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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우리 민족의
문자 한글. 우린 한글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현재 대부분의 책이나 교과서엔 한글의
창제는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이 공동으로 만든 것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이 상식은 정확한
것일까요?
한글 창제 당시의 기록으로는 그런 증거가 하나도 없습니다.
친제했다고 하는
사실을 잘 모르는 시절에 그런 설이 나와서 모든 사람한테 마치 사실인 것처럼 유포 된 것이죠.
실록에 전혀
그런 말이 없습니다.
아주 잘못된
사실을 온 백성이 알고 있는데 세종이 무덤 속에서 통탄하고
있을 겁니다.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짜와로 서르 사맛디 아니할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훈민정음의 서문입니다.
내 이랄 위하야
어엿비 너겨 새로 스믈여ㅤㄷㅡㄼ짜랄 맹가노니...
즉 내가
스물여덟 글자를 새로 만드나니...
라고
적고 있는데 그동안은 별 생각 없이 지나쳐온 이 문구는 집현전 학자들이 한글을 만들지 않았다면 이것은 세종 혼자 만들었다는 뜻으로
기록한 셈이 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한글을 만든 것은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이 공동으로 연구한 결과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상반된 주장이 나오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한글 창제 과정에
얽힌 의문점들을 하나하나 되짚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한글이 창제된 직후 신하들이 아주 강력한 반대 상소를 올렸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반대 상소를 올린 것은 누구였을까요?
반대상소를 올린 것은 바로 집현전의 학자들이었습니다.
세종과 더불어 한글을 만들었다는 집현전 학자들이 한글창제 이후 한글을
비난하는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한글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1443년 세종 25년의 일입니다.
실록엔 이것에
대해 매우 간략한 기록만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훈민정음의 창제는 당시 큰 파문을 불러 일으키게 됩니다.
관료들이 집단으로 상소를 올려 한글 창제를
반대하고 나섰던 것입니다.
집현전
부제학이었던 최만리를 대표로 신석조 김문 정찬선 등 모두 일곱 명의 학자들이
반대 상소를 올린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 집현전 소속으로 집현전 내에서도 높은 지위에 있던 원로
학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상소를 올린 건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이들은 상소를 통해 한글 창제가 세종의 독단적 행동이었던 것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훈민정음이 만들어지고
있단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최만리도 아마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있단 걸 그때 와서 알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
전에는 그런
기록들이 없고, 적어도 집현전의 대제학은 하나의
명예직이자 겸직이지만 부제학은 실무 담당 책임자입니다.
그분의 상소가 그때야 올라온 것을 보면 미리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그전까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게
아닐까요?
집현전의 최고
책임자였던 최만리가 한글 창제를 몰랐다면 창제 과정에 집현전 학자들이 참여했다는 것은 어떻게 된 것일까요?
한글 창제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진 학자는 정인지 최항 신숙주 성삼문 등 모두
일곱 사람입니다.
반대 상소를 낸
학자들이 원로라면 이들은 대부분 ㅤㅈㅓㄼ은 나이로 소장학자에 속합니다.
집현전 칠 학사라고도 불리는 이들의 이름은
조선시대 문헌에서도 자주 언급되고 있습니다.
오래된 기록인
성연의 용재총화를 보면 세종이 신숙주 성삼문에게 명해 언문을 지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집현전 칠학사 중에서도 한글 창제와 관련해 가장 주목을 받는 학자는
신숙주입니다.
세종의 총애를
받았을 뿐 아니라 한글 관련 사업에 가장 많이 동원된 사람이 바로 신숙주였기 때문입니다.
신숙주는 외국어에도 능통했다고 알려졌습니다.
중국어 일본어 등 5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사실도 그가 한글 창제에 참여했을 거라는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신숙주의 문집인
보한제집에는 그의 행적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신숙주가 직접 쓴 글을 비롯해 당대
학자들이 기록한 그의 일대기가 실려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한글 스물여덟 글자를 만든 것은 세종이라고
적혀있습니다.
신숙주가 한 일은
세종의 명을 받아 한글 서적을 편찬하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동안 학자들이 주목한 것은 신숙주가 요동에 다녀왔다는 기록입니다.
당시 요동에 귀향와 있던 중국의
언어학자 황찬을 만나기 위해 성삼문과 함께 요동을 방문했다는 것입니다.
신숙주가 황찬을
만난 것은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서였다고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질문한 것은 한글을 만드는 것에 대해서 질문한 것이 아닌 한자음을 바로 잡기
위한 것... 한자음에 관한 질문을 하러 간
것이었습니다.
한자음에 관한
이론이었던 성운학에 대해 물은 것이지 우리 한글을 만드는데 직접적인 조언을 듣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조선실록을 보면
연도를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숙주가 황찬을 만나기 위해 요동으로 간 것은 언제일까요?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해 보기로 합니다.
검색결과 신숙주가 최초로 요동에 간 것은 1447년 1월. 한글이 반포된 지
1년 2개월 후의 일이었습니다.
실질적인 일은
신숙주나 성삼문이 했다고 하는데 성삼문은 집현전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고 신숙주는 세종 25년 말에
훈민정음이 창제가 공표됐는데 23년 집현전 학사가 되고나서는 일본에 가 있었습니다.
훈민정음 창제에 관여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한글 창제에
집현전 학자들이 참여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히려 원로 학자들은 한글 창제 자체를
반대했고 ㅤㅈㅓㄼ은 학자들도 한글 서적을 만드는데 참여했다는 사실만을 밝혀냈던 것입니다.
결국 세종 25년에 만들어진
한글 스물여덟 자는 그들의 공로라고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한글 스물여덟
글자가 만들어진 것은 세종 25년이고 이 훈민정음 책이 만들어진 것은 그로부터 3년 뒤인 세종 28년의
일입니다.
만약 집현전
학자들이 훈민정음 책을 만드는 데에만 동원됐다면 세종 25년에 만들어졌다는 한글 스물여덟
글자는 세종 혼자서 만들었다는 얘기가 되는데 과연 그것은 가능한 것이었을까요?
세종은 조선
왕조 오백 년 뿐 아니라 우리 역사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업적을 남긴 문화적 군주였습니다.
농업, 천문, 의학 등을 장려해 측우기, 해시계, 물시계 등 수많은 발명품을
만들어 냈고 각 학문 분야에서 뛰어난 성과를 올린 전문
서적들을 수백 권 씩 만들어 낸 것도 바로 이 시기였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 역사에서 그가 재위했던 삼십이
년간보다 과학기술이나 문화가 발달했던 시기는 없었다고까지 평가합니다.
이 모든 것은 세종이라는 임금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과를 보인 이 문헌들을 살펴보면 그 일을 맡았던 실무자의 이름이
명확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독 한글만은
세종이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현존하는
훈민정음에 관한 책 중 가장 오래된 것은 훈민정음 해례본입니다.
바로 이것이 세종 28년 한글
반포를 위해 집현전 학자들이 만든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해례본은 한글의 글자 하나하나에 대한 해석을 담은
책입니다.
집현전 학자였던
정인지가 쓴 이 책의 서문 중에 한글을 만든 사람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전하창제
여기서도 훈민정음 스물여덟 자를 만든 것은
세종이라고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신하들이
만들었는데 관례에 의해서 임금이 한 것으로 기록하지 않았을까 ....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다른 경우를 보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세종대왕 때
한글만 만든 것이 아니라 다른 사업도 많이 했는데
관련 기록에는 그 일을 한 사람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 당시 사람들의 인식을
생각하면 한글 만든 것은 대단한 공이 아닌 오히려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임금이 하고 있다고 보는 견해였기 때문에 공을 임금에게
돌리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는 일입니다.
세종 스스로
한글을 만든 것이 자신임을 드러낸 것입니다.
세종이 직접
쓴 글 속에서도 한글 창제를 다른
사람에게 명해서 만들게 했다는 말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같은 사실은
훈민정음 서문을 통해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한글 스물여덟
글자는 자신이 직접 만든 것임을 밝힌 것입니다.
친제라고 하는
표현은 훈민정음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세종이 한글을 만들었다는 사실에 대해 세종의 여러 가지
배경과 능력을 봐서라도 조금의 의심할 여지도 없습니다.
세종은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고 합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책에 몰두해 건강이
나빠지기 일쑤였습니다.
그 때문에
아버지였던 태종이 글을 읽지 못하도록 책을 모두 빼앗았다는 기록도 전해집니다.
세종은 이미 왕자 시절에 학문에서 상당한 경지에 올라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세종 이분은
학문의 대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임금이 된 이후에도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꼭 공부를 하십니다.
경서류에서 안 본 책이 없다..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책은 다 봤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세종은 언어학에도
조예가 깊었습니다.
세종의 반박은
단호했습니다.
세종 스스로
언어학에 대해 자신감을 느끼고 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와같은 세종의
반박에 대해 당시 이름난 학자였던 집현전 학사들은 단 한마디도 대꾸하지 못했습니다.
최만리가 집현전
책임자였는데 다른 말로 하면 당시 최고의 학자라고 할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런 당대 최고
학자 앞에서 세종의 말은 아무리 임금이라도 자신이 뛰어난 학문적 역량이 없으면 할 수 없는 말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한글을 만든
직후 세종은 동국정운을 편찬하도록 명합니다.
이것은 방대한
분량의 중국 음을 모두 한글로 ㅤㅇㅛㄻ겨
적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신숙주가 쓴
서문에 따르면 음 하나하나까지 모두 임금의 재가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음운학에서 당대 최고의 학자가 바로 세종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훈민정음 창제 과정에서 집현전 학자들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정인지가 쓴 훈민정음 해례에서 그
단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세종의 명을
받아 한글 스물여덟 글자의 원리와 용례를 해석하는 일을 맡았다는
것입니다.
이같은 기록으로
볼 때 집현전 학자들은 한글 스물여덟 자의 해석과 동국정운 등 한글 서적의 편찬사업에 관여했을 뿐이었습니다.
그것도 세종의 지시를 일일이 받아서 이루어낸 일들입니다.
세종이 임금이기
때문에 학자라는 사실이 가려지는데 세종은 왕이면서도 매우 뛰어난 언어학자였습니다.
언어학자
였다는 사실을 강조하지 않는데 임금이 아니었다면 언어학자로서 세계사에 이름이 오르내렸을 거라고 봅니다.
세종이 한
여러 가지 업적을 보면 세종은 뛰어난 언어학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세종대에 이뤄진
한글 관련 사업의 최고 책임자 그것은 당대 최고의 언어학자였던 세종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훈민정음이라고 부르는 이 책은 사실은 두 권의 책이 하나로 묶여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왼쪽의 책은
훈민정음이라고만 적혀 있고 오른쪽 책에는 훈민정음 해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용례를 풀어서 기록했다는
뜻입니다.
왼쪽의 책이
원래 훈민정음이고 오른쪽은 그 뒤에 해석을 위해 붙인 책인 것입니다.
이
두 권을 살펴보면 글자꼴과 크기가 서로 다른데 이 책이 각각 다른 사람에 의해 작성됐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왼쪽 책이 세종 25년에 작성된 어제 훈민정음 즉 세종이 직접 만든 훈민정음이고 오른쪽은 세종의 명을 받고 집현전
학자들이
정리해서 만든 일종의 설명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집현전 학자들이 동원된 것은 글자가 다 만들어지고 난 뒤에
해설서를 만들기 위해서였고 한글 스물여덟 글자는 세종 혼자서 만들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세종이 아무리
뛰어난 언어학자였다고 하더라도 혼자서 이런 일을 해낼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만약 혼자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우리말로 탄생하기까지는 무수한 시행착오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에 우리말에 맞도록
하기 위해서는 수없는 실험도 해야할 것이고 실제로 사용도 해봐야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일들을 세종이
혼자서 해결할 수가 있었을까요?
혹시 세종에게
우리가 모르는 협력자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훈민정음 창제를
둘러싸고 떠도는 이야기는 많지만 그중 믿을 수 있는 이야기는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그중에서 구체적인 기록을 가진 가문이 있다고 해 확인해보기로합니다.
바로 세종의 둘째 딸인 정의공주와 관련된
것입니다.
한글을 창조하고
창제한 것을 민간인에게 실험하는 일을 정의공주께서 했다는 이야기를 어릴 때 들었습니다.
한글을
만들었다고까지 이야기되는 세종의 둘째 딸 정의공주는 죽산 안씨 가문으로 출가합니다.
그런데 이
가문의 족보에 시집온 그녀가 세종의 명을 받아 한글을 창제를 도왔다는 기록이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세종이 한글의
변음과 토착을 풀 것을 여러 대군에게 하명했으나 대군들이 풀지 못하자 정의공주에게 하명하여 정의공주가 풀어낸
뒤에 세종이 극찬하며 노비 수백 명을 하사하셨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정의공주가 했다는 변음 토착에 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습니다.
다만 이것이 민간에서 사용하던 언어나
사투리가 아니었을까 추정해 볼 뿐입니다.
한글 창제 과정에서 정의공주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기록은 한글을
만드는 과정에 세종의 직계 가족이 참여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집현전 학자들을
중심으로 추진된 한글 서적 편찬 사업에도 세종의 가족들이 깊숙이 개입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글 창제 후 처음 시작한 사업이 바로 운회를 번역하는 것. 이 일에
왕자들이 동원된 것입니다.
한글이 창제되고
난 삼 개월 뒤부터 한글 관련 사업이 시작되는데 그때 총책임자는 세자가 맡았습니다.
이는
한글을 만드는 과정에서 세종과 대군들 간에 의견 교환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이때 처음 집현전의 젊은 학자 몇이
참가했고 그 후 최만리의 반대 상소문이 나옵니다.
운회를 번역하는 일에 참여한 왕자는 모두 세 사람.
이들이 번역 사업의 책임자가 된 것은 왕의 아들이라서가
아닌 다른 누구보다도 한글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문종과 관련해
직해동자습이라는 책에 재밌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이것은 신숙주와
함께 한글을 만든
장본인으로 지목되는 성삼문이 쓴 기록이라는 점에서 눈길을 끕니다.
성삼문은 이 글에서 한글을 만든 것이 세종과
문종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것을 뒷받침해 줄
만한 다른 기록은 없지만, 한글창제에 왕자들이 참여했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인 셈입니다.
그렇다면 세종은
왜 한글을 만들려고 했던 것일까요?
이것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지만 세종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단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삼강행실도입니다.
이 책이 만들어진
동기는 세종
10년에 있었던 일 때문입니다.
진주사람 김화가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에 충격을
받은 세종은 모두 자신의 잘못이라고 자책하며 효자, 충신 등의 사례를 담은 행실도의 간행을 제시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삼강행실도는 내용과 함께 그에 맞는 그림을 그려 넣었습니다.
글을 모르는 사람도 그림을 보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한 배려였습니다.
그러나 세종은
문자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이 그림만으론 제대로 된 뜻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며 안타까워합니다.
문자 창제 필요성에 관한 최초의 언급입니다.
그리고 십 년 뒤
훈민정음 서문에서 어리석은 백성과 문자라는 단어가 다시 나타납니다.
삼강행실도에 백성이 알
수 있는 문자를 붙이고 싶었던 세종.
그러나 신하들의
반대로 사업은 중단되고 훗날 성종 때 이 책은
간행됩니다.
한글 창제는
세종이 신하들 몰래 자식들을 데리고 십여 년간을 추진해 온 비밀스런 연구의 결과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세종은 비밀리에 문자를 만들어야 했던 것일까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절대적인 존재인
왕조국가의 왕이 무엇이 두려워 이렇게 비밀리에 문자를 만들어야 했던 것일까요?
이렇게까지 하면서 훈민정음을
만들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한글이 만들어진
직후 세종은 큰 곤경에 처합니다.
한글 창제를
찬성하는 이는 없는 반면 가장 신임하던
집현전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섰기 때문입니다.
최만리 등의
학자들은 상소를 통해 왕의 행동은
사려 깊지 못한 일이라며 강력하게 비난합니다.
이들이 감히
세종에게 도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중국과의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이런 사실을 중국에서 알기라도 하면 어떻게 되겠느냐며 최만리는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당대 학자로서는
상식적인 생각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모두가 그러한
소양을 가지고 있었고 우리나라
상류사회의 문자생활은 이미 중국의 한자로 이뤄져 있었기 때문에한글을 따로 만든다는 것은 그들에게 필요하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도리어 상소문에도 나오듯이 오랑캐가 되려 한다는 비난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왕이 명령한다
해도 집현전 학자들이 반대할 것이 불 보듯 뻔한 일이었기에 비밀리에 만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한글이
창제되기 전 신하들의 반대가 있었다면 한글 창제는 불투명했을 것입니다.
이 같은 가능성을
엿보게 하는 것이 내불당 사건입니다.
세종이 궁궐
내에 법당을 지으려 하자 신하들이 대대적으로 반대 하고
나섭니다.
나라의 국교가
유교, 즉 성리학인데 왕이 불교를 숭상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해동잡록에는
당시 신하들의 반대가 어느 정도였는지 보여주는 기록이 있습니다.
집현전학자들은 자신들의 의견이
관찰되지 않자 업무를 중단하고 모두 집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이에 세종은 당시 영의정이었던 황희를 붙잡고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아무리 임금이라
하더라도 명분을 앞세운 신하들의 주장을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더욱이 글 모르는 백성을 위한 한글 창제는 양반계층의 이익과는 상반되는
것이었기에 반대는 더욱 거셀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당시 최만리 등의 양반계층은 한문를 배워서 한문으로 문자 생활을 하고 이것이
다른 일반 백성과 구별되는 증거이기도 했기
때문에 굳이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는 새로운 글을 만들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고유의 글을 가진
일본, 여진 등을 오랑캐라고 무시하는 대목이 상소문에 나옵니다.
한마디로 자신들로서는 필요 없다는 이야기인데 세종은 글을 아는 사대부의 처지에서 보지 않고 글을 모르는 어리석은 백성의
처지에서 봤기 때문에 필요하다고 보는 의견 차이가 생겨난
것입니다.
내불당 사건
때와는 달리 세종은 반대론자들에 대해 매우 단호하게 대처합니다.
반대 상소문을 올린 집현전
학자들을 전원 하옥시키면서까지 한글의 사용을 추진하려 했던 것입니다.
한글 창제 전에 이 사실이 신하들에게
알려졌다면 한글은 탄생 자체가 불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당시의 명분과는
어긋나는 한글 창제.
한글은 세종이
신하들을 따돌리는 비밀작업으로 마침내 이루어낸 거대한
비밀 프로젝트였던 것입니다.
한글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험난한 과정을 거치고서야 태어날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세종은
어떻게 학자들의 도움도 없이 새로운 스물 여덟 자를 고안해 낼 수가 있었을까요?
훈민정음의
서문과 실록을 보면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가방고전
옛 글자를 참고했다는 뜻인데 과연 그럴까요?
이 한 구절
때문에 한글의 기원에 관한 수많은 논란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한글 창제 당시
우리 주변에는 한자 이외에 여러
문자가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몽골
문자를 두고 많은 사람이 우리 한글의 기원이 되는 글자가 아닌가 추측하기도
했지만
글자꼴이 닮은 것이 거의 없습니다.
그 중 몇 자가 비슷하다고
해서 그것이 한글의 모태라고 보기엔 어렵습니다.
만약 한글이
어떤 문자를 참고했다면 가장 가능성이 큰 문자는
어떤 것일까요?
이곳에 있는 한
작은 마을의 어귀에는 이상한 글씨의 비석이 있습니다.
여기에 새겨진 글자가 한글의 기원과
관련해 주목받는 것입니다.
비석엔 마치
한글을 풀어쓴 듯한 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일본에서
는 이 글자를 신대문자라고 부릅니다.
일본의 한문이 들어오기 전인 신대에 사용하던 문자라고 믿는 것입니다.
북한의
학계에서는 바로 이 글자가 고조선의 문자가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
같은 신대문자는 현재 일본 전역에 흩어져 있습니다.
주로 조상신을
모시는 신사 등에 많이 남아있는데 그 분포
지역만 해도 백여 군데가 넘는다고 합니다.
한글과 똑
닮아있는 이 글자를 일본사람들은 어떻게 발음하고 있을까요?
놀랍게도 이 글자는 한글과 똑같이 발음되고 있었습니다.
일본사람들은
신대문자를 과거 조상으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글자라고 여겨 매우 신성시하며 숭배하고 있습니다.
일부
신사에서는 이 글자 자체를 신 대신 모시는 일도
있습니다.
신대문자에는
그 자체로도 신령한 힘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일반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도 신대 문자의 흔적은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부적입니다.
신사에서 만드는
부적에는 지금도 신대문자가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신자문자의 흔적은 비석 청동검 청동 거울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글자가
언제부터 존재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한글 이전에
있었는지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일반인에게
신대문자를 처음 소개한 것은 1800년대에 출판된 신자일문전을 통해서였습니다.
여러 종류의
신대문자들이 소개돼 있는데 일부에선 이 책의 저자에 의해 신대문자가 조작된 것으로 의심하고 있기도 합니다.
신대문자를 두고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정통
국어국문학계에서는 위장이라고 말합니다.
신대에 있었던
말.. 신이 주는 말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신대문자를 두고
진위논란이 벌어지는 가운데 우리나라의 부적 속에도 고대 문자가 쓰여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삼국시대 이전부터 전해져 내려왔다는 부적의 문양 속에서 한글과 유사한
글꼴들이 발견된다는 것입니다.
부적속에 담긴
글자는 우리 조상이 쓰던 글자이고 밝혀지지 않았지만
조상들이 썼던 글자가 부적에 남은
흔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 신앙이
존재했던 시대에 조상신을 부르려면 조상신이 알아볼 수 있는 글자를 써야 하기
때문에 다른 나라 글을 적는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조상이 보고 읽을 수 있는 기호로서 만들어지는 것이
상식입니다.
우리나라에
고대부터 문자가 있었다는 주장은 옛날부터 있어왔습니다.
연대를 알 수 없는 책에서는 고조선 때
사용되던 글자라며 신지문자라는 것이 소개되어 있기도 한데
이 신지문자도 부적 속에서 종종 발견된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이는
남해 양하리에 바위그림을 일러 고대 우리 선조가 쓰던 그림글자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많은 주장
가운데 가장 최근에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환단고기라는 책 속에 소개된 가림토 글자입니다.
모두
서른여덟 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글자 모양이 한글과 거의 유사합니다.
가림토 글자가
실제 존재했다는 증거로
제시되기도 하는 탁본입니다.
1930년대 서울대 이상백 교수가 만주지역에서 탁본하였는데 이것이 한글의 어머니글자라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정말 원시 한글의 흔적일까요?
동아시아
고문자를 연구하는 송기중 교수가 확인해 봤습니다.
이것은 가림토
문자가 아닌 돌궐 문자로
밝혀졌습니다.
이 돌궐문자는
동아시아 지역의 소리문자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이처럼
동북아시아에서는 중국의 뜻글자 외에도 독자적인 소리 글자의 전통이 어어 졌습니다.
우리 민족과 언어학적 계통을
같이하는 이들. 그렇다면 우리 민족에게도 소리글자의 전통이 있었던 것일까요?
이와 관련해
신경준이 지은 훈민정음운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에도 한문 외에 민간에서 사용되는
문자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만약 세종 당시
이런 민간 문자가 있었다면 백성을 위해 한글을
만들었던 세종이 이 문자를 참고 했을 가능성이 없진않습니다.
그러나
자방고전에 대해서는 그 어느 기록에서도 명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종이 참고했다는
글자 -고전- 에 대해서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자방고전이라는
옛글자가 암시하는 것처럼 세종이 한글을 만들면서 무언가 참고했을 거란 건 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참고했다는 옛글자가 훈민정음 스물여덟 자를 만드는 데 끼친 영향은
아주 미미했을 것입니다.
훈민정음
해례본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책이 발견된
건 1940년 안동의 한 민가에서였습니다.
그
전까지는 훈민정음의 제자 원리를 두고 수없이 많은 논쟁이 있어왔는데 이 책이 발견되면서 모든 논란에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훈민정음 스물여덟
글자의 제자 원리가 이 책 속에 적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백
년 만에 한글 한자한자의 제자 원리가 밝혀진 것입니다.
어떤 이는
세종이 창호 문의 문양을 바라보다가 여기서 힌트를 얻어 만들었다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이는 훈민정음해례가 발견되면서
터무니없는 주장이었음이 밝혀집니다.
한글의 글자꼴이
무엇을 본떠 만든 것인지 이 책이 명백히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역 글자가 왜
ㄱ모양을 가졌느냐 하면 기역을 발음할 때 혀의 모습이 ㄱ형태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발음
할 때의 발음 기관의 모양을 그대로 상형했다는 것은 매우 독특하고 유례가 없는 일입니다.
한글의 글자꼴이
발음기관의 모습을 얼마나 정확하게 표현한 것인지 실험해보기로 했습니다.
이것이 맞는다면
세종은 이미 오백 년 전에 발음기관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는 뜻이 됩니다.
해례의 설명
그대로입니다.
나머지 글자들도
모두 해례의 설명을 충실히 따르고 있습니다.
그 외의
글자들은 매우 간단한 원칙에 따라 만들어졌습니다.
다섯 글자를
기본으로 삼고 소리가 강해지면
기본자에 획을 더하면 됩니다.
하나를 배우면 세
가지를 쉽게 알 수가 있습니다.
사람이 낼 수
있는 모든 소리는 다섯 가지 기본 음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바로 이것이 한글의 기본 글자를 이루게
됩니다.
다섯 글자를
기본으로 삼고 획을 추가해 글자를 만들게 됩니다.
이 경우 동일한
계열의 소리는 동일한 글자를
갖게 됨으로써 한글은 소리와 모양이 일치하는 세계에서 유일한 문자가 됩니다.
한글이 고도로
발달한 문자라고 하는 것은 고도로 발달한 음성 지식, 발음 작용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글자이기
때문입니다.
과학잡지
디스커버는 지난 94년 7월호에서 문자에 관한 특집기사를 실었습니다.
이 기사는 한글을 설명하는데 많은 지면을 할애했을
뿐 아니라 가장 중요하게 다뤘습니다.
그리고 최상급의 표현을 써서 한글을 극찬하고 있습니다.
다른 문자와 비교해도 한글의 우수성은 탁월한 것입니다.
미국인 학자로
한글을 연구하는 레드야드교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한글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세계
문자 사상 가장 진보된 문자 그것이 바로 한글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문자학적 사치 그것은 시대를 앞서간 천재 언어학자 세종의 외로운 노력이 가져다준 고귀한 선물입니다.
새로운 문자를 만들어 비록 오랑캐가 된다 하더라도 백성이 글을 알아야 한다는
그의 의지..
한글 창제는
극소수
양반층만 누리던 문자의 특권을 모든 백성에게 나눠준 세종의 거룩한 문자혁명이었습니다.
한글은 어느 날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영감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언어학적 이론을 바탕으로 치밀한 연구와 끊임없는 실험을
통해 이룩한 과학적 발명품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점 때문에
세종이 한글을
혼자 만들었다는 사실은 의심을 받게
됐고 집현전 학자들과 공동으로 만들었다는 오해를
낳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살펴본 바로는 세종의
단독 창제를 부인할 수 있는 어떤 단서도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세종이 집현전 학자들의 반발을 피하기
위해 몰래 노력하고 연구한 흔적들만 만날 수 있었습니다.
한글이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의 공동 창작이라거나 혹은
세종은 명령만 내리고 실제로는 집현전 학자들이 만든 것이라고 믿어왔던 우리의 견해 이것은 이제 수정되어야 할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