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2021. 11. 14
13. 三歸 삼귀
今旣懺悔已 與善知識 授無相三歸依戒 大師言 善知識 歸依覺兩足尊 歸依正離欲尊 歸依淨衆中尊 從今已後 稱佛爲師 更不歸依餘邪迷外道 願自性三寶 慈悲證明 善知識 惠能 勸善善知識 歸依自性三寶 佛者 覺也 法者 正也 僧者 淨也
금기참회이 여선지식 수무상삼귀의계 대사언 선지식 귀의각양족존 귀의정리욕존 귀의정중중존 종금이후 칭불위사 갱불귀의여사미외도 원자성삼보 자비증명 선지식 혜능 권선선지식 귀의자성삼보 불자 각야 법자 정야 승자 정야
지금 이미 참회하기를 마쳤으니 선지식들을 위하여 '무상삼귀의계(모양이 없는 삼귀의계)'를 주리라.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선지식들아, '깨달음의 양족존께 귀의하오며, 바름의 이욕존께 귀의하오며, 깨끗함의 중중존께 귀의합니다.
지금 이후로는 부처님을 스승으로 삼고 다시는 삿되고 미혹한 외도에게 귀의하지 않겠사오니, 바라건대 자성의 삼보께서는 자비로써 증명하소서'하라.
선지식들아, 혜능이 선지식들에게 권하여 자성의 삼보에게 귀의하게 하나니, 부처란 깨달음이요 법이란 바름이며 승이란 깨끗함이니라."
♧ 네이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三歸依 삼귀의>
* 정의 :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의례. 佛 法 僧 三寶에 돌아가 의지하는 의식.
* 내용 : 三歸禮, 三歸戒라고도 한다. 삼귀의는 불교의 어떤 의식에서나 필수적으로 가장 먼저 행해진다.
'歸依佛兩足尊'은 부처님이 이 세상에서 가장 높으며, 대원(大願)과 修行, 福德과 지혜를 함께 갖추었으므로 돌아가 의지한다는 뜻이다.
'歸依法離欲尊'은 불법이 일체의 허망됨과 욕심은 떠난 청정한 법이므로 돌아가 의지한다는 뜻이다.
'歸依僧衆中尊'은 僧이 일체의 대중 가운데서 가장 존귀한 존재이므로 돌아가 의지한다는 뜻이다.
신라의 원효는 그의 <대승기신론소>에서 삼귀의를 더욱 강조하여 '歸命三寶'로 이름을 붙이고 이를 상세히 설명하였다.또,
고려 말기의 나옹은 '自心三寶'에 귀의할 것을 강조하였다. 나옹은 귀의를 '허망을 버리고 진실을 가지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또한 나옹은 항상 분명히 깨달아서 虛明靈妙하고 天然 그 자체로서 조그마한 조작도 없는 것을 '自心佛寶', 탐애를 아주 떠나서 잡념이 생기지 않고 마음의 광명이 시방세계를 비추는 것을 '自心法寶', 청정하여 더러움이 없고 한 생각도 생기지 않으며 과거와 미래가 끊어지고 홀로 드러나 당당한 것을 '自心僧寶9'라고 정의하였다.
삼귀의례가 귀의의 대상을 외부에다 둔 他力信仰의 성격을 가진 것인 데 대하여, 나옹의 자심삼보는 자기의 마음을 삼보로 삼아 스스로 깨우쳐 간다는 自力信仰에 근거를 두고 있다.
♧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고전용어사전
<兩足尊>
부처님을 이름. 兩足은 두 가지 일이 족한 것이니, 부처님은 복덕과 지혜의 둘을 다 다 만족하게 갖추고 계시므로 이를 갖춘 가장 높의신 분이란 말. 또 부처님은 두 발(兩足)을 가진 이 중에서 가장 높은 이란 뜻. 兩足仙, 二足尊이라고도 함.
♤ 松溪 小註
佛, 부처님은 복덕과 지혜가 완전한 분이라서 과거 현재 미래의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분이시란 '귀의불양족존'은 불교 승려들과 신자라면 의당하게 여긴다. 불교는 어디까지나 종교이다. 아무리 불교 교리가 심오하다고 해도, 아무리 반 또는 비 불교적이라고 해도 모두 부처님 손바닥 안이다. 석가모니도 수행 도중에는 독각승이었지만 득도한 후부터는 많은 제자들과 신도들이 따르게 되면서 부지불식간에 교단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교단이 형성되자 체계와 질서가 필요했다. 이후 수백 수천 년 세월이 흐르면서 한 지역을 넘어 더 넓은 세계로 전파된 불교는 더욱 견고한 조직체계를 갖추게 되었고, 승려들도 상중하 위계질서를 확립하게 되었다.
화두 중에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가 있다. 그런데 화두로는 성립하지만 실제 현실 불교 교단에서는 금기일 것이다. 그러나 석가모니가 되기 전 싯다르타 시절은 철저한 독각행이었다. 그렇지만 왕자 출신 승려라는 후광과 득도의 경지가 높다는 인정을 받으면서 석가모니로 차원을 달리하게 되었다. 석가모니가 제자들과 신도들을 가르칠 때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석가모니는 자기가 열반한 이후에 신이 되어 숭상받으리라고 생각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석가모니가 잠시 현세에 내려와 불교 교단의 모습을 본다면, 내 정신을 잘 구현하고 있다고 생각할까 가사 입은 도적들이 날 팔아먹으며 호의호식 하고 있다고 생각할까.
두 번째 '귀의법이욕존'은 인간으로서의 물질욕구를 완전히 벗어나 무색무취의 경지를 걷는 것은 불법뿐이라는 대단한 자부이자 자만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불법말고도 수많은 종교와 사상, 학문이 있어 인간으로 하여금 지나친 물질욕구에 집착하지 말고 청정무구한 마음으로 한 생을 살아가라는 가르침을 준다.
세 번째 '귀의승중중존'은 불교의 승려라면 당연히 갖는 자부다. 그러한 자부는 어느 종교나 마찬가지다. 불교 신자라면 승려를 존중하고 잘 모심이 의당하다. 승려들은 신도들의 존경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자부가 지나쳐 자만심으로 가득하여 신도들을 하대해선 안 된다. 하루 의식주가 신도들로부터 나왔음을 항상 고맙게 생각하여 용맹정진해야 한다. 그런데 승려답지 못하면서 대접을 받으려고 하는 자들이 바글바글 한 게 문제다.
나옹이 '자심삼보'를 강조한 까닭은 불교가 지나치게 신도, 중생구원 쪽으로 흘러 종교성만 강조됨을 경계했기 때문일 것이다. 불교는 원래 자력종교이다. 신도들이야 승려들에 의지하여 부처님의 가피를 받아 복덕을 누리며 수명을 길게 함을 목표로 하여 불교를 믿지만, 승려들은 연각의 태도로 불교 본연의 정신을 불태우며 옹맹정진해야 한다.
종교의 양면성, 독각과 설법은 숙명이다. 도통한 스님이 있다는 소문이 얼마나 빠른지 순식간에 온 골에 중생들이 운집한다. 득도한 자로서 그런 중생들을 어찌 외면할 것인가. 친견을 하고 설법을 하다보면 종파가 형성되고 발전하여 교단이 된다. 이것을 일러서 중생구제라는 미명으로 분식하지만, 득도하고 독각을 이으며 조용히 음미할 시간이 없다. 그러다보면 득도가 늑슬어 흐물흐물해진다.
42. 2021. 11. 20
13. 三歸 삼귀 (2)
自心 歸依覺 邪迷不生 少欲知足 離財離色 名兩足尊 自心 歸正 念念無邪故 卽無愛著 以無愛著 名離欲尊 自心 歸淨 一切塵勞妄念 雖在自性 自性 不染著 名衆中尊 凡夫 不解 從日至日 受三歸依戒 若言歸佛 佛在何處 若不見佛 卽無所歸 卽無所歸 言却是妄 善知識 各自觀察 莫錯用意 經中 只卽言自歸依佛 不言歸他佛 自性 不歸 無所歸處
자심 귀의각 사미불생 소욕지족 이재이색 명약족존 자심 귀정 념념무사고 즉무애착 이무애착 명이욕존 자심 귀정 일체진로망념 수재자성 자성 불염착 명중중존 범부 불해 종일지일 수삼귀의계 약언귀불 불재하처 약불견불 즉무소귀 즉무소귀 언각시망 선지식 각자관찰 막착용의 경중 지즉언자귀의불 불언귀타불 자성 불귀 무소귀처
자기의 마음이 깨달음에 귀의하여 삿되고 미혹이 생기지 않고 적은 욕심으로 넉넉한 줄을 알아, 재물을 떠나고 색을 떠나는 것을 양족존(복덕과 지혜를 두루 갖춘 부처)이라고 하느니라. 자기의 마음이 바름으로 돌아가 생각마다 삿되지 않으므로 곧 애착이 없나니, 애착이 없는 것을 이욕존이라고 한다. 자기의 마음이 깨끗함으로 돌아가 모든 번뇌와 망념이 비록 자성에 있어도 자성이 그것에 물들지 않는 것을 중중존이라고 하느니라. 범부는 이것을 알지 못하고 날이면 날마다 삼귀의계를 받는다. 그러나 만약 부처님에게 귀의한다고 할 때는 부처가 어느 곳에 있으며, 만약 부처를 보지 못한다면 곧 귀의할 바가 없느니라. 이미 귀의할 바가 없으면 그 말이란 도리어 허망할 뿐이니라.
선지식들아, 각자 관찰하여 그릇되게 마음을 쓰지 말라. 경의 말씀 가운데 "오직 스스로의 부처님께 귀의한다." 하였고, 다른 부처에게 귀의한다고 말하지 않았으니, 자기의 성품에 귀의하지 아니하면 돌아갈 바가 없느니라.
♧ 인터넷 강연 자료
* 네이버열린연단 ㅡ 문화정전ㅡ 동아시아문명의 정전 ㅡ 8강 육조단경. 인경스님 강연
* 네이버열린연단 ㅡ 패러다임 ㅡ 주제/철학, 사상 ㅡ 1강 혜능, 동아시아 불교의 탄생.
* 네이버열린연단 ㅡ 교양서20 ㅡ 02.동양사상 ㅡ 전등록. 김호귀 박사 강연
♤ 송계 소주
'사미불생 소욕지족 념념무사 즉무애착 자성불염착' 까지는 수신론, 수행론이다. 이 수신 수행은 어느 종교에서나 기본적으로 제시하는 가르침이다. 종교치고 악을 가르치는 데는 없다.
후반부는 '자귀의불'을 말한다. 그런데 앞의 '각자관찰 막착용의'는 이중의 의미를 갖는다. '귀타불' 하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 생각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자기 생각은 '자기관찰'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혜능은 '각자관찰'이 '그릇되게 마음을 쓰는 경우'가 더 많으므로 금지하도록 한다.
혜능의 요지는 '자성귀의'이다.자성을 관찰하고 그 본질을 깨달으라고 한다. 즉 쓸데없는 데에 노력을 허비하지 말고 자성을 깨닫는 데만 집중하라고 말한다.
'견성오도'는 혜능이 일으킨 선불교의 중심 교지이다. 그런데 이후에 대한 답이 아직 제시되지 않고 있다. 돈오하여 부처가 되고 난 다음에 어떻게 하는가. 돈오하여 세상의 모든 욕망과 아집으로부터 탈출하여 '거룩한 사람'이 되었으니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남은 생을 편하게 살다 죽는 것인가? 아니면 불승들과 세인들을 찾아다니며 내가 깨달은 바를 가르쳐야 하는가. 후자를 '화하중생'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선불교가 아닌 대승불교의 논리이다.
원효는 오도한 후에 불승으로서의 품위와 권위를 버리고 중생 속으로 걸어들어 갔다. 그 앞에는 '대안스님'의 만행이 있었다.
네이버 열린 연단에서 사회자인 교수가 한 말이 오래 남는다. "현대사회에서 선불교가 견성오도를 목표로 삼아 자기 완성에 집착하기만 하고, 중생과 사회에는 무관심한 경향이 있다."
한반도에서 선불교가 시작된 때는 신라 말기 혼란한 시대였다. 승려들이 군웅이 할거하며 패권을 다투는 혼란한 시대에 아무리 유식하고 유덕한 승려라 할지라도 화하중생의 길에 들기가 두려웠을 것이다. 그러니 은둔하여 자기만 만족할 수 있는 중국의 선불교가 성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조선시대 역시 척불정책 때문에 중생사회에 들어갈 수 없으니 자기 만족의 선불교가 승려들의 주무가 될 수 없었다.
현대사회에서 선불교와 정토불교 등은 어떤 생각과 태도를 가져야 할까. 견성오도도 중요하고 화화중생도 중요하다. 현대인들의 지식 수준은 매우 높다. 그래서 엔간한 불교 교리는 지해하고 있다. 그러나 바쁜 일상생활에 파묻혀 자기 자신의 본성을 조용히 관찰할 여유가 없다. 그런 면에서 선불교가 명상법이나 좌선 등으로 현대인이 자아를 사색하는 데에 유효할 것이다. 그러면서 사회적 네트워크, 즉 불교 모임 연대를 통해 사회적 활동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방향으로 현대불교가 운동하고 있는 모습이 곳곳에서 보이고 있다.
견성오도에는 매우 긴 시간이 필요하다. 혜능이 돈오돈수를 말하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선 긴 시간이 소요된다. 그 긴 시간이 곧 점수점오다. 상근기인 혜능 역시 유년기나 소년기에 견성오도 한 게 아니다.
혜능이나 성철 등 상근기들이 돈오돈수만을 주장하며 점오점수나 돈오점수 등을 아래로 보고 배척하는 것은 지적 오만이다. '견성'에서 무엇을 보는가. 본성에 덕지덕지 붙은 탐진치를 씻어내고 해맑은 본성을 보존함이 아닌가. 그 '해맑은 본성' 속에 '오만'이 들어 있는가?
진짜 '견성오도'는 물과 같다. 온데 스며들면서도 가장 낮은 곳으로 향한다. 오만이 스며있는 견성오도는 집착의 결과이다. 하루종일, 장좌불와 십수 년 면벽좌선이 거대한 집착일 수도 있다. 이런 면에서, 고승열전 소개문에 "토굴에서 십년 장좌불와하고..." 등은 미사여구일 수도 있다. 무엇을 얻었는가? 심중에서 뭉클뭉클 일어나는 욕망의 뿌리를 캐냈는가? 인간과 지구 그리고 우주의 원리를 보았는가? 그래서 어떻게 하겠는가?
'나는 견성오도 했다' 자부하며 대접받기를 바라고, 중근기와 하근기를 하대하고 무시하는 자는 가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