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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존(金仁存)은 자가 처후(處厚)이고 처음 이름은 김연(金緣)이며 신라(新羅)의 종실(宗室)인 각간(角干) 김주원(金周元)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김상기(金上琦)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시랑평장사(侍郞平章事)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고 선종(宣宗) 묘정에 배향되었다.
김인존(金仁存)은 성격이 총명하고 민첩하여 어려서 과거에 급제하여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다. 선종(宣宗)·헌종(獻宗)·숙종(肅宗)의 세 왕을 차례로 섬겼으며, 내시(內侍)로 임금에게 아뢰는 일을 담당하였다. 왕과 가까운 자리에 있기를 원하지 않고 외직(外職)에 보임되기를 간절히 원하여, 상서예부원외(尙書禮部員外)를 거쳐 개성부사(開城府使)가 되어 나갔고 임기가 다하자 기거사인 지제고(起居舍人 知制誥)의 벼슬을 받았다. 기거랑(起居郞)으로 승진하였으나 언사(言事)가 임금의 뜻을 거슬러, 병부원외랑(兵部員外郞)으로 좌천되었다.
요(遼)의 사신 학사(學士) 맹초(孟初)가 이르자 김인존(金仁存)이 접반사(接伴使)가 되었는데, 맹초는 그의 나이가 어려 보여 자못 쉽게 여겼다. 일찍이 어느 날 함께 말고삐를 나란히 하여 교외로 나갔다. 내리던 눈이 비로소 개이자 아득하게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고, 다만 말발굽이 땅에 닿아 소리를 내고 있었다. 맹초가 읊기를, “말발굽이 눈을 밟으니 마른하늘에 천둥이 치네.”라고 하자, 김인존이 곧바로 응답하여 말하기를,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니 세찬 불길이 타오르네.”라고 하였다. 맹초가 몹시 놀라 말하기를, “진실로 천재로다.”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깊은 정이 날마다 돈독하여 서로 창화(唱和)하였고, 헤어질 때에는 금대(金帶)를 풀어 김인존에게 주었다.
〈김인존은〉 이부낭중 겸 동궁시강학사(吏部郞中 兼 東宮侍講學士)로 자리를 옮겼다. 예종(睿宗)이 동궁(東宮)에 있을 때 『논어(論語)』를 강론(講論)하였는데, 김인존이 『논어신의(論語新義)』를 찬술하여 진강(進講) 하였다.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 이동하였다.
숙종(肅宗)이 훙서하자, 김인존(金仁存)이 고애사(告哀使)로 요(遼)에 갔다. 동경(東京)에서부터 〈요의〉 서울에 이르기까지 지나가는 주(州)와 부(府)에서 모두 연회를 베풀고 음악을 연주하였다. 김인존이 말하기를, “신이 올 때 본국의 군신(君臣)이 모두 상복을 입고 소리 내어 울고 있었습니다. 지금 상국(上國)에 왔는데, 비록 은혜를 입는 영광은 감사하지만 신하가 된 자의 정리(情理)로 음악을 듣는 것은 차마 하지 못하겠습니다.”라 하였다. 말이 지극히 정성스럽고 극진하니 요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허락하였다. 황제를 알현할 때에 이르러서도 또 길복(吉服)을 입는 것과 무도(舞蹈) 절차를 없애주기를 청하니, 맹초(孟初)가 막사에 이르러 말하기를, “전정(殿庭)에 들어가는 복색(服色)은 마땅히 길복을 따라야 하지만, 다만 무도를 하지 않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라 하였다. 돌아오니 예부시랑 간의대부(禮部侍郞 諫議大夫)에 임명되었다.
왕이 승려 담진(曇眞)을 왕사(王師)로 책봉하기 위하여 김인존(金仁存)을 봉숭사(封崇使)로 삼으니 〈김인존이〉 사양하여 말하기를, “신의 직분은 간원(諫院)에 있어 이미 왕사를 책봉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아뢰었는데, 아직 왕의 승낙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또한 〈봉숭사가 되는 것을〉 따르게 되면 이는 전하를 속이는 것입니다.”라 하였다. 왕이 강력히 두세 번 권하였으나 굳게 사양하고 왕의 명령을 받들지 않으니, 내시(內侍) 유태수(柳台樹)로 대신하게 하였다.
왕이 장차 동여진(東女眞) 정벌하려 하자 대신들이 모두 찬성하였는데, 김인존이 홀로 상소하여 극력 간하였으나 〈왕이〉 대답하지 않았다. 윤관(尹瓘) 등이 여진을 격파하고 9성(城)을 쌓았는데, 여진이 〈자신들의〉 은신처를 잃어 해마다 와서 다툼을 벌이니, 우리 병사를 잃어버리는 일이 매우 많았다. 여진 또한 괴롭게 여겨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고, 옛 땅을 돌려줄 것을 애걸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논의하였으나 의견이 달라서 왕도 오히려 결정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으니 김인존이 말하기를, “땅이라는 것은 본디 민(民)을 기르는 것인데 지금 성을 다투다가 사람을 죽이니 그 땅을 돌려주고 민을 쉬게 하는 것이 낫습니다. 지금 〈그 땅을〉 돌려주지 않는다면, 반드시 거란과 틈이 벌어질 것입니다.”라 하였다. 왕이 그 까닭을 묻자 김인존이 말하기를, “나라에서 처음 9성을 쌓았을 때 거란(契丹)에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려, ‘여진의 궁한리(弓漢里)는 우리의 옛 땅이므로 그곳에 거주하는 민들도 역시 우리의 편맹(編氓)입니다. 〈그런데〉 근래에 변방을 노략질 하는 것이 많기 때문에, 수복하고 그 성을 쌓았습니다.’라 하였습니다. 표문에 말을 그렇게 하였으나 궁한리의 추장에는 거란의 관직을 받은 자가 많기 때문에 거란이 우리가 거짓말을 한다고 여겨서 회답하는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멀리서 글을 올려 일의 형편에 대하여 대략 아뢰었으나, 그 사이에 토지의 소속과 호구(戶口)의 귀속은 이미 담당 관리에게 칙서를 내려 자세히 조사하도록 하였으니, 순서대로 별도로 지휘(指揮)를 내릴 것이오.’라 하였습니다. 이로써 생각해보면 나라에서 9성을 반환하지 않는다면, 거란이 반드시 우리를 책망하고 꾸짖을 것입니다. 만약 동쪽으로는 여진에 대비해야 하고, 북쪽으로는 거란에 대비해야 한다면, 즉 신은 9성이 삼한의 복(福)이 아니게 되는 것이 두렵습니다.”라 하였다. 왕이 그렇다고 여겼다.
〈김인존은〉 비서감(秘書監)으로 승진하여 사명을 받들고 송(宋)에 가니, 휘종(徽宗)이 그들을 대접하는 것이 매우 정성스러워서 여러 차례 잔치를 하사하였는데, 잔치의 그릇은 모두 백옥(白玉)을 사용하였다. 김인존이 “황제가 우리나라를 정성스럽게 대접하여 잔치의 의례가 비록 평소와는 다르지만, 지금 상황을 본다면 화려하고 사치스러움이 너무 심하니 탄식할만하다.”라고 여겼다. 귀국하여 경원군(慶源郡)에 이르러 아버지의 부고를 듣게 되자 사신의 일은 아랫사람에게 부탁하고, 집으로 돌아가 아버지의 상을 치르느라 사신 다녀온 일을 보고하지 않으니, 당시 사람들이 그것은 예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비난하였다.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 병부·예부·호부상서(兵禮戶部尙書), 정당문학(政堂文學), 참지정사(叅知政事)를 지냈고 수사도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상주국(守司徒 中書侍郞 同中書門下平章事 上柱國)으로 승진하였다. 금(金)의 병사가 거란(契丹)의 주군(州郡)을 공격하여 거의 다 파괴하니 왕이 김인존을 판서북면병마사(判西北面兵馬使)로 삼아 군무(軍務)를 처리하게 하였다. 거란의 내원성자사(來遠城剌史) 상효손(常孝孫)은 〈성을〉 지키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주민(州民)을 이끌고 배를 타고 도망하였으며, 내원성(來遠城)·포주성(抱州城)의 2성은 우리에게 귀부(歸附)하였다. 김인존이 병사를 데리고 그 성을 차지하여 병장기와 물화(物貨)를 거두었는데 매우 많았으며, 드디어 압록강(鴨綠江)까지 지계(地界)를 넓혔다.
왕이 친왕(親王)과 양부(兩府)에게 청연각(淸讌閣)에서 잔치를 베풀고 김인존(金仁存)에게 명령하여 그 일을 기록하게 하였다. 그 글에 말하기를, “왕께서 총명하고 슬기로우며 독실하고 빛난 덕으로 유학을 숭상하시고 화풍(華風)을 사모하여 대궐[大內]의 옆, 연영서전(延英書殿)의 북쪽, 자화전(慈和殿)의 남쪽에 따로 보문각(寶文閣)과 청연각(淸讌閣)의 2각을 지으셨습니다. 하나에는 송(宋) 황제의 어제(御製)와 조칙(詔勑), 서화(書畵)를 모시어 걸어놓고 훈칙(訓則)으로 삼아 반드시 용모를 단정히 하고 절을 올린 연후에야 우러러 보았습니다. 하나에는 주공(周公)·공자(孔子)·맹자[孟軻]·양웅(揚雄) 이래 고금(古今)의 문서를 모아놓고 날마다 노사(老師)·숙유(宿儒)와 함께 선왕의 도(道)를 선양할 것을 토론하였으며, 항상 감추어두고 손질하며 쉴 때나 공부할 때나 〈항상〉 내놓지 않으니, 삼강오상(三綱五常)의 가르침과 성명(性命)·도덕의 이치가 사방에 가득 차 넘쳤습니다. 올해 여름이 지나자 태부 상서령 대방공(太傅 尙書令 帶方公) 신(臣) 왕보(王俌), 수태부 상서령 대원공(守太傅 尙書令 大原公) 신 왕효(王侾), 수태보 제안후(守太保 齊安侯) 신 왕서(王偦), 수태보 통의후(守太保 通義侯) 신 왕교(王僑), 수태보 낙랑후(守太保 樂浪侯) 신 김경용(金景庸), 문하시랑(門下侍郞) 신 이위(李瑋), 문하시랑 신 이자겸(李資謙)·신 김연(金緣), 중서시랑(中書侍郞) 신 조중장(趙仲璋), 참지정사(叅知政事) 신 김준(金晙), 수사공(守司空) 신 김지화(金至和), 추밀원사(樞密院使) 신 이궤(李軌),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신 왕자지(王字之),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신 한안인(韓安仁) 등을 불러 청연각에서 성대한 모임을 열었습니다. 이내 조용히 말하기를, ‘내가 돌이켜보건대, 나는 덕이 부족한데 하늘이 보살펴주어 강녕을 내려주시니, 종묘사직이 복을 누리었다. 전쟁[金革]은 삼변(三邊)에서 그쳤고, 문궤(文軌)는 중국[中夏]과 같으니, 무릇 정책을 세워 일을 하는데 크고 작은 것에 있어서 자품(資禀)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숭녕(崇寧)·대관(大觀)이래로 시설(施設)하고 조치함에 있어서 문각(文閣)·경연(經筵)에서 좋은 선비를 찾아 구하는 것은, 선화(宣和)의 제도를 따른 것이며, 깊숙한 곳 은밀한 자리에서 보신(輔臣)을 맞이하여 보는 것은 대청(大淸)의 잔치를 본받은 것이다. 비록 예의에는 차등이 있으나, 어진 사람을 우대하고 유능한 사람을 높이는 뜻에는 일치되는 것이다. 지금 진공사(進貢使)로 입조(入朝)했던 이자겸이 계향(桂香)·어주(御酒)·용봉명단(龍鳳茗團)·진과(珍果)·보명(寶皿)을 가지고 돌아오니, 기뻐서 경 등과 더불어 이 기쁨을 성대히 나누려 한 것이다.’라 하셨습니다. 신료들이 모두 황공하고 놀라 두려워하며 물러나 섬돌[階陛]에 엎드려, 고루한 자들로 감히 성대한 의식에 참여할 수 없다고 사양하였으나, 왕께서 재촉하여 자리에 나아가라고 명령하셨으며, 온화한 얼굴로 대접하고 준비를 갖추어 잔치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장막을 설치하고 기명(器皿)을 늘어놓고 술잔과 그릇을 채우고 과일의 종류는 모두 육상(六尙)의 진귀한 것이며, 사방의 맛있는 음식으로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다시 상국(上國)의 파려(玻瓈)·마노(瑪瑙)·비취(翡翠)·서시(犀兕)와 같은 기이한 완상품이 상 위에 어지럽게 놓여 있었고 훈지(塤篪)·공게(控揭)·금슬(琴瑟)·종경(鐘磬)이 안락하고 우아한 소리로 당(堂) 아래에서 합주되었습니다. 왕께서 술잔을 잡고 근신에게 명령하여 살펴 권하며 말하기를, ‘군신(君臣)의 교제는 오직 지극한 정성에 있을 뿐이니 각자 양껏하여 마시는 것을 사양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좌우가 두 번 절하고 술잔을 올리기도 하고, 술잔을 주고 받으며 즐거운 기운이 두루 미쳤습니다. 술이 아홉 차례나 돌자 또 물러나 휴식하기를 명하고, 계속하여 귀인들 가운데 습의(襲衣)와 보대(寶帶)를 하사하시어 후의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불러 가까운 자리에 앉게 하고 각자 편한대로 행동하며 먹고 마시게 하시니, 마음을 터놓고 웃고 떠들며 눈가는 대로 관람하기도 하였습니다. 둘러놓은 난간 밖으로는 돌을 쌓아 산을 만들고, 뜰의 가장자리에는 물을 끌어들여 연못을 만들었으니, 산은 높아 만 가지 형상을 만들고, 맑은 물이 사방으로 흘렀습니다. 동정(洞庭)·오(吳)·회(會)의 좋은 경치가 생겨난 듯하고, 연회가 끝날 때까지 덥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으니, 모두 취하도록 통음하고, 밤이 다하여 끝내셨습니다. 이에 진신(縉紳)과 사대부(士大夫)는 얼굴에 기쁜빛을 띠며 서로 아뢰며 말하기를, ‘우리 왕이 인자하고 검소한 것을 보배로 여기시어 지나친 행동이 없으시며, 옷은 화려하게 수놓은 것을 입지 않으시고 그릇은 장식한 것을 쓰지 않으신다. 다만 한 사람이라도 알맞은 지위를 차지하지 못하거나, 하나의 일이라도 제도에 부합되지 않을까를 염려하시어 매일 밤낮으로 마음쓰고 걱정하신다. 여러 신하와 귀한 손님에게 잔치를 베풀실 때는 내부(內府)에 간직한 보물을 내 놓으시며, 상국(上國)으로부터 받은 특별한 은혜도 기울이신다. 그러나 종일토록 힘을 쓰다 불을 켜고 계속하면서도 오히려 지나치다고 여기지 않으시니, 현명한 사람을 존중하시어 예의를 두터이 하시고 착한 사람을 좋아하시어 권세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마음이 진실로 모든 임금보다 빼어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라 하였습니다. 신이 일찍이 듣건대, 옛날에 노공(魯公)이 천자(天子)의 예약(禮樂)을 사용하여 풍속을 교화시켰으므로, 반궁(泮宮)에서 선생과 군자가 함께 즐겼다고 하였습니다. 그 시에 말하기를, ‘노후(魯侯)가 이르니 반궁에서 술을 마시고 좋은 술을 마시니 영원토록 늙기 어렵네.’라 하였다고 합니다. 노침(路寢)에서 연회를 베풀자 대부와 여러 선비들이 함께 화목하였습니다. 그 시에 이르기를, ‘노후가 연회를 기뻐하니 대부와 여러 선비들도 화목하네. 나라를 잘 다스리시니 이미 많은 복을 받으셨도다.’라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 임금께서는 천자의 은혜로운 뜻을 받들어 신하들을 총애하여 대우하였으니, 공경대부(公卿大夫)가 하늘이 보호하시어 임금에게 보답하려는 뜻을 품었습니다. 말하신 것을 본받고 따라 아유가빈(我有嘉賓)의 시를 읊으며, 악사와 가수는 군신이 서로 즐거워하는 음악을 만들어내니 기쁨이 서로 통하고 예의는 법도에 맞았습니다. 이 때를 당하여 인령(人靈)의 화목한 기운, 천지의 아름다운 감응, 상하(上下)의 베품과 보답, 풍속의 교화가 모두 음식의 즐거움과 온화한 얼굴로 웃는 사이에 나온 것입니다. 어찌 영원토록 늙기 어려움과 이미 많은 복을 받은 것에 그칠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억만년을 지나며 태평한 복을 누리시어 천자의 영원하고 무궁한 아름다움을 널리 펴게 되실 것입니다. 신이 어리석고 졸렬하나 다행한 시기를 만나 재부(宰府)에 억지로 자리를 차지하였는데, 신이 재주가 없다고 여기지 않으시고 특별히 느낀 대로 적으라는 명령을 받아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억지로 기록합니다.”라 하였다. 이에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 홍관(洪瓘)에게 명령하여 글을 돌에 새기도록 하였다.
〈김인존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개부의동삼사 판동북면병마사 겸 행영병마사(開府儀同三司 判東北面兵馬事兼行營兵馬事)를 더했다. 왕이 서경(西京)에 있을 때, 태자(太子)의 관례(冠禮)를 행하고자 하니 김인존이 아뢰어 말하기를, “관례라는 것은 예의 시작이니,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궁에 있는〉 동쪽 섬돌[阼]에서 관을 쓰는 것을 세 번 거듭하여 더욱더 높이는 것은, 그 의례를 높이는 것이니 성인(成人)의 뜻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지금 원자(元子)의 존귀함으로 관례를 밖에서 행하는 것은 선왕(先王)을 본받는 것도 아니며, 후대에 보일만한 것도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대로 따랐다.
김인존(金仁存)은 문장으로 이름 높고 청렴한 절개가 당대의 으뜸이었으므로 왕이 매우 존중하여 은혜와 대우를 특별히 후하게 하였다.
인종(仁宗)이 어려서 왕위를 계승하고 이자겸(李資謙)이 권력을 장악하니 〈김인존이〉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사양하고 물러나기를 간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어느 날 관아로 가려 하는데, 길에서 동요(童謠)를 듣고 〈놀라서〉 말에서 떨어져 집으로 돌아가 병석에 누워 간절하게 면직(免職)을 요청하니, 드디어 재상의 지위에서 물러나게 하고 판비서사 감수국사(判祕書省事 監修國史)가 되었다. 왕이 은밀하게 내시(內侍) 김안(金安)을 보내어 김인존(金仁存)과 이수(李壽)에게 물어 말하기를, “이자겸의 권한을 빼앗고 한가한 직책[散地]으로 보내려고 하는데 어떠한가.”라고 하였다. 모두 대답하여 말하기를, “주상께서 외가(外家)에서 성장하여 은혜를 끊을 수가 없습니다. 하물며 그 당여(黨與)가 조정에 가득하여 함부로 행동할 수 없으니 그 틈을 기다리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변란이 일어나서 궁궐에 연달아 불이 나니 왕이 불을 피하여 산호정(山呼亭)에 앉아 한탄하여 말하기를, “김인존의 말을 듣지 않아 일이 여기까지 이른 것이 한스럽구나.”라고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익성동덕공신(翊聖同德功臣)의 호를 받고, 삼중대광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문하시중(三重大匡 開府儀同三司 檢校太師 門下侍中)이 되었다.
금(金)의 군사가 〈송의〉 변경(汴京)을 침입하였는데, 변방에서 보고하기를 금이 패배하여 송(宋)의 군사가 그 기세를 타고 깊숙이 들어와 금나라 사람들이 막아내지 못한다고 하였다. 정지상(鄭知常)·김안(金安) 등이 아뢰어 말하기를, “때를 놓치면 안 됩니다. 군사를 보내어 송과 호응하여 큰 공을 이룸으로써 주상의 공업(功業)을 중국의 역사에 실어 만세에 전하도록 할 것을 청합니다.”라 하였다. 그 때 왕이 서경(西京)에 있었는데, 근신(近臣)을 보내 급히 가서 김인존(金仁存)에게 묻도록 하였다. 〈김인존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전해 듣는 말은 항상 사실과 다른 것이 많습니다. 뜬소문을 듣고 군사를 일으켰다가 강한 적을 화나게 하면 안 됩니다. 또한 김부식(金富軾)이 송에 들어가서 곧 돌아올 것이니 잠시 기다리소서.”라 하였다. 김부식이 돌아왔는데 그 변방의 보고가 과연 허황된 것이었다.
왕이 예종(睿宗)의 유명(遺命)으로 교지를 내려 수태부 문하시중 판이부사(守太傅 門下侍中 判吏部事)로 삼았는데, 김인존(金仁存)이 마지못하여 직책을 맡았으나 늙고 쇠약해져서 결국 다른 사람이 부축하여 겨우 다녔다.
〈김인존이 인종〉 5년(1127)에 죽으니 하루 동안 조회를 정지하였으며, 해당 관리에게 명령하여 부의하고 예를 더하여 장례를 치르도록 하였다. 시호는 문성(文成)으로, 예종(睿宗) 묘정에 배향(配享)되었다.
김인존(金仁存)은 학문을 좋아하여 늙어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당시의 조서(詔書)와 교서(敎書)는 그 손에서 나온 것이 많았으며, 과거[禮闈]를 두 번이나 관장하여 이름난 선비를 많이 얻었다. 일찍이 최선(崔璿)·이재(李載)·이덕우(李德羽)·박승중(朴昇中) 등과 함께 음양지리(陰陽地理)에 대한 여러 책을 산정(刪定)하여 왕에게 바치니, 『해동비록(海東秘錄)』이라는 제목을 하사하였다. 또 박승중과 함께 『시정책요(時政策要)』를 편찬하였고 또 『정관정요(貞觀政要)』의 주석을 달았다.
〈김인존의〉 아들 김영석(金永錫)·김영윤(金永胤)·김영관(金永寬)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평장사(平章事)의 벼슬을 받았다. 김영석의 증손자 김변(金弁)은 일명 김기(金琪)라고 하며,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써 과거에 급제하였고, 고종(高宗) 때에 정언(正言)·어사(御史)를 지냈다. 충청도를 살피러 나가서는 날마다 지나치게 술을 마시고 일을 돌보지 않았으며, 또 백성에게 세금을 마구 거두어 권귀(權貴)에게 뇌물을 주었으니 사람들이 모두 이를 갈았다. 벼슬은 판소부감사(判少府監事)에 이르렀다. 김인존(金仁存)의 아우 김고(金沽)는 풍채가 우아하고 아름다웠으며 문학을 잘하여 당시에 명성이 있었는데, 벼슬은 수사공 중서시랑평장사(守司空 中書侍郞平章事)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