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의 낙랑군이 먼저 있었고, 그 다음은 경상북도 위쪽과 와 강원도 남부를 차지했던 조문국이 있었고, 대동강에 위치한 낙랑국이 있었다. 이들을 낙랑, 또는 국이라고 기록해 놓았으니 헷갈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AD37년 기록을 보면 분명히 이때의 낙랑은 낙랑국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머지 대륙의 낙랑과 조문국을 낙랑이라고 표현해 놓고, 남해왕 원년에는 낙랑병을 기록해 놓아 또 헷갈리게 했으니, 박혁거세 당시에 신라를 침범했던 낙랑은 조문국이며, 바로 진한의 맹주였다. 남해왕 원년에는 차마 6부의
병사들이 [실제는 6국의 병사] 금성을 여러겹으로 포위했다고 쓰지 못하고 낙랑병으로 대체하여 표기해 놓은 것이다. AD18년에 신라에 온 고구려의 비속7국이 박혁거세를 천자로 추대했으며, 국호는 계림이라 하였으나 AD42년에는 6국이 반란을 일으켜 박혁거세와 알영을 처형하고, 금성을 포위하였던 것이다. 이때의 남해왕은 고(孤)라고 하였으니 소국의 왕을 의미한다. 6국의 반란으로 인해 신라는 천자국에서 소국으로 전락했던 것이다. 탈해가 7국의 왕들에게 추대받아 태보가 되어 정권을 장악하며, 남해왕은 귀신
에게 제사만 지내는 무당과 같은 일만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남해왕이 아닌 남해차차웅이 된 것이다.무당의 풍습은 여인국에서 즐겨하던 것으로, 고구려의 도움도 있었겠지만, 여인국의 도움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원래 경주 자체가 여인국의 도읍지었기 때문이다. 여인국은 초대 여왕 이름인 사라 즉 사라국으로 6세기까지 불리기도 했다. 여인국의 여왕과 이씨, 박씨, 석씨, 김씨는 혈연이 맺어져, 후대에 신라의 건국이 아닌 여인국의 건국인 BC57년을 신라사람들 자신의 건국 연도로 삼았다고 생각된다. 마치 고구려가 부여의 시조 동명왕이 건국한 BC232년을 자신들의 시작으로 삼았던 것을 따라했다고도 생각된다.
고구려 [BC232-AD668, 900년], 신라 [BC57-AD935, 992년]
실제 고구려 [BC37 -AD668, 705년], 신라 [AD14-AD935, 922년]
아래는 이전에 쓴 글....
*************************************************************************
남해왕원년(AD42 추정)의 낙랑병사는 바로 신라의 6부병사이다.
몽골의 쿠릴타이처럼 6부촌장의 회의를 통해 혁거세와 알영을 죽이고,
이서국을 멸망시켰으며, 왕성인 금성을 여러겹으로 포위한 것이다.
*********************************************
30년(기원전 28) 여름 4월, 그믐 기해일에 일식이 있었다.
낙랑(樂浪) 사람들이 병사를 일으켜 쳐들어오려다가, 그곳 사람들이 밤에 문을 잠그지 않고 지내며, 들에는 노적가리가 잔뜩 쌓여 있는 것을 보고 서로 말하였다.
“이 지방 백성들은 도둑질을 하지 않으니, 법도가 있는 나라라고 할만하다. 우리가 몰래 군대로 습격한다는 것은 도적과 다름없으니, 어찌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곧바로 병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원년(서기 4) 가을 7월, 낙랑(樂浪)의 병사가 와서 금성(金城)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다. 임금이 가까운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두 분의 성인이 세상을 떠나시고 내가 백성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으나 이는 잘못된 일이다. 조심스럽고 위태롭기가 마치 냇물을 건너는 것과 같다. 지금 이웃나라가 침범해오니, 이는 나에게 덕이 없는 탓이다. 이를 어찌하면 좋겠는가?”
측근들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적은 우리나라에 국상이 난 것을 요행으로 여기고 함부로 침범해왔으니, 하늘은 절대 그들을 돕지 않을 것입니다. 전혀 두려워할 일이 아닙니다.”
얼마 후에 그들이 물러갔다.
元年 秋七月 樂浪兵至圍金城數重 王謂左右曰 二聖棄國 孤以國人推戴 謬居於位 危懼若涉川水 今隣國來侵 是孤之不德也 爲之若何 左右對曰 賊幸我有喪 妄以兵來 天必不祐 不足畏也 賊俄而退歸
첫댓글 元年 秋七月 樂浪兵至 圍金城數重 王謂左右曰 二聖棄國 孤以國人推戴 謬居於位 危懼若涉川水 今鄰國來侵 是孤之不德也 爲之若何 左右對曰 賊幸我有喪 妄以兵來 天必不祐 不足畏也 賊俄而退歸
南解 원년(AD4년, 甲子)=> 南解 1년(AD68년, 戊辰)
가을 7월, 樂浪(낙랑)의 군사가 와서 金城(금성)을 몇 겹으로 둘러쌌다. 왕이 좌우의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두 성인이 나라를 버리시고, 내가 나라 사람들의 추대로 그릇되이 왕위에 있어, 두려움이 마치 냇물을 건너는 것과 같다. 지금 이웃 나라가 와서 침범하니, 이는 내가 덕이 없는 까닭이다. 이를 어찌하면 좋겠는가?"
좌우의 신하들이 대답하였다.
"적(賊)이 우리가 국상(國喪)을 당하였음
"적(賊)이 우리가 국상(國喪)을 당하였음을 다행으로 여겨서 망령되게 군사를 이끌고 왔으니 하늘이 반드시 도와주지 않을 것입니다. 지나치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적이 잠시 후에 물러갔다.
*AD68년- AD4년= 64년 편차.
탈해가 AD42년에 왔는데, 어떻게 남해왕 원년을 AD68년이라 하는지....
@크크리 혁거세 39년이라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실제는 혁거세 29년인 AD42년이었습니다.
@크크리 *AD68년- AD4년= 64년 편차.
64년 편차가 나니까..남해왕 원년이 AD68년이 맞지요..
@라디오 AD8년 신라건국은 박혁거세가 BC5년생 즉 부여의 왕녀 파소의 아들일때 가능한 얘기인데,
그 때 과연 도절이 임신을 시킬만한 나이였는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BC6년에 결혼했다고 하는데,
그때 나이 겨우 14살입니다. 그렇다면 신부나이는 얼마나 됐을 것이며, 불가능한 얘기입니다.
신라 땅이 원래 여인왕국의 땅인데, 도절조차 왕이 못된 이유가 뭐겠습니까? 여인왕국에서 동의해주지 않았고, 대신 여왕과의 사이에 낳은 박혁거세를 왕으로 올리는데 동의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박혁거세는 AD2년생이어야 맞는 겁니다.
@크크리 남당유고나 삼국사기에 AD1년에 도절이 죽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명백한 거짓이고, 도절과 결혼한 대소의 딸이
죽었다고 봐야 맞는 겁니다. 과연 아들이 있는데, 대소의 딸이 죽었을까요? 자살로 추정하는데, 아들이 있었다면 그런 선택을 하지는 않았을테고, 도절이 배를 타고 왜를 거쳐 신라로 오는 일도 없었을 겁니다.
삼국유사에는 <고본(古本)에는 임인년에 이르렀다>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AD 42년이 임인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