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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최명희 작가의 혼불 문학관
김선자 시인
한 달 동안 여러 가지 행사로 유난히도 바빴던 터라 사전 계획 없이 원고 날짜가 임박해서야 무작정 최명희 작가의 혼불 문학관을 가기 위해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작년에 화재의 소식이 신문으로 보도되면서 관심을 갖고 읽기 시작한 '혼불' 아직도 못다 읽은 내용을 대충 정리하면서 달리는 마음은 무거웠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4월의 아름다운 푸르름과 농촌의 한가로움을 즐기면서 꽃의 향기에 깊은 심호흡으로 무거움 마음을 달래보았다.
집에서 출발한 지 1시간30분쯤 지나 도착한 서도마을 입구에는 '구서도역 영화 촬영장'이라는 푯말이 발길을 멈추게 하였다.
역사 마당에는 때늦게 핀 벚꽃이 실바람에 꽃눈을 날리는 모습이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아름답다.
혼불 문학마을의 도입부라는 이곳은 1932년 지어진 가장 오래된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조건물이라 한다.
2002년 전라선철도 이설 후 신역사로 이전하면서 헐릴 위기에 처하자 2006년 남원시에 매입하여
다시 복원한 구서도역
지금은 영화촬영장으로 보존활용하고 있다고 한다
꽃눈 날리는 모습이 자꾸만 발목을 잡았지만 유혹을 뒤로하고 목적지를 향해 차에 올랐다. 이정표를 따라 좁은 도로를 달려 옛날 가옥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로 접어드니 지나가시던 마을 어르신들이 반갑다며 인사를 먼저 건네신다. 마을을 지나 산 아래 자리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주변을 살펴보니 문학관을 배경으로 좌측에는 한눈에 들어올 수 있게 문학관 전경을 담아놓은 안내도가 있었다.
주차장 좌측에 있는 문학관 전경을 담은 전시도
문학관 주변의 자연환경은 관리하시는 분들에 의해 잘 다듬어져 있었다.
남원시 사매면 서도리 522번지 소설의 배경지인 이곳에 자리한 혼불 문학관은 작가의 마음을 이해하고 도울 수 있도록 건물 하나에도 신경을 써 전통적인 풍으로 지어서 2004년 10월24일에 개관하였다고 한다 전시관을 향하는 계단을 오르면서 4월의 꽃향기에 최명희 작가의 고운 모습을 그려 본다.
관계자분과 함께 찍은 사진 뒤로 보이는 것이 전시관이다
평일이라 그런지 전시관은 한적하였다. 잔디밭에 서서 마을을 내려다보노라니 매안 이씨 집안에 효원이가 시집오던 날 분주했을 장면들이 영상으로 스친다. 그러면서 17년 동안 혼불을 완성하기까지 혼신을 다했던 최명희 작가의 단아한 모습이 정겹게 스친다. 마냥 지체할 수 없어 먼저 도움을 받기 위하여 우측에 있는 관리실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관계자분께 우리 한비문학을 소개한 뒤 안내를 부탁드렸더니 환한 미소로 반기시면서 흔쾌히 시간을 내어 주신다.
혼불의 개관과 규모 등을 설명 들으면서 전시관 입구에 도착하니 전시관 외벽 하단부에는 그 시대의 생활을 그대로 이해를 돕기 위해 가지런하게 전시되어 있는 흑백사진들이 매우 이색적이었다.
전시관 외벽 하단에 전시되어 있는 흑백 사진
전시관에 들어서는 순간 최명희 작가가 생전에 강의하였던 내용이 차분한 목소리로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오면서 들뜨던 마음을 숙연하게 했다. 그리고 우측 벽면으로는 작가의 작가가 모국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글을 썼다던 것을 잘 알려주는 글이 정갈하게 사진과 액자에 담겨 있었다.
--최명희 작가의 말--
웬일인지 나는 원고를 쓸 때면,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고도 간절한 일이랴.
날렵한 끌이나 기능 좋은 쇠붙이를 가지지 못한 나는,
그저 온 마음을 사무치게 갈아서 손끝에 모으고, 생애를 기울여 한마디 한 마디, 파나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월이 가고 시대가 바뀌어도 풍화 마모되지 않는 모국어 몇 모금을 그 자리에 고이게 할 수만 있다면
그리고 만일 그것이 어는 날인가 새암을 이룰 수만 있다면,
새암은 흘러서 냇물이 되고, 냇물은 강물을 이루며, 강물은 또 넘쳐서 바다에 이르기도 하련만,
그 물길이 도는 굽이마다 고을마다 깊이 쓸어안고 함께 울어 흐르는 목숨의 혼불들이,
그 바다에서는 드디어 위로와 해원의 눈물나는 꽃 빛으로 피어나기도 하련마는,
나의 꿈은 그 모국어의 바다에 있다.
어쩌면 장승은 제 온몸을 붓대로 세우고, 생애를 다하여, 땅속으로 땅속으로,
한 모금 새암을 파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운 마을, 그 먼바다에 이르기까지……
--최명희 작가가 남긴 말 중에서--
순간 작가의 이 글귀가 뼈마디마다 박히면서'나는 어떤 모습으로 글을 대하였을까?' 하는 생각에 잠긴다. 혼불을 읽다 보면 소설인지 시인지 모를 정도로 아름다운 언어들에 매료되어 페이지 넘기기가 쉽지 않았던 순간순간들이 떠오른다. 아마도 작가의 이런 노력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작가가 남긴 말
혼불을 쓰던 육필 원고
육필원고를 보면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글자 하나하나에 작가의 혼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정성이 깃들어 있는 것이 느껴진다 그리고 작가는 글을 쓰기 위해 절대 새 원고지를 쓰지 않았다고 한다 원고지를 구입하면 몇 년을 음식을 곰삭이듯이 숙성시켜 사용한다고 한다 작은 것 하나에도 온갖 심혈을 기울인 모습이 보인다.
전시관 입구에서 작가의 말이 새겨진 글을 보는 것만으로도 두 분 평론가들의 말의 뜻을 더욱 공감할 수 있었다.
‘최명희 작가가 소설 하나에 17년을 매달려 신들림과 각고의 세월을 보내며 우리의 풀뿌리 숨결과 삶의 결을 드러내는 풍속사이기도 한 이 소설의 울림과 호소력을 발휘한 판소리의 가락이라고 하고 싶다.'던 유종호 문학평론가님의 말
그리고 또 정일구 문학 평론가님은 '전통문화와 민속 관념을 치밀하고 폭넓게 형상화한 것이 문화 전승 담론 가운데 전범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그 어느 민족지에 기술된 것보다 정확하고 다채롭다고 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바로 옆에는 혼불의 변천 과정과 작가의 원고교정 모습과 생전에 기사화되었던 내용들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혼불의 변천 과정
원고 교정 모습과 기사화된 내용
최명희 작가가 작고한 뒤 기사화 되었던 내용과 수상했던 상장 같은 것들을 전시
매안 이씨의 종부 3대의 이야기 중에 나오는 청암부인(작품속 효원역)의 육필
최명희 작가가 서울에서 생활하면서 혼불을 썼던 서재를 재연
전시관 중앙쯤에는 작가의 삶을 자세하게 담아 작가의 이해를 도왔다
단층으로 지어진 전시관은 소설 한 작품으로 생애를 걸었던 최명희 작가의 삶을 그대로 표현해주려고 애쓴 흔적이 곳곳에서 엿보인다 전시관 안으로 들어갈수록 옆으로 발걸음 옮기기가 쉽지 않았다 자신도 어느덧 혼불 속의 한 인물이 되어 그곳에 서있는 느낌이었다 아늑하게 전시되어 있는 전시관은 작가의 생애가 한눈에 들어올 수 있게 잘 정리되어 있었고 바로 옆에는 소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 시대의 장면들을 디오라마로 10장 면의 셋트로 잘 꾸며 놓아 한층 전통문화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을 전달하고 그 시대에 대한 이해를 도와주었다.
자세한 설명으로 많은 자료를 담고 나오는데 입구에는 방문객 방명록이 있었다.
그곳에 작은 흔적을 남기고 관계자분께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하고 소설의 배경지인 주변을 살피기 위해 혼자 발걸음을 돌렸다.
전시관 뒤로 보이는 벼슬봉과 노적봉을 다시 바라보는 마음은 전시관을 둘러보기 전에 느끼던 느낌과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와닿았다.
그 시대 물이 귀해 농사를 짓기 힘들었다던 노봉 마을에 물을 가두기 위하여
'노봉마을 서북쪽으로 뻗어내린 노적봉과 벼슬봉의 산자락 기맥을 가두기 위해 큰 못을 파고, 그 갇힌 기운이 찰랑찰랑 넘치게 한다면 백 대 천손의 천추락만세향 누릴만한 곳이다 하여 청암부인은 2여 년에 걸쳐 실농한 셈치고 팠다던' 저수지에 들렀다.
갇힌듯한 청호저수지 물...바람이 터치하는 것이 간지럽기라도 하듯 수만 개의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밖에도 새암바위, 노적봉 마애불상, 호성암, 물레방아, 거멍굴, 달맞이 동산 등 많은 것들이 있지만 여기서 '작가의 생애'와 소설 '혼불'의 줄거리를 간단하게 소개하고 청암부인이 살았던 종가로 옮겨 볼까 한다.
최명희 작가의 생애
1947년 10월 10일(음력) 전북 전주시 경원동 출생
1960년 전주 풍남초등학교 졸업
1963년 전주사범학교 병설중학교 졸업. 당시의 생활기록부에는 문예에 소질이 있는 것으로 기재
1965년 고등학교 3학년 때 쓴 수필 “우체부”가 당시 고등학교 작문교과서에 실림
1966년 전주 기전여자고등학교 졸업
1967년 5월 13일 “전북대학신문”에 일기 [먼지와 햇빛과]를 발표하였다.
10월 제1회 전국 대학 문화 예술 축전의 문학부문에 수필 [냇물]이 우수작으로 당선
1968년 전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편입
12월 25일 전북대학신문에 일기 [내 나이, 나의 키 1]을 발표
10월 단편 [脫空]으로 숙대신보사에서 주는 제2회 대학 문학상을 소설 부문에서 받았다.
1972년 2월 전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72년~1974년 전주기전여자고등학교 국어교사 재직
10월 6일 전북대학신문 지령 400호 기념 동문 문예 특집에 콩트 [오후]를 발표하였다.
1974년~1981년 서울보성여자고등학교 국어교사 재직
1980년 1월 1일 중앙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단편 [쓰러지는 빛]으로 당선
1981년 2월 친구인 극작가 이금림의 권유로 {혼불}의 집필을 위하여 보성여자고등학교 교사를 그만 두었다.
1981년 동아일보 창간 60주년 기념 2천만원 고료 장편소설 공모에 {혼불}(제1부)이 당선.
1983년 단편 [이웃집 여자]가 서울신문사에서 나온 {정예여류작가 10인선 신작집}, {일곱 무지개 빛깔같은}에 실렸다.
1985년 9월~1986년 4월 장편 [祭亡妹歌]를 전통문화에 싣다가 {혼불}에 전념하려고 중단하였다.
1988년 9월부터 월간 {신동아}에 {혼불} 제2부 연재 시작.
1985년 10월까지 만 7년 2개월간 제5부까지 집필, 국내 월간지 사상 최장기 연재기록 세움.
1990년 12월 {혼불} 제1~2부(전4권) 출간(도서출판 한길사 刊).
1991년 단편 [袂別]과 [쓰러지는 빛]이 ‘우리 시대의 한국문학'(계몽사) 25권에 실렸다.
1993년 7월 문예진흥원의 해외 소재 발굴을 위한 창작 지원금을 받아 64일간 {혼불}의 주요무대였던 중국 동북지방과 심양(봉천), 목단강 일대를 돌아보고 조선족을 만나 이민사를 알아보았다.
1994년 2월 미국 일리노이주립대학교 동양학연구소 초청강연.
3월 미국 시카고대학교 ‘한국을 사랑하는 교수와 학생들의 모임' 초청강연.
1995년 3월 뉴욕주립대학교 스토니브룩 한국학회 초청강연.
강연문 [나의 혼, 나의 문학]이 한국학과 고급 한국어 교재로 채택됨.
10월 시카고 노스팍 칼리지 한국학연구소 초청강연.
아이오와 대학교 동양학연구소 초청강연.
뉴욕주립대학교 스토니브룩 한국학회 및 미동부 문인협회 초청강연.
1996년 12월 {혼불} 제1~5부(전10권) 출간(도서출판 한길사 刊).
1997년 7월 14일 한길사 제정 제11회 단재상(丹齋賞) 문학부문 수상
‘작가 최명희와 혼불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 발족.
8월 30일 전북대학교 명예문학박사학위 받음.
10월 9일 제16회 세종문화상(문화부 주관) 수상.
11월 8일 국립국어연구원 초청강연( {혼불}과 국어사전 ).
이 내용이 국립국어연구원의 {새국어생활} 1998년 가을호에 실렸다.
12월 전라북도 예향운동본부에서 주는 전북 예향대상을 받았다.
1998년 1월 12일 제15회 여성동아대상(동아일보사) 수상.
6월 1일 호암상(호암재단) 예술부문 수상.
12월 11일 지병인 난소암으로 영면
12월 15일 전주시민의 장으로 장례식을 치른 뒤 전주시 덕진동 전북대학교 예술대학 뒷산에 묻혔다.
1999년 12월 교보문고가 각 분야 전문가 100명에게 조사의뢰 ‘90년대 최고의 책'으로 선정.
12월 4~5일 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현대문학이론학회 공동 주최 추모 1주기 전국학술대회
{혼불}의 작가 최명희의 문학세계(전북대학교)를 개최.
2000년 10월 20일 옥관문화훈장 수상.
2004년 10월 20일 소설 {혼불}의 배경지 남원시 사매면 서도리 노봉마을에 “혼불문학관”이 개관 되었다.
문학관을 떠나 마을로 내려오니 종가로 가는 이정표가 보인다. 차 한 대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은 도로라서 마을 입구에다가 주차를 하고 번거롭지만 걸어 올라가기로 하였다. 마을 아주머니의 구수한 사투리 인사도 받으면서 700m쯤 오르니 종가의 대문이 나온다.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가니 또 하나의 문이 나온다. 그리고 마당에는 누전으로 인한 화재의 잔해가 아직도 조금은 남아 있고 주춧돌만 쓸쓸하게 기둥을 세우고 있었다. 앞마당 가에는 주인 잃은 동백과 자목련이 슬픈 모습으로 눈인사를 하면서 반긴다. 노봉서원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뒤쪽으로 올라가니 그곳에도 빈터에 주춧돌만 남아 있었다. 나는 혼불을 다시 새기면서 10권을 모두 읽어보아야 하겠다는 다짐과 함께, 글을 쓰고자 하는 자신의 자세를 다시 정립해야 되겠다는 각오를 세우면서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종가 들어가는 입구
화재가 난 집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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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기행에 좋은 내용 소개를 감사합니다. 우리 어린 선상님과 연세 많은 내가 동행 했으면 좋을 번한 곳이었습니다. 다음엘랑 나도 좀 데려가 주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