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할 일꾼 MD사역자 (마 9:35-38)
35.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37.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38.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 본문 강해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하신 수많은 사역과 예수님의 뒤를 이어 이 일을 감당할 ‘추수할 일꾼’에 대한 말씀입니다.
35절) 예수님께서는 모든 도시와 마을들을 두루 다니시면서 그들의 회당에서 1) 가르치시며 2)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3)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습니다. 이것이 초기 예수님의 대표적인 3대 사역입니다. 마태복음 4장 23절에도 같은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마 4:23)
마태는 예수님의 초기 사역 세 가지를 중심으로 마태복음을 요약해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광야에서 40일 동안 사탄의 시험을 물리치시고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가장 먼저 천국 복음을 전파하신 내용입니다. 마태복음 4장 17절입니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리신 것이 아니라 은혜가 필요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셨습니다. 여기서 ‘두루 다니사’ 라는 말은 빠짐없이 이곳저곳을 다 방문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편견 없이’ 두루 다니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기피하는 사마리아에 가서 전도하셨고, 이방인의 고을에도 찾아가 전도하셨고, 또 예루살렘 주민과 지도자들도 전도 대상자로 삼으셨습니다. 지역과 사람에 대한 편견 없이 동등하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딤전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또한 ‘두루 다니사’ 라는 말은 열심히 사역하셨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쉬지 않고 사역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열심은 불쌍한 죄인들을 어찌하든지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시려는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님을 본 받아서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눈높이 전도’를 하였습니다. 고전 9:19-23절 말씀입니다.
“19.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0.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23.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또한 ‘두루 다니사’ 라는 말은 전도뿐만 아니라 세심하게 양육하셨다는 뜻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노골적으로 배척하는 동네 외에는 또다시 그곳에 가서 돌보신 예가 많습니다. 갈릴리 지역은 수없이 순회하셨고, 예루살렘에도 반복하여 가셨습니다. 갈릴리와 예루살렘으로 오가는 과정 중에 가신 동네도 또 가셔서 사람들을 돌보셨습니다.
전도보다 중요한 것은 정착입니다. 한 번 전도하여 회개시키는 일도 중요하지만 계속 심방하여 돌보고 격려하여 믿음을 정착시키는 일은 더 중요합니다. 마치 농부가 그 뿌린 씨가 자라는 것을 돌보듯 성도들은 계속해서 돌아보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최선을 다해 열심히, 편견 없이, 그리고 세심하게 사람들을 돌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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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절)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예수님의 사역을 참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만들었던 비결이 본문에 등장합니다. 무리를 보시며 불쌍히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보시며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 그들을 향한 목자의 마음을 품으셨습니다. 목자의 마음으로 말씀을 가르치시고, 바로 그 목자의 마음으로 복음을 선포하셨고, 바로 그 목자의 마음으로 모든 질병을 치유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핵심은 가르치심과 복음전파와 치유하심 속애 담겨 있는 참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은 동일한 마음으로 십자가 사랑, 성령의 감동, 즉각 순종으로 무장된 MD사역자들을 통하여 목자 없는 양과 같은 사람들에게 천국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말씀을 가르치시고, 치유의 능력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또 여기서 ‘불쌍히 여긴다’는 말은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동정심’을 뜻합니다.
그 당시 유대 서민들의 삶은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로마 제국은 각종 세금 명목으로 재산을 수탈했고, 유대 종교지도자들도 종교적 명분으로 서민들의 돈을 뜯어내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통치자였던 분봉왕 헤롯 왕조는 사치와 낭비와 방탕으로 날을 지새우며 백성을 돌보는 일에는 아예 무관심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환경 속에서 유대 서민사회는 각종 병자들과 거지들이 들끓는 비참한 사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고통당하는 백성들을 ‘목자 없는, 길 잃은 양’ 으로 보시며 안타까워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양을 치는 목자들이 양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십니까? 목축으로 살아가는 목자들에게는 가축이 곧 생명의 기반이기 때문에, 마치 자기 가족과 똑같이 사랑하고 돌봅니다. 어린 양들을 자기 처소에서 재우는 예도 많고, 사나운 짐승이 공격하면 목숨 걸고 싸워서 지킵니다. 그리고 늘 양들의 상태를 살펴본 후, 병이 들었는지 탈이 났는지를 가립니다. 자신은 땡볕에 있을지라도 양들은 그늘지고 시원한 좋은 곳에 둡니다. 요한복음 10:11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여러분, 우리 예수님은 언제나 이런 ‘목자의 눈’으로 우리들을 바라보십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고난에 빠지게 되면 ‘창자가 아프도록 걱정’하시는 분입니다.
이런 목자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양육하고 보호하고 계시는데 우리가 무엇을 염려하고 걱정하겠습니까?
그런데 37-38절에서 예수님은 추수할 것은 많으나 일꾼이 적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목자의 마음으로 무리를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9장 37절입니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두 가지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추수할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추수할 일꾼이 적다는 것입니다. 추수할 것이 많습니다. 추수할 때를 맞이한 농부의 심정을 상상해보십시오. 그것은 해변에서 수많은 모래알을 바라보는 피서객의 마음과 다릅니다. 해변에 있는 수많은 모래알도, 논과 밭에 널려있는 곡식알도 많다는 점에 있어서는 동일합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해변에 있는 수많은 모래알을 보면서 마음이 조급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추수할 곡식이 논이나 밭에 가득한 모습을 보면, 농부는 마음이 조급해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농부에게 있어서 논과 밭에 널려있는 곡식 하나하나가 너무도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모래알이 많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추수할 곡식이 많다고 말씀하셨지요. 예수님 주변으로 수많은 사람들, 성경의 표현대로 무리가 몰려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 한 번도 그들을 해변의 모래알과 같이 생각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지금 당장 추수하고, 지금 당장 그들의 마음을 붙잡아주어야 한다는 농부의 심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추수할 곡식은 많은데 무엇이 없습니까? 추수할 일꾼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사셨던 시대의 이스라엘은 종교가, 곧 유대교가 국가를 운영하는 가장 중요한 이념이자 정치 조직이었습니다. 당시 유능한 사람들은 모두가 유대교에 입문하였고, 유대교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 가운데 유능한 사람, 똑똑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추수할 일꾼이 없다고 한탄하십니다. 예수님 시대 유대교 지도자들은 추수를 기다리는 무리들에게 추수하는 일꾼이 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왜, 무엇이 부족하여 예수님 시대 유대교 지도자들은 추수할 일꾼이 될 수 없었던 것입니까? 그들에게 성경 지식이 부족했습니까? 그들이 정기적으로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까? 그들이 구제를 하지 않아서 일까요? 그들이 종교적인 혹은 정치적인 조직이 없어서입니까? 아닙니다. 그 모든 것에 있어서는 완벽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결정적으로 없었던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마음, 곧 목자의 심정이 없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오늘날 우리 교회 성도들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필요로 하는 일꾼은 머리가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필요로 하는 일꾼은 성경 지식이 많은 사람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필요로 하는 일꾼은 사회적으로 출세한 사람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필요로 하는 일꾼은 무리를 바라보며 추수할 알곡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 사람들을 보면서 목자의 마음으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일꾼을 위한 기도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 교회를 돌아보면 ‘하나님, 우리 교회의 목사님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시네요.’ ‘하나님, 우리 교회의 중직자들이 문제입니다. 그들도 우리를 예수님처럼 사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우리 교회 소그룹 지도자들이 문제입니다. 그들이 우리를 목자의 마음으로 사랑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불평하실 수 있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불평하라고 말씀하지 않고 교회의 일꾼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9장 38절입니다.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물론, 이 구절은 추수할 일꾼을 새롭게 보내달라는 기도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MD사역 훈련을 받고 보면 먼저 우리가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일꾼인 ‘추수할 일꾼’, 곧 목자의 심정을 품은 일꾼이 되도록 기도하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이와 같은 교회였으면 좋겠습니다. 성도들이 교회의 일꾼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에 세워진 일꾼들이 목자의 심정으로 교회를 바라보며, 우리 교회의 성도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 곧 목자의 심정을 품은 일꾼으로 세워지기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일꾼이 적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무려 수만 명에 이르렀으나 정작 예수님과 같이 사역하는 일꾼들은 열두제자와 70여 명이 전부였습니다. 그들 핵심 제자들 외에 막달라 마리아처럼 물질로 예수님을 돕는 이들도 있었으나 아주 소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대교의 권세가 두려워 예수님을 적극 돕지 못하는 자들도 많았습니다.
그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께 도움을 바라는 자들이었습니다. 먹을 것을 바라고 따르고, 표적 행하는 것을 구경하려고 몰려들고, 각종 병을 고침 받고자 따르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헌신할 일꾼들이 너무나도 부족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현상은 오늘날 교회에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현대교회의 성도들 중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1. 소수의 적극적인 일꾼들과
2. 소수의 가시역할하는 자들과
3. 관망하는 성도들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성도들이 목회자의 일에 적극적으로 협조도 하지 않고, 반대도 하지 않고, 관심 없이 그저 예배에 참석하는 ‘관람객 성도들’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자들 중에서도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멀리 떨어져 구경만 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오직 사도요한과 몇몇 여인들만이 십자가 밑에까지 갔었습니다.
여러분, 지금을 ‘군중들 시대’가 아니라 ‘관중들 시대’ 라고 부르는 사회학자들도 있습니다. 자신은 참여하지 않고 그저 영화나 스포츠 경기를 관람하듯 사회 문제를 관망만 하는 이들이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결코 하나님의 일에 관람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자들은 하나님께 큰 책망을 받게 됩니다. 나만 죄 안 지으면 된다고 여기는 것은 바리새적 종교관입니다. 적극적으로 진리에 참여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삶에 신앙의 열매를 남기는 것이 진정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결코 관람객 입장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38절 말씀처럼, 먼저는 내가 추수할 일꾼이 되고 또 하나님께 추수할 일꾼을 보내주소서 기도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모여 있는 휴양지가 아니라, 복음으로 복음화 된 복음의 일꾼들이 또 다른 새로운 복음의 일꾼을 기르는 곳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복음의 일꾼들이 되시고, 또 이러한 복음의 일꾼들을 길러내는 우리교회가 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