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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것과 보는 것의 싸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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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꼭지의 경제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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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은 팔기 위한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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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서방의 양복 한 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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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축적의 동력과 모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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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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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는 진실의 구성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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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랑의 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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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의 관계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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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이부동(和而不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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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이불사즉망(學而不思則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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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를 양으로 바꾼 까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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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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빔이 쓰임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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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서 바다가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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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워 기계를 사용하지 않을 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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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옛사람의 찌꺼기 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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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얼굴을 비추지 않아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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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지리의 신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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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 밑에서 띄우는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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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발 걸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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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새벽의 기상나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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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색과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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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들어 사는 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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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명인(名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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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소(老少)의 차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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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맞는 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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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가리 없는 잡담다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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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최고형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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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도의 관계론(關係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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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끼가 무엇인지, 어미가 무엇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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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구정과 압구정 - 우리가 헐어야 할 피라미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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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일리의 저녁 놀 - 일몰 속에서 내일의 일출을 바라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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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버스는 왜 서쪽으로 갔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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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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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카 최후의 도시 마추픽추 - 떠나는 것은 낙엽뿐이어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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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마음 갠지스 강 - No money No problem, No Problem No Spiri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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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얼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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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순의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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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것과 보는 것의 싸움
우리는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사회를 살아갑니다. 사회는 개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도리어 개인을 포섭하여 따르게 하는 구조입니다. 포섭과 학습, 그리고 제도와 문화에 의하여 부단히 재구축(再構築)되는 지속적 구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에게는 강제적 구조입니다. 사회가 개인을 포섭하는 기제는 먼저 사회의식을 통하여 작동됩니다. 일반적으로 특정 사회의 사회의식은 본질에 있어서 편견(偏見)입니다. 사회의식 일반의 논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편견에 관한 것입니다.
사회의식이 편견인 것은 그 사회의 언어와 문화가 편견인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언어와 문화는 자연에 대한 편견이며 동시에 다른 사회에 대한 편견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의식은 이처럼 특정한 사회, 특정한 문화, 특정한 역사적 편견으로 구성되고 있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특정사회의 문화와 의식은 이러한 일반적 편견에 더하여 계급적 편견을 내장(內藏)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특정 사회의 지배적 사회의식은 그 사회의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로 구성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개인이 최초로 대면하게 되는 사회의식은 여러 층위의 편견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개인의 일차적 과제는 기존의 사회의식을 옳게 인식하는 일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사회의식의 인식(認識)’이 일차적 과제가 됩니다.
인식은 아는 것과 보는 것의 싸움입니다.‘안다’는 것은 사회의 일반의 의식을 학습한 것이며,‘본다’는 것은 개인이 자기의 현실에서 구성하는 인식입니다. 대상에 대한 다양한 해석 가능성 중에서 하나의 해석을 선택하는 경우에도 선택은 일차적으로‘아는 것’을 기초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아는 것과 보는 것과의 갈등이 이 과정을 다시 조정합니다. 우리의 인식은 사회의식의 수용과 실천적 검증이라는 시행착오 과정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는 이론과 실천의 갈등구조입니다.
이론 역시 언어와 마찬가지로 편견입니다. 이 편견과 눈앞에서 우리와 대면하는 객관적 실체의 갈등구조가 우리의 인식지평이 됩니다. 이것은 아는 것과 보는 것의 싸움이며, 주어진 사회의식과 자기가 구성하는 사회인식의 갈등구조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인식은 사회의식의 일방적 수용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인식은 감각경험을 통해 받아들이는 자료들의 수동적 축적을 통한 귀납적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능동적으로 조사하고 비교하고 일반화시킴으로써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능동적으로 조사하고 비교한다는 것이 곧 관계의 건설입니다.
대상과 주체의 관계, 보는 것과 아는 것 사이의 관계, 구성요소들의 상호관계를 조직하는 것입니다. 인식은 관계를 조직하는 것이며 인식의 내용은 ?관계?에 대한 인식을 본령으로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인식은 본질적으로 참여(參與)이며 그것은 수동적 수용이 아니라 적극적 조직(組織)입니다.
인식이 능동적 참여와 적극적 조직임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주어진 현실공간에서 이루어집니다. 당연히 참여와 조직의 능동성은 제한적입니다. 참여와 조직 역시 우리의 인식과 마찬가지로 사회가 용인하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집니다. 개인은 문화를 통하여 사회화됨으로써 이에 적응하고 문제를 제기함으로서 이에 저항합니다.
문화는 개인의 바깥으로부터 개인의 내부에 침투함으로써 완성되고 개인은 문제 상황의 인식과 문제제기와 문제해결이라는 일련의 과정을 통하여 문화를 해체합니다. 사회에 있어서 개인은 능동적 주체로서 <I>이며 동시에 수동적 객체로서 <Me>입니다. <Me>와 <I>는 조화 충돌 모순 통일의 여러 측면을 구성합니다.
텍스트(Text)는 이러한 제한성을 뛰어 넘기 위한 디딤돌이 됩니다. 텍스트는 언제나 역사적 과정에 있습니다. 특정 시공(時空)의 특정 주체에 의하여 특정한 언어로 쓰여 진 것입니다. 상대적이고 조건적이고 우연적인 것입니다. 텍스트를 해석하고 있는 독자들도 그들 자신의 역사성에 발 딛고 있습니다. 텍스트의 역사성과 독자의 역사성 사이의 거리를 결합하는 것이 텍스트의 독법이 됩니다. 텍스트와 독자의 관점이 하나의 경험으로 융화되면서 각자의 역사성을 초월할 때 결합이 가능해집니다. 이 경우 거리는 장애가 아니라 둘을 이어주는 다리가 되고 창조적 공간이 됩니다. 텍스트의 내용과 텍스트의 독법이 창조적으로 조직될 때 비로소 텍스트의 의미가 현실적으로 생환(生還)됩니다. 이 때 텍스트는 자신을 뛰어넘게 됩니다. 대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기존 이데올로기의 재생산 공간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뛰어 넘기 위한 공간입니다. 아는 것과 보는 것이 새롭게 조직될 때, 사회의식을 주체적으로 인식할 때 비로소 창조적 공간이 열립니다.
텍스트가 역사적이라는 의미는 그것이 자족적이지 않다는 의미도 포함됩니다. 텍스트는 자유로운 합의의 결과물이거나 상호이해(相互理解)의 표현이 아니라 특정한 이데올로기이거나 강제의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텍스트뿐만 아니라 독자의 경우도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독자가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어 있는 한 역사와의 대화 상황에 자유롭게 참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참된 인식은 비판적 성찰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비판적 성찰은 일차적으로 인식주체들에 개입하는 이데올로기들을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비판하고 배제하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런 점에서 주체적 인식의 모태는 성찰과 비판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성찰과 비판이 미흡한 경우를 특히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성찰과 비판은 인식과 실천이 사회적 제약 속에서 진행된다는 사실에 대한 승인을 포함합니다. 실천은 물론이며 실천의 결과인 인식도 당연히 사회 역사적 제약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질적 제약과 정신적 제약 아래에 놓이게 됩니다. 성찰과 비판은 이처럼 텍스트와 그것을 읽는 독자, 나아가 이론과 실천의 제한성 그리고 사회의식과 사회인식에 대한 포괄적 관점을 갖게 하는 드높은 인식활동입니다.
부단한 성찰과 비판을 통하여 구성하여야 하는 것이 곧 법칙적 인식입니다. 법칙적 인식은 현상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구조에 대한 인식이며 외부보다는 내부에서 변화와 운동의 원인을 찾는 관점을 갖는 것입니다. 황소와 오리의 걸음걸이가 다른 것은 뼈대의 구조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내부는 외부를 통하여 나타나고 외부는 내부를 규정함으로써 서로 통일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구조와 내부가 현상과 외부에 비하여 주동적이며 전국면(全局面)에 관철됩니다. 사회인식의 요체는 부단한 성찰과 비판을 통한 법칙적 인식의 구성입니다. 법칙적(法則的) 인식은 동시에 구조적(構造的), 통합적(統合的), 이성적(理性的) 인식입니다. 법칙적 인식은 물(水)에서 산(山)을 보는 것입니다. 물에서 도(道)를 보는 것입니다. 바다의 맨 아래에 있는 ?움직이지 않는 역사?를 깨닫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에 장기적으로, 반복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모두 ?구조(構造)?입니다. 사회적 구조, 경제적인 구조, 문화적 구조가 그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구조는 인식의 토대이자 동시에 장애물입니다. 장기지속(長期持續)의 완고한 지하 감옥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견고한 구조라 하더라도 시간의 마모(磨耗)를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인간적 위상은 이러한 가능성 속에서 인간의 몫을 찾는데 있습니다. 완고한 감옥으로부터 해방되려고 노력하는 인간의 의지가 역사가 됩니다.
바로 이 점에서 감성은 인식의 적극적 구성요소입니다. 감성이 인식을 불안정하게 한다는 주장은 인식에 대한 그리고 진리에 대한 결정론적 관념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진리란 피안(彼岸)의 존재이며 차안(此岸)으로부터 도달하여야 할 궁극적 목표라는 관념이 결정론적 관념입니다. 감성이 인식을 불안정하게 한다는 주장은 진리라는 기존의 목표에 이르는 과정이 비합리적인 요소로부터 보호되어야 한다는 결정론적 관념에서 연유합니다. 그러나 진리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하는 것이며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조직과 참여에 있어서 감성은 대상세계의 범위를 확장합니다. 우리가 포용할 수 있는 세계의 범위를 최대한으로 확장합니다.
바로 이 점에 있어서 사회인식의 요체는 주체의 구성이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주체의 구성문제는 인식주체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고, 무엇을 위하여 살아갈 것인가 라는 가치판단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한 마디로 참여점(entry point)의 건설문제이기도 합니다. 이 참여점은 인식과 실천을 연결하는 <몸>의 문제이며, 몸의 중앙에 위치하는 <가슴, heart>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타자로부터의 해방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해방을 강조하는 것은 적극적 실천의지를 포기하고 개인적이고 윤리적인 영역으로 도피하는 것으로 비난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권력에 대한 궁극적인 저항은 그 근본에 있어서 자기와의 관계에서부터 시작되는 정체성의 문제이며, 그것이 곧 주체구성의 문제라는 사실이 간과되어서는 안 됩니다.
도덕과 윤리는 정치의 포기가 아니라 정치와의 팽팽한 긴장 속에서 온몸을 던짐으로써만 추구될 수 있는 최대한의 정치적 과제라는 사실이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주체의 구성은 인식의 전제일 뿐 아니라 인식의 궁극적 실체라는 사실 역시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주체의 문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은 발견(發見)되는 것이 아니라 발명(發明)하는 것”이며 더구나 부단히 발명해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더구나 오늘날의 실천적 과제가 정치적 억압이나 경제적 착취로부터의 해방만이 아니라, 정체성의 예속에 대한 항거라는 점에서도 주체의 문제는 바로 해방의 문제와 직결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수도꼭지의 경제학
C교도소 4동 상층의 세면장에는 수도꼭지가 8개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용할 수 있는 꼭지는 2개뿐이었습니다. 나머지 6개는 T자형의 손잡이를 뽑아버리고 스패너로 단단히 조아 놓았기 때문에 먹통이었습니다. 맨손으로는 그것을 풀 수가 없도록 해 놓았습니다. 물을 절약하기 위해서임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재소자는 너나없이“물 본 기러기”이기 때문입니다. 교도소에서 귀하기로 말할 것 같으면 밥과 맞먹는 것이 물입니다. 단 한 번도 물을 물 쓰듯 써보지 못한 우리들로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욕심입니다.
하루 세끼 설거지에서부터 세수 빨래는 물론이고 목욕은 감히 생심을 못한다 하더라도 냉수마찰은 어떻게든 하고 싶기도 합니다. 기회만 있으면 방에 있는 주전자나 물통은 물론이고 그릇이란 그릇마다 물을 채워놓는 것이 일이었습니다. 물을 많이 챙겨 놓은 날은 마음 흐뭇하기가 흡사 그득한 쌀뒤주를 바라보는 심정이었습니다. 그만큼 물이 귀했습니다. 여름철은 말할 필요도 없고 겨울이라고 해서 찬물 목욕이나 담요빨래를 시켜만 준다면 마다할 사람이 없는 처지이고 보면 물을 가운데에 둔 관과 재소자의 줄다리기가 사철 팽팽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8개의 수도꼭지 중에서 2개만 남기고 나머지 6개를 먹통으로 잠가버리는 것은 어느 교도소건 관례가 되다시피 한 통상적인 통제의 방법이었습니다. 이것은 이를테면 원천을 봉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방법이 언뜻 가장 완벽한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어느새 엄청난 누수가 일어나고 마는 것입니다. 맨 먼저 일어난 사건은 성하게 남겨둔 수도꼭지의 손잡이가 분실되기 시작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처음 몇 번 동안은 관에서 없어진 손잡이를 다시 갖다가 꽂아 놓았습니다. 그러나 다시 꽂기가 무섭게 이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수도꼭지는 어느 것이나 마찬가지로 윗부분의 나사 한개만 풀면 손잡이가 쉽게 분해될 수 있는 얼개였으며, 손잡이만 가지면 먹통꼭지를 틀어서 얼마든지 물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손잡이의 분실사건이 계속되자 이제는 아예 나머지 성한 꼭지의 손잡이마저 분리하여 담당교도관이 책상서랍에 보관하였습니다. 이제는 물을 합법적으로 쓰기 위해서도 절차를 밟아야 했습니다. 숨겨 둔 손잡이의 가치는 더욱 커졌습니다.
다른 출역사동의 세면장에 있는 수도꼭지의 손잡이가 분실되기 시작하였고 공장이건 목욕탕이건 심지어 직원 화장실에 이르기까지 수도꼭지가 분실되지 않는 곳이 없었습니다. 우리 방에도 물론 비밀리에 입수하여 감추어 두고 사용하는 수도꼭지가 한 개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법 끗발이 센 K군이 자기 혼자만 사용하는 손잡이가 한 개 더 있었습니다. 4동 상층의 11개 사방 가운데 수도꼭지를 한두 개 감추어 두고 있지 않은 방은 하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잘 나가는 방’에는 두어 개씩 보유하고 있기도 하였습니다. 심지어는 2개 또는 3개씩의 개인용 꼭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혹시 분실할 수도 있고 검방이나 검신 때 발각되어 압수될 지도 모르기 때문에 여벌로 한두 개쯤 더 가질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수도꼭지는 어느덧 친한 친구나 평소 신세를 진 사람에게 귀한 선물이 되기도 하였고 더러는 상품이 되어 다른 물건과 교환되기도 하였습니다. 수도꼭지는 이제 수도꼭지 이상의 가치를 갖게 되었습니다.
수도꼭지는 물을 떠나서도 가치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4동 상층에 몰래 감추어 두고 사용하는 수도꼭지가 모두 몇 개인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대충 계산해 보더라도 11개 방마다 한두 개씩 그리고 끗발 있는 재소자가 네댓 명이라 치면 거진 20여 개의 수도꼭지가 있는 셈이 됩니다.
세면장에 설치되어 있는 8개의 수도꼭지에 비하면 무려 두어 갑절이나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도꼭지는 여전히 부족하였습니다. 우선 그 방에 몰래 감추어 두고 쓰는 것이기 때문에 그 꼭지의 관리자한테 일일이 허락을 받아야 하였고, 개인용을 빌리기도 한두 번이지 미안하고 속상하는 일이었습니다.
4동 상층의 1백여 명의 재소자가 불편이나 불평 없이 물을 쓸 수 있기 위해서는 대체 몇 개의 수도꼭지가 있어야 하는지 계산해 보았습니다. 1인당 1개에다 분실이나 압수에 대비한 여벌 1개씩 도합 2백여 개의 수도꼭지가 필요하다는 계산입니다. 8개의 수도꼭지에 비하여 무려 2, 30배의 수도꼭지가 필요한 셈입니다.
이처럼 많은 양이 있더라도 물의 사용은 일단은 불법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실제로 담당교도관에게 적발되어 수도꼭지를 압수당하고 경을 친 사람도 더러 있었습니다. 대개는 담당교도관에서 밉게 보인 사람이거나 만만하게 보인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재수 없어’걸렸다고 했습니다. 어쨌건 원천을 봉쇄하여 물을 통제하려던 애초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8개의 수도꼭지를 모두 열어놓는 것보다 더 많은 물이 누수 되고 있었습니다. 스패너로 단단히 묶어 둔 6개의 먹통 수도꼭지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맨손인 사람에게만 철벽일 뿐 수도꼭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한테는 수청기생처럼 쉽게 몸을 풀었음은 말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처럼 수많은 수도꼭지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물은 여전히 부족하였고 불편하였습니다. 물의 필요는 수도꼭지에 대한 욕심으로 바뀌어 남들의 비난을 받았고 스스로도 부끄러웠습니다.
이 이야기는 물론 징역살이의 이야기이고 교도소에나 있는‘물 본 기러기’들의 물 욕심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서울의 도처에서 문득문득 그 씁쓸한 수도꼭지의 기억을 상기하게 됩니다.
수많은 자동차들로 체증을 이룬 도로의 한복판에서 걷는 것보다 더 느리게 꿈틀거리는 버스 속에 앉아 있을 때, 나는 예의 그 수도꼭지를 생각합니다. 분양아파트의 모델하우스에 붐비는 인파 속에서 나는 먹통 수도꼭지 앞에서 마른 침을 삼키던 예의 그 갈증을 생각합니다. 8개의 수도꼭지로 될 일이 20개 30개의 수도꼭지로도 안 되는 일은 교도소가 아닌 바깥세상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자동차도 그렇고 아파트도 그렇고 땅도 그렇고 대학입시도 그렇고 화려한 백화점의 수많은 상품들도 그렇습니다.
나는 낯선 서울거리를 걸으며 버릇처럼 수도꼭지를 상기합니다. 맨손으로 수도꼭지를 비틀다가 하얗게 핏기가 가신 엄지와 검지의 통증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잘못된 소유(所有), 잘못된 사유(私有)가 한편으로 얼마나 엄청난 낭비를 가져오며, 다른 한편으로 얼마나 심한 궁핍을 가져오는가를 생각합니다. 망망대해 위를 날고 있는 목마른 기러기를 생각합니다.
상품은 팔기 위한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상품사회입니다. 상품은 팔기 위한 것입니다. 상품이 팔기 위한 것인 한 그것은 당연히 가치를 갖습니다. 상품은 가치형태로 자신을 표현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것은 가치형태로 존재합니다. 재화와 노동력 그리고 우리자신까지도 가치형태로 존재합니다. 가장 간단한 가치표현 형태는 다음과 같은 등식입니다.
쌀 1가마 = 구두 1켤레 |
이 등식은 <쌀 1가마>는 <구두 1켤레>와 같은 가치를 갖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쌀이 상품인 한 그것은 가치형태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쌀은 스스로 가치를 드러내지 못하고 구두의 도움을 빌어 상대적으로 자기의 가치를 표현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쌀은 상대적 가치형태(相對的 價値形態)에 있다고 합니다.
반대로 구두는 쌀의 가치를 표현하는 소재일 뿐입니다. 자기가 쌀과 동등한 가치를 가졌다는 것을 증명할 뿐입니다. 따라서 구두는 등가형태(等價形態)에 있다고 합니다. 이 교환등식에 있어서 우리가 주목하여야 하는 것은 좌항과 우항은 자신의 본질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쌀은 밥과 관계가 없고, 구두는 발과 관계가 없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상품에는 자신의 본질 즉 정체성이 소멸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상품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통일이라고 하지만 본질은 교환가치입니다. 설령 사용가치를 갖는 경우조차도 그것은 하위개념으로서 교환가치의 구성요소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도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이 우리에게는 충격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 사람도 상품인 한 교환관계에 놓이게 되고 당연히 상대적 가치로서 존재하게 됩니다. 위의 등식에서 쌀에 사람을 대입하면 그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1사람 = 구두 1켤레 |
이 등식의 의미가 매우 비인간적이란 것은 누구나 읽을 수 있습니다. 사람의 인격이 소멸되기 때문입니다. <1사람 = 구두 10켤레>라 하더라도 인격이 배려된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등가물이 구두10켤레가 아니라 <연봉 1억>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십중팔구 이 등식의 비인간적 의미를 읽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사람을 읽는 일반적 관점이 되고 있습니다.
상품의 가치표현 형태는 역사적으로 ‘등가물’→‘일반적 등가물’→‘화폐’라는 발전과정을 거쳐 왔습니다. 구두라는 등가물이 화폐로 바뀌는 경우 이 좌우항의 권력은 역전됩니다. 화폐가 출현하면 상품사회의 문화와 의식구조는 상품구조로부터 화폐구조로 전환됩니다. 화폐는 상품의 아들이었으나 상품으로부터 독립하여 그것을 지배하는‘상품의 주인’으로 군림합니다.
가치의 화폐적 표현은 좌우항(左右項)의 불가역적(不可逆的) 관계의 선언이며 화폐권력의 선언입니다. 생산물뿐만 아니라 생산적 활동 그 자체에 대하여도 화폐가 권력을 행사합니다. 화폐화(貨幣化)될 수 없는 생산물이 그랬던 것처럼 화폐화되기 어려운 생산 활동은 점차 소멸됩니다. 자신의 능력을 화폐화할 수 없는 사람은 도태됩니다. 생산능력보다는 생산물을 화폐화하는 능력이 더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지적(知的) 활동보다 그것을 파는 정치적 활동이 중요해지고 예술적 활동보다는 그것을 비싼 값에 화폐화할 수 있는 경영능력이 중요해집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상품사회라고 하는 것은 결국 화폐권력이 군림하는 사회라는 의미와 다름이 없습니다.
근대사회 역시 이러한 화폐권력을 기본 구조로 하고 있습니다. 홉스의 사회 계약론에서 보는 바와 같이 국가권력과 인민이 맺고 있는 근대사회의 기본구조는 초월적 권력을 갖는 화폐에 의해 상품세계 전체가 하나로 통합되고 가치론적 질서를 획득하게 되는 화폐권력 구조와 다름이 없습니다. 아담 스미스의‘보이지 않는 손’역시 자유방임의 손이 아니라 화폐의 손입니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조화와 질서는 화폐권력이 지배하는 질서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것은 자유주의가 아니라 화폐권력에 의하여 자동화된 강제와 폭력의 개입 메커니즘입니다. 자유방임(Lesses faire)의 요구라든가 시장에 맡기라는 주장은 화폐권력에 일임하라는 요구와 같은 것입니다.
경제 불황과 공황이라는 충격적 경제현상 역시 이러한 화폐질서의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화폐의 승인을 받지 못한 가치, 다시 말하자면 팔리지 못하는 상품의 가치가 무효화되는 과정입니다. 그것은 화폐권력이 승인할 수 있는 크기로 가치가 재평가되거나 폐기되는 폭력적 과정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건은 상품이 지배하며, 상품은 화폐가 지배합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상품사회이고 상품의 최고형태가 자본이기 때문입니다. 상품은 물론 팔기 위한 것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윤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상품의 최고 형태인 화폐는 그런 의미에서 필연적으로 자기증식을 본질로 하는 자본이 됩니다. 상품에서 화폐로, 화폐에서 자본으로, 그리고 자본으로부터 자본축적 개념으로 나아가는 필연적 경로가 바로 자본주의 사회의 법칙적 운동구조입니다.
허서방의 양복 한 벌
몸을 움직여서 먹고 사는 사람은 대체로 쓰임새가 헤픈 반면에, 돈을 움직여서 먹고사는 사람은 쓰임새가 여물다고 합니다. 그러나 몸 움직여 버는 돈이란 그저 먹고사는 데서 이쪽저쪽일 뿐 따로 쌓아 둘 나머지가 있을 리 없습니다. 쓰임새가 헤프다는 것은 다만 그 씀씀이가 쉽다는 뜻에 불과하다. 쓰임새가 쉬운 까닭도 첫째 자신의 노동력을 믿기 때문입니다. 쓰더라도 축난다는 생각이 없습니다.‘또 벌면 된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끈끈한 인간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하는 과정에서 맺은 인간관계가 생활 깊숙이 자리 잡고 있어서 함께 나누어야 할 사람들이 주위에 많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일하고 더불어 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몸을 움직여 먹고 사는 사람의 쓰임새가 헤프다는 것은 이를테면 구두가 발보다 조금 크다는 정도의 필요 그 자체일 뿐 결코 인격적인 결함이라 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의 역량을 신뢰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당연하게 여긴다는 점에서 오히려 지극히 인간적인 품성이라 할 것입니다.
다만 이러한 내용이 쉽사리 드러나지 않는 까닭은 이른바‘번다’는 말의 뜻이 애매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힘들여 일한 대가로 돈을 받을 경우에도 돈을 벌었다고 하고, 돈놀이나 부동산 투기로 얻은 불로소득의 경우에도 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남을 속이거나 빼앗은 경우도 돈을 벌었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도대체‘번다’는 말의 본뜻은 무엇인가?
경제학이 가르치는 바에 따르면, 사람들이 버는 모든 소득은 노임이든 이자든 이윤이든 불로소득이든, 오로지 생산된 가치물에서 나누어 받는 것입니다. 가치물을 생산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경로를 통해서건 타인의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번다’는 말은 가치를 생산함으로써 받는 돈에 국한해야 할 것입니다.‘돈이 돈을 번다’는 말의‘번다’고 하는 단어는 다른 말로 바꾸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시골에 사는 허 서방이 서울에 올라와서 양복점에서 일하는 둘째 아들한테서 양복 한 벌을 해 입었습니다.
‘얘, 이 옷이 얼마냐?’
‘80만 원입니다. 40만 원은 옷감 값이고, 40만 원은 품값입니다.’
허 서방은 방직공장에 다니는 큰딸을 찾아갔습니다.
‘얘, 양복 한 벌 옷감 값이 얼마냐?’
‘40만 원입니다. 20만원은 실 값이고, 20만 원은 품값입니다.’
허 서방은 이번에는 방적공장에 다니는 작은딸을 찾아갔다.
‘얘, 양복 한 벌 감에 드는 실 값이 얼마냐?’
‘20만 원입니다. 10만 원은 양모 값이고, 10만원은 품값입니다.’
허 서방은 도로 시골로 내려가서 양을 키우는 큰아들한테 물었습니다.
‘얘, 양복 한 벌 감에 드는 양모 값이 얼마냐?’
‘10만 원입니다. 5만 원은 양 값이고, 5만 원은 품값입니다.’
양은 양이 낳고, 양 값이란 양을 기르는 품값입니다.
허 서방이 입은 80만원의 양복은 결국 4남매의 품값인 셈입니다. 이 이야기는 양복뿐만이 아니라 사회를 양육하고 지탱하는 의식주의 실체가 과연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동물은 철저한 소비자일 뿐이며 미생물은 단지 보조자임에 비하여, 지구 위의 유일한 생산자는 오직 식물이라는 한 농사꾼의 이야기는 실로 놀라운 정치경제학입니다. 나무를 키우는 일이 자연을 지키는 일이듯이, 사회의 생산자를 신뢰하며 그를 건강하고 힘 있게 키우는 일이야말로 사회를 지키는 가장 확실한 길이며, 나아가 수많은 사람들의 소외와 타락을 동시에 구제하는 유일한 길이라 할 것입니다.
자본축적의 동력과 모순
첫째 자본축적은 노동을 소외시킵니다.
자본은 자기증식(自己增殖)하는 가치이기 때문에 자본축적은 자본의 필연적 운동형식입니다. 자본축적은 잉여가치를 자본화하는 것이며 자본규모의 확대입니다. 잉여가치의 자본전화 즉 투자를 결정하는 것은 자본가 개인의 의지가 아니라“경쟁(競爭)”이라는 객관적 법칙입니다.
자본축적은 자본의 강제법칙이이며 자본주의적 생산은 필연적으로 확대재생산이 됩니다. 자본주의의 발전과정은 확대재생산의 과정이며 이것이 자본주의 그 자체의 동력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본축적의 동력뿐만 아니라 그 모순에 대하여 주목하여야 합니다. 자본축적은 일차적으로 자본의 유기적 구성(有機的 構成)을 고도화(高度化)합니다.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는 기계화로 나타나며 이는 투자자본 단위당 필요로 하는 노동자의 수를 감소시킵니다. 그 위에 기계화는 노동을 단순화함으로써 노동공급을 증대시키고, 다른 한 편으로는 경쟁에 몰락한 기업이 노동자를 배출하기 때문에 노동공급이 증대됩니다. 자본 축적은 이처럼 노동자가 항상적인 실업위험에 노출되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작업속도 작업방식에 있어서의 노동자의 자율성은 위축되고 완성품을 생산할 수 있는 종합적인 노동능력이 상실됩니다. 반면에 자본의 최소규모가 커지기 때문에 수공업, 농업부문으로의 후퇴로(後退路)마저 실종됩니다. 노동자는 발전할 수 없으며‘같은 것’, 아는 것’만을 반복적으로 사용하기를 강요받습니다.
둘째 자본축적은 노동이 담당합니다.
그러나 자본축적에 있어서 가장 역설적인 것은 노동이 자본을 축적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생산관계를 재생산한다는 사실입니다.
노동자가 노동력의 사용을 자본가에게 맡기고 생산과정에 투입되어 생산이 끝나면, 즉 100C'(50V+50s)를 생산하고 나면 50의 임금을 받습니다. 그것도 상품교환권(商品交換券)으로 받습니다. 노동자는 이 상품교환권으로 시장에서 자기가 생산한 100C' 중의 50C 즉 50V를 구입합니다. 따라서 50V는 상품교환권의 형태로 전환되었다가 다시 생필품의 형태로 전환되었다가 다시 노동력의 형태로 전환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재생산에 50V로 투입됩니다. 결국 C(Mp)뿐만 아니라 V(Lp)까지도 노동자가 투입합니다. 자본축적은 노동이 담당합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자본축적과정은“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재생산한다는 사실입니다. 생산된 150C' 가운데서 50V에 해당하는 C'를 교환할 수 있는 상품교환권을 노동자에게 지급하고 150C'는 자본가의 소유가 됩니다. 노동자는 이 교환권으로 50v(50C')를 구입하여 소비함으로써 노동력을 회복한 다음 생산과정에 들어갑니다.
“노동자는 자기의 외부에 자기를 지배하는 자본을 만들어놓고 걸어 나온다. 그리고 노동력을 회복한 다음 다시 걸어 들어간다.”생산관계 그 자체를 생산합니다.
셋째 자본축적은 노동계급의 궁핍화과정입니다.
이러한 자본축적과정은 더 많은 생산과 더 많은 소비로 치장된 풍요의 과정으로 인식됩니다. 그러나 자본축적과정은 내면에 있어서 노동자계급의‘궁핍화’과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자본주의 전개과정의 생산과 소비의 엄청난 증대를 부정할 수 없는 한 그것이 궁핍화 과정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을 갖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궁핍화의 의미는 종속화의 의미입니다. 물질적 소비수준이 낮아진다는 개념이 아니라 노동의 지위가 열악해지고 노동의 자율성이 침해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노동자계급의 의미 역시 특정국가의, 특정부문의 취업노동자에 국한된 개념이 아니라 세계의 모든 노동계급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이해하여야 합니다.
실업, 비정규직의 양산과 취업자의 불안은 물론이며, 국제경제의 수탈적 구조와 빈곤층의 광범한 확대현상을 간과하지 않는다면 자본축적이 풍요의 과정이라는 주장이 오히려 설득력을 잃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넷째 자본축적은 불균형의 누적과정입니다.
자본축적은 확대재생산과정이며 재생산과정에는 균형이 요구됩니다. 가치에 있어서의 균형과 개별생산물의 종류와 총량에 있어서 균형이 이루어져야 하며, 사회 전체적으로 생산과 소비간의 균형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체계에 있어서 이러한 균형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자본축적은 사적 이윤동기에 의한 개별자본의 몫입니다. 개별자본의 개별적 계획과는 상관없이 사회 전체적으로는 무정부적일 수밖에 없으며, 자본축적과정은 필연적으로 불균형의 누적과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구나 자본축적과정은 확대재생산 과정이며 확대재생산 과정은 원천적으로 생산과 소비의 불균형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다섯 째 자본축적과정은 이윤율 저하과정입니다.
이윤율의 저하는 자본총량이 끊임없이 증대한다는 사실의 다른 표현입니다. 그리고 평균이윤율이 저하하는 경향은 노동의 사회적 생산력이 점차 발전한다는 사실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있어서의 특수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평균이윤율의 저하는 이윤 량의 감소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총자본 량이 커지면 이윤율이 저하하더라도 이윤의 절대량은 일반적으로 증대합니다. 총자본 량의 증대는‘더 많은 이윤 량’과 더 낮은 이윤율’을 동시에 만들어 냅니다. 높은 이윤율을 실현하기 위하여 자본을 축적하면 할수록 처음의 의도와는 반대되는 상황에 빠지게 되는 모순에 직면합니다. 모순이란 정책적 대응에 의하여 해결될 수 없는 것이며 같은 질서 내에서는 해결될 수 없는 것으로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해체에 의하여 해소되는 성질의 것입니다. 자본은 자신의 목표를 허물어버리는 운동을 합니다.
여섯째 자본축적과정은 공황과 독점화의 과정입니다.
자본축적과정은 공황의 생산과정이며 공황은 자본축적과정의 독특한 중단과 혼란이며 동시에 생산부문간의 불균형과 생산-소비간의 불균형이 폭력적으로 조정되는 과정이며, 열위(劣位)자본이 탈락하는 독점화의 과정입니다.
독점단계에서는 더욱 치열한 우위다툼(rivalry)의 경쟁이 존재하기 때문에 독점기업도 존속을 위해서는 자본력에 있어서 우위(優位)에 서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국내시장에서는 더 이상의 투자기회가 존재하지 않으며 독점가격의 유지를 위하여 생산규모가 제한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는 자신의 독점이윤을 동일산업에 재투자하는 길이 막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독점의 모순입니다. 결국 독점적 경쟁에서 우위다툼은 동일(同一) 독점산업에 재투자(再投資)하는 경향으로 나타나며 그 결과 과잉생산(過剩生産)에 직면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채택할 수 있는 출구(出口)는 비독점 경쟁산업(非獨占 競爭産業)에 투자하는 길과 대외(對外) 자본수출(資本輸出)입니다. 그러나 비독점 경쟁산업에 대한 투자는 동일한 과정을 거쳐 생산과잉과 이윤율 하락으로 귀결됩니다. 따라서 대외팽창이 보다 큰 가능성을 갖게 됩니다. 「자본축적 → 독점 → 대외팽창」이라는 필연적 과정을 밟게 됩니다.
일곱 째 자본축적과정은 패권화의 과정입니다.
독점자본의 대외팽창은 자본축적의 내재적(內在的) 모순(矛盾)이 발현되는 것입니다. 독점자본주의 단계의 대외팽창이 곧 제국주의(帝國主義)이며 패권주의(覇權主義)입니다. 그것은 단지 과잉자본의 수출에 그치지 않고 노동력, 원료, 상품시장, 자본시장, 교역조건(交易條件)등에 있어서 패권국의 이익을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관철합니다. 정치, 경제, 문화, 군사적 지배하에 둠으로써 그 토대를 안정화합니다.
자본축적과정은 독점화과정이며 대외팽창의 과정입니다. 대외팽창과 제국주의 과정은 2차 대전 이후 신식민주의 방식으로 그 지배방식이 변화하였을 뿐만 아니라 초국적 금융자본이 헤게머니를 장악한 현대자본주의 단계에서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적 논리로 외형이 변화하였습니다. 자본축적을 전략개념으로 하는 경우 이 모든 변화와 과정이 일관되게 해명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자본축적 개념은 자본주의 이해의 전략개념입니다.
시(詩}는 진실의 구성입니다.
陟彼岵兮 瞻望父兮 父曰 嗟予子 行役夙夜無已 上愼?哉 猶來無止
陟彼?兮 瞻望母兮 母曰 嗟予季 行役夙夜無寐 上愼?哉 猶來無棄
陟彼岡兮 瞻望兄兮 兄曰 嗟予弟 行役夙夜必偕 上愼?哉 猶來無死
-『시경』 魏風, 「陟岵」-
이 시는 징병되었거나 만리장성 축조에 강제 징용된 젊은이가 가족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그리고 있습니다. 아마 당대에 가장 보편적인 이산(離散)의 아픔을 담고 있습니다. 이산의 아픔은 산업사회와 도시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안고 있는 보편적 정서이기도 합니다. 고향을 떠난 삶이란 뿌리가 뽑힌 삶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도 한 그루 나무라고 한다면 이 시의 정서는 3천 년을 격한 옛날의 정서라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만리장성에 올랐을 때 이 시가 생각났습니다. 나는 관광지로 유명한 팔달령(八達嶺)으로 가지 않고 찾는 사람도 별로 없는 사마대(司馬臺)로 갔습니다. 사마대는 마침 단 한 명의 관광객도 없는 쓸쓸하기 그지없는 정경이었습니다. 눈까지 내려 더욱 쓸쓸했습니다. 멀리 뻗어 있는 장성을 따라 시선을 던지며 그 엄청난 역사(役事)에 감탄하기도 하고 벽돌 한 장 한 장에 담겨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피땀에 몸서리치기도 했습니다.
만리장성은 동쪽 산해관에서 서쪽 가욕관에 이르는 장성입니다만,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지점은 산해관의 망루에서 1km 정도 떨어진 발해만의 노룡두인데 이곳에 맹강사당(孟姜祠堂)이 있습니다. 맹강녀(孟姜女)의 한 많은 죽음을 기리는 사당입니다.
맹강녀의 전설은 이렇습니다. 진시황 때 맹강녀의 남편 범희양이 축성(築城) 노역에 징용되었습니다. 오랫동안 편지 한 장 없는(杳無音信) 남편을 찾아 겨울옷을 입히려고 이곳에 도착했으나 남편은 이미 죽어 시골(屍骨)마저 찾을 길 없었습니다. 당시 축성 노역에 동원되었던 사람들이 죽으면 시골은 성채 속에 묻어버리는 것이 관례였다고 합니다. 맹강녀가 성벽 앞에 옷을 바치고 엎드려 대성통곡하기 며칠째 드디어 성채가 무너지고 시골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맹강녀는 시골을 거두어 묻고 나서 스스로 바다에 뛰어들어 자살했습니다. 맹강녀 전설입니다. 성채가 무너지고 시골이 나오다니 전설은 전설입니다.
그러나 사실과 전설 가운데에서 어느 것이 더 진실한가를 우리는 물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사실보다 전설 쪽이 더 진실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문학이란 그런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의 내면을 관통하는 어떤 혼(魂)이 있어야 합니다. 『시경』의 시가 바로 이러한 진실을 창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이란 결국 진실을 구성하는 수많은 조각 그림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의 조합에 의하여 비로소 진실이 창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문학의 세계이고 시의 세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경』에 실려 있는 시들은 대부분이 민간에서 불리는 노래를 수집한 것입니다. 민심을 읽고 민심을 다스려 나가기 위한 수단으로써 채시관들이 조직적으로 백성들의 노래를 수집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승인함으로써 전승되어온 민중시라는 점이 가장 큰 특징입니다. 따라서 『시경』에 대한 조명은 기본적으로 ‘삶과 정서의 공감’을 기초로 하는 사실성과 진정성(眞情性)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진정성을 통하여 현대 사회의 분열된 정서를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의 문화적 환경은 우리 자신의 삶과 정서를 분절시켜놓고 있습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상품미학, 가상 세계, 교환가치 등 현대 사회가 우리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한마디로 허위의식입니다. 이러한 허위의식에 매몰되어 있는 한 우리의 정서와 의식은 정직한 삶으로부터 유리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소외되고 분열된 우리들의 정서를 직시할 수 있게 해주는 하나의 유력한 관점이 바로 시적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적 관점은 왜곡된 삶의 실상을 드러내고 우리의 인식 지평을 넓히는 데 있어서도 매우 유용하다고 생각합니다. 시적 관점은 우선 대상을 여러 시각(視角)에서 바라보게 합니다. 동서남북의 각각 다른 지점에서 바라보게 하고 춘하추동의 각각 다른 시각(時角)에서 그것을 바라보게 합니다. 결코 즉물적(卽物的)이지 않습니다. 이처럼 자유롭고 투시적(透視的)인 관점은 사물과 사물의 연관성을 깨닫게 해줍니다. 한마디로 시적 관점은 사물이 맺고 있는 광범한 관계망을 드러냅니다.
안도현의 「너에게 묻는다」란 시가 있습니다. 이 시에서 우리는 시인이 연탄이란 하나의 대상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는가를 깨닫게 됩니다.“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정호승의 시에 「종이학」이 있습니다. 비에 젖은 종이는 내려놓고 학만 날아간다는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유연하고 자유로운 사유가 마치 학과 같습니다. 시의 정수는 이처럼 사실성에 근거한 진정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과 정서가 진정성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한 우리의 삶과 생각은 지극히 관념적인 것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사실성과 진정성의 문제는 위에서 이야기 하였듯이 우리들의 분열된 정서를 회복하고 나아가 올바른 사회인식을 키우기 위한 문제와 직결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허구와 가상과 판타지가 우리들의 감수성을 사로잡고 있는 오늘날의 문화적 환경에서는 시적 관점은 문학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공자는『시경』의 시를 한마디로 평하여‘사무사’(思無邪)라 하였습니다(詩三百篇 一言以蔽之思無邪).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사특함이 없다는 뜻은 물론 거짓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시인의 생각에 거짓이 없는 것으로 읽기도 하고 시를 읽는 독자의 생각에 거짓이 없어진다는 뜻으로도 읽습니다. 우리가 시를 읽는 이유는 거짓 없는 마음을 만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창랑의 물
屈原旣放 游於江潭 行吟澤畔 顔色憔悴 形容枯槁
漁父見而問之曰 子非三閭大夫歟 何故至於斯
屈原曰 擧世皆濁 我獨淸 衆人皆醉 我獨醒 是以見放
漁父曰 聖人不凝滯於物 而能與世推移 世人皆濁 何不?其泥 而揚其波
衆人皆醉 何不?其糟 而?其? 何故深思高擧 自見放
屈原曰 吾聞之 新沐者必彈冠 新浴者必振衣
安能以身之察察 受 物之汶汶者乎 寧赴湘流 葬於江魚之腹中
安能以皓皓之白 而蒙 世俗之塵埃乎
漁父莞爾而笑 鼓?而去 乃歌曰
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
遂去不復與言 (屈原의 「漁父」)
이 시는 유배 중인 굴원과 어부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굴원의 자문자답으로 보아도 상관없습니다. 유배되어 초췌한 모습으로 호숫가를 거닐고 있는 굴원에게 어부가 유배된 이유를 묻습니다. 굴원이 밝힌 유배의 이유는 다소 엉뚱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죄다 부패했는데 자기 혼자만 깨끗했기 때문에 유배되었고, 세상 사람들이 모두 술에 취해 있는데 자기 혼자만 맑은 정신이어서 추방당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굴원이 자신의 결백함과 정치적 정당성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굴원의 선언에 대하여 어부는 굴원의 비타협적이고 고고한 처세를 비판합니다.
성인은 사물에 얽매이지 않고 세사(世事)의 변화와 추이(推移)에 능히 어울릴 수 있어야 함을 들어 굴원의 심사고거(深思高擧)를 나무랍니다. 여기에 대한 굴원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이 구절은 명구로 지금도 인구에 회자됩니다.
新沐者必彈冠 新浴者必振衣
머리를 감은 사람은 반드시 먼지를 떤 다음 갓을 쓰는 법이며, 몸을 씻은 사람은 먼지를 떤 다음 옷을 입는 법이라고 선언합니다. 차라리 강물에 몸을 던져 고기밥이 될지언정 어찌 깨끗한 몸을 더럽힐까 보냐고 자신의 고고함을 고집합니다. 비타협적 기개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러한 굴원의 비타협적 선언에 대하여 어부는 노를 두드리며 혼잣말처럼 노래하며 떠나갑니다. 이 노래가 이 시의 결론 부분입니다. 이 부분은 어부가 읊조리는 노래로 되어 있습니다만 굴원이 스스로의 생각을 최종적으로 압축해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구절 역시 명구로 회자(膾炙)되는 구절입니다.
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
굴원의 이 시는 ‘이상과 현실의 갈등’이라는 의미로 읽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상과 현실의 모순과 갈등은 어쩌면 인생의 영원한 주제인지도 모릅니다. 이 오래된 주제에 대한 굴원의 결론은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가장 정갈하게 간수해야 하는 갓끈을 씻고, 반대로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 것입니다. 비타협적 엘리트주의와 현실 타협주의를 다 같이 배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획일적 대응을 피하고 현실적 조건에 따라서 지혜롭게 대응해야 한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굳이 이야기한다면 대중노선을 지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론은 좌경적으로 하고 실천은 우경적으로 해야 한다는 노선배들의 충고가 생각납니다. 좌경적이라는 의미는‘신목자 필탄관(新沐者必彈冠) 신욕자 필진의(新浴者必振衣)’처럼 비타협적인 원칙의 고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경적이라는 의미는 맑은 물에는 갓끈을 씻고 흐린 물에는 발을 씻는다는 현실주의와 대중노선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상과 현실의 갈등을 어떻게 조화시켜 나갈 것인가 하는 오래된 과제를 마주하는 느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에서 또 하나의 의미를 천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초사』가 대표하고 있는 남방 문학의 낭만주의적 정신세계가 갖는 의미를 재조명하는 일입니다. 한 마디로 낭만주의의 창조적 성격에 관한 담론입니다.
낭만주의는 물론 시대에 따라 매우 넓은 스펙트럼으로 나타납니다. 문학이나 미술에서부터 사회체제에 대한 비판적 세계관에 이르기까지 매우 광범한 영역을 포괄하고 있음이 사실입니다. 낭만주의가 대체로 부정적 의미로 인식되는 것은 인간의 정신을 구속하는 억압에 대한 원천적 저항과 비판 의식을 내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대응 방식의 개인주의적 성격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회에 대한 소아병적 인식의 협소함 때문에, 그리고 도피 또는 복고적이라는 실천의 허약함 때문에 그것의 긍정적 의미가 크게 훼손되어 왔음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이 강고한 억압 속에서는 그 숨겨진 구조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들이 문화적으로 길들여짐으로써 맹목이 되어버린 보이지 않는 포섭 기제를 드러내기 위하여 낭만주의적 관점은 초기 대응방식의 하나로서 충분히 주목될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 중국의 혁명과 건설이, 특히 인류사 최대의 드라마라고 하는 대장정(大長征)이 이러한 낭만주의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 역사에서는 남과 북이 싸우면 언제나 남쪽이 집니다. 중국의 전쟁사는 남의 패배와 북의 승리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기후가 온화하고 물산이 풍부한 남방인들의 기질이 험난한 풍토에 단련된 북방의 강인한 기세를 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싸움에 지는 것을 패배라고 하고 그것을 '敗北' 라고 씁니다. 북(北)에게 졌다(敗)는 뜻입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남방이 북방을 물리친 정권이 바로 현대 중국입니다. 호남성 장사(長沙)의 마오쩌둥이 이끈 중국공산당이 건설한 중화인민공화국이 이를테면 남방 정권입니다. 장쩌민과 후진타오는 물론 측근들 역시 소위 상해파로서 남방 출신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여기서 중국 권력을 논의하자는 것이 아니라 남방의 낭만주의에 대해 이야기하자는 것입니다.
1972년 닉슨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마오쩌둥이 닉슨에게 건넨 선물이 놀랍게도『초사』라는 사실입니다. 마오쩌둥은『초사』를 손에서 한시도 놓는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장정 때에도 손에서『초사』를 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조직의 류사오치(劉少奇), 이론의 마오쩌둥”이라는 유행어가 있습니다만, 마오쩌둥 사상이 이러한 남방적 낭만주의가 갖는 자유로움과 무관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남방과 낭만주의와 창조적 정신 영역이 서로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입니다. 현실에 매달리지 않고 현실의 건너편을 보는 거시적 시각과 대담함이 곧 낭만주의의 일면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이러한 넓고 긴 안목이 비록 『초사』의 세계나 남방적 낭만주의와 무관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우리가 처하고 있는 공고한 체제적 억압과 이데올로기적 포섭 기제를 드러내야 하는 당면의 과제와 연결시켜보는 것도 매우 의미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굴원은 동정호 남쪽에서 방황하다 기원전 295년 5월 5일 멱라수(汨羅水)에 돌을 안고 투신하여 59세로 일생을 마칩니다. 중국에서는 지금도 단오절인 이 날을 ‘시인(詩人)의 날’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주역의 관계론
소설을 읽는 이유는 그 속에 담겨있는 파란만장한 삶을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 그 소설은 세상을 담는 하나의 그릇이 됩니다. 많은 소설을 통하여 세상과 삶에 대한 이해를 넓혀가기도 합니다. 두보의 시 한 편에 망향의 아픔을 담아보기도 하고, 엘리엇의 시편(詩片)에서 문명의 황폐와 생명이 겪어야 할 길고 질긴 아픔을 읽기도 합니다. 300편의 시를 암기하고 세상의 숱한 인정풍물을 만날 때마다 그것을 시 한편에 담아서 간직하기도 합니다. 주역을‘물 뜨는 그릇’이라고 하는 까닭이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그릇으로 바닷물을 뜹니다. 그릇에 담긴 물은 물론 바닷물이지만 그것이 바다는 아닙니다.‘민들레’가 민들레가 아닌 것과 같습니다.
주역의 64괘는 세상의 변화를 64개의 패턴으로 분류해 놓은 것입니다. 세상의 변화를 담는 그릇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오랫동안 사용하던 손때 묻은 그릇이며 집집마다 가지고 있는 비슷비슷한 그릇입니다. 한마디로 그것은 우리의 친숙한 인식 틀입니다. 주역의 관계론이라 함은 주역의 독법이 관계론적 이라는 것이며 그것은 바로 우리의 친숙한 인식 틀이 관계론적 이라는 뜻입니다.
『주역』의 관계론적 독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위(位)입니다. 즉‘자리’입니다. 어떤 효의 길흉화복을 판단할 때 그 효(爻)만 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효가 어디에 자리하고 있는가를 보고 판단합니다. 효에는 물론 양효와 음효가 있지만 양효는 언제 어디서든지 양효로서의 공능(功能)을 발휘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음효 역시 그 공능이 개별적인 효 속에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위(位)라는 개념은 한마디로 효와 그 효가 있는 자리와의 관계입니다.
양효가 양효의 자리에 있고, 음효가 음효의 자리에 있는 경우를 득위(得位)하였다고 하고 그렇지 못한 경우를 실위(失位)하였다고 합니다. 음양이라는 개별적 존재성 보다는 그것이 맺고 있는 자리와의 관계성을 존중합니다. 개별적 존재에 대해서는 그것의 고유한 본질을 인정하지 않거나, 그러한 개별적 본질을 인정하는 경우에도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깁니다. 이는 동양적 전통에서 매우 자연스러운 생각입니다. 그 처지에 따라 생각도 달라지고 운명도 달라진다는 생각입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금언도 바로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처지를 바꾸어서 생각하라는 말은 처지에 따라 그 생각도 달라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처지에 눈이 달린다”는 표현을 하지요. 눈이 얼굴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발에 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사회과학에서는 이를 입장이라 합니다. 계급도 말하자면 처지입니다. 당파성과 계급적 이해관계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개인에게 있어서 그 자리(位)가 갖는 의미는 운명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자리가 아닌 곳에 처하는 경우 십중팔구 불행하게 됩니다. 제 한 몸만 불행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불행에 빠트리고 나아가서는 일을 그르치게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개인의 역량도 그가 처한 상황이나 자리에 따라 엄청나게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배타적 존재성보다는 포괄적 관계성 이것이 주역 독법의 특징입니다.
자기의 능력을 키우려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는 먼저 자기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 주역의 사상입니다. 개체의 능력은 개체 그 속에 있지 않고 개체가 발 딛고 있는 처지와의 관계 속에서 생성된다고 하는 생각이 바로 『주역』의 사상입니다. 이러한 사상이 득위(得位)와 실위(失位)의 개념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것이 곧 서구의 존재론과는 다른 동양학의 관계론입니다.
주역 독법 가운데 ‘중(中)’의 개념이 있습니다. 대성괘를 구성하고 있는 여섯 개의 효 중에서 제2효와 제5효를 ‘중’이라 합니다. 2효와 5효는 각각 하괘와 상괘의 가운데 효입니다. 『주역』에서는 이‘가운데’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제일 위에 있거나 제일 앞에 있는 것을 선호하는 경쟁 사회의 원리와는 사뭇 다릅니다. 중간과 가운데를 선호하는 정서는 매우 오래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산전수전을 두루 겪으신 노인들은 대체로 모나지 않고, 나서지 않고, 그저 중간만 지키기를 충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생각은 비단 노인들만의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중간을 선호하는 이유는 앞과 뒤에 많은 사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관계가 가장 풍부한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중간은 그만큼 영향을 많이 받고, 영향을 많이 주게 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중(中)에 대한 선호가 바로 관계론적 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역독법의 특징 중의 하나가 바로 중(中)의 선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역』에서는 중간을 매우 좋은 자리로 규정합니다. 그리고 가장 힘 있는 자리로 칩니다. 막상 가장 위에 있는 제6효인 상효는 물러난 사람에 비유합니다. 주역독법에서는 가운데 효 즉 중(中)이 득위하였는가, 득위하지 못하였는가를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중이면서 득위한 경우를 중정(中正)이라 하여 매우 귀하게 여깁니다.‘강건중정(剛健中正)’이란 현판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주역 독법의 하나로 응(應)의 개념이 있습니다. 위(位)가 효와 그 효가 처한 자리의 관계를 보는 것임에 비하여 응은 효와 효의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어떤 효가 다른 효와 조화를 이루고 있는가, 그렇지 못한가를 보는 것입니다. 여섯 개의 효 중에서 1효와 4효, 2효와 5효, 3효와 6효의 음양 상응 관계를 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괘의 1, 2, 3효와 상괘의 1, 2, 3효가 서로 음양 상응 관계, 즉 조화를 이루고 있는가를 보는 것이 응입니다.
『주역』 사상에서는 위보다 응을 더 중요한 개념으로 칩니다. 이를테면‘위’의 개념이 개체 단위의 관계론이라면‘응’의 개념은 개체와 개체가 이루어내는 관계론입니다. 이를테면 개체 간의 사회적 관계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위가 개인적 관점이라면 응은 사회적 관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위보다는 상위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실위(失位)도 허물이요 불응(不應)도 허물이지만 실위이더라도 응이면 무구(無咎)로 보는 것입니다. 이처럼 위보다 응을 상위에 놓는 것이 『주역』의 사상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생활의 도처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집이 좋은 것보다 이웃이 좋은 것이 훨씬 더 큰 복으로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산다는 것은 곧 사람을 만나는 일이고 보면 응의 문제는 참으로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위가 소유의 개념이라면, 응은 덕(德)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저변에서 지탱하는 인간관계와 신뢰가 바로 응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응 이외에도 효와 효의 상응 관계를 보는 개념으로 비(比)라는 관점이 있습니다. 이 비는 인접한 상하 두 효의 상응 관계를 보는 것입니다. 응이 하괘와 상괘 간의 상응 관계를 보는 것임에 비하여 이 비는 인접한 두 효의 음양 상응을 본다는 점에서 응에 비해 다소 그 관계의 범위가 협소하고 시간대가 짧습니다. 그러나 기본적 성격은 관계론임에 틀림없습니다.
이상의 몇 가지 독법만을 예로 들었습니다만『주역』의 독법은 철저하리만큼 관계론적입니다. 효와 그 효가 처한 자리(位)와의 관계, 효와 효의 관계 즉 응(應)과 비(比), 그리고 괘(卦)와 괘(卦)의 관계 등‘관계’가 판단과 해석의 기초가 되고 있습니다. 개별적 존재의 의미는 오히려 부차적일 정도로 매우 왜소합니다. 개별적 존재의 의미와 역할은 그것이 맺고 있는 관계망 속에서 상대적으로 규정되고 사후(事後)에 구성되는 것일 뿐입니다. 『주역』의 이러한 관계론적 사상이 어떠한 과정을 통하여 형성되었는가에 대하여 많은 논의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공자학파의 철학적 성과라고 설명되기도 합니다. 공자학파가 십익(十翼)을 이루어놓음으로써 복서(卜筮)의 책이 철학적 내용을 갖추게 되었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점(占)은 상(相)이나 명(命)처럼 이미 결정되어 있는 운명을 엿보려는 것이 아니라 의난(疑難)을 당하여 선택과 판단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다만 어떤 현상과 상황을 우리들의 일상적 관점과는 다른 논리로 재해석하고 조명하는 인식 체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 역시 사물과 변화에 대한 판단형식의 일종이며 그런 점에서 기본적으로 철학적 구조를 띠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역』사상에 담겨 있는 관계론의 철학적 내용은 특정 학파의 철학적 성과라고 하기 보다는 자연과의 관계형식을 존중하고 인간관계를 덕의 개념으로 존중하는 동양적 사유의 보편성으로 이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역』은 사회 경제적으로 농경적 토대에 근거하고 있는 유한 공간(有限空間) 사상이며 사계(四季)가 분명한 지역에서 발전될 수 있는 사상이라는 주장이 더욱 설득력이 있습니다. 오랜 기간 동안의 반복적 경험의 축적과 시간관념의 발달 위에서 성립할 수 있는 사상이기 때문입니다. 1년 내내 겨울이 지속되는 극지(極地)나 반대로 상하(常夏)의 지역에서는 발전할 수 없는 사상임에 틀림없습니다. 『주역』은 변화에 관한 사상이고 변화에 대한 법칙적 인식이기 때문입니다.
『주역』의 관계론적 철학 사상이 이러한 사회 역사적 지반 위에서 형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 무리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사상이란 어느 천재의 창작인 경우는 없습니다. 어느 천재 사상가가 집대성하는 경우는 있을지 모르지만 사상이란 장구한 역사적 과정의 산물입니다. 『주역』周易은 글자 그대로 주周나라 역사 경험의 총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나라 역시 그 이전의 여러 문화와 사상의 총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역』과 주나라의 문화 사상은 이후 중국 문화와 동양적 사고의 기본 틀이 되고 있음이 사실입니다. 공자는 『주역』을 열심히 읽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위편삼절(韋編三絶)이라 하여 죽간(竹簡)을 엮은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질 정도로 많이 읽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화이부동(和而不同)
子曰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 ( 『논어』「子路」)
이 글의 일반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군자는 화목하되 부화뇌동하지 아니하며 소인은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화목하지 못한다.”
이러한 일반적인 해석에서 먼저 지적해야 하는 것은 화와 동을 대비의 개념으로 해석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동양학에서는 어떤 개념을 설명하는 경우 그 개념 자체를 상술(詳述)하거나 비유를 들어 설명하기보다는 그와 대비되는 개념을 나란히 놓음으로써 그 뜻이 드러나게 하는 방식을 선호합니다. 한시(漢詩)의 대련(對聯)이 그렇습니다. 이러한 대비는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일반적 의미에서 개념은 차이를 규정하는 것에 의하여 성립됩니다. 어떤 대상에 대한 개념적 인식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과의 차이에 대한 인식입니다. 특히 언어는 모든 것에 대한 차이에 의해서 의미구성을 하기 때문에 언어는 차이가 본질이 되는 역설을 낳는다고 합니다. 동양적 표현 방식에 있어서의 대비의 방식은 이러한 언어와 개념의 한계를 우회하고 뛰어넘는 탁월한 발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는 통체적(統體的)이기 때문에 차이를 부각시키는 방법, 즉 개념적 방법으로 세계에 접근하는 것은 그것이 인식 과정의 불가피한 방법상의 문제라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세계에 대한 인식을 그르칠 수도 있습니다. 이항 대립적 차이이건 또는 모든 것과의 차이화(差異化)를 통한 개념 구성이든 상관없이 ‘차이짓기’방식은 결과적으로 부분에 매몰되게 함으로써 전체의 모습을 못 보게 합니다. 이에 비하여 대비 방식은 이러한 차이화에 대한 경계이며, 분(分)과 석(析)이라는 소위 분석방식에 대한 반성이라는 측면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문화적 전통에서 근대성과 다른 일면을 발견한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인식이란 어차피 부분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세계에 대한 일차적 인식으로서의 이른바 감성적 인식은 부분적 인식일 수밖에 없습니다. 전체에 대한 참여이고 전체의 일부를 조직한 것이 인식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다시 한 번 주의해야 하는 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이 분리된 대상을 더욱 정치(精緻)하게 개념화하는 방식은 전체와의 거리를 더욱 확대할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한 심화 과정에서 대상 그 자체가 관념화된다는 사실입니다. 이에 비하여 대비의 방식은 분리된 대상을 다시 관계망 속에 위치시킴으로써 대상 그 자체의 관념화를 어느 정도 저지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동양학에서 대체로 대비의 방식을 선호하는 까닭은 동양학 그 자체가 관계론적 구조를 띠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논어』의 이 화이부동(和而不同)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에서는 위의 해석에서 보는 바와 같이 화(和)와 동(同)을 대비로 보지 않습니다. 화를 화목하고 서로 잘 어울리는 의미로 해석하고 동을 부화뇌동(附和雷同)과 동일(同一)의 의미로 해석합니다. 어느 경우든 화와 동이 대(對)를 이루지 못합니다. 그리고 동의 의미도 첫 구와 다음 구에서의 의미가 각각 다르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첫 구에서는 부화뇌동 즉 자신의 분명한 입장이 없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다음 구에서는 동일함 즉 차이가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동을 시종 윤리적 수준에서 해석하는 것이며 그런 의미라면 새롭게 재조명할 필요도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논어』의 이 화동론(和同論)은 근대사회 즉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을 가장 명료하게 드러내는 담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화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관용과 공존의 논리입니다. 반면에 동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획일적인 가치만을 용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배와 흡수합병의 논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화와 동은 철저하게 대를 이루고 있습니다. 따라서‘군자화이부동’(君子和而不同)의 의미는 군자는 자기와 타자의 차이를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타자를 지배하거나 자기와 동일한 것으로 흡수하려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반대로‘소인동이불화’(小人同而不和)의 의미는 소인은 타자를 용납하지 않으며 지배하고 흡수하여 동화한다는 의미로 읽어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화의 논리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관용의 논리이면서 나아가 공존과 평화의 원리입니다. 그에 비하여 동의 논리는 지배, 흡수, 합병의 논리입니다. 동의 논리 아래에서는 단지 양적 발전만이 가능합니다. 질적 발전은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화의 논리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위 구절은 다음과 같이 읽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배하려고 하지 않으며, 소인은 지배하려고 하며 공존하지 못한다..”
현대자본주의가 바로 이러한 동의 논리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라는 패권적 구조가 그것입니다. 이러한 현대자본주의 논리가 바로 존재론의 논리이며 지배, 흡수, 합병이라는 동(同)의 논리입니다. 종교와 언어까지도 지배하는 전형적 동의 논리입니다.
콜럼부스에서부터 오늘날의 이라크에 이르기까지 유럽 근대사는 존재론적 논리가 관철되는 강철의 역사였습니다. 이러한 패권적인 동의 논리를 화의 원리로 전환하는 것이야 말로 새로운 문명론의 핵심적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문명전환의 담론과 관련하여 현대 중국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지양한 새로운 문명을 가장 앞서서 준비하고 있는 현장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현대 중국은 자본주의화의 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소화하고 있다는 주장이 그것입니다. 중국사의 전개과정에는 그러한 강력한 시스템이 작동해왔던 사실을 근거로 제시하기도 합니다.
불교가 중국에 유입되면 불학(佛學)이 되고, 마르크시즘도 중국에 유입되면 마오이즘이 되고, 몽고제국과 만주제국까지도 중화라는 거대한 시스템 속에 융화되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지양하고자 하는 중국적 의지에 대해서는 일단 그 역사적 의의를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중국이 만들어내고자 하는 새로운 문명이 근본에 있어서 또 하나의 동(同)일 수도 있다는 우려입니다.
중화주의(中華主義)는 철저히 문화적인 것이라는 주장이 없지 않지만 설령 그러한 주장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문화주의란 군사적 강제나 정치적, 경제적 강제를 배제한다는 의미일 수는 있지만 그것이 곧 다른 문화, 다른 가치, 그리고 다른 삶의 방식에 대한 관용과 공존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근본에 있어서 얼마든지 또 하나의 동이 될 수 있다는 우려를 불식할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극좌(極左)와 극우(極右)는 통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는 말입니다. 그러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적 격동기에는 곳곳에서 확인되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극좌와 극우가 상통하는 이유가 바로 둘 다 동(同)의 논리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패권주의적 극우 논리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극좌 논리는 둘 다 강철의 논리이며 존재론적 구조이며 결국 동의 논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점에서 극좌와 극우는 그 근본적인 구성 원리에 있어서 상통할 수 있는 구조입니다.
이러한 동의 논리와 결별하는 것에서부터 20세기를 청산해야 할 것입니다. 화(和)의 논리는 자기와 다른 가치를 존중합니다. 타자를 흡수하고 지배함으로써 자기를 강화하려는 존재론적 의지를 갖지 않습니다. 타자란 없으며 모든 타자와 대상은 사실 관념적으로 재구성된 것일 뿐입니다. 문명과 문명, 국가와 국가 간의 모든 차이를 존중해야 합니다. 이러한 차이와 다양성이 존중됨으로써 비로소 공존과 평화가 가능하며 나아가 진정한 문화의 질적 발전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러한 화동 담론은 우리의 통일론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남과 북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서로 다른 체제로 대립하고 있고 또 지금까지 흡수합병이든 적화통일이든 기본적으로 동(同)의 논리에 따른 통일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통일론을 동의 논리가 아닌 화의 논리로 바꾼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일입니다.
화의 논리는 무엇보다 먼저 공존과 평화의 논리로 통일 과정을 이끌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공존과 평화 정착은 통일 과정에서 요구되는 전 과제의 90%를 차지할 만큼 압도적인 분량의 과제입니다. 공존과 평화 정착이 일단 이루어지면 그 이후부터는 대체로 시간의 문제로 귀착됩니다.
화의 원리는 통일 과정의 출발점이면서 궁극적으로는 종착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우리의 통일문제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비롯하여 세계의 다양한 문화와 가치, 삶의 방식을 존중하고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구도를 모색하는 과제와 직결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화의 원리는 새로운 문명을 모색하는 세계사적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화의 원리로 우리의 통일 과정을 이끌어가는 노력은 통일이라는 민족적 과제로부터 세계사적 과제로 나아가는 것이기도 할 것입니다.
화동 담론은 굳이 거대담론으로 읽지 않고 일상적 교훈으로 읽는 경우에도 대단히 훌륭한 금언이 됩니다. 자기 흉내를 내거나 자기에게 굴종하는 사람을 존경하는 법은 없기 때문입니다.
학이불사즉망(學而不思則罔)
子曰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논어』「爲政」)
“학(學)하되 사(思)하지 않으면 어둡고, 사(思)하되 학(學)하지 않으면 위태롭다.”
이 정도의 번역으로는 그 뜻을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학과 사의 뜻이 불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도 완벽한 대비 형식의 진술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의 정확한 의미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학과 사를 대(對)로 읽는 것이 핵심입니다.
일반적으로 학은 배움(learning)이나 이론적 탐구라는 의미로 통용됩니다. 그런데 사를 생각(thought) 또는 사색(思索)으로 읽을 경우 학과 사가 대를 이루지 못합니다. 다 같이 정신적 영역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결론을 미리 말한다면 사는 생각이나 사색의 의미가 아니라 실천의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그것이 무리라고 한다면 경험적 사고로 읽어야 합니다. 글자의 구성도‘전田+심心’입니다. 밭의 마음입니다. 밭의 마음이 곧 사(思)입니다. 밭이란 노동하는 곳입니다. 실천의 현장입니다.
이러한 풀이에 대하여 전문 연구자의 반론이 있습니다. 사(思)의 전田은 어린아이의 두개골에 있는 봉합 부분 즉 숨구멍을 의미한다는 설명입니다. 따라서 두뇌와 마음 심(心)을 합한 것이 사(思)라는 것입니다. 총(聰) 자의 오른쪽 글자가 바로 사(思)의 원 글자에 해당한다는 대단히 자상한 전거를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사고가 두뇌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 밝혀진 것은 적어도 일본의 경우 메이지유신 이후라는 사실입니다. 그때까지는 사고가 가슴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통했습니다. 그래서 가슴에 두 손을 얹고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적어도 사(思)가 관념적 사고의 의미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학이 보편적 사고라면 사는 분명 자신의 경험을 중심으로 하는 과거의 실천이나 그 기억 또는 주관적 관점을 뜻하는 것이라고 읽어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내게는 이‘학이불사즉망(學而不思則罔)’에 관한 추억이 있습니다.
할아버님께서 언젠가 어린 손자인 나를 앉혀놓고 이 구절을 설명하셨습니다. 한 시간쯤 책을 읽고 나서는 반드시 30분 정도는 생각을 해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책을 덮고 읽은 것을 다시 생각하면서 머릿속에서 정리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야 어둡지(罔) 않게 된다는 것이 할아버님의 해석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동안 할아버님의 그런 말씀이 생각나서 자주 그렇게 하기도 했습니다. 읽은 것을 다시 생각하면 내용의 핵심을 간추려보게 되기도 하고 또 글 전체의 구성을 이해하게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내가 감옥에 앉아 책을 읽으면서 깨닫게 됩니다. 책을 읽기만 해서는 도대체 머리에 남는 것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책을 30∼40쪽 쯤 읽고 나서야 그 책은 전에 읽은 것이란 걸 알게 됩니다. 감옥에서 하는 독서란 그저 무릎 위에 책 한 권 달랑 올려놓고 읽는 것이 전부입니다. 독서는 독서 이후와 완벽하게 단절된 그저 독서일 뿐입니다. 실천과 유리된 관념의 소요(逍遙)일 뿐입니다. 책을 덮고 읽은 것을 다시 생각하고 정리해 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책을 읽는 것(學)이나 책을 덮고 생각하는 것(思)은 같은 것을 반복하는 의미 이상일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할아버님의 해석이 잘못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사(思)를 경험과 실천의 의미로 읽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분명한 것은 학과 사를 대(對)로 읽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경험과 실천의 가장 결정적인 특징은 현장성(現場性)입니다. 그리고 모든 현장은 구체적이고 조건적이며 우연적입니다. 한마디로 특수한 것입니다. 따라서 경험지(經驗知)는 보편적인 것이 아닙니다.
학(學)이 보편적인 것(general)임에 비하여 사(思)는 특수한 것(special)입니다. 따라서‘학이불사즉망’의 의미는 현실적 조건이 사상(捨象)된 보편주의적 이론은 현실에 어둡다는 뜻입니다. 반대로‘사이불학즉태’(思而不學則殆)는 특수한 경험적 지식을 보편화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뜻이 됩니다.
학교 연구실에서 학문에만 몰두하는 교수가 현실에 어두운 것이 사실입니다. 반대로 자기 경험을 유일한 잣대로 삼아 일을 처리하면 위험하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자신의 경험에서 이론을 이끌어내는 사람들, 즉 대부분의 현장 활동가들은 대단히 완고합니다. 자기 경험만을 고집합니다. 생산직 기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인(匠人)적인 자존심으로 자기 방식을 고집합니다. 경험적 지식은 매우 완고합니다. 따라서 경험주의를 주관주의라고 합니다.
자기의 경험적 사실을 곧 보편적 진리로 믿는 완강한 고집에서 나는 오히려 그 정수(精髓)의 형태는 아니라 하더라도 신의와 주체성의 일면을 발견합니다. …… 경험이 비록 일면적이고 주관적이라는 한계를 갖는 것이긴 하나, 아직도 가치중립이라는‘인텔리의 안경’을 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는 나는, 경험을 인식의 기초로 삼고 있는 사람들의 공고한 신념이 부러우며, 경험이라는 대지에 튼튼히 발 딛고 있는 그 생각의 ‘확실함’을 배우고 싶습니다. …… 경험 고집은 주체적 실천의 가장 믿음직한 원동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몸소 겪었다는 사실이 안겨주는 확실함과 애착은 어떠한 경우에도 쉬이 포기할 수 없는 저마다의‘진실’이 되기 때문입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주관주의를 경계해야 합니다. 세상이란 참으로 다양한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동(大同)은 멀고 소이(小異)는 가깝습니다. 자기의 처지에 눈이 달려 있기 때문에 누구나 자신의 시각과 이해관계에 매몰되기 쉽습니다. 따라서 사회적 관점을 갖기 위해서는 학과 사를 적절히 배합하는 자세를 키워가야 합니다.
공자가 이 구절에서 이야기하려고 한 것이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이론과 실천의 통일입니다. 현실적 조건에 대한 고려가 있어야 함은 물론이며 동시에 특수한 경험에 매몰되지 않는 이론적 사고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연과 필연의 변증법적 통일에 관한 인식이기도 합니다.
「학이」편에‘학즉불고’(學則不固)란 구절이 바로 이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배우면 완고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학(學)이 협소한 경험의 울타리를 벗어나게 해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학이란 하나의 사물이나 하나의 현상이 맺고 있는 관계성을 깨닫는 것입니다. 자기 경험에 갇혀서 그것이 맺고 있는 관계성을 읽지 못할 때 완고해지는 것입니다.
크게 생각하면 공부란 것이 바로 관계성에 대한 자각과 성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은 것은 큰 것이 단지 작게 나타난 것일 뿐임을 깨닫는 것이 학이고 배움이고 교육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작은 것의 시공적 관계성을 깨달아야 합니다. 빙산의 몸체를 깨달아야 하고 그 이전과 그 이후의 전 과정 속에 그것을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온고(溫故)와 지신(知新)을 아울러야 합니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탓하는 것이 이를테면 존재론적 사고라고 한다면, 관계론적 사고는 내가 남을 알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는 것(不患人之不知己 患不知人也)이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학(學)이 객관주의적이고 사(思)가 주관주의적이라고 설명했습니다만 반드시 그러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반대 측면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학이 주관적이고 사가 객관적인 경우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매우 사소한 일화입니다만 우리 집에 전기 공사를 할 때의 일입니다. 나도 전기수리공을 도우면서 한나절을 같이 일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의 전기수리공과 주고받은 대화 내용입니다. 집에 책이 많은 걸 보고 그 수리공이 내게 학교 선생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그의 말인즉 선생은 참 좋겠다고 부러워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부러워하는 이유가 무척 철학적이었습니다. 그가 부럽다고 하는 이유는 선생에게는 방학이 있다거나 칠판에 쓰는 것이 전기 배선 작업보다 힘이 덜 든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책상에서는 한 가지이지만 실제로 일을 해보면 열 가지도 넘는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교실보다는 현실이 훨씬 더 복잡하다는 뜻이었습니다.
그가 주장하는 바는 요컨대 이론은 주관적이고 실천은 결코 주관적일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관념적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가 이야기한 것은 어쩌면 단순하다, 복잡하다는 정도의 일상적 대화였습니다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내용은 매우 철학적인 것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는 마치 확인 사살하듯이 못 박았습니다.
“머리는 하나지만 손은 손가락이 열 개나 되잖아요.”
내가 반론했습니다.
“머리는 하나지만 머리에는 머리카락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의 대답은 칼로 자르듯 명쾌했습니다.
“머리카락이요? 그건 아무 소용없어요. 모양입니다. 귀찮기만 하지요.”
그렇습니다. 생각하면 머리카락이란 이런저런 모양을 내면서 결국‘자기(自己)’를 디자인하고 합리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그 수리공도 모자를 쓰고 있었음은 물론입니다.
소를 양으로 바꾼 까닭
臣聞之胡?曰 王坐於堂上 有牽牛而過堂下者 王見之曰 牛何之
對曰 將以?鍾 王曰 舍之 吾不忍其??若 無罪而就死地
對曰 然則??鍾與 曰 何可?也 以羊易之 不識有諸 (『맹자』「梁惠王 上」)
“신은 호흘(胡?)이라는 신하가 한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언젠가 왕께서 대전(大殿)에 앉아 계실 때 어떤 사람이 대전 아래로 소를 끌고 지나갔는데 왕께서 그것을 보시고 “그 소를 어디로 끌고 가느냐?”고 물으시자 그 사람은 “흔종(?鍾)에 쓰려고 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왕께서 “그 소를 놓아주어라. 부들부들 떨면서 죄 없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나는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흔종의식을 폐지할까요?” 그러자 왕께서는 “흔종을 어찌 폐지할 수 있겠느냐. 소 대신 양으로 바꾸어라”고 하셨다는데 그런 일이 정말로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맹자의 질문에 대한 선왕의 답변과 맹자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선왕 :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맹자 : 그런 마음씨라면 충분히 천하의 왕이 될 수 있습니다. 백성들은 왕이 인색해서 소를 양으로 바꾸라고 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신은 왕께서 부들부들 떨면서 사지로 끌려가는 소를 차마 볼 수 없어서 그렇게 하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선왕 : 그렇습니다. 그렇게 생각한 백성도 있을 것입니다만, 제(齊)나라가 아무리 작은 나라라고 하더라도 내가 어찌 소 한 마리가 아까워서 그렇게 하였겠습니까? 죄 없이 부들부들 떨면서 사지로 끌려가는 소를 차마 볼 수가 없어서 그랬던 것입니다.
맹자 : 백성들이 왕을 인색하다고 하더라도 언짢게 여기지 마십시오. 작은 것으로 큰 것을 바꾸라고(以小易大) 하셨으니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어찌 왕의 깊은 뜻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죄 없이 사지로 끌려가는 것을 측은하게 여기셨다면 (소나 양이 다를 바가 없는데) 어째서 소와 양을 차별할 수 있습니까? (牛羊何擇焉)
왕이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정말 무슨 마음으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재물이 아까워서 그런 것은 아닌데 소를 양으로 바꾸라고 했으니 백성들이 나를 인색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겠군요.
맹자 : 상관없습니다. 그것이 곧 인(仁)의 실천입니다. 소는 보았으나 양은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군자가 금수(禽獸)를 대함에 있어서 그 살아 있는 것을 보고 나서는 그 죽는 모습을 차마 보지 못하고, 그 비명 소리를 듣고 나서는 차마 그 고기를 먹지 못합니다. 군자가 푸줏간을 멀리하는 까닭이 이 때문입니다.
맹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동물에 대한 측은함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측은함으로 말하자면 소나 양이 다를 바가 없습니다. 소를 양으로 바꾼 까닭은 소는 보았고 양은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가장 핵심적인 것은‘본다’는 사실입니다. 본다는 것은‘만난다’는 것입니다. 보고(見), 만나고(友), 서로 안다(知)는 것입니다. 즉‘관계’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이 대목에서 이끌어내야 하는 것은 소와 양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실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 사회의 인간관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한마디로 오늘날의 우리 사회는 만남이 없는 사회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주변에서‘차마 있을 수 없는 일’이 버젓이 자행되는 이유가 바로 이 ‘만남의 부재(不在)’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만남이 없는 사회에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이 있을 리 없는 것입니다.
식품에 유해 색소를 넣을 수 있는 것은 생산자가 소비자를 만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식품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얼굴 없는 생산과 얼굴 없는 소비로 이루어진 구조입니다. 당구공과 당구공의 만남처럼 한 점에서, 그것도 순간에 끝나는 만남일 뿐 엄격히 말서 만남이 아닙니다. 서로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관계없기 때문에 서로를 배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러한 무관심과 냉담한 인간관계의 원인을 도시의 물리적 밀집성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도시는 자본주의가 만든 것입니다. 도시는 자본주의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실존적 형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상품사회입니다. 상품 사회는 그 사회의 사회적 관계가 상품과 상품의 교환으로 조직되어 있는 사회입니다. 당연히 인간관계가 상품교환이라는 틀에 담기게 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사람은 교환가치로 표현되고, 인간관계는 상품교환의 형식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게 되는 제도입니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라 하더라도 전체적인 사회 구성에 있어서 전(前) 자본주의 부문도 온존하고 있으며 비(非)자본주의 부문도 존재합니다. 이러한 부문에 주목하고 이 부문을 진지(陣地)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주장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실천적 과제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인식 자체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전 자본주의, 비자본주의 부문이 공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사회란 사회의 일반적 부문에 있어서의 인간관계가 일회적인 화폐 관계로 획일화되어 있는 사회입니다.
일회적 화폐관계가 인간관계 속에 전면화(全面化)되고 있는 단계가 되면 인간관계는 사실상 황폐화되고 소멸된 상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서로 보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고,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상태는 모든 사람이 타자화되어 있는 상태이며‘불인인지심’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구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관계의 황폐화는 사회 그 자체의 해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관계의 지속적 질서가 바로 사회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지속성이 있어야 만남이 있고, 만남이 일회적이지 않고 지속적일 때 부끄러움(恥)이라는 문화가 정착되는 것입니다.
지속적 관계가 전제될 때 비로소 서로 양보하게 되고 스스로 삼가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남에게 모질게 할 수가 없게 됩니다. 지속적인 인간관계가 없는 상태에서는 어떠한 사회적 가치도 세울 수 없습니다.
곡속장을 통하여 반성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우리의 현실입니다. 맹자는 제나라 선왕이 소를 양으로 바꾸라고 한 사실을 통해 제 선왕에게서 보민(保民)의 덕(德)을 보았던 것입니다.
빔이 쓰임이 됩니다.
三十輻共一? 當其無 有車之用 ?埴以爲器 當其無 有器之用 鑿戶?以爲室
當其無 有室之用 故有之以爲利 無之以爲用 (노자 제11장)
“서른 개의 바퀴살이 모이는 바퀴통은 그 속이‘비어 있음’(無)으로 해서 수레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진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드는데 그‘비어 있음’(無)으로 해서 그릇으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문과 창문을 내어 방을 만드는데 그‘비어 있음’(無)으로 해서 방으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따라서 유有가 이로운 것은 무無가 용用이 되기 때문이다.”
해석상의 논란이 없지 않지만 핵심적인 것은 역시 노자 철학의 주제인 무(無)와 유(有)의 관계입니다.
수레의 곡(?)은 바퀴살이 모이는 통(hub)입니다. 이 곡에 축(軸)을 끼웁니다. 곡에 축을 끼움으로써 수레가 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이 곡이 비어 있어야 축을 끼울 수 있는 것도 그렇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릇의 속이 비어 있기 때문에 그릇으로서의 쓰임이 생기고, 방의 빈 공간이 방으로서의 쓰임이 된다는 것 또한 너무나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노자의 관점은 그런 자명한 사실을 이야기하자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자명한 사실의 배후를 드러내는 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이 중요한 것입니다.
누구나 수레를 타고, 그릇을 사용하고, 방에서 생활하지만 그것은 수레나 그릇이나 방의 있음(有)에만 눈을 앗기어 막상 그 있음의 배후(無)를 간과하고 있는 것입니다. 숨어 있는 구조를 드러내는 것, 즉 유(有)의 배후로서의 무(無)를 드러내는 것이 노자의 철학이고 이 장의 숨은 뜻입니다. 현상을 있게 하는 본질을 가리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찻잔 한 개를 고를 때 모양이나 질감, 색상, 무늬 등을 보고 고릅니다. 말하자면 유(有)를 보고 고르는 셈입니다.
뿐만 아니라 물건의 있음(有) 즉 그 효용에 주목하기보다는 그것을 만들어내는 노동을 생각해야 한다는 뜻으로도 읽어야 합니다. 누군가의 기쁨이 누군가의 아픔의 대가라면 그 기쁨만을 취할 수 있는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기 때문입니다.
『노자』를 상품과 노동의 화두로 읽는 것이 『노자』를 매우 얕게 읽는 것이라는 비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현학(玄學)을 경제학의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가치란 소유와 소비라는 유(有)의 세계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유(有)의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고 어떻게 전개되며, 어떠한 것을 축적하고 어떠한 것을 파괴하고 있는가를 주목하는 실천적 관점이 바로 『노자』의 현대적 독법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장으로부터 무소유(無所有)의 철학을 이끌어내는 사람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소유의 예찬은 자칫 사회의 억압 구조를 은폐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해진 장삼 한 벌과 볼펜 두 자루만 남기고 입적하신 노스님의 모습은 무소유에 대한 무언의 설법입니다. 욕망의 바다에서 소유의 탑을 쌓고 있는 중생들에게 무소유의 설법은 매우 중요한 각성의 계기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소유 없이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노스님의 무소유는 사찰 종단의 거대한 소유 구조 위에서 가능한 것이라 해야 합니다.
무소유의 역설(力說) 그 자체가 역설(逆說)입니다. 무소유가 가능한 것은 소유가 용(用)이 되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노자의 역설입니다. 무소유와 무의 가치를 예찬하기보다는 차라리 우리 사회가 숨기고 있는 보이지 않는 무, 숨겨진 억압 구조를 드러내는 관점에서 이 장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장에서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하나 더 있습니다. 나의‘데미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내가 닮고 싶은 인간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나의 가까운 선배 중에 매우 조용한 분이 한 분 있습니다. 노자가 이야기하는 없는 듯이 존재하는 분입니다. 모임에서도 발언하는 일조차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모임이 끝난 후에 누구 한 사람 그분이 참석했는지 참석하지 않았는지 도무지 기억하지 못하는 그런 분입니다. 그러나 이상한 점은 그분이 참석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모든 사람들이 분명하게 그가 참석치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는 사실입니다. 참으로 신통할 정도입니다. 참석했을 경우에는 눈에 띄지 않고, 결석했을 경우에는 그 자리가 큼직하게 텅 비는 그런 분입니다. 아마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서 이것저것 꼭 필요한 일들을 거두거나 거들었기 때문이라고 짐작됩니다. 없는 듯이 있는 분의 이야기입니다. 노자의 무(無)를 연상케 하는 품성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든 살아 있는 생명들의 숨결을 위하여 한 줄기 바람이 되리라.”무와 유가 절묘하게 융화되고 있는 것이 바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노자』에 대한 이해는 노자를 닮은 사람을 찾는 것으로 완성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화두로 하여 자신을 끊임없이 반성하는 것이 『노자』의 진정한 독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서 바다가 됩니다.
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居善地 心善淵 與善仁 言善信 正善治 事善能 動善時 夫唯不爭 故無尤
-『노자』 제8장 -
노자 철학을 한마디로‘물의 철학’이라고 합니다. 도무수유(道無水有), 도는 보이지 않고 보이는 것 가운데 가장 도에 가까운 것이 바로 물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물로써 도를 설명하고 있는 이 장은 매우 유명한 장입니다. 노자가‘상선약수’(上善若水)라 하여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고 하는 까닭은 크게 나누어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만물을 이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물이 만물을 이롭게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더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로(雨露)가 되어 만물을 생육하는 것이 바로 물입니다. 생명의 근원입니다.
둘째는 다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투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좀 설명이 필요합니다. 다투지 않는다는 것을 매우 소극적인 의미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다투어야 마땅한 일을 두고도 외면하거나 회피하는 도피주의나 투항주의(投降主義)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다투지 않는다는 것은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실천한다는 뜻입니다. 다툰다는 것은 어쨌든 무리가 있다는 뜻입니다. 목표 설정에 무리가 있거나 아니면 그 경로의 선택이나 진행 방식에 무리가 있는 경우에 다투게 됩니다.
주체적 역량이 미흡하거나 객관적 조건이 미성숙한 상태에서 과도한 목표를 추구하는 경우에는 그 진행 과정이 순조롭지 못하고 당연히 다투는 형국이 됩니다. 무리(無理)를 감행하지 않을 수 없는 법입니다. 쟁(爭)이란 그런 점에서 위(爲)의 다른 표현이고 작위(作爲)의 필연적 결과입니다.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하는 일이 못 되는 것을 노자는‘쟁’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손자병법』에‘전국위상 파국차지(全國爲上 破國次之)’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나라를 깨트려서 이기는 것(破國)은 최선이 못 된다고 하고 있습니다. 전국(全國), 즉 나라를 온전히 보전한 채로 취하는 것이 최상의 승리라는 뜻입니다. 다투지 않는다는 것은 작위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노자』 마지막 장인 제81장의 마지막 구가‘천지도이이불해(天地道 利而不害) 성인지도위이부쟁(聖人之道 爲而不爭)’입니다.“천지의 도는 이로울지언정 해롭지 않고, 성인의 도는 일하되 다투는 법이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물은 결코 다투는 법이 없습니다. 산이 가로막으면 멀리 돌아서 갑니다. 바위를 만나면 몸을 나누어 비켜갑니다. 곡류(曲流)하기도 하고 할수(割水)하기도 합니다. 가파른 계곡을 만나 숨 가쁘게 달리기도 하고 아스라한 절벽을 만나면 용사처럼 뛰어내리기도 합니다. 깊은 분지를 만나면 그 큰 공간을 차곡차곡 남김없이 채운 다음 뒷물을 기다려 비로소 나아갑니다. 너른 평지를 만나면 거울 같은 수평을 이루어 유유히 하늘을 담고 구름을 보내기도 합니다.
셋째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는 것입니다.
항상 낮은 곳에 처한다는 뜻입니다. 이 경우 낮다는 것은 반드시 그 위치가 낮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비천한 곳, 소외된 곳, 억압받는 곳 등 여러 가지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물론 물은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이 구절이 노자 정치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속에서 민초들의 정치학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노자 사상이 민초들의 정치적 해방을 위한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노자』는 지식인 내부의 비판 담론이며, 근본에 있어서 고도의 제왕학(帝王學)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도가(道家)의 무리는 대개 사관(史官)에서 나왔으며 이는 인군(人君)이 나라를 다스리는 술수(術數)를 기술한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소위‘무위(無爲)의 통치’는 군주의 비밀 정치론이라는 해석도 없지 않습니다.
제3장에 대해서도 다르게 해석하기도 합니다. 백성을 무지무욕(無知無慾)하게 한다는 것은 곧 우민화(愚民化)이며, 백성들의 마음을 비우고 배를 채우게 한다는 것은 배만 부르게 하고 머리는 비게 한다는 것입니다.
의지를 약하게 만들고 뼈를 튼튼하게 한다는 것은 비판 의식을 제거하고 힘든 노동에 견딜 수 있도록 육체만 튼튼하게 한다는 논리입니다. 이와 같은 부정적 평가의 부분적 타당성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비판은 결과적으로『노자』를 철학의 차원으로부터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노자』는 중국 사상사에서 최고의 철학적 담론임에 틀림없습니다. 백 보를 양보하여 『노자』를 정치사상이나 이데올로기라고 하더라도『노자』의 정치학은 철저한 비판 담론이란 점에서 민초들의 입장과 정서에 닿아 있는 것이라고 해야 합니다.
춘추전국시대는 무한 경쟁의 시대입니다. 부국강병의 방법론을 두고 수많은 이론이 속출하게 됩니다. 직접 일하지 않고 패자(覇者)에게 기생하여 지식을 팔고, 그것을 발판으로 하여 사사로운 이해를 도모하는 지식인 계층이 사회적으로 확대됩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노자는 패권 경쟁을 반대하고 그에 기생하는 지식인들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그러면서도 노자는 자신의 주장을 사회학과 정치학의 차원을 넘어 철학적 논리로 승화시킵니다.
‘도가도비상도(道可道 非常道) 명가명비상명(名可名 非常名)’이라는 최고의 철학적 체계를 완성합니다. 여기에 시대를 초월하고 있는『노자』의 역사적 의미가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노자는 자신의 철학적 논리로 패권 경쟁을 둘러싼 일체의 행위를 반자연의 무도(無道)한 작위로 단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노자』가 제왕학이 될 수 없는 가장 근본적 이유가 이와 같습니다. 패권 경쟁의 무도한 작위를 철저하게 반대하는 것 그것이 민초들의 정치학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반전중명(反戰重命)사상을 설파하고 약한 자가 이긴다는 희망을 선포하고 있는 노자의 비판 담론은 전쟁의 최대 희생자인 민초들의 삶과 투쟁에 뛰어난 실천적 의미를 부여하는 사상이며 전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춘추전국시대라는 천하 대란을 당하여 모든 억압과 착취는 결국 가장 약한 민초들의 부담으로 전가됩니다.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생명과 재산을 잃고,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이산의 고통은 결국 민초들의 몫입니다. 이러한 민초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노자』곳곳에 피력되어 있습니다. 백성들이 굶주리는 것은 지배자들이 세금을 많이 걷어 먹기 때문이라는 것이 노자의 인식입니다.(제75장).
물이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는 것은 가장 낮은 곳에 처한다는 뜻이며, 또 가장 약한 존재임을 뜻합니다. 가장 약하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물입니다. 민초가 그렇습니다. 천하에 물보다 약한 것이 없지만 강한 것을 공격하기에 이보다 나은 것은 없으며 이를 대신할 다른 것이 없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天下莫柔弱於水 而攻堅强者莫之能勝 以其無以易之: 제78장).
이 78장에서 우리가 찾아내어야 하는 것은 물이 강한 것을 이길 수 있는 이유입니다. 유약(柔弱)이 사직(社稷)의 주인이 되고 천하의 왕이 되는 까닭, 연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단단한 것을 이기는 이유를 읽어내야 합니다. 왜 그러한 힘이 약한 것에 있는가 하는 이유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몫입니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는 이유는 무엇보다 먼저 약한 사람이 그 수에 있어서 다수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강자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그것은 그가 지배하는 약한 사람들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강자의 힘은 그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地位)에서 나오는 것이고 그 힘은 원래 약자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강자가 지배하는 구도에 있어서 약자의 수가 항상 다수라는 사실입니다. 강자가 다수일 수 없다는 사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약한 사람들이 다수라는 사실은 두 가지 점에서 결정적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다수 그 자체가 곧 힘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수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도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쉬지 않고 흐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강한 것을 공격하기에 물보다 나은 것이 없는 까닭은 물은 쉬지 않고 흐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낙숫물이 댓돌을 뚫는 이치가 바로 그렇습니다. 쉬지 않고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럴 수 있기 위해서는 일단 다수여야 합니다. 양적으로 우세해야 합니다.
둘째, 다수는 곧 정의(正義)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곧 민주주의 원리입니다. 불벌중책(不罰衆責), 많은 사람이 범한 잘못은 벌할 수 없는 법입니다. 많은 사람이 지킬 수 없는 신호는 신호 위반자를 처벌하기보다는 신호등을 철거해야 하는 것이 옳습니다. 물론 소수의 선동가에 의해서 다수의 의견이 왜곡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언론권력에 의해서 여론이 조작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다수라고 할 수 없음은 물론입니다. 약한 사람이 이길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다수이기 때문이며 다수가 바로 현실이며 정의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이‘바다’입니다. 바다가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입니다. 낮기 때문에 바다는 모든 물을 다‘받아들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바다’입니다. 세상의 모든 물을 다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가장 낮은 곳에 있기 때문임은 물론입니다. 큰 강이든 작은 실개천이든 가리지 않고 다 받아들임으로써 그 큼을 이룩하는 것입니다. ‘강해소이능위백곡왕자(江海所以能爲百谷王者)’. 바다(江海)가 모든 강(百谷)의 으뜸이 될 수 있는 까닭은‘자신을 더 낮추기 때문이다.(以其善下之)’라는 66장의 선언이 그렇습니다. 『노자』가 민초의 전략 전술이며 정치학이라고 하는 이유가 이와 같습니다.
노자의 물은 민초들의 정치학이면서 동시에 우리 사회의 실천적 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변혁 역량은 대단히 취약합니다. 절대적인 역량에 있어서 취약하고 더구나 부문별로 또는 정파 단위로 분산되어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처럼 분산된 부문별 역량들의 결합 수준 또한 대단히 저급하기 때문입니다. 연대야말로 당면의 실천적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연대의 모델이 다름 아닌 ‘노자의 물’입니다. ‘하방 연대(下放連帶)’입니다.
낮은 곳으로 지향하는 연대입니다. 노동·교육·농민·환경·의료·시민 등 각 부문 운동이 각자의 존재성을 키우려는 존재론적 의지 대신에 보다 약하고 뒤처진 부문과 연대해 나가는 하방 연대 방식이 역량의 진정한 결집 방법임은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중소, 하청기업, 비정규직, 여성, 해고자, 농민, 빈민 등 노자의 물처럼 낮은 곳을 지향하는 연대이어야 함은 물론이며 하방 연대에는 보다 진보적인 역량이 덜 진보적인 역량과 연대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덜 진보적인 역량은 더 양보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위의 8장은 다음 구절로 이어집니다.
居善地 心善淵 與善仁 言善信 正善治 事善能 動善時 夫唯不爭 故無尤
이 구절도 여러 가지로 해석되고 있습니다만 중요한 것은『노자』 전체의 의미 맥락에 따라서 읽어야 하고 현대적 의미를 재조명하는 관점에서 읽는 일입니다. 이 문장의 주어는 물론 물입니다.
‘거선지’居善地는 현실에 토대를 둔다는 의미입니다. 민중들과의 정치적 목표를 공유하는 현실 노선과 대중노선을 토대로 해야 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심선연’(心善淵)은 마음을 비운다(虛靜)는 의미입니다. 사사로운 목표를 경계하는 것입니다.
‘여선인’(與善仁)의 여와 인은 인간관계를 의미합니다. 동지적 애정으로 결속해야 한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언선신’(言善信)은 그 주장(言)이 신뢰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선치’(正善治)의 정(正)은 정(政)입니다. 바로잡는 것, 즉 개혁과 변혁입니다. 그 방법이 치(治)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평화로워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영도 방식이 예술적이어야 한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정(政)의 방법이 예술적이어야 한다는 의미는 강제나 독선에 의한 것이 아니라 최대의 자발성과 창조성을 이끌어낸다는 의미입니다.
‘사선능’(事善能)은 전문적인 능력으로 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며,
‘동선시’(動善時)는 그 때가 무르익었을 때에 움직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체적 역량과 객관적 조건이 성숙되었을 때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상에서 제시한 실천 방법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과학적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학적 방법이란 싸우지 않는 것(不爭)이며 따라서 오류가 없는 것(無尤)입니다. 이어지는 구절이 바로 이러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유부쟁 고무우(唯不爭 故無尤)’, “오직 다투지 않음으로써 허물이 없다.”
부끄러워 기계를 사용하지 않을 뿐
爲圃者忿然作色而笑曰 吾聞之吾師 有機械者 必有機事 有機事者 必有機心
機心存於胸中 則純白不備 純白不備 則神生不定 神生不定者 道之所不載也
吾非不知 羞而不爲也 -『장자』「天地」-
자공(子貢)이 초(楚)나라를 유람하다 진(晉)나라로 가는 길에 한수(漢水) 남쪽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한 노인이 우물에서 물을 길어 밭에 내고 있었는데 힘은 많이 드나 효과가 별로 없었습니다. 딱하게 여긴 자공이 용두레(?)라는 기계를 소개합니다. 노력은 적게 들고 효과는 큰(用力甚寡 而見功多) 기계를 소개하자 그 노인은 분연히 낯빛을 붉히고 이야기합니다. 위의 글은 노인이 자공에게 하는 말입니다.
밭일을 하던 노인은 불끈 낯빛을 붉혔다가 곧 웃음을 띠고 말했다.
“내가 스승에게 들은 것이지만 기계라는 것은 반드시 기계로서의 기능(機事)이 있게 마련이네. 기계의 기능이 있는 한 반드시 효율을 생각하게 되고(機心), 효율을 생각하는 마음이 자리 잡으면 본성을 보전할 수 없게 된다네(純白不備). 본성을 보전하지 못하게 되면 생명이 자리를 잃고(神生不定) 생명이 자리를 잃으면 도(道)가 깃들지 못하는 법이네. 내가 (기계를)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부끄러이 여겨서 기계를 사용하지 않을 뿐이네.”
그 다음 이야기도 매우 신랄합니다.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대답을 못하고 있는 자공에게 댁은 뭐 하는 사람이냐고 노인이 묻습니다. 자공이 공구(孔丘)의 제자라고 대답하자 노인은 공자를 신랄하게 욕합니다. 그자는 많이 아는 체하고, 성인을 자처하고, 백성들을 속이고, 홀로 거문고를 타면서 슬픈 듯이 노래하며, 천하에 명성을 팔고 다니는 자가 아닌가! 자네도 그런 생각을 버리고 심신의 속박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도에 가까이 다가갈 수가 있겠네. 제 몸 하나도 간수하지 못하는 주제에 어느 여가에 천하를 다스린단 말인가? 내가 하는 일을 어리석다 하지 말고 그만 가보시게.
(子非夫博學以擬聖 於于以蓋衆 獨弦哀歌 以賣名聲於天下者乎 汝方將忘汝神氣
墮汝形骸 而庶幾乎 而身之不能治 而何暇治天下乎 子往矣 无乏吾事)
이 글에서 이야기하려고 하는 장자의 속뜻에 관해서는 더 설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생산성, 경쟁력, 효율성이라는 신화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장자의 이러한 태도는 어쩌면 시대착오적인 이야기로 여겨질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동양적 가치는‘인성(人性)의 고양(高揚)’이 궁극적 목표입니다. 더 많은 생산과 더 많은 소비가 아닙니다. 도의 깨달음과 도의 체득 그리고 합일(合一)입니다. 물론 현대의 동양에서는 이미 이러한 가치와 정서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동양의 근대화란 곧 서구화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근대성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요구되고 있다는 사실이 또한 현대의 특징입니다. 기계에 대한 장자의 주장은 근대성에 대한 반성적 의미로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장자의 체계에 있어서 기계가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것은, 기계는 그 속성인 기사(機事)와 기심(機心)으로 인하여 인간을 소외시키기 때문입니다. 기계의 발명과 산업화 그리고 이 과정에서 발생되는 노동 문제, 노동자 문제, 노동 계급 문제 등은 장자가 경험하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나아가 공황이나 실업 문제에 대해서도 경험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장자는 매우 중요한 문제를 미리 꿰뚫어보고 있습니다. 기계로 말미암아 인간이 비인간화된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장자의 논거는 오늘날의 논의와는 그 장(場)을 달리 합니다. 기계로 말미암아 노동이 종속적 지위로 전락하고, 노동과 노동자에 대한 경멸적 문화가 자리 잡는 그러한 일련의 반노동 과정을 지적하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좀 더 근원적인 문제를 꿰뚫어보고 있습니다. 일과 놀이와 학습이 통일된 형태가 가장 바람직한 것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기계는 바로 이 통일성을 깨트린다는 것입니다. 노동은 그 자체가 삶입니다.
경제학적 표현을 빌린다면 노동은 삶의 지출(支出)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노동이란‘생명의 존재형식’입니다. 지출이란 개념이 온당하지 않음은 물론입니다. 모든 생명은 노동함으로써 존속합니다. 그런 점에서 노동은 삶의‘실현’이며,‘삶 그 자체’입니다. 기계는 노동의 근본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노동이 삶 그 자체임에도 불구하고 기계로 말미암아 노동이 다른 목적의 수단으로 전락되는 것입니다. 노동을 그 본연의 지위로부터 끌어내리는 일을 기계가 하고 있는 것입니다.
러다이트 운동(Luddite Movement)은 1810년대 영국에서 일어난 기계 파괴 운동입니다. 기계로 말미암아 일터를 잃은 노동자들이 기계 파괴에 나섰습니다. 기계가 사람을 쫓아냈기 때문이었습니다. 기계로 인한 실업, 즉 자본축적과 상대적 과잉인구 문제를 제기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참담한 실패로 끝난 후 이 러다이트 운동에 대하여 내린 평가는 다음과 같습니다.
기계와 기계의 자본주의적 채용을 구별하지 못한 데서 일어난 잘못된 운동이라는 것이 비판의 요지였습니다. 기계가 사람을 추방한 것이 아니라 기계의 채용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결론입니다. 기계의 효율성은 생산력의 발전에 필요한 것으로 승인됩니다. 다만 그것이 자본의 논리로 채용되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상대적 과잉인구를 만들어냈다는 것입니다. 기계의 효율성이 노동 시간의 단축과 노동 경감으로 이어지지 않고 노동자의 해고 즉 실업으로 이어지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물론 틀린 논의가 아닙니다.
그러나 장자와 함께 이 문제를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합니다. 자본주의적 채용 형식이 아니라면 기계 자체로서는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한마디로 기계가 인간을 소외시키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 기계는 그 효율성으로 말미암아 사람들로 하여금 더 많은 여가를 가지게 하고 그 생산성으로 말미암아 사람들로 하여금 더 많은 소비를 할 수 있게 합니다. 그러나 기계로 인한 실업 문제가 없다고 하더라도 여가와 소비의 증대가 인간성의 실현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곧 장자의 문제의식입니다.
장자가 제기하는 것은 경제학에서 다루는 문제보다는 훨씬 더 근원적인 것입니다. 도(道)의 문제입니다. 도에서 멀어지기 때문에 그 편리성을 충분히 알고 있지만 채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순백한 생명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용두레를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장자의 주장입니다. 순백한 생명이 안정되려면 자연과의 조화가 필요한 것은 물론입니다. 우리의 삶은 도와 함께 소요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장자의 체계에 있어서 노동은 삶이며, 삶은 그 자체가 예술이 되어야 하고, 도가 되어야 하고, 도와 함께 소요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장자의 시대가 아니더라도 오늘날 우리에게는 기계와 속도와 효율성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고, 이러한 반성이 근대 문명에 대한 반성으로 이어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계보다는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효율성보다는 깨달음을 소중하게 여기는 문화를 복원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절망적인 것은 우리의 현실이 그러한 반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장자가 우려했던 당시의 현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책은 옛사람의 찌꺼기입니다.
齊桓公讀書於堂上 輪扁?輪於堂下
釋椎鑿而上 問桓公曰 敢問公之所讀者 何言邪
公曰 聖人之言也
曰 聖人在乎 公曰 已死矣
曰 君之所讀者 古人之糟魄已夫
桓公曰 寡人讀書 輪人安得議乎 有說則可 無說則死
輪扁曰 臣也 以臣之事觀之 ?輪徐則甘而不固 疾則苦而不入
不徐不疾 得之於手 而應於心 口不能言
有數存焉於其間 臣不能以喩臣之子 臣之子亦不能受之於臣
是以行年七十而老?輪 古之人 與其不可傳也 死矣
然則 君之所讀者 古人之糟魄已夫 (『장자』「天道」)
제나라 환공이 당상(堂上)에서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목수 윤편(輪扁)이 당하(堂下)에서 수레바퀴를 깎고 있다가 망치와 끌을 놓고 당상을 쳐다보며 환공에게 물었습니다.
“감히 말씀 여쭙겠습니다만 전하께서 읽고 계시는 책은 무슨 말(을 쓴 책)입니까?”
환공이 대답하였습니다. “성인(聖人)의 말씀입니다.”
“그 성인이 지금 살아 계십니까?”
“벌써 돌아가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전하께서 읽고 계신 책은 옛사람의 찌꺼기군요.”
환공이 말했습니다.
“내가 책을 읽고 있는데 목수 따위가 감히 시비를 건단 말이냐. 합당한 설명을 한다면 괜찮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윤편이 말했습니다.
“신은 신의 일(목수 일)로 미루어 말씀드리는 것입니다만, 수레바퀴를 깎을 때 많이 깎으면 (축軸 즉 굴대가) 헐거워서 튼튼하지 못하고 덜 깎으면 빡빡하여 (굴대가) 들어가지 않습니다. 더도 덜도 아닌 정확한 깎음은 손짐작으로 터득하고 마음으로 느낄 뿐 입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물론 더 깎고 덜 깎는) 그 중간에 정확한 치수가 있기는 있을 것입니다만, 신이 제 자식에게 그것을 말로 깨우쳐줄 수가 없고 제 자식 역시 신으로부터 그것을 전수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일흔 살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손수 수레를 깎고 있습니다. 옛사람도 그와 마찬가지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전하지 못하고(글로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하께서 읽고 계시는 것은 옛사람들의 찌꺼기일 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위의 글을 읽으면 연극 무대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습니다. 당상에 환공이 앉아서 책을 읽고 당하의 마당에는 백발의 늙은 목수가 수레바퀴를 깎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대사가 시작되는 그런 연극 무대 같은 그림이 떠오릅니다. 눈앞에 펼쳐 보이듯이 자기의 주장을 매우 쉽고 설득력 있게 이야기하는 장자의 역량이 돋보입니다. 사실은 우리 강의도 이처럼 쉽고 비근한 예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하지 않나 하고 반성하게 하는 글입니다. 내용에 관해서는 더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책의 한계에 관해서 이보다 더 명쾌한 비판이 있을 수 없습니다.
위의 예시문은「천도」天道 13절의 일부입니다만 그 앞부분에서‘책’의 한계에 대하여 명쾌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세상에서 도(道)를 얻기 위하여 책을 소중히 여기지만 책은 말에 불과하다. 말이 소중한 것은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며 뜻이 소중한 것은 가리키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은 그 뜻이 가리키는 바를 전할 수가 없다. 도대체 눈으로 보아서 알 수 있는 것은 형(形)과 색(色)이요 귀로 들어서 알 수 있는 것은 명(名)과 성(聲)일 뿐이다.”
책과 함께 지식에 관한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雖然有患 夫知有所待而後當 其所待者 特未定也
庸?知吾所謂天之非人乎 所謂人之非天乎 (『장자』「大宗師」)
“지식이란 의거하는 표준이 있은 연후에 그 정당성이 검증되는 법인데 그 의거해야 하는 표준이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문제이다. 내가 자연이라고 하는 것이 인위적인 것은 아닌지 그리고 내가 인위적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은 자연이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장자는 물론 이 구절에서 하늘이 하는 일과 사람이 하는 일을 나누고, 결국 하늘에 비추어보아야 한다(照之於天)는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장자의 결론은 물론 새삼스러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장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우리는 이 구절로부터 ‘지식’에 대한 몇 가지 논의를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입장(立場)에 관한 것입니다. 장자의 체계에 있어서‘조지어천(照之於天)’의 의미는 진인(眞人)의 입장을 뜻합니다. 일견 객관적 입장을 의미합니다. 지식에 있어서 과연 객관적 입장이 있는가라는 논의가 가능할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장자가 관념론자로 비판되는 근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장자의 천(天)을 객관적 입장의 의미로 해석하기보다는 우물을 벗어나는 탈정(脫井)의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둘째는‘소대이후 당(所待而後當)’ 즉 지식의 진리성은 소대(所待) 이후에 검증된다는 것입니다. 이 경우 소대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가 관건입니다. 소대는 다음 구절에서 반복됩니다.‘소대자 특미정(所待者 特未定)’이 그것입니다. 소대가 아직 미정이라는 것입니다. 특(特)은 다만’또는‘아직’이란 의미로 읽습니다. 소대는 글자 그대로 ‘기다려야 할 어떤 것’입니다. 따라서‘지유소대 이후 당(知有所待而後當)'이란 의미는 지식이란 어떤 것을 기다린 연후에 그 진리성 여부가 판명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을 기다려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지식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식이란 한마디로 어떤 대상을 표현하는 명(名)입니다. 그 명의 실체가 되고 있는 실(實)과 비교하여 명실(名實)이 부합할 때에 지식은 합당(合當)한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소대자(所待者)는 실(實)을 가리킵니다. 그리고‘소대자 특미정’이란 이 실(實)이 아직 정해지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상 그 자체가 변화한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변증법에 의하면 이론은 실천에 의하여 그 진리성이 검증됩니다. 그러나 실천의 조건이 변화하고, 실천의 주체가 변화하는 경우 검증은 매우 복잡한 것이 됩니다. 장자는 물론 이러한 논의를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만 우리는 이 문제는 가볍게 넘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과 진리성에 관한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변화’입니다. 변화를 담아내는 구조를 만드는 일입니다. 사회 변동기에는 이러한 요구가 더욱 절실해진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최대한의 변화를 포용하려고 할 때 우리는 다시 한 번 장자의 천(天)을 생각하게 됩니다. 장자의 천은 진리가 수많은 진리들로 해체되는 것을 막아주고 진리가 재(材), 부재(不材)라는 쓸모의 차원으로 격하되지 않도록 해주는 최후의 보루가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느 것이 인(人)이며, 어느 것이 천(天)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이것은 장자의 고민이기도 하고 동시에 오늘날 우리의 고민이기도 할 것입니다.
끝으로 지식론이 아닌 대단히 풍자적인 장자의 지혜론(?)을 소개합니다.
“지혜란 무엇인가?”
“상자를 열고, 주머니를 뒤지고, 궤를 여는 도둑을 막기 위하여 사람들은 끈으로 단단히 묶고 자물쇠를 채운다. 그러나 큰 도적은 궤를 훔칠 때 통째로 둘러메고 가거나 주머니째 들고 가면서 끈이나 자물쇠가 튼튼하지 못할까 걱정한다. 세속의 지혜란 이처럼 큰 도적을 위해 재물을 모아주는 것이다.”
오늘날의 지식이 하는 일이란 대체로 이런 역할에 지나지 않습니다. 정권을 유지하게 하거나, 돈을 벌게 하거나, 나쁜 짓을 하고도 그것을 그럴듯하게 꾸미는 일을 대행하는 일이 지식과 지식인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도척(盜?)은 도둑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데, 실은 공자 당시의 노나라 현인 유하계(柳下季)의 동생으로 무리 9천을 거느리고 여러 나라를 침략한 대도(大盜)였습니다. 장자가 도척에게 “도적질에도 도가 있습니까?”하고 질문합니다.
도척의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감추어진 것을 알아내는 것이 성)聖)입니다. 남보다 먼저 들어가는 것이 용(勇)입니다. 늦게 나오는 것이 의(義)이며, 도둑질해도 되는가 안 되는가를 판단하는 것이 지(知)입니다. 도둑질한 물건을 고르게 나누는 것이 인(仁)입니다.”
물에 얼굴을 비추지 않아야 합니다.
是故 子墨子曰 古者有語曰 君子不鏡於水 而鏡於人 鏡於水 見面之容 鏡於人
則知吉與凶 今以攻戰爲利 則蓋嘗鑒之於智伯之事乎
此其爲不吉而凶 旣可得而之矣 (『묵자』「非攻」)
“옛말에 이르기를‘군자는 물을 거울로 삼지 않고 사람을 거울로 삼는다’고 했다. 물을 거울로 삼으면 얼굴을 볼 수 있을 뿐이지만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길흉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공격 전쟁이 이롭다고 하는 사람들은 어찌하여 지백과 부차의 일을 거울로 삼지 않는가?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전쟁이야말로 흉물임을 일찌감치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묵자에게 있어서 전쟁은 국가가 근본을 잃는 것이며 백성들이 그 생업을 바꾸어야 하는 일입니다(國家失本 而百姓易務也). 천하에 엄청난 해악을 끼치는 일입니다(天下之害厚矣). 전쟁의 폐단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임금이나 대신들이 그런 짓을 즐겨 행한다면 이것은 천하의 만백성을 해치고 죽이는 것을 즐기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이 묵자의 반전(反戰) 비공(非攻)의 논리입니다 (王公大人樂而行之 則此樂賊滅天下之萬民也).
묵자는 다만 전쟁의 피해를 들어 그 부당함을 비판하는 논리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공격 전쟁 그 자체가 결국은 패망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역설합니다.
“옛날 일은 들어서 알고 지금 일은 눈으로 보아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공격 전쟁으로 망한 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尙者以耳之所聞 近者以目之所見 以攻戰亡者 不可勝數
그 중에서도 특히 힘만 믿고 자만하던 오왕(吳王) 부차(夫差)의 사례와 연전연승으로 오만해져 공격을 그칠 줄 몰랐던 진(晉)의 지백(智伯)이 결국은 약소국의 연합 전선에 무참히 패망하였던 사례를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묵자』물론 대단히 광범한 영역을 포괄하고 있습니다. 전국시대의 패권주의에 대하여 강력한 비판 세력으로 등장하여 기층 민중의 이상을 처음으로 제시한 최초의 좌파사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추운 자는 입을 것이 없고, 일하는 자는 쉴 틈이 없다(有三患 飢者不食 寒者不衣 勞者不息)는 현실인식에 근거하여 겸애(兼愛)라는 보편적 박애주의와 교리(交利)라는 상생(相生)이론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론을 지침으로 하여 실천적 연대(連帶) 방식을 통하여 사회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당면의 실천적 과제로서 반전 평화의 기치를 내걸고 헌신적으로 방어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묵자 사상이 매우 넓은 범위에 걸쳐 있지만 특히 그의 반전(反戰) 평화론(平和論)에 주목하는 까닭은 전쟁이 결코 과거의 역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至殺人也 罪益厚於竊其桃李 殺一人謂之不義 今至大爲攻國
則弗知非 從而譽之謂之義 此可謂知義與不義之別乎 (『묵자』「非攻」)
“사람을 죽이는 것은 복숭아를 훔치는 것보다 죄가 더 무겁다. (그래서) 사람을 죽이면 그것을 불의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 크게 나라를 공격하면 그 그릇됨을 알지 못하고 그것을 칭송하면서 의롭다고 한다. 이러고서도 의와 불의의 분별을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열 명, 백 명을 살인하는 것이 아니라, 수만 명을 살인하는 전쟁에 대해서는 비난할 줄 모르고 그것을 칭송하고 기록하여 후세에 남기고 있는 전국시대의 그 집단적 허위의식에 대하여 묵자는 통렬한 각성을 촉구합니다. 천하가 그러한 허위의식에 물들어 있는(國亦有染) 현실을 개탄하고 있습니다. 마치 오늘날의 우리를 질타하는 듯합니다.
전국시대는 이름 그대로 하루도 전쟁이 그치지 않는 시대였습니다. 묵자는 전쟁의 모든 희생을 최종적으로 짊어질 수밖에 없는 기층 민중의 대변자답게 전쟁에 대해서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그것을 정면에서 반대합니다. 전쟁은 수천수만의 사람을 살인하는 행위이며, 수많은 사람의 생업을 빼앗고, 불행의 구렁으로 떨어트리는 최대의 죄악입니다. 단 한 줌의 의로움도 있을 수 없는 것이 전쟁입니다.
따라서 비공(非攻), 반전(反戰), 평화(平和)야말로 전국시대 최고의 사상이며 최상의 윤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통일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전쟁 방식에 의한 정의의 실현이 공공연히 선언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전쟁을 용인하는 한 그것이 어떠한 논리로 치장하고 있더라도 그것은 기만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나쁜 평화가 없듯이 좋은 전쟁 또한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묵자의 반전론은 매우 정연한 논리를 가지고 전개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단한 설득력을 발휘합니다.
묵자는 공격전쟁(攻戰)을 예찬하는 자를 반박합니다. 공전이 비록 불의(不義)하지만 이익이 된다는 논리에 대해서도 반박합니다. 제나라와 진(晉)나라가 처음에는 작은 제후국이었으나 전쟁을 통하여 영토가 확장되고 백성이 많은 강대국으로 발전하였다는 사실을 들어 공전을 예찬하는 논리가 있지만 묵자는 단호하게 이는 잘못된 것이라고 논박합니다.
“만 명에게 약을 써서 서너 명만 효험을 보았다면 그는 양의(良醫)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약이 아니다. 그러한 약을 부모님께 드리겠는가?”라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몇 개의 전승국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수많은 패전 국가의 비극과 파괴를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묵자는 또한 전쟁의 파괴적 측면에 대하여 매우 자세하게 예시하고 있습니다.
“전쟁은 수년, 빨라야 수개월이 걸린다. 임금은 나랏일을 돌볼 수 없고 관리는 자기의 소임을 다할 수 없다. 겨울과 여름에는 군사를 일으킬 수 없고 꼭 농사철인 봄과 가을에 (전쟁을) 벌인다. 농부들은 씨 뿌리고 거둘 겨를이 없게 된다. 이렇게 되면 국가는 백성을 잃고 백성은 할 일을 잃는다. 화살·깃발·장막·수레·창칼이 부서지고, 소와 말이 죽으며, 진격 시와 퇴각 시에 수많은 사상자를 내게 된다. 죽은 귀신들은 가족까지 잃게 되고 죽어서도 제사를 받을 수 없어 원귀가 되어 온 산천을 떠돈다. 전쟁에 드는 비용을 치국(治國)에 사용한다면 그 공은 몇 배가 될 것이다.”
불경어수(不鏡於水)의 금언은 마치 오늘의 세계를 눈앞에 두고 하는 말 같습니다. 군사적 패권주의가 당장은 부강의 방책일 수 있지만 그것이 곧 패망의 길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묵자의 준엄한 반전 선언이 살아 있는 언어로 다가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울에 비추지 마라”는 묵자의 금언은 비단 반전의 메시지로만이 아니라 인간적 가치가 실종된 물신주의적 문화와 의식을 반성하는 귀중한 금언으로도 읽어야 할 것입니다.
차치리의 신발
鄭人有且置履者 先自度其足 而置之其座 至之市 而忘操之 已得履
乃曰 吾忘持度 反歸取之
及反市罷 遂不得履 人曰 何不試之以足 曰 寧信度 無自信也
(한비자』「外儲說左 上」)
“정나라에 차치리라는 사람이 있었다. 자기의 발을 본뜨고 그것(度)을 그 자리에 두었다. 시장에 갈 때 탁(度)을 가지고 가는 것을 잊었다. (시장의 신발 가게에 와서) 신발을 손에 들고는 탁을 가지고 오는 것을 깜박 잊었구나 하고 탁을 가지러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다시 시장에 왔을 때는 장은 이미 파하고 신발은 살 수 없었다. (그 사정을 듣고) 사람들이 말했다. “어째서 발로 신어보지 않았소?” (차치리의 답변은) “탁은 믿을 수 있지만 내 발은 믿을 수 없지요.”
시장에 신발 사러 간 사람이 발의 본을 뜬 탁(度)을 가지러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이야기입니다. 탁을 가지러 구태여 집까지 갈 필요가 없음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탁을 가지러 집까지 가는 것도 우스운 이야기입니다만 위 예시문의 핵심은 사람들의 반문에 대한 차치리의 답변에 있습니다. 직접 신어보고 신발을 고르면 되지 않느냐는 사람들의 말에 대한 차치리의 답변은 매우 엉뚱합니다. 탁은 믿을지언정 내 발은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글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소개하는 구절입니다만 나로서는 나 자신을 스스로 경계하는 뜻으로 읽고 있습니다. 차치리의 행동은 참 어리석고 우습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내가 이 글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웃지 않았습니다. 나 자신이 바로 탁을 가지러 집으로 가는 사람이라는 걸 곧바로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매우 충격적이었습니다. 나는 여러분도 탁을 가지러 집으로 가는 사람이기는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탁이란 책입니다. 리포트를 작성하기 위해서 여러분은 탁을 가지러 갑니다. 현실을 본뜬 탁을 가지러 도서관으로 가거나 인터넷을 뒤지는 것 역시 탁을 상대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살아 있는 현실을 대면하기보다는 그 현실을 본뜬 책을 더 신뢰하는 것입니다. 발을 현실이라고 한다면 여러분 역시 발로 신어보고 신을 사는 사람이 못 됩니다.
나와 같이 징역살이를 한 노인 목수 한 분이 있었습니다. 언젠가 그 노인이 내게 무얼 설명하면서 땅바닥에 집을 그렸습니다. 그 그림에서 내가 받은 충격은 잊을 수 없습니다. 집을 그리는 순서가 판이하였기 때문입니다. 지붕부터 그리는 우리들의 순서와는 반대였습니다. 먼저 주춧돌을 그린 다음 기둥 도리 들보 서까래 지붕의 순서로 그렸습니다. 그가 집을 그리는 순서는 집을 짓는 순서였습니다. 일하는 사람의 그림이었습니다. 세상에 지붕부터 지을 수 있는 집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붕부터 그려온 나의 무심함이 부끄러웠습니다. 나의 서가(書架)가 한꺼번에 무너지는 낭패감이었습니다. 나는 지금도 책을 읽다가 ‘건축’이라는 단어를 만나면 한동안 그 노인의 얼굴을 상기합니다.
주춧돌부터 집을 그리던 그 노인이 발로 신어보고 신발을 사는 사람이라면 나는 탁을 가지러 집으로 가는 사람이었습니다. 탁(度)과 족(足). 교실과 공장. 종이와 망치. 의상(衣裳)과 사람. 화폐와 물건. 임금과 노동력. 이론과 실천. . . . 이러한 것들이 뒤바뀌어 있는 우리의 사고(思考)를 다시 한 번 반성케 하는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고성 밑에서 띄우는 글
오늘은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비는 이 유형지의 어두운 분위기를 더욱 더 축축한 것으로 만듭니다. 저마다 권태로움에 젖어드는 자신의 마음을 구하려 하지만 이미 수렁에 던져진 바위처럼 마냥 밑으로, 밑으로 침하하기만 합니다. 세상의 가장 낮은 바닥에 앉아 있는 처지에 다시 더 밑으로 떨어진다는 것은 결국 가상(假想)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허무한 가상 속에서 상당한 분량의 위로를 얻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자물쇠 채우는 금속성의 마찰음이 귓전을 칠 때, 또는 취침나팔의 긴 여운이 울먹일 때, 또는 잠에서 막 깨어 그것이 꿈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우리는 허황한 착각에서 깨어나 퍼뜩 제정신이 들면서 다시 침통한 마음이 됩니다. 이런 때에는 어김없이 현실의 땅바닥에 떨어져버린 한 마리씩의 깃이 젖은 새처럼 풀죽은 꼴이 됩니다.
이렇게 하루에도 몇 번씩 하늘과 땅 사이를 배회하는 가상 속에서 오히려 옥살이라는 고통과 위로를 혼동하며, 고통이든 위로든 그것을 애매하게 만들어놓습니다. 그러나 오늘같이 비가 내리는 날이면 자꾸만 밑이 꺼지는 공허를 어쩔 수 없습니다. 진흙바닥에 발이 박혀서 신발마저 뽑아내지 못한 채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던 국민학교 시절의 기억…….
이제 한 달 안으로 이 고성을 떠나게 될 것 같습니다. 작년 1월 22일 하얗게 눈에 덮인 이 산성으로 실려 온 지 벌써 1년 5개월, 그 동안 나는 많은 것들을 여기 이 땅 속에 묻어두었습니다. 어쩌면 이 편지가 남한산성에서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지도 모릅니다. 이 편지 역시 이 땅 속에 묻는 편지이기도 합니다. 이곳은 나 한 사람만의 사연이 묻혀 있는 곳이 아니라 민족의 수난과 치욕이 멍든 비극의 땅이기도 합니다.
이조 16대 임금 인조가 청나라 태종의 말 아래 무릎을 꿇고 항복한 곳도 바로 이곳입니다. 그것이 약 300년 전의 일이고 보면 아직도 이곳 어디엔가 묻혀 있을 혈흔을 파낼 수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창문에서 보이는 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는 큰 소나무가 다섯 그루 서 있습니다. 나는 노대위와 함께 저 소나무 밑에 앉아서 이쪽을 굽어보며 술 한 잔 기울일 것을 약속해두었습니다.
지금 막 취침나팔이 울리고 있습니다. 요즈음은 취침나팔을 스피커를 통하여 녹음방송하기 때문에 이 소리마저도 나무토막처럼 감흥이 없습니다. 하나 잃었습니다. 좀 전까지만 하더라도 수감자 나팔수가 옥상에 올라가서 설레는 가슴으로 불었었는데 지금은 그도 출감해버리고 불만한 사람이 없나 봅니다. 며칠 전 중앙에 들렀더니 거기 벽 구석에 그 나팔이 걸려 있었습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잠시 쓰다듬어보았습니다. 오랫동안 쓰지 않아서인지 윤기도 없고 군데군데 얇은 녹이 앉아 있었습니다. 사형수의 신발처럼 쓸쓸한 행색이었습니다.
이제는 모두들 곤한 몸들을 누이고 잠들어버린 듯 주위는 무덤 속 정적입니다. 오늘 저녁에는 꼭 이야기 하나 들려달라고 그리도 졸라대던 세 친구도 내 옆에서 고이 잠들고 말았습니다.
비가 많이 내렸습니다. '와우 아파트'가 무너지고, 축대가 깨져 판잣집이 내려앉고, 태풍‘올가'호가 휩쓸어 산이 무너지는 등 숱한 재산, 인명이 또 한 번 액운을 당하고 있는데도, 이곳에서 비닐우산 한 자루 없이도 태무심으로 걱정 하나 없이 앉아 있습니다.
감옥의 벽은 태풍에도 꿈적 않을 만큼 견고하고, 높고 작은 반달 창은 해가 떴는지 별이 떴는지도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얻은 평정함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러한 평정함이 도대체 나를 무엇으로 만들어갈 것인가. 주룩주룩 그치지 않는 빗소리는 이런 나의 심경을 축축하고 무거운 곳으로 끌어내리고 마침내 질퍽한 진흙바닥에 나앉게 합니다. 어깨가 젖고 가슴이 젖는 듯한 무거운 상념에 젖어듭니다. 이처럼 빗소리에 새삼스레 무거운 마음이 되는 까닭은 아직도 내게 숱한 미련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과거를 회상하는 것은 미래를 창백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사실 요사이 나는 지난 일들을 자주 떠올리고, 또 그것들을 미화하는 짓을 자주 하는 편입니다. 과거가 가장 찬란하게 미화되는 곳이 아마 감옥일 것입니다. 감옥에는 과거가 각박한 사람이 드뭅니다. 감옥을 견디기 위한 자위(自慰)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만 이 자위는 참혹한 환경에 놓인 생명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생명운동 그 자체라고 생각됩니다. 자위는 물론 엄한 자기성찰, 자기비판에 비하면 즉자적(卽自的)이고 감성적인 생명운동임에는 틀림없습니다만 그것이 갖는 의미와 필요에 대하여 너무 심하게 폄하할 생각이 없습니다.
불모의 영토마다 자리 잡고 있는 과거라는 이름의 숲은 실상 한없이 목마른 것입니다. 그늘도, 샘물도, 기대앉을 따뜻한 바위도 없습니다. 머물 수 있는 곳이 못됩니다. 나는 벽 앞에 정좌하여 동공을 나의 내부로 열기로 하였습니다. 내부란 과거와 미래의 중간입니다. 과거를 미화하기도 하고, 현재를 자위하기도 하고, 미래를 전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사색이 머릿속의 관념으로서만 시종(始終)하는 것이고 보면, 앞뒤도 없고 선후도 없어 전체적으로는 공허한 것이 되고 맙니다. 그렇지만 나는 나의 내부에 한 그루 나무를 키우려 합니다. 숲이 아님은 물론이고, 정정한 상록수가 못됨도 사실입니다. 비옥한 토양도 못되고 거두어줄 손길도 창백합니다.
염천과 폭우, 엄동한설을 어떻게 견뎌나갈지 아직은 걱정입니다. 그러나 단 하나, 이 나무는 나의 내부에 심은 나무이지만 언젠가는 나의 가슴을 헤치고 외부를 향하여 가지 뻗어야 할 나무입니다.
이 나무는 과거에다 심은 나무이지만 미래를 향하여 뻗어가야 할 나무입니다. 더구나 나는 이 나무에 많은 약속을 해두고 있으며 그 약속을 지킬 열매를 키워야 하기 때문에 당장은 마음 아프더라도 자위보다는 엄한 자기 성찰로 스스로를 다그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오늘은 유난히 햇빛이 밝은 날입니다. 어제 내린 비가 온갖 먼지를 씻어낸 자리에 오늘은 일제히 햇빛이 내려 쪼이고 있습니다. 멀리 산림과 눈앞의 벽돌담이 다 함께 본래의 색깔로 빛나고 있습니다. 나는 이 넓은 햇빛 속에서 가끔 우렁찬 아우성소리를 듣는 때가 있습니다. 낮은 소리에서부터 서서히 음계를 높여가서는 가장 높은 꼭대기에서 폭발하여 합창으로 되는, 아니 소리가 빛이 되는 그런 순간이 있습니다. 오늘도 씻은 듯 맑은 산림과 벽돌담에 은총처럼 쏟아지는 햇빛이 방금이라도 우렁찬 아우성으로 비약할 듯합니다. 자연의 위대함에 경탄하다가 창가에 목을 뽑고 있는 나 자신에게로 돌아오면, 광막한 자연으로부터 지극히 사소한 나의 애환으로 돌아오면 순간 고적감이 송곳같이 파고듭니다.
고독한 상태는 일종의 버려진 상태입니다. 스스로 나아간 상태와는 동일한 조건이라고 하더라도 그 의미는 전혀 다릅니다. '창조의 산실'로서 고독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고독은 무엇을 창조할 수 있는 상태가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지금 내가 처하고 있는 이 어두운 옥방의 고독이 창조의 산실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찬란한 햇빛 아래 산과 들과 숲과, 건물과…… 모든 것이 저마다 생동하는 우람한 합창 속에서 내가 지키고 있는 이 고독한 자리가 대체 어떤 의미가 있으며, 도대체 무슨 이름으로 불러야 할 것인가.
고독은 고독 그것만으로도 가까스로 한 짐일 뿐 무엇을 창조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닙니다. 어떤 형태로든지 이 고독을 깨뜨리지 않고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우렁찬 저 햇빛 찬란한 합창을 향하여 문 열고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한 발 걸음
우리 방에서 가장 빨리 달리는 20대의 청년과 가장 느린 50대의 노년이 경주를 하였습니다. 토끼와 거북이의 우화를 실연(實演)해본 놀이가 아니라 청년은 한 발로 뛰고 노년은 두 발로 뛰는 일견 공평한 경주였습니다. 결과는 예상을 뒤엎고 50대 노년이 거뜬히 이겼습니다. 한 발과 두 발의 엄청난 차이를 실감케 해준 한판 승부였습니다. 우김질 끝에 장난삼아 해본 경주라 망정이지 정말 다리가 하나뿐인 불구자의 패배였다면 그 침통함이란 이루 형언키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징역살이에서 느끼는 불행 중의 하나가 바로 이 한 발 걸음이라는 외로운 보행입니다. 실천과 인식이라는 두 개의 다리 중에서 '실천의 다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실천 활동을 통하여 외계의 사물과 접촉함으로써 인식을 가지게 되며 이를 다시 실천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그 진실성이 검증되는 것입니다. 실천은 인식의 원천인 동시에 그 진리성의 규준이라 합니다.
이처럼 '실천 → 인식 → 재실천 → 재인식'의 과정이 반복되어 실천의 발전과 더불어 인식도 감성적 인식에서 이성적 인식으로 발전해갑니다. 그러므로 이 실천이 없다는 사실은 거의 결정적인 의미를 띱니다. 그것은 곧 인식의 좌절, 사고의 정지를 의미합니다. 흐르지 않는 물이 썩고, 발전하지 못하는 생각이 녹슬 수밖에 없는 이치입니다.
제가 징역 초년, 닦아도, 닦아도 끝이 없는 생각의 녹을 상대하면서 깨달은 사실은 생각을 녹슬지 않게 간수하기 위해서는 앉아서 녹을 닦고 있을 것이 아니라 생각 자체를 키워나가야 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요컨대 일어서서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랑 많이 일굴수록 쟁깃날은 빛나고", 유수봉하해(流水逢河海), 흐르는 물은 바다를 만난다는 너무나 평범한 일상의 재확인이었습니다만 이것이 제게 갖는 뜻은 결코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일어나서 걷고자 할 경우의 허전함, 다리 하나가 없다는 절망은 다시 그 자리에 주저앉게 합니다.
징역 속에 주저앉아 있는 사람들이 맨 처음 시작하는 일이 책을 읽는 일입니다. 그러나 독서는 실천이 아니며 독서는 다리가 되어주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역시 한 발 걸음이었습니다. 더구나 독서가 우리를 피곤하게 하는 까닭은 그것이 한 발 걸음이라 더디다는 데에 있다기보다는 '인식 → 인식 → 인식……'의 과정을 되풀이하는 동안 앞으로 나아가기는커녕 현실의 튼튼한 땅을 잃고 공중으로, 공중으로 지극히 관념화해 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결국 저는 다른 모든 불구자가 그러듯이 목발을 짚고 걸어가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제가 처음 목발로 삼은 것은 다른 사람들의 경험 즉 '과거의 실천'이었습니다.
목발은 비록 단단하기는 해도 자기의 피가 통하는 생다리와 같을 수 없기 때문에 두 개의 다리가 줄곧 서로 차질을 빚어 걸음이 더디고, 뒤뚱거리고, 넘어지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나 이 어색한 걸음새도 세월이 흐르고 목발에 손때가 묻으면서 그럭저럭 이력이 나고 보속(步速)과 맵시(?)가 붙어갔습니다.
그런데 이 경우의 소위 이력이란 것이 제게는 매우 귀중한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목발이 생다리를 닮아서 이루어진 숙달이 아니라 반대로 생다리가 목발을 배워서 이루어진 숙달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나의 인식이 내가 목발로 삼은 그 경험들의 임자들의 인식을 배우고 그것을 닮아감으로써 비로소 걸음걸이를 얻었다는 사실입니다. 목발의 발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생다리의 발전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은 사전(事前)에는 반대로 예상했던 것이었던 만큼 실로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징역 동료들의 경험들이 단지 과거의 것으로 화석화되어 있지 않고 현재의 징역 그 자체와 튼튼히 연계되거나 그 일부를 구성하고 있음으로 해서 강렬한 현재성을 띠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과거의 실천이란 죽은 실천이 아니라 살아서 숨 쉬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의 발견은 나의 목발에 피가 통하고 감각이 살아나는 듯한 감동을 안겨주는 것이었습니다.
실천이란 반드시 극적 구조를 갖춘 큰 규모의 일만이 아니라 사람이 있고 일거리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흔전으로 널려 있다는 제법 익은 듯한 생각을 가져보기도 합니다.
사람은 각자 저마다의 걸음걸이로 저마다의 인생을 걸어가는 것이겠지만, 땅을 박차서 땅을 얻든, 그 위에 쓰러져 그것을 얻든, 죽어서 땅 속에 묻히기까지는 거대한 실천의 대륙 위를 걸어가게 마련이라 생각됩니다.
3월, 길고 추웠던 겨울이 끝나려 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옥담 밑 어느 후미진 곳에 봄은 벌써 작은 풀싹으로 와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어떻든 봄은 산 너머 남쪽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발밑의 언 땅을 뚫고 솟아오르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겨울 새벽의 기상나팔
기상 30분 전이 되면 나는 옆에서 곤히 잠든 친구를 깨워줍니다. 부드러운 손찌검으로 조용히 깨워줍니다. 그는 새벽마다 기상나팔을 불러 나가는 교도소의 나팔수입니다.
옷, 양말, 모자 등을 챙겨서 갖춘 다음 한 손에는 '마우스피스'를 감싸쥐어 손바닥의 온기로 데우며 다른 손에는 나팔과, 기상나팔 후부터 개방(開房) 나팔 때까지 서서 읽을 책 한 권 받쳐 들고 방을 나갑니다. 몇 개의 외등(外燈)으로 군데군데 어둠이 탈색된 운동장을 가로질러서 교회당 계단을 꺾어 올라 높다란 2층 창 앞에 서서 나팔을 붑니다. 가슴에 맺힌 한숨 가누어서 별빛 얼어붙은 새벽하늘에 뿜어냅니다. 성씨 다른 아버지께 엽서를 띄우는, 엄마 불쌍해서 돈 벌어야겠다는…… 농(農)돌이, 공(工)돌이, 이제는 스물다섯 징(懲)돌이……. 얼어붙은 새벽하늘을 가르고, 고달픈 재소자들의 꿈을 찢고, 또 하루의 징역을 외치는 겨울 새벽의 기상나팔은 '강철로 된 소리'입니다.
교도소의 문화가 침묵의 문화라면 교도소의 예술은 비극미(悲劇美)의 추구에 있습니다. 전장에서 쓰러진 병정이 그 주검을 말가죽에 싸듯이 상처 난 청춘을 푸른 수의에 싸고 있는 이 끝동네 사람들은 예외 없이 비극의 임자들입니다.
검은 머리 잘라서 땅에 뿌리고, 우러러볼 청천 하늘 한 자락 없이, 오늘밤 두들겨볼 대문도 없이, 간 꺼내어 쪽박에 담고 밸 꺼내어 오지랖에 싸고, 이렇게 사는 것도 사는 것이냐며 삶 그 전체를 질문하는, 검푸른 비극의 임자들입니다. 비극이, 더욱이 이처럼 엄청난 비극이 미적인 것으로 승화될 수 있는 가능성은 그 '정직성'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저한테 가해지는 중압을 아무에게도 전가하지 않고 고스란히 짐질 수밖에 없는, 가장 낮은 곳에 사는 사람의 '정직함'에 있습니다. 비극은 남의 것을 대신 체험할 수 없고 단지 자기 것밖에 체험할 수 없는 고독한 1인칭의 서술이라는 특질을 가지며 바로 이러한 특질이 그 극적 성격을 강화하는 한편 종내에는 새로운 '앎' ― '아름다움' ― 을 마련해주는 것입니다.
비극은 우리들이 무심히 흘려버리고 있는 일상생활이 얼마나 치열한 갈등과 복잡한 얼개를 그 내부에 감추고 있는가를 깨닫게 할 뿐 아니라 때로는 우리를 객석으로부터 무대의 뒤편 분장실로 인도함으로써 전혀 새로운 인식평면(認識平面)을 열어줍니다.
열락(悅樂)이 사람의 마음을 살찌게 하되 그 뒤에다 '모름다움'을 타버린 재로 남김에 비하여 슬픔은 채식(菜食)처럼 사람의 생각을 맑게 함으로써 그 복판에 '아름다움'[知]을 일으켜놓습니다. 야심성유휘(夜深星愈輝), 밤 깊을수록 광채를 더하는 별빛은 겨울 밤하늘의 '지성'이며, 상국설매(霜菊雪梅), 된서리 속의 황국(黃菊)도, 풍설(風雪) 속의 한매(寒梅)도 그 미의 본질은 다름아닌 비극성에 있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사람들이 구태여 비극을 미화하고 비극미를 기리는 까닭은, 한갓되이 비극의 사람들을 위로하려는 '작은 사랑'(warm heart)에서가 아니라, 비극의 그 비정한 깊이를 자각케 함으로써 '새로운 앎'(cool head)을 터득하고자 한 오의(奧義)를 알 듯합니다.
그러나 기상 30분 전 곤히 잠든 친구를 깨울 적마다 나는 망설여지는 마음을 어쩌지 못합니다. 포근히 몸담고 있는 꿈의 보금자리를 헐어버리고 참담한 징역의 현실로 끌어내는 나의 손길은 두번 세번 망설여집니다.
새해란 실상 면면한 세월의 똑같은 한 토막이라 하여 1월을 13월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지만, 만약 새로움이 완성된 형태로 우리 앞에 던져진다면 그것은 이미 새로움이 아니라 생각됩니다. 모든 새로움은 그에 임하는 우리의 심기(心機)가 새롭고, 그 속에 새로운 것을 채워나갈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주어지는 새로움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보호색과 문신
월간지 자연(自然)에는 특집으로 ‘벌레들의 속임수’(あざむく?たち)가 계속 연재되고 있는데 지난달에는 애벌레(幼蟲)와 나방들의 문양과 색깔에 관하여 소개하고 있습니다.
애벌레를 먹이로 하는 소조(小鳥)들은 애벌레가 눈에 뜨이기만 하면 재빨리 쪼아 먹습니다. 그러나 소조가 애벌레를 보는 순간 공포를 느끼거나 과거에 혼찌검이 난 경험이 연상되는 경우에는 일순 주저하게 되는데, 이 일순의 주저가 애벌레로 하여금 살아남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고 합니다.
그래서 애벌레들은 오히려 소조를 잡아먹는 맹금류(猛禽類) 등 포식자(捕食者)의 눈을 연상시키는 '안상문'(眼狀紋)을 등허리의 엉뚱한 곳에 그려놓고 있거나, 포식자가 입을 벌릴 때 나타나는 구내색(口內色)을 연상시켜 깜짝 놀라게 하는 '경악색'(驚愕色)을 몸에 입고 있습니다. 올빼미나 매의 눈을 몸에 그려놓고 있는 놈, 몸을 움츠려 뱀의 머리모양으로 둔갑하는 놈, 맹금의 무늬를 빌려 입고 있는 놈, 구내색으로 새빨갛게 단장한 놈……. 수천만 년(?)에 걸쳐 쌓아온 벌레들의 지혜가 놀랍기만 합니다.
부모의 보호가 없음은 물론, 자기 자신을 지킬 힘도, 최소한의 무기도 없는 애벌레들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하여 궁리해낸 기만, 도용(盜用), 가탁(假託)의 속임수들이 비열해보이기보다는 과연 살아가는 일의 진지함을 깨닫게 합니다.
교도소에는 몸에 문신을 한 사람이 많습니다. 전과가 한두 개 더 되는 사람이면 십중팔구 바늘로 살갗을 찔러 먹물을 넣는 소위 '이레즈미'(入墨)를 하고 있습니다. 용, 호랑이, 독거미, 칼……, 무시무시한 그림이나 복수, 필살(必殺), 일심(一心) 등 원한이나 독기 풍기는 글을 새겨놓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신은 보는 사람들을 겁주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는 애벌레들의 안상문이나 경악색과 다를 바 없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험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돈이나 권력이 있든지 그렇지 못하면 하다못해 주먹이라도 있어야한다"는 지극히 단순하되 정곡을 찌른 달관을 이 서투른 문신은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사회의 거대한 메커니즘 속에서, 지구의 자전처럼 개인이 느낄 수 없는 엄청난 '힘'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종이호랑이'만도 못한 이 서투른 문신이 이들의 알몸을 어떻게 지켜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불행한 사람들의 가난한 그림입니다.
하루의 징역을 끝내고 곤히 잠들어 고르게 숨 쉬는 가슴 위에 사천왕보다 험상궂은 얼굴로 눈떠 있는 짐승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차라리 한 마리의 짐승을 배워야 하는 그 혹독한 처지가 가슴을 저미는 아픔이 되어 가득히 차오릅니다.
세 들어 사는 세상
지난번 형수님께서 접견 오시던 날의 이야기입니다. 제가 재소자 접견 대기실에서 잠시 기다리고 있을 때 몹시 침울한 표정으로 접견실을 나와 제 옆자리에 맥 놓고 앉는 젊은 친구가 있었습니다.
초면이지만 저는 그를 위로할 작정으로 몇 마디 말을 걸었습니다. 이러한 경우에 제가 할 수 있는 위로란 적당한 말끝에 내가 십 수 년을 살았다는 사실을 소개하는 것이 고작인데 대부분의 단기수(短期囚)들은 십 수 년의 옥살이에 대하여 놀라는 마음이 되고 그 긴 세월과 자기의 얼마 안 되는 형기를 비교해보고 거기서 약간의 위로를 얻습니다.
세상에는 남의 행복과 비교해서 느끼는 불행이 있는가 하면 남의 불행과 비교해서 얻는 작은 위로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날은 제가 그를 위로하기 전에 제 쪽에서 먼저 충격을 받고 생각이 외곬에 못 박혀버렸습니다. 그와 나누었던 대화는 다음과 같이 매우 짧은 몇 마디였습니다.
"고생이 많습니다. 누가 오셨어요?"
"……제 처가 왔어요……."
"무슨 안 좋은 이야기라도 들었습니까?"
"……일 나가나 봐요. 말은 않지만……."
"그야 먹고살자면 일 나가야지요."
"그런 일이 아녜요."
"……."
"가버릴 것 같아서 그래요."
형수님은 아마 이 대화에 담긴 의미를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가 의미하는 '일 나간다.'는 말은 한마디로 '몸을 판다'는 것을 뜻합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생면부지인 제게 제 아내의 일을, 그도 자랑이 될 수 없는 일을 서슴없이 이야기해준 것이 아무래도 잘 납득되지 않습니다만 추측컨대 아마 자기의 근심에 너무 골똘한 나머지 다른 것은 미처 생각할 겨를이 없었을 수도 있고, 또 같은 재소자라는 동료의식이 그렇게 하였을 수도 있고, 그리고 '일 나가는 여자'가 그에게 있어서 특별히 수치스럽게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받은 충격은 이 세 번째의 것과 관련된 것입니다. 몸을 팔아 살아가는 여자를 부정(不貞)한 여자로 보지 않는다는 사실, 설사 부정한 여자로 본다고 하더라도 그를 자기의 아내의 자리에 앉히기를 조금도 꺼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저로서는, 알고 있는 일이긴 하나 정작 부딪치고 보면 상당한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내의 정절에 대한 세상의 모든 남편들의 당연한 요구가 그의 삶에 있어서는 얼마나 고급한 것인가를 일깨워줍니다.
사실은 그 젊은 친구뿐만 아니라 우리의 벽촌에는 그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일부일처제는 그들이 향유하기에는 너무나 고급한 제도입니다. 그들은 일부반처(一夫半妻), 일부 1/3처……, 일부 1/10처……, 그리고 여자 쪽에서 보면 일처반부(一妻半夫), 일처 1/3부……, 일처 1/10부……라는 왜소하고 영락된 삶의 형식을 가까스로 꾸려나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옹근 한 여자를 데불고 살 처지가 못 되는 지아비들이며, 아내의 자리 하나 온전히 차지할 수 없는 지어미들입니다. 이를테면 창녀와 그의 '가난한 단골'과의 관계가 곧 일부1/10처, 또는 일처1/10부의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의 관계는 일부일처제의 가정을 꾸릴 형편이 못되는 사람들의 소외된 결혼형태로 파악되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서울의 외곽에 빈촌(貧村)이 있듯이 일부일처제의 외곽에 있는 빈혼(貧婚), 즉 빈남빈녀(貧男貧女)들의 군혼(群婚)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성도덕의 문란이 만들어낸 윤리적인 차원의 문제로 파악하는 태도는 본말(本末)을 전도한 피상적인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남의 집 방 한 칸을 얻어 세 들어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세상에는 이처럼 아내를 또는 남편을 세 들어 사는 그런 삶도 없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남의 세상에 인생을 세 들어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아내나 남편을 세 들어 사는 사람들보다 더욱 불행합니다.
징역 사는 사람들 중에는, 징역 산 햇수가, 물론 여러 번에 나누어 산 것이지만, 도합 10년이 넘는 사람이 허다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저도 그 중의 하나이지만, 어린 시절을 제하고 나면 징역 산 햇수가 사회에서 산 햇수와 맞먹거나 그 이상입니다. 이들에게는 사회가 오히려 타향이고 객지입니다. 이러한 인생이 이른바 남의 세상에 세 들어 사는 인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가(貰家), 세부(貰夫), 세처(貰妻), 세생(貰生)……. 이는 삶의 가장 참혹한 형태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삶은 우리들로 하여금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처럼 참혹한 삶을 지탱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러한 사람들의 삶이 그 비극적 흔적을 좀체로 표면에 드러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아마 그 한복판에 있는 저의 감성이 무디어졌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그들 자신의 그 왜소한 삶에 기울이는 그들 나름의 노고와 진실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온몸으로 살아가는 삶은 비록 도덕적으로 타락한 측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그 진실성을 훼손하지는 못하기 때문인가 봅니다.
그날 접견장에서 만난 젊은 친구의 표정에서 제가 읽은 것만 하더라도 그것은 아내의 옥바라지를 염두에 둔 타산의 흔적이 아니라 비록 1/3, 1/10의 아내이지만 아내의 옹근 자리 하나 고스란히 남겨두려는 그의 고뇌와 진실이었습니다. 지금도 고뇌에 찬 그의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가슴에 사무치는 생각은, 같은 시대 같은 세상을 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처럼 판이한 사고와 윤리관을 갖게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며, 그것은 또 얼마나 끔찍한 것인가 하는 몸서리입니다. 그리고 그들에 비하면 저의 윤리의식은 얼마나 공허하며 사치스러운 것인가 하는 참괴의 염(念)입니다. 그리고 1/3의 아내로서든, 1/10의 아내로서든 그가 출소할 때까지 그의 옆에 남아 있어 주기를 바라는 저의 작은 바람입니다.
일의 명인(名人)
1급수들은 휴일을 이용하여 노력봉사를 하는 일이 가끔 있습니다. 형수님이 보시고 놀라던 그 긴 복도를 청소하기도 하고, 잡초를 뽑거나 빗물로 메인 배수로를 열기도 하고 땅을 고르는 등 비교적 간단한 작업입니다.
저는 휴일에 작업이 있기만 하면 빠지는 일이 없습니다. 여러 사람이 함께 일을 하면 그 자체가 하나의 '학교'가 되게 마련이지만 특히 제게는 두 사람의 훌륭한 '스승'을 배울 수 있는 귀중한 기회이기 때문에 절대로 빠지는 일이 없습니다. 이 두 사람의 스승은 학식도 없고 집안 형편도 어려워 징역살이도 자연 '국으로 찌그러져' 사는 응달의 사람입니다. 제가 이 두 사람을 스승으로 마음 두고 있는 까닭은 '일'이 사람을 어떻게 키워주고 사람을 어떻게 개조하는가를 이분들의 말없는 행동을 통하여 깨닫기 때문입니다.
첫째 이 두 사람은 일을 '발견'하는 눈이 매우 탁월합니다. 저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미처 일거리로 보이지 않는 것도 이 두 사람의 눈길이 닿으면 마치 조명을 받은 피사체처럼 대뜸 발견되고 맙니다. 그것도 자잘한 잔챙이를 낚아서 바지런 떠는 그런 부류와는 달리 별로 힘들이는 기색이나 생색내는 일도 없이 큼직큼직한 일거리, 꼭 필요한 일머리를 제때에 찾아내는 솜씨란 과연 오랜 세월을 일과 더불어 살아온 '일의 명인(名人)'다운 풍모를 느끼게 합니다.
둘째로 이 두 사람은 일을 두고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가녀린 심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변에 일손을 기다리는 일거리가 있거나 비뚤어져 있는 물건이 한 개라도 있으면 그만 마음이 불편해서 견디지 못하는 그런 심정의 소유자입니다. 이분들에게 있어서 일이란 외부의 어떤 대상이 아니라 삶의 내면을 이루는 존재조건 그 자체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무심히 걷는 몇 발자국의 걸음 중에도 항상 무엇인가를 바루어놓고 말며, 다른 일로 오가는 중에도 반드시 무얼 하나씩 들고 가고 들고 옵니다. 잠시 동안도 빈손일 때가 없습니다.
셋째로 이 두 사람은 여러 사람과 함께 일하는 경우에는 언제나 제일 많은 사람이 달라붙는 말단의 바닥 일을 골라잡습니다. 일부의, 더러는 먹물이 좀 들어 있는 사람들이, 반드시 힘이 덜 들어서가 아니라, 약간 독특한 작업상의 위치를 선호하여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일정하게 구별하려는 경향이 있음에 비하여 이 두 사람은 언제나 맨 낮은 자리, 그 무한한 대중성 속에 철저히 자신을 세우고 있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이 두 사람은 제게 다만 일솜씨만을 가르치는 '기술자'의 의미를 넘어서 '사람'을 가르치는 사표(師表)가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두 사람이 걸레를 잡으면 저도 걸레를 잡고, 이 두 사람이 삽을 잡으면 저도 얼른 삽을 잡습니다. 이분들의 옆에 항상 나 자신의 자리를 정함으로 해서 깨달은 사실은 여러 사람들 속에 설 때의 그 든든함이 우리를 매우 힘 있게 만들어준다는 것입니다.
교편을 잡으시던 부모님 슬하에서 어려서부터 줄곧 학교에서 자라 노동의 경험은 물론, 노동자들과의 생활마저 부족했던 제게 징역과 징역 속의 여러 스승이 갖는 의미는 실로 막중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다가 가장 낮은 자리에서 그 큼을 이루고 꽃송이가 다발을 이루어 큰 꽃이 되는 그 변증법의 비밀이 실은 우리의 가장 비근한 일상의 노동 속에 흔전으로 있는 것임에 새삼 우리들 자신의 맹목을 탓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보내주신 책 두 권은 열독이 허가되지 않아 읽지는 못하였습니다만 보내주신 마음은 잘 읽고 있습니다. 사람도 물건도 출입이 어려운 마을에 살고 있음을 알겠습니다.
노소(老少)의 차이
노소(老少)가 함께 일하는 경우에 노인들은 젊은이에 대하여, 그리고 젊은이는 노인들에 대하여 일정한 불만을 갖게 됩니다. 이는 주로 일을 하는 자세, 일에 대한 태도의 차이에서 오는 것인데 저는 이 점에 있어서만은 노인들을 지지합니다. 노인들의 젊은이들에 대한 불만 중에 가장 자주 듣는 것은, 젊은이들은 일을 여기저기 벌여놓기만 하고 마무리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먼저 하고 나중 할 일을 혼동하는가 하면 일손을 모아서 함께 해야 할 것도 제각각 따로따로 벌여놓기 때문에 부산하기만 하고 진척이 없다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의 이러한 태도가 어디서 온 것인가를 어느 좌상님께 여쭈어보았더니 한마디로 농사일을 해보질 않아서 그렇다고 하였습니다. 간결하고 정곡을 찌른 지적이라고 생각됩니다. 농사일은 파종에서 수확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일관된 노동입니다. 일의 선후가 있고, 계절이 있고, 기다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 생명인 이를테면 볍씨의 일생이면서 그 우주입니다. 부품을 분업 생산하여 조립 완성하는 공업노동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것을 담고 있습니다. "젊은 애들 도회지 나가서 잃는 것이 어디 한둘인가." 그 좌상님의 개탄이 제게는 육중한 무게의 문명비판으로 들립니다.
젊은이들은 노동을 수고로움, 즉 귀찮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 비하여 노인들은 거기에다 자신을 실현하고 생명을 키우는 높은 뜻을 부여합니다.
요컨대 젊은이들은 노동을 '소비'라고 생각합니다. 시간의 소비, 에너지의 소비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점 노동을 생산으로 인식하는 노인들의 사고와 정면에서 대립하고 있습니다. 공업노동, 분업노동의 경험은, 더욱이 상품생산, 피고용 노동인 경우 노동이 이룩해내는 생산물에 대한 총합적인 가치 인식을 가지기 어렵게 할 뿐 아니라 노동이 그 노동의 주체인 자기 자신을 성장시켜준다는 인격적 측면에 대해서는 하등의 신뢰나 실감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그들의 열악한 현장에서 겪은 체험의 소산이겠습니다만, 이러한 태도는 일차적으로는 일 그 자체에 대한 태도로 나타나지만 그것은 동시에 일하는 사람들 간의 인간관계에 정착됨으로써 사회화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좌상님의 말씀처럼 젊은이들이 도회지에 나가서 잃는 것이면서 또한 우리시대 자체가 잃어가고 있는 사회 역사적인 문제와도 맥락이 닿아 있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우리는 근대사의 전개과정에서 노출된 수많은 모순을 극복하기 위하여 시도한 여러 갈래의 운동 형태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양한 운동들이 농업공동체의 이상에 귀주(歸住)하고자 하는 복고적 성격으로 해서 실패하기도 하고 과학기술의 전(全) 스펙트럼을 회의(懷疑)함으로써 실패하기도 해온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젊은이들에게 농업과 노인을 배우라는 손쉬운 충고를 할 수가 없음을 느낍니다. 그러한 충고에 앞서 우리가 버려야 할 것과 받아들여야 할 것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손으로 창조한 것을 자각케 하고,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어떠한 사회적 관련을 갖는가, 그리고 자기의 삶이 다른 사람의 삶과 어떻게 연대되는가를 실감케 하는 부단한 계기를 생활의 현장, 그 경제적 기초 위에 창조해내는 운동이야말로 민중들의 합의된 결단을 이끌어내고 지연, 혈연 또는 작업장이라는 한정된 범위를 뛰어넘어 '공동의 터전'을 이룩하는 길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막상 돌아갈 농촌도 없고 뿌리내릴 터전도 없는 젊은이들에게 그들의 메마른 자세만을 꾸짖는다는 것은 소용없는 일일 뿐 아니라 너무나 야박한 짓이라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 피해자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노인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제가 젊은 사람들의 태도 중에서 가장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싶은 것은 젊은 사람들은 미운 사람이 시키는 일이나 별로 의미를 느낄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지극히 냉정한 태도를 취한다는 사실입니다.
일 그 자체에 몰입해서 무슨 일이건 일이라면 장인(匠人)의 성실성을 쏟는 노인들의 이른바 무의식성에 비하면 젊은이들의 이러한 태도는 겉보기에 상당히 불성실한 인상을 주기도 하지만 그것에 담겨 있는 강한 주체성은 의당 평가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것은 노인들에게는 없는 탄력이며 가능성입니다.
거실이 동남향이기 때문에 창 앞에 가면 산과 언덕은 늘 그의 서북면(西北面)을 제게 보여줍니다. 산록의 서북쪽에는 잔설(殘雪)과 음영(陰影)으로 해서 겨울이 최후까지 도사리고 있습니다. 연일 계속되는 영상의 따뜻한 날씨는 산언덕에 끈질기게 붙어 있는 겨울을 큰소리 하나 내지 않고 하나하나 녹여내고 있습니다. 어제는 밤새껏 눈을 불러 다시 겨울을 쌓아놓았습니다만 천지 가득히 다가오는 봄기운을 어쩌지 못할 것입니다.
함께 맞는 비
상처가 아물고 난 다음에 받은 약은 상처를 치료하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늦고, 도리어 그 아프던 기억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시기가 엇갈려 일어난 실패의 사소한 예에 불과하지만, 남을 돕고 도움을 받는 일이 경우에 따라서는 도움이 되기는커녕 더 큰 것을 해치는 일이 됩니다.
함께 징역을 살아가는 사람 중에는 접견도, 서신도, 영치금도 없이 받은 징역을 춥게 살면서도 비누 한 장, 칫솔 한 개라도 남의 신세를 지지 않으려는 고집 센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모르는 사람들은 이러한 사람들을 두고 남의 호의를 받아들일 줄 모르는 좁은 속을 핀잔하기도 하고, 가난이 만들어놓은 비뚤어진 심사를 불쌍하게 여기기도 하고, 단 한 개의 창문도 열지 않는 어두운 마음을 비난하기도 합니다.
남의 호의를 거부하는 고집이 과연 좁고 비뚤고 어두운 마음의 소치인가. 우리는 공정한 논의를 위하여 카메라를 반대편, 즉 베푸는 자의 얼굴에도 초점을 맞추어 조명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칫솔 한 개를 베푸는 마음도 그 내심을 들추어보면 실상 여러 가지의 동기가 그 속에 도사리고 있음을 우리는 겪어서 압니다. 이를테면 그 대가를 다른 것으로 거두어들이기 위한 상략적(商略的)인 동기가 있는가 하면, 비록 물질적인 형태의 보상을 목적으로 하지는 않으나 수혜자 측의 호의나 협조를 얻거나, 그의 비판이나 저항을 둔화시키거나, 극단적인 경우 그의 추종이나 굴종을 확보함으로써 자기의 신장(伸張)을 도모하는 정략적(政略的)인 동기도 있으며, 또 시혜자라는 정신적 우월감을 즐기는 향락적(享樂的)인 동기도 없지 않습니다. 이러한 동기에서 나오는 도움은 자선이라는 극히 선량한 명칭에도 불구하고 그 본질은 조금도 선량한 것이 못됩니다.
도움을 받는 쪽이 감수해야 하는 주체성의 침해와 정신적 저상(沮喪)이 그를 얼마나 병들게 하는가에 대하여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서둘러 자기의 볼일만 챙겨가는 처사는 상대방을 한 사람의 인간적 주체로 보지 않고 자기의 환경이나 방편으로 삼는 비정한 위선입니다.
이러한 것에 비하여 매우 순수한 것으로 알려진 '동정'이라는 동기가 있습니다. 이것은 측은지심(惻隱之心)의 발로로서 고래(古來)의 미덕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동정이란 것은 객관적으로는 문제의 핵심을 흐리게 하는 인정주의의 한계를 가지며 주관적으로는 상대방의 문제해결보다는 자기의 양심의 가책을 위무(慰撫)하려는 도피주의의 한계를 갖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동정은 동정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동정하는 자의 시점에서 자신을 조감케 함으로써 탈기(脫氣)와 위축을 동시에 안겨줍니다.
이 점에서 동정은, 공감의 제일보라는 강변(强辯)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공감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값싼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여러 가지를 부단히 서로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징역 속에서, 제게도 저의 호의가 거부당한 경험이 적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상대방의 비좁은 마음을 탓하기도 하였지만, 순수하지 못했던 나 자신의 저의를 뒤늦게 발견하고는 스스로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남의 호의를 거부하는 고집에는 자기를 지키려는 주체성의 단단한 심지가 박혀 있습니다. 이것은 얼마간의 물질적 수혜에 비하여 자신의 처지를 개척해나가는 데 대개의 경우 훨씬 더 큰 힘이 되어줍니다.
사람은 스스로를 도울 수 있을 뿐이며, 남을 돕는다는 것은 그 '스스로 도우는 일'을 도울 수 있음에 불과한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가르친다는 것은 다만 희망을 말하는 것이다"라는 아라공의 시구를 좋아합니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으며 함께 걸어가는 공감과 연대의 확인이라 생각됩니다.
졸가리 없는 잡담 다발
어머님을 비롯하여 가내 무고하시리라 믿습니다. 이곳의 우리들도 건강하게 그리고 마음 편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요즈음은 밀린 일거리 때문에 10시까지 잔업입니다. 나도 거의 매일 잔업입니다. 땜통 미싱사라 1조, 2조, 3조, 4조 어느 조든 빠진 자리에 가 앉아 일합니다. 덕분에 친구도 많고 얻어듣는 이야기도 많습니다. 오늘은 잔업시간에 오가는 우리들의 졸가리 없는 잡담 다발 소개합니다.
성근이 잔업 잡혔구나. 안됐다. 감기몸살 엉 까도 안 먹혔구나. 작업반장이 얼마나 빠꾸미라고. 곰보새끼 들어갔냐? 형님 여기 계신다! 아우야. 곰보라니 문화재(文化財) 보구. 겁을 상실한 애들인께. 야 몰짝 나왔다. 이것 봐라, 춘길이 솜씨지. 해태누깔이로구나. 미싱깨나 밟았다는 늠이. 인철이 오늘 보온메리 소포 받고 더 울상이냐. 마누라가 없는 돈에 사 부쳤는데 맴이 맴이 간디. 어께는 쌍가사리 때리는 거지? 나는 아무래도 도둑놈 체질이 못 되나봐. 도둑님이라 그러지. 야, 이 팔 개월 반 만에 가출옥으로 나온 놈아.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체질이 무슨 놈의 체질이야. 있어, 있어. 너는 진짜 체질이다. 아니야, 걔는 영숙이 잘못 사랑해서 징역 들어온 거라고.
"바위섬…… 나는 네가 조오아서……."
제 노래 솜씨 어때요? 프로 이상이야, 서툰 기교도 안 부리고……. 저치 신 선생 칭찬 들어서 계속 시끄럽게 생겼구나. 주제파악 좀 해라. 동석이형 태백산맥 3권 누가 보고 있나 지금.
영희 미싱 세워놓고 어디 갔어! 빨래하러 갔어. 작업 바쁜 줄 아누만. 작업반장 맥킨콜이야. 맥골이다 맥골. 고무풍선을 꽉 잡으면 손구락 새로 삐져나오잖아. 그 삐져나온 걸 또 꽉 잡으면 어떻게 되겠어? 어떻게 되긴 어떻게 돼, 펑이지 펑. 내일 불교집회 안 갈텨? 비디오 가지고 온대. 떡 가지고 온다면 가지. 역시 너는 떡신자야. 비디오 제목이 뭐래? 뭐긴 뭐겠어, '소림사 주방장'이지. 때가 크리스마스 땐디 먼 불교여. 상영이 너, 전성시대가 몇 년도야. 묻지 마라. 과거가 험한 사람한테는 과거가 고문이야. 니가 왜 끼어 드냐. 그게 어디 제대로 된 전성시대냐. 동인천 그 왜 생낙지 집 있지. 야야, 먹는 얘기 좀 사양 안할래. 그것도 고문이야.
"내 청춘의…… 빈 노트에 무엇을 채워야 하나……."
야, 잠 좀 자자. 노래 다칠라. 스피커에서 지금 나오고 있잖아. 암만 나오더라도 그렇지, 빈 노트가 어딨어. 너나 나나 고생고생 엉망진창 노트다. 우리한테는 못 맞는 노래다 임마. 그래그래. 있는 집의 할일 없는 애들 노래야. 노래 잘못 골랐다가 몰매 맞는구나. 내내 그렇다니까. 가위 가져가신 분? 안 계십니까? 서울말로 욕 치겠습니다. 내가 첨으로 양복일 배울 때 말이야, 쥔집 아줌마가 그러더라고. 너 이 단추 구멍 예쁘게 치면 이담에 이뿐 마누라 얻는다고 그러더만, 진짜 이쁘게 쳤지. 그래서 이쁜 마누라 얻었어? 지금까장 수많은 단추구멍 이쁘게 쳤건만 이쁜 마누라커녕, 미운 마누라도 없어. 야 너 땀수 몇 단 놓고 박는 거야! 이 자식 막 건너뛰는구나. 삼부요인이 누구누구야. 어제 우리 방에서 심리 붙어갖고 한참 시끄러웠다. 단독주택인데 말이야, 뒷담으로 들어가서 안방 일 보고 나오는데 대문 옆에 도사견이 떡 버티고 있더먼. 꼼짝 마라구나. 아니야, 건데 웃겼어. 비싸도 개는 개더만.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오면 달려들거나 짖었을 텐데 말이야, 안방에서 턱 나오니께 이게 헷갈리나봐. 고개만 갸웃갸웃하더라고. 비싸도 개는 개더만. 건데 개장에 통닭 남아도는 거 있지…….
"이제는 졸립구나……."
용수, 참새의 하루 불르는 게 시간됐나 보구나. 저 시계 5분 늦어. 한번은 들어갔는데 있지, 강짜들이 먼저 들었어. 보니께 안방에다 묶어놓고 이 새끼들, 막 일을 벌일 참이야. 폼들이 타짜가 아니야. 아무리 밤중이지만 바깥에 삥도 안 세워놓고 말야. 그래서 어떻게 했어? 야구방망이 있지, 그거 마당에 있더만. 이 새끼들 기겁했을 거야. 창문도 박살났지. 그치들 우리가 방범인 줄 알았을 꺼야. 우리도 물론 잽싸게 토꼈지. 어이. 기계수리! 여기 모타 좀 봐줘, 열 너무 받는데. 오늘 미싱 밟은 것만큼 오토바이를 밟았으믄 집에 갔다 오고도 남을 텐데. 너는 운쨩으로 사고 내고 미싱사로 돌았다며? 풍파에 놀란 사공 배 팔아 말을 샀구나. 그런데도 징역 들어왔잖아? 사연이 길어, 다 얘기하자면. 육갑 떨고 있네. 다 물어봐라, 너만한 사연 없는 놈 있는가. 도구 반납! 작업 끝이다. 천천히 가, 세면장 만땅꼬야. 춘데 씻긴 뭘 씻어, 발만 씻자…….
입방 길에 잠시 운동장에 서면 누구나 밤하늘을 바라봅니다. 흑청 빛 하늘에 무수히 박혀 있는 별들. 수억 광년 수십억 광년의 광대한 우주. 일순 교도소의 주벽이 바짝 우리의 몸을 죕니다.
"수고했어요. 수고했어요. 잘 자. 편히 쉬세요. 수고했어요."
잠든 동료들의 안면을 방해하지 않기 위하여 낮게, 낮게 나누는 인사말, 좀 전의 농끼라곤 한 점도 찾을 수 없는 숙연할 정도로 진지합니다.
관계의 최고형태
어느 일본인 기자가 쓴 '한국인'에 관한 글을 읽었습니다. 젊은 동료 한 사람이 그 글의 진의(眞意)를 물어 와서 일부러 시간을 내어 읽어본 것입니다만 제가 읽어본 일본의 몇몇 민주적인 지식인의 글에 비하면 그 격이 훨씬 떨어지는 3류의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작은 엽서에서 그 글의 내용을 탓하려고 하지도 않으며 또 그 글에 숨어 있는 필자의 민족적 오만이나 군국주의의 변태를 들추려고도 않습니다. 한마디로 그 글은 우리가 어떤 대상을 인식하거나 서술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준 반면(反面)의 교사였습니다.
우리가 인식하거나 서술하려는 대상이 비교적 간단한 한 개의 사물이나 일개인인 경우와는 달리 사회나 민족이나 한 시대를 대상으로 삼을 경우 그 어려움은 실로 막중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대상이 이처럼 거대한 총체인 경우에는 필자의 관찰력이나 부지런함 따위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물며 필자의 문장력이나 감각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회 역사의식이나 철학적 세계관에 기초한 과학적 사상체계가 갖추어져 있지 않는 한, 아무리 많은 자료를 동원하고 아무리 해박한 지식을 구사한다 하더라도 결국은 코끼리를 더듬는 장님 꼴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과학적 사고보다 더 중요하고 결정적인 것은 바로 대상과 필자의 '관계'라 생각합니다. 대상과 필자가 어떠한 관계로 연결되는가에 따라서 얼마만큼의 깊이 있는 인식이, 또 어떠한 측면이 파악되는가가 결정됩니다. 이를테면 대상을 바라보기만 하는 관계, 즉 구경하는 관계 그것은 한마디로 '관계없음'입니다.
구경이란 말 대신 '관조'라는 좀 더 운치 있는 어휘로 대치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는 관조만으로 시작되고 관조만으로서 완결되는 인식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대상과 자기가 애정의 젖줄로 연결되거나, 운명의 핏줄로 맺어짐이 없이, 즉 대상과 필자의 혼연한 육화(肉化) 없이 대상을 인식 서술할 수 있다는 환상, 이 환상이야말로 우리 시대에 범람하는 저널리즘이 양산해낸 특별한 형태의 오류이며 기만입니다.
저널리즘은 항상 제3의 입장, 중립의 불편부당이라는 허구의 위상을 의제(擬制)하여 거기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대상과 관계를 가진 모든 입장을 불순하고 저급한 것으로 폄하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구경꾼, 진실의 낭비자로 철저히 소외시킵니다. 상품의 소비자, 스탠드 위의 관객, TV 앞의 시청자 등…… 모든 형태의 구경꾼의 특징은 대상과 인식 주체 간의 완벽한 격리에 있습니다.
이처럼 대상과 인식 주체가 구별, 격리되어 있는 경우에는 시종 양자의 차이점만이 발견되고 부각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대상을 관찰하면 할수록 자기와는 점점 더 다른 무엇으로 나타나고, 가까이 접근하면 할수록 더욱더 멀어질 뿐입니다. 그리하여 종내에는 대상을 잃어버림과 동시에 자기 자신마저 상실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위 문화인류학이 식민주의의 첨병(尖兵)으로서 세계의 수많은 민족을 대상화하여 그들의 민속과 전통문화 그리고 그들의 정직한 인간적 삶을, 자기들의 그것과 다르다는 이유로, 자기들의 침탈을 다른 이름으로 은폐할 목적으로, 야만시하고 왜곡해왔으며, 그러한 부당한 왜곡이 결국은 대상의 상실뿐 아니라 자신의 인간적 양심을 상실케 함으로써 그토록 잔혹한 침략의 세기(世紀)를 연출해내었던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징역 사는 우리들 재소자도 대상화되고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죄명별, 범죄유형별……, 여러 가지 표지(標識)에 따라 분류되기도 하고, 범죄심리학, 이상심리학, 심리전 등 각종 심리학의 연구대상이 되기도 하는데, 이 경우 대부분의 연구자들에게서는 그들이 대상으로 삼고 있는 재소자들이 그들과 동시대를 살고, 동일한 사회관계 속에 연대되고 있다는 거시적인 깨달음을 기대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분류 연구나 심리학적 관찰은 결국 그들과는 전혀 딴판인 이를테면 '종'(種)을 달리하는 네안데르탈인만큼이나 멀리 떨어진 '범죄인종'(犯罪人種)을 발견해내고 만들어내도록 예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발견된 범죄인종의 여러 가지 패륜은 그들 자신과는 하등의 인연도 없는, 수십만 년의 거리가 있는 것이란 점에서 그들 자신의 윤리적 반의(叛意)를 자위하고 두호(斗護)하고 은폐하는 데 역용(逆用)됨으로써 결국 그들 자신을 폐륜화(悖倫化)하는 악순환을 낳기도 합니다.
시대와 사회를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각자의 처한 위치가 아무리 다르다 하더라도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이 더 많은 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어떤 대상에 대한 인식의 출발은 대상과 내가 이미 맺고 있는 관계의 발견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검은 피부에 대한 말콤X의 관계, 알제리에 대한 프란츠 파농의 관계…….
주체가 대상을 포옹하고 대상이 주체 속에 육화된 혼혈의 엄숙한 의식을 우리는 세계의 도처에서, 역사의 수시(隨時)에서 발견합니다. 이러한 대상과의 일체화야말로 우리들의 삶의 진상을 선명하게 드러내주는 동시에 우리 스스로를 정직하게 바라보게 해주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한 법입니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적 연대가, 실천적 연대보다는 입장의 동일함이 더욱 중요합니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입니다.
서도의 관계론(關係論)
제가 서도(書道)를 운위하다니 당구(堂狗)의 폐풍월(吠風月) 짝입니다만 엽서 위의 편언(片言)이고 보면 조리(條理)가 빈다고 허물이겠습니까.
일껏 붓을 가누어 조신해 그은 획이 그만 비뚤어버린 때 저는 우선 그 부근의 다른 획의 위치나 모양을 바꾸어서 그 실패를 구하려 합니다. 이것은 물론 지우거나 개칠(改漆)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상 획의 성패란 획 그 자체에 있지 않고 획과 획의 '관계' 속에 있다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획이 다른 획을 만나지 않고 어찌 제 혼자서 '자'(字)가 될 수 있겠습니까. 획도 흡사 사람과 같아서 독존(獨存)하지 못하는 '반쪽'인 듯합니다. 마찬가지로 한 '자'가 잘못된 때는 그 다음 자 또는 그 다음다음 자로써 그 결함을 보상하려고 합니다. 또 한 '행'(行)의 잘못은 다른 행의 배려로써, 한 '연'(聯)의 실수는 다른 연의 구성으로써 감싸려 합니다. 그리하여 어쩌면 잘못과 실수의 누적으로 이루어진, 실패와 보상과 결함과 사과와 노력들이 점철된, 그러기에 더 애착이 가는, 한 폭의 글을 얻게 됩니다.
이렇게 얻은 한 폭의 글은, 획, 자, 행, 연 들이 대소, 강약, 태세(太細), 지속(遲速), 농담(濃淡) 등의 여러 가지 형태로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양보하며 실수와 결함을 감싸주며 간신히 이룩한 성취입니다. 그중 한 자, 한 획이라도 그 생김생김이 그렇지 않았더라면 와르르 얼개가 전부 무너질 뻔한, 심지어 낙관(落款)까지도 전체 속에 융화되어 균형에 한 몫 참여하고 있을 정도의, 그 피가 통할 듯 농밀한 '상호연계'와 '통일' 속에는 이윽고 묵과 여백, 흑과 백이 이루는 대립과 조화, 그 '대립과 조화' 그것의 통일이 창출해내는 드높은 '질'(質)이 가능할 것입니다. 이에 비하여 규격화된 자, 자, 자의 단순한 양적 집합이 우리에게 주는 느낌은 줄 것도 받을 것도 없는 남남끼리의 그저 냉랭한 군서(群棲)일 뿐 거기 어디 악수하고 싶은 얼굴 하나 있겠습니까.
유리창을 깨뜨린 잘못이 유리 한 장으로 보상될 수 있다는 생각은, 사람의 수고가, 인정이 배제된 일정액의 화폐로 대상(代償)될 수 있다는 생각만큼이나 쓸쓸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획과 획 간에, 자와 자 간에 붓을 세우듯이, 저는 묵을 갈 적마다 인(人)과 인 간(間)의 그 뜨거운 '연계' 위에 서고자 합니다.
춥다가 아직 덥기 전의, 4월도 한창 때, 좋은 시절입니다.
새끼가 무엇인지, 어미가 무엇인지
참새 집에서 참새새끼를 내렸습니다.
날새들 하늘에 두고 보자며 한사코 말렸는데도 철창 타고 그 높은 데까지 올라가 기어이 꺼내왔습니다. 길들여서 데리고 논다는 것입니다. 아직 날지도 못하는 부리가 노란 새끼였습니다. 손아귀 속에 놀란 가슴 할딱이고 있는데 사색이 된 어미참새가 가로 세로 어지럽게 날며 머리 위를 떠나지 못합니다.
"저것 봐라. 에미한테 날려 보내줘라."
"날도 못하는디요?"
"그러믄 새집에 도로 올려줘라."
"3사 늠들이 꺼내갈 건디요? 2사 꺼는 위생늠들이 꺼내서 구워 먹어뿌렀당께요."
"……."
손을 열어 땅에다 놓았더니 어미 새가 번개같이 내려와 서로 몸 비비며 어쩔 줄 모릅니다. 함께 날아가 버리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그 높은 새집까지 안고 날아오를 수도 없고, 급한 대로 구석으로, 구석으로 데리고 가 숨박는데,
"저러다가 쥐구멍에 들어 갔뿌리믄 쥐 밥 된당께."
그것도 끔찍한 일입니다. 어쩔 수 없기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방으로 가지고 왔습니다. 마침 빌어두었던 쥐덫에 넣어 우선 창문턱에 얹어놓았습니다.
어느새 알아냈는지 어미 새 두 마리가 득달같이 쫓아왔습니다.
처음에는 방안의 사람 짐승을 경계하는 듯 하더니 금세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새끼한테 전념해버립니다. 쉴 새 없이 번갈아 먹이를 물어 나릅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그리고 다행한 일입니다.
"거 참 잘됐다. 우리가 아무리 잘 먹여야 에미만 하겠어? 에미가 키우게 해서 노랑딱지 떨어지면 훨훨 날려 보내주자."
이렇게 해서 새끼참새는 날 수 있을 때까지 당분간 쥐덫 속에서 계속 어미 새의 부양을 받으며 살아야 합니다. 먹이를 물어 나르던 어미 새는 쥐덫에 갇혔다가 놓여나는 혼찌검을 당하고도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새끼가 무엇인지, 어미가 무엇이지, 생명이 무엇인지…….
참새를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이 아픕니다.
저는 물론 어머님을 생각했습니다. 정릉 골짜기에서 식음을 전폐하시고 공들이시던 어머님 생각에 마음이 아픕니다. 20년이 지나 이제는 빛바래도 좋을 기억이 찡하고 가슴에 사무쳐옵니다.
반구정과 압구정
-우리가 헐어야 할 피라미드-
파주에서 서쪽으로 시오리 임진강가에 반구정(伴鷗亭)이라는 작은 정자가 있습니다. 세종조의 명상이며 청백리의 귀감인 방촌(尨村) 황희(黃喜) 정승의 정자입니다. 18년간의 영상직을 치사(致仕)하고 90세의 천수를 다할 때까지 이름 그대로 갈매기를 벗하며 그의 노년을 보낸 곳입니다. 단풍철도 지난 초겨울이라 찾는 사람도 없어 한적하기가 500년 전 그대로다 싶었습니다. 당신은 아마 똑같은 이름의 정자를 기억할 것입니다.
서울 강남의 압구정(狎鷗亭)이 그것입니다. 압구정은 세조의 모신(謀臣)이던 한명회(韓明澮)가 그의 호를 따서 지은 정자입니다. 반구정의 ‘伴’과 압구정의 ‘狎’은 글자는 비록 다르지만 둘 다 ‘벗 한다’는 뜻입니다. 이 두 정자는 다 같이 노재상이 퇴은(退隱)하여 한가로이 갈매기를 벗하며 여생을 보내던 정자입니다만 남아있는 지금의 모습은 참으로 판이합니다.
반구정이 지금도 갈매기를 벗하며 철새들을 맞이하고 있음에 반하여 압구정은 이미 그 자취마저 없어지고 현대아파트 72동 옆의 작은 표석으로 그 유허(遺墟)임을 가리키고 있을 따름입니다. 정자의 주인인 황희 정승과 한명회의 일생만큼이나 극적인 대조를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영상의 자리에 올랐던 재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사람은 언제나 명상(名相), 현상(賢相)의 이름으로 칭송되는가 하면 또 한 사람은 권신(權臣), 모신(謀臣)의 이름으로 역사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세종 조의 찬란한 업적 뒤에는 언제나 황희 정승의 보필이 있었으되 사람들은 오히려 그를 몽매하다고 할 만큼 눈에 뜨이지 않는 자리에 있었고, 심지어는 물러나 임진강가에서 야인어부들과 구로(鷗鷺)를 길들일 때에도 그가 당대의 재상이었음을 아무도 몰랐을 정도였습니다.
한명회는 그의 두 딸을 왕비로 들이고 정난공신 1등, 익대공신 1등 등 네 차례나 1등공신이 되지만 그 뒤에는 언제나 쿠데타와 모살과 옥사(獄事)가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후에 신원되기는 하였지만 부관참시(剖棺斬屍)의 화를 입은 권력자였습니다. 황희 정승은 두문동에 은거하기도 하고 유배되기도 하지만 언제나 자신의 원칙에 따라 진퇴했던 반면, 한명회는 스스로 실력자에게 나아가 그를 앞질러 헤아리고 처리해나간 모신이었습니다.
두 사람에게 얽힌 일화도 판이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황희정승의 집안 노비 두 사람이 서로 다투다가 그를 찾아와 서로 상대방의 잘못을 일러바치자 사내종에게도 ‘네 말이 옳다’ 계집종에게도 ‘네 말이 옳다’고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이를 지켜보던 부인이 그 무정견을 나무라자 ‘부인의 말도 옳다’고 했다는 일화는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언언시시(言言是是) 정승이라 불릴 정도로 그는 시(是)를 말하되 비(非)를 말하기를 삼갔고, 소절(小節)에 구애되기보다 대절(大節)을 지키는 재상이었다고 합니다. 황희정승이 겸허하고 관후한 일화의 주인공으로 회자됨에 비하여 한명회에 관한 일화는 그와 정반대인 것이 대부분입니다.
생육신의 한사람인 김시습이 강정(江亭)에 걸려있는 한명회의 靑春扶社稷 白首臥江湖(청준부사직, 백수와강호)라는 시구의 扶를 亡으로, 臥를 汚로 고쳐 써서 ‘젊어서는 사직을 망치고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힌다’는 뜻으로 바꾸어버린 일화는 유명합니다. 사람들은 한명회가 대로(大怒)하여 이를 찢어버렸다는 후일담까지 곁들여놓았습니다.
차로 2시간도 채 못 되는 거리에 남아 있는 반구정과 압구정의 차이가 이와 같습니다. 그것은 물론 그 인품의 차이만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황희가 문화통치기의 재상이었고, 한명회는 의정부중심의 합의제를 타파하고 강력한 왕권체제로 회귀하던 시기의 재상이라는 정치체제상의 차이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상황의 차이로 환원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정치란 사회의 잠재적 역량을 최대한으로 조직해내고 키우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권력의 창출 그 자체는 잠재적 역량의 계발과 무관하거나 오히려 그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피라미드의 건설이 정치가 아니라 피라미드의 해체가 정치라는 당신의 글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땅을 회복하고 노역을 해방하기 위해서는 먼저 모든 형태의 피라미드를 허물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우리가 맡기지 않더라도 어김없이 모든 것을 심판하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몫은 우리가 내려야 할 오늘의 심판일 따름입니다.
반구정과 압구정의 남아 있는 모습이 그대로 역사의 평가는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의 차이가 함의하는 언어를 찾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해체해야 할 피라미드는 과연 무엇인지 우리가 회복해야 할 땅과 노동은 무엇인지를 헤아려야 할 것입니다. 압구정이 콘크리트 더미 속 한 개의 작은 돌멩이로 왜소화되어 있음에 반하여 반구정은 유유한 임진강가에서 이름 그대로 갈매기를 벗하고 있습니다. 나는 바람 부는 반구정에 앉아서 임진강의 무심한 물길을 굽어보았습니다. 분단의 제거야말로 민족의 역량을 최대화하는 최선의 정치임을 이야기하는 듯 반구정은 오늘도 남북의 산천과 남북의 새들을 벗하고 있었습니다.
하일리의 저녁 놀
-일몰 속에서 내일의 일출을 바라봅니다.-
강화도의 서쪽 끝 하일리(霞逸里)는 저녁노을 때문에 하일리입니다. 저녁노을은 하루의 끝을 알립니다. 그러나 하일리의 저녁노을에서는 하루의 끝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하늘과 땅이 적(赤)과 흑(黑)으로 확연히 나누어지는 산마루의 일몰과는 달리 노을로 물든 바다의 일몰에서는 저 해가 내일 아침 다시 동해로 솟아오르리라는 예언을 듣기 때문입니다.
하곡(霞谷) 정제두(鄭濟斗)선생이 당쟁이 격화되던 숙종 말년 표연히 서울을 떠나 진강산 남쪽 기슭 이곳 하일리에 자리 잡은 까닭을 알 것 같았습니다. 이곳 하일리에서는 오늘 저녁의 일몰에서 내일아침의 일출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서울에서 강화까지 걸어서 이틀 길이었습니다. 다시는 서울을 찾지 않으려고 하곡은 강화의 서쪽 끝인 이곳 하일리로 들어왔던 것입니다. 진강산 기슭의 옛터에 오르면 손돌목의 세찬 물길로 서울로 돌아가는 길을 아예 칼처럼 자르고 떠나온 그의 강한 결의가 지금도 선연히 느껴집니다. 하곡이 정작 자르고 왔던 것은 당시 만연했던 이기론(理氣論)에 관한 공소(空疎)한 논쟁과 그를 둘러싼 파당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곡이 이곳에 자리 잡은 후 그의 사상에 공감하는 많은 인재들이 강화로 찾아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 연려실 이긍익(燃藜室 李肯翊), 석천 신작(石泉 申綽), 영재 이건창(寧齋 李建昌) 등 하곡의 맥을 잇는 학자, 문인들이 국학연구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이룩했던 것입니다.
학문을 영달의 수단으로 삼는 주자학 일색의 허학(虛學)을 결별하고 경전(經典)을 우리의 시각에서 새로이 연구하고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탐구하는 한편 인간존재의 본질을 사색하는 등 다양하고 개방된 학문의 풍토와 정신세계를 이루어 내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등 조선후기 실학(實學)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 이른바 ‘강화학(江華學)’의 산실이 바로 이곳이었습니다. 곤궁을 극한 어려운 생활에도 개의치 않고 250년이라는 오랜 세월동안 이러한 실학적 전통을 연면히 지켜온 고장입니다. 이른바 강화학파의 맥을 이어온 곳입니다. 강화학이 비록 봉건적 신분질서와 중세의 사회의식을 뛰어넘은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지행합일(知行合一)이라는 지식인의 자세를 준엄하게 견지하며 인간의 문제와 민족의 문제를 가장 실천적으로 고민하였던 학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곤륜산을 타고 흘러내린 차가운 물 사태(沙汰)가 사막 한가운데인 염택(鹽澤)에서 지하로 자취를 감추고 지하로 잠류하기 또 몇 천리, 청해에 이르러 그 모습을 다시 지표로 드러내서 장장 8,800리 황하를 이룬다’
이 이야기는 강화학을 이은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선생이 해방직후 연희대학에서 가진 백범을 비롯한 임정요인의 환영식에서 소개한 한대(漢代) 장건(張蹇)의 시적 구상으로서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강화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지금도 큰 감동으로 남아있습니다. 강화로 찾아 든 학자 문인들이 하일리의 노을을 바라보며 생각하였던 것이 바로 이 황하의 긴 잠류였으며 일몰에서 일출을 읽는 내일에 대한 확신이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황하의 오랜 잠류를 견딜 수 있는 공고한 신념, 그리고 일몰에서 일출을 읽을 수 있는 열린 정신이 바로 지식인의 참된 자세인지도 모릅니다.
강화에는 이처럼 지식인의 자세를 반성케 하는 준엄한 사표가 곳곳에서 우리를 질타하고 있습니다. 사기(沙磯) 이시원(李是遠)이 병인양요를 맞아 자결한 곳도 이곳이었고, 1910년 나라의 치욕을 통분하여 ‘지식인이 되기가 참으로 어렵다(難作人間識字人)’는 그 유명한 절명시를 남긴 매천(梅泉) 황현(黃玹)이 자결하기 직전에 찾은 곳도 이곳입니다. 가난한 어부들에 대한 애정과 나라의 치욕을 대신 짊어지려는 헌신과 대의로 그 길고 곤궁한 세월을 견디어내며 박실자연(朴實自然)의 삶을 지향하였던 그들의 고뇌가 곳곳에 묻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여기저기 아름다운 러브호텔이 들어서고 횟집의 유리창이 노을에 빛나는 강화에서 막상 이들의 묘소와 유적들은 적막하기 짝이 없습니다. 여한구대가(麗韓九大家)의 한 사람으로 당대의 가장 냉철한 지식으로 꼽히던 영재 이건창의 묘소에는 어린 염소 한 마리만 애잔한 울음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고 가난한 사재를 털어 세웠던 계명의숙(啓明義塾)은 황폐한 터만 남아 조국 광복에 몸을 던져 만주로 떠나기 전 이곳을 찾았던 독립투사들의 모습을 더욱 처연히 떠올리게 합니다.
마니산의 도토리나무는 지금도 강화벌판을 내려다보면서 풍년이 들면 적게 열리고 흉년이 들면 많이 열린다고 합니다. 아마도 곤궁한 이들의 생계를 걱정하여 그 부족한 것을 여투어주려는 배려였는지도 모릅니다.
‘북극을 가리키는 지남철은 무엇이 두려운지 항상 그 바늘 끝을 떨고 있다. 여윈 바늘 끝이 떨고 있는 한 그 지남철은 자기에게 지니워진 사명을 완수하려는 의사를 잊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며,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도 좋다. 만일 그 바늘 끝이 불안스러워 보이는 전율을 멈추고 어느 한쪽에 고정될 때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한다. 이미 지남철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신이 읽어준 이 간결한 글만큼 지식인의 단호한 자세를 피력한 글을 나는 이제껏 알지 못합니다. 당대의 가장 첨예한 모순을 향하여 서슬 푸르게 깨어 있는 정신이야말로 한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을 가리는 가장 확실한 지표라고 생각됩니다.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해마다 세모가 되면 이 곳 하일리로 찾아오는 당신의 마음을 이제는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모의 바닷가에서 새해의 약속을 읽고 있는 당신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콜럼버스는 왜 서쪽으로 갔는가?
오늘은 멀리 이베리아반도의 끝에 있는 스페인의 우엘바(Huelva)항구에서 이 엽서를 띄웁니다. 당신에게 띄우는 첫 번째 엽서입니다. 첫 번째 엽서일 뿐만 아니라 나의 첫 번째 해외출국입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조국, 그리고 20년을 갇혀 있어야 했던 조국을 처음으로 벗어나는 감회가 남다른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나 자신의 감회에 한동안 젖어 있다가 비행기 창밖을 내다보았습니다. 비행기는 어느덧 우랄산맥을 넘고 있었습니다. 1만m의 고공에서, 시속 800km로 우랄산맥을 넘을 때, 문득 '20세기는 내게 잔인한 세월이었다.'던 당신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나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20세기가 내게는 어떠한 것이었던가. 생각하면 20세기 인류사는 다른 어느 세기보다도 잔인한 100년이었습니다. 그 20세기를 살아 온 사람들이라면 잔혹한 아픔 하나쯤 갖지 않은 사람이 없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우리는 바야흐로 그 20세기를 마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20세기를 마감하고 있는가. 새삼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 엽서를 띄우는 이 항구는 작은 마을입니다. 그리고 과거의 마을입니다. 그러나 이곳은 지중해와 대서양이 만나는 곳이며 유럽과 아프리카가 가장 가까이 마주보고 있는 곳입니다. 두 대해(大海) 와 두 대륙(大陸)이 만나는 곳입니다. 내가 이곳을 가장 먼저 찾아온 이유는 이곳이 바로 500여 년 전에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향하여 출항한 항구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그 시절의 융성함도 사라지고 인적마저 드문 바닷가에 콜럼버스와 함께 신대륙으로 떠났던 '산타마리아호'의 모형만 바람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나는 바르셀로나의 콜럼버스 동상에서부터 세비야 대성당에 안치되어 있는 그의 관곽(棺廓)을 거쳐 이 항구를 찾아오면서 이 길이 결코 과거로 향하는 여정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이곳은 유럽의 역사가 지중해를 벗어나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유럽 주도의 세계사가 시작되는 기점이기도 합니다. 콜럼버스의 출항은 본격적인 식민주의(植民主義)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습니다. 식민지에 서 빼앗은 부(富)와 이 부를 원시 축적으로 하여 이룩한 산업혁명의 신화가 현대사의 신념체계라면 콜럼버스는 아직도 살아 있다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식민주의의 가장 큰 특징이 자기와 똑 같은 동류(同類)를 만들어내는 것이라면, 그리고 자기를 추종하게 하는 것이라면 이곳은 지중해를 벗어난 유럽의 시작이면서 동시에 오늘날 도도하게 전개되는 세계화 논리의 출발지점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곳은 유럽이 중세를 벗어나는 곳이기도 합니다. 콜럼버스가 이 항구를 떠난 1492년은 바로 그라나다에 있는 아랍왕조 최후의 궁전인 알함브라궁이 함락된 해입니다. 이사벨라와 페르난도왕이 결혼함으로써 통일을 이룩한 스페인이 800년간의 아랍지배를 청산하고 국토회복(Reconquista)을 완료한 스페인 통일의 원년입니다. 통일에 이은 종교재판과 추방, 그리고 식민지 경략(經略)으로 나아간 역사의 행보를 예찬할 마음은 없습니다. 그리스, 로마를 보존하고 전승했던 코르도바의 문화가 종교적 이유로 여지없이 파괴된 것은 분명 역사의 상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라나다 함락 당시 피로 물들었던 알바이신 언덕은 지금도 당시의 비극을 짙게 묻어놓고 있는 듯 합니다. 더구나 이곳에서 바라보는 알함브라 궁전은 말할 수 없는 감회를 안겨줍니다.
시에라네바다 설산을 등에 지고 잠자듯 정적에 잠겨 있는 알함브라 궁전은 당시의 비극이 그대로 멈추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러한 강력한 세계경영의 힘은 중세적 분립을 청산한 통일에 의해 비로소 가능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분단현실이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분단에서 오는 거대한 국력의 소모를 청산함이 없이 냉엄한 국제사회에서 우리의 민족적 자존을 키워나가기는 불가능함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열여섯 시간의 긴 비행에 시달리는 동안 나는 생각했습니다. 만약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평양을 거쳐 중국, 시베리아, 유럽에 이르기까지 육로로 올 수 있었더라면 이 여정이 얼마나 많은 인간적인 만남과 추억으로 채워질 수 있었겠는가 하는 아쉬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콜럼버스와 마젤란의 모항(母港)이던 세비야에는 탈 중세(脫中世), 근대지향의 흔적들이 숱하게 남아 있습니다. 오페라 ?세빌리야의 이발사?와 ?피가로의 결혼?이 바로 이곳을 무대로 삼고 있습니다. 이곳 세비야가 바로 세빌리야입니다.
한낱 거리의 이발사에 지나지 않는 피가로가 귀족들을 농락하는 이야기는 마치 봉산탈춤의 말뚝이처럼 중세질서에 대한 당돌한 도전입니다. 풍차를 향하여 돌진하는 라만차의 돈키호테 역시 몰락해가는 중세기사에 대한 풍자이기는 마찬 가지입니다. 어느 것이나 중세사를 청산하고 근대를 지향하는 이야기들입니다. 돈 호세가 카르멘을 처음 만났던 연초공장과 카르멘이 돈 호세의 칼에 찔려 숨을 거두는 투우장도 남아 있습니다. 오페라속의 인물과 무대는 물론 가공(架空)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연초 공장만은 가공이 아닌 실제의 건물입니다. 세비야 국립대학이 되어 있는 당시의 연초공장은 놀랄만한 규모였습니다. 얼마나 많은 연초가 신대륙에서 실려 왔는가 짐작케 하고도 남았습니다. 나는 과달키비르강가에 앉아 신대륙무역의 독점 항이던 세비야의 번영과 식민지의 부로 쌓아올린 스페인의 거대한 유적들을 다시 한 번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중세의 청산과 함께 시작된 식민지역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콜럼버스는 왜 서쪽으로 갔는가?'
이 물음은 한마디로 답변하기 어려운 역사의 덩어리입니다. 콜럼버스의 출항을 황금과 향료에 대한 탐욕만으로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다. (크리스토퍼)'는 콜럼버스의 이름풀이로 대신할 수도 없습니다. '지구는 둥글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한 과학적 탐구로 격상시킨다거나, 이사벨라여왕과 후아나 공주에게 바치는 바닷사나이 콜럼버스의 연정(戀情)으로 격하시킨다는 것은 더욱 가당찮은 일입니다. 그가 신대륙에 도착한 이후에 자행한 1,600만 명에 달하는 신대륙 원주민의 살육과, 같은 수의 아프리카 흑인을 대상으로 한 인간사냥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오늘날까지 맥맥이 이어지고 있는, 그리고 21세기에도 청산되기 어려운 식민주의적 국제원리에 까지 생각이 미치면 그가 서쪽으로 간 개인적인 이유는 더욱 작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신대륙 발견' 500주년에 행해 진 가상재판에서 콜럼버스는 유괴와 살인을 저지른 잔혹한 침략자로 단죄되고 '신대륙 발견(發見)'이란 당찮은 이름이 여지없이 폐기되었습니다. '신대륙'이 아님은 물론이며 '발견'이 아닌 '도착(到着)'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최후의 신화(神話)로 남아 있는 '콜럼버스의 달걀'도 이제는 비범한 발상의 전환이라기보다는 생명 그 자체를 서슴지 않고 깨트릴 수 있는 비정한 폭력성의 대명사로 전락되어 있습니다. 과연 신대륙에서는 무수한 생명이 깨트려지는 소리로 가득하였으며 그 소리는 지금도 세계의 곳곳에서 들려오고 있습니다. 생각하면 콜럼버스에 대한 단죄는 바다만을 상대했던 그에게는 매우 부당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중세의 청산이나 식민지시대의 개막과는 아무 상관없이 오로지 험한 파도와 사투를 벌였던 바닷 사나이에게는 참으로 가혹한 평가일지도 모릅니다. 더구나 화려했던 젊은 시절과는 반대로 병고에 시달리며 돌보는 사람 없이 '잊혀진 사람'으로 쓸쓸히 세상을 떠난 콜럼버스에게는 더욱이나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개인의 행동은 그것이 아무리 개인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그 속에 엄청 난 사회성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산타마리아호 선상에 올라가 멀리 대서양을 바라보았습니다. 바람에 출렁이는 대서양의 푸른 물결이 아득히 출렁이고 있습니다. 바다 저편의 신대륙은 물론 보이지 않습니다. 신대륙으로서의 새로움이 여지없이 짓밟힌 고난의 대륙이 바다 저편에 있을 것입니다. 눈 앞의 무심한 바닷물과는 반대로 귓전을 스치는 바람 속에서 수많은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이 우리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항변이 들려옵니다. '세계는 결국 둥글지 않았다.'는 당신의 말이 들려옵니다. 그리고 지금도 세계의 여러 곳에서 신대륙을 찾아 비행기로 이륙하고 있는 수많은 콜럼버스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잉카 최후의 도시 마추픽추
- 떠나는 것은 낙엽뿐이어야 합니다 ―
'당신의 향기가 나의 뿌리를 타고 내가 들고 있는 술잔까지 올라온다.'
침묵의 도시 마추픽추의 폐허에서 술잔을 들면 바예흐의 시구가 떠오릅니다. 이곳을 버리고 떠나가지 않을 수 없었던 잉카인의 슬픔이 술잔 속에서 잔잔한 물결을 일으킵니다. 프란시스 피사로가 이끄는 황금의 추격자들에게 쫓기고 쫓기던 잉카인들이 마지막으로 은거한 '최후의 도시'가 마추픽추입니다.
나는 관광열차 아우토바곤을 타고 우루밤바 협곡을 통과하면서 다시 한 번 세월의 무상함에 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집요하기 그지없었던 스페인 군마저 추격을 단념하지 않을 수 없었던 험처(險處)가 바로 이 곳 우루밤바 협곡입니다. 아스라이 솟아있는 절벽과 절벽사이로 소용돌이치는 강물만이 간신히 뚫고 지날 수 있는 곳입니다. 이 협곡의 안쪽 해발 2,400m의 산상에 마추픽추가 있습니다. 이곳에 도시를 건설한 그들은 그러나 미라 173구만을 남겨놓고 다시 이곳을 떠났고 그 후 마추픽추는 망각 속에 묻혀버립니다. 그로부터 400년 후인 1911년, 이곳이 다시 세상에 알려졌을 때는 초목만이 무성한 폐허였습니다.
우루밤바 강줄기가 실개천처럼 까마득히 내려다보이는 마추픽추의 폐허(廢墟)에 서면 가족을 땅에 묻고 황급히 이곳을 떠나간 잉카인의 비장한 최후가 가슴에 젖어옵니다. 그들은 그들의 지혜와 피땀으로 세운 도시를 버리고 다시 어디로 사라져 갔는가. 그들이 떠나간 후 400년 동안 이 도시의 비밀이 어떻게 그처럼 철저히 지켜질 수 있었는가. 황금을 찾아 잉카 땅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진 익스플로러(Explorer)들까지도 설마 이처럼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도시가 있었으리라고는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하였습니다.
바예흐의 시구에 있는 '당신의 향기'는 잉카의 후예가 망각의 역사로부터 길어 올리는 그 땅과 그 사람들에 대한 절절한 애정입니다. 당신은 사이먼과 가펑클의 '철새는 날아가고' (El Condor Pasa)라는 노래를 기억할 것입니다. 마추픽추의 폐허에서 원주민들의 악기로 듣는 이 노래는 참으로 가슴 저미는 아픔으로 다가옵니다. 이 노래는 원래 페루의 작곡가 로불리스( Daniel Alomias Robles)의 기타 곡입니다. 사이먼과 가펑클이 이 곡에 노랫말을 붙여 부른 후 널리 애창된 노래입니다. ‘달팽이보다는 차라리 참새가 되고 싶다(I'd rather be a sparrow than a snail)’는 것은 이곳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던 잉카인의 슬픔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반어(反語)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가장 마음에 남는 구절은 마지막 구절입니다.‘길(street)보다는 숲(forest)이 되고 싶다’는 구절입니다. 어디론가 떠나는 길보다는 그 자리를 지키는 숲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이 마추픽추의 마음이라고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길을 자신의 품속에 안고 있는 숲, 그리고 발밑에 무한한 땅을 갖고 있는 숲에 대한 그리움을 그들은 남겨놓고 있습니다. 나는 이 마추픽추가 숲이 되지 못하고 메마른 폐허로 남아 있는 산정(山頂)이 비극의 어떤 절정 같았습니다. 왜 우리의 역사에는 지혜와 땀이 어린 터전들이 황량한 폐허로 남아야 하는가, 이곳뿐만이 아니라 우리는 도처에 얼마나 많은 폐허를 갖고 있으며 또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폐허를 만들어내어야 하는가. 잉카의 하늘을 지키던 콘도르마저 사라진 하늘에는 애절한 기타 음률만이 바람이 되어 가슴에 뚫린 공동을 빠져나갑니다.
자유롭게 하늘을 날 수 있는 참새라 하더라도, 더 높은 곳으로 날아간 콘도르라고 하더라도 떠난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이곳 마추픽추만큼 떠나는 것의 비극성이 사무치게 배어있는 땅도 없습니다. 떠나는 것은 낙엽뿐이어야 한다는 당신의 시구가 생각납니다. 그렇습니다. 새로운 잎에게 자리를 내주는 낙엽이 아닌 모든 소멸(消滅)은 슬픔입니다.
1911년 이곳을 발견한 하이럼 빙엄은 이곳이 잉카 최후의 도시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곳은 최후의 도시로 전승(傳承)되어 온 '비르카밤바'가 아니며 이곳으로부터 다시 어디론가 떠나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비르카밤바는 잉카 최후의 도시로서 황금으로 만든 물건들이 대량으로 묻혀 있을 것으로 추측되는 황금의 도시입니다. 그러나 빙엄 역시 엘도라도를 찾아 헤매던 익스플로러였으며 그가 잉카 어린이의 안내로 이곳에 도착한 후 실어낸 짐이 무려 나귀로 150마리 분이었다고 하였습니다. 그 짐들 속에 금붙이는 단 한 개도 없었다고 그는 강변하고 있지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이곳이 최후의 잉카도시인 전설의 비르카밤바였을 가능성을 부인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잉카의 수도 쿠스코가 침략자들의 수중에 떨어지고 울란타이탐보까지 함락되었다는 급보를 받은 이 도시의 사람들이 이곳에다 잉카의 모든 유산들과 병약한 이들을 땅에다 묻고 황급히 아마존의 밀림 속으로 흩어져 갔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어쨌건 이곳은 잉카가 잉카로서 남아 있었던 최후의 도시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비르카밤바와 엘도라도가 안데스의 험준한 산악이나 아마존의 밀림 속 어딘가에 있다는 믿음이 아직도 전설처럼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안데스산맥과 아마존 밀림 속을 찾는 익스플로러들은 이제 없습니다. 오늘날의 익스플로러들은 이제 도시의 빌딩숲 속에서 엘도라도를 찾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나는 이 비극의 도시 마추픽추를 떠날 때 다시 한 번 비애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것은 소위 '굿바이 보이'(Goodbye-Boy)로 알려져 있는 챠스키(Chaski)의 남아 있는 모습에서였습니다. 챠스키는 광대한 잉카제국의 통신을 담당한 발 빠른 파발꾼입니다. 쿠스코에서 리마까지 그 험준한 잉카트레일을 4일 만에 답파할 정도로 빠르고 건장한 다리를 가진 젊은이들이었습니다.
셔틀버스로 마추픽추를 내려올 때의 일이었습니다. 차창 밖에서 어린이들 몇 명이 손을 흔들며 외치는 소리를 들을 때까지만 해도 버스에 타고 있는 관광객들 중에 그 소년을 주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관광지 어린이들의 흔한 인사정도로 밖에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굽이굽이 사행(蛇行)길을 내려오는 동안 굽이마다 버스를 향하여 '굿바이'를 외치는 같은 소년을 목격하게 됩니다. 저 소년이 지름길로 버스를 앞질러 뛰어 내려와 굿바이를 외치면서 버스와 함께 이 길을 내려가고 있는 소년이란 사실을 알면서부터 버스 속의 관광객들은 술렁이기 시작합니다. 소년이 다시 차창밖에 나타나 굿바이를 외치면 버스 안의 모든 관광객은 일제히 '오 마이 갓'(Oh my God)을 연발하며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이제 한 굽이를 돌 때마다 관광객은 그를 기다렸다가 탄성을 발합니다. 그러기를 일곱 번 정도 반복했습니다. 마지막 굽이에서 뜻밖에도 그 소년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미처 뛰어 내려오지 못하였나 하고 걱정하던 사람들이 문득 버스 앞에서 달려가고 있는 그의 뒷모습을 발견하고 다시 한 번 놀라게 됩니다. 버스 앞을 달리며 뒷모습을 잠시 보여주고 난 후 세워주 는 버스 위로 올라와서 만장의 박수와 찬사를 받는 것으로 끝납니다. 끝나는 것이 아니라 관광객들로부터 돈을 받기 시작합니다.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찬사와 함께 기꺼이 이 소년에게 돈을 줍니다. 아마 유럽관광객들은 그의 건각(健脚)을 예찬하는 헌금으로 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나도 물론 돈을 주었습니다. 나는 잃어버린 우리들의 다리에 대한 벌금으로 돈을 치렀습니다.
남아 있는 잉카의 모습이 굿바이소년으로 하여 더욱 처연해집니다.
험준한 산악에서 단련된 건각은 우리가 잃어버린 유산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마추픽추에 남아 있는 모습은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잉카의 광대한 제국을 지탱하던 건각이 관광 상품으로 남아있는 모습이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인도의 마음 갠지스 강
- No money No problem, No problem No spirit -
오늘은 힌두교 성지 바라나시(Varanasi)에서 이 엽서를 띄웁니다. 바라나시는 매년 100만 명 이상의 순례자들이 찾아와 '인도의 마음'을 길어가는 곳입니다. 이곳 사람들은 갠지스를 ‘강가(Ganga)’라고 부릅니다만 나는 당신의 편의를 위해 갠지스라 쓰겠습니다.
갠지스 강은 당신도 잘 알고 있듯 세계의 지붕인 히말라야산맥에서 발원하여 인도양으로 흘러들기까지 메마른 인도대륙을 적시며 곳곳에 찬란한 고대문명을 꽃피운 인도의 젖줄입니다. 갠지스 강이 이곳 바라나시에 이르면 마치 전생(前生)으로부터 흘러오던 강물이 잠시 이곳을 이승으로 삼다가 떠나려는 듯 초승달 같은 만곡(彎曲)을 이루면서 유속(流速)도 뚝 떨어집니다.
나는 아직도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이른 새벽 강에 배를 띄우고 강물과 함께 천천히 흘러갑니다. 강가는 벌써 강물에 몸을 씻고, 명상하고, 기도하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갠지스강물에 몸을 씻으면 이승에서 지은 모든 죄를 씻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트(Ghat)’라는 이 목욕장은 강물에 닿아 있는 긴 돌계단으로, 이 돌계단은 죽은 사람의 시체를 태우는 화장터로도 함께 사용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저만치 두 개의 불꽃이 아직도 어둠에 묻혀 있는 수면을 밝히며 피어오르고 있습니다. 불에 타고 있는 사람의 형체가 장작불 속으로 보입니다.
이곳 갠지스 강가에서 죽고 그 시신을 태운 재를 강물에 흘려보내면 윤회를 벗고 영원히 해탈(解脫)을 얻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장작 값으로 손목에 팔찌 하나만 남기고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이곳에 와서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돈이 부족한 사람은 장작이 모자랍니다. 그래서 화장터 주변에는 타다 남은 시체를 얻으려고 개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도 기다리고 있는 개가 눈에 띕니다.
나는 사진촬영을 금지하는 워치맨의 감시를 피하여 카메라를 들다가 그만 내려놓았습니다. 이것은 결코 한 장의 사진에 담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당신이 말했습니다. 문화라는 이름의 가공(架空)속에서 길들여진 우리들의 정서가 가장 먼저 회복해야 하는 것은 '당혹감'이라고 하였습니다. 외부세계와 인간존재가 직선으로 대면했을 때 돌출하는 충격, '세계는 저기서 무엇을 하고 있으며 저것과 나의 대면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하는 싱싱한 의문에 충실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당혹감과 충격은 현장을 떠나서는 만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그것을 한 장의 사진으로 만들어 사유화(私有化)하려는 욕심은 우리들의 정신을 박제화(剝製化)하는 상투적 허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창백하기로 말하자면 내가 띄우는 이 엽서 속의 언어들도 조금도 다를 바 없습니다. 당신이 직접 이곳에 오기 바랍니다. 비단 이곳이 아니라도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현장의 당혹감을 머리가 아닌 가슴에 먼저 주입(注入)하는 일이라 믿습니다.
어느덧 갠지스 강에 해가 뜨고 아침 해는 붉은 노을을 강물위에 던지며 마치 등잔의 심지를 내려놓듯 화장터의 불빛도 줄여놓습니다. 그리고 갠지스 강은 한줄기 긴 빛으로 변합니다. 한 줄기의 강물로부터 끝없는 시간의 흐름으로 변합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관류하는 종교가 되고 철학이 됩니다. 나(Atman)와 우주(Brahman)를 통일하는 달관(達觀)이 됩니다. 삶과 죽음, 영광과 좌절, 부귀와 빈천을 한줄기 강물로 흘려보냅니다.
빈천이나 부귀는 모두 전생에서 지은 당연한 업보(業報)며, 이승의 가난과 괴로움도 저승에서는 벗을 수 있다는 무한한 윤회를 믿고 있습니다. 선(善 .Goodness)은 얼마든지 줄 수 있고 또 얼마든지 받을 수도 있지만 돈은 그럴 수 없는 것이라 했습니다.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람이 물속에서 몸 을 씻고 있다가 말했습니다.
'노 머니 노 프로블럼(No money No problem)'.
나는 그가 던진 만트라(Mantra, 警句)에 화답하였습니다.
'노 프로블럼 노 스피리트(No problem No spirit)'
나는 갠지스 강이 안겨주는 달관이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체념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모든 실재(實在)를 비 실재화(非 實在化)하는 이데올로기가 아니기를 바랍니다. 생각하면 그러한 달관에 비록 체념의 흔적이 없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매우 귀중한 깨달음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더 많은 것을 가지려 하고 더 빨리 도달하려고 하는 우리들의 끝없는 집착의 윤회를 통틀어 반성케 하는 귀중한 깨달음이 그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갠지스 강은 척박한 인도 땅에서만이 아니라 오히려 번영과 풍요의 대륙을 가로질러 흘러가야 할 강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의 가슴이 아니라 백 년 천년 이승에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가슴 한복판을 가로질러 흘러가야 할 강이라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거대한 갠지스강을 새로운 세기(世紀)의 한복판에 만들어내는 일이 우리시대의 과제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뱃사공 람지는 다음에 다시 갠지스 강을 찾아올 때에는 손목시계 한 개를 갖다 주기를 내게 부탁했습니다. 나는 잠시 생각한 뒤에야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결코 손목시계의 소유 그 자체에 대한 욕망이 아니었습니다. 자기의 노동시간을 정확하게 측정함으로써 배를 빌린 손님에게, 그리고 자기를 고용하고 있는 배 임자에게도 약속을 지키려는 그의 양심이었습니다.
나는 한동안 나의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며 고민했습니다. 어느 투자금융회사의 창립10주년 기념품인 내 시계는 조금도 값나가는 것이 아니었지만 당장의 여정 때문에 끝내 풀어주지 못했습니다. 만약 당신이 나보다 먼저 갠지스 강을 찾아오게 된다면 그에게 손목시계 한 개를 선물하기 바랍니다. 당신이 그에게 주는 시계는 그의 삶과 노동이 되어 갠지스 강과 함께 흘러갈 것입니다.
사람의 얼굴
<가고파>란 노래를 들을 때 나는 내가 어린 시절에 자랐던 유천 강을 생각합니다. <옛 동산에 올라>란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나의 머릿속에 변함없이 떠오르는 동산은 언제나 고향의 작은 뒷산입니다. 유천 강이나 고향의 작은 뒷산은 이 노랫말을 지은 시인이 생전 보지도 듣지도 못한 곳입니다. 이 노래를 부르거나 듣는 사람들 가운데 내가 떠올리는 강이나 산을 연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심지어 어린 시절 이 강과 산을 함께 나누며 자라온 나의 친구나 형제들 가운데에도 나와 같은 연상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비단 노래뿐만이 아닙니다. 무심히 글을 읽다가 문장 속에서 잠시 만나는 한 개의 단어에서도 우리들에게는 그것과 함께 연상되는 장면이 있게 마련입니다. 글 뜻에 마음이 빼앗겨 미처 돌이켜 볼 여유가 없어서 그렇지 이러한 연상세계는 마치 영상의 배경처럼 우리가 구사하는 모든 개념의 바탕에 펼쳐져 있습니다.
이를테면 <민족>이란 단어를 읽을 때 연상되는 장면을 물어 보면 사람마다 각각 다른 장면을 이야기해 줍니다. 어떤 사람은 태극기를, 어떤 사람은 3.1절 기념식장을, 어떤 사람은 88올림픽을, 장승을, 시골장터를 연상하고 있습니다. 민족이란 단어뿐만이 아니라 더욱 구체적인 단어의 경우도 사람마다 그 연상의 세계가 가지각색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소나무, 돼지, 자동차, 쌀, 옷…….
나는 오랜 독거생활의 무료를 달래려고 시작한 것이기는 하나 한동안 내가 사용하거나 만나는 모든 단어의 연상세계를 조사해 나간 시절이 있었습니다. 내 생각의 배후를 파헤치는 심정으로 하나하나 점검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매우 놀라운 것을 발견했습니다. 예를 들어 <실업>이란 단어를 읽을 때 나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장면은 경제학 교과서에서 읽은 이러저러한 개념이었습니다.
케인즈적 실업, 맬더스적 실업, 상대적 과잉인구, 실업률 … 메마른 경제학 개념과 이론들이 연상되는 것이었습니다. <전쟁> <자본> <상품>과 같이 고도의 사회성을 띠고 있는 개념도 그 사회관계의 본질인 사회적 관계가 사상되고 있음은 물론이고 구체성을 담고 있는 개념마저도 그 연상세계가 감각적이고 형식적인 것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전쟁>이라는 단어에서는 이제 패트리어트 미사일과 스커드 미사일이 펼치는 전자 오락게임과 같은 텔레비전 화면이 연상되기 십상이며 <자본>에서는 은행의 금고가, <상품>에서는 백화점 쇼우 윈도우가 연상되기 마련입니다. 한마디로 정서적 공감의 원초가 되는 <사람>이 연상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이처럼 나의 머릿속에 사람의 얼굴이 담겨 있지 않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을 때의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심한 무력감과 외로움 같은 것이었습니다. 한겨울의 독방보다도 더 무력하고 통절한 외로움이었습니다. 더불어 함께 일할 동료도 없이, 손때 묻은 연장 하나 없이, 고작 몇 권의 책과 연필을 들고 척박한 간척지에 서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사회과학도에게 요구되는 냉철한 이성(cool head )이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것은 거대한 허구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냉철한 이성이 따뜻한 가슴(warm heart )을 바탕으로 하여 얻어지는 것이라면 나의 관념세계는 실로 비정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내가 읽고 생각한 것 심지어 내가 온 몸으로 겪은 것에서마저도 껍데기만 얻고 있었을 뿐이었고 껍데기로 누각을 짓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나는 나의 메마르고 비정한 연상세계에 사람의 얼굴을 하나하나 심어나가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관념적인 연상세계를 풍부한 구체성으로 채우고 싶었습니다.
나는 우선 <실업>이란 말을 듣거나 읽을 때 의식적으로 내가 잘 아는 친구를 떠 올리기로 하였습니다. 그는 쌀 1kg에 800원 하던 때에 5백 원어치의 쌀을 달라고 하기가 부끄러워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사람이었습니다. 연탄을 살 돈이 없어 아예 냉방으로 지내던 겨울에 그를 괴롭히던 것은 추위가 아니라 혹시 다른 가게에서 연탄을 사고 있지나 않나 하고 의심스럽게 바라보는 가게 집 아주머니의 시선이 고통스럽던 친구였습니다. 하루 종일 번 돈이 식구들의 끼니를 에울 만큼이 되지 못하면 차마 자기만 바라고 있는 동생들을 볼 면목이 없어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싸구려 합숙에서 새우잠을 자고 새벽어둠 속 대학병원에서 피를 팔던 친구였습니다. 회복실에 누워 메마른 카스텔라를 먹으며 팔목을 타고 흘러내리는 피를 손가락에 찍어 벽에다 낙서를 하던 친구. 그 친구를 생각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가 썼던 벽 위의 낙서를 생각하기로 하였습니다.
관념성을 벗는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이 연상의 세계가 관념적이지 않아야 할 것 같았습니다. <건축>이라는 단어에서‘빌딩’이 연상되는 것보다는 ‘포 크레인’이나‘망치’가 연상되는 것이 덜 관념적이고 포 크레인이나 망치보다는 자기가 잘 아는‘목수’가 연상되는 경우가 보다 덜 관념적이라고 생각됩니다. 더구나 <정직>이라든가 <양심>과 같이 추상적인 단어일수록 그것과 더불어 사람이 연상되지 않는 한 그것이 사람들의 삶을 담아내는 일에 있어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는 것이며, 그것이 인간적인 것으로 되기는 더욱 어려운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연상되는 사람이 어떠한 사람인가에 따라서 그 사고의 성격 즉 사회적 입장이 정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시대 그 사회의 가장 민중적인 사람들이 사고의 밑바탕을 자리 잡고 있어야만 그의 사상도 시대적 과제와 사회적 모순을 온당하게 반영하고 그것과 튼튼히 연결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자유>나 <평등>과 같은 고매한 개념도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사실적으로 표현 해내는 그림으로 그 내용이 채워질 때 비로소 우리는 관념의 유희와 비인간적인 물신성(物神性)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사람의 얼굴이 담겨 있지 않은 우리의 머리와 사람과의 관계가 사라져 버린 우리들의 삶 속에 사람 대신 무엇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들어 앉아 있는지 … 참으로 섬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북한산 등반길에서 어느 중년의 남자 두 사람이 이야기하며 지나갔습니다.‘저게 다람쥐는 아니고 이름이 무어라더라? 꼬리가 꽤 비싸다던데?’우리들의 생각은 얼마나 삐뚜로 놓여 있으며 우리들의 삶은 얼마나 삭막하고 산산이 조각나 있는가. 일체의 물질적 성과와 일체의 정신적 문화 환경의 밑바탕에서 그것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지탱하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발견해 내고 그 사람들과의 관계 위에서 영위되고 있는 나의 삶을 깨닫는 일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그러한 깨달음을 가까이 두기 위하여 나의 연상세계에 사람들을 심으려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독거실의 냉기 속에 곧추 앉아서 사고의 배후를 파헤치고, 나의 뇌리 속에 틀고 앉은 잡다한 관념의 검불을 쓸어내고, 그 자리에 나의 친구들을 심으려던 나의 시도는 결국 이렇다 할 진척을 보지 못한 채 참담한 구멍만 뚫어 놓고 끝났습니다. 그 참담한 실패의 전모를 글로서 적기에는 그 과정이 너무나 복잡합니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필요한 일이기는 하였으나 성급한 것이었습니다.
나에게는 우선 그 많은 개념들의 밑바닥에 들어앉힐 친구들이 부족했습니다. 그리고 설령 내게 수많은 친구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친구들의 얼굴이 나에게 정서적 친근감을 준다는 이유만으로 그 자리에 들어앉힐 수도 없었습니다. 친근한 개인으로 말미암아 도리어 그 개념이 왜소화하거나 심지어는 다른 내용으로 변질되어버림으로써 거꾸로 주관성이 강화되기도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실업>이라는 개념의 밑바닥에 들어앉힌 친구만 하더라도 그가 1980년대의 실업의 본질적 성격을 제시해 주지는 못했습니다.
사람이 담지(擔持)하고 있는 그 풍부한 정서와 사회성에 주목했던 나의 노력이 사람을 통하여 당대 감수성의 절정에 이르기는커녕 한낱 개별인간에 대한 관심으로 전락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가장 절망적인 것은 도대체 독거실에 앉아서는 될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세번 네번 심어도 뿌리내리지 않는 풀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머릿속에 심을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어깨동무로 만나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연상세계를 바꾸려던 나의 노력은 결국 나에게 작은 위안만을 한동안 가져다주었을 뿐 더욱 침통한 고민을 안겨주었습니다. 개별인간의 정서와 현실이 우선은 핍진(乏盡)한 공감을 안겨줄 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우리 시대의 견고한 구조적 실상에 대하여는 극히 무력할 뿐이었습니다.
<사람>이란 누구나 누구의 친구이고 누구의 가족일 터이지만 그것이 우리의 사고 속에 계속 친구나 가족으로서만 남아 있는 한 우리의 사고가 감상적 차원을 넘어 드넓은 지평으로 나아가기는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곳이 연상의 세계이든, 그 곳이 현실의 팽팽한 긴장 속이든 우리는 우리가 만나는 사람으로부터 그 사람을 규정하고 있는 사회구조적 얼개를 향하여 다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어차피 한사람의 절친한 개인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 개인을 매개로 하여 사회적 개인으로 나아가지 않는 한 우리는 당면한 모순을 변혁해낼 주인공의 얼굴을 만날 수는 없는 것이며, 더구나 그 역량에 대한 신뢰를 가지기는 더욱 어렵다고 믿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친구들을 소중히 간직할 것입니다. 일체의 실천이 배제된 독거실에서 추운 겨울밤을 뜨겁게 달구며 해후한 나의 친구들을 나는 사랑합니다. 애정은 아무리 보잘것없는 대상도 자신의 내부로 깊숙이 안아 들여 더욱 큰 것으로 키워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시대의 한복판으로 걸어 나가는 일, 그리고 그 현장의 첨예한 칼끝으로부터 부단히 상처받는 일도 이러한 애정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언제나 사람에서 비롯되고 언제나 사람에게로 통하는 것이기 때문이기 때문입니다.
죽순의 시작
해마다 식목일에 수많은 나무를 심지만 대나무를 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대나무는 누가 심어주어서 자라는 나무가 아니라 오직 뿌리에서만 그 죽순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땅 속의 시절을 끝내고 나무를 시작하는 죽순의 가장 큰 특징은 마디가 무척 짧다는 점입니다. 이 짧은 마디에서 나오는 강고함이 곧 대나무의 곧고 큰 키를 지탱하는 힘이 됩니다. 훗날 횃불을 에워싸는 죽창이 되고, 온몸을 휘어 강풍을 막는 청천 높은 장대 숲이 될지언정 대나무는 마디마디 옹이진 죽순으로 시작합니다.
대나무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나무들은 마디나 옹이로 먼저 밑 둥을 튼튼하게 합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일상사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됩니다. 새 학교를 시작하든, 새 직장을 시작하든, 어제의 일터에 오늘 다시 불을 지피든, 모든 시작하는 사람들이 맨 먼저 만들어 내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짧고 많은 마디입니다.
나무가 아닌 우리들의 삶에 있어서 마디는 과연 무엇이며 또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만들어 내어야 하는가. 이러한 물음은 새봄과 함께 세차게 일어나는 우리 사회의 여러 부문 운동에 있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새로운 뜻을 심고자 하는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절실한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사가 어렵다고 하는 까닭은 서로 다른 이해관계 때문에 새로운 것은 언제나 낡은 것의 완강한 저항과 억압 속에서 시작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경우는 그래도 덜한 경우이고, 낡은 것이 새로운 것을 부단히 배우고 수용함으로써 자기 개선을 해 나갈 수 있는 최소한의 탄력성마저 상실해버린 단계가 되면 이는 아예 초전박살의 살벌한 위기구조가 되고 맙니다. 이 때 죽순은 다만 좋은 먹이가 될 뿐입니다.
죽순의 마디는 분명히 뿌리에서 배운 것입니다. 캄캄한 땅속을 뻗어가던 어렵던 시절의 몸짓이며, 역경의 산물이며, 저항의 흔적입니다. 그것은 차라리 패배의 상처 그 자체인지도 모릅니다. 좌절과 패배를 딛고 일어선 의지의 인생을 우리는 물론 알고 있으며, 처절한 패배로 막을 내린 민중투쟁마저도 유구한 민족사의 밑바닥에 묻혀 있다가 이윽고 찬란한 승리의 원동력이 되었던 승패의 변증법을 우리는 역사의 도처에서 읽고 있습니다.
객관적 조건과 주체적 역량에 맞는 목표와 단계를 설정하는 일이 곧 마디의 과학이라 생각하며, 달성할 수 있는 목표, 이길 수 있는 싸움을 조직하는 일이 바로 짧은 마디의 교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손자병법이 가르치는 바도 다르지 않은데, 이를테면 전쟁을 잘 한다는 것은 쉽게 이길 수 있는 상대를 이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약한 상대를 고르라는 비열함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용두사미란 경구를 모르는 사람이 없듯이 정당이든 단체든 개인이든 거대하고 요란한 출발은 대체로 속에 허약함을 숨기고 있는 허세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민들레의 뿌리를 캐어 본 사람은 압니다. 하찮은 봄풀 한 포기라도 뽑아본 사람은 땅속에 얼마나 깊은 뿌리를 뻗고 있는가를 알고 있습니다. 모든 나무는 자기 키 만큼의 긴 뿌리를 땅속에 묻어두고 있는 법입니다.
대숲은 그 숲의 모든 대나무의 키를 합친 것만큼의 광범한 뿌리를 땅속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대나무가 그 뿌리를 서로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대나무가 반드시 숲을 이루고야 마는 비결이 바로 이 뿌리의 공유에 있는 것입니다.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나면 이제는 나무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개인의 마디와 뿌리의 연대가 이루어 내는 숲의 역사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홍수의 유역에서도 흙을 지키고, 강물을 돌려놓기도 하며, 뱀을 범접치 못하게 하고, 그늘을 드리워 호랑이를 기릅니다. 그 때쯤이면 사시청청 잎사귀까지 달아 바람을 상대하되 잎사귀로 사귀어 잠재울 것과 온몸으로 버틸 것을 적절히 가릴 줄 압니다. 설령 잘리어 토막 지더라도 은은한 피리소리로 남고, 칼날 아래 갈가리 찢어지더라도 수고하는 이마의 소금 땀을 들이는 바람으로 남습니다.
식목의 계절에 저마다 한 그루의 나무를 심기 전에 잠시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어느 뿌리 위에 나 자신을 심고 있는가. 그리고 얼마만큼의 마디로 밑 둥을 가꾸어 놓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