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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매장 시키겠다, 마지막 말을 하라
증언자: 최영철(남)
생년월일: 1960.(당시 나이 20세)
직 업: 양화공(현재 무직)
조사일시: 1988. 12
개 요
19일부터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며 많은 시간 동안 시위에 참여했다. 5월 24일 진월동에서의 상황을 중심으로 한 증언이다.
5.18 이전
나는 전라남도 목포에서 7형제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우리 집은 처음에는 농사도 좀 있고 여유있게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님이 사업에 실패하고 병으로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내가 어렸을 때에는 나라에서 주는 영세민 보급품을 받아 먹고살 정도로 가난했다. 위의 형님 두 분은 고등학교를 다 마쳤지만 나는 집안이 곤란해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진학을 포기해 버렸다. 그 대신 세살 때 소아마비를 앓아 절뚝거리는 한쪽 다리를 치료하려고 서울의 삼육재활원 병원에서 2년간 생활했다.
1976년 목포에서 잠시 머물다 광주로 옮겨온 뒤 양화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동네에 아는 분이 양화점을 하고 계셨는데 내 다리가 성치 않으니 그 일을 배우는 것이 좋겠다는 어른들의 권유 때문이었다. 기술 중에서도 양화 부분은 특히 보수가 박했지만 나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신발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1980년에도 대인동 박인천씨 집 앞의 공장에 다니고 있었다. 그때 내 나이 스무 살이었다.
임신한 여자가 쓰러지고
5월 19일 출근할 때부터 거리에 공수들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다. 그날 갑자기 밖에서 '와' 하는 함성과 '펑' 하는 소리가 들리고 코가 맵기 시작했다. 밖을 내다보니 공수대가 학생시위대를 밀고 내려오면서 사람을 닥치는 대로 때리고 짓밟는 것이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의 안면을 때려 넘어뜨리고는 지근지근 밟아버리는가 하면 교련복 입은 학생의 온몸을 후려쳤다. 또한 박인천씨 집안에 숨어 있던 여학생을 끌어내어 뺨을 때리는 광경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그날은 오후 2시까지만 일했다. 원래 양화업이 여름에는 일이 없는 데다가 데모까지 하는 바람에 일찍 끝난 것이다. 나는 곧장 집으로 가지 않고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광주경찰서, MBC 방송국, 도청 등지를 돌아다녔다. 주로 공수단 뒤편에서 구경하다가 위험하다 싶으면 제자리에 가만 서 있었더니 별탈은 없었다.
20일에도 언제나처럼 일을 나갔다. 10시쯤 헬기에서, "데모하는 사람들은 자중하라. 직장도 근무를 하지 말고 시민들은 집으로 돌아가라."는 방송이 나왔다.그때부터 직장일을 쉬면서 나는 본격적으로 시위에 가담해 24일 상무대로 끌려갈 때까지 시내 곳곳을 돌아다녔다. 계속 혼자 행동했으며 두려움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금남로에서 밀고 밀리는 공방전을 수차례 반복하다 시민들이 밀고 올라가 가톨릭센터를 점령했다. 유리창을 다 깨고 올라가 무전기와 총을 한 정 뺏었는데 내가 알기로는 실탄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러는 사이 군인들이 최루탄을 쏘며 밀고 내려와 시민들이 뒤로 밀렸다. 그때 임신한 여자가 넘어졌다. 아무도 그녀를 일으켜세워주는 사람이 없었다. 도리어 그냥 밟고 도망치기에 바빴다. 나도 그 여자를 밟고 한일은행 쪽으로 냅다 뛰었는데 그 여자가 어찌 됐는지는 모르겠다.
시외버스 공용터미널로 가봤더니 사거리 한가운데에 공수부대가 있었다. 공수들이 트럭을 타고 도로를 왔다갔다 하자 소방서 쪽에서 시민들이 큰돌을 던졌다.
한 트럭 운전병 머리에 정통으로 돌이 맞아 차가 꼬나박히자 놈들이 쫓아왔다. 나는 소방서 뒷길로 해서 MBC 방송국 쪽으로 도망쳤다. '김대중 석방하라', '계엄 해제하라', '신현확 물러가라', '최규하 물러가라', '전두환 물러가라'는 등의 구호를 외쳤는데, 그때 나는 전두환이가 누구인지도 몰랐다. 후에 상무대에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설명을 듣고서야 조금 알게 된 정도였다.
총 조작법을 배우고
그날 저녁 광주역 부근에 있을 때 총소리가 났다. 시민들이 KBS 방송국을 점령 하기 위해서 차에 불을 붙이고 시동을 걸어 앞으로 밀어붙였는데 총소리가 나자 다 도망갔다. 나는 뒤쪽에 있어서 자세한 상황은 보지 못했다. 내가 집에 들어간 뒤에도 계속 총소리가 났다. 예광탄 불빛을 보며 동생들이 멋있다고들 했다.
저녁을 먹고 다시 도청 쪽으로 나갔다. 금남로에서 전경차 두 대가 불에 타고 있었다. 얼굴에 치약을 바르고 돌을 던지며 싸우던 중 몇몇 사람들이 소방차 두 대를 끌고 왔다. 나도 그중 한 대에 올라탔다. 물을 뿌리려고 해도 작동을 할 수 없어 그냥 도청 쪽으로 밀어붙였다. 그런데 최루탄을 어떻게나 많이 쏘아대는지 앞 차를 운전하던 사람이 차를 꼬나박아버렸다. 차를 버리고 도망쳐 버리자 공수들이 작동해 물을 뿜어댔다. 나는 나머지 한 대의 차에 타고 사이렌을 울리며 돌아다녔다.
21일 역시 차를 타고 각목으로 차체를 두들기며 시내 곳곳을 돌아다녔다. 운전수들이 도청을 밀었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다.
그날 오후 3시쯤 광주공원에서 총을 지급받고 한 50명 정도의 시위대원들이 학동다리에서 예비군에게 총 조작법을 배웠다. 총을 분해, 소제하고 있다가 방림동 산에 계엄군이 있다는 말을 듣고 무작정 출동해 총을 갈겨댔지만 아무도 없었다.
또 한번은 서방을 통과하다가 중흥교회에 계엄군이 있다고 해서 열 명이서 교회에 대고 무작정 총을 쐈다. 안이 잠잠해 들어가보니 교회 사람들만 방에 숨어 있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만큼 급박하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때 애매한 사람이 다치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 했는가.
화약고를 털기 위해 교도소를 지나 창평으로 향했다가 계엄군이 있다고 해서 도중에 되돌아와버렸다. 광주로 들어올 때 교도소에 있던 군인들에게 집중공격을 받았지만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다. 그 뒤로 서방 깡패들이 교도소를 털었다는 소문을 듣기도 했다.
공원에서는 내 앞에 있던 학생이 오발사고로 숨진 일도 있었다. 교련시간에 배웠다며 총을 만지다가 잘못해 그렇게 된 것이다. 또 차에 깔려 죽었다는 공수대 한 명이 가마니에 덮여 있는 것도 봤다.
다음날 새벽까지 광주공원에서 근무를 서고 날이 밝자 우연히 상황을 점검하는 지프차에 타게 되었다. 서방, 지원동, 화정동 등지에서 각 동의 상황을 보고받아 도청에 알려주었다. 그 뒤에는 전남고 부근에서 지원을 요청해 다섯 시부터 그곳에서 근무를 섰다. 광천동 다리 쪽에서 군인들이 서서히 몰려오는 것을 보며 경계근무를 섰지만 그날 밤 아무 일도 없었다.
다음날(23일) 아침 여덟 시에 스피커에서 총을 수거하니 도청으로 모이라는 방송이 나왔다. 10시경 도청으로 가봤더니 무작정 총을 반납하라고만 했다.
나는 처음에는 무기반납을 반대했다.
"아니 왜 총을 달라고 하느냐?"
"지금 총이 무작정 배포되어 누가 갖고 있는지 파악할 수 없습니다. 우선 반납하고 주민등록증과 전화번호를 제시하면 명단을 작성해 다시 나눠주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총을 반납하고 그냥 집으로 돌아와 오랜만에 푹 쉬었다.
무기 반납하러 도청에 갔을 때 보니 민원사무실과 경찰국으로 들어가는 길 입구에 시체가 엄청나게 많았다. 한 할머니가 아들을 찾으러 왔는데 누가 누구인지 구분이 안 된다며 아들을 찾아달라고 애원했다. 팔에 헌병대 문신이 있다고 했는데 시체들이 새까맣게 변색되어 있고 또 부패되어 여간해서 찾아지지가 않았다.
무작정 시체들의 팔을 수건으로 문질렀더니 문신 새겨진 팔이 나왔다. 내가 만져 본 시체는 모두 열서너 구 정도 되었다. 거의가 총상으로 왼쪽 얼굴이 없어진 사람, 목이 관통된 사람, 어깨가 날아가고 없는 사람 등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을 만큼 참혹하고 험했다. 죽은 것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잠자는 것 같기도 했다.
가족이 확인한 시체는 상무관으로 옮기고, 그렇지 않은 시체만 도청에 두고 있다고 했다.
총을 겨냥하고 안전장치까지 풀었지만 차마 쏠 수가 없었다 24일에는 시위와 상관없이 두암동의 친구집으로 놀러갔다. 그런데 마침 친구가 집에 없어 다시 시내로 나갔다. 도청까지는 군용 트럭을 타고 갔다. 그런데 특별한 볼일도 없고 해서 백운동의 사장님댁에 놀러갈 요량으로 지나가는 차를 세워 올라탔다. 21일 광주공원에서부터 함께 활동했던 사람이 지프차에 타고 있었다.
그때 한 아주머니가 도청에서 찾은 남편의 시신을 북동 쪽으로 옮겨달라고 해 목적지까지 태워다주었다. 북동 어디쯤에 내려주고 월산동 외곽도로를 지나 백운동 철길에 이르렀을 때 나는 내려달라고 했다. 그런데 운전수가 차를 세우지 않고 남평 쪽으로 계속 달렸다. 그 지프차에는 운전수와 조수, 그리고 나 외에 청년 넷이 더 타고 있었다.
차는 진월동 효덕국민학교 앞에서 멈췄다. 그러자 조수가 우리 다섯 명에게 철모와 총을 하나씩 나눠줬다. 그는 시민군의 역할분담에 따라 외곽지역 방어를 맡았던 사람인 것 같다. 나는 공교롭게 카빈과 M1총을 다 지급 받았다. 카빈 실탄은 15발, M1 실탄은 세 발을 받아 바지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우리를 내려놓고 차는 바로 되돌아갔다. 차가 떠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국민학생들이 학교운동장 에서 "군인이다"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때 시간이 오후 2시쯤 되었을 것이다. 공수부대가 지원동으로 통하는 좁은 길목으로 장갑차를 몰고 와 총을 갈겨댔다. 그 길로 냅다 도로가 집에 숨어들었는데 도망갈 때 총알이 귀 옆을 쌩쌩 스쳤다. 머리에 두 방이나 총알을 맞았지만 철모를 쓰고 있어서 살았다. 한 방을 머리 윗부분을 맞아 철모가 약간 흔들거렸고, 또 한 방은 철모 뒷통수에 제대로 맞았다. 그때 앞으로 푹 쓰러지며 M1총은 버리고 카빈 한 정만을 들고 도로가에 있는 끝 집 뒷간으로 숨었다. 우리들 중 다른 두 명은 그 집 방으로 숨었다고 했다.
뒷간에 있는 십여 분 사이에 총을 어찌나 많이 쏘아대던지.
그때는 우리를 잡으려고 공포탄을 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나중에 상무대에서 알고 보니 군인들간에 오인사격이 있었다고 했다. 무슨 총인지 총에다 포를 넣어 개방대학교 앞 쪽으로 세 방이나 쏘았는데, 그때마다 논바닥이 푹푹 튀어올랐다.
내가 숨어 있는 집에도 엄청나게 쏴대 흙담이 펑펑 뚫렸다. 군인 지휘관이 "수색하라"고 명령을 내리자, 군인 네 명이 내가 숨어 있는 집으로 붙었다. 그리고 논두렁에서는 두 명이 일개조를 이루어 LMG를 들고 오는 것이 보였다. 뒷간에서 이런 움직임들을 모두 볼 수 있었다. '나는 이제 죽는구나' 생각하고 그들에게 총을 겨냥해 안전장치까지 풀었지만 차마 쏠 수가 없었다. 안전장치를 잠그고 총을 내려 한 발짝 옆으로 옮겼는데, 그때 또 총알이 벽을 뚫고 날아왔다. 조금 전 내가 서 있던 곳이었다. 자리를 옮기지 않았으면 순간의 차이로 아마 심장이 뚫렸을 것이다. 그것을 보니 온몸의 힘이 쭉 빠졌다. 정말로 나는 죽었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한 명은 다른 곳으로 가버리고 세 명만 계속해서 담벼락에 붙어 있었다.
그들이 투항하라고 하길래 "투항한다"고 악을 쓰며 나갔더니 앞에 있던 군인이 깜짝 놀라 총을 겨눴다. 갖고 있는 총을 건네주는 순간부터 곤봉, 개머리판, 워커발로 전신을 수없이 구타당했다. 어떻게 도로에까지 끌려갔는지 기억조차 없다. 무릎을 꿇고 있는데 그 중 한 놈이 "대검을 아스팔트에 한번만 갈면 쑥 들어갈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무디다. 좋게 말해라. 몇 명이냐?"고 하길래 다섯 명이라고 얘기했다. 그 자리에서 또 두들겨맞아 기절했다. 우리 다섯 명 중에서는 내가 제일 처음 잡혔고 곧 세 명이 더 잡혀 왔다. 나머지 한 명은 뒤늦게 상무대에서 만났으니 모두 생포된 셈이다.
사살해 버려!
효천, 남평 쪽으로 도로를 타고 내려가 철로를 넘어서 또 밭을 지나 야산에 도착하니 헬기장이 있었다. 그곳까지 가는 도중 도로에서 군용 트럭 열네 대 중 불타고 있는 서너 대와 군인들 시체 아홉 구를 봤다. 나는 그때까지도 싸움이 왜 이렇게 크게 벌어졌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같이 잡힌 사람 말이 우리 뒤에 잡힌 한 명을 바로 앞에 놓고 머리를 쏴서 죽였다고 했다.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며 10대 학생으로 보이더라고 했다.
잠시 후 헬기가 와 우리 네 명을 통합병원으로 실어갔다. 통합병원 연병장에 일개 대대는 족히 될 것 같은 공수들이 있었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또 정신없이 맞아 병원 현관 옆에 고꾸라져버렸다. 그때 장군 계급장을 단 지휘관이 오더니 물었다.
"누구냐?"
"폭도들입니다."
"사살해 버려."
병원 안의 보안대 사무실로 끌려가 왜 잡혀왔는지, 어떻게 해서 총을 들게 되었는지, 누가 총을 쏘았는지에 대해 집중조사를 받았다. 저녁 6, 7시경에 상무대로 옮겨졌다. 트럭을 타고 가는 도중 고개를 처박고 있다가 호흡이 곤란해 고개를 쳐든 김에 밖을 내다보았다. 길가에 탱크를 앞세운 많은 군인들이 있었고, 멀리에서 시민군들이 대치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렇게 잠시 사방을 둘러보고 있는 순간 워커로 또 짓이겼다.
상무대에서의 조사, 생매장시켜 버리겠다
상무대에서는 합동수사본부에서 조서를 받았다. 그곳이 보안대라고 알고 있는데, 무엇을 했으며 어떻게 해서 붙잡혀왔는지를 따져 물었다. 질문에 대해 답변을 하면 받아쓰는 형식이었는데, 슬쩍 보니 내가 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쓰고 있었다. 예를 들어 총을 소지하고 있었으면 총을 쐈다고 쏘고, 김대중 석방하라는 구호가 있었다고 하면 적극가담이라고 쓰는 식이었다. 함께 잡혀온 사람들과는 같은 사무실에서 책상만 따로 해 조사를 받았다. 그때 알고 보니 대개가 다 나와 비슷한 처지로 전과자도 있었고, 가구공, 제과점 점원, 식품업자도 있었다. 다음날 2차 조서를 받았는데 그때에도 역시 어제와 같은 이야기만을 반복했다.
수사관은 내 대답과 상관없이 1차 조서와 비슷하게 정리를 했다. 결국 나는 조서내용과는 반대되는 말만 계속하는 꼴이었다. 조사를 받는 도중 매는 계속해서 맞았다. 몽둥이뿐만 아니라 각목과 철근으로까지 맞는 일이 예사였다.
며칠 후 다시 조서를 받을 때는 수사관이 바뀌었다. 처음 1, 2차 조사시 수사관은 서울 사람이었고, 이번에는 전라도 사람으로 이름이 박병철씨이다. 내가 그에게 소리를 지르며 폭언을 많이 했다.
"왜 사실과 다르게 쓰느냐?"
"네가 나가고 못 나가고는 이 조서에 달렸다. 그래서 내가 네 말을 듣고만 있는데 조서내용과 너무나 다르다. 사실대로 말해라."
그는 내가 말하는 대로 썼다. 다 쓰고 나서는 내게 보여주었다.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으면 말해라."
내용을 확인한 후 지장을 찍었다. 나와 함께 잡혀온 다른 사람들도 역시 나처럼 좋은 대우를 받았다고 했다.
그 후 상무대 영창에서 살았다. 7월 초 1차 석방 때 우리도 나갈 줄 알았는데 제외되었다. 우리를 조사했던 박병철씨가 우리를 부르더니 말했다.
"너희들을 이번에 내보내려고 했는데 위에서 조서내용이 많이 다르다고 해 안 됐다."
며칠 후 또 조서를 받았다. 지금까지의 보고서를 상부에서 인정하지 않아 다시 조사한다고 했다. 그때부터는 '심상식'이란 자에게 조사받으며 갖은 고문과 폭행, 폭언을 당했다. 그도 역시 총을 쐈느냐는 내용을 중점적으로 물었다.
우리들은 아무도 총을 쏘지 않은 것이 분명한데, 함께 잡혀간 다른 사람들이 매에 못 이겨 쏘지도 않은 총을 쐈다고 말해버렸다. 나중에는 나만 총을 쏘았다고까지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나는 끝까지 총을 쏘지 않았다고 버텼다. 심상식이란 놈이 나를 접의자에 앉혀놓고 고개를 뒤로 젖히고 코에 물을 부어댔다. 숨이 막혀와 물을 들이킨 것이 두 주전자는 족히 될 것이다. 그리고 또 각목으로 온몸을 구타하는데, 특히 아픈 다리를 더 때리며 괴롭혔다. 그래도 내가 총을 쏘지 않았다고 하자, 이번에는 "너는 이제 죽는다. 생매장을 시켜버리겠다. 가서 이놈의 무덤을 파라"고 방위병에게 말했다. 밖으로 나간 방위병이 나가자마자 곧 들어왔다.
'아직 땅을 다 팔 시간이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들어온다.'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나를 일으켜세우더니 수갑을 풀고 수건으로 눈을 가려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좌로 몇 발, 우로 몇 발하며 여러 번 반복하는데 내 짐작에는 연병장만 계속 돌고 있는 것 같았다. 어느 장소에서 멈춰세우기에 안대 밑으로 고개를 치켜들고 살짝 내려다보니 다름 아닌 방공호였다.
"마지막 말을 해라."
"어머니, 불효자식은 먼저 갑니다. 어쩌다 총 한번 들고 다닌 것이 죄가 되어 먼저 죽으니 죄인입니다. 이 말을 어머님께 전해 주십시오." 반공호인줄 뻔히 알면서 그들의 각본대로 내숭을 떤 것이었다.
"너를 산 채로 매장시킬 것이다. 이제 죽어라."
나를 쑥 밀더니 실수한 척하면서 다시 끌어올렸다.
"야 임마, 너무 깊다."
그러고는 또 같은 질문을 했다.
"너 정말 총 안 쐈느냐? 어차피 죽기는 매한가지이니 지금이라도 나한테 사실대로 말해라."
"이제 죽을 목숨인데 뭣 때문에 거짓말을 하겠소? 우리들 중에는 총을 쏜 사람이 없고 나 역시 총을 쏘지 않았소. 그리고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그 많은 군인을 상대로 누가 미쳤다고 쏘겠소?"
그러자 잠시 후 또 좌로 몇 발 우로 몇 발을 시켜 조사받던 곳으로 데려갔다. 박병철 씨가 말했다.
"너 정말 총 안 쐈느냐?"
"내가 뭣 때문에 거짓말을 하겠어요. 어떻게 쏘지 않은 걸 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내가 교도소로 옮겨지면 당신 아들이 들어간 줄 아시오." 그의 이름 끝자가 나와 같은 '철'자 였고 또 조사받을 때 "너만한 아들이 있다"며 잘 대해 줬으므로 내가 일부러 그렇게 자신있게 말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미안하다.
재판 전에 형량은 이미 정해지고
그리고는 군검찰청으로 넘겨져 검찰조사를 받았는데, 그때 우연히 책상 옆에 붙어 있는 차트를 보게 되었다. 재판도 받기 전 이미 형이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내 죄목은 '총기소지죄, 내란죄, 포고령 위반' 등으로 일곱 가지나 되었다. 함께 잡혀간 우리 넷은 C급으로 집행유예 2년형으로 정해져 있었던 것 같다.
다시 영창생활이 계속되었다. 국회의원이 된 정상용씨와 정동년씨와 한방에서 지냈다. 김상집씨와 김상윤씨에 대해서는 우리들은 "형제는 용감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곳에서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정자세를 취하고 앉아 있어야 했지만 틈틈이 대화도 나누고 서로 친하게 지냈다.
며칠 후 수사관이 영창에 와서는 전부 고개를 숙이라고 하더니 한 명 한 명 살폈다. 그런데 아뿔싸! 나와 21일부터 함께 활동했고 24일 도청 앞에서 함께 지프차를 타고 진월동에 내린 사람이 뒤늦게 잡혀와 나를 지목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다시 불려나갔다. 수사관이 나에게 먼저 물었다.
"이 사람 아느냐?"
"모릅니다."
시치미를 뗐다. 그는 그래도 나를 안다고 했다. 다른 세 명도 처음에는 모른다고 하다가 각목으로 때리려고 하자 함께 숨었던 사람이라고 불어버렸다. 속으로 '에이 멍청한 놈들, 무조건 모른다고 하면 될 텐데' 하고 생각했지만 사람 속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처럼 인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고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걸 뼈저리게 느낀 적도 없다. 더구나 나중에 잡혀온 사람이 21일부터 함께 활동했던 것까지 다 말해버려 그때부터 나는 다시 얻어터지고 고문을 당해야 했다. 볼펜을 손가락 사이에 끼워 돌려버리는가 하면 각목으로 온몸을 때리고, 두개의 책상에 머리와 다리만 걸쳐놓은 채 몸은 공중에 붕 뜬 상태로 억수로 맞았다. 그래서 나도 화가 나 끝내는 다 말해버렸다.
"21일부터 만나 함께 활동했고, 그때도 저 사람은 완전무장을 했지만 나는 총만 들었다. 그리고 저 사람의 친구도 함께 했는데 지금은 안 잡혀왔다." 우리 네 명은 석방된 후 길에서 우연히 만나기도 했지만 그때 일을 생각하면 정이 떨어져 아는 체도 하지 않았다. 그중 한 사람은 올해 망월동에서 마주쳐 그가 전화번호랑 적어줬지만 관심이 없어 다 분실해 버렸다. 어려울 때 서로 생각하고 의리도 지켜야 하는데 자기 살길만 찾겠다고 했던 놈들이니 아는 척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이름도 기억에 없는데, 한 사람은 이진만이고 또 한 사람은 최진수였던 것 같다.
두부는 먹을 필요없다.
그해 8월 교도소로 넘어갔다가 9월 초 전두환이가 대통령 취임식 할 때 훈방조치되었다. 우리는 영문도 모르고 재판받으러 가는 줄 알았는데 상무대로 옮겨진 뒤 소준열 계엄분소장이 연설을 했다. '여자의 유방을 베었다거나 양동에서의 학살에 대한 유언비어는 믿지 말라. 다 불순분자의 책동이었고 실제로 간첩도 있었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그리고 석방되어 나가면 좋게 살라고 했다. 그때 박병철씨가 오더니 나를 찾았다. 예전에 내가 했던 말도 있고 또 석방되는 날 그를 보니 미안해서 숨어버렸다.
석방되어 집에 도착하자 동네분들이 두부를 사왔는데 어머님 말씀이, "네가 살인죄를 지었느냐, 강도질을 했느냐. 악행으로 살다 온 것 아니니 두부는 먹을 필요가 없다."고 하셔서 두부를 먹지 않았다. 우리 어머님은 남자들만 칠형제를 기르고 또 생계를 꾸려나가느라 고생을 많이 하셔서 성격이 활달하고 남자 같으시다.
그 후 나는 형님이 공무원인 관계로 피해입을 것을 염려해 내색하지 않고 있다가 올해(1988년) 추가신고 때에야 신고를 했다. 사실 지금에야 민주화운동이니, 투사니, 열사니 말들 하지만 5.18 직후에는 그런 얘기를 입 밖에 내는 사람도 없었다. 당시에는 거의 의식 없이 가담했지만 지금은 내가 그런 훌륭한 일에 참여한 것이 자랑스럽게 느껴진다.
부상자회에서 연락이 와 나가봤더니 실망이 컸다. 회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추가 접수자회'를 또 하나 만들자는 것이었다. 단체를 만들어 서로 만나고 활동하는 것은 좋지만 5.18 단체가 다 뿔뿔히 흩어져 서로 잘났다고 싸워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 단체들이 하나로 합쳐서 분과형식으로 나뉘어 활동하는 것이 더 좋을 텐데. 나보다 똑똑한 사람도 많고 또 나는 회에 가입한 지도 얼마 안 돼 아무 말 안 했다.
광주특위 청문회를 보면 국회의원들이 너무나 성의가 없고, 특히 평민당 의원들은 광주 사람들이 왜 평민당을 전폭적으로 지지해 주었는지 그 의미를 모르는 것 같다. 자신들이 직접 내려와 사건별로, 또는 날짜별로 중요한 활동을 한 사람을 만나서 얘기도 듣고 보좌관, 비서 등을 통해 직접 조사하도록 해야 하는데 자료만 몇 개 보고 청문회를 끌어가니 실수까지 저지르는 것 아닌가. 나는 정확히 확인해 보지 않고 증거자료로 택한 그 의원에게도 책임은 있다고 생각한다. (조사정리 양선화) [5.18연구소]
첫댓글 자료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