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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양의 지브롤터'거문도 도보 여행기
- 언제:2018/02/16-17(1박2일)
거문도 트레킹 흐름도
-동선 :여수여객터미널->거문도 여객터미널(고도)->
삼호교->덕촌->불탄봉->신선바위->기와집 몰랑->보로봉->
목넘어->수월산 샛길->수월산 동백터널->거문도 등대->관백정
녹산등대-고도민박(1박)
다음날->유림해변->기와집 몰랑->보로봉->
거문도 여객터미널->여수여객터미널
제주에서 바다 건너 온 봄이
제일 먼저 온기를 풀어놓는다는 섬,거문도에는
2월 중순이었지만 동백꽃이 화사했습니다.
유난히 추웠던 올 겨울,고양 파주 지역은 유독 추위가 더 심한 곳인데
겨우내 한파에 지친 심신을 위로하고 우수와 경칩이
머잖았지만 아직은 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 봄을 마중하러
지난 설, 짧은 연휴에 어렵게 그 섬으로 들어갔습니다.
거문도는 먼 섬이었습니다.
다도해 해상국립공원 중 최남단, 전라남도 여수의 끝에 위치한 거문도는
방송 날씨 예보에서 들리던'남해 동부 먼 바다'에 속하는 곳으로
여수에서 114.7km,제주에선 110km 떨어진 섬으로
여수연안여객터미널에서 쾌속선으로 약 2시간 20여분을 내달려야
닿을 수 있습니다.
이 섬이 '거문도'라 불리게 된 유래는 확실치 않지만
섬에 뛰어난 문장가들이 많이 살아
'거문(巨文)'이라 칭했다는 일화가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었습니다.
거문도는 제주도와 여수의 중간에 위치하여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섬이었습니다.
이런 연유로 거문도항은 옛날부터 왜적들을 비롯한 열강의 침입을
자주 받아왔는데 특히 러시아는 이곳을'동양의 지브롤터'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외세의 대립이 극심하던 구한말,영국은 러시아의 남하를
막는다는 구실을 내세워 거문도를 약 2년간 불법 점거했습니다.
영국군은 이 섬을 '해밀턴 섬'이라고 불렀습니다.
(거문도 전경 드론 촬영사진 출처:한겨레)
거문도는 동도,서도,고도 등 세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트레킹 코스는 거문도 선착장이 있는 고도에서
삼호교를 건너 서도에 있는 녹산등대에서 거문도등대까지
산능선을 따라 수려한 명품길이 이어집니다.
거문도로 들어가는 배는 여수 여객터미널에서 오전,오후
두편이 운항하는줄 알고 갔는데 년중 2월에만!
하루에 한번,오전 7시 40분에 출항하는 배 한편이 있었습니다.
거문도로 운항하는 배는 갑판으로 나갈 수 없는 쾌속선으로
날씨에 매우 민감해서 조금만 바람이 심해도 결항이니
미리 출항 여부를 확인하고 출발하는 것이 좋습니다.
여수여객터미널 오션호프해운(주) 061-662-1144
여수에서 출항한 쾌속선은 일렁이는 바다를 미끄러지듯 달려
거문도 여객터미널이 있는 고도에 뱃머리를 댔습니다.
동도와 서도에 비해 고도는 작은 섬이지만
관공서와 숙박시설,음식점 등은 이곳 고도에 밀집되어 있습니다.
설 연휴여서인지 인적은 뜸했고 문을 닫은 가게들이 많았습니다.
일반적으로 거문도에 내리면 먼저 백도 유람선을 타고
백도를 관광하는데 명절이라 여행객이 드물어
백도 유람선은 발이 묶여 있었습니다.
불탄봉 가는길
바다 건너 거문도 여객터미널이 있는 '고도'에서
아치형의 다리 '삼호교'를 건너 이곳 '서도'로 건너왔습니다.
거문중학교 담벼락 옆으로 난 조붓한 오솔길을 따라
불탄봉으로 갑니다.
거문도는 시나브로 겨울이 가고
시나브로 봄이 움트고 있었습니다.
불탄봉으로 오르는 길섶에는 거문도 특산물이라는
해풍쑥이 쑥쑥 자라고 있었습니다.
옛부터 불이 자주 나서 섬사람들이
'불탄봉'이라 부른다는 산정에는 소나무 한그루가
거문도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불탄봉에 오르니 거문도 바다에는 벌써 봄이 와있었습니다.
유독 혹독했던 지난 겨울을 벗어나기 좋은 봄날이었습니다.
거문도는 저 건너편 동도와,가운데 고도, 불탄봉이 있는 이곳 서도 등
세개의 섬이 서로 마주 보고 있어 그 안쪽 바다(內海)는
늘 잔잔한 편입니다.
불탄봉에서 거문도 등대로 가는 능선길은 억새군락지였습니다.
지난 가을의 잔영이기도 한 마른 억새풀들이
혹한의 추위를 견뎌내고 봄을 맞고 있었습니다.
여행도 병인지라 설명절에 고향집에 잠깐 들러 가족들의 안부만 묻고
서둘러서 찾아온 섬은 의외로 한적하고 호젓했습니다.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제대로 가기만 한다면
느리게 가는 것도 괜찮습니다.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얼마나 천천히 가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나는 압니다.
누군가 끌어주고 밀어주고 일으켜 세워준다고 해도
결국 전진하려면 스스로의 힘으로 가야한다는 것을.
내 속도,내 느낌으로 밀고 나가야 한다는 것을.
닥쳐오는 바람을 피하지 않고 그 부는 바람에 몸을 맡기는 것,
삶이 허락하는 한 삶속에서, 빛이 허락하는 한 빛 속에서
그렇게 흔들리는 것,
지난 겨울 혹한의 삭풍을 견디고 몸을 한껏 낮춘
마른 억새풀들이 조금만 추워도 호들갑을 떠는
인간의 나약함을 일깨우고 있었습니다.
바다가 시원스럽게 조망되는 산능선 길을 따라 걷다보면
군데 군데 동백숲이 나옵니다.
거문도는 심어놓은 동백 말고 자연 군락으로는
국내 으뜸으로 알려진 섬답게 동백숲이 지천이었습니다.
앞에 보이는 산능선이 '기와집 몰랑'이라 불리는 곳입니다.
기와집이라해서 기와집이 있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바다에서 보면 마치 기와집처럼 보인다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몰랑'은 산 마루를 뜻하는 남도의 사투리로
(여수와 가까운 광양지역에서는 '몬당'이라고도 함)
기와집 형태의 산마루를 뜻합니다.
어눌하게나마 홀로움을 즐길 수 있다면
길이란 낡음도 늙음도 낙담도 없는 곳
- 황동규 시인
아득한 절벽아래,바다가 고즈넉합니다.
늘 그렇듯이,조금은 쓸쓸한,그럴때가 있기 마련입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새로운 장소는 새로운 사유,새로운 가능성을 가져다 준다.
세상을 탐험하는 것은 마음을 탐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리고 걷기는 세상을 여행하는 방법이자
마음을 여행하는 방법이다.
-리베카 솔닛,<걷기의 역사>(김정아 譯,민음사) 중.
보로봉의 돌탑은 지난 겨울 거센 해풍에도 끄덕없는 모습으로
제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서있었습니다.
해풍과 염분에도 잘 견딘다는 동백나무 숲으로 들어가니
한낮에도 어두울 정도로 울창했습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빛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사무치는 것은 봄으로 온다고 했습니다.
늘 새삼스럽지만 지나고 나면,견디고 나면 결국 봄은 옵니다.
한겨울 혹독한 추위를 견디고 뜨거운 마음 하나로 피워낸
화사한 동백꽃이 붉디 붉은 자태로 보는이의 마음을 설레게 합니다.
내 삶의 모든 것,
고요 속의 바스락처럼 바스라지고 있다.
허나 후회는 말라.
부서짐은 앞서 무언가 만들었다는 게 아니겠는가
만든 것은 결국 안 만든 것으로 완성된다.
꽃이 지며 자기 생을 완성하듯이...
- 황동규 시인
살아있는 동안은
누구에게나 꽃피울 자리는 있다
피운다는 것은 쓰러지기 위한 눈부신 허무
향기를 피우고
곰팡이를 피우고
바닥의 통증까지 밀어 올리고 나면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도둑처럼 사라진다
피우는 것들은 모두
어둠을 본적지로 두고 있다
- 송지은,<피운다는 것은>중
언제나 바다는 그 자체로 좋습니다.
신선바위 아래 드넓은 바다에는 봄볕이 눈부셨고
이따금 훈풍이 불었습니다.먼 바다에는 부드러운 바람이 일고
수평선으로 시선이 이끄는 풍경은 사유를 강요합니다.
아직은 이른 봄바다를 거침없이 달려가는 저 배처럼
지치고 힘들더라도 꾸준히 가다 보면 또 한 번 그 알 수없는
인생의 굴곡을 넘어 행운이 찾아오리라 믿습니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보는
너,먼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이성부,<봄>
신선바위를 지나면서 지금껏 걸어온 길들을 뒤돌아봅니다.
저 멀리 불탄봉아래 억새능선이 보입니다.
고즈넉한 섬의 풍경은 고요와도 같은 평안을 안겨줍니다.
내가 나를 다독이는 시간은 늘 여행에서였습니다.
오래도록 이 햇빛을,이 바람을,이 순간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동백숲은 겨울에도 제 스스로 푸르릅니다.
인간은 다만 그 아래에서 쉬어갑니다.
"나는 걸으면서 나의 가장 풍요로운 생각들을 얻게 되었다.
걸으면서 쫒아버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생각이란 하나도 없다."
-키레르케고르
동백 숲은 동박새들의 소리로 요란했습니다.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이 꽃에서 저 꽃으로 옮겨 다니며
숲의 정적을 깨고 있었습니다.
외로울 수 있습니다.그렇다고 꽃이 피지 않는것은 아닙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
넘어질 듯 넘어지지 않고,그리고 다시 시작하고,
그렇게 거듭하는 것.
바로 이것을 두고 걷는다고 한다.
균형을 잡고 땅 위를 또한 말 속을
그리고 생각 속을 이동하는 것."
- 걷기,철학자의 생각법(로제 폴 드루아 지음,백선희 옮김,책세상)에서
"누구든 걸음걸이를 보면 그가 자기 길을 찾았는지 알 수 있다.
목표에 가까이 다다른 사람은 더 이상 걷는 게 아니라 춤을 춘다."
- 프리드리히 니체
숲속을 나와
다시 숲속으로
나는 천국에서 걷는 걸음을 모르지만
이런 길은 이렇게 걸을 거다
가다가 하늘을 보고
가다가 바다를 보고
가다가 꽃을 보고
가다가 새를 보고
머리로 생각하지 않아도
머리로 고민하지 않아도,
웬일로 나를
나무가
꽃이
새가
혹은 벌레가
아직 살아 있는 나를
행복의 길로 몰고 가는지 모르겠다
너무 행복해서 죄스럽다
- 이생진,<거문도 등대로 가는 길 1>
동백터널로 이어지는 앞에 보이는 산은
'수월산'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닷물이 넘나든다는'목넘어'위에 있다 해서 붙은 명칭이라고 합니다.
수월산에는 동백나무가 가장 많이 분포하고 상록 교목인
생달나무,후박나무,두릅나무 등 다양한 수종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잘못된 화살표를 따라갈 수 있다
아니 삶의 길,곧 인생의 카미노에는
너무 많은 색깔의 화살료가 있는 지도 모른다
혹은 아예 화살표가 없을 수도 있다
따라서 정말 중용한 것은 자신만의 방향감각이다
- 정진홍,<내안의 나침반을 믿고 나아가라>중
거문도 등대로 가는 수월산 동백숲에서 내려다본 '목넘어'입니다.
건너편 산봉우리는 보로봉이고 해안 절벽을 따라 난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길이 거문도 트레킹의 하이라트 구간입니다.
누구나 마음속에 등대 하나쯤 가지고 살아갑니다.
살면서 가끔 답답하고 앞이 잘 안보일 때,어둠속을 헤맬 때,
길을 밝혀줄 등대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그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를 내 마음속의 등대를 찾아
홀연히 길을 떠납니다.
삶의 어떤 부분이든 저 등대 같은 가치를 강직하게 지켜 나갈 수 있다면
적어도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는 순간을 살 수 있다고 믿습니다.
거문도 등대로 향하는 수월산 동백터널을 걸어보니
왜 이 섬을 '동백섬'이라 부르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내 있던자리를 잠시 떠나와 낯선 섬에서 또 알게 되었습니다.
떠난 다는 일,떠나보면 안다는 것들을!
나는 꽃이 피기 직전의 나날을 사랑한다.
어떤 빛과 어떤 시간들에서만 볼 수 있는 불그스름함.
어떤 아우라로 둘러싸여 있을 때를.
- 작가 프랜신 프로즈,<Real Simple>중 <The Giving Tree>에서
추위가 매울수록 봄꽃이 화사하다 했던가요.
유난히 추웠던 올 겨울,혹한을 견딘 동백꽃이 유난히 붉습니다.
1904년 준공된 우리나라 1호 거문도 등대는
촉광이 25마일까지 비친다고 합니다.
남해안 최초의 등대로 백년 넘게 남도의 뱃길을 말없이 지켜왔습니다.
거문도 서도 북쪽에 자리한 녹산 등대와 더불어 서도 남단을 밝힙니다.
배치바위
'백도를 바라본다'는 정자'관백정'입니다.
"어디로 갈지 보기 위해서는 잠시 멈춰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의 삶에서,당신이 볼 수 있는 세상에서,
당신이 지금 가장 신경 쓰고 있는 것들에서 잠시 나와봐야 합니다.
그리고 집을 찾아야 합니다."
- 피코 아이어,테드 강연 <당신의 집은 어디인가요?>중에서
이제 남은 것들은 자신으로 돌아가고
돌아가지 못하는 것들만 바다를 그리워합니다.
관백정에서 바라본 백도가 바다위에서 신비롭습니다.
섬 전체의 봉우리가 백(百)개에서 하나가 모자라
'백도(白島)'라는 지명이 붙었다고도 하고
멀리서 보면 섬 전체가 흰빛을 띠고 있다고 해서 '백도'라고 부릅니다.
거문도 등대까지 트레킹을 마치고 목넘어로 다시 걸어 나와서
녹산등대까지는 택시를 불러 이동했습니다.
목넘어~녹산등대 입구 (택시요금 1만5천원)
외로운 사람이 외로운 사람을 찾는다
등대를 찾는 사람은 등대같이 외로운 사람이다
- 이생진,<녹산 등대로 가는 길3>중
거문도는 거문도등대가 워낙 유명하지만
거문도로 들어가는 입구를 지키고 있는 이곳 녹산등대도
이국적인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습니다.
녹산(鹿山)은 말 그대로 사슴을 닮은 산입니다.
바다로 툭 튀어나온 녹산 끝지점에 녹산등대가 우뚝 솟아 있습니다.
녹산등대는 1958년 처음 불을 밝힌 무인 등대입니다.
녹산 등대에서 본 거문대교
공간 속으로 저무는 것들이 시간 속으로 저뭅니다.
모든 저무는 것들은 애잔합니다.
"신지끼"라 불리는 거문도 인어는
하얀 살결에 길고 검은 생머리를 하고 있으며
주로 달 밝은 밤이나 새벽에 나타나 절벽에 돌을 던지거나
소리를 내어 어부들을 태풍으로 부터 구한다고 하는 전설이
구전되고 있습니다.
녹산등대를 한바퀴 돌아 내려오면서 바라본 장촌마을입니다.
군데군데 그물이 쳐져 있는 곳은 해풍쑥밭 입니다.
저 마을에서 숙소가 있는 고도까지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걸어갔는데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왼쪽 엄지발가락이 까맣게 멍이 들었습니다.
결국 발톱을 잘라내야 했습니다.ㅠㅠ
산길이나 흙길은 제아무리 많이 걸어도 괜찮은것 같은데
포장된 도로는 인간의 보행에 많은 무리를 준다는 것을
이번 거문도 도보 여행에서 새삼 깨달았습니다.
녹산등대를 걷고 장촌 마을에서 고도까지는 택시를 이용하면 편리합니다.
거문도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운행하는 택시 두대가 있습니다.
걷다 지치면 산능선 아래로 내려와 전화하면 바로 달려옵니다.
거문도 택시 010-3607-1681
거문도 해풍쑥은 해양성 기후로 인해 공기가 마르지 않고
염기가 섞인 해풍과 해무를 맞고 자라기에 미네랄이 풍부하다고
알려져있습니다.
누구든 그 자체로서 온전한 섬은 아닐지니
모든 인간은 대륙의 한 조각이며 또한 대양의
한 부분이어라
- 존 던,<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중
내가 沿岸(연안)을 좋아하는 것은 오래 품고 있는 속마음을
나에게조차 내어주지 않는 일과 비슷하다
비켜가면서 흘러들어오고 숨으면서 뜨여오던 그날..
잘 보이지도 않는 작은 섬들의 이름을 말해주던
당신이 결국 너머를 너머로 만들었다
- 박준,<세상 끝 등대1>중
이튼날,
날씨는 화창했지만 바람이 세차게 불어 풍랑주의보가 내려져
여수에서 아침에 배가 출항하지 못해 오전 10시에 여수로 나가는
배가 결항 되었습니다.
덕분(?)에 반나절의 여유가 생겨 어제 미처 다보지 못했던
기와집 몰랑과 신선바위를 다시 찾아갔습니다.
꽃은 그냥 피지 않습니다.
엄혹한 바람과 한설의 시간을 견녀낸 꽃눈만이
이렇게 화사하게 개화할 수 있습니다.
길가에 떨어진 저 한 송이 꽃이 가벼워 보일지는 몰라도
최선을 다해 자신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바닥으로 떨어져도 결코 가벼운 삶이란 없습니다.
모든 삶에는 제 각각의 무게가 있습니다.
살아있는 모든 존재에게는 다시 시작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다시 시작할 때 모든 출발점은 좌초됐던 지점입니다.
새로운 시작이 그렇게 마지막까지
단 하나의 꿈을 가지고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도보로 하는 산책은 반드시 혼자 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유가 그 내재적 속성이기 때문이고 마음내키는 대로
발걸음을 멈추거나 계속하여 가거나 이쪽으로 가거나
저쪽으로 가거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스티븐슨
햇살이 유난히 찬란하여 내 마음 속에 머금던 날이었습니다.
바다 가까이에 가만히 앉아 나혼자 마주하는 바다,햇살,하늘..
푸른바다를 따라 난 언덕길과 동백숲으로 이어지던 길은
이곳 기와집 몰랑에 이르러 절정에 이릅니다.
어제도 걸었던 길이었지만 새삼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는
이제 곧 이 섬을 떠나야만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행지가 가장 좋아지는 순간은 그곳을 떠나기 직전입니다.
기와집 몰랑에서 바라본 거문도가 유난히 적막해보입니다.
세월이 흐른 뒤 어렴풋하게 깨닫습니다.아니 겨우 짐작합니다.
길을 잃어봐야 자신만의 지도를 그릴 수 있다는 것을.
" 본 것을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결코 허무하지도,
생각에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며 고독하지도 않을 것이다."
- 빈센트 반 고흐
어제 그냥 지나쳤던 신선바위에 오르기 위해 능선길에서
조붓한 돌계단 길로 내려섭니다.
거문도 트레킹을 하는 사람들의 태반은 이곳을 지나칩니다.
나 역시 어제 길을 걸으면서 그냥 지나쳤던 곳이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아침 배가 결항되어 운좋게 오를 수 있었습니다.
거문도 트레킹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소중의 명소입니다.
마치 바다 한가운데서 서서 거문도 등대를 마주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수평선처럼 누워있는 세계에서
검은 돌고래가 솟구쳐 오를 때
무릎이 반짝일 때
우리는 양팔을 벌리고
한없이 다가간다
- 김행숙의 시,<다정함의 세계>
어쩌면 내 존재의 실체는
저토록 푸른 봄바다에서 잉태되었는지도 모릅니다.
봄날이어서,봄볕이어서,더 적막하기만 한 바다를
무심히 바라보니 지금 내가 세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하고 가슴설레는 일인지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수월산 너머로 보이는 백도는
푸른 바다위에서 불끈 솟은 형상으로 굳건하게 서있었습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젖다 다시 홀로 스스로의 길로
걸어 돌아갈 때 언뜻 스쳐지나가는 부드러우면서도
삐걱거리는 외로움을 마음에 새겨두라
- 박주택,<무인도>중
나 언젠가 당신을 만날 때 꽃 봉우리 맺혀 있기를!
넘실대는 쪽빛 바다와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진초록빛 잎새 사이에
선연하고도 붉은 동백꽃들이 과하지 않게 단아하게 피었습니다.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바다가 있고 저마다의 파도가 있기 마련입니다.
낯선 곳에서 느끼는 황홀과 신비,나를 맞이하던 드넓은 바다와 빛의 침묵.
풍경속의 섬과 등대는 저 자신만의 침묵을 간직합니다.
바다가 있었고 봄이 바다에 있었고 기억또한 바다에 남았습니다.
"움직이는 물은 그 물 속에 꽃의 두근거림을 지니고 있다"
- 가스통 바슐라르,<꿈꿀 권리>(이가림 역,열화당출판사 1990)
사람들 사이의 가장 진실한 접촉은 말 없는 마주봄.
표면적 의사의 부재,마음 속 기제와 흡사한,
침묵안에서의 신비한 소통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뿐입니다.
- 에밀 시오랑
호젓했지만 조금은 쓸쓸했던 봄볕 찬란한 바다와
아직은 이른 봄바다를 스쳐오던 온화하고 부드러운 바람의 은총!!
거문도는 아름다웠고 눈부셨습니다.
이른 봄의 바다는 그 자체로 위안이었습니다.
겨우내 움추렸던 가슴 깊숙한 곳의 응어리까지 따스하게 어루만져주던 바다!
연일 미세먼지로 숨쉬기도 버거운 번잡하고 잡다한 일상에서
여행을 다녀온지 벌써 2개월이 훌쩍 지났는데도
거문도의 그 호젓한 바다가 사무치게 그리운 까닭입니다.
어쩌면 인생이란 고장난 나침판을 들고 한 생애를 횡단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언제나 그렇듯 바다는 꽃 지듯이 금방 허무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릿한 고독을 달래며 오늘도 난 정처없이 바다로 향합니다.
-끝.
글,사진:윤선한
"우리는 앞을 보고 또 뒤를 보며,
우리에게 없는 것을 갈망한다."
- 퍼시 비시 셸리
-배경음악:영화 "냉정과 열정사이" ost - History
첫댓글 멋지군요
멋진 사진 과
글
감사합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1.04.18 19:34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1.04.19 01:18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1.04.19 07:29
역시.. 멋지네요.^^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1.04.19 01:18
언제나 멋진 글과 사진, 원더풀~~^*^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1.04.18 19:34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1.04.19 0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