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1077년, 40살에 경전 읽고 염불하여 극락 간 재상 이정
이정 무덤돌에 새긴 글 묘지명(李頲墓誌銘)
문종 31년(1077).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No 신5861) 간직
고리국(高麗國)의 돌아가신 대중태부 수태부 겸 문하시중 상주국(大中太夫 守太傅 兼 門下侍中 上柱國)이고 죽은 뒤 정헌(貞憲)으로 높여준 이공(李公) 무덤돌에 새긴 글
문림랑 수상서예부원외랑文林郎 守尙書禮部員外郞 조유부趙惟阜가 짓다.
공의 이름은 정頲이고, 자는 백약百藥이며, 수주 소성현樹州 邵城縣 사람이다. 증조부 허겸許謙은 상서좌복야 태자태부尙書左僕射太子太傅로 높여주고, 조부 한翰은 상서좌복야 태자태보尙書左僕射太子太保인데 안경安敬이라는 시호를 추증追贈 받았다. 아버지 자연子淵은 수태사 겸 중서령守太師 兼 中書令이고, 추증된 시호는 장화 章和이다. 어머니 김씨는 계림국대부인雞林國大夫人으로,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 인위因謂의 딸이다.
공은 곧 중서령의 큰아들로 하늘과 땅의 순수한 정기를 받아 풍채가 남다르게 빼어났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자라서는 시를 공부하였는데, 아름다운 경치, 맑게 갠 밤, 꽃피는 아침, 달뜨는 저녁에는 반드시 붓을 잡고 글을 짓느라 거의 헛되게 보내는 날이 없었다. 한 문장 한 구절이 나올 때마다 (글은) 다리가 없는데도 구슬보다도 빠르게 달려가 사람들이 다투어 전하고 베끼니 도성 안에 종이가 귀해졌다. 그 읊은 내용을 보면 큰 뜻이 다 갖추어져 있고 형식에 얽매이는 병폐가 없었으니, 어찌 풍월이나 읊조리고 화초를 희롱할 따름이었겠는가. 하물며 고전에 이르러서는 그 깊은 이치를 탐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그 문장은 한 나라를 빛낼 만하였으며, 그 재주는 과거에 1등으로 급제할 만하엿다. 그러나 33세가 되어도 글에만 빠지는 상여병相如病이 지나칠까 하여, 선친이 과거 응시를 허락 하지 않고 강제로 공신 후손 자격으로 첫 벼슬에 나가게 하였다.
20세에 내고부사內庫副使를 지내고, 23세에 예빈 성주부禮賓省主簿로 옮겼다. 25세에 합문지후閤門祗候를 더하고, 28세에 상서고공원외랑尙書考功員外郎으로 옮겼으며, 지방으로 나가 양주를 다스렸다. 31세에 임기가 끝나자 조정으로 돌아와 다시 상서호부원외랑尙書戶部員外郎이 되었는데, 32세에 정랑正郎을 더하고 겸하여 비어緋魚를 내렸으며, 33세에 위위소경 지합문사衛尉少卿知閤門事에 임명되었다. 35세에 상서우승尙書右丞으로 옮기고, 36세에 상서이부시랑尙書吏部侍郞으로 고쳐 제수되었으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38세에 전중감 지상서 이 부사殿中監 知尙書 吏部事가 되고, 40세에 본관本官으로서 동지중추원사 겸 삼사사同知中樞院事 兼 三司使가 되었다. 44세에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를 제수받고, 46세에 호부상서중추사 권서경유수사戶部尙書 中樞使 權西京留守使로 옮겼다. 47세에 이부상서吏部尙書로 고쳐 제수되고, 48세에 참지정사 판삼사사 주국叅知政事 判三司事 柱國에 제배되고, 51세에 중대부 중서시랑동중 서문하평장사 판상서병부사 서북면병마사 겸 서경유수사 상주국中大夫 中書侍郎同中西門下平章事判尙書兵部事 西北面兵馬事 兼 西京留守使 上柱國이 되었으니, 겨우 30여년에 낭서郎署로부터 재형宰衡에 이르게 된 것이다. 밝게 드러난 공적은 모두 국사國史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모두 싣지 않는다.
아우가 네 명 있는데 모두 높은 지위에 오르고, 누이가 세 명 있는데 함께 왕비가 되었다. 그 이름과 덕업은 장화공章和公의 지문誌文에 아주 자세히 나와 있으므로 줄이고 적지 않았다. 무릇 우리 임금(皇)의 아들들은 모두 공의 생질이 도니 가세의 대단함이 이미 이와 같으며, 관직의 화려함이 또한 저와 같다. 귀하다고 하여 다른 사람에게 오만하게 대하지 않았고, 항상 겸손함을 실천하면서 자신을 다스렸다.
왕씨를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상당현군上黨縣君에 봉해졌다. 중서령中書令에 추증된 가도可道의 셋째 딸로서, 용모가 매우 아름답고 부덕婦德이 구족九族 가운데 으뜸이었다. 6남 4녀를 낳았는데, 큰아들 자인資仁은 22세에 진사에 급제하여 처음 비서성교서랑秘書省校書郎이 되고 거듭 승진하여 지금 합문지후閤門祗候가 되었으니 그 몸과 마음을 가다듬으며 예의범절이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났기 때문이다. 둘째 자의資義는 경시서승京市署丞이고, 셋째 자충資忠은 상서호부주사尙書戶部主事이며, 넷째 자효資孝는 양온령良醞令인데, 모두 후손에게 벼슬 주는 혜택을 받아 일찍 벼슬길에 올랐다. 각기 재주와 명성을 지니고 있으나, 과거에 뜻이 있으니, 당시 사람들이 재능이 뛰어난 군자들로 용과 호랑이처럼 우열을 기르기 어려운 형제라고 하였다. 다섯째는 비구比丘가 되어 현화사玄化寺에 있는데, 법명은 세량世良이었다. 여섯째는 어려서 아직 이름이 없었다. 장녀는 우산기상시 삼사사右散騎常侍 三司使 김양감金良鑑의 정실 아들인 잡직서승雜識署丞 의義에게 시집갔다. 다음 둘째와 셋째는 모두 시집가지 않았고, 다음 넷째도 아직 비녀 꽂을 나이가 되지 않았다.
현군懸軍은 공보다 76일 앞서 사망하였다. 공은 죽음을 슬퍼하는 기색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으나, 달관한 생각이 아내를 잃고 술 사발을 두드린 장자에 버금갔다. 이에 시름을 품은 시를 읊었는데 다음과 같다.
서녀 해 동안 병을 가진 몸으로
공로도 없이 임금의 녹을 먹으니 모든 사람이 비웃는다.
조금씩 남국南國 휴문休門의 수척함을 닮아 가니
헛되이 서하西河 자하子夏의 살짐을 부러워하노라.
단지 불교를 배워 정진하는 것이 간절하나
꽃과 술을 만나니 즐거움만 극진하네.
올봄에 문득 어려움 함께 겪은 아내를 잃으니
들보 위 제비 한 쌍만 미워하노라.
그 마지막 구절 뜻이 옆 사람이 들어도 오히려 서글픈데, 하물며 부부 사이에 능히 생각이 없을 수 있겠는가. 슬프다. 40년 이래 시를 업으로 삼은 자로 이보다 더 뛰어난 사람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리에 병이 생겼는데, 수십 일이 되어도 낫지 않았다. 임금이 사령장(麻誥)을 내려 대중대부 수태부 겸 문하시중大中大夫 守太傅 兼 門下侍中 벼슬을 내리고, 장남을 뽑아 조관朝官으로 올렸다. 어의를 보내어 보살피도록 하기도 하고 임금이 사사로이 쓰는 돈을 내어 조정에서 기도하기도 하였다. 태자와 후비, 친왕들도 재물 내린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고, 몸소 찾아가 안부를 물으니 길이 수선하였다.
그러나 운명과 복이 다하니 하늘땅을 다스리는 신이나 붇다도 머무르게 하기가 어려웠다. 5월 13일에 서울 안의 불은사佛恩寺에서 돌아가시니, 이 해는 송 희령 10년(문종 31, 1077)으로 세차로는 정사년이다.
돌아가시는 날 저녁에는 신음소리도 없이 손발을 씻고 의관을 단정히 하고 앉아서 아미따불의 이름을 읊조렸다. 또한 스스로 보살 8계를 받고 끝나자 베개에 누워서 작고하였으니, 춘추 53세이다.
식자들은 백성들을 위하여 애석하게 여겼다. 임금은 이 소식을 듣고 조회를 사흘간 멈추었으며, 시호를 정헌貞憲이라 내렸다. 슬퍼하는 마음이 보통과는 달라 부의를 높이는 것이 관례보다 두터웠으니, 애통함과 영예로움을 함께 갖춘 것이 고금에 견줄 바가 드문 것이다.
이달 23일 임신일에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장례일을 돌보게 하고, 불교 법에 따라 서기산西畿山 기슭에서 다비하였다. 자녀들이 목놓아 슬피 울며 유해를 받들어 사찰에 임시로 안치하고 아침저녁으로 제사를 받드는 것이 살아 있을 때와 같이하였다. 또 그해 10월 20일 정유일에 좋은 점괘를 좇아 임진현 백악 선영 근처에 장례 지내니, 예에 따른 것이다.
공은 마흔 살 때부터 인과를 깊이 믿어 근무하는 시간 이외에는 대장경을 읽으면서 자신을 돌보고자 하였다. 전체를 한 번 다 읽고 다시 거의 반을 읽었으니, 붇다가 식언을 하지 않는다면 저승에서 도와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유부惟阜는 일찍이 보잘것없는 재주로나마 외람되게 따뜻한 보살핌을 받았는데, 글을 지어 달라는 부탁을 받으니 사양하고 거절할 수가 없었다. 비록 글을 잘 쓰지 못하지만, 사실을 기록하는 데에는 다행히 부끄러움이 없어, 삼가 명銘을 짓는다.
참으로 뛰어난 자손이여,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났으니
도량은 큰 바다같이 넓고,
고상한 인품은 온화한 자태 그대로다.
배움은 스승을 통하지 않아도
마음은 오직 지극한 도를 섬겨서,
눈으로 제자백가를 섭렵하고 가슴으로는 고금을 꿰뚫었다.
시는 원백元白처럼 고경하고 필체는 종장鍾張처럼 신묘하니,
남겨진 풍모가 이어져 빛나고,
황실과 외척 간에 꽃다운 향기가 잇따르도다.
단아하고 총명하여 높은 자리를 역임하고
이름은 유리병 명단에 첫째로 적혀서
옥으로 만든 솥과 같이 강하고
부드러운 덕으로 높은 지위에 올랐네.
다섯 빛깔 붓으로 임금 보필하고
열 아름 큰 나모같이 나라를 받들었지만,
총애를 받아도 더욱 삼가고 귀해져도 위엄을 부리지 않았다.
일찍이 인생 허무함 깨달아
늘 연화장蓮華藏 세계 찾아 헤매고,
남을 자신과 똑같이 대하며 색과 공을 함께 잊었도다.
달콤한 샘물 쉽게 마르고, 배어난 재목 먼저 꺾이나니
원수洹水 건넌 것이 꿈속의 일인가,
대산岱山 노닐면서 돌아오지 않는구나.
사람들 놀라 배를 잃고
황제 슬퍼 거울을 보는 것을 잊었는데,
동각東閣은 바람에 스산하고, 북당北堂은 달빛이 슬프도다.
흐르는 세월도 금방 바뀌니 먼 날도 잠깐이런가,
푸른 새가 길함을 알리고,
흰 비단을 두른 마차 조심스레 걷는다.
무덤을 닫으면서 옥돌에 새겨 이에 묻으니
난초 향기처럼 그 덕도 영원하리라.
대강 3년 정사년(문종 31, 1077) 10월 ○일에 새김.
장사랑 한림원대조將仕郎 翰林院待詔 양숙화梁肅華가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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