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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산
낙동강 가까운 서쪽 승학산을 시작으로 시약산 구덕산이 둥글게 도심을 가로질러 우뚝 섰다. 그 끝자락 야트막한 언덕 복병산 기슭에 자리 잡았다. 남서향 시내가 다 내려다뵈는 곳에 학교가 다소곳이 앉았다. 복작대는 남포동과 자갈치, 충무동이 눈앞에 훤히 보인다. 들랑날랑 배들이 끝없이 다니는 남항과 아래 영도 봉래산, 건너 서쪽 천마산이 솥발처럼 걸쳐있다. 교가에 아아산이 나와 붙여진 이름이다. 승학산은 삐죽한 창끝이다. 시약산과 구덕산이 가다가 불쑥 솟았다. 백양산과 금정산, 장산, 연대봉 등 다닥다닥 산이 많아 부산이라 부른다.
이 덩치 큰 중간쯤 산허리 길을 따라 꽃동네에서 봉우리로 자꾸 올라간다. 높은 구덕산을 넘어가는데 봉수대도 보인다. 서서히 내리면 끝자락에 나지막한 아아산이 나타난다. 작은 언덕이어도 시내가 한눈에 보인다. 북항이 첫눈에 들어온다. 저 건너 동편 황령산이 우뚝하다. 서면이 넓게 펼쳐졌다. 경부선 마지막인 부산역의 철길이 중심가를 길게 차지했다. 구덕산과 영도 봉래산이 떠받들고 부산진과 남구 황령산이 대들보처럼 든든하게 아름다운 부산항을 감싸고 있다. 좀 높은 곳은 봉홧불 놓는 자리다. 절영도와 아치섬이 항을 감싸 안고 파도를 막아줬다.
고래가 뭍에 올라와 휘어져 엎드린 모습의 산 둘레엔 여러 개 대학이 골짝에 들앉아 있다. 도드라진 중턱 건물의 우뚝한 대학도 보인다. 낮은 곳은 초등학교와 좀 높은 곳은 중⸱고등학교가 수없이 둘레둘레 서 있다. 좀 크다 싶은 건 학교이다. 그중에 청산중⸱고등학교가 다들 잘 있나 하고 서구와 중구 일대를 내려다보고 있다. 옆 구덕산 골에도 종합대학이 자리 잡았다.
산복도로 차도가 나기 전엔 가방 들고 터벅터벅 걸어 올라가야 했다. 가팔라 헉헉하면서 주야로 좁은 골목길엔 등하교 학생들이 줄을 이었다. 그 전엔 험한 산비탈이었다. 집 지을 엄두를 내지 못하는 곳에 한집 두집 들어서기 시작했다. 전란 때 이게 웬 땅이냐며 너나없이 판자와 천막, 검불 움막을 지어댔다. 꼬불꼬불 등산길이다. 눈비 올 땐 미끌미끌하다. 전쟁 난민들과 태극 신도들이 판자와 천막, 거적때기로 집을 지은 언덕바지다.
건너편 시약산에서 내려온 천마산 기슭 토성동에는 임시수도 대통령관저가 있다. 서울 대통령궁 경무대에서 백성을 두고 떠나려 하지 않자 달래어 뒤늦게 출발했다. 하마터면 성난 파도처럼 밀쳐 들어오는 인민군에게 점령당할 뻔했다. 당일 춘천이 공산화되고 3일 만에 서울을 빼앗겼다. 전차로 덮치고 내려와 감당할 수 없었다. 항공과 철로가 막힌 뒤다. 서울 가까이 포탄 터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돌담을 쌓아도 밀고 들어오는 전차다.
얼마나 다급했던지 비포장 도보로 흔들리는 차량에 의지해 밤낮 남쪽을 향해 달렸다. 삼엄한 경호를 받으며 내려오다가 밤이 돼 청도에서 하룻밤 쉬었다. 부산에 닿아 경남도청 뒤에 우선 거처할 곳을 찾았다. 괜찮은 언덕집을 골라 들어갔다. 중앙청이 도청과 겸했다. 국회는 남포동 극장을 사용하고 문교부 편수국은 대통령관저 아래 절 방을 빌려 들었다.
“내 이름이 왜 이승만인가 리승만으로 해.”
“각하 발음하기 쉬운 두음법칙입니다.”
꼿꼿한 최현배는 그만 사직하고 이어 장관도 자리를 버린 사건이 벌어진 곳이다. 그래도 이 일대 중구 서구가 한때 임시수도였으니 영원히 기억될 역사적 장소다.
방상주 이사장이 학교를 잘 꾸려 간다. 아버지 2대 방남길이 초대 전태수 이사장에게서 물려받았을 땐 할 일이 많은 학교였다. 하나하나 손보면서 번듯한 인문 고등학교로 키웠다. 처음 세워질 땐 피난 온 서울 무연여고였다.
부산에 와 감히 시중에서는 학교 세울 자리를 찾지 못했다. 교장 선생님을 모시고 한 선생과 함께 어느 산기슭에 세워 보려고 이곳저곳 수일을 헤매었다.
“그때는 학교마다 장소 쟁탈전이 벌어진 듯한 느낌이었다.”
고 회고했다.
피난지 부산 보수동 길거리에서 생선 자판을 놓고 파는 차사백 교장 선생을 만났다. 이내 미술 이 선생도 찾았다. 돌을 한곳으로 모으고 풀 뽑으며 흙 펴서 텐트를 친 뒤에 서둘러 교육한 것은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단다. 울퉁불퉁한 곳과 흙 계단이 의자이고 무릎이 책상이었다. 처음에 60명이 차차 수가 늘어 수백 명이 넘자 천막 교실은 소용없고 나무 아래가 공부하는 자리였다. 그래도 마냥 즐거웠다. 무연여고 피난지 분교가 놀랍다. 오늘은 저 언덕에서 내일은 소나무 아래로 자릴 정해 수업했다.
화단을 가꾸어 곳곳에 꽃나무와 풀꽃을 심어 꽃 병풍, 꽃동산을 이루었으니 가관이다. 낡아빠진 군용천막 하나에다 휴대용 흑판 서너 개가 시설 전부였다. 그러다 거적때기가 하나둘 늘어나고 내버린 식당 나무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밤나무와 떡갈나무 사이사이에서 풍성한 자연의 분위기를 맛보며 행복한 수업 시간을 보냈다니 가엾은 일이다. 봉선화와 채송화, 백일홍을 심었다. 절름발이 의자에 앉은 학생도 있었다.
따스한 햇볕과 서늘한 바람이 좋았다. 철 따라 변하는 바다 빛과 아침저녁으로 달라지는 저 수평선 어름 위의 구름을 본다. 꿈 많은 여학생의 대화가 끊이지 않는 전원적이고 낭만적인 분위기가 이 언덕에서 일어났다. 쿵-쿵 - 멀리서 폭탄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해 여름엔 사무실과 숙직실이 세워지고 8월 졸업식도 있었다. 여학생들이 줄기차게 이고 지고 하나하나 저 날랐다. 끌어올려서 판자 교실과 교무실도 만들어졌다. 이듬해인 1952년 3월에 7회 졸업식을 거행하고 가을에는 교무실을 다시 증축하여 낙성식도 가졌다. 아기자기한 얘기에 빠질 듯이 그 어떤 소꿉놀이가 전설처럼 들려온다. 그윽이 울려 퍼지는 뱃고동 소리가 은은하다. 억척같은 또순이 여학생이 학교를 만들어갔다.
어최선 교사는 지리, 국사, 세계사, 물상까지 네 과목을 가르쳤고 장용학 선생은 역사, 국어, 고전, 한문을 맡아 교육했다. 신문 사설의 한자를 쓰게 하는가 하면 소설을 읽게 했는데 교과서가 없어서 이렇게라도 가르쳤다. 교사가 흑판에 쓰면 학생들은 아무 종이에나 받아 적곤 했다. 간간이 학교 옆 산기슭에서 사대부고 학생들의 수업하는 소리도 들렸다니 피난 학교들이 주위에 있었나 보다. 이런 현실은 소설 “요한시집”에 영향을 주었다. 교과마다 교사가 모자라 여러 과목을 가르쳤다. 교재가 없어 신문과 소설을 읽고 배웠다.
8회 이경자 졸업생은
“전쟁 중에서도 졸업할 수 있었으니 여러 선생님의 따뜻한 은공은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졸업식을 앞두고 사은회 때는 정든 부산 무연을 떠나기가 너무 서러워 한없이 울었습니다.”
사은회도 열었다.
9회 손승지 졸업생은 「보수산 기슭에서」의 글에
”어떤 겨울인가 몇십 년 만에 처음으로 내렸다는 폭설로 해서 내 키의 반이나 쌓인 일이 있었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제일 먼저 학교가 걱정되어 가 보았다. 천막 교사의 지붕이 눈에 눌려서 주저앉아 있었고 벽은 옆으로 비스듬히 쓰러져 있었다. 지금 기억해 보니까 그때 그 광경을 보고 우리는 철없이 재미있어 한 것 같다. 슬프거나 걱정 같은 기분은 전혀 없이 마냥 그 광경이 우습고 즐거운 것이었다“
고 밝히고 있다.
실제 기록 일지에 1952년 12월 10일 풍설로 교사 전부가 파괴되었다고 적혀있다. 폭설로 교사가 다 짓눌렸다. 기울어진 교실을 보고 자지러지게 웃음이 터졌다.
10회 이정옥 졸업생은
“엄동설한에 화물칸 자리를 마련해 추위에 떨며 부산까지 내려갔다. 몇 개월 뒤 부산 보수공원에 무연여고의 임시 개교 소식을 전해 듣고 너무 기뻐서 잠을 설쳤다. 그러나 공부할 자리조차 손수 마련해야 하는 형편이어서 산등성이에 돌을 깔고 앉아 신문으로 해를 가려서 공부했다.”
그마저 고맙고 다행한 일로 생각되었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판자로 벽을 만들고 텐트로 지붕을 덮어 교실을 정성껏 마련해 놓으면 폭풍으로 다 쓰러져 선생님들과 힘을 합하여 몇 번이나 다시 세워야 했던지, 그 어려운 환경에서도 온 정열을 다해 선생님들은 우리를 열심히 지도해 주셨다.”
그 당시 수업상황을 자세히 말하고 있다.
살기 힘든 부산 피난 땅에서 학교가 다 뭔가.
12회 유혜숙 졸업생은 「학창 시절을 회상하면서」의 글에
“학교는 산 중턱에 계단식으로 파서 그곳에 천막을 치고 공부했습니다. 추운 천막 교실에서도 우리는 늘 즐거웠고 학우들은 웃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담임선생님은 장 선생님이었는데 우리는 선생님의 함경도 억양을 흉내 내며 늘 함박웃음을 터뜨리곤 했습니다.”
“세찬 바람이 불어닥쳐 천막이 날아간 일도 있었으며 눈이 쌓인 어느 날은 선생님과 눈을 던져서 싸움하며 좋아서 깡충깡충 뛴 일도 있었습니다. 장 선생님은 한문의 중요성을 강조하시고 문학책을 읽으라 했다. 소설책을 서로 빌리고 빌려주면서 밤새워 읽었습니다.”
“그 후 선생님은 어느 신문사 논설위원으로 계셨고 무엇이 잘못되어 심한 고문으로 몸이 상하고 귀는 보청기를 사용했습니다. ’77년 10월 동기 총회에 모셔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제는 너희들과 같이 늙는다.“
고 하시면서
“건강하자고 하더니 ’99년 8월 다시는 뵐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려웠던 그때의 일을 하나하나 기억하고 아쉬워하며 그립다 했다. 장용학 국어 선생의 억양을 흉내 내고 텁텁한 모습에 정이 들었다. 한문과 소설의 문장을 배웠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특별활동과 교외 활동도 했다. 미술과 습자, 수예 등으로 전람회를 열고 <풀 잎사귀>라는 학생 작품집도 발간했다. 또 춘향전 연극공연을 부산극장에서 가졌다. 6.25 전쟁 속에 피어나는 이들의 애국심도 대단했다. 군부대와 국군병원, 군경 상이용사에 대한 위문을 다녔다. 군 트럭을 타고 다니면서 공연을 통해 나라를 지키려는 국군의 사기를 높여주었다. 겨울철 군부대의 김장 만들기 작업 등 힘든 일을 맡아서 열심히 배우고 일했다. 그 북새통에서도 전시회를 열었다. 여러 공연도 했다.
임시천막 교사에서 3회의 졸업식을 하고 땀과 눈물로 얼룩졌던 보수동 산 중턱 천막 교실을 뒤로한 채 서울 성동구 행당동 무연여고로 돌아갔다. 한 송이 꽃이었던 무연의 마음속에는 회한이 서리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1953년 9월 30일 자로 부산분교를 돌아보고 또 보며 서울로 올라갔다. 29개월 동안 긴긴 3년 세월, 그녀들이 머물렀던 자리에 복병산 아아산 꽃이 피고 있다.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떠날 때 책걸상을 어루만졌다. 교문을 나설 때 뒤돌아보고 보고 했다.
전태수 이사장은 남은 학생과 교사를 안고 청산 학교로 다시 출발했다. 매일 산을 깎아 달구지나 리어카에 실어 나르고 소쿠리에 담아 운동장을 넓혀나갔다. 모자라는 학생들을 채우기 위해 남학생도 들였다. 이웃 공립여고에 잘 다니는 딸도 전학시켜 청산을 다니게 했다.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야간도 만들었다. 좁은 공간에다 중학교도 세워 오글오글한 학교가 되었다. 태풍으로 허름한 교사가 무너지고 쓰러져서 날아가자 비에 젖은 교복으로 공부하는 모습과 따가운 햇볕을 받으며 수업하는 광경이 신문 방송에 나갔다.
온 정성으로 청산을 위해 일하며 고생 고생해 키워나가는 전 이사장이다. 남녀 학생들의 즐거운 배움터이다.
군 부대장이 중장비로 밀어서 넓히고 바닥을 골라 천막 교실을 만들어주며 책걸상과 흑판을 걸어줬다. 학교장이 수고한 부대를 찾아가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그때부터 군부대 여군들이 야간수업을 받으러 왔다. 스리쿼터를 타고 큰길에 내려 걸어 올라갔다. 마치면 타고 가는 보기 드문 풍경이 펼쳐졌다. 중졸 여군들을 진학으로 보살펴준 부대장이었다. 불도저가 좁은 운동장을 넓혔다. 군 천막 교실이 포근했다. 말쑥하게 줄지어 다니는 경리와 교환, 의료 등 여군들이 멋졌다.
내친김에 주위의 청소년들도 모여들었다. 배움의 길이 어려워도 갈 길이라 여겨 낮에 일하고 밤 학교를 찾아 나섰다. 가까운 보수동 강변에서도 처녀들이 배우러 왔다. 1⸱4후퇴 때 쏟아져 내려온 전국의 학교들이다. 그 심히 어려운 가운데서도 선생님들을 찾아 빈터에 학교 간판을 달고 수업을 이어갔다. 외신을 타고 흘러나갔다. 세상에 감동을 주었다. 돕자는 물결이 일었다. 계속 유엔군이 교체되어 들어오고 생필품이 그득그득 실려 왔다.
부모 잃은 아이들이 길거리를 헤매며 득실거렸다. 헤스 대령이 안전한 제주 농고에 보육원을 만들어 1천 명 가까이 비행기로 급히 실어 날라 살려냈다. 계속 쏟아져나와 거리를 헤매는 다급한 어린이를 보는 데로 괴정 보호소로 보내 입히고 먹이며 잠재웠다. 굶주리는 피난민들을 위해 국제시장통에 솥을 걸고 꿀꿀이 죽을 끓여 허기진 사람들에게 퍼 주었다.
어찌 잊으랴. 두고두고 이 빚을 갚아나가야 할 일이다. 유엔군 사상자가 수십만 명이다. 집에서는 다 귀한 자식이다.
청소년 교육으로 그들의 앞날을 지켜주려는 맘이 앞선 전 이사장이다. 매일 허름한 교사를 손보며 학생들의 수업을 지켜봤다. 물려받은 학교는 천막과 판자여서 낡아 곧 쓰러질 것만 같다. 일일이 보수하기 바쁘다. 그러자 또 가을 태풍이 불어 허물어지고 날아갔다. 그 사라호 태풍은 강해서 남아있는 게 적다. 깡그리 밀쳐내고 쓰러뜨렸다. 언덕 아래 저 멀리까지 흩날려갔다. 바람 많은 언덕이다. 판자와 천막이 이리저리 종이처럼 날아다녔다.
몰골이 말이 아니다. 전처럼 비 올 때 임시천막을 치고 공부했다. 맑을 땐 햇볕 가린 그늘을 찾아 수업했다. 군부대와 주위 학교에서 많이 도왔다. 전쟁의 상처를 씻고 조금 나아진 사회가 발 벗고 나섰다. 가까운 곳 학생들이어서 학부모도 위로하고 격려했다. 그래도 꾸역꾸역 찾아와 공부해 주는 학생들이 희망이다. 주 야간이고 남녀공학이어서 북적댔다. 시와 교육청에서도 도와줬다. 방 이사가 많이 애썼다.
태풍 때 날아가지 않는 슬래브로 지어야 했다. 근근이 교사를 짓는데 철근을 다 넣지 못하고 대충 지었다. 2층을 올릴 때 계단을 나무로 얽어서 오르내리곤 했다. 무너질까 걱정이다. 교실 가운데는 둥근 쇠기둥을 세웠다. 수업 중에 선생님 얼굴과 흑판 글씨를 기우뚱하면서 봐야 했다. 앞에서도 뒤를 갸웃거려 살폈다. 우우 뛰어다니는 학생들이 오르내릴 때 발에 걸릴까 걱정이었다. 건드리면 울려 위아래가 퉁퉁거렸다. 수업하러 2층을 가려면 삐걱대는 계단을 올랐다.
모든 게 돈이 없어 쩔쩔매는 학교다. 교사 급료도 밀려 제때 줄 수 없다. 유리창이 깨져도 언뜻 갈아 끼우기 힘들다. 교사도 다 둘 수 없어 선생님 한 분이 여러 과목을 가르쳤다. 학생은 넘쳐났다. 교실이 모자라 또 올려 짓지 않을 수 없다. 4층까지 겨우겨우 짓고 강당도 만들었다. 길이가 10개 교실이 넘어 가장 기다란 학교이다. 쿵덕쿵덕 교실 지으랴 수업하랴 바쁘다. 길이가 1백 미터나 된다. 사회과 이학수 교사는 영어와 독일어를 가르치고 한문도 했다. 그중에서 과학 과목을 가르칠 때가 젤 어려웠다고 털어놨다. 쓰러질까 진단검사를 받아야 했다.
학교 언덕 오르는 정문 계단을 모퉁이에 세웠다. 가팔라 힘들게 올라갔다. 자칫 잘못해 헛디디면 큰일 난다. 성처럼 높다란 학교는 이 마지막 오르는 계단이 곧추섰다. 늘 걱정이다. 좌우로 달리는 차들이 위협이다. 절벽에 세워진 학교로 교실에서 내려보면 저 아래가 아마득하다. 하늘 교실이다. 교문을 옮겨 안전했으면 생각 중이다. 오르다 뒤돌아보면 어지럽다. 쓰러지면 다 같이 넘어진다. 산복도로를 내면서 깎인 절벽으로 돌이 떨어져 굴러내리면 어쩌나 아찔하다. 잡초와 나무, 칡넝쿨이 얼기설기 감싸 구를 돌을 안고 있다.
교육 정상화 바람이 불었다. 중학교를 폐쇄하고 적정 교사 채용 지시가 내려졌다. 갑자기 큰일이 닥쳤다. 야간도 정리해 주간 고등학교로만 지키라는 내용이다. 남녀공학도 남학교로만 허락이 떨어졌다. 이 커다란 소용돌이를 감당할 수 없다. 거기다 교명도 바꿔야 했다. 가혹한 시련이 눈앞에 내닫고 말았다. 어디서부터 풀어나가야 하나. 같은 교명이 대구에 먼저 있었다. 아아산으로 바꿔야 했다. 완전히 허물을 벗고 거듭났다.
중학교와 야간 고등학교 신입생을 못 받으니 2, 3학년이 남았다. 2년 뒤 그들이 모두 졸업해 나갈 때 몹시 서러워했다. 후배의 배웅을 받지 못하고 선생님들도 다른 곳으로 가거나 교단을 떠나야 했다. 교사와 학생이 교문까지 나서며 잘 가 인사하는 모습은 가슴을 저리게 했다. 특히 야간 남녀 학생은 졸업장을 받아쥐고 돌아서면서부터 눈물을 훔쳤다. 여학생들이 서러워했다. 긴 계단을 내려가면서 위를 쳐다보며 계속 훌쩍였다.
교과마다 정교사를 채용케 했다. 학생 수에 적정 교사를 채우도록 한 것이다. 한 교사가 다른 과목을 가르칠 수 없도록 장려했다. 부실 수업을 억제하고 학사일정을 알뜰히 해나가도록 감독하는 내용이다. 불어 교사가 영어를 맡지 못하게 한 것이다. 국어 선생이 작문과 논술은 해도 교과 자격증이 따로 있는 한문을 가르칠 수 없다. 사회과가 국민윤리를 맡을 수 없도록 했다. 자격증 교과를 지켜나갔다. 교육청 관리 감독이 엄격해졌다.
교명을 고쳐야 했다. 청산은 사용할 수 없단다. 전국에 하나만 쓸 수 있다니 무엇으로 바꿀까. 궁리 끝에 아아산으로 했다. 처음은 어색했다. 자꾸 부르니 괜찮아진다. 아침저녁 교가를 부르면서 ‘아아산’을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들었을 때 그런 산이 어디 있나 했다. 이름이 좋아 있으면 가 보고 싶은 산이다. 또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요에 아아 으악새가 있을까.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 나라 내 고향에 붉은 꽃이 있기나 하나.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눈 못 뜨는 모진 흙바람은 계속 불었다. 재단 설치에 필요한 수익재산 형성이 문제였다. 가난한 재단이 어디서 뭘 구해오나. 마음뿐이었지 어찌해 볼 수 없다. 그래도 형편이 괜찮은 방 이사가 돕는다고 많이 거들었다. 하나하나 정리하고 해결하는데 뼈를 깎는 어려움을 겪었다. 계속 꾸물대고 늦어지면 기간을 놓쳐 학교 설립이 어려워진다.
아무것도 모르는 학생들은 좁은 운동장에서 뜀박질하고 야단이다. 잘 있는 교사를 어찌 나가라 하나. 긁어모아도 수익 날 재산이 없다. 하루하루 폐교의 길로 걸어갔다.
학교장의 우울한 모습에서 주임 교사 평교사들도 알게 되었다. 어찌하면 좋을까. 급기야 학생들도 이 어려운 사정을 눈치채고 함께 걱정했다. 학부모도 찾아와 위로의 말을 했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서류 제출 날짜가 다가오자 교육청 독촉이 오고 모두의 얼굴엔 그늘이 생겼다. 학업이 중단되고 직장을 잃게 되는 일이 눈앞에 들이닥쳤다.
한 학생이 교무실을 찾았다.
“하천부지를 사용하면 어떨까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심정인데 정말 하늘에서 복음이 들려온 것이다. 5만 평 질펀한 강가 땅으로 등기를 마쳤다. 가까스로 재단설립과 학교명을 허가받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이런 지친 몸과 마음고생 속에 온 정성으로 애쓰다가 전 이사장이 그만 건강을 해쳤다. 시름시름 고달팠던 몸은 날로 병색이 짙어갔다. 방남길 이사가 이사장 일을 대행하며 도왔다. 조금씩 평상으로 돌아가는 학교이다.
대동과 물금 사이 낙동강 섶으로 갈대가 뒤덮은 을씨년스런 땅이다. 비 오면 넘쳐 강이 되고 마르면 드러나는 몹쓸 땅이다. 질척질척하다. 떠내려온 비닐과 나무, 돌무더기 온갖 오물로 쌓여 거무스레하다. 칙칙한 게 드넓게 펼쳐졌다. 꾹꾹 개구리 소린지 들리고 새들이 숨었다가 푸드득 날아간다. 늪에 들어서면 발 빠지고 벌레들이 질펀한 곳에 바글바글하다. 뭘 먹었는지 갈대가 길길이 자랐다. 드넓은 낙동강 물이 한결같이 넘실대며 도도히 흘러내렸다.
학교를 살려낸 땅이라 자주 찾아가 강가를 거닐었다. 학교 수익재산이며 귀한 하천부지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 주위가 모두 아름답게 보인다. 건너 물금과 양산 아래 평야가 어디까지 펼쳐졌다. 좌우 산들로 둘러싸여 좁게 흐르다가 여기 와서 펑퍼짐하다. 아직 부산에서 멀리 떨어져서인가 농촌 마을로 집들이 허름하고 뜨덤뜨덤 걸쳐있다. 좀 올라가면 부산시민이 먹을 낙동강 물금 취수장이다. 정수장도 가까운 산기슭에 자리 잡았다.
강변에다 채소를 갈아보면 잘 자란다. 잎이 너풀너풀 싱싱하다. 비료 거름을 넣지 않아도 포기 배추와 한 아름되는 무가 퉁퉁하다. 어떤 교사는 낚시를 준비해서 갈대밭에 쪼그려 앉아 넣는다. 가끔 잉어를 잡아 올린다. 게들이 버글버글 갯가를 돌아치는 살아 숨 쉬는 곳이다. 거무튀튀해 보여도 먹을 게 푸짐한 생명체가 넘치는 땅이다. 오리가 귀여운 새끼를 데리고 둥둥 떠다니는 한적한 곳이다. 넘실대는 강을 보노라면 속이 다 시원하다.
갈대가 아무 근심 걱정 없이 쑥쑥 자라난다. 폭이 넓어 저 건너 사람들은 먼 나라 같다. 모심기 철 봄날 심히 가물어도 한결같이 흐르는 대하 낙동강이다. 저 아래 구포다리를 건너야 갈 수 있다. 가끔 경부선 열차가 휙 달려간다. 위에 삼랑진이 있다. 예전엔 배 다니는 나루터가 있었는가 진이 붙었다. 굽이굽이 먼 태백산에서 내리는 고달픈 강이다. 강원도 황지에서 시작한다. 1,300 리나 흘러내려 이 앞을 서서히 지난다.
양산천과 합치는 호포가 건너다 뵌다. 남포, 구포와 함께 바다였는가 포라 부른다. 삼천포와 목포, 마포, 격포 한다. 다대포에서부터 포가 여러 개다. 김해의 해가 가락국 때는 바다이기에 붙여진 모양이다. 삼랑진도 부산진처럼 바다나 강에 배 대는 곳이리라. 노량진, 울진, 정라진, 청진하는 것이 보인다. 큰 강에는 유람선이 다닌다. 한강에 보인다. 전엔 부산을 부산포 했다. 인천은 제물포였다.
강 건너는 물금과 양산 벌이다. 일본에 볼모로 잡힌 왕자를 구하고 외딴섬에 갇힌 신라 만고 충신 박제상이 태수로 있던 곳이다. 대가야 가실왕 때 악성 우륵이 신라로 망명하면서 한때 가야금 12곡을 다시 정리한 강가이기도 하다. 경주까지 넓은 골짜기로 좌우 높은 산이 엄호해준다. 곡창지대를 이루는 살기 좋은 땅이다. 치술령에서 남편을 기다렸다. 내 나라 문지기가 될지언정 왜왕 신하로 살고 싶지 않다던 충신의 말이 쟁쟁 들려왔다.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 밀양과 남지 쪽으로 다니면 좋을 것이다. 높은 데서 내려보는 게 아름답고 낮은 곳에서 쳐다보는 것도 좋다. 등산하는 재미가 그것이다. 사방을 둘러보는 게 쏠쏠하다. 북유럽의 바다를 지나며 절벽을 더듬는 여행이 즐겁다고 하잖는가. 육로와 철로로 다니고 강으로도 배 띄우면 그림 같은 모습일 것이다. 거기다 자전거 길이 어디까지 났다니 흥미롭다. 강기슭으로 자전거와 보행로가 만들어졌다. 유유히 흐르는 강을 보며 달리거나 걷는 게 좋다. 부산서 서울로 어디든 이어졌다니 한번 가고파라.
낙동강 부지를 개간하면 좋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마을 가운데 학생 부모를 찾아가 고개 숙여 감사의 인사를 연신 했다. 강가여서 가뭄 걱정이 없는 곳이다. 장마 때 물 넘치면 반타작이니 어쩔 수 없다. 그러지 않을 땐 좋은 알곡을 수확할 수 있을 것 같다. 넘치는 큰물은 어쩌다 생기니 그냥 지을 수 있으면 좋겠다. 빈 땅을 이리 놀려서야 되겠나. 무얼 심어도 무럭무럭 잘 자라겠다. 오랜 세월 온갖 것이 떠내려와서 쌓인 비옥한 땅이다.
수만 년 흘러내리면서 더께가 터실터실한 거름기 있는 강변 옥토일 것이다. 저 갈대 자라는 걸 보면 기름진 땅이다. 강물 출렁거리며 들어오는 낮은 곳에 가림막치고 좀 높은 곳 흙을 밀어 넣어 판판하게 만들었다. 풀뿌릴 뽑고 쓰레기와 돌자갈로 둑을 만들었다. 그 넓은 땅을 수년 동안 애써서 벼 논바닥으로 만들었다. 교사와 학생들도 노력 동원을 보탰다. 점심 싸 들고 힘들게 일하러 가는 데도 기차 타고 가는 즐거움이 대단하다. 너도나도 가겠다며 나서는 게 놀라웠다. 다시 군부대 중장비가 들어와 도와줬다. 나락 씨를 뿌려 모판을 만들었다. 모내기하고 풀 뽑는 논 매기도 했다.
번듯한 논으로 만들어졌다. 주말에 쉬는 교사와 학생들이 달려가 애써 일군 농장이다. 행정실은 업무가 하나 더 늘었다. 농번기엔 바쁘게 돌아가야 했다. 가깝기나 하나 멀다. 가려면 여럿이 우우 기차를 타고 또 배로 건너가야 한다. 부산역 가랴 기다렸다 건너랴. 시간이 걸린다. 그래도 어찌 얻어걸린 귀한 땅인데 그냥 둘 수 있나. 처음 소출 유신 쌀을 나눠 먹었다. 서로 한 가마씩 샀다. 너도나도 맛있다고 야단이다. 이웃도 사달라며 부탁이다.
추수할 때마다 베러 가는 일을 기다렸다. 익어가는 누런 벌판의 그 아름다움이 낙동강과 어우러져 장관이다. 엄청 넓다. 봄엔 동력 농기구를 넣어야 일할 수 있다. 추수 때도 기계 힘을 빌려야 한다. 물이 넘쳐 들어와 망칠 때도 있었지만 몇 해에 가끔 치루는 홍역 외엔 별 탈 없다. 이제 곧 경남도에서 제방을 쌓는다니 좋은 소식이 들려온다. 비료와 거름을 많이 하지 않아도 벼가 잘 자라는 영근 땅이다. 상습 침수지역을 정비하는 계획이다. 이보다 더 좋은 옥답이 어디 있을까. ‘넝쿨째 굴러들어온 호박이다.’ 벼 익을 때 황금벌판은 형언키 어려운 아름다움이다. 토지와 쌀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 함께 해야 할 단어이다. 아니 영원히 변하지 않는 말이다.
장마가 져도 괜찮다. 가물어도 걱정이 없는 곳이다. 이런 땅이 세상 어디에 있나. 버려진 나대지 습지가 금싸라기가 됐다. 몹쓸 하천부지가 제법 쓸만한 땅으로 변해간다. 알토란이다. 구렁이 알 같은 땅이다. 주인이었던 하천부지 농부가 눈이 휘둥그레지기 시작했다. 내 땅인데 이제 돌려받아야 하잖나. 일할 때 찾아오고 학교로도 올라왔다. 수시로 들랑날랑했다. 내놓으라고 떼를 쓴다. 난감하다. 등기해서 학교 소유로 이전해놨는데 어찌 돌려줄 수 있나.
“내년엔 우리가 부칠 테니 얼씬도 말라.”
란다.
“조상 대대로 내려온 내 땅이다.”
이듬해 갈고 모를 심었다. 한쪽에서는 일하고 저쪽에선 뽑아냈다. 아침에 가 보면 간밤 짓밟아 회를 쳐놨다. 실랑이가 벌어져 삽을 겨누며 시퍼렇게 옥신각신했다. 일 년 내내 싸움질로 날이 새고 졌다. 서로 할 짓이 아니다. 지겹고 힘들어졌다. 밤이면 방위를 세워야 했다. 심은 곡식을 보호하려면 그리하지 않으면 안 됐다. 전쟁이다. 마을 사람들도 한 편이 돼 우리 오는 걸 싫어한다. 고소해도 해결되지 않자 법정으로 가잔다. 일이 커져만 갔다.
재단설립을 하고 돌려줄 것이라 믿었는데 그러잖았다며 화낸다. 쓸모없던 하천부지를 학교 설립을 위해 기꺼이 바치겠다 해놓고선 지금 와 딴소리하며 저런다. 이제 재판을 기다린다. 도와준 학생과 그 부모에게 고마웠는데 그만 안타까운 일로 바뀌었다. 저리 안달하며 돌려달라는데 응당 줘야 하잖나. 그러나 등기를 마쳤고 교육청에 서류까지 넣어서 허락받았다. 재판하게 됐으니 변호사를 대야 했다. 서로 각종 서류를 증거로 내놨다.
길고 지루한 민사 재판이 시작되었다. 지면 학교는 문을 닫아야 할지 모른다. 또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장로인 방남길 이사장은 기도를 올리고 교목은 예배 시간마다 간절했다. 아침 교직원 조례 때도 하나님께 빌었다. 모집에서 배정으로 가는 평준화 학제가 된다. 이리 말썽이면 지원하겠나. 평지도 아니고 언덕 학교를 누가 오려 맘먹을까. ‘물가에 아기 세워놓은 듯’ 편할 날이 없다. 자칫하면 헛디뎌 휩쓸려 떠내려갈 판이다.
“조마조마하다.”
재판 때마다 판사와 변호사 입만 쳐다본다. 어려울 때 이사에서 이사장을 맡아 학교를 도운 방 이사장은 시내 양정에서 의류도매업을 했다. 세상 떠난 전 이사장과는 같은 함경도 고향 사람으로 학교 어려운 사정을 듣고 함께 하게 됐다. 교육에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갖고 살아온 것이 남달랐다. 어릴 때부터 배우려는 학생들을 눈여겨 봐왔다. 초대 전 이사장과 함께 청산에서 아아산학교을 만들기까지 온 힘을 쏟았다. 전태수 이사장의 헌신이 빛난다. 2대 방남길 이사장의 수고로 살아나는 학교이다. 없어졌을 학교가 근근이 생명을 이어갔다.
뒤 운동장이 서구와 중구로 갈라졌다. 재단 재산으로 등기하고 산기슭을 일부 사 넣어 넓혔다. 영도와 장유에 임야 10만 평씩을 사들여 수익재산으로 만들었다. 앉으나 서나 학교 생각이고 자나 깨나 아아산 걱정이다. 운동장에 들어오면서부터 선생과 학생들에게 먼저 고개 숙여 인사한다. 늘 기도하며 학교 잘되기만을 바랐다.
월남한 사람이다. 함경도 명천에서 큰 잡화상회를 경영했다. 공산당 청년 당원들이 설치고 다니니 불안했다. 부산항 잘 아는 군수부대장의 도움을 받으려 했다. 마침 함흥 원산에 볼 일이 생겨 올라온 차였다. 군 트럭이 여러 날 헤맸으나 피해 다니는 방 이사장 가족을 만날 수 없었다. 살생부 명단을 갖고 죽창과 몽둥이를 든 무서운 당원들이 밤낮으로 찾아다녔다. 하루가 아닌 잠시도 섬뜩하여 숨 쉬고 사는 게 아니었다. 언제 들이닥쳐 맞닥뜨릴지 불안한 맘으로 지새웠다. 산속 동굴에서 지나고 바닷가 섶에서도 날밤을 지새워야 했다.
“자본가를 처단하라.”
“악덕 지주는 물러가라.”
거리엔 구호가 난무하다. 산으로 들판으로 목숨을 부지하려 애썼다. 허기지고 굶주려도 어찌 살 방도를 구해야 했다. 전쟁으로 치닫는 공포가 날로 덮쳐왔다. 골목마다 살기가 등등하다. 점점 날 세우더니 남쪽에서 올라오던 차량도 없고 연락도 끊기었다. 겨우 포구에 정박한 낡은 배 한 척을 구했다. 숨죽이며 탈출하려는 맘이 비상했다. 기름과 식량을 구하고 함께 떠날 사공을 찾았다. 야반도주를 위해 가족을 태웠다. 대대로 살던 정든 고향을 등지고 떠나야 했다. 시시각각 죽음이 눈앞을 어른거리는 곳에 어찌 사나. 사는 게 아니다.
이젠 왕래하던 삼팔선이 막혀 뱃길로 내려갈 수밖에 없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우린 떠난다.
“잘 있거라 명천아.”
희미한 불빛이 멀어짐을 보면서 남으로 남으로 내려갔다. 시꺼먼 무엇이 뒤에서 쫓아올 것만 같다. 뒤돌아보면서 배야 빨리 가라 달려라 기도한다. 턱턱 부딪치는 파도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배고픔과 추위 따위는 생각도 없다. 어서 빠져나갔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망망한 바다다.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다. 내려가는 건지 오르는 것인지 키 잡은 선장만 하늘같이 믿고 쳐다봤다. 몇 며칠 얼마를 달려 삼팔선을 넘었다는 말을 듣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파도에 시달렸다. 멀미로 속이 비도록 토해냈다.
“보름 넘게 달려갔다.”
“포항 근처에서 기름을 넣고 이틀 쉬었다.”
망망대해를 알고 가는지 모르고 내리는지 그저 통통배는 멎지 않고 내뺀다. 해 뜨고 지는 곳을 향해 달렸다. 오징어와 고등어, 명태, 도루묵을 그리 많이 잡는다는데 얼찐거리는 어선이 안 보인다. 그물 던져 잡는 것이 먼 바다인가. 다니는 배도 없다. 출렁이는 바다로 물천지다. 우리 배만 빠질 듯이 힘겹게 가고 있다. 실 배가 고프다. 먹을 것을 질겅질겅 넘기니 해가 졌다가 뜨곤 한다.
“눈 감았다 뜨면 낮이고 밤이다.”
“겨울밤은 으스스 춥다.”
“초롱초롱 별은 왜 저리 많나.”
이제 남한 땅으로 들어왔다는 생각에 졸음이 막 달려든다. 자도 자도 끝이 없다. 시달려 피해 다니느라 어찌 잠을 자겠나. 무엇이 벌떡 나타나 짓밟히고 얻어맞으며 찔리는 꿈을 자꾸 꾸게 된다. 이제 한꺼번에 몰려든다. 이래도 감기고 저래도 기절한다. 살았다는 마음에 편안해선가 꾸덕꾸덕 꼬꾸라진다. 배고프지도 어디 아픈 데도 없다. 부산에 닿으니 꿈만 같다. 생전 처음 보는 부산항이다. 신천지에 왔다. 이런 포근한 세상이 있었나.
“말만 듣던 영도다리다.”
“자갈치에 닿았다.”
이겼지만 어수선하고 벙벙하다. 마음이 무겁다. 학생과 그 부모에게 미안한 마음이다. 못 할 짓이다. 앞으로 보상해야 할 텐데 어쩌면 좋을까. 상처투성이 맘을 무엇으로 위로해야 하나. 잡초로 무성하던 것을 걷어치우고 넘치는 강물을 막은 든든한 둑이 그저 그만이다. 번듯한 논으로 바뀌었으니 내 땅 달라던 농부가 한이 맺히고 말았다. 졸업생도 부모에게 얼마나 민망했을까. 기증하겠다고 자필로 서명한 것이 좋은 증거였다. 시무룩해서 법정을 나섰다.
힘없이 터벅터벅 걸어 나가기는 서로 마찬가지다. 진 쪽은 기가 막힐 것이고 이긴 학교도 씁쓰레하다. 중학교와 야간, 남녀공학을 정리하는데 힘들고 시간도 많이 들었다. 곁가지를 잘라내는 일이 쉽나. 싹둑싹둑 칼로 쳐내고 끊어낼 때마다 피 나고 아리다. 그중 어려웠던 재단 수익재산 일이 어정쩡하게 해결됐다. 내 것이 아닌데 어쩌다 승소해서 가질 수 있게 됐다. 학교가 다시 죽을 뻔하다가 힘겹게 살아났다. 정상이 되면 빨리 갚아야 하고 돌려줘야 했다.
기막힐 땐 사람은 허허 웃는다고 한다. 장마로 생활 터전인 논밭이 떠내려가면 거기 서서 그렇게 한단다. 갑자기 화재로 집이 타고 자식이 죽으면 텅 빈 잿더미 마당에 서서 웃고 있다. 딱하고 분노와 슬픔이 짙으면 웃음만 나온다. 하천부지 주인을 생각하면 그러리라 생각이다. 학교가 잊을 게 따로 있지 그럴 수 없다. 꼭 농부와 그 졸업생과 자식에게 도움을 줬으면 하는 생각이다. 그 부모 살아생전에 보여야 할 것이다. 아랫대도 계속 도우면서 말이다.
아아산학교는 인문 고등학교로 날이 가고 해가 바뀌면서 발전해 갔다. 때맞춰서 배정받아 학급수가 늘어났다. 주위 중학교 졸업생들이 골고루 모여들었다. 언제 중학교가 있었으며 야간이 있기라도 했나. 남녀공학 때가 있었을까. 말끔하게 단장한 학교가 높은 언덕에서 날아갈 듯 빛난다. 밤낮으로 열심히 가르치고 자습시켜서 대학을 보란 듯이 합격해 들어갔다. 서울 국립 대학에 50명 합격할 때가 신났다. 지방 주요 대학에도 많이 합격해 명문 학교가 됐다.
운동장이 작아 교련 사열을 다대포해수욕장에서 가졌다. 2천 명 학생이 그곳 백사장을 가득 메웠다. 얼룩무늬 옷을 입고서 나무총을 들고 훈련하는 모습은 정작 군인들과 다를 바 없었다. 난데없는 학생들로 아름다운 해수욕장은 군 병영으로 바뀌었다. 오가는 노선버스가 가득가득 넘쳤다.
조례 땐 운동장이 꽉 찼다. 검은 동복을 입었을 땐 덩치 큰 학생들이어서 온통 학교가 그득했다. 학교가 수학능력시험장으로 정해졌다. 수능시험 때는 비행기가 지나가지 못하고 경찰차도 수험생을 위해 새벽부터 태워 날라야 했다.
여름 교복 하얀 상의를 입었을 땐 싱싱한 꽃들이 펄떡펄떡 뛰어다닌다. 일찍 등교해 0교시 보충수업에서 오전 오후 수업을 다 하고 몇 시간 또 보충수업을 해야 한다. 한술 저녁 들고 또 밤 자습 시간이 남아 기다린다. 말은 자율학습이면서 거의 모든 학생이 참여한다. 교실마다 대낮 같은 조용한 분위기다. 달라진 학업 분위기로 학교가 날로 번창을 거듭해 나갔다. 한밤중 마치면서 담임선생에게
“집에 다녀 오겠습니다.”
인사다.
학력 경쟁이 심해 학생 건강을 해친다. 학력 향상으로 여겼다. 열심히 하는 게 잘하는 줄 알았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서 야단이다. 강제성으로 학생들을 옥죄어서 자율이 아니란다. 학교마다 멋모르고 앞서가다 저지른 넘쳐난 일이 되고 말았다. 경쟁이 가속화되어 갈 땐 정신없었다. 저녁 6시가 8시로 그러다가 10시까지 했다. 마치고 집에 가면 먼 학생은 자정이다. 언제 씻고 자나. 또 새벽에 나서야 했다. 오전 수업 시작 전에 보충수업을 하니 온통 수업 수업이다. 정상이 깨진 것도 모르고 지났다. 육성회비와 보충수업비를 내야 한다. 거기다 점심 저녁 급식비가 있어 어려운 학생은 부담이 컸다.
우수 학생들을 가려 주위 「애린유스호스텔」에서 합숙시키기도 했다. 그러다 학교로 불러들여 강도 높게 자습했다. 말이 자습이지 특강을 넣어 지도해 나갔다. 별별 짓을 하며 경쟁에서 뒤지지 않으려 애썼다. 학교가 보습학원을 겸했다. 치닫는 일이 격발하듯 날로 달음질이다. 학교마다 이러니 이게 무슨 교육이겠나. 과열되어 뜨겁다. 수능 직전 밤낮으로 땀 흘리며 고생했다. 맡아 수고하는 교사는 보름 만에 집을 찾으니 쫓겨날 뻔했다.
교육이 제정신 아니다. 시끌벅적하다. 새벽에 집 나서서 한밤중에 들어오느냐이다. 팔팔한 아이들이어서 망정이지 어른 같으면 벌써 몸져누웠다. 교육 정상화 바람에 추풍낙엽처럼 휩쓸려 다니다가 겨우 정신 차리니 이번엔 과외와 보충수업으로 난리가 났다. 집 짓자면 땅을 파 골라야 하고 세우자면 어지러운 일이 많다. 숱한 우여곡절을 넘고 넘었다. 세상에 0교시가 어딨나. 학력 경쟁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고삐 풀린 말처럼 달리다 진정세로 돌아섰다. 정말 자율로 가라앉기 시작한다. 교육 정상화로 몸서리치다가 제자리로 조금씩 앉아가는 모습이다. 회초리 들고 설치다가 그것도 사라졌다. 체벌도 할 수 없다. 머리 덥수룩한 게 단정치 못해 단속했다. 머리 잘리는 걸 되게 싫어했는데 그것도 자율이다. 교복도 말끔했는데 제멋대로다. 학생부 교문 지도가 할 일이 없어졌다. 앳된 학생 모습이 점점 사라진다. 화장하고 립스틱도 발랐다.
그렇게 해서 정교사 발령과 학생 수에 따른 정원제가 이뤄졌으며 학생들이 가까운 곳으로 골고루 배정되었다. 바로 서자면 이렇게라도 해야 하는가 보다. 몽골과 말레이시아에 가니 우리나라 교사자격증과 운전면허증을 인정해 주는 걸 보고 놀랐다. 출산 감소로 학생 수가 줄어들면서 교사 구직 자리가 어려워졌다. 이때라며 사학에선 채용과 승진 시에 잡음이 생겨났다. 청산 시절과 아아산 이사장은 하나 그런 게 없음이 다행이다. 아무리 감쪽같아도 터지고 새어 나오기 마련이다. 입학 학생 수가 해마다 줄어드는데 사학재단의 불의한 채용, 승진으로 말썽이 일었다. 모두 남의 일이었다.
해마다 햅쌀이 나올 때 졸업생이 생각난다. 지금은 무얼 하고 있나. 부모는 살아계실까. 건강한가. 이 학교를 세워주었고 재판도 끝이 났다. 그는 더 말이 없다. 잊을 수 없는 아아산이다. 두고두고 걸린다. 그럭저럭 세월이 흘러 어언 수십 년이 지났다. 운동장에 넘치고 교실마다 찼던 수천 명의 학생이 해마다 줄어들어서 이제 수백 명이다. 학급수도 30여 개가 줄어 줄어서 20여 반이다. 한 반에 60명이던 것이 스무 명으로 줄었다. 연간 백만이던 출산이 절반 아래로 뚝 떨어져서 인구 절벽이 다가오고 있다. 수많던 넘치는 학교가 절반으로 줄어들 날이 오지 않을까. 초등학교부터 폐교하는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말썽 많았던 매도 처분한 하천부지 논 앞으로 고속도로가 휑하니 생겨났다. 주위에 큰 도시가 세워지고 멋진 사장교 화명대교도 놔줬다.
“푸른 항구 아아산 우리의 양지, 서라벌 옛 종소리 들리는 언덕, 상록수 가지마다 솔바람 불면 구름도 멈춰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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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 !선생님 정말 보물이 십니다
이 건 도서관입니다
이 재능 기억 영원히 간직되길 기원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박회장님 카페를 너무 잘 지켜주십니다.
감사합니다.
언제나 꽃피는 봄날입니다.
존경하는 선배님께
70년전 부산포와 부산인근의 조감도를 하늘에서 보는 것 같습니다
6.25와 그시절 피난민들이 몰려와서 먹고사는 것뿐만 이나라, 열악한 교육환경을 제대로 살려놓는 선배님들의 수고들이 다큐멘터리로 전개되는 군요
세월이 지나면서 교육제도와 환경이 바뀌면서 혼란스런 시절에 선생님을 하셨던 선배님의 감회가 존경스럽습니다
더구나 담담한 문구로 서술한 내용이 봉화 고향냄새도 납니다
잘 보았습니다
선배님 건강하세요
환영합니다.
우리 만나지 못해 보고싶습니다.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