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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무엇으로 하느님과 계약한 것인가?
글을 쓰며
필자는 남다른 권위도 없는 평범한 신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만 형제님들과 가끔 성서와 신앙에 관한 묵상을 나누는 중 조금 관심 있게 들어주시고 다른 이들에게도 도움이 되겠다고 말씀하셔서 용기를 내어 이 글을 서술합니다.
저의 글은 새로운 주관적 견해를 주장한다거나 또 해석을 내리는 글이 아니라 단지 신앙생활을 하면서 묵상한 내용을 자전하는 수필입니다.
그러나 글을 쓴다는 것은 그것이 어떠한 형식을 지니건 말처럼 지나는 것이 아니어서 이 내용이 교의에 어긋나지는 않는지 확인하고 홀연 깨우친 생각이 어떤 오류가 있는지를 퇴고해야 하므로 신중을 기하고 조심스러운 마음을 갖습니다.
일부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점을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도움이 저 개인에게 부족하므로 공동체의 도움을 희망합니다.
서론
일부의 사람들은 구약시대의 초기부터 오늘날 우리가 믿는 기독교가 있었거나 그 핵심 교리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구약시대의 하느님을 믿는 종교를 굳이 이름을 붙여 구분해야 한다면 아브라함교 그 다음 발전해서 유태교이다.
학자들에 의하면 기원전 580년경 초기유태교가 성립되고 기원전 160년경(다니엘서 쓰인 시기) 이나 기원후 70년경에 이르러 유태교가 뿌리 내린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모세오경 등의 구약 성경을 지금의 신앙적 관점으로 보면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이 있을 수 있다.
유대인의 조상인 아브라함으로부터 모세와 출애급 사건을 통해 비로소 이스라엘이 야훼를 알고 그 자비를 체험한다. 아브라함과 성조들에게 야훼신앙이 예비되고는 있었지만 모세와 탈출기, 시나이산에서의 계시를 통해 이스라엘의 해방신으로서의 관계정립이 된다. 이스라엘인들이 하느님을 실제로 알게 되는 계기는 모세를 통해서이고 신명기에 이르는 긴 여정을 통해 조금씩 깨달아 간다.
모세 오경 당시 이스라엘의 구체적 역사 속에서 이집트의 압제로부터의 해방, 이 해방신관이 구약시대의 신관 및 신학관의 요체라 할 수 있다. 영적인 구원이 아니라 현실의 문제와 세상사를 해결하는 하느님인 것이다. 그래서 당시의 유다인들은 조금만 이 기대에 어긋나도 하느님을 원망하고 우상을 섬기고는 했다.
모세오경에는 부활사상이 없다. 이것은 한참 후 기원전 2세기에 등장하는 바리사이파에서 주장했다. (마카베오상 참조)
사도행전 23장 8절에 나타나듯 바오로 사도가 최고의회 의원 앞에서의 변론과정을 보면 잘 드러난다.
“사실 사두가이파들은 부활도 천사도 영도 없다고 주장하고 바리사이들은 그것을 다 인정하였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완성되는 현재의 기독교는 이스라엘인의 해방신관을 확장시키고 승화시켰다. 구약의 해방신관 개념에서 하느님의 보상은 약속된 땅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이스라엘인의 독립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약속된 땅은 하느님과 함께하는 땅이다. 이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같은 의미이다.
구약에서의 인간은 하느님의 은혜를 얻기 위해 믿음과 그 믿음의 증거로 율법의 준수를 해야 하고 신약에서의 인간은 믿음의 증거로 복음을 완성해야 한다.
인류는 구약의 역사 속에서 좀 더 하느님의 진리에 가깝게 발전해 온다. 모세오경은 아직 하느님의 진리가 완전히 드러나지 않는다. 사실 초기적 단계이다. 이것은 하느님이 불완전해서가 아니라 당시의 인간이 아직 하느님의 진리 속에 드러나지 아니했기 때문이다.
창세기
창세기는 제목이 말하듯 하느님이 우주와 만물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성경은 오늘의 기준으로 보는 과학적 기록이 아니다. 그러나 몇 천년 전의 인류에게는 그 시대의 기준이 있고 그 기준이 곧 당시의 과학이다.
당시의 특히 근동지역의 사람들에게는 창세기의 창조이야기와 매우 비슷한 여러 설화가 있었음이 고고학에 의해 밝혀졌다. 당시의 우주창조론 관점이 그러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기준으로 판단한다는 것은 논점을 벗어난 것이다.
성경 창세기 창조이야기는 다른 창조설화와 비슷하기는 하여도 강조점이 매우 다르다고 한다. 그 다른 점은 하느님은 우리 인간을 자신의 소유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자유의지를 갖는 자유 인간으로 만드셨다는 점이다. 하느님의 권위를 넘으려 하는 불경까지도 저지르는 자유로운 인간으로 살도록 창조하셨다.
이 자유의지의 인간은 하느님의 권위를 넘으려는 시도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선악과를 따먹는 일이다. 결국 하느님의 분노로 이어지고 에덴동산에서 추방 된다. 인간의 고통이 시작되는 것이다. 아담의 죄는 하느님의 권위를 넘으려하는 일종의 반란죄이며 이 죄는 대를 이어가는 인류의 원죄가 된다.
그리스도교의 핵심 교리 중 하나인 원죄설이 이 사건을 근거로 한다.
이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왜 죄가 될까? 선악과는 선과 악의 구분과 판단을 하는 분별력과 심판의 능력을 행사토록 하고자 하는 욕망을 갖게 하는 나무이다.
인간은 하느님께서만 하시는 심판의 능력을 행사하고 싶었던 것이다. 바로 이 점이 하느님의 권위에 도전한 죄가 된 것이다.
그 후에도 인간은 하느님께 도전하는 일을 또 하는데 바벨탑 사건이다. 이 사건은 창세기에 기록된 두 번째 하느님 도전이다. 이 도전의 형벌로 인류는 분열의 상태에 놓이게 되고 서로 싸우는 스스로의 형벌을 자초하는 벌을 받게 된다.
정리하면 선악과 서리?는 에덴동산의 유토피아에서 추방당하며 인간이 인간으로 살아갈 때 짊어져야 할 고통의 벌을 받게 되고 이것은 원죄로 남게 된다. 두 번째 도전으로 인류의 또 다른 숙명적 분열의 벌을 받는다. 이 벌로 말미암아 인류는 분열하게 되고 집단과 집단, 국가와 국가 간의 갈등의 뿌리가 잉태되어 단 하루도 전쟁의 참상이 멈추지 않는 고통을 얻게 된다.
신약의 시대에 이르러야 비로소 예수님의 오심과 파스카의 희생으로 우리는 이 원죄의 사함을 받는다. 이 사함은 첫 번째 불경으로 받은 죄의 사함이다. 두 번째 불경죄의 용서는 아직 받은 적이 없다. 이 죄에 대한 벌은 아직 진행형이다. 분열의 벌 이 벌로부터 인류는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창세기 성서에 기록된 몇 번의 죄가 더 있는데 카인의 동생 살인이고 노아의 홍수, 소돔과 고모라이다.
카인은 동생 아벨의 살인에 대해서는 세상을 떠돌아 다니게 되는 이른바 역마살의 벌 이외에 사실 별다른 벌이 없다. 또 사람들이 해치지 못하도록 보호도 해 주시겠다고 하신다. 물론 양심의 가책이라는 벌도 의미는 있지만 다른 예의 벌에 비하면 비교적 가볍게 느껴진다.
카인의 사건은 다른 범죄와는 조금 달라서일까. 노아의 홍수나 바벨탑, 또 아담의 죄는 하느님의 권위에 도전하거나 경배하지 않는 자들을 벌하셨다. 카인의 사건은 동생 아벨에게 치우친 하느님 사랑을 질투하여 일어난 범죄이다. 적어도 카인은 하느님을 업신여기거나 도전하거나 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일까. 하느님은 그 죄를 벌하시기는 하지만 그를 죽음으로부터는 보호하신다.
노아의 홍수, 소돔과 고모라의 벌 역시 하느님 경배와 관련이 있다. 유일한 하느님을 경배하지 않으면 벌을 면치 못한다는 가르침이다.
성조시대(기원전 19세기)
창세기 전반 후반부(창세기 12장 26절)에 이르면 아담의 20대손 이스라엘인들의 시조가 되는 아브라함이 등장한다. 아브라함의 대는 이사악, 야곱 다음 요셉으로 이어진다. 이스라엘인의 조상이 등장하는 것이다. 우리 식으로 단군 할아버지, 주몽 등이다. 창세기 후반부는 아브라함의 증손자 요셉이 형제들의 미움을 사 죽임을 당하려다 어찌어찌하여 이집트의 노예로 팔려가게 되고 무대가 이집트로 옮겨진다.
성서학자들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활동하던 시기를 기원전 1900년경으로 본다. 야곱까지를 성조시대라 하는데 이는 유대인의 성스러운 조상이라는 뜻이다.
구체적 계약
하느님께서는 두 번의 불경죄를 저지른 인간과의 관계에서 고민하셨는지 인간과 구체적인 계약을 맺는다. 그 대표 계약자가 아브라함이다. 아브람이 뭘? 잘해서 하느님의 선택을 받았을까? 에 대한 구체적 텍스트는 없이 그냥 부르심을 받는다.
일단 하느님은 아브람을 부르시고 순전히 말씀으로만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겠다.”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할 것이다.” “복을 내리겠다.” 고 약속하신다. 즉 미래에 주시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아브람의 환심을 산 하느님은 드디어 아브람과 구체적 계약을 맺으신다.
이 계약내용의 아브람의 자격조건은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창세기 15장 6절)이다. 하느님의 약속을 아브람은 의심하지 아니한 것이다.
갑의 조건 : “아브라함 너는 나를 절대 믿어라. 너 자신에게만 끝나지 말고 네 자손들에게도 이어지도록 해라.” 을의 조건 : “그러면 하느님은 땅과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은 자손을 준다.” 이른바 쌍방 계약이 맺어지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표상되는 순종과 경배, 하느님은 땅과 자손이다. 드디어 구약의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암송아지, 암염소, 숫양, 산비둘기, 집비둘기를 증표로 하여 이른바 피와 불의 계약을 하신다. (창세기 15장 9-17)
이 계약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그 자손들에게도 이어지는 계약이다. 보편적인 인류 다른 민족과의 계약은 신약시대에 이르러야 구체화 된다.
지금의 우리는 구 신약적 기록을 이해하므로 하느님과 우리 인간과의 신앙적 관계를 구체화 할 수 있다.
창세기 15장의 계약은 아담에게 한 방법보다 훨씬 진일보한 계약이며 매우 구체적이다. 사실 아주 공정하지는 아니한데 하느님이 지불한 것에 비하면 아브라함의 지불은 사실 믿어주겠다는 것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이다. 갑과 을이 앉아 갑이 을에게 100억 자리 빌딩을 줄께. 을은 그래! 이 빌딩 주는 너 갑을 믿어주고 잘 할께. - 아니! 누구는 못해? 달랑 믿어주기만 하면 된다는데! -
‘달랑 믿어 주는 거’ 사실 일상생활에서 상대를 믿어준다는 것으로 많은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 믿어야 할 때 믿지 못함으로 서로의 불신을 야기한다. 아내와 남편이 서로 믿어 주지 아니하여 갈등이 생기고 부모가 자식을 믿어 주지 못해 올바른 성장을 방해하기도 한다.
‘믿음’ 쉬운 것 같지만 쉽지 아니한 것인가 보다. 이후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아브람이 약속했던 이 믿음을 저버림으로 불행과 고통을 자초한다. 믿음의 배신, 빈번한 계약의 위반 그것이 연약한 오늘날 인간의 모습이다.
그리스도교의 신앙적인 믿음이란 인간의 힘으로는 선택되어 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이다. 신에 대한 믿음이란 특히 유일신 종교에서 핵심이 되는 사상이다. 불교나 유교 등은 믿음으로 부처가 되거나 해탈이나 도를 얻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여러 말씀에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하셨다. 구약에서의 믿음은 하느님의 자비로운 의지, 인간에 대한 계획, 다가올 미래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에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이때의 종교는 유태교의 처음 단계. 연구에 의하면 유태교의 초기적 교리라도 완성되는 단계는 에즈라의 율법 반포가 행하여진 기원전 6세기이다.)
성경은 하느님의 역사와 인간의 역사를 독특한 방식으로 기록한다. 독특한 방식이라 함은 하느님의 존재와 그 존재하심이 어떻게 인간의 역사에서 구체화 되는가를 인간의 역사를 통해 설명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구약성경의 독특함이다.
꼭 맞는 예는 아니지만 그리스 신화를 보면 신 자체에 대한 활동 기록이 있다. 제우스가 뷔너스를 만나고 또 신들이 모여 파티를 하고 이런 식이다. 즉 제우스가 어떤 인간을 만나야만 그 제우스가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존재성은 언제나 인간역사 속에서만 드러나고 이해된다. 그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이라 믿는 것이다.
탈출기(기원전 13세기 경)
창세기, 탈출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모세오경이라 한다. 이는 모세가 저술했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이 오늘날 성서적 견해이며 주류이다. (모세의 저술이라고 하는 학파나 종파도 있음)
탈출기부터 신명기까지 모세가 주인공이다. 모세와 하느님과의 만남, 이스라엘 백성을 이끄는 지도적 행위, 모세의 행적, 명령 등을 주로 기록한다. 물론 하느님과의 구체적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창세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스라엘 성조 아브람의 손자 야곱의 아들 요셉이 이집트로 팔려가고 어찌하다 이집트의 재상이 되고 그 덕에 야곱의 모든 아들과 손자 등 그 자손들이 이집트로 이민을 오게 된다. 성경은 당시의 야곱 가족의 총 인원수를 며느리들 빼고 66명이라 기록하고 있다. 이후 요셉의 죽음으로 창세기 50장은 끝이 난다.
야곱의 가족들은 처음에는 잘 대접을 받았으리라 보여진다. 왜? 재상의 가족이니까. 그러나 처음에도 아주 적극적인 대접은 받지 못했는데 기본적으로 이집트인들은 이스라엘인들을 야만인 취급하며 멸시했다. 요셉의 형제들이 이집트에 오자 요셉의 집에서 음식을 대접하는데 이집트인들은 멸시하는 마음으로 한 상에 같이 앉지도 않는다. 성경의 기록을 보자.(창세기 43장 32절)
"그들은 요셉에게 상을 따로 차려 올리고 그의 형제들에게도 따로 차려주고 요셉과 함께 먹는 이집트 사람들에게도 따로 차려주었다. 이집트 사람들은 히브리 사람들과 자리를 같이 해서 음식을 먹으면 부정을 타게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여기서 그들이란 요셉의 집에서 일하는 시종들로 보이는데 이 시종들마저도 당시의 히브리인들을 멸시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집트는 당시 최고의 문명을 구가하던 나라였다. 나일강의 풍요로움으로 농경업이 발달하고 오늘날까지도 남아있는 스핑크스나 피라미드와 같은 대 건축물을 기원전 2,500여년 전에 만들었던 고도의 문명사회였으니 이리저리 떠돌며 목축업을 하던 이스라엘인과는 비교가 안되었다.
당연히 선민의식이 있었고 이러한 인종 차별의 결과인지 오랜 시간이 지나자 야곱의 후손들은 이집트의 노예살이로 전락하게 된다. 이 스토리로 탈출기의 1장이 열린다. 학자들에 의하면 이 시기가 기원전 13세기라 한다.
그 노예살이가 어느 정도였을까? 여러 예가 있으나 대표적으로 모세 탄생과정의 전후에서 잘 드러난다.
영화 '십계' 등으로 비신자들도 잘 아시는 이야기이다. '모세'가 태어날 즈음 이집트 왕 '파라오'는 이스라엘인들이 너무 불어나자 그 힘이 너무 커져 반항하게 될까 걱정한다. 그래서 '모세'가 태어나던 시기쯤에 유아 사내아이를 다 강물에 익사시키라고 명령한다. 대 참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나찌의 유대인 학살과 비슷한 일이 3,300여년전 경에 벌어지는 것이다. 한 어머니가 이 참상으로부터 자기의 아기를 살리기 위해 왕골 광주리배를 만들어 나일강의 물결 속에 아기의 운명을 맡긴다. 이 아기가 '모세'이다.
이 '모세'가 어찌하다 공주의 양아들이 되고 40살이 되고 어찌하다 살인죄를 저지르고 미디안으로 도망가 살다 또 40년이 흘러 하느님의 부름 즉 고통 받는 내 백성을 구하라는 사명을 받는 것이다.
'모세'를 통한 하느님이 이끄시는 이집트에서의 탈출 여정의 이모저모를 담은 기록이 탈출기이며 여기에서 나타나는 하느님의 구원 역사 즉 하느님이 이끄신다는 것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성서의 바른 이해이며 바른 신앙이라 할 수 있다.
'야곱'과 그 후손들이 이집트로 이주 후 모세의 지도에 의해 이집트를 탈출할 때까지 성경적 해석에 의하면 약 400여년의 세월이 지난다. 이 400여년 동안 유대인들은 하느님을 잊고 산다. 유대인들만 잊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도 잊으셨다.
주요한 구절이므로 그대로 옮겨 보자.
“그 뒤 오랜 세월이 흘러 이집트의 왕이 죽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고역을 견디다 못하여 신음하며 아우성을 쳤다. 이렇게 고역에 짓눌려 하느님께 울부짖으니 하느님께서 그들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과 맺으신 계약을 생각하시어 이스라엘 백성을 굽어살펴 주셨다.”(탈출기 2장 23-25절)
이 성경 맥락은 이렇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간 하느님을 한번도 찾지 아니한 것이다. 하느님을 찾았다면 그 소리를 못 들을리 없으셨다. 고통이 극에 이르자 울부짖음으로 찾은 것이다.
하느님은 무소식이 희소식이야^^ 잘 살고 있겠지 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는 말이다. 어떻게? 울부짖음으로 찾으니. 비로소 응답하셨다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세상사로 고통이 닥친다면 울부짖어야 할까? 평소에 잘 해야 할까?
'요셉' 이후 400여년간 성경에 자손들 족보가 나오기는 하지만 하느님과 인간의 구체적 관계 기록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요셉 이후 모세까지의 기간이다. 일종의 신앙의 휴지기라 할 수 있다. 결론은 인간들이 하느님을 잊었다는 것이다. 잊기만 한 것이 아니라 다른 신 우상을 섬겼다. 그 다른 신이 태양신이나 바알신이다.
(모세의 족보: 야곱의 아들 레위, 레위의 아들 크핫, 크핫의 아들 아므람, 아므람의 아들 모세)
긴 휴지기 이후 이제 하느님은 성조들과 약속한 자손인 이스라엘인들로부터 각종 우상 주로 바알신을 떼놓기 위한 긴 싸움이 시작되고 이 싸움은 그들에게는 때로는 고통이 되고 희망이 된다. 신명기까지의 신앙적 핵심은 하느님을 올바로 알고 믿고 공경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느님을 믿지 않고 경배하지 않으면 벌이 내리고 우상을 섬기면 그 벌은 가중된다는 것이다. 이는 전체 구약의 핵심이 되는 신앙적 가르침이다.
특히 이 오경의 이 많은 율법은 하느님을 향한 믿음과 공경을 가르치고 또 생활화하기 위해 제정되는 법이다. 이는 마치 신병훈련소의 훈련처럼 엄하고 혹독하다. 당시의 이스라엘인들이 하느님의 신앙관에서 신병같은 초보였음을 알 수 있다.
구약의 전체 역사에 바알신과의 대립은 자주 등장한다. 엘리야가 바알의 사제들과 대결하는 장면이 압권인데, 바알 사제 450명과 엘리야 홀로 대결하는 장면은 그 비장함을 넘어 바알교가 이스라엘 사회에 얼마나 만연되었는지를 보여준다.(열왕기상 18장 20- 39절) 엘리야는 기원전 9세기 북왕국에서 활동하던 예언자이다. 이집트 탈출이 기원전 13세기 말경이므로 무려 400년이 지나도록 이 지긋지긋한 우상숭배는 근절되기는 커녕 더 번성했던 것이다.
이 탈출기부터 이제 어린 백성은 하느님을 처음부터 배우고 그 무한한 존재를 깨달아가는 긴 여정이 시작된다.
모세의 등장은 이집트에서 노예 살이 하던 이스라엘인들에게는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구원의 선물이며 희망의 메시지이다. 하느님은 모세와 그 옛날 아브라함과 맺은 동일한 성격의 계약을 맺는다.
‘갑’인 하느님 대물은 역시 땅이다. 무슨 땅? 그들의 고향땅이며 성조가 살던 가나안땅이다. ‘을’인 이스라엘인의 대물은 ‘나 이외의 신을 섬기지 못한다.’ 즉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다. 모세를 대표로 하여 이스라엘인과 맺는 계약이지만 훗날 예수님을 통하여 전 인류와 은총으로 승화되어 완성된다.
이집트 탈출에서부터 요르단강 건너까지 도착하는 여정의 기록이(거리는 약 600~700Km이며 시간은 40여년) 탈출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이다. 끝내 모세는 그토록 갈망하던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120세를 일기로 모압땅에서 죽는다. 요르단강을 건너지 못하는 것이다. 모세의 죽음으로 신명기도 끝이 난다.
여기서 이 성서 표지의 정확한 뜻을 살펴보자. 상당수의 신자님들이 이 정확한 뜻을 잊거나 모름으로 구약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탈출기’란 그 이름이 말하듯 이집트 탈출의 기록이다. 탈출의 배경이 되는 이집트의 혹독한 노예 생활과 모세의 탄생 그리고 이집트 탈출로부터 ‘시나이산’까지 여정 중 일어난 여러 기록이다.
‘레위기’는 야곱의 열 두 아들이 이스라엘의 지파를 형성하는데 아내‘레아’에게서 낳은 셋째 아들 ‘레위’의 후손들 족보에 속한 이들을 ‘레위지파’라 한다. 레위지파에게 제사를 돕는 임무가 주어진다. 주로 제사법을 기록했다.
‘민수기’는 국민의 숫자를 말한다. 탈출 이후 광야에서 두 번의 총 인구조사와 레위인들만을 대상으로 세 번의 인구 조사를 한다, 이 인구조사를 할 당시의 여러 기록이다.
‘신명기’를 가장 햇갈리는데 신의 명령이라고 잘못 알고 있기도 하다. 거듭 신자를 써서 거듭 명령한다는 뜻이다. 누가? 모세가 하느님의 지시를 받아서 앞서 한 여러 율법을 다시 강조하고 보강한다.
유일신 하느님과 태양신, 바알신의 전쟁
앞서 필자가 오랫동안 하느님을 잊고 살았던 이스라엘 민족이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약 500년 가까이 잊고 살았던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하느님은 처음부터 다시 교육해야 했다. 어떻게 보면 이 교육과정의 기록이 모세오경이다.
먼저 모세의 교육이다. 이 모세는 80세가 되기까지 약간의 민족적 연대심은 있었겠지만 하느님을 알지 못했다. 하느님이 모세에게 처음 나타나시어 “내가 하느님이다.” 이렇게 말하지 않고 “내가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이다.” 라 말씀하심을 오늘 식으로 옮겨보면 이런 것이다.
하느님이 불꽃이 이는 떨기나무에 나타나시자
모세: 앗! 할아버지는 누구세요?
하느님: 나! 나는 니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인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이 잘 따르고 존경했던 존재야! 그러면 니가 알아서 잘 모셔야지.
하느님의 존재에 무식했던 모세에게 조상을 들먹이지 않고는 설명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더 먼 조상인 이른바 성조인 '아브람'의 손자 '야곱'의 아들인 "유다'의 시기에도 바알신의 신전이 곳곳에 있었고 '유다' 역시 바알신을 섬긴 듯한 기록이 보인다. 유다와 며느리의 관계에서 며느리가 신전의 창기로 변장하고 시아버지 유다를 유혹한다. 당시의 풍습으로 남편의 대를 잇기 위해서이다. 이 신전이 바로 바알신의 신전이다. 유다가 바알신과 전혀 관계가 없었다면 바알교의 신전 창기와 관계할 수 없다. 이 풍습 역시 훗날 모세가 제정하는 유태교의 율법과는 어긋난다.
아브라함의 증손자인 유다도 하느님을 올바로 정립하지 못했는데 모세에게 하느님을 설명한다는 것은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이에게 글을 가르치려 하는 격이다.
민족의 구원이라는 사명 또는 하느님에게는 아브람과 약속한 땅으로의 복귀 임무를 맡기는 날 모세가 하느님께 물었던 질문을 보면 하느님을 모르는 모세의 신관이 잘 드러난다. 성경의 구절을 그대로 보자. (탈출기2장 13-15)
모세가 하느님께 아뢰었다. "제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서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고 말하면 그들이 '그 하느님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어떻게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곧 나다." 하고 대답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분은 '나다.' 하고 말씀하시는 그분이라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러라."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다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일러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선조들의 하느님 야훼시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시다.' 이것이 영원히 나의 이름이 되리라. 대대로 이 이름을 불러 나를 기리게 되리라.
야훼라는 이제가지 사용하지 아니한 하느님의 또 다른 지칭을 알려주신다.
모세는 이름을 물었다. 이름을 묻는다는 것은 모세에게는 유일신적 신관이 없었다는 말이다. 이름이 무엇인가. 비슷한 것과 구분하기 위해서이다. 오직 하나로 유일하다면 이름은 필요하지 않다. 구분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버지 어머니는 오직 한 분만 계신다. 우리가 아버지나 어머니를 부를 때 ‘길동이나 ‘순자’라 부르지 않고 지칭인 아버지를 부르면 된다. 아버지의 이름이 필요할 때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필요한 것이지 그 자식에게는 필요치 않으며 오히려 이름을 부르면 욕을 먹게 될 것이다.
하느님은 "나는 곧 나다." 라고 하심으로써 유일한 신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야훼라는 말은 존재한다는 뜻이며 구분하자면 하느님을 너희들은 이렇게 부르면 된다며 친히 알려 주신 지칭적 이름이라 말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라 부르면 된다고 하셨음을 기억하자)
과월절의 의미
이집트에 내리는 열 번의 재앙을 통해 결국 이집트 왕 파라오는 민족의 이동을 허가한다.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은 모든 맏배의 죽음이다. 동물이건 사람이건 관계없이 이집트 땅의 모든 맏이 죽는 것이다. 죽음은 돌이킬 수 없다. 강물의 피는 정화될 수 있고 등애나 메뚜기는 사라짐으로 이집트인의 고통은 복원된다. 돌이킬 수 없는 죽음 맏배의 죽음으로 파라오와 이집트인 모두가 제발 떠나달라고 절규한다.
맏배의 죽음으로부터 이스라엘인을 보호하는 장치가 흠 없는 숫컷 양이나 염소의 피다. 기독교 신학을 관통하는 후일 주님의 희생과 대속의 성사적 표지가 되는 ‘양의 피‘가 등장한다.
이 ‘양의 피’를 유태인들은 문설주와 문 상인방에 발라 죽음의 재앙을 넘어가게 한다. 하느님께서 이 표시를 보고 그냥 지나쳐 이스라엘인의 맏배가 죽음을 면하는 이 사건을 기념하는 것이 ‘과월절’이다. 통과한다는 과와 추월할 때의 월자를 사용 넘어 지난다. 는 뜻을 지닌 한자어로 ‘과월절’이다.
‘유월절‘이라고도 하는데 ‘넘을 유’자이다. 하느님이 유태인의 맏배를 보호하시고 탈출의 전기가 된 이 날을 오늘날 유태인들은 7일간의 축제로 성대히 기념한다. 일종의 독립기념일이다.
가톨릭은 예수님의 과월절 식사가 최후의 만찬이 되시면서 예수님 스스로 ‘어린 양’ 이 되어 인류의 죄를 대신하시고 부활하셨음을 기념한다.
하느님이 이집트에 내리는 열 가지의 재앙은 태양신을 믿는 이집트인에는 재앙이 되고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하느님이 유일신임을 깨닫고 믿게 하는 학습자료로 작용한다. 이 학습을 통해 당시의 이스라엘인들은 차츰 유일신임을 믿고 고백한다.
결국 이집트를 나오게 되지만 당시의 이스라엘인들이 유일신으로 하느님을 100퍼센트 받아 들이지 못하고 의심하는 계약위반이 이후 여러 기록에서 나타난다. 이 의심의 죄로 약속의 땅으로의 귀환길이 40년이나 걸리는 것이다. 40년이라 함은 하느님의 능력을 의심한 당 세대의 모든 이들이 가지 못하는 단체적 벌을 의미한다. 결국 의심하지 아니한 여호수아가 요르단 강을 건넌다. 이 의심과의 기나긴 싸움은 현대인에게도 2015년 오늘까지 여전히 진행형이다.
탈출기는 표면적으로는 이집트로부터의 탈출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우상으로부터 유일신이신 야훼 하느님으로 귀환하는 빛을 향한 탈출기이다.
탈출기의 극적인 사건은 증언판을 받는 것이다. 처음 증언판은 불행히도 바알교의 우상 금송아지를 부수는데 사용되다 부서지고 만다. 이후 십계판이라고 불리는 증언판을 재차 받는다. 이 증언판을 보관한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고 안팎을 순금으로 입힌 상자가 계약궤이다.
이 계약 궤는 여호수아가 요르단강을 건널때 물의 흐름을 멈추게 하고 가나안 족의 예리코성을 무너뜨리는 힘을 발휘한다. 예리코성의 함락시에 이스라엘인의 정탐병을 숨겨준 창녀 라합의 이야기는 이 숨막히는 전쟁의 이야기를 더욱더 드라마틱하게 한다.
레위기
레위기의 레위는 야곱의 열 두 아들 중 한 지파의 이름이다. 이 지파는 제단의 예식을 돕는 역할을 맡는다. 즉 사제를 도와서 제사준비를 하고 여러 가지 봉사를 하는 이들을 말한다. 에즈라시대에 가면 레위의 위상이 높아져 사제와 동등하게 되기도 하지만 오경의 레위기에서는 사제를 도와주는 역할을 했다. 레위기는 여러 제사 방식과 이 제사의 도움을 맡은 레위의 역할과 일반 유다인들의 예식법들을 서술한 책이다. 레위기는 제사방법의 교본인 셈이다. 모세는 성경에 의하면 레위의 4대 손이다.
레위기에서는 여러 제사 방식이 소개된다. 그 중에 하나가 번제이다. 번제는 재물을 태워 연기를 피우는 방식의 제사이다. 오늘날의 향 태움과 같은 것이다. 연기는 하늘로 올라간다. 즉 주님께서 주신 것을 다시 그 분께 올려드린다는 의미이다.
레위기의 배경연대는 탈출로부터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이전 광야생활 때이다. 앞서 필자는 모세오경은 하느님을 깨달아 가는 과정이라고 한 바 있다. 물론 하느님을 깨닫는 과정이 오경에서 끝나는 것은 아니지만 오랜 세월 잊었던 민족에게는 처음부터 시작하는 그런 과정을 필요로 했을 것이므로 세밀한 의식이 필요했을 것이다.
레위기에 등장하는 제사방식은 오늘날의 제사 즉 전례에서는 사라진 것이다. 오늘 우리의 시각으로 당시를 규정할 수 없다. 이 시대는 이집트를 탈출하고 광야를 헤매는 극한적 상황 과정 중에서 하느님을 새롭게 깨달아 가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이리저리 중구난방한 이들을 교육하려면 매우 세밀한 의식적 절차가 필요했을 것이다. 또한 제사 의식을 고정된 건축물이 아닌 성막이라 하는 이동식 제단에서 드리는 상황을 상상해보자.
그러나 사실은 이 시대에 그런 제사법이나 여러 율법들이 전부 있었다기보다는 후대에 과거에 그렇게 했다고 첨가하고 또 다른 이가 첨가하고 해서 방대해졌다는 해석이 현대 신학계의 주류이다.
성막은 이동식 대형천막이다. 탈출기 30장에 자세히 나오는데 천막을 조립했을 때 길이 45미터 너비 22미터가 된다. 너비 22미터를 그대로 이동했을 수 없음으로 이동시에는 작은 여러 묶음이었을 것이다. 이 성막의 관리 책임은 레위가 맡았다.
레위기에 흐르는 신학적 주제는 무엇일까? 거룩함이다. 제사도 거룩하게 지내기 위해 번제물도 흠없는 숫컷이어야 되고 곡물제를 드릴 때 역시 아주 고운 곡물이어야 한다. 왜 하느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이며 거룩한 하느님으로 너희가 모셔야 너희 역시 거룩해 진다는 것이다. 번제물은 태워 연기를 피우는 재물이라는 뜻이며 ‘사를 번' 자를 쓴다.(Holocaust)
이것을 보고 모세가 아론에게 일렀다. "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내 가까이에서 나를 섬기는 자들에게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리라. 온 백성 앞에 나의 위엄을 나타내리라.'" 아론은 다만 입을 다물고 있었다. (레위기 10장 3절)
제사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부정한 것을 먹지 못했다. 레위 11장에 보면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먹을게 별로 없을 정도이다. 낙타, 오소리, 토끼, 돼지,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물고기, 솔개, 까마귀, 타조 쏙독새, 갈매기, 매, 등 네발로 걸으면서 날개 달린 벌레 등 도마뱀, 육지 악어, 캬멜레온 등 인데 이 동물의 시체가 옷에 닿기만 하여도 안된다는 것이다. 아예 근처도 가서는 안되는 것이다. (레위기 11장 43-45)
이 핵심은 너희의 거룩함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구절도 있다. 악성 피부병에 걸린 환자의 격리규정, 생리 중 여인의 격리 규정, 계집의 출산시 남아 출산보다 더 긴 정결기간 등 이루 셀 수 없을 만큼 규정이 많은데 이 모든 규정의 결론은 부정을 멀리하는 거룩함이다.
이 거룩함을 통하여 하느님과 인간은 이제 새롭고 성스럽게 만나고 깨달아 가야 한다는 것이 레위기의 신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