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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공주시 장기면 당암리의 지명 유래 및 설화
―현, 세종시 다정동 지역의 지명 유래 및 설화
이은봉(시인, 광주대 명예교수, 전 대전문학관장)
1. 머리말
조선 후기에 장기면 당암리(唐巖里)는 공주군 삼기면(三岐面)의 지역에 속했다. 1914년에 추진된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작업에 의해 공주군 삼기면의 당동리(唐洞里), 용암리(龍巖里), 입석리(立石里), 두곡리(杜谷里) 등이 통합되어 당암리라는 이름으로 개편되었다.
당암리는 과거 공주군 장기면의 중동부에 자리해 있는 행정구역의 이름, 곧 법으로 정해진 리(里)의 이름이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이 개편되기 전의 이름인 당동리(唐洞里)와 용암리(龍岩里)에서 당(唐)이라는 글자(字)와, 암(巖)이라는 글자(字)를 따서 당암리(唐巖里)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이 당암리 지역의 경우 세종시로 개편된 이후에는 세종시 다정동이라는 행정명을 얻게 되었다.
과거의 당동리(唐洞里), 속칭 당골(唐谷)은 삼국시대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할 때, 말하자면 웅진(熊津), 곧 공주가 함락될 때 당(唐)나라 군사들의 본대가 주둔했다고 하여 당골(唐谷)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당나라 군사들이 이곳에서 철수할 때 당나라의 장수인 소정방이 당골 근처, 그러니까 속골 뒷산에 있던 용암(龍巖)이라는 바위를 깨부수고 금은보화를 꺼내 갔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1995년에는 공주군이 공주시와 통합되면서 ‘공주군 장기면 당암리’가 아니라 ‘공주시 장기면 당암리’가 공식적인 행정구역의 명칭이 되었다. 당암리의 동남부 경계에는 금강 유역에 형성된 대규모의 들판인 장남평야(長南平野)가 펼쳐져 있었다. 연기군 남면과 연한 동쪽 경계에는 속칭 모듬내라고 부르는 제천(濟川)이 흘렀고, 서부 경계에는 대교천(大橋川)이 흘렀는데, 동남쪽 평야의 산기슭 일대에 여러 촌락이 들어서 있었다.
세종시가 들어서면서 지금은 다 사라지고 없어졌지만 당암리의 동부와 서부에는 각각 해발 고도 60m와 100여m의 산지가 형성되어 있었다. 동부 산지의 동남쪽 들판, 곧 장남 평야에는 꽃소내, 곧 방축천과 합쳐진 모듬내, 곧 제천이 흘렀다. 북서쪽에서 동남쪽으로 흐르는 모듬내, 곧 제천은 장남 평야를 가로지르며 나성 뒤쪽으로 흐르다가 금강에 닿았다. 이 냇물을 북서쪽으로 거슬러 오르다가 보면 당암리를 지나 서쪽으로 제법 큰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이 냇물(모듬내)의 이름을 따라 제천리라고 불렀다.
이 냇물 제천 곧, 모듬내는 세종시가 건립된 지금까지도 세종시의 중요한 하천이 되어 있다. 애초에는 이 제천이 공주군 장기면 당암리와 연기군 남면 종촌리를 나누는 경계로 작용했었다. 제천은 당암리 두곡(杜谷, 막은골) 아래쪽을 지나면서 갈운리 및 종촌 쪽에서, 그러니까 북서쪽에서 흘러 내려오는 지천, 그러니까 방축천(芳丑川), 곧 꽃소내를 받아들이며 금강으로 흘렀다.
모듬내, 곧 제천은 금강을 향해 흘렀는데, 금강은 본래 북동쪽에서 남동쪽을 향하고 있었다. 1950년대 이후에는 제천은 물론 금강도 좌우에 인공제방이 쌓이기 시작했다. 세종시가 들어선 이후에도 이 시냇물 제천(모듬내)은 큰 변화 없이 흐르고 있다. 서부 산지 너머에서 흐르던 대교천(大橋川)은 북서에서 남동 방향으로 금강을 향해 흘렀는데, 세종시로 개편되기 이전에도 이 대교천의 유역에는 인공제방이 축조되어 있었다.
2009년 12월 31일 현재 당암리의 면적은 1.76㎢인데, 총 38세대에 81명(남 42, 여 39)의 주민이 살고 있었다. 총 경지 면적은 75.89㏊로, 면 전체 면적의 5.77%를 차지했다. 대교천 주변의 평야는 벼농사 지대였으며, 산기슭은 밭농사 지대였다. 동남쪽 장남평야에 이르기 전의 산기슭에는 두곡(막은골), 속골, 참생골, 선돌, 만자골, 왕박골, 당골 등의 촌락이 들어서 있었다. 국도와 지방도는 없었으나, 소규모의 도로가 마을과 마을을 연결해주었다.
당암리는 당암초등학교가 있었던 행정구역 이름이기도 하다. 당암초등학교에는 당암리, 제천리, 송원리, 나성리에 거주하는 학생이 입학했다. 1976년 행정구역 개편 이후 당암리, 제천리는 공주군 장기면에 속했고, 송원리, 나성리는 연기군 남면에 속했다. 이 4개 리의 학생들 사이에 학연이 생긴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하여, 당암초등학교를 졸업한 필자도 이 4개 리 중 당암리에 대해서는 특히 잘 알 수 있었다.
이 글의 필자이기도 한 시인 이은봉은 이곳 당암리 두곡(杜谷, 막은골)에서 태어나 자랐다. 이 조사를 1차 시도했던 2011년 11월 무렵에도 이미 세종시가 건설되기 시작하여 이 당암리 두곡(막은골) 일대는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지금은 ‘다파니고개’ 옆에 세워져 있는 당암정(唐巖亭)이라는 정자와 다정동으로 자리를 옮긴 ‘당암교회’라는 교회에 그 이름의 흔적이 남아 있을 뿐이다.
2. 과거 공주시 장기면 당암리의 지명 유래 및 설화
지명: 도깨비탕〔둠벙〕
위치: 대전에서 조치원으로 가다가 제천을 가로지르는 1번 국토에 있던 다리, 곧 모듬내다리(일명, 피속골다리) 앞에서 버스를 내려 냇둑을 따라 당암리 막은골(두곡[杜谷], 망골)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왼쪽에 있었던 둠벙의 이름이다.
유래: 비가 내리는 밤에는 도깨비불이 둠벙 위를 날아다닌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지명: 찬물내기〔둠벙〕
위치: 도깨비탕에서 막은골 쪽으로 조금 더 걸어가면 왼쪽에 띠울이나 엄고개, 속골 쪽으로 가는 큰길이 나오는데, 이 큰길을 조금 지나 막은골 쪽으로 가다가 보면 왼쪽에 있었던 둠벙의 이름이다.
유래: 항상 차고 시원한 물이 나온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여름에는 찬물이 나고, 겨울에는 따듯한 물이 나와 겨울에는 동네 사람들이 모여 빨래하던 둠벙이다.
지명: 용샘, 용시암〔둠벙〕
위치: 찬물내기에서 막은골 쪽으로 조금 더 걸어가면 왼쪽(서쪽) 논 가운데 있었던 작은 둠벙이다.
유래: 용이 살고 있다고 하여 붙인 작은 둠벙의 이름이다. 실제로는 미꾸라지가 많이 살았는데, 겨울에 두레박으로 물을 품은 뒤 미꾸라지를 잡으면 몇 가마나 되었다.
지명: 공수마루〔언덕〕
위치: 막은골(두곡, 망골)에서 모듬내(제천)를 건너가면 건너편 둑 중 좀 높고, 넓고, 도톰한 언덕이 있었는데, 그곳을 가리키는 지명이다. 이곳에는 1970년대까지 아름드리 물버들나무들이 서 있었는데, 어린애가 죽으면 그 위에 시체를 올려놓은 채 풍장을 했다고 한다.
유래: 커다란 물버들나무 위에 애장을 올려놓고 풍장을 한 뒤 이 언덕에서 푸닥거리를 했다고 하는데, 그때 신으로부터 공수를 받은 높은 곳이라고 하여 공수마루라는 이름 붙였다고 한다.
지명 : 막은골(망골, 두곡杜谷)〔마을〕
위치: 막은골(망골)은 당암초등학교 북동쪽에 위치해 있었다. 장남평야 북서쪽에 있었던 작은 산 아래에 있었던 제법 큰 마을이다.
유래: 산이 마을을 둘러싸 막은 것처럼 되어 있다고 하여 흔히 막은골, 줄여서 망골이라고 불렀다. 한자로는 杜谷(두곡)이라고 불렀다. 동네 사람들은 음운이 변이를 택해 보통 망골이라고 불렀다. 당암리의 가장 동쪽에 있었던 마을이다. 제법 컸던 이 마을은 대략 20호 정도 되었다. 마을 동쪽 끝에 잇대어 모듬내 혹은 제천이라고 부르는 시냇물이 흘렀다.
지명 : 송정목(松亭目)께〔터〕
위치: 막은골(속칭 망골)과 불탄터 사이에 상석과 문인석이 있는 진주 유(柳) 씨의 큰 묘소가 있었는데, 그 앞의 넓은 터를 송정목께라고 불렀다. 막은골의 위치에서 보면 우백호 자락의 공터라고 할 수 있다,
유래: 우백호 자락을 비보(裨補)하기 위해 이곳 산언덕에 커다란 해송(海松) 여러 그루를 키웠다. 한때 해송들 사이에 정자가 있어 송정목(松亭目)께라고 불렀지 않았나 싶다.
지명: 불탄터〔마을〕
위치: 막은골(망골)과 부기동 사이의 5~6호쯤 되는 작은 마을이다.
유래: 일설에는 불무고개에서 불을 지피면 부기동을 지나서까지 재(숯)가 남게 되는데, 이 재를 처리한 곳을 가리켜 불탄터라고 했다고 하는데, 믿기 어렵다. 1960년대까지는 이 마을 동쪽 언덕에 사기를 굽던 곳의 흔적이 있었는데, 다른 일설에는 이 사기를 굽던 곳, 곧 사기장골에 큰불이 난 이후부터 이곳을 불탄터라고 했다고도 한다.
지명 : 부기동(부귀동)〔마을〕
위치: 막은골(杜谷, 망골) 서쪽에 자리해 있었다. 막은골에서 불탄터를 지나 불무고개로 넘어가는 오른쪽에 있었던 마을이다.
유래: 옛날 이 지역에 부자가 터를 잡고 살았다고 하는데, 그 터에서 발견되는 기와장이 그 설을 입증해왔다. 부자가 터를 잡고 살았다고 해서 부기동 혹은 부귀동이라고 했다고 한다. 일설에는 이 마을에서 살면 부자가 된다고 하여 부기동(부귀동)이라고 했다고도 한다.
지명 : 안터〔마을〕
위치: 부기동에서 약간 서북쪽의 산비탈에 있었던 마을 이름이다.
유래: 부기동 서쪽으로 쑥 들어간 산비탈에 형성되었던 작은 마을이다. 6~7호 정도 되었다. 이 마을 산 고개 위에 담암교회가 있었는데, 세종시가 건설되기 직전 논란이 많았을 때 이명박 대통령이 이 교회에 와서 예배를 보았다.
지명: 불무고개(일명, 풀무고개)〔고개〕
위치: 부기동에서 당골 및 제천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었던 고개다.
유래: 불을 피울 때 연기가 잘 빠지는 것을 돕기 위해 이 지역에 불목이라는 것이 있었다고도 한다. 불목이 있던 고개를 통해 연기를 내보내서 불무고개라고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당골과 용고동 쪽에서 부기동과 막은골 쪽으로 서북풍이 넘어오는 바람골이기도 해서 붙인 이름이다. 불무질(풀무질)을 하면 세찬 바람이 일듯이 당골과 용고동 쪽에서 부기동과 불탄터, 막은골 쪽으로 서북풍이 세차게 몰려오는 바람목이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 아닌가 싶다. 이 불무고개에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돌을 쌓아올린 성황당이 있었다.
지명: 음담말(응달마을)
위치: 막은골(망골)에서 당암초등학교까지 가는 도중에 있던 엄고개 밑에 있었던 마을이다. 엄고개(언고개) 못미처에 있었던, 엄고개로 넘어가기 전에 있었던 4~5호 정도되는 작은 마을이다.
유래: 북서향의 마을이어서 양지일 때보다 음지일 때가 많아 붙인 이름이다.
지명: 엄고개(언고개)〔고개, 마을〕
위치: 음담말(응달마을)과 당암초등학교 사이에 있었던 고개 이름이다. 한편으로는 엄고개 넘어 담암초등학교 주변에 있었던 마을을 가리키는 이름이기도 했다. 당암초등학교 서쪽에 있었던 마을로 15호쯤 되는 제법 큰 마을이었다.
유래: 마을과 마을 사이에 얹혀 있다는 뜻으로 언고개(엄고개)라 했다고도 하는데, 얼마간 경사져 있어 마을에서 장남평야 들판이 한눈에 보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엄나무가 많이 자라는 고개라고 해서 엄고개라고 불렀다는 속설도 있다. 이 속설이 좀 더 설득력이 있다.
지명: 속골(소골, 솟골)〔마을〕
위치: 당암초등학교 남쪽 도로 안쪽(서쪽)의 마을이다.
유래: 지형이 마치 소가 누워 있는 형국이라 하여 소골이라 불렀다고도 하는데, 근방의 동네 사람은 보통 속골, 솟골이라고도 불렀다. 소를 키워야 부자가 된다고 하여 소를 많이 키운 마을이라고 하여 솟골이라고 불렀다는 설도 있다. 또한 이 마을을 용암(龍岩) 또는 용암리(龍岩里)라고도 불렀는데, 마을 뒷산에 있던 바위를 용암(龍岩)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이 용암에는 앞에서 말한 당나라 장수 소정방의 설화가 있다. 소정방이 철수할 때 용암을 깨뜨리고 금은보화를 꺼내갔다는 설화 말이다.
장남평야 쪽에서 보면 속으로 쑥 들어갔다고 해서 속골이라고 불렀다는 설도 있다. 장남평야 건너편 마을인 송담리의 갈뫼(葛山)를 두고 ‘피속골’이라고 부르기도 했고, 제천을 가로지르는 1번 국도의 다리를 ‘피속골 다리’라고 부르기도 했다. 속골 서쪽으로 대속골, 안대속골이라는 마을 이름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면 ‘속골’이라고 쓰고 불러야 옳을 듯하다.
지명: 선돌〔마을〕
위치: 엄고개 남서쪽에 있는 6~7호쯤 되었던 작은 마을이다.
유래 마을에 선돌이 있어 선돌이라고 불렀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선돌이 있었다. 그러나 세종시가 들어오기 훨씬 전 선돌은 어딘가로 옮겨갔고, 그 대신 문관 형의 장승이 마을 양쪽에 있는데, 한쪽 장승은 세종시가 세워지기 전에 잃어버렸다. 이 장승과 관련한 동제는 없었으나 개인적인 신앙의 대상은 되었다.
지명: 만자골(만자동)
위치: 속골 북서쪽이 있던 꽤 큰 마을이다. 한때는 가구 수가 20여 호나 되었다.
유래: 일단은 마을의 모양이 만(卍)자 모양이라고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한편으로는 이곳에 살면 아들을 많이 낳는다고 하여 만자(萬子)골이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지명: 왕박골〔마을〕
위치: 속골(소골) 위(북서쪽)에서 당골로 가는 길목 왼쪽에 있었던 작은 마을 이름이다.
유래: 백제 멸망 때 의자왕이 소정방의 당나라 군사들에 의해 공주서에서 이 마을로 포박되어와 숙박했다고 하여 왕박골이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지명: 당(唐)골〔마을〕
위치: 장기면 공암리 동남쪽에 있었던 당암리의 중심 마을이다. 당암리의 모든 길은 당골로 통했다. 막은골(망골)에서 불탄터, 부기동(부귀동)를 거쳐 불무고개(풀무고개)를 넘어 왼쪽으로 돌아가면 있었던 아주 큰 마을이다. 경신사라는 이름의 작은 규모의 사찰도 있었다.
유래: 삼국시대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킬 때의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공주성이 점령되기 전 당(唐)나라 군사들의 본대(지휘부)가 주둔했다고 하여 당(唐)골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지명: 양청(마을)
위치: 넓게는 당골이라고 불렀지만 당골 동북쪽에 있었던 남서향의 마을이다. 부귀동에서 안터 고개를 넘어가면 그 아래쪽에 있었던 마을이기도 하다. 안터고개(양청고개) 위에는 당암교회가 있었다. 양청은 당암리, 제천리, 송원리 일대에서 개신교 교회가 가장 먼저 세워진 곳이기도 하다.
유래: 양청은 남서향이기는 하지만 볕이 잘 드는 양지바른 곳이라고 하여 붙인 이름인 듯하다
지명: 당암교회(교회이름)
위치: 양청에 있었던 감리교 교회를 안터고개(양청고개) 위에 옮겨 세우고 당암교회라고 불렀다. 세종시 건설과 관련해 논란이 분분할 때 이명박 대통령이 이 당암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린 적이 있다.
유래: 당암리에 세워진 교회라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지명: 횟골〔마을〕
위치: 막은골에서 불탄터와 부귀동을 지나 불무고개 넘어 당골로 가는 왼쪽으로 하얀 석회가 나오는 백흙산이 있었는데, 그 아래에 있었던 아주 작은 마을이다. 2~3호 정도가 살았다.
유래: 옛날에 이 마을 위쪽에 하얀 석회가 나오는 백흙산이 있었다. 백흙산 아래 마을이라도 하여 횟골이라 불렀다.
지명: 띠울〔마을〕
위치: 엄고개에서 종촌으로 가는 왼쪽 산기슭 마을에 있었던 3~4호 정도되는 작은 마을이다. 오른쪽 들녁에도 두어 집이 있었다. 주로 청주 한(韓) 씨들이 살았다.
유래: 띠풀이 많았던 지역으로 짐작된다.
지명: 통묏산〔산이름〕
위치; 부엉바위 동북쪽 장남평야 들판 가운데 외롭게 우뚝 솟아 있었던 산이다.
유래: 들판 한가운데 통으로 툭, 튀어나온 산이라고 해서 붙인 이름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