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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소몰이 소년
2화 회색 도시
3화 달님의 슬픔
4화 고향의 설음
5화 루즈-내츄럴 캔디
6화 낯선 만남-하나 그리고 열하나
7화 그녀, 또 다른 그녀
8화 그녀의 향기, 그녀의 아픔
9화 아아, 달님
10화 벼랑의 끝자락
11화 어머니의 끝섬
12화 작은 장구벌레의 우화(羽化)
13화 아담과 이브, 만개하다
14화 꽃잎 떨어지다
끝섬(EDGE ISLAND)
<14화>꽃잎 떨어지다
숙희의 남동생 영호가 그토록 투쟁하며 기다리던 민주화의 봄은 점점 안개 속으로 치달았다. 군인이 중앙정보부장서리로 임명되었고 계엄사령관의 지휘 아래 학원 데모가 강력하게 엄단 조치되었다. 신학기가 되면서 각 대학의 학생회와 평교수회가 부활되고 해직교수와 제적학생들이 복귀함으로써 민주화 열풍이 일기 시작한 것에 대한 정부의 대응조치였다.
시위 열기에 힘입어 노동자들도 근로조건개선과 민주화를 위하여 전열을 가다듬었고 곳곳에서 민주화시위가 벌어졌다. 광주에서는 대학생 1만여 명이 가두행진을 전개하였다. 그곳에 영호도 있다고 했다. 영호는 늘 스크럼을 짠 맨 앞에서 열정적으로 구호를 목청껏 토한다고 했다.
광화문과 종로는 물론 서울역에서는 수만 명이 운집하여 계엄철폐와 민주화를 요구했다. 군중의 흐름은 마치 파도와도 같았다. 서울역 광장 앞은 물론 퇴계로까지 이어진 서울역 고가는 군중의 함성에 춤추며 출렁거렸다.
숙희와 나의 불안은 증폭되었다. 귤 밭의 이전문제가 까다로운 상속 절차 때문에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고 그녀의 배도 점점 불러왔기 때문이었다. 그녀와 나의 비밀을 지키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서둘러 결혼 날짜를 잡아야 했지만 확실한 정착지가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제대로 된 직장을 잡을 수도 없었고, 참으로 애매하고 답답한 나날이 이어졌다. 게다가 시위에 늘 앞장선다는 영호에 대한 걱정으로 불안감은 더해갔다. 광주에 전화를 걸면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소식만 들려왔다.
계절은 봄이 왔는가 싶더니 어느새 5월이었다.
“노수 씨, 나랑 광주에 내려가 봐야 할 것 같아. 영호가 소식이 끊어졌대!”
숙희의 다급한 전화를 받고 나는 광주행을 결정했다. 비상계엄령이 전국적으로 확대된 후 영호와 소식이 끊어졌다는 다급한 아버지의 호소 때문이었다. 대학에 계엄군이 진주하여 학생들을 연행하는 사태가 벌어졌는데 영호가 계엄군에 연행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소식이었다. 우리는 새벽기차를 이용해 급히 광주로 내려갔다. 선호는 이미 출근하여 없었고 아버지는 불안해하며 조바심과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아버지에게 사건의 자초지종을 설명 들었으나 확인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숙희와 나는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간단하게 해결하고 근황을 알아보기 위해 영호가 다니는 대학교로 향했다. 그러나 학교 교문 앞에는 예상치 못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숙희와 나는 감히 접근조차도 못하고 먼발치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교문은 굳게 닫힌 채 학생들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계엄군에 의해 통제된 상황이었다. 학교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려는 계엄군과 학교로 들어가려는 학생들 사이에 일촉즉발의 실랑이가 벌어졌다.
학생들이 구호를 외쳤다.
“계엄군 물러가라!”
“휴교령 철폐하라!”
학생들의 항의시위는 저돌적이고 격렬했다. 학생들과 계엄군 사이의 감정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마침내 계엄군이 진압봉을 휘둘렀고 마구잡이로 휘젓는 진압봉에 학생들은 머리를 맞았다. 머리를 맞은 학생의 울부짖음이 또 다른 학생들을 더욱 분노케 했다. 몇몇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바닥에 꼬꾸라졌고 바닥 여기저기에 핏물이 튀어 시멘트 위를 방울방울 물들이기 시작했다. 붉게 물든 바닥이 점점 늘어갔다. 마침내 돌멩이가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투석전이 일어났다. 돌멩이가 하늘을 가르며 날아들고 진압봉이 마구잡이로 학생들에게 내리꽂혔다. 교문 앞은 순식간에 아비규환 아수라장이 되었다.
“자아, 금남로로 가블자!”
누군가의 우렁찬 구호에 학생들이 금남로 방향으로 흩어져 이동하기 시작했다.
숙희와 나는 예기치 않은 참담한 광경을 보고 넋이 빠진 채 돌처럼 굳어버렸다. 온몸이 얼어붙어 단 한 발자국도 꼼짝할 수가 없었다. 학교로 들어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흥분한 학생들을 붙잡고 영호의 소식을 묻는다는 것은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일이었다.
겨우겨우 집으로 돌아왔다. 놀란 숙희를 진정시키는 데 한참이나 걸렸다. 방바닥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숙희 손을 꼭 잡아주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나는 영호에 대한 불길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어 자꾸 도리질을 쳤다. 저녁 무렵 직장에서 돌아온 숙희의 오빠는 금남로로 이동한 시위대와 계엄군 사이에 일어난 사건을 상세하게 들려주었다. 동생 영호의 소식이 끊어진 탓인지 선호는 몹시 분노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식구들이 놀라지 않도록 흥분한 기색을 감추려 애쓰는 기색이 역력했다.
학생들은 학교 정문에서 발생한 계엄군의 만행을 낱낱이 폭로하며 시위를 벌였다. 곳곳에서 격렬한 가두시위가 벌어졌다. 연좌시위를 벌이고, 파출소에 투석했다. 페퍼포그차가 불타고, 매캐한 최루탄 가스가 광주의 하늘을 뒤덮었다.
오후가 되어 계엄군이 시내까지 투입되었고 거친 진압이 시작되었다. 진압봉에 맞아 피 흘리는 학생들을 보다 못한 시민들이 계엄군의 진압을 만류했다. 그러나 계엄군은 진압을 만류하는 사람에게조차 무자비하게 진압봉을 휘둘렀다. 젊은이는 말할 것도 없었으며 노인이나 아주머니, 아이들의 몸에서도 피가 튀었다. 성난 광주 시민들이 삽시간에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시민들은 계엄군과 대치하며 스크럼을 짜고 방어막을 만들었다. 밀고 밀리는 충돌이 하루 종일 빚어졌다.
계엄군의 진압봉 앞에 시위대는 치열한 육박전도 불사했다. 수많은 시위군중이 계엄군에게 체포되어 끌려갔고, 경찰이 시위대의 포로가 되어 잡히기도 했다.
“아배는 물론이고 당신이나 숙희 니도 당분간 싸다니지 말그라. 거시기, 분위기가 심상치 않혀잉. 영호 소식은 나가 백방으로 알아보고 있응께 곧 알 수 있것쟤. 통행금지가 9시로 앞댕겨졌으니께 조심들 허구.”
숙희의 오빠는 담배를 꺼내 물며 몇 번이고 길게 한숨을 몰아쉬었다. 모든 이야기를 숨죽여 듣기만 했던 가족들은 정작 선호보다 더 불안에 떨었다. 나는 숙희의 손을 더욱 세차게 움켜쥐었다. 숙희의 손바닥에 식은땀이 깊이 배어있었다. 그녀의 손바닥에서 미열이 느껴졌다.
밤늦게 숙희는 신음소리를 내며 몹시 앓았다. 나는 물수건으로 손과 이마를 연신 닦아주며 자리를 지켰다. 아버지가 약국에서 약을 지어왔지만 약조차 제대로 먹을 수 없었다. 그녀의 임신소식을 말하지 못했던 터라 약을 먹었다고 거짓으로 변명하고 슬쩍 감춰버리고 말았다.
나는 밤새 한 숨도 못 자고 꼬박 밤을 밝혔다. 그녀가 아픈 것보다 내 마음이 더 아리고 아팠다. 차라리 내가 아픈 것이 아픈 그녀를 보고 있는 것보다 나을 성싶은 불안한 밤이 속절없이 흐르고 있었다.
【5월 19일, 꽃잎 떨어지다】
아침 일찍 올케에 의해 숙희의 임신 사실이 발각되었다. 이미 두 아이를 낳아본 경험이 있던 올케는 평소와 다른 숙희의 몸집과 행동만 봐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가씨, 멧 달 되었으라?”
앞뒤 가리지 않고 대뜸 임신 몇 개월이냐며 묻는 올케의 질문에 숙희는 당황하여 모든 사실
을 실토했다. 결국 아버지는 물론 오빠에게도 숙희의 임신 사실이 알려졌다. 모두들 놀란 눈치였으나 그래도 별 탈 없이 받아들여주었다. 더군다나 영호의 행방이 묘연하니 숙희의 임신 사실이 가족들에게 주는 충격은 덜한 듯했다.
아버지는 나에게 결혼을 언제 할 것인지 계획을 물어왔다. 하지만 명확하게 답할 수 없는 나로서는 죄스러워 잔뜩 쪼그라들었다.
“거시기, 귤 밭이 결정나기 전까정 우선 광주에 방 얻어서 둘이 함께 지내브러. 결혼식은 좀 더 기둘렸다가 생각해 봄세. 시방 나라가 복잡허고 집안도 어수선한께 당분간은 여서 머물러 생활허게나!”
충분히 성을 낼 법도 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아량을 베풀어주었다. 나는 아버지의 마음 씀씀이에 더욱 초라하고 작아졌다. 대관절 숙희 아버지의 무엇이 아픈 부인이 누워있는 동안 딴 여자와 외도를 하게 했는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더욱 다행스러운 것은 임신한 숙희에게 이것저것 관심을 갖고 보살펴주는 올케의 태도였다. 밤새 앓기만 했던 그녀에게 흰 죽을 끓여 먹이며 더 영양가 있는 음식을 해먹여야겠다고 했다. 그런 올케가 더없이 고맙고 신뢰가 쌓였다.
오후 늦게 직장에서 돌아온 오빠는 영호에 대한 아무런 소식도 가져오지 못했다. 다만 시청에 근무하는 관계로 더욱 거세진 계엄군과 군중들의 충돌상황만을 낱낱이 듣고 이야기를 전할 따름이었다. 선호는 가족들에게 경각심을 세워주려는 듯 비교적 상세하게 사건이 돌아가는 상황을 설명했다.
“새복에 광주역으로 계엄군이 증파되브렀다. 금남로럴 딱하니 막아불고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있쟤. 속옷 차림으로 원산폭격을 한 학상들이 군홧발에 꼬꾸라지고 총을 멘 군인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걸 봤당께. 오늘 고등학상까정 교과서를 팽개치고 학교운동장에 집결해서 밖으로 나오려다 실패했쟤. 국민학교는 수업을 중단하고 귀가 조치시켰다야. 성난 시민들이 모여들어 군중이 어마어마해브러. 시민들이 몽둥이와 각목을 들었쟤. 거시기, 분위기가 안 좋아야. 계엄군이 닥치는 대로 사람덜을 잡아가. 오늘은 시위현장 주변건물을 샅샅이 뒤지며 진압을 했다는디. 아가씨가 대검에 가슴이 찔리고, 말 못하는 벙어리를 때려 끌고 갔다는 거여. 벌써 시외버스터미널 주차장에 여러 구의 시체가 목격되었다는 소문도 있당께.”
선호에게서 상황을 전해 들으니 시위는 점점 더 격렬하게 확대되는 모양이었다. 영호가 다니던 대학교 앞에서 목격했던 충격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상황에서 나는 숙희를 밖에 있는 화장실에 보내는 것조차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얼마 후 화장실을 가겠다는 숙희를 따라 마당으로 나왔다. 멀리서 검은 연기가 솟구치는 것이 목격되었다. 시내 어딘가가 불타고 있는지 검은 연기는 봉홧불과도 같이 하늘을 향해 춤추며 승천하고 있었다. 하늘에서는 지척지척 봄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요란한 헬기 소리가 하늘을 덮었다. 프로펠러 소리와 뒤섞인 헬기의 마이크에서는 시민들의 해산을 종용하는 방송이 밀가루처럼 살포되어 지상의 산지사방으로 낙하했다.
【5월 20일, 꽃잎 떨어지다】
선호는 시청에 출근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가 운행하던 시청 트럭을 몰고 영호를 찾아 나서겠다고 아침부터 서둘렀다. 나는 숙희에게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신신당부를 하고 선호를 따라 트럭에 탑승했다. 숙희는 오빠의 트럭에 합승하는 것을 극구 말렸으나 한편으로는 그런 내 의지를 고마워하는 눈빛이었다.
거리에는 여전히 계엄군에 붙잡힌 학생들이 기합을 받는 것이 목격되었다. 남자들은 팬티 바람이었고 여자들은 팬티와 브래지어만 남겨지고 자존심이 유린당하고 있었다.‘투사회보’가 시내 곳곳에 뿌려져 나뭇잎처럼 바람에 흩날렸다. 계엄군에 맞서 싸울 것을 결의하자는 투사회보의 영향력보다는 불의에 분노하는 시민들이 시시각각 노도와도 같이 커져갔다. 트럭은 군중 속에 묻혀 좀처럼 움직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군중 속에는 장사를 집어치운 시장의 상인들은 물론 영업을 해야 하는 택시까지 가세해 있었다. 수많은 택시가 전조등을 켜고 도로에서 시위를 벌였다. 자동차에서 뿜어져 나오는 경적은 출정을 알리는 나팔소리처럼 우렁차게 하늘로 솟구치며 메아리쳤다.
계엄군과 시민의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시민들은 계엄군과 대치한 채로 밀고 밀리며 폭풍처럼 공방전을 몰아쳤다. 머리 위로 최루탄이 폭죽처럼 터져 뽀얀 연기로 자욱해지고 계엄군의 화학탄에 화염병으로 맞섰다. 분사된 화염방사기에 장렬하게 산화되면서도 태극기를 휘날리며 계엄군 앞에 보무당당하였다. 곳곳에서 군중에 포위되고, 고립되고, 퇴각을 당한 것은 오히려 계엄군이었다.
“거시기, 안 되겄다. 돌아가 불자! 앞으로는 차덜 끌고 댕길 생각을 아예 하덜 말아야긋다.”
트럭이 후진했다. 광주는 벌써 어둠이 내려깔리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불이 났고 방송국 건물도 불길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검은 연기가 검은 어둠으로 빨려 올라갔다. 행불된 영호의 소식은 여전히 듣지 못했다. 밤새도록 시위가 계속되는지 콩 볶는 총소리 또한 아련하게 계속되었다. 어둠 속의 총소리에 묻혀 거룩하게 떨어지는 피지 못한 꽃잎들이 감은 눈 안에 아른거렸다. 한낮에 보았던 참혹함이 뇌리를 떠나지 않아 새벽녘까지 오랫동안 뒤척였다.
【5월 21일, 꽃잎 떨어지다】
숙희는 서울에 있는 여동생과 통화조차 불가능하다며 불안에 떨었다. 시외전화가 계엄군에 의해 차단되어 광주는 철저히 고립되었다. 우리는 광주에 완전히 갇힌 신세였다.
오빠는 트럭을 버리고 영호를 찾아 아침 일찍 나갈 채비를 했다. 평소 영호와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과 학교를 다시 찾아가 소식을 알아보고, 이도 안 되면 사람들 틈바구니에서라도 찾아야겠다고 했다. 나도 함께 가고 싶었으나 숙희는 물론 아버지의 만류로 일단 집에 있기로 했다.
점심나절 선호는 영호를 찾은 것만큼이나 헐레벌떡 집으로 돌아왔다. 혹시 영호의 소식을 찾았는가 싶어 모인 가족에게 그는 흥분된 목소리로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세무서가 오밤중에 몽땅 타버려 잿더미가 되불었단다. KBS건물도 새복부터 불타고 있어야. 시체가 2.5톤 트럭으로 까득이고 시민들이 니아까에 시체를 싣고 금남로에 모였당께. 시민덜이 장갑차는 물론 버스, 트럭꺼정 도청광장에 배치해브렸다. 멧 십만 명도 더 되는 것 같아야. 어마어마하디. 참혹해서 못 볼 지경이쟤. 거시기, 이건 아닌 것 같아야. 나도 그 대열에 가불란다. 지금까정 무신 연락도 없고 오리무중인 영호도 계엄군에 잡힌 것이 틀림없당께!”
그는 울분을 삭히며 열변을 토했다. 그의 얼굴색은 흥분과 분노로 벌겋게 달아있었다.
“여보, 당신이 잘못 되블면 우리 애덜은 어떻게 하라꼬 당신까정 나선다요?”
“요로코롬 보고만 있을 순 없잖여. 이러다간 광주사람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허긋는디!”
결국 오빠는 올케의 눈물 섞인 애원을 뿌리치고 시위대열에 합류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나는 그의 뒷모습만을 바라보다가 끝내 고개를 돌려 올케를 외면했다.
집에 남은 사람들은 온종일 좌불안석이었다. 선호가 시위대에 합류했으니 영호 소식도 일단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소식이 끊긴 영호보다 시위대에 합류한 선호가 당장의 걱정이었다. 그나마 저녁 무렵 그가 가족들 앞에 잠깐 나타나 가족들의 한숨을 덜어주었다. 그러나 선호는 한층 더해진 울분을 폭발했다. 그는 한낮에 발포현장을 목격했다고 했다. 참혹한 학살 장면을 보고 온 선호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한낮 광주의 날씨는 높았다. 갑자기 애국가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계엄군도 시위대도 왼쪽 가슴에 손을 얹고 숙연하게 함께 불러야 할 애국가가 처연하게 광장에 울려 퍼졌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계엄군의 애국가와 시위대의 애국가가 다를 리 없었다. 동해물이 마르고 백두산이 닳도록 아름다운 강산에서 하나가 되어 살아가야 할 너와 나였다. 사격이 시작되고 총소리가 천지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분노하며 돌진하던 시민의 각목은 계엄군의 무기 앞에 너무도 애처로웠다. 시민들은 총알을 맞고 피를 흘리며 쓰러지기 시작했다. 무작위로 날아온 총탄 앞에 시민들은 꽃잎처럼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쓰러진 꽃잎을 구하려던 시민 또한 흩날리는 꽃잎이 되었다. 러닝셔츠만 입고 장갑차 위에서 태극기를 높이 들고 계엄군을 향해 돌진하던 청년은 쓰러졌어도 쓰러지지 않은 꽃잎이었다. 대의명분 앞에 목숨을 건 아름다운 희생의 시작이었다. 누가 종용해서도 아니었고 누가 원해서도 아니었으며 누구에게 떠밀리거나 두려워서도 아니었다. 쓰러져가는 꽃잎들을 보면서 당연히 그래야 했고 그러지 않으면 부끄러울 뿐이었다. 광주의 석가탄신일이 온통 피로 물들었다.
“금남로, 도청은 물론 광주 전역에서 전쟁 중이쟤. 근디 요로코롬 맥없이 목숨을 강탈당할 수는 읍다고 아우성들이다야!”
선호는 가족들이 피해입지 않도록 단단히 주의를 주고는 마침내 전쟁터로 나갔다. 그의 비장한 각오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나는 차마 감내할 수 없는 일이기에 부끄럽기만 했다. 숙희의 오빠 선호, 대학생 영호 앞에 나는 한낱 비굴하고 형편없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했다.
【5월 22일, 꽃잎 떨어지다】
시민군의 일원으로서 한바탕 전쟁을 치른 선호는 가족을 만나기 위해 집으로 들어와 가족의 안위를 확인하고 곧바로 되돌아갔다. 광주의 상황을 마치 보고라도 하듯 아버지와 가족들에게 이야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계엄군의 발포에 성난 시민들은 무장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군용트럭을 탈취했고 장갑차를 획득했다. 경찰과 예비군의 탄약고에서 총과 실탄도 입수했다. 그리고 대학병원 옥상에 기관총을 설치하여 계엄군과 맞섰다.
시가전이 시작되었다. 시민군은 재래식 무기만으로도 계엄군의 신무기를 마침내 밀어냈다. 계엄군은 조선대학교로, 주남마을로, 외곽으로 철수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여 꽃잎이 되었다. 도청 옥상에는 검은 리본을 동여맨 조기가 계양되었다. 맑은 하늘, 바람에 흩날리는 태극기는 차라리 의롭고 거룩했다. 꽃잎들 위에 태극기가 덮여지고 엄숙한 추도식이 눈물로 승화되었다.
살아남은 시민들은 수습대책위원회를 출범시켜 슬기로운 수습을 하고자 원했다. 수습대책위원회는 죽은 자들의 장례는 물론 차량통제에서부터 의료반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발적으로 움직였다. 병원차와 지프차로 시내를 돌며 절박하게 헌혈을 호소하는 방송을 보냈고, 자체적으로 치안을 담당했으며, 부상자를 위한 모금운동을 전개하고 일부 무기를 회수하면서 대표로 선출된 사람들은 계엄군을 만나 논의된 수습 안을 전달했다.
소식을 들은 광주 인근에서 항의시위는 들불처럼 번져갔다. 경찰서가 피습되어 점거되고 또 파괴되었다. 무기고는 습격당했고 광주의 참상을 전해들은 외곽의 시민들은 무장을 갖추고 광주로 속속 응원군으로 들어와 합류했다. 계엄군은 광주 외곽을 봉쇄했고 광주로 진입하는 차량에 무조건 발포했다.
【5월 23일, 꽃잎 떨어지다】
고립된 시민들은 광주의 안정과 회복을 간절히 원했다. 수백의 남녀 고등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시내를 청소하자 시청 직원과 시민들이 합세했다. 숙희의 오빠도 그 대열에 앞장섰다. 광주는 범시민궐기대회를 통해 안정을 되찾고자 노력했다. 질서회복과 평소 생활로의 복귀를 호소하는 민주시민강령이 선포되고, 장례반과 차량통제반이 구성되었고, 총기회수반은 무기를 자발적으로 회수했다. 부녀자들은 그들에게 무조건적인 식사를 제공했다.
분수대에 운집한 수만의 시민들은 장렬하게 산화한 이들을 가슴에 묻고 하늘로 보냈다. 그러나 여전히 꽃잎으로 떨어지는 피해자는 속출했다. 고립된 광주보다 광주를 고립시키려는 계엄군과 시민군이 외곽에서 충돌이 잦았다. 해남에서 교전 중 산화했고, 주남마을의 양민도 희생되었다. 하물며 버스를 타고 가던 승객조차도 아무런 이유 없이 총격을 받아 그대로 희생되었다.
사망자 명단과 인상착의를 알리는 벽보가 붙었다. 그러나 행불된 영호의 이름과 얼굴은 어디에도 없었다. 영호가 벽보에 없는 것은 어쩌면 어딘가에 살아있다는 반증이었으므로 오히려 다행이라고 식구들은 위안을 삼아야 했다.
【5월 24일, 꽃잎 떨어지다】
숙희가 또 앓아누워서 나는 온종일 집에 있어야 했다. 서울에 있는 여동생과 통화할 수도 없었고 영호의 소식은 점점 희미해져 갔으며 선호의 살얼음판 같은 행보는 숙희를 더욱 아프게 하였다.
광주는 생필품조차도 동이 나 버렸다. 선호는 직장을 나간다며 밖으로 나갔고, 틈틈이 영호의 소식을 수소문하고, 저녁마다 그날그날 돌아가는 상황을 상세히 이야기해 주었지만 어느 것 하나 해결된 것은 없었다.
시민들은 여전히 궐기대회를 통하여 민주수호를 외쳤다. 수습대책위원회에서는 미확인된 사망자까지 합쳐 산화한 주검이 6백여 명이며, 중경상자는 무려 2천여 명이라고 발표했다.
오후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비를 맞으며 꽃들은 여전히 속절없이 억울하게 떨어졌다.
【5월 25일, 꽃잎 떨어지다】
온종일 비가 왔다. 광주의 눈물일 터였다.
추기경의 메시지와 구호대책비가 전달되고, 교파를 초월한 종교단체와 재야인사들, 신부를 주축으로 수습 안이 만장일치로 채택되는 등 광주는 서서히 안정의 실마리가 잡혀가고 있었다. 학생 수습대책위원들은 범죄발생예방과 식량공급, 청소문제 등을 논의하며 신속하게 수습에 참여했다.
저녁 늦게 선호가 영호의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다. 어렵게 수소문한 결과 영호가 있는 곳을 알아냈다고 했다. 영호는 시위 첫날 학교에서 시위를 하다가 계엄군에 붙잡혀 상무대로 끌려갔다는 것이었다. 그곳 연병장의 비좁은 막사에 임시 수용되어 재판을 위한 수사를 받고 있다고 했다. 상무대에 끌려간 학생들 대부분은 굶주림은 물론 심하게 구타를 당하고 고문까지 당하고 있다고 전했다. 하지만 선호는 물론 그 누구의 힘으로도 당장은 면회조차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그러나 단지 영호가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족들은 커다란 위로를 받았다.
【5월 26일, 꽃잎 떨어지다】
먼동이 트면서 근 이틀 동안 내리던 빗방울이 간헐적으로 잦아들고 있었다. 선호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영호를 찾아가겠다고 가족들을 설득했다. 최소한 얼굴이라도 보고 오겠노라며 일단 한번 부딪혀보겠다는 돈키호테 식 발상이었다. 애당초 누가 만류한다고 들을 것도 아닌 사람이지만, 가족들도 영호가 걱정되어 적극적으로 말리도 못하는 처지였다.
나는 숙희의 근심에도 불구하고 선호의 트럭에 동승했다. 비록 아무런 힘이 되어줄 수 없다손 치더라도 그 혼자 보내기에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광주가 어느 정도 안정되어 가는 느낌도 들어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트럭을 모는 속도로 봐서 그의 마음은 동생을 만나게 된다는 생각에 다소 들떠 있는 듯 보였다. 골목골목을 빠져 곡예를 하는 행동이 마치 영호를 이미 만난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계엄군은 탱크와 중화기를 앞세우고 광주 외곽으로 나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먼발치에서 먼저 탱크를 발견한 그가 트럭을 갑자기 정지시켰다. 그는 계엄군에게 트럭이 발각된 것을 이미 알고 잠시 망설였다. 뒤돌아 도망쳤다가는 오히려 집중사격을 받을 수 있었기에 상황은 절박했다. 그는 탱크를 우회하여 샛길로 가는 척하며 슬금슬금 트럭을 접근시켰다. 계엄군의 눈을 피해 은근슬쩍 목적지로 이동하려는 심산이었다. 선호는 본능적으로 더 큰 화를 당할지도 모르는 일임을 직감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야, 뭐하는 새끼들이야!”
철모에 띠를 두른 다수의 계엄군이 총부리를 겨누었다. 그렇지 않아도 두려움에 절어 잔뜩 눈치를 살피며 긴장하고 있었는데 삽시간에 소름이 돋는 공포에 휩싸였다. 싸늘한 전율이 하늘로 솟구쳐 모든 생각을 정지시켰다.
“야, 내려! 씨벌 새끼들!”
계엄군은 대뜸 욕지거리부터 해대며 거칠게 윽박질렀다. 총부리를 들이대며 내리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는 계엄군의 기세에 눌려 나는 어떻게 차에서 뛰어내렸는지도 모른다.
“꿇어!”
엉거주춤 망설이는 선호를 향해 계엄군이 소리쳤다. 선호는 양팔을 머리에 대고 곧바로 무릎을 꿇었다. 나도 그를 따라 지체 없이 무릎을 꿇었다. 차마 계엄군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땅바닥에 눈동자를 깔았다. 계엄군이 가까이 다가오는 군홧발 소리가 공포스럽게 들려왔다. 하사 계급장을 단 놈이 막무가내로 소리를 질렀다.
“이 새끼들 겁도 없어. 지금이 어느 땐지 알고 쏘다녀?”
“어머니가 위독해서 급히 가는 길입니다!”
선호가 순간의 기지를 발휘했다. 그리고 뒤이어 실낱같은 희망을 찾고자 곧바로 군 경력을 들먹이며 표준말을 썼다.
“시청 직원입니다. 사실, 나도 공수부대 나왔습니다!”
“뻥 까고 있네. 몇 공수?”
“…7공수.”
계엄군은 선호의 군 경력을 듣고는 조금 주춤거리는 듯했다. 일이 생각보다 쉽게 풀릴 기미가 보였다. 선호는 이미 계엄군이 공수부대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럼, 옆에 있는 이놈은 뭐야? 머리 들어 인마!”
한 놈이 군홧발로 내 무릎을 냅다 걷어찼다. 짜릿한 전기가 무릎을 타고 등골로 전파되었다.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친동생입니다.”
선호가 옆에서 거들었다. 무릎을 까인 탓도 있었지만 눈물이 핑 돌았다. 갑자기 숙희 얼굴이 떠올랐다. 심한 입덧으로 하루가 멀다 하고 앓는 숙희의 얼굴이 점점 더 크게 달무리처럼 번져갔다. 안개처럼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끝이다 싶은 생각이 온몸을 엄습하며 휘감아왔다.
그러나 뿌옇게 흐려진 눈동자에 계엄군의 일행 중 한 명의 얼굴이 쏜살같이 달려와서 눈에
박혔다. 상상할 수도 없고 결코 있을 수도 없는 전혀 뜻밖의 만남이었다. 그가 계엄군이라니……. 철모를 깊게 눌러 썼지만 너무나 분명한 고향의 얼굴이었다. 그의 얼굴에서 황소가 떠올랐다. 그의 할아버지가 생각나고 국밥집이 생각났다. 충주의‘마즈막재’도 번개처럼 떠올랐다.
“야아, 민…민기야. 나 노수다!”
“헉! 노수, 니가 여긴 웬일이야?”
모기 소리처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의 나보다 총을 든 민기가 더 놀란 눈치였다. 군에 간다고 해서 송별회까지 하고 난 후 그동안 머릿속에서 민기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훈련을 마치고 자대에 배치된 것도 조금은 된 시간이었다. 하지만 계엄군이라니……. 하물며 이런 곳에서 이런 상황에 민기와 맞닥뜨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민기는 어쩌면 하늘이 내려준 천운이었다. 처절하게 맺어진 운명이 아니고서는 감히 상상이 되지 않는 순간이었다.
“뭐야? 조 일병, 이놈 아는 놈이야?”
하사가 민기를 쏘아보며 내뱉었다.
“예에, 친한 고향 친굽니다!”
“그래? 더럽게 운 좋은 놈이군. 그럼 조 일병이 잘 타일러서 빨리 돌려보내. 여기서 얼쩡대다가 큰일 난다구.”
민기만 남겨 놓고 다른 일행은 벌써 저만치 사라지고 있었다. 시민이 모르는 대대적인 공격을 준비하는 듯한 움직임이 그들의 부산한 몸짓에서 짙게 흘러나왔다.
나는 민기와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것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어마어마한 위기를 넘긴 안도감에 털썩 엉덩방아를 찧고 주저앉고 말았다.
“우린 공수부대가 아닌 사단 병력이야. 며칠 전에 용산에서 내려왔어. 지금 길게 얘기할 시간 없어. 차 끌고 빨리 시내로 돌아가 숨어. 밖에 쏘다니지 말구.”
민기는 용건만 짤막하게 말하고는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뛰어서 일행에게 돌아갔다. 절박한 상황에 민기와 나눈 이야기는 거기까지였다. 송별회를 하면서 함께 토하도록 술을 마시던 날, 잠깐 숙희 이야기도 했으니 내가 광주에 있는 이유를 곧 유추해낼 일이었다. 온몸의 땀구멍마다 진땀이 솟아있었다. 진땀은 다시 소름으로 되살아나 끈적거렸다.
선호와 나는 이마에 흐른 땀을 옷소매로 문질러 닦으며 서둘러 트럭에 올라탔다. 그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사선을 넘은 병사처럼 뒤를 돌아다보았다. 한참을 침묵하며 마음을 진정시킨 나는 겨우 민기와의 관계를 선호에게 설명했다.
이제 영호의 일은 어쩔 수가 없었다. 앞으로 영호의 생사는 영호의 판단과 슬기로움에 맡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처절한 운명 속에서 살아 돌아오기만을 기원할 수 있을 뿐. 선호는 나를 내려놓고 트럭을 갖다 놓기 위해 시청으로 간다며 다시 사라졌다. 그러나 트럭을 놓고 바로 온다던 선호는 저녁 무렵에야 나타났고 표정은 돌처럼 굳어있었다.
“거시기, 오후에 두 차례나 범시민궐기대회를 열었는디도 소용없당께. 계엄군이 다시 시내로 진입할 모양이여. 시민수습대책위원들이 계엄군의 시내 진입을 저지한다고 죽음의 행진을 감행해도 헛수고여. 대대적인 전쟁이 터질 것 같은 분위기여. 무장한 시민군이 도청을 비롯한 시내 중요 거점에 흩어져 최후의 일전을 준비하고 있어. 지금 고등학생이랑 여자들은 집으로 돌아가라며 종용하는 중이여. 나도 지금 가 봐야 혀!”
그러나 올케의 만류는 거의 사생결단이었다. 올케의 눈물로 선호는 계백처럼 처자식을 어찌하지 않고는 결코 떠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아버지와 숙희, 나 또한 선호를 말렸다. 그는 결국 주저앉았다. 폭풍전야 같은 공포가 어둠과 함께 내려앉았고 시내 전화마저 불통되었다.
무등산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5월 27일, 꽃잎 떨어지다】
광주의 어둠은 깊었다. 나의 어둠은 더 깊었다. 도대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내내 뒤척이며 선잠에 꿈틀거렸다. 돌아누워도 잠시였고 엎드려 누워도 잠시일 뿐이었다. 머릿속은 온통 민기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라의 부름을 받고 본인의 의지와는 다른 곳에서 형제의 가슴에 총을 쏘아야 하는 민기의 마음이 온전할 것 같지 않아 안타까움이 솟구쳤다. 계엄군은 누군가의 명령에 의해 진압봉을 휘둘렀다. 계엄군은 또 누군가의 명령을 받고 총을 쏘았다. 소꼴을 베고 여물을 끓이고 산소가 있는 할아버지 옆을 떠나지도 못했던 순박한 시골 촌놈에게는 너무도 가혹한 형벌이었다.
명령 앞에 군인은 쌀이나 총이나 피복만도 못한 일개 소모품일 뿐임을 민기는 알고 있을까. 비단 민기뿐이랴. 철모에 흰 띠를 두르고 명령 앞에 투입된 계엄군의 마음이 온전할 리 없다. 분노한 시민군 또한 무기를 들고 계엄군을 향해 총을 쏘고 싶었을 리 없다. 계엄군이나 시민군이나 그들 모두가 아름다운 꽃잎일 터였다. 결코 떨어져서는 아니 되는 꽃잎일 뿐이었다.
그들에 비하면 나는 비겁했다. 지난날들이 늘 비겁했고 광주에서는 더 비겁했다. 선호의 용기 앞에 비겁했고 영호의 신념 앞에서 비겁했다. 나는 부끄러움에 또 몸을 돌이켜 캄캄한 벽면을 목적 없이 마주보았다. 아직 어둠이 온 천지를 뒤덮고 있는 새벽인 듯했다. 갑자기 애절한 여자의 목소리가 어둠을 뚫고 메아리쳐 들려왔다. 초조하고 다급하게 귓속을 맴돌아 나가는 호소는 간절했다.
“계엄군이 쳐들어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계엄군이… 쳐들어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확성기의 잡음과 뒤섞인 여자의 목소리는 작아졌다가 커지기를 반복하며 점점 아련한 곳으로 멀어져 갔다. 나는 애절한 목소리 앞에 더 비겁하여 굼벵이처럼 몸을 움츠렸다. 요란한 굉음과 함께 웅웅웅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탱크 바퀴에서 뿜어내는 마찰음이 땅바닥에 바짝 엎드린 지네처럼 빠르게 달려왔다. 방바닥이 지진 난 듯 흔들리며 흐느꼈다. 멀리서 시가전이 전개되고 있는 듯 총소리가 콩 튀는 소리처럼 탁탁거렸다. 마침내 폭음이 울리고 수류탄 터지는 소리가 천지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기관총 소리가 밤하늘을 찢었다. 헬기의 프로펠러 소리는 하늘과 땅을 뒤흔들었다. 지붕은 요란한 굉음의 파장에 맥을 못 추고 울어댔다.
마지막까지 싸울 것을 결의하던 시민군은 피 흘리며 꽃잎으로 쓰러져 갈 것이다. 쏟아지는 강력한 무기 앞에 구식 무기를 부여잡고 피 흘리며 유린당하고 있을 것이다. 숭고한 신념 앞에 서슬이 퍼런 용기를 불사르고 꽃잎처럼 쓰러질 것이다. 누가 강요하지 않았다. 그들의 신념과 들끓는 심장이 그들로 하여금 분연히 일어서게 했다. 고등학생도 있고, 대학생도 있고, 시민도 있고, 대한의 아들딸들이 모두 있을 것이다. 숭고하고 거룩한 꽃잎들이 캄캄하고 어두운 그곳에서 외롭게 떨어지고 흩날릴 것이다.
나는 숨을 죽이고 마침내 머리를 방바닥에 찧었다. 마치 참호 속에 갇혀 웅크리고 있는 소년병처럼 엄청난 공포 앞에 나는 더욱더 비겁하게 몸을 도사렸다.
영호의 방에서 혼자 비겁하게 앉아 있던 나는 불현듯 숙희가 궁금해졌다. 그녀가 놀랄 것을 생각하니 심장이 찢어질 듯 죄여왔다. 슬금슬금 기어 나와 그녀가 있는 아버지의 방으로 건너갔다. 굉음에 놀라 잠을 깬 식구들이 이미 아버지가 있는 안방으로 모두 모여 있었다. 행여 집중 공격의 대상이 될 것을 염려한 선호가 불을 켜지 못하게 해 방 안은 칠흑 그 자체였다. 어둠 속에서도 서로의 놀란 눈동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서로 눈치만 살필 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동안의 시위와는 분명히 다른 굉음과 요란한 총소리에 모두들 넋을 잃은 것 같았다. 올케와 조카들은 선호의 무릎에 엎어져 서로 엉킨 채 몸을 웅크렸다. 숙희가 사시나무 떨 듯 몸을 떨며 두더지처럼 내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숙희를 부셔질 정도로 꼭 껴안았다. 미동조차 할 수 없었다.
순간 담벼락 가까이에서 찢어질 듯한 총소리가 여러 번 들려왔다. 가족 모두 방바닥에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신음소리가 들렸다.
“거시기, 먼 소리여? 모두들 시방 괜찮은 거시여?”
흥분한 선호의 목소리가 어둠 속을 낮게 기어서 들려왔다. 납작 엎드린 채 서로를 확인하며 번뜩이는 눈동자가 방 안을 굴러다녔다.
또 신음소리가 들렸다. 문밖이었다. 그러나 문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엄두도 못낼 일이었다. 신음소리는 더욱 애절하게 방 안으로 구조신호를 보냈다.
“안 되겠어. 나라도 잠깐 나가봐야 할까 봐! 혹시 영호인지도 모르잖아?”
나의 조용조용한 속삭임에 숙희는 재빨리 팔을 잡아끌었다. 만류하는 숙희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것은 오로지 사랑하는 사람의 새 생명을 몸속에 지니고 있는 여인의 마음일 터였다. 그러나 더는 비겁하게 있을 수 없었다. 꽃잎으로 떨어져 쓰러지는 그들 앞에 마 이렇게 초라해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떳떳하지는 못할망정 최소한 비겁하지는 말아야 했다.
나는 발목까지 잡아끄는 숙희의 손을 뿌리치고 주변을 경계하며 엉금엉금 툇마루 밖으로 나왔다. 컴컴한 어둠 속에서 탱자나무 덤불에 엎어진 사내가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넘어질 때의 충격으로 탱자나무 울타리의 한쪽 모서리가 움푹 무너져 있었다.
그를 구해야만 했다. 이 상황에서 그를 구하지 않는다고 나를 비난할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총에 맞아 생사의 갈림길에서 신음하는 이가 눈앞에 있지 않은가! 피 흘리며 탱자나무 가시에 얽혀 있는 꽃잎을 쓰러지지 않게 해야만 했다. 며칠째 수많은 꽃잎들이 떨어져 그렇게 흩날리지 않았던가! 그렇게 이름도 없이 사라지지 않았던가!
골목 어귀를 살펴보니 유령처럼 어둠 속을 분주히 뛰어다니는 계엄군들이 눈에 들어왔다. 뛰어다니는 검은 몸짓이 마치 야생 동물의 움직임처럼 민첩했다. 서너 마리씩 무리지어 사냥하는 짐승의 습성이 누군가에 의해 그들에게도 교육되어져 있었다.
도청 언저리 하늘은 갑자기 검붉게 빛났다가 다시 어두워졌다. 무엇인가 터지는 강렬한 굉음은 여전했고 총구를 떠난 총소리는 서로 뒤엉켜 메아리가 되어 이어졌다.
나는 슬금슬금 기어가 그를 일으켜 세웠다. 앳된 얼굴이 영호 또래의 대학생인 듯 보였다.
“…괜찮으세요?”
“빨리 피해브러요!”
다행히 큰 상처는 아닌 듯싶었다. 학생은 엉금엉금 기며 어린아이처럼 나에게 매달렸다. 일순 다시 여러 발의 총소리가 사방에서 터지며 골목으로 흩어졌다. 총부리를 떠난 불꽃은 별똥별 같은 획을 그리고 산지사방으로 어둠 속을 가르고 날아다녔다.
순간 아뜩했다. 황소 뒷발에 된통 차인 것처럼 등가죽이 아팠다. 갑자기 다된 전구가 깜박인 듯 순간적으로 정신이 나갔다가 들어왔다. 명치를 맞은 것처럼 호흡이 턱에 걸려버렸다. 목구멍에 걸린 이물질의 느낌은 식도를 막고 신선한 공기를 철저히 가로막았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학생을 일으켜 세우려던 무릎이 저절로 풀썩 꺾어졌다.
선호가 뛰어나왔다. 뒤이어 숙희가 맨발로 뛰쳐나왔다. 그녀는 비명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나를 부둥켜안았다. 그녀의 흰옷이 빠르게 붉은 피를 빨아먹었다. 내 가슴 언저리는 따듯하고 끈끈한 액체로 미끈거렸다. 뼈의 이음새가 마디마디마다 분리되고 있었다. 몸속에 흐르던 피가 밖으로 튀어나가 뜨거움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근육이 마비되어 그녀가 만져지지 않았다. 숙희의 몸속에서 숨 쉬고 있을 녀석조차 이제 느낄 수 없을 터였다.
숙희의 뜨거운 물방울이 얼굴로 떨어졌다. 그녀의 애처로운 절규가, 눈물진 얼굴이 내 얼굴을 비볐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그녀의 절규는 아련하게 흩어지는 바람처럼 귓속을 맴돌아 나가며 서서히 멀어졌다. 그녀의 절규, 울부짖음은 내 귓가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기나긴 잠의 유령이 성큼성큼 가까이 다가왔다. 치명적인 고요였다. 숙희의 눈물범벅인 눈동자에 아스라한 내가 비쳤다. 내 눈동자에도 절규하는 숙희가 있을 터였다. 숙희의 눈동자에 있는 나는 점점 더 희미하게 옅어져 가고, 내 눈동자에 있는 숙희의 얼굴은 점점 아뜩하게 스러져갔다.
아뜩하게…… 고요 속으로…… 끝섬으로 스러져갔다.<끝>
첫댓글 이설 작가님 충주를 무대로 작품을 완성하셨군요
독자들로부터 많은 사랑 받으시리라 믿어집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꽃잎이 무심하게 날려 땅바닥을 붉게 물들였던, 속수무책 바라만 보아야 했었던 광주 사태와 최근의 미얀마 사태가 오버랩 됩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