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혁명에서 파리코뮌까지]
3. 코뮌 혁명의 발발
지난 1월 28일 휴전 이래 파리의 분위기는 그 이전보다 훨씬 더 과격해졌다. 그 주요한 이유는 위에 열거한 일련의 사건들이 파리를 격분케 했기 때문이지만, 그 밖에도 몇 가지 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첫째, 파리의 함락 이래 약 15만 주민이 파리를 빠져나갔다. 그들은 주로 부유한 사람들이었다. 다라서 훨씬 빈곤한 주민만 남아 있는 파리는 그만큼 더 과격해짖고 전보다 더 좌경화할 수밖에 없었다. 둘째, 파리 주변의 요새에 배치되었던 군인들이 휴전 기간에 일단 파리 시내로 철수했는데, 이들은 패잔병의 일반적 특성인 실망과 불만에 가득 차 있었다. 이들이 정부를 불신하고 휴전을 타기하는 정신적 태도는 파리의 과격파의 그것과 상통하였다. 셋째, 파리 국민 방위대의 과격화이다. 약 15만의 부유한 시민이 파리를 빠져나감으로써 부자구의 방위군 대대들은 거의 자연 소멸하고 말았다. 온건한 부르주아 대대들이 줄어든 만큼 파리 전체의 방위대의 성격이 더 과격해진 것은 당연하였다.
2월 8일 선거의 겨로가와 보르도 의회의 보수성이 명백해진 2월 15일에 벌써 무장한 파리 국민 방위대 약 3,000명이 독일에 대한 강화 반대와 파리 방위대의 연합체 구성을 결의한 바 있었다. 국민 방위대는 본래 자치적 민병대로서 파리의 경우 각 구마다 독립적 편대였는데, 이제 파리 전체를 하나의 조직체로 연합하자는 것이었다. 2월 15일의 결의에 따라 24일에는 연맹(federation)을 결성하고 중앙위원 66명을 선출했다. 이 국민 방위대 중앙위원회(Comite Cental de la Garde Nationale)는 3월 15일에 정식으로 성립되지만 실은 2월 24일부터 벌써 크게 활약하였다. 24일은 마침 2월혁명 기념일로서 바스티유 광장에 모였던 국민 방위대는, 방위대를 약화시키고 무장을 해제시키려는 정부의 의도를 규탄하고 독일군의 파리 입성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는 다음 날 한결 좌익적 색채를 띠었다. 26일에는 아침 10시부터 저녁 6시까지 국민 방위대가 대대별로 밴드에 발맞추어 검은 리본을 단 깃발들을 들고 당당한 행진을 펼쳤다. 그것은 위풍이 당당했을 뿐만 아니라 장엄하기까지 하였다.
이날의 시위에는 약 30만의 일반 시민이 방위대에 합세하였다. 그들은 파리 시를 온통 흥분과 혼란 속에 몰아넣고 있었다. 시위 군중은, 브뤼넬(Paul Antoine Brunel) 중위를 비롯한 1월 22일 사건 주동자들이 갇혀 있는 생트펠라기 감옥으로 몰려가서, 그들은 석방시키는 데 성공했다. 도잇에 국민 방위대의 한 무리는 파리 시내에 산재해 있는 대포 170문을 몽마르트르 언덕 위로 옮기는 데 성공하였다. 그것은 3월 1일에 독일군이 입성하면 대포를 독일군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였다. 사실 그 대포들은 파리 포위 기간 중 파리 시민의 모금에 의하여 제조된 것이었으므로 정부의 것이 아니라 파리 시민의 것이었고 국민 방위대의 것이었다.
그러나 대포의 몽마르트르 집결은 그 동기가 아무리 애국적이고 또 소유권에 대한 주장이 아무리 논리적이라 하더라도 현실적 의의와 결과는 중대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정부의 눈에는 더욱 그러했다. 정부는 독일과의 협정에 따라 무장 정규군은 이제 1사단밖에 갖고 있지 않았는데, 파리의 40만 방위대는 무장을 해제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170문의 대포를 가지게 되었다. 파리 군사령관 비누아의 4만 병력이 과연 40만 방위대에 대항할 수 있을는지 누구나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3월 3일 새로 임명된 방위대 사령관 도렐 드 팔라딘이 파리에 부임하여 대대장 회의를 소집했을 때 260명 중 30명밖에 소집에 응하지 않았을뿐더러, 이 30명도 도렐 드 팔라딘에게 방위대 중앙위원회에 도전하는 것은 이미 늦었다고 경고할 정도였다. 더구나 바로 그 3월 3일에는 방위대 중앙위원회에 과격파들이 새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10일에는 연맹 규약이 최종 결정되고 15일에는 260개 대대 중 215개 대대의 대표자들로 구성된 총회에서 연맹 중앙위원회의 정식 성립이 선포되었다. 이 중앙ㅇ위원회는 앞으로 파리코뮌의 중추적 기능을 담당하게 된다.
정부는 몽마르트르의 대포 반환을 국민 방위대에 교섭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3월 8일 정부는 비누아의 정규군에게 대포 탈환을 명령했으나 정규군이 오히려 격퇴되고 말았다. 정부는 취약함을 목격한 연맹 중앙위원회의 한 사람인 뒤발(Emile Victor Duval)은 이날 늦게 그르넬 거리의 병사에 불을 질렀다. 비누아와 티에르의 분노는 이제 극에 달하였다.
티에르는 무력에 의한 진압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결심하였다. 그러나 그는 파리 주둔 정규군도 믿을 수 없었다. 그들은 패잔병의 좌절감에 사로잡혀 사기를 잃고 있을 뿐만 아니라 파리 민중에 감염되고 있었다. 티에르는 그들은 다른 데로 이동시키고 지방 출신 병사로 대체하여 약 2만의 정규군과 경찰로 파리를 기습할 작전을 세웠다. 그는 의회가 20일에 베르사유에서 속회하기 전에, 파리 문제를 깨끗이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여 정부 내의 일부 반대를 물리치고 3월 18일 새벽에 군사행동을 개시하엿다.
그의 작전 계획은, 밤 2시에 출동을 개시하여 새벽 5시에 시내 요소요소의 대포 진지들을 기습하고, 주력 부대가 몽마르트르와 벨빌 구로 향하여 그곳을 완전히 제압하여 대포를 탈환하는 것이었다. 한편 경찰은 연맹 중앙위원회를 비롯한 과격파의 지도자들을 일제히 검거, 체포하여 그 조직을 완전 소탕한다는 것이었다. 티에르의 이 작전은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군대는 계획대로 움직였고 예정된 시간에 예정된 장소를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다.
몽마르트르는 새벽 4시에 점령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큰 실수를 저질렀다. 대포를 언덕 위에서 시내로 끌어내릴 말들을 준비해 오지 않았던 것이다. 말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사이에 국민 방위대와 시민이 정부의 기습을 알아처렸다. 파리 코뮌의 여걸 미셸(Louise Michel)은 총을 어깨에 메고 달리면서 “반역, 반역”하고 외쳤다. 새벽잠에서 깨어난 방위군과 민중이 경종을 난타하였다. 정부군이 점령한 대포 진지들이 순식간에 인산인해의 군중에게 포위되었다.
몽마르트르도 아침 7시 45분에 폭도들에게 포위되었다. 정부군 르콩트(Claude Lecomte)의 88연대 사병들은 폭도들과 어울렸다. 폭도들은 온갖 선동을 주저하지 않았다. 갑자기 사병들 중에서 총을 거꾸로 들고 “비누아, 타도!” “티에르 타도!”를 외치는 소리가 터졌다. 르콩트는 부하들에게 발포를 명하였다. 그러나 명령 소리는 누구도 귀에도 들리지 않았다. 이윽고 르콩트는 폭도의 포로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군대는 방위대와 함께 군중을 규합하여 시내로 행진하엿다. 오후 2시 30분 비누아 장군은 작전 정지와 함께 군대의 철수를 명령하였다. 로지에 가 6번지에서는 르콩트에 대한 신문이 시작되었다. 오후 4시 또 하나의 포로가 잡혀 왓다. 비누아의 전임자 토마 장군이었다. 르콩트와 토마는 피에 굶주린 폭도들에게 그 자리에서 처형되었다. 비누아와 투로쉬도 거의 같은 운명에 떨어질 뻔하였다. 비누아가 죽었다는 풍문이 한참 동안 나돌기도 하였다.
국방 장관 르 플로(Adolphe Le Flo) 장군은 바스티유 광장에서 간신히 도망쳐 나왔다. 그는 40만의 방위대 중 정부에 충성하는 자는 6,000명도 안 될 것이라고 티에르에게 보고하엿다. 티에르의 작전은 이제 완전 실패였다. 그의 정규군에 대한 평가도 방위대에 대한 평가와 마찬가지로 모두 오산이었다. 티에르는 일부 장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곧바로 정부를 파리에서 베르사유로 옮기기로 결정하엿다. 그날 밤 사이에 정부와 그 군대는 전부 파리를 버리고 베르사유로 철수하였다.
지난 26일 생트펠라기 감옥에서 석방된 브뤼넬은 스스로 방위대를 이끌고 120연대를 습격하여 장교들을 잡아 가두고 병사들의 무장을 해제하고, 이어 다른 방위대 대대들과 합세하여 시청을 포위하엿다. 저녁 8시 30분, 시청을 지키고 있던 경찰과 헌병들의 비밀 지하도를 통해 모두 다 도망치고 말았다. 시청은 브뤼넬과 국민 방위대가 차지하였다.
3월 18일에 파리에서 파노라마처럼 일어난 이 극적인 사건들은 모두 즉흥적인 것이었다. 티에르의 작전 계획 이외에는 미리 준비된 것이란 하나도 없었다. 그의 작전 계획도 오래전부터 치밀하게 짜여진 것이 아니라 다분히 즉흥적인 것이었다. 그러기에 그 계획은 오류투성이였다. 새벽의 기습은 파리 시민에게는 청천벽력처럼 너무나 의외의 사건이었다. 거기에 대응한 모든 행동도 순간순간의 상황에 따라 취해진 즉흥적인 행동이었다. 르콩트와 토마의 처형도 브뤼넬의 병영 습격도, 비누아의 철군도, 티에르의 정부 철수 결정도 모두 순간순간 전혀 예기치 못한 사태의 돌발 앞에서 취해진 일들이었다. 3월 18일 사건은 본래의 의미의 봉기가 아니었다. 파리의 주민과 방위대의 폭동은 정부의 도전에 대한 피동적인 자연발생적 행동이었다.
어쨌든 현대 프랑스에서만이 아니라 현대 세계사에서 가장 끔찍하고 가장 논란이 많은 파리 코뮌이라는 미완성 혁명의 불길이 이제 가눌 수 없이 드높이 솟았다.
3월 19일 청명한 봄 날씨의 일요일, 파리 시민은 어제 있었던 일을 까맣게 잊은 듯이 명랑한 휴일을 즐기고 있었다. 아니, 어제 일을 잊은 것이 아니라 지난 9월 이래 쌓이고 쌓였던 울적함이 어제 일시에 다 풀리고 이제야 정말 해방되었다는 해방감에 취해 있었는지도 모른다. 1793년 이래 처음으로 혁명 세력이 파리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지난 한 세기 동안 파리가 바라고 기다렸던 것이 아닌가? 그러나 파리가 과연 우월한 군사력으로 프랑스 전체를 호령할 수 있을까?
시가의 평온함과는 대조적으로 시청 안에서는 각양각색의 혁명가들이 갑작스런 사태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어제 사건이 어느 조직에 의하여 계획된 것이었다면 새 사태에 대한 대비책도 마련되어 있겠지만, 우발적, 자연발생적인 것이었던 만큼 모두 신통한 묘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브뤼넬은 곧바로 군사행동을 일으켜 베르사유를 점령하여 정부를 뒤엎자고 주장하고, 미셸은 티에르의 암살을 열심히 설득하였다. 방위대 중앙위원회의 한 사람은 시골뜨기 대의원들의 독재를 비난하면서 의회의 해산을 주장하엿다. 이에 대해 오랜 망명 생활에서 갓 돌아온 노련한 사회주의자 루이 블랑은 “당신들은 가장 자유로이 선출된 국회에 반란을 일으키고 있다”고 꾸짖었다. 이견이 백출한 토론의 결론은 결국 파리를 통치할 수 있는 유일한 조직으로서 방위대 중앙위원회의 우월적 지위를 승인한 것이었다. 제1인터내셔널 파리 지부의 이름 없는 회원인 아시(Adolphe-Alphonse Assi)가 의장에 선출된 방위대 중앙위원회가 이제 파리의 지배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파리에는 티에르 정부의 기관들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것은 구장들과 파리 출신 국회의원들이었다. 베르사유로 철수한 티에르는 구장들과 국회의원들을 사이에 넣어 중앙위원회와의 타협을 교섭했다. 몽마르트르 언덕이 있는 파리 제18구의 구장 클레망소는 국회의원을 겸하고 있었다. 그는 3월 8일부터 몽마르트르의 대포 문제로 정부와 방위대 사이의 조정을 맡아왔는데, 이제 또다시 중재역을 맡았다. 19일 밤 2시에 시작된 첫 회합에서 클레망소는 중앙위원회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파리가 하는 요구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또 정부가 파리를 분노하게 한 잘못을 유감으로 생각하지만, 파리가 프랑스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킬 권리는 없다. 파리는 의회의 권위를 절대적으로 승인해야 한다. 중앙위원회가 이 막다른 골목에서 빠져나갈 유일한 길은 파리의 요구를 의회에서 얻어내려고 결심하고 있는 대의원들과 구장들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는 것이다.
이 발언에 대하여 중앙위원회의 바를랭(Eugene Varlin)은 아주 온건한 요구들을 제의하였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시 의회의 선거만이 아니라 진정한 자치적인 자유, 경찰국의 폐지, 국민 방위대의 간부 임명권과 재편성권, 그리고 합법적 정부로서의 공화국의 선포, 집세 지불의 무조건 연기 즉 공정한 채무 만기법….등이다.
이런 요구들은 결코 무리한 것이 아니었다.
조정 회담은 20일 새벽 4시까지 계속되었는데 부자구의 제2구 구장 티라르(Pierre Tirard)의 입에서 “반란자들”이라는 말이 나오자 중앙위원회 주르드(Jourde)는 핏대를 올리며 “반란이라니 무슨 소린가? 내란을 일으켜서 공격해 온 것은 도대체 누군데. 야음의 습격에 대항하여 제 돈으로 만든 대포를 도로 찾은 것 외에 방위대가 무엇을 했단 말인가? 그리고 민중을 따라 텅 빈 시청사에 자리를 잡은 것 말고 중앙위원회가 무엇을 했단 말인가”라고 소릴 질렀다. 계속하여 주르드는 “파리만이 아니라 프랑스 전체가 불바다가 될 것이다. 그리고 피바다가 될 것이다. 분명히 경고해 두거니와 만일 너희들이 우리를 정복할 경우 우리는 파리를 태워버리고 프랑슬르 제2의 폴란드로 만들어버릴 것이다”라며 예언 비슷한 말을 내뱉엇따. 양쪽의 대립을 겨우 조정하여 드디어 합의에 도달했는데, 그것은 구장들이 중앙위원회의 요구를 국회가 수락하도록 힘쓰겠다는 것과 22일에 시행하기로 계획되어 있는 파리 시의회 선거를 베르사유 의회가 파리 자치법을 가결할 때까지 연기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다음 날 방위대 중앙위원회는 파리 20구 공화주의 중앙위원회 감시 위원회로부터 맹렬한 공격을 받고 클레망소에게 어제의 합의를 취소한다고 전하였다.
그렇다면 ‘20구 공화주의 중앙위원회 감시 위원회’란 무엇일까? 이것은 국민 방위대 중앙위원회와는 전혀 다른 정치적인 조직으로서, 지난해 9월 4일 공화국이 선포되자 프랑스 혁명 때의 파리 코뮌을 본떠서 비교적 과격한 공화주의자들이 구마다 감시위원회를 구성하여 임시 국방정부에 정칮거, 군사적 압력을 가하기로 하고, 각 구 감시 위원회는 대표 네 명씩을 선출하여 20구의 대표 80명으로 ‘파리 20구 공화주의 중앙위원회’를 9월 11일에 결성한 것이엇다. 이 기구는 순수한 자치 조직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왜 그런 것을 만들어야 했던가에 있다. 다시 말하면 왜 임시 국방정부에 정치적, 군사적 압력을 가할 필요가 있었는가를 살펴야 하는 것이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제2제정 시대에 파리에 조성된 사회주의 분위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1848년 2월 혁명으로 출현한 제2공화국은 6월 폭동에 대한 무자비한 진압과 함께 사실상 죽고 말았는데, 이런 역사적 경험은 프랑스 노동자와 파리 민중의 마음속에 부르주아적 공화주의에 대한 불신감과 증오심을 깊이 깃들게 하였다. 그런데 나폴레옹 3세의 제2제정은 이 불신감과 증오심을 완화시키지 못하였다. 1864년의 ‘60인 선언’은 노동자의 사회적 권리를 부르주아의 은혜에 절대로 기대지 않고 노동자 자신의 힘으로 쟁취하겠다는 선언ㅇ이었다. 그런데 이듬해 1865년에는 제1인터내셔널의 프랑스 지부가 파리에 설치되고 그 후 차차 지방에도 그 분극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프랑스 사회주의운동의 특이성을 만들어내는 프루동과 블랑키의 영향이 노동자 사이에 널리 번져갔다. 제2제국의 자유와의 경향에 따라 1860년대 말에는 과격한 정치적, 사회적 혁명 세력이 매우 강대해졌던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잠재 요인을 안고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일어난 데다가 나폴레옹 3세의 장군들은 패전에 패전을 거듭했으니, 파리의 사회주의자와 노동자의 혁명적 기운은 하루하루 열기를 더해 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자체를 반대했고 더구나 프랑스의 패퇴를 조금도 유감으로 여기지 않았다. 패전은 제국을 멸망시키고 공화국을 세울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세상의 항복과 함께 9월 4일에 공화국이 선포되자 프랑스의 노동자는 공화국을 방어하기 위해 독일과의 싸움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다. 마르크스(Karl Marx)는 이 노동자의 애국심을 쇼비니즘(Chauvinism)이라고 개탄했지만 그는 프랑스 공화주의의 역사적 전통을 몰랐던 것이다. 프랑스의 공화국들은 자코뱅 이래 항상 애국심과 일체가 되어 있었다. 자코뱅주의의 3대 목표는 조국 방위, 혁명 수호, 민주주의의 실현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애국심은 공화주의와 일체가 된 애국심이었다. 이러한 애국심에 불타는 파리 민중의 눈에는 임시 국방정부가 조국 방위에 열성적이지도 않고 끝까지 항쟁할 생각도 없으며 조기 휴전을 서두르는 것으로만 비쳤다. 정부는 적보다도 파리 노동자의 혁명을 더 두려워하는 것으로 비쳤던 것이다. 이 의구심은 파리 민중의 가슴속에 깊이 깃들어 있는 부르주아 있는 부르주아에 대한 불신과 증오에 연결되었다. 그 의구심은 역사적인 뿌리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서 그들은 임시 국방정부에 군사적, 정치적 압력을 넣어 조국을 방위하고 공화정을 수호할 것을 결심했던 것이다.
이 결심이 위에서 말한 파리 각 구의 감시 위원회와 그 대표자 80명으로 구성된 20구 중앙위원회는 명칭과는 달리 위로부터의 통제 기관이 아니라 일종의 연합적 원리에 의한 것이었으나 10월 하순에 가서 중앙집권적으로 방향을 전환하고 위원의 수도 160명으로 늘렸다. 20구 공화주의 중앙위원회는 자치 조직으로서 정부와는 전혀 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를 넘어서서 정치적인 힘을 발휘하였다. 이 기이한 조직체는 그 역사적 정당성을 프랑스 혁명 시대의 파리 코뮌에 뿌리박고, 국가란 코뮌의 연합체에 불과하다는 이론에 뒷받침되고 있었다. 다시 말해 조국을 방위하려는 민중의 애국심이 국토 방위에 불성실한 정부를 넘어서서 자치권을 요구하는 민중 의지의 표현으로 표출된 것이라 할 수 있다.
20구 중앙위원회가 9월 15일에 발표한 첫 성명을 보면, 그것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었던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성명은 옛 경찰 기구의 해체, 식량의 배급제, 파리 시민 전체의 무장화, 전 국민 총동원령과 군수품의 징발 등을 요구하였다. 이들의 궁극적 목표는 조국 방위에 있었던 것이다. 20구 중앙위원회는 처음에는 온건한 편이었는데, 10월 후반에 이르면 위원 수를 배가하고 중앙집권적으로 변화했을 뿐만 아니라 한결 더 사회주의적이 되고, 10월 31일 사건에서는 국방정부의 사퇴와 48시간 이내의 코뮌 선거 실시를 요구하여 임시정부 위원 명단을 발표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다. 이 시기부터 블랑키파의 영향이 커져 파리에 산재하고 있는 민중 클럽들을 장악하고 1871년 1월에 이르면 명칭을 ‘20구 공화주의 대표단’으로 고치고 1월 6일 제2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 성명에 서명한 140명은, 정부가 관리하는 선거를 기다릴 필요 없이 1792년의 파리 코뮌처럼 민중 봉기의 방식으로 코뮌 정부를 구성하자는 사람들이었다. 정부는 이 성명을 무장 봉기의 신호로 간주하였다. 정부와 20구 대표단의 대립이 극에 달하게 되었다. 이러한 때에 1871년 1월 22일 사건이 일어났으므로 정부는 20구 대표단의 주요 인물들을 체포하고 이들의 손발인 민중 클럽과 신문을 철저히 탄압하고 휴전 교섭을 서둘렀던 것이다.
20구 대표단은 총선거 후 2월 29일에 원칙 선언을 채택하여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밝혔는데, 거기서 이제는 사회주의혁명 목표를 분명히 하고 있었다.
감시 위원회의 전원은, 혁명적 사회주의당에 속함을 선언한다. 따라서 우리는 온갖 가능한 방법으로 부르주아의 특권을 폐지할 것과 그 지배적 계급의 권력을 상실할 것과 그리고 노동자의 정치적 성장, 요컨대 사회적 평등을 요구하고 획득하려고 노력한다. 이제는 고용자 계급도 없고 프롤레타리아 계급도 없고 계급이라는 자체가 없다. 사회 구성의 유일한 기초는 노동이다. 그리고 노동의 성과는 전부 노동자에게 돌아가야 한다.
정치적 영역에서는 공화제를 다수결의 원리에 우선시킨다. 따라서 우리는 다수파가 국민투표라는 직접적 수단에 의해서든 의회라는 간접적 수단에 의해서든, 인민주권의 원칙을 부정하는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 사회 구성의 기초가 정치적, 사회적 혁명의 방법으로 깨끗이 변혁될 때까지는 어떠한 제헌의회나 국민의회의 소집에도 필요하다면 실력으로 반대할 것이다. 결정적 혁명이 성취될 때까지는 파리 시의 혁명 사회주의 집단의 대표들로 구성된 혁명적 코뮌 이외에는 정부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렇게 20구 대표단은 강고한 혁명 목표를 내걸고 코뮌 정부의 수립을 위한 조직의 재편성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그 성급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별로 큰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새로 나타난 국민 방위대 중앙위원회라는 민중 조직 앞에 눌리기 시작했다. 3월 18일에도 20구 대표단은 아무 활동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방위대 중앙위원회와 베르사유 정부의 무서운 대결이 불가피한 긴박한 정세의 급변화 함께 갑자기 그 혁명적 이론과 조직으로 정치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이때에는 그 명칭을 20구 대표단에서 본래의 20구 중앙위원회로 다시 고쳤는데 이 20구 중앙위원회가 3월 21일에 방위대 중앙위원회와 클레망소의 합의를 맹렬히 비난하고 나서는 바람에 방위대 중앙위원회는 그 전날의 합의를 취소한다고 클레망소에게 전했던 것이다.
22일 티에르는 파리의 국민 방위대를 지각 없는 범죄자로 규정하고, 이 지각 없는 범죄자들이 적군이 아직 점령지에서 철수도 하지 않은 어려운 형편에 파리를 무질서와 파괴와 치욕으로 몰고가고 있다는 비난의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이는 타협을 바라는 태도를 표명하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티에르는 강경한 태도 표명과 함께 파리 방위대 사령관에 도렐 드 팔라딘 대신 세세(Saisset) 제독을 임명하였다. 그러나 새세 제독의 명령에 따르는 프랑스 방위대는 한 사람도 없었다. 새세는 변장을 하고 몰래 파리를 빠져나와 도보로 베르사유로 돌아와서, 티에르에게 파리의 폭도를 진압하려면 30만의 병력이 필요하다고 보고하였다. 진압이 불가능하다는 뜻이었다. 25일 티에르는 제2구 구장 티라르에게 쓸데없는 교섭은 이제 그만두라고 지시하면서 2~3주일 이내에 폭동 진압에 충분한 병력을 확보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한편 파리의 방위대 중앙위원회는 3월 25일 드디어 베르사유의 동의 없이 코뮌 선거를 다음 날 실시하기로 결의했다. 파리의 구장, 부구장 및 파리 출신 의원들의 약 3분의 1이 이 결의에 동의하였다. 코뮌 선거는 반(半)합법성을 얻은 셈이다. 그러나 그 반합법성도 그리 중요한 의의를 지니는 것은 아니었다. 베르사유 정부가 그 반합법성을 고금이라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마당에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또 코뮌 선거의 정치적 목표의 성부는 결국 베르사유와의 군사적 대결의 승패가 결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코뮌 선거는 3월 18일 이후의 모호한 정치적 성격을 혁명적 방향으로 결정지었다. 이 명백한 방향 결정은 20구 중앙위원회의 혁명 목표에 일치했다. 20구 중앙위원회는 이제 그 혁명적 조직과 이론으로 방위대 중앙위원회를 누르고 선거를 지도할 수 있게 되었다. 더구나 방위대 중앙위원회는 25일 선거 실시 성명에서 “우리의 사명은 이제 끝났고, 시민 여러분이 선출할 새 정식 수임자들에게 우리의 권한을 이양할 것”이라고 했는데, 그 수임자들 가운데는 20구 중앙위원회 구성원이 많이 선출되어 20구 중앙위원회는 새 코뮌에서 힘을 뻗게 된다. 26일 코뮌 선거에는 등록 유권자 48만 5,000명 중 22만이 투표에 응했다. 티에르는 높은 기권율에 근거하여 정부 측의 승리라고 선언했으나 실은 그렇지 않았다. 왜냐하면 유권자 등록부는 1년 전의 것이었고, 또 앞에서 본 바와 같이 휴전 기간에 15만 명쯤의 부유한 시민이 지방으로 전출하였고, 특히 3월 18일 사건 이후에도 상당한 수가 파리를 탈출했기 대문이다. 티에르도 실은 이 사실을 뻔히 알고 있었다. 따라서 코뮌 선거의 투표율은 과거 어느 선거에서보다도 높은 편이었다. 그것은 그만큼 혁명 지지 세력이 컸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선거 결과도 혁명파가 압도적으로 많이 당선되었다. 정원 90명 중 중복 당선자가 다섯 명이었으므로 실제는 85명이 당선되었는데, 온건한 공화파 20명 이외는 모두 사회주의 혁명파였다. 20구 중앙위원회 추천 후보가 당선자 총수의 반이나 차지하고 방위대 중앙위원회의 구성원도 16명이 당선되었다. 온건 공화파 계통의 20명이 사임하고 또 다른 이유로 4석의 공석이 생겨서 4월 16일 보궐선거가 실시되었는데 혁명파만 당선되었다. 파리 코뮌의 특색은 시의회가 입법부의 기능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행정부의 업무를 겸하는 데 있었다. 시의회 의원들이 구장과 시장을 나눠 맡았다.
3월 28일 정식으로 파리 코뮌이 선포되었다. 약 2만 명의 방위대와 수만 명의 시민이 운집한 시청 광장에서 의원으로 선출된 방위대 중앙위원회 랑비에(Ranvier)가 “인민의 이름으로 코뮌을 선언한다”고 외치자 “공화국 만세! 코뮌 만세!”의 함성이 하늘을 찔렀다. 방위대의 행렬이 프랑스 국가 ‘다마르세이에즈’의 주악에 맞추어 위원들의 사열대 앞을 보무도 당당히 행진하면 민중의 미친 듯한 갈채가 우뢰처럼 터져 나왔다.
<인민의 외침(Le cri pu peuple)>은 ‘축제(La fete)’라는 표제의 논설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코뮌이 선언되는 날, 그것은 혁명적이고 애국적인 축제의 날, 평화롭고 상쾌한 축제의 날, 도취와 장엄함 그리고 위대함과 환희가 넘치는 축제의 날이다. 그것은 1792년의 사람들을 우러러본 나날에 필적하는 축제의 하루이며, 제정 20년과 패전과 배반의 여섯 달을 위로해 준다……코뮌이 선언된다.
오늘이야말로 사상과 혁명이 결혼하는 축전이다.
내일은 시민병 제군, 어젯밤의 환호로 맞아들여 결혼한 코뮌이 아기를 낳도록, 항상 자랑스럽게 자유를 지키면서 공장과 가게의 일터로 돌아가야 한다.
승리의 시가 끝나고 노동의 산문이 시작되다.”
분명히 파리의 민중은 이제 자신이 자신의 생활과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감동과 의욕에 넘쳐서 코뮌 선포의 날을 축제의 날로 지샜다. 민중의 소박하고 약동하는 해방감이 코뮌의 파리를 뒤덮었다.
그러나 당시 파리에 망명하고 있었던 러시아의 사회주의자 라블로프(Ravlof)는 벨기에 인터내셔널의 기관지 <랜터나시오날(L’international)>에 28일의 축전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이렇게 끝맺고 있다.
“의심할 나위도 없이 상황은 아직 어려움에 가득 차 있다. 파리와 의회와의 충돌은 계속되고 있고, 지방의 주요 도시들 상황은 불투명하고, 베르사유 정부는 적대적이다. 장래는 어둡다. 지금 파리는 분명히 모든 진보 세력, 특히 모든 나라의 사회주의자의 성실한 공감을 얻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소극적인 공감이 사태의 진전에 무슨 영향을 미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어디서 적극적인 원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나는 무어라고도 답할 수 없다. 때가 말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