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17:10절 “너희는 모두 다시 올지니라
내가 너희 중에서 지혜자를 찾을 수 없느니라”
너희는 다 다시 올지니라. 원어는 다 돌아가라는 뜻입니다.
너희들하고는 도무지 말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죄인들은 패는 쪽이든 맞는
쪽이든 항상 아집이 대단합니다. 모든 것이 자기에게 포인트가 맞추어져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자기를 괴롭히는 존재라고 여깁니다. 철학의 영향을 받은 현대교육이
교회로 스며들어 지금 인간이 인간을 보는 관점을 가지고 인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인간이 무엇인가 말씀하는 건 하나님의 관점에서 인간이 무엇인가를 말씀합니다.
마25장의 의인과 악인의 삶을 보면 의인은 남을 생각합니다. 소자를 돌아봅니다.
그러나 악인은 주님께만 유익이 된다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생각할 뿐 일하지 않습니다.
11절 “나의 날이 지나갔고 내 계획, 내 마음의 소원이 다 끊어졌구나”
욥은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상실했습니다.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합니다.
절망의 노래만 부릅니다. 이게 바로 욥의 죽음의 노래입니다. 지금도 일을
그만 둔 목회자나 선교사들이 일을 그만 두면 그만 정체감마저 없어지는 걸 봅니다.
그러면 안 되죠. 일은 일이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신 새로운 피조물에
대한 새로운 정체감을 가지고 쇠하거나 녹슬지 않는 살아 있는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12절 “그들은 밤으로 낮을 삼고 빛 앞에서 어둠이 가깝다 하는구나”
13절 “내가 스올이 내 집이 되기를 희망하여 내 침상을 흑암에 펴 놓으매”
14절 “무덤에게 너는 내 아버지라, 구더기에게 너는 내 어머니, 내 자매라 할지라도”
15절 “나의 희망이 어디 있으며 나희 희망을 누가 보겠느냐”
16절 “우리가 흙 속에서 쉴 때에는 희망이 스올의 문으로 내려 갈뿐이니라”
멸망 받을 사람은 자기 속에 고정관념에 의한 자화상이 깊이 박혀 있습니다.
마음에 창조가 되어야 현실에 창조가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8복을 구하세요.
의식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처음에는 누가 내게 뭘 좀 도와주지 않나 하고
바라는 사람이었지만 8복이 이루어지면 자신이 줘야 할 대상을 찾게 됩니다.
성경은 처음에는 우리의 존재를 C.T 촬영하듯 하고 난 뒤에 구원 하십니다
얼마나 고마운가요? 따라서 창조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은 이를 모르니 우리라도 그 가치를 알고 아버지의 이름을 높이 불러야 합니다.
욥기가 유대인에게는 지혜서입니다. 이스라엘 전체의 이야기가 욥기는
욥이란 개인의 이야기로 점철이 됩니다. 이스라엘이나 모든 인간이 바로 욥과
같은 본성이 있기 때문에 땅의 것에 대해서는 자유의지라 하며 장군 멍군하지만
하늘의 신령한 복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못한다는 걸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철학과 헛된 속임수라고 말합니다(골2:8) 이는 땅에 속한 인간에
대한 초등학문으로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하늘에 속한 지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땅의 인과응보에 대한 이야기뿐입니다. 문제는 지금 이 지식을 온 땅이 흠뻑
들이마시고 있는 형국입니다. 이게 바로 용의 입에서 나온 독극물입니다(계12:16)
진리의 지식은 이성과 상식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깨달음입니다. 성령이 아니고는
아무도 그리스도를 주로 믿을 수도 없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관계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성령의 조명이 아니고는 인간은 하늘의 신령한 복이 무엇인지 알 수
없고 인간 내면세계에 관한 성경의 말씀을 깨달을 수가 없는 법입니다.
땅에 속한 겉 사람의 성장은 한계가 있으나 하늘에 속한 속사람의 성장은
무한대입니다. 바로 영생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지혜가 중요한 것이지만 그 출처가 어딘가를 파악해야 합니다(고전2장)
땅의 지혜는 깨달으면 그걸로 끝입니다. 행하려고 해도 필연적으로 안 됩니다.
그러나 성령의 지혜는 계속 성장되고 새로워집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자신에게 적용하면 겉 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계속 새로워집니다(고후4:16-18)
현실세계는 나이가 들면 쓸모가 없어집니다. 다 나의 밖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영적인 어른이 되어 가면 계속 쓸모가
있습니다. 어쩜 이 시대에 천연기념물과 같은 존재가 될 겁니다. 목사들이 영원한
자아 곧 영원한 정체감이 되는 새로 지음을 받은 자신을 쌓아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영원토록 자신의 것이 되지 못할 것들에 붙들려 그만 그것들에게 버림을 받고 비참해집니다.
하나님은 항상 자신의 차원에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가 왜
반드시 당신같이 되어야 합니까? 내 형편대로 놔두시고 그냥 사랑해 주세요.
내 모습 이대로 도와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세요‘ 합니다. 결국 영적인
어린아이가 되어 늘 배꼽티 입고 물장구나 치고 있는 꼴불견입니다.
우리가 자란다는 것은 내용보다 영적인 차원이 계속 달라지는 것입니다.
땅에서 하늘로 점점 높이 올라가는 겁니다. 그러므로 새처럼 날아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욥은 과거에 집착해 있습니다. 과거의 공적과 현재의 고난을 연결시켜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임에도 그는 까맣게 모르고 있는 겁니다.
영적인 사람은 과거는 없고 언제나 현재와 미래만 있습니다.
빌3장에서 바울은 뒤엣것은 잊어버리고 합니다. 아니 똥 같이 여긴다고 말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현재의 고난을 통해 우리를 다른 차원으로 끄집어 올리려고
하시는데 우리는 이를 고집스럽게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애급에서
광야를 거쳐 가나안으로 이끌어가듯 우리를 그의 보좌로 이끌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은 애급도 바로만 아무 문제가 없었다면 살만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가나안까지 굳이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인간성입니다.
욥과 세 친구의 차원이 땅에 속해 있으므로 하나님이 욥38장에 천지 창조의
이야기를 꺼내십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내가 어디에 있었느냐?”
너희들이 함부로 떠드는데 이 땅에 있는 것들이 다 너희 것이냐? 하시는 겁니다.
이들이 흠 잡을 것이 없는 사람들 같지만 무엇 하나 존재화 된 것이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말씀이 육신화 된 적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결국 다 허물어집니다(마7:21이하) 자기화 되지 않는 것들은 다 남의 것들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에게 ‘너는 무엇이냐?’ 물으신다면 어떻게 대답을 할까요?
욥이 옳게 살았다고 주장하는데 너 자신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에 대답을
하지 못하고 세 친구 또한 인간의 껍데기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 인문학이니 교육학이니 심리나 상담학 등이 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기능과 역할만이 아니라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고
물으면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고 그 생명을 내가 가지고 있다고 대답을 해야죠.
기능적으로 남에게 혜택을 주는 것도 장한 일입니다. 사회적인 공헌입니다.
인기 있는 일이니 하고 싶은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맡겨야죠.
욥기 전 까지는 이스라엘이라는 집단의 역사입니다. 욥기는 개인의 역사입니다.
사람들은 대한민국, 한국교회, 자신이 속한 교단과 함께 엉켜서 도매금으로
얼렁뚱땅 넘어 가려고 합니다. 이게 당을 짓는 인간 본능의 습관적인 기능입니다.
그러나 이제 내가 무엇인가? 체크해 봐야 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적자를 보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부르실 때 대충하려고 우리를 부르실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잘못으로 인해
그 분이 손해를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작품이 훼손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존재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롬2, 갈6) 하나님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한번 제대로 만들어 볼까? 그 하나님의 업적을 드러낼 존재를 찾으십니다.
율법이 죄가 되는 것은 거기에 걸려드는 것 보다 그것에 대한 보상과 보응의
심리가 무섭습니다. 잘하면 보상심리로 기고만장, 못하면 보응에 전전긍긍합니다.
근데 욥은 지금 보상을 받을 자가 보응을 받고 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에 대한 인간의 죄성입니다. 욥은 어느 늙은 교수의 낡은
강의노트처럼 덕지덕지 늘어놓고 있습니다. 과거를 지향하고 집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날마다 새로워집니다. 어제는 결코 오늘이 아닙니다.
다만 어제라는 선행 학습으로 어제가 오늘을 만들기는 하는 겁니다.
지금 모든 만물은 다 시들어가고 있습니다. 지금 우주 공상 영화 같은 것을
보면 살벌하고 삭막한 우주의 광경이 나옵니다. 인간의 심성이 그렇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새로워져 가려면 어제를 벗어버려야 합니다. 벗고 새로 입으라 하십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3:27) 두루마기를 빠는 자(계22:14)가 복이 있고,
진리로 거룩(표백)하게 되고,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계19:8) 등으로 말씀합니다.
일단 현재의 자신에 대한 불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언젠가는 하나님이 이루십니다.
다른 사람의 칭찬과 환호에 미혹되지 말아야죠. 성경은 항상 장래를 향해 지향합니다.
하나님은 일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주십니다. 영의 생각을 하도록 하십니다.
우리는 깨달은 말씀을 전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워지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과거를 확인하고 오늘의 사람으로 날마다 새로워져야 합니다. 욥처럼 과거를
고집해서는 안 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 실망을 시켜 드려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영적인 구경꾼은 쉽게 만들 수는 있지만 따르도록 하기는 매우 힘듭니다.
단편 소설 한 권 쓰지 못하면서 문학평론가를 한다는 사람들이 수두룩합니다.
성경이 새롭고 달리 보이는 만큼 자신이 발전한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되어 진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걸 명심해야 합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주께 영광을!
"땅에 속한 겉 사람의 성장은 한계가 있으나
하늘에 속한 속사람의 성장은
무한대입니다. 바로 영생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