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k1172 -14-님께
마지막으로 만나뵈었던것이 거의 사십여년이 된것 같군요.
십대초반이었던 제가 오십을 훌쩍 넘겼으니까요.
오빠의 소식은 둘째오빠를 통하여 잘 듣고 있었습니다.
아드님만 두셨는데 큰아드님이 의사라구요.
지난번 하회탈이 반도(그물)로 밤에 물땅꼬에서 기름걸레에 불붙여서
머리카락 태워먹은 재미있는 이야기에
꼬리글 달아놓으신것 보고 아하, dk1172 오빠시구나 알겠더군요.
'h야 괴기무거래이'로 통하는 청송여관할머니네 h오빠와
남동에 살았던 또래보다 유난히 작았던 y오빠,
권투글럽 끼고 사진속에 있던,- 부산해양대 시헙보러간다고
친구들 모두가 부산으로 함께 따라갔던- c오빠와
요즘의 욘사마 같은 이미지의 시장안에 살았던 j오빠와
그리고 어린제기억에 시거를 지긋이 물고있는'쟝 폴 벨몬드' 닮았던
멋진 d 오빠는
저희 둘째오빠와 고기잡이를 비롯 온갖 위험한 장난질을
우리후배 하회탈 형제만큼
아니 그보다 더하던 진짜 원조 개구장이들 아니었습니까?
거기에 적극 협조적이었던 저희 외할머니와 오빠네어머님은 친구셨고.
풍미식당 지하의 삼방동이 내려다 보이는 주방에서
거친나무를 대패로 곱게 깍아서 실제크기의 곡선모양의 크래식한 피아노 모형에
건반한개한개가 움직이도록 완벽하게 만들어 주던 d 오빠의 목공솜씨는
계속하셨으면 대단한 예술가로 오늘날 이름을 떨쳤지 않을까요.
동점 구문소.
비가 부실부실 내리던날 그당시만 해도 시퍼렇게 깊은 물이 위험해서
어른들이 절데로 가지 못하게 했던 곳을 오빠들 낚시 가는데 따라 갔었을때
저녘무렵이 되어도 고기는 한마리도 못잡고
중학생이던 까까머리들이 누구주머니에서 나왔는지 쌈짓돈 털어서
좁은 신작로에 먼지를 뒤집어쓴 어설픈 찐빵가게에서
소다를 과다하게 넣어서인지 군데군데 누런 무뉘가 남아있는 껍데기에
들큰찍직한 허여스므레 블그스레한 팥안꼬의 찐빵 몇개중에
그래도 어린동생이라고 온전하게 한개는 내게 주고
남은것으로 오빠들끼리 서로 나누어 먹으면서 허기를 달래고
지름길인 위험한 동점 철로 터널을 다리아프다고 칭칭대던 저는
오빠들에게 교대로 엎혀오는데 어느오빠가 제게 그랬어요.
만약에 굴을 다 빠져나가기전에 기차가 오면 내려놓을테니까
납잡 엎드려 있으라고.. 그래도 바람에 같이 딸려갈지 모르니까 조심하라고.
아! 그 공포라니.
그날 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말썽꾸러기 둘째놈과 소리없이 사라진 어린딸아이가
걱정이 되어 사람까지 풀어서 찾다가 무사히 돌아온 오빠를 보고
화가 치밀은 어머니께 우리 오빠는
개탄넣는 짚개로 철암역앞에서 사정없이 엄청 맞았지요. ㅎㅎ
우리 둘째오빠.
복받아 마땅한 사람이에요. 저희가족에게는, 특히 저에게는요.
먹을게 있으면 가족을 먼저 생각하고 남의것을 빼앗아서라도 가족을 생각하는..
남에게 엄청 독하게 보이려고 눈을 또록또록뜨고 설쳤지만
사실은 정에 약한 우리 오빠는
어린저를 앞에 앉혀놓고 ' 성-문앞 우물곁에~' 를 비롯 각종 가곡과
칸쏘네, 샹송을 눈을 지긋이 감고 폼잡고 자아도취해서 부르곤 했는데
싫증난 저는 한곡 들어주는데 십원씩 받았었어요.
그당시 음악을 좋아하던 경북고등학교를 다니던 큰오빠의 영향으로
오페라아리아를 비롯 상당한 수준의 곡으로 어린 여동생을 관객으로 리사이틀을
하곤했던 우리 오빠덕에 우리 지인이나 제가 그나마 음악쪽으로 기울지 않았나싶군요.
군대도 가지 않은 어린나이의 소년에 가까운 청년일적에
어린 동생을 밤기차에 태워서 '진명여중'시험보러 데리고 가서
촌스럽게 멀미하는 동생을 전차에 버스에 몇번씩이나 내리고 타기를 시도하다가
마지막에는 그 추운 겨울날 등에 엎고 노량대교를 걸어서 상박이 오빠네로
북아현동 친척집으로 데리고 다니면서 시험보고 나올때까지 학교앞에서
벌벌떨고 서있다가 길가에서 시험지 정답맞추어보고 웃음을 참지못하고
기뻐하던 정많은 사람이었어요.
지인이... 맞습니다. 맞구요 ^^* 둘째오빠네 아이.
그리고 자랑할만도 하구요.
독일 전역에 방송되는 국영방송에서 일등을 하였다는것은
한국에서 대학가요제에서 대상받아도 자랑인데 우리나라와 비교도 않되는 큰나라,
음악의 종주국인 독일국영방송국에서 주최하는 컨서트에서 일등.
게다가 그냥 대중가수가 아니고 부전공을 종교학으로 하여서 중학교 종교학 선생이고
쾰른대학 시절부터 뮤지컬 ' 켓츠'등에서 '메~~모리...' 등과
'에비타에서 '~~~ 아르- 헨티나 --'등을 부르는 주역으로 그 지역 신문에
오르내리던,작곡도 직접하고 생각도 깊은ㅡ
그렇게 고운 목소리로 대중음악을 하는 음악인.
그정도면 자랑스런 철암인을 지나서
자랑스런 한국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만...요.
마침 그때 어렸을때 목탁이라 불리우던 저희 막내가 그곳을 방문중이었는데
독일 방송국에서 방송국의 온갖 시설들을 끌고 와서
가족과 지인이가 거주하는 방을 비롯
'지인이의 애견 룩스' 까지 전 독일에 방송이 되었는데
오빠의 딸인 지인이가 인텨뷰에서 또롱또롱하게 독일어로 그리고 영어로
저희가 치부라고(?)생각하는 부분들을 '파파와 마마 '에 대하여
자랑스럽게 소개하는것을 보고
저희 막내가 오빠에게 절데로 한국에는 소개가 되지 않도록 단단히 부탁,
아니 확실한 조치를 하고 온겁니다.
둘째오빠는 대구에서 삼덕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경북중학교에 다니려 하다가
철암으로 와서 일년 놀수도 없어서 그당시만 해도 어수룩한 시절이라
그곳의 초등학교를 육학년을 한번더 다니다가 태백중학과 태백고등에서
강릉상고를 거쳐서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를 다녔지요.
오빠말씀데로 군대제대후에 정식직원도 아니고 임시직으로 잠시 대한석탄공사에
근무하다가 다시 서울에 올라와서 조금 지나다가 자격도 없으면서 어찌어찌하여서
독일행 비행기를 탔고 그 후에 고생을 좀 많이 하면서
그래도 그곳에서 학업은 계속하였고
현재 바이엘의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일년에 한번씩 중소기업진흥의 초청으로
세미나를 하러 나올때마다 동길오빠를 만난 이야기 하더군요.
만나보셔서 아시겠지만 정서적으로 철암사람에 가까워진 지인이 엄마인 우리 올케도
대학을 제대로 나와서 명문이라면 명문인 집안의 자녀가 그당시만 해도
해외에 나가기가 어려웠던 시절이라 공연히 멋있을것 같아서
독일로 갔다는거지요.
어찌되었든 한마디로 70년대에 독일에 갈수 있는 방법은 그 방법이 가장 수월했던지라
그럴수 밖에 없었지만 지인이가 메스컴에 알려지게 되면,이해가 어려운 동문도 있겠지만
한국에서 살수 밖에 없는 저희가 힘들어질것이라는 판단하에...
저희가 아주. 많이. 내 놓고 이런이야기를 할 만큼 사회적으로 대단해 진것도 아니고.
지금 오빠는 독일에서도 중산층이상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오래된 농가를 수리하여서 오이며, 상치며 각종야채를 직접재배하고
식물을 워낙이 좋아하여서 짐승을 좋아하던 막내오빠와 늘상 다투곤 하더니
평생 소원데로 정원에 유리온실을 만들어서 소파들여놓고 음악깔고
무릎에 가벼운 담요를 덮은채 책보다가 잠들다가 하는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더군요.
에니웨이.
그래서 오빠가 지인이 이야기를 카페에 올린것을 보고 당황하였습니다.
저희 철초카페에는 dk1172 오빠자제분을 비롯하여
지인이보다 더 훌륭한 동문들이 저와 철암인들의 자부심이 되고 있습니다.
구십이 가까워져오는 저희 어머님은 오늘도 여전히 열정적으로 살고 계십니다.
봄에 둘째오빠가 오면 그때 어머님 뵈러 한번 오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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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침에 미애씨가 그럽니다. "돌아가신 전 대통령이나, 오바마 대통령이나, 유명한 어른들 보면 어릴 때 참 잘 놀았어요. 잘 논 아이가 큰 사람되는가봐요." / 친구, 이웃, 자연과 친한 철암 아이들, 참 잘 노는 철암 아이들. 우리나라에 큰 일군이 될겁니다. 선배들 처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