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 관리기
류 근 만
‘류 사장님! 이리 따라와 보세요!’
앞서가던 양봉조합 이사장이 뒤돌아보면서 나에게 하는 말이다. 나는 의미를 모른 채 따라갔다. 그는 밭 한구석에 처박힌 관리기 앞에서 멈춘다. “이 관리기를 고철로 팔면 삼만 원은 받겠지요?’ 하면서 날 쳐다본다. 나는 아무리 쓸모없는 관리기라 할지라도 그 가치는 더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옆에 있던 동료 세 명과 힘을 합쳐 흔들어 보았지만 끄떡도 하지 않는다. 주인이 쓸모없어 몇 년씩 밭 구석에 처박아 둔 관리기가 무슨 사연이 있는지도 궁금하다.
핸들을 잡고 이리저리 흔들어 본다. 내가 힘이 없는지 미동도 안 한다. 발에 힘을 주고 바퀴를 탕~ 탕~ 쳐 봐도 마찬가지다. 허리를 굽혀 밑 부분을 살펴봐도 녹슬고 거미줄치고 지저분하다. 모진 풍파에 망가진 흉물, 어쩐지 처량해 보인다.
겉은 멀쩡한데 속내는 도통 알 수가 없다. 낡아서 버려진 것은 아닌 것 같다. 고장이 났으면 고쳐 쓸 수 있는 기계인데!. 고철로 변한 관리기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짠하다.
나는 큰 결심이나 한 듯이, ‘이 관리기 내가 가져가겠습니다. 삼만 원 드리면 되지요’
옆에서 듣고 있던 동료들이 빈정대듯 한마디 한다. 에이! 오만 원은 줘야지! 엿 한 가락 값도 안 된다.’.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겉으로는 웃으면서도 속으로는 관리기를 끌어낼 일이 걱정이다. 집에 돌아오는 내내 관리기가 눈에 밟힌다.
내가 관리기에 집착하는 이유가 있다. 오래전 농사를 지으시던 아버지를 돕느라 쟁기질을 일찍 배웠다. 쟁기를 지게에 지고 소를 몰며 들로 향한다. 논밭을 갈기 위해서다. 소 등에 멍에를 씌운 다음 왼손으론 쟁기를 잡고, 오른손은 소고삐를 잡는다. ‘이랴, 쪄~ 쪄~’,말은 못 하는 짐승이지만 주인 말은 잘 알아듣는다. 쟁기질한 이랑이 자로 잰 듯 반듯하다. 제법 능숙한 솜씨라고 자랑하고 싶을 정도다. 농사를 지으려면 쟁기는 필수품이다.
지금은 기계화에 밀려 쟁기로 논밭을 가는 일은 역사 속으로 숨었다. 아무리 기계화가 좋지만, 나이 들고 기계사용이 우둔한 나에게는 그림 속의 떡이다. 차라리 쟁기로 밭을 갈면 편하겠다는 생각도 한다.
요즘엔 농업기술센터에선 농기구를 무상으로 임대도 한다. 하지만 운반용 소형 트럭이 있어야 한다. 운반 장비가 없는 나에겐 불가하다.
나는 농작물 품종이 다양하고 작은 면적이지만 인력으로 땅을 파고 고르려면 힘에 겹다. 작물을 심을 때는 쇠스랑이나 괭이 삽 등으로 이랑을 만들고 씨앗을 뿌린다. 힘이 버거울 땐 온몸이 땀범벅이 된다. 이럴 땐 체구가 작은 관리기가 제격이란 생각이 들곤 했다. 그러나 관리기를 사려면 경제적 부담도 되기에 이때나 저 때나 저울질하다가 오늘에 이르렀다.
나는 고철값 쳐주고 가져오기로 한 관리기 때문에 잠을 설쳤다. 아침에 일어나 농기계에 식견이 있는 지인에게 전화로 도움을 청했다. 관리기 기어를 중립에 넣고 핸들을 움직여 보란다. 지인의 말대로 핸들을 잡고 밀었다 당겼다 해봤다. 살갑게 움직인다. 나는 핸들을 잡은 채 밀고, 한 사람은 앞에서 끌었다. 밭을 벗어날 수가 있었다. 호박이 덩굴 체 굴러온 기분이다.
운반할 차량을 임차하여, 내 농장 가까운‘농기계수리센터’로 옮겼다.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수리해달라고 부탁했다. 헌 관리기를 분해하여 점검한 다음 수리비 견적서를 핸드폰으로 전송했다. “체인 케이스가 망가져 수리비가 과다하네요.’ 하면서 명세서도 첨부했다. 견적금액이 장난이 아니다. 예상외의 금액이다. 오랫동안 방치된 탓이란다. 수리를 해봤자 얼마나 오래갈지 보장은 할 수 없다고 한다. 어차피 쓸모없는 고철이다. 결국은 운반비만 받고 고물로 처리키로 했다. 고생한 보람도 없이 허사로 끝났다. 그냥 없던 일로 치부하기엔 너무 허탈했다.
그렇다고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다. 농업기술센터로 향했다. 팀장과 상담을 하기 위해서다. 그간의 사정을 설명했더니, 그는 내 마음을 안다는 듯이, 중고 기계를 고르는 요령을 알려주었다. 중요한 것은, 오랫동안 방치된 것은 안 된다는 것이다. 사용하던 것이 좋다. 기계 내부는 겉만 보고 알 수가 없다. 가격도 천차만별이다. 사람을 믿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어렵더라도 발품을 많이 팔고, 설령 매물을 찾아도 직접 시험 운전을 해보고 결정해야 한다. 결론은 좋은 물건을 구하는 것도 운이 따라줘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지인을 통해 옥천군 군서면에 소재한‘신진공업사’를 소개받았다. 전화하고 카톡으로 관리기 사진과 주소를 전송받았다. 관리기를 다룰 줄 아는 지인과 함께 현장으로 갔다. 기술센터 팀장이 알려준 대로 시동도 걸어 보고 꼼꼼하게 살펴봤다. 중고품이지만 말끔히 수리한 것 같았다. 일단 합격점을 줬다.
다음 날 공업사 사장이 관리기를 싣고 내 농장으로 왔다. 사용요령과 부품을 교체하는 방법까지도 자세히 알려준다. 직접 밭에서 시연도 해 준다. 친절하게 설명하면서 기계가 이상이 있을 땐 언제든지 연락을 하라고 한다. 공업사 사장이 떠나고, 나 혼자서 시동을 거는데 잘 안 된다. 옆에서 구경하던 최 사장이 자청해서 도와준다.
최 사장은 내 밭과 인접한 밭주인이다. 나는 재차 시동 와이어를 힘껏 당겼다. ‘통통 통’ 굉음을 내면서 시동이 걸린다. 기어를 일단으로 넣고, 서서히 전진한다. 울퉁불퉁한 이랑이 평평하게 골라진다. 로터리를 치는 것이다. 삼 십 분도 안 걸렸는데, 나 혼자서 온종일 할 일을 끝냈다. 신기하리만큼 편리하다. 기계화의 필요성을 새삼 느꼈다.
나는 사용요령을 익히는 것이 급선무다. 시간만 나면 밭에 가서 시동을 걸고, 텅 빈 밭을 갈았다. 최 사장이 수시로 찾아와 도와주기도 한다. 몇 년 전, 처음 만났을 땐 서먹서먹한 관계였다. 자주 만나다 보니 이젠 절친한 사이다. 사람이든 기계든 자주 만나야 소중함을 안다.
나도 낡아가는 나이가 아닌가? 좋은 사람들 만나 도움도 받고, 비록 발품은 팔았지만, 마음에 드는 물건을 구했으니 운이 좋은 것이 아닌가? 저녁 밥상머리에서 아내와 마주했다. 내가 좋아하는 모습을 본 아내가 한마디 한다. ‘그렇게 좋아요! 잘했어요, 이젠 일하기가 수월하겠네요’ 내 마음을 알아주는 아내가 고맙다. 이 나이에, 있는 관리기도 처분해야 할 판인데, 반대할 줄 알았던 아내가 잘했다고 하니 얼마나 고마운가!
중고품이지만 소원하던 관리기를 구했으니 흐뭇하다. 꼭 필요했기에 원했고, 사고 싶었던 것이기에 기쁜 것이다. 주위에서 도와주고, 내 맘을 알아주니 고마운 것이다. 희로애락(喜怒哀樂)은 큰 데서 오는 것이 아니다. 모두가 사소한 것에서 출발한다.
요즈음 나는 나이가 들면서 철이 드는지 사소한 일에도 집착이 간다. 중고 관리기가 늦게나마 나와 인연을 맺였으니 녹슬지 않게, 닦고 기름칠하면서 오래오래 사용하려 한다. 더 늙기 전에 동고동락(同苦同樂)하면서 잘 지내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
첫댓글 수필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