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 晉 王 朝 世 家
東晉(동진) AD. 317∼AD. 420 위치 江蘇省(강소성) 성 司馬(사마)
代數 | 在位期間 | 位 | 姓名 | 關係 | 首都 | 現地名 |
제 1대 | AD. 317∼AD. 323 | 元皇帝(원황제) | 司馬睿(사마예) |
| 建業(건업) | 江蘇省 南京 |
제 2대 | AD. 323∼AD. 325 | 明皇帝(명황제) | 司馬紹(사마소) | 원황제의 아들 |
| 강소성 남경 |
제 3대 | AD. 325∼AD. 342 | 成皇帝(성황제) | 司馬衍(사마연) | 명황제의 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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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대 | AD. 342∼AD. 344 | 康皇帝(강황제) | 司馬岳(사마악) | 성황제의 동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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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대 | AD. 344∼AD. 361 | 穆皇帝(목황제) | 司馬聃(사마담) | 강황제의 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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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대 | AD. 361∼AD. 365 | 哀皇帝(애황제) | 司馬丕(사마비) | 성황제의 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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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대 | AD. 365∼AD. 371 | 海西公(해서공) | 司馬奕(사마혁) | 사마비의 아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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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대 | AD. 371∼AD. 372 | 簡文皇帝(간문황제) | 司馬昱(사마욱) | 사마예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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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대 | AD. 372∼AD. 396 | 孝武皇帝(효무황제) | 司馬曜(사마요) | 간문황제의 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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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대 | AD. 396∼AD. 418 | 安皇帝(안황제) | 司馬德宗(사마덕종) | 효무황제의 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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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대 | AD. 418∼AD. 420 | 恭皇帝(공황제) | 司馬德文(사마덕문) | 안황제의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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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대 원황제(AD. 276∼AD. 323)
사마의의 넷째아들인 瑯琊王 司馬伷(랑야왕 사마주)의 손자이며. 랑야공왕 司馬覲(사마근)과 하우씨 사이 에서 태어난 장남이다. 사마예의 모친이름은 夏候光姬(하후광희) 이고, 아버지는 夏候莊(하후장). 할아버 지는 夏候威(하후위). 증조 할아버지는 하후연이다. 사마근의 뒤를 이어 AD. 290년 15세의 나이로 랑야 왕이 되었으며, 원강 2년(AD. 292년), 원외산기상시가 되어 업성에 있었다. 건무 원년(AD. 304년). 사마 예의 숙부였던 동안왕 사마요가 성도왕 사마영에게 피살되자 사마예는 자기에게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 했는데. 낙양을 떠나 산동성 랑야 곧 자신의 봉국으로 돌아왔다. AD. 311년 회제가 영가의 난때 포로로 잡혀 흉노의 한에 잡혀가서 죽자(AD. 313년), 민제가 즉위하여 사마예를 승상겸 대도독으로 임명하였 다. 민제가 포로로 잡혀가고 서진이 멸망하자 사마예는 晉朝(진조)의 귀족과 강동 대족의 지지를 받아 AD. 317년 44살에 즉위한다. 나중에 낭야 왕씨의 세력을 꺾으려 하다가 군사권을 장악한 王敦(왕돈)의 반발을 유발하여 그 와중에 분통이 터져 사망한다.
제 2대 명황제(AD. 299∼AD. 325)
사마의의 고손자로 그의 증조 할아버지는 사마의의 6남인 司馬伷(사마주)이며, 그의 할아버지는 司馬覲 (사마근)이고 그의 부친은 원황제 사마예와 어머니 순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지간에는 화목했으며, 어진 사람과 유학자를 존경했으며 장졸과 백성을 사랑했다.
건무 원년(AD. 317년), 세자가 되었고 이듬해 3월에는 태자가 되었다. 대장군 왕돈은 자기가 찬탈하는데 명제가방해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그는 효성이 없고 무능하다는 이유로 모함하여 여러 번 폐위하려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이루지 못했다. 영창 원년(AD. 322년), 11월 사마소는 황제에 즉위했다.
태년 원년(AD. 323년), 왕돈은 군사를 고숙으로 옮기고 이듬해 정월에는 충신 주숭 등을 죽이고 회계를 습격했다. 왕돈은 이때 친정하러온 명제의 진채를 형 왕함으로 하여금 기습하게 했는데 오히려 참패하자 분통이 터져 죽었다. 명제는 명군의 자질이 컸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재위 2년 만인 AD. 325년 27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제 3대 성황제(AD. 321∼342)
대흥 4년(AD. 321년),에 명황제 사마소와 유문군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녕 3년(AD. 325년)3월 태자가 되었고 8월 5살의 나이로 황제가 되었다.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유태후가 섭정하고, 사도 왕도. 중서령 유랑(사마연의 모친 유문군의 오빠). 상서령 변호가 보좌했다. AD. 328년, 역양내사 소준이 예주 자사 조 악과 함께 군을 일으켜 유량 토벌을 명분으로 건강에 쳐들어가 강제로 황제를 석두성으로 데려갔다. 유 량은 심양으로 도주하여 강주 자사 온교. 서주 자사 치감. 정서 대장군 도간과 함께 소준을 토벌했다.
함화 4년(AD. 329년), 소준의 낭이 평정되고 사마연은 구출되었다. 그 후 성인이 되자 정사에 힘을 기울 이고 법률을 간소화 했으나 재위 18년 만인 AD. 342년 2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제 4대 강황제(AD. 322∼AD. 344)
영창 원년(AD. 322년)에 태어났으며, 사마연의 친동생이며, 명제의 아들이다. AD. 326년에 오왕이 되었 고 이듬해에는 랑야왕이 되었다. 함화 9년(AD. 334년)에는 표기 장군이 되었고, 함강 5년(AD. 339년)에 는 시중. 사도가 되었다. 함강 8년(AD. 342년), 사마연의 병세가 위독했지만 사마연의 두 아들은 모두 어 린 아이였다. 이대 사마연의 외숙부 중서감 유빙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사마악을 추천했다. 사마연의 허 락으로 사마악이 황제가 되었다. 사마악은 AD. 344년 재위 2년 만에 23세 나이로 사망했다.
제 5대 목황제(AD. 343∼AD. 361)
사마악과 저산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건원 2년(AD.344년), 강황제 사마악의 병세가 위급해지자 중서감 유빙과 정서 장군 유익 형제는 회계왕 사마욱을(원황제 사마예의 막내아들) 후사로 세우기로 했는데 중서 감 하충은 겨우 두 살밖에 안되는 사마담을 태자로 봉하자고 했는데 그대로 되었다. 9월 사마악이 사망 하자 황제가 되었는데 저태후가 섭정하고 하충이 보좌했다. 하충은 나라를 잘 다스렸다. 이때 중원지역이 혼란에 빠져 갈족의 後趙(후조)를 한족의 염민이 멸하여 염위를 세웠고 저족이 세운 前秦(전진)이 부견이 천황에 즉위했으며, 선비족 전연의 모용준이 염위를 멸망시켰다. 이 틈을 타서 동진의 유력한 형주 군벌 환온이 서정을 감행했다. 영화 3년(AD. 347년), 成漢(성한)을 쳤다. 환은은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상 한을 멸망 시키고 후주 이세를 사로 잡았으며 서촉지방을 수복했다. 사실상 형주의 지배자였던 환온이 북벌을 감행한 목적은 동진을 찬탈하는 것이었는데 결국 그의 꿈은 그의 아들 환현이 이루다가 말았고 유유가 그 꿈을 이룬다. 승평 5년(AD. 361년), 사마담은 재위 18년 만에 1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제 6대 애황제(AD,.341∼AD. 365)
사마연과 주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사마비는 두 살 때 랑야왕이 되었고 5살 때 신기상시가 되 었다. 승평 5년(AD. 361년), 자식없이 죽은 사촌동생 목제 사마담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으나 즉위 2 년 후 병석에 누웠고 1년 뒤 죽었다. 아우인 랑야왕 사마립이 즉위하니 그가 황제 혁이다.
제 7대 해서공(AD. 342∼AD. 386)
사마혁은 애황제 사마비의 친동생이다. 사마혁은 한 살이 되는 해에 동해왕이 되었다가 AD. 362년, 랑야 왕에 책봉되었다. AD. 365년에 애황제 사마비가 사망하자 후사가 없어 사마혁이 후사를 이었다. 실권자 였던 대사마 환온은 북벌을 단행했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일찍부터 반역의 뜻을 품고 있던 환온은 북벌 도 실패하고 다른 방법을 찾았다. 환온은 사마혁을 폐위하기 위해 동분서주 하여 결국은 고자 내지 남색 으로 몰아 재위 7년 만에 저태후가 폐위시켰다. 폐위 후 372년. 해서현 공으로 강등되어 오현으로 유배 보냈다. 폐제 사마혁은 AD. 386년 45세 나이로 오현에서 사망하였다.
제 8대 간문황제(AD. 320∼AD. 372)
원황제 사마예와 정아춘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3살 때 랑야왕. 7살 때 회계왕이 되었다. 함화 원년 (AD. 366년), 환온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다. 황제에 즉위한 후 대사마 환온을 불러놓고 하염없이 눈물 만 흘렸는데 은근히 양심이 찔리던 환온은 땀을 흘리며 아무 말도 못했다. 청렴단백하고 욕심이 없었으 며. 노자사상에 밝았다. 태화 2년(AD. 372년), 7월 결국은 재위 8개월 만에 태극전에서 사망하였다.
제 9대 효무황제(AD. 362∼396)
간문황제 사마욱과 이릉용의 3남으로 태어났다. 처음에 회계왕에 책봉되었다가 함안 2년(AD. 372년), 나 이 10살에 황제에 즉위했다. 383년, 전진의 부견이 87만 대군을 이끌고 처들어 왔지만 비수대전에서 승 리했다. 초기에는 황제에 걸맞는 기량을 보였으나 시간이 지나자 아우인 회계왕 사마도지에게 정사를 위임하고 밤. 낮으로 주색에 빠졌다. AD. 396년, 후궁들과 주연을 베풀던 사마요는 총애하던 장귀인에 게 너도 이제 30세가 넘었구나. 새 후궁을 찾아야 겠구나 하고 말했다. 그날 저녁 장귀인은 술에 취한 사마요의 얼굴에 두꺼운 이불을 잔뜩 올려서 죽여 버렸다. 이렇게 사마요는 35세 나이로 허망하게 최후 를 맞았다.
제 10대 안황제(AD. 382∼419)
효무황제 사마요와 안덕태후 진씨(陳歸女)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자는 安德(안덕)이다. 태원 12년(AD. 387년), 사마덕종은 태자에 책봉되고 태원 21년(AD. 396년), 사마요의 죽음으로 황제가 되었으나 나이 가 어려 숙부인 회계왕 司馬道子(사마도자)가 섭정하며 보좌하였다. 용안 3년(AD. 399년), 사마도자는 아예 정사를 18세난 아들 司馬元顯(사마원현)에게 맡겼다. 사마원현과 유유가 이끄는 관군이 손은의 반 군을 필사적으로 저지하는 동안 桓溫(환온)의 아들이었던 형주. 강주 자사 桓玄(환현)이 수도 건강으로 진군. 사마원현은 북부군을 동원하여 이를 막으려 했으나 북부군의 수장 유뢰지의 배신으로 실패한다.
원흥 원년(AD. 402년), 환현은 건강에 입성하여 사마도자. 사마원현 부자를 죽이고 동진의 대권을 장악 했다. 환현은 스스로 승상. 태위에 오르나 사치와 방종으로 부패는 극을 달렸다. 원흥 2년(AD. 403년), 환현은 사마덕종을 협박하여 선양하게 하고 초나라를 세워 황제가 되었다. 사마덕종은 평고왕으로 강등 되어 심양으로 이주되었다. 원흥 3년(AD. 404년), 건무 장군 유유가 건강으로 진격했다. 환현은 불리해 지자 사마덕종을 강제로 데리고 강능으로 도주했지만, 유유는 환현의 선봉 桓修(환수)를 죽이고 5월 환 현도 죽였다. 유유는 모용선비족의 남연. 강족의 후진. 등을 차례로 멸망시키고 동진 최강의 권력자가 되었다. 참언을 날조하여 황제를 돌보던 아우 사마덕문이 병던 사이에 중서시랑 왕소지를 시켜 건강 동 당에서 사마덕종을 교살했다. 이렇게 사마덕종은 재위 23년 만인 37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휴평능에 안 장되었다.
제 11대 공황제(AD. 386∼AD. 421)
안황제 사마덕종의 친동생이다. AD. 418년 사마덕종이 죽자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사람됨이 공손하 고 신중했는데 AD. 420년 중서령 부량이 유유의 뜻을 따라 사마덕문에게 유유에게 양위한다는 조서를 내리도록 했다. 유유는 선양 받은 다음 사마덕문을 선양왕으로 봉했지만 살려두기에는 부담스러워 저비 의 오빠 저숙도와 저담지 형제에게 저씨를 만나게 하는 동안 유유가 보낸 병사들은 사마덕문에게 이불 을 덮어서 질식사 시켰다. 동진은 원황제로부터 이에 이르기 까지 모두 11세, 104년이었다. 서진과 동 진은 모두 합하여 156년 만에 멸망했다.
사료 출처
曾先之(증선지)의 십팔사략(십팔사략)과 司馬光(사마광)의 資治通鑑(자치통감)과 인터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