盧綰): 기원전 202년 장도를 대신하여 연왕에 봉해졌는데
기원전 195년 흉노와 손잡은 것이 발각돼 흉노로 망명합니다.
장사문왕(長沙文王) 오예(吳芮): 형산왕(衡山王)에서 바뀌어 봉해졌으며 민월을 평정하다가 병사하니
아들 오신(吳臣)이 장사왕의 지위를 이었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배한 영포를 속여 죽음에 이르게
했는데 장사국은 이성 제후국 가운데서는 유일하게 존속하여 오예의 후손이 봉해졌는데 기원전
157년 오차(吳差)가 자손이 없어서 죽을 때까지 존속하나 오예의 무덤은 나중에 손권에게 도굴됩니다.
이로서 한 제국이 성립하게 되지만 이런 제후왕들은 하나하나 토사구팽당하고 유방은
제거한 제후 대신 친척인 유씨로 제후를 교체합니다.
초원왕(楚元王) 유교(劉交): 유방의 동생으로 형제 중 막내. 기원전 201년 초왕
한신이 회음후로 격하되면서 초나라 서쪽을 받고 초왕이 됩니다.
형왕(荊王) 유고(劉賈): 유방의 사촌 형으로 기원전 201년 초왕 한신이 회음후로
격하되면서 초나라 동쪽을 받고 형왕이 됩니다.
오왕(吳王) 유비(劉濞): 유방의 조카로 대경왕의 아들인데 기원전 195년 형왕 유고가 영포에게
살해당해 옛 형나라 땅을 받고 오왕이 됐으며 후에 이 사람은 오초 7국의 난의 주동자가 됩니다.
대경왕(代頃王) 유희(劉喜): 유방의 작은형으로 동성 제후왕과 달리 이성 제후왕을 대신해
봉해진 것이 아니고 기원전 201년 한왕 한신과 함께 흉노 방비를 위해 봉해졌습니다.
제도혜왕(齊悼惠王) 유비(劉肥): 유방의 서장자로 201년 한신의 옛 제나라에 봉해짐.
조은왕(趙隱王) 유여의(劉如意): 유방의 서자로 처음에 흉노의 침입을 받고 달아난 큰아버지 대경왕
대신 대나라에 봉해졌는데 기원전 198년 유방 암살에 연루된 조왕 장오 대신 조나라에 봉해집니다.
대왕(代王) 유항(劉恒): 유방의 서자로 기원전 196년 진희의 난이 평정되면서 대나라에
봉해졌고 한신의 한나라까지 아울러 받았으니 훗날 한문제입니다.
양왕(梁王) 유회(劉灰): 유방의 서자로 기원전 196년 죽은 팽월 대신 양나라에
봉해졌으니 시호는 공(共)이고, 조나라로 옮겨졌기에 조공왕(趙共王)입니다.
회양왕(淮陽王) 유우(劉友): 유방의 서자로 팽월이 죽으면서 회양군을 받아 회양왕이 됐으니
시호는 유(幽)이고, 조나라로 옮겨졌기에 조유왕(趙幽王) 입니다.
연영왕(燕靈王) 유건(劉建): 유방의 서자로 195년 흉노로 달아난 노관 대신 연나라에 봉해졌습니다.
회남여왕(淮南厲王) 유장(劉長): 유방의 서자로 기원전 195년 죽은 영포 대신 회남국에 봉해집니다.
한고조가 죽을 때까지 남았던 유씨가 아닌 제후왕은 인구도 적고 민월, 남월에서 완충지
역할을 하던 장사국의 오예(吳芮)뿐이며 한편 한나라에 형식적으로 복속된,
한족이 아닌 월족(越族)이 세운 이민족 왕조도 있는데 물론 이 왕조는 유씨가 아닙니다.
민월왕(閩越王) 무제(無諸): 지금의 푸젠성. 월족(越族) 왕으로 항우가 왕으로 봉해주지 않아 유방을
지원했기 때문에 왕으로 봉해졌으니 자손은 동해왕(東海王), 동월왕(東越王) 등으로 봉해졌습니다.
남월왕(南越王) 조타(趙佗): 지금의 광둥성과 베트남 북부 지역. 조타는 본래 진나라의
장수였으나 남월족과 동화되어 남월왕을 자칭하였으니 베트남의 왕조로 여겨집니다.
그외 중원땅에서 왕으로 임명된 이성왕 공신이 한명 더 있었으나 이 공신은 유방에게서
왕으로 임명되기 무섭게 왕위를 포기하고는 유방과 여후 사이에 난 노원공주에게
하사받은 영토를 바쳐서 토사구팽을 피하고 고향에서 편안한 여생을 보냈다고 합니다.
항우의 행적은 군인으로서는 최고였으나 통치자로서 볼 때는 안좋은 점만 다 모아놓았으니
특히 군주로서는 명백한 폭군이었고 결국 그것이 그대로 돌아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지만
항우는 죽을 때까지 자기가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했고 오히려 하늘 탓만
했는데 그리고 당대는 물론 후대 사람들도 항우가 진 건 항우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여깁니다.
항우는 멸망하고 이성 제후왕들의 세력도 한풀 꺾여 한나라가 성립되었지만 한나라는 오히려 매우
허약한 국가가 되어 있었으니 진나라는 토목공사를 자주해서 노동력을 강제로 징발했고
세금을 과도하게 부과했는데 그런 까닭으로 진나라는 통치 체계가 불안정했고, 진의 통일전쟁부터
영포의 난까지 전란과 학살로 많은 인구가 소멸했으며 중국을 떠나 해외로 이탈한 인구도 많았습니다.
실제로 사기 조선 열전을 보면 진나라의 통일전쟁때 부터 연나라와 제나라, 조나라 출신
유민들이 조선으로 이주했다는 기사가 나오며, 덕택에 그동안 연나라에게
눌러지냈던 고조선이 그 덕을 보며 연나라 시절에 상실당했던 영토도 상당수 회복
하고 세를 다시 떨치게 되면서 중흥기를 맞지만 유방의 증손자 한무제에게 멸망합니다.
전란이 끝난 직후인 서기전 194년에 조선의 체제가 위만조선으로 바뀌게 된 계기도 이 유이민
세력 중 위만 세력을 조선이 흡수하고 위만 세력이 조선의 정권을 차지하면서 벌어진 일
이었으며 진나라는 어렵지 않게 무찔렀던 흉노를 한나라는 패배하는 굴욕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이후로도 한나라는 한 동안 군사력에서 밀리며 흉노에게 조공을 바치는 신세가 되어버리고 말았는데
물론 묵돌 선우와 노상선우가 동호와 월지 등 주변 종족들을 복속시키는데 성공하고 부국강병을
꾀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한나라의 국력이 진나라때에 비해 크게 악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전국시대의 인구는 2천만으로 추산되는데, 진나라 통일전쟁을 시작해서 영포의 난까지 종결
되는 30여년 동안의 전란 사이에 사라진 인구는 그 가운데 70% 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그 결과 한고조 치세에서 인구는 고작 500만 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70% 가 모조리 절멸했다기 보다는 전후 한나라의 행정력에서 이탈한
인구가 대다수 였을 것인데 다만 이 수치도 너무나도 많은데다가 더 심한 것은
후대의 신나라와 후한으로 이어지는 전란기와 후한 말 군웅할거의 전란을
겪은 삼국시대의 경우 전란이 종결된 이후의 인구는 몇 배나 많이 집계되었습니다.
한나라의 인구가 적은 것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70% 감소까지
는 매우 심한 일이니 즉 인구가 70% 가 감소한것은 아니라고 쳐도 진나라
의 폭정과 항우의 학살, 수십년간의 민란과 전쟁으로 만만찮은 사람들이 죽은
것은 확실하며 그 탓에 통일제국이 된 한나라는 당연히 행정력이 많이 떨어졌습니다.
진나라가 벌인 통일전쟁과 가혹한 정치로 인해 전국에서 유랑민이 속출했는데 여기에 더해
항우가 저지른 잔혹한 학살이니 신안대학살 등 기록에 명확하게 남은 숫자만 합쳐도
당시 인구의 몇% 정도는 항우의 주도 아래 학살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저런 대학살 만행을
저지른 것을 보면 항우는 전국시대의 백기 같은 수준으로 각지에서 학살을 자행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나마 백기는 병사가 될수 있는 젊은 장정을 대상으로 학살을 자행했지만 항우는 더 잔인해서 성과
마을을 점령하고는 민간인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학살했는데 한군이 지켜낸
관중도 대기근이 돌아 수많은 사람들이 아사했으니, 당시에는 안전한 곳이 단 하나도 없이
폐허가 된 성과 마을, 시체로 가득한 세상이었으니무자비하게 민간인을 학살하는 지옥도였습니다.
진나라 통일전쟁을 시작으로 영포의 난까지 이어지는 엄청난 난세 속에서 그로 인한
국가 시스템이 붕괴했으며 기근도 겹쳐서 전 중국의 민생이 처참한 상태로 추락
했다. 초한 전쟁 말기에 이미 전란의 폐해가 확연히 드러나게 되는데
진나라의 본거지로서 풍요로운 생산력을 자랑했던 관중 땅도 전란과 기근이 지속되니.....
소하가 보통은 병역 의무를 짊어지지 않던 노인, 청소년까지 징병해서 긁어모은 병력을 유방에게
지원군으로 보내야 했을 정도로 황폐화 되어버렸던 것이며 게다가 문제는 관중 지방은 여전히
그나마 상황이 나은 지방이었다는 것이니 직접적으로 학살에 노출된 다른 지방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전쟁이 끝난뒤 경제와 민생 상태는 최악이었으니 사마천의 사기에도 전한 초에는 장군들
조차 말이 없어 소를 타고 다녀야 했다는 증언이 기록되어 있을 정도이며 유방이
진평에게 3만호가 넘는 크고 좋은 땅을 내렸는데 백성들 대부분이 유랑민이
되어서 막상 남아있는 백성들은 기껏해야 5천호 수준밖에 안 되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진의 폭정과 초한 전쟁은 중국에 큰 피해를 남겼으며 한 제국은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매우 허약한 국가였으니 북방의 흉노에게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으며 한 고제 유방은
흉노가 침공해왔을때 친정에 나섰으나 흉노에게 참패하여 조공과 인질을 바치는 굴욕외교를
감수해야 했고 위만조선도 한나라가 허약했기 때문에 적극적인 확장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유방은 당초 약속했던 것과 달리 약법삼장(約法三章) 외의 다른 법을 다 없앨수는 없었고 많은
부분이 진나라를 거의 그대로 계승했지만 '죄인은 최대한 무겁게 엄벌' 이었던 진나라와는 정
반대로 '가능하다면 가볍게 처벌하자' 라는 부분에서 법을 운용하는 의도가 달랐고 백성 중
가진게 없고 궁핍해진 사람이 대부분이었기에 세금을 내게 되는 성인의 나이를 23세까지 올립니다.
조세법은 수확량의 15분의 1로 내린뒤 말년에 납세 시기 등의 조항이 애매모호한 걸 많은 사람들이
악용한다면서 조공은 한 해에 한번만 내라하고 징수액과 함께 다시한번 못을 박았는데 토지
상태에 대한 고려가 전혀없이 세금을 똑같이 뜯어가던 진 시절의 허점을 보완하여 토지의
여건에 따라 세금 지불액에 차등을 두었고 수확할 처지가 아니라서 땅을 반납하겠다는 것도 허용합니다.
진의 가혹한 법률과 달리 한고제는 유연한 통치를 펼치고 사면령을 내리는 것으로 가혹한 처벌로
고통받는 사람을 줄였으며 요역 면제권을 주면서 전국적인 사업을 자제하였다으며 도가의
무위사상을 바탕으로 백성에게 휴식을 주고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함으로써 인구와 경제의 자연
회복(증가)을 기대한 것인데 혜제와 소제까지 정책의 기조가 이어지면서 생산력이 서서히 증가합니다.
진나라의 제도를 계승하되 도가의 황로 사상에 의거한 국가 운용은 이후 한무제 때까지 전한 정치의
기반이 되었으니 진나라 시기 일시적으로 강고하게 구축되었던 군현제 역시 붕괴해 군국제로
후퇴했으며 군현제 복귀는 한무제 시기까지 기다려야 했는데 전란기 혼란스럽고 진나라
시기를 거치며 엄격해진 예법도 숙손통으로 하여금 시대에 맞게 간략한 예법으로 바뀌었습니다.
항우의 말입니다. "내가 군사를 일으킨지 8년, 70여차례 전투를 치렀고 가로막은 자들은 목을 베어 죽였다.
공격받은 성들은 항복했고, 한번도 싸움에서 진적이 없어 천하를 제패했다. 오늘 내가 한사코 죽음을
무릅쓰고 세번 싸워 모두 이김으로써 너희들을 위해 한군의 포위망을 풀고, 적장들의 목을 베면서
적군의 깃발을 부러뜨려 이런 곤궁한 처지에 놓이게 된 이유는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고 했기
때문이지 내가 싸움을 잘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너희들로 하여금 알게 해 주겠다."
한고제 유방의 말입니다 "한신, 소하, 장량 이 세 사람은 실로 인중호걸(人中豪傑)들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천하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 세 사람을 능히 부릴 줄 알았기 때문인 것이다.
항우는 그나마 있었던 범증(范曾) 한 사람도 제대로 쓰지 못했기 때문에 나에게 사로잡히게 된 것이다."
왕릉의 말입니다 "항우는 현능한 사람들은 시기하고 재능 있는 사람들은 미워하며, 능력 있는
사람들은 의심하여, 싸움에서 승리했음에도 그 공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지 않고, 땅을
얻어도 나누지 않아 그 이익을 같이 누리지 않음으로 인해, 항우는 천하를 잃은 것인가 합니다."
범증의 말이니다."참으로 애통하구나! 어린아이와 함께 일을 도모했으니 일이
이루어 질 수 있겠는가? 항왕으로 부터 천하를 뺏어갈 자는 필시 패공
(沛公)일 것이다. 그때가 되면 여기 있는 우리들은 그의 포로가 되고 말리라! "
사마천의 말입니다 "항우는 스스로 공로를 자랑하고 사사로운 지혜만을 앞세워 옛 것을 따르지
않았으며 패왕의 업을 이루었다고 하면서 무력으로 천하를 다스리려 했다. 이에 5년만에
나라는 망하고 몸은 동성(東城)에서 죽었으면서도 자기의 잘못을 깨닫지 못한 것은
참으로 허물이라고 하겠다.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 것이지 용병을 잘못해서
지은 죄가 아니다.」라고 말했으니 그가 황당무계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양웅의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초가 해하(垓下)에서 패하여 바야흐로 죽게 되었는데, 말하기
를 '하늘아!' 라고 하였다니, 믿겠습니까?" 이에 대답하였다. "한은 여러 정책을 다하였고, 여러명의
힘을 다하게 하였지만, 초는 여러 정책을 싫어하고 스스로 그 자신의 힘을 다하였던 것이오.
다른 사람을 다하게 하는 사람은 이기고, 스스로 다하는 사람은 지는 것인데, 하늘이 무슨 까닭이겠소."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것은 진나라였지만 가혹한 통치로 15년만에 멸망하는 단명왕조가 되어버렸고
한나라가 400년 가까이 통치하면서 실질적인 중국의 첫번째 통일왕조로 기능하는데 왕망이
황위를 찬탈하여 신나라를 건국했지만 광무제가 왕망을 물리치고 후한을 건국하면서 황제는
오로지 유(劉)씨만이 할수 있다는 관념이 성립되었고 유비가 건국한 촉한 멸망 때까지 이어집니다.
초한전쟁은 한반도에도 큰 영향을 끼쳤는데 연나라 땅에 거주하던 위만이 진한교체기의
혼란을 틈타 무리를 이끌고 도망쳐와서는 고조선 준왕에게 복속하였고 이후
고조선 서쪽 국경을 지키다가 반란을 일으켜 준왕을 몰아내고 위만조선을 세우게 됩니다.
위만조선은 한나라가 내전의 상처와 흉노의 압박으로 약해진 틈을 타서 적극적인 영토
확장을 실시하는 동시에 한나라와 진(辰)국 사이에 중계 무역으로 많은 이득을
누렸으며 또한 한반도에 본격적으로 철기가 도입된 것도 위만조선 시기입니다.
한나라 무제가 즉위하고 나서 무역문제로 고조선을 압박하였고 협상이 결렬되자 한나라의
대대적인 침공으로 결국 위만조선은 멸망하니 한나라는 고조선의 영토에 한사군을
설치해 지배하려고 했으나 토착민들의 저항으로 점차 밀려나 고구려와 같은 소국들이 성장
하였고 마지막 남은 낙랑군이 고구려 미천왕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면서 한사군은 소멸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