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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가지 밭의 비유? (막 4:1~20)
1. 비유란 무엇인가?
오늘 말씀은 앞서 주님이 행하신 치유와 이적, 수많은 가르침에 대해 반응하는 사람들을 유형화시킨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들을 귀 있는 자가 들으라는 도전은 천국 복음이 이제는 들을 귀 있는 자들의 복음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비유라는 방법을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비유란 어떤 사실이나 사물,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쉽게 볼 수 있거나 쉽게 연상할 수 있는 다른 사물 혹은 다른 사실을 예로 들어 서로 연결함으로써 이해를 돕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추상적인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실제적인 비유를, 신적인 것을 알리기 위해서 인간적인 비유를, 천상적인 것을 계시하시기 위해서 지상적인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즉 주님은 당신이 알고 계시는 사실들을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시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비유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비유는 주님께서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 너무나 자주 사용하셨던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비유는 예수님을 이해하는 열쇠, 하나님의 뜻을 찾아내는 보물 창고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들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쉽고 이해하기 쉬운 것이었지만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더 혼란을 일으키게 하고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조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막 4:11~12절)고 말씀하십니다. 비유 속에 계시 된 지혜와 그 속에 계시 된 비밀, 즉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이 임하였다는 것은 깨달을 특권이 있는 자들에게만 알려질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비유는 귀 있는 자들에게 설명과 주장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비유를 이해하고 그 핵심을 캐내는 작업은 천국을 이해하는 것이나 예수님의 말씀들을 이해하는 것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많은 비유 중 절반가량은 천국의 비유라고 불립니다. 비유들의 시작을 살펴보면 많은 비유가 “천국은 ...과 같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다양한 국면들을 내포하고 있기에 한 마디나, 한 비유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다양한 비유들을 통해서 천국의 모습을 설명해 가시고 있는 것입니다.
2. 네 가지 밭의 비유(막 4:1~9, 13~20절)
이 비유는 뒤에 오는 다른 비유들을 이해하는 것에 있어서 출발점과 기본이 됩니다. 주님은 13절에서 주님은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 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뇨”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머지 비유들에서도 농부, 밭, 씨 등이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네 가지 밭의 비유라고 한 것은 천국의 좋은 씨가 똑같이 떨어졌지만, 밭의 상황에 따라 결실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네 가지 밭의 비유는 천국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유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당시에 흔히 볼 수 있었던 시골의 광경을 묘사한 것입니다. 농부가 밭에 나가서 씨를 뿌릴 때 씨가 여기저기 떨어집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농사법과는 상당히 다른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먼저 땅을 잘 갈아서 비옥하게 만들고 씨를 뿌릴 자리를 확보한 다음에 그 위에다가 씨를 뿌립니다.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땅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무조건 먼저 씨를 뿌렸다고 합니다. 밭이라고 해야 광야와 별로 다를 바 없는 돌투성이인 데다가 잡초가 무성한 그런 땅입니다. 농부는 그런 땅에다가 먼저 씨를 뿌립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겠습니까? 옥토를 비롯한 다양한 땅에 씨가 뿌려집니다. 그런 다음에 농부는 밭을 갈아서 사람이 다닐 만한 길을 남겨 놓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씨는 길가에도 떨어지고 돌밭에도 떨어지고 가시 떨기에도 덜어지게 마련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당시의 사회가 농경사회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을 예로 들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천국의 복음을 가르치시고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외치시던 예수께서 왜 갑자기 농사짓는 광경을 묘사하시는가에 있습니다.
이 질문에 답을 얻으려면 우선 당시의 상황에 대한 이해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는 주님이 오셔서 말씀을 증거 하셨던 때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현재, 막 도래했습니다. 사람들은 원하기만 하면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아직 교회는 시작도 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라는 이름도 없었고 그리스도인이라는 말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할 때 주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당신을 따라 다니고 있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사역을 설명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당시 예수님 주변에는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배에 오르셔서 가르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단순한 가르침만을 베푸신 것이 아닙니다. 당신을 따라다니는 사람들에게 비유를 통해서 자신을 보게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적극적인 결단을 하게 하는 것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의도하는 것입니다.
당시 예수님 주변에는 아직 미숙하지만 그래도 열심으로 주님을 섬기고 있는 제자들과 상당한 호감을 느끼고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있는 대부분 군중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군중들 사이에는 어떻게 하면 꼬투리를 잡을까를 연구하고 있는 대제사장과 서기관, 바리새인들의 무리도 있었습니다.
주님은 똑같은 권위와 능력을 갖추고 천국의 씨를 뿌리셨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항상 긍정적이지만은 않았습니다. 주님은 똑같이 천국의 복음을 전파하시는데 왜 그 결과는 다르게 나타나는가? 주님은 바로 이 점을 설명하시기 위해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그 원인이 씨에 있다거나 씨 뿌리는 자에게 있지 않고 전적으로 청중들에게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네 가지 밭의 비유라는 것입니다.
1) 길가에 뿌리어진 씨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들은 주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듣기는커녕 적대적인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생명의 말씀을 듣기는 들었지만, 거꾸로 반응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의 행적을 보면서도 그것이 무엇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무감각한 상태로 그냥 지나쳐 버렸습니다. 그들이 만난 예수는 그들과 아무런 상관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주님은 길가에 뿌려진 씨로 비유하셨습니다. 이들은 천국의 말씀을 들었고, 예수님의 사역을 보았지만, 그 말씀과 사역은 그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섬기는 교회에도 길가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몸은 예배당에 와 있지만 그래서 말씀을 듣고 있지만 다른 생각으로 가득차 있는 사람들이 바로 길가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꼭 기독교에 적대적인 무엇만은 아닙니다. 다른 것에 사로잡혀 말씀을 아예 듣지 못하는 사람들 모두가 길가에 앉아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아예 주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지도 않은 몸만 주님 곁에 있는 사실상 불신자라고 보아야 합니다. 불행한 사람들이지요.
2) 돌밭에 뿌리어진 씨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런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어디에서 들어본 적도 경험한 적도 없는 신기하고 신선하고 놀라운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기쁨을 주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그 말씀으로 인해서 자기를 부인해야 하고 때로는 그 말씀으로 인해서 고난과 핍박을 받아야 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 때문에, 제자로서 살아가려는 것 때문에 말입니다. 이런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예수께서 뿌리시는 천국의 말씀을 포기한다면, 즉 핍박을 피하기 위해서 마치 예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그의 말씀을 받지도 않은 것처럼 행동한다면 그는 자갈밭에 떨어진 씨처럼 곧 싹은 나왔지만 성장하지 못하고 열매도 맺히지 못하는 씨요 밭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성경 묵상을 해 보면 쉽게 드러납니다. 처음에는 한 번 내가 열심히 해 보리라 하고 시작하지만 한 달을 못 넘깁니다. 왜냐하면 대단한 노력과 성실성이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 믿는데 성실성이 별 연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돌 밭 같은 신앙! 그래서 반짝 기쁠 때는 활활 타지만 금방 내가 언제 예수 믿었느냐는 식으로 싸늘해지는 신앙은 근본적으로 마음은 바뀌지 않고 잠시 겉모양만 바뀐 듯한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이런 신앙인들이 많습니다. 특히 무슨 기적을 통해 신앙을 경험한 분들은 니런 신앙의 패턴을 보이기 쉽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마라톤입니다. 하루 이틀 화끈하게 믿어서 좋은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처음 열심히 잘하는 신앙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열정이 있을 때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밑에 돌이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그는 영원히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열매가 없다는 말은 주님께서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안다는 말씀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결실치 못한다는 말은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여기서 돌 밭은 어려움입니다. 고난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포기해야할 것들입니다. 그것을 통과할 믿음이 없습니다. 성실성이 없는 것입니다. 말씀을 깊이 경험하지 못한 것입니다. 불행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러므로 처음 열정은 고난이 오면 여지없이 드러납니다. 고난은 극복할 때 아름다워지는 것입니다.
3) 가시 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또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고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것에 있어서 고난과 핍박만이 방해물은 아닙니다. 그 방해물은 세 번째로 이어지고 있는 재물의 유혹과 세상의 염려입니다. 예수를 믿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 보려고 하니까 포기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뭡니까? 그동안 몸에 붙어 있던 세상적인 돈 벌이 방법들, 또 포기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또 그렇게 살다보면 도저히 안 될 것 같은 염려가 엄습합니다. 그래서 적당히 두 얼굴로 살아보지만 기쁨이 없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몸은 주님에게 있고 말씀을 듣고 있지만 마음은 세상에 있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갑니다. 세상적인 방법과 출세, 명예욕 때문에 도저히 주님을 계속 따라다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싹이 나고 꽃도 피웁니다. 그러나 결국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겉보기에는 제자로서 사는 것 같고 모든 것을 다 잘하는 것 같으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런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런 분들은 나름대로 열심도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중직을 차지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세상을 포기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 이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으로 맺어야할 열매를 맺지 못하게 했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불행한 그리스도인들입니까? 주님은 지금 천국이 이런 사람들이 뒤 섞여 있다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가 이루고 있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마지막 사람들, 좋은 땅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핍박과 고난을 견디어 내었습니다. 세상 재리의 염려와 유혹을 담대하게 물리쳤습니다. 그리고 종래에는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을 맺게 되었습니다.
다시 정리해 보겠습니다.
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있어서 핵심은 네 단계 중 가운데 두 가지, 즉 자갈밭에 떨어진 씨와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에 비유된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즉 자갈밭에 떨어진 씨와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에 비유된 사람들에게 있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길가에 뿌려진 씨를 ‘천국의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는 자’로, 마지막의 좋은 땅에 뿌려진 씨를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로 해석하셨습니다. 이 비유에서는 두 가지 상반된 개념, 즉 깨닫는 것과 깨닫지 못하는 것이 사람들을 구분하는 기준점이 됩니다. 다시 말해 깨닫는 것과 깨닫지 못하는 것 사이에 다른 것이 있어서는 안 되는데 그사이에 자갈밭과 가시떨기가 끼워져 있다는 것입니다. 자갈밭과 가시떨기를 설명할 때는 깨닫는다는 말과는 전혀 상관없는 말로 설명하시고 있는 것을 주목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두 번째와 세 번째에게 기대되고 있는 반응이 네 번째의 좋은 밭과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합니다. 즉 가시밭과 돌밭 역시도 좋은 결실 맺기를 원하셨습니다. 말을 바꾸면 천국의 말씀을 받았지만, 환난과 핍박을 극복하지 못하는 것이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것은 결국 듣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말씀입니다. 천국의 말씀을 들었지만, 그것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면 그 결과는 결국 듣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결국, 천국의 말씀을 진정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그 말씀을 기쁨으로 받을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일어나는 모든 부정적인 환경을 극복하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길가가 불신자들에 대한 비유라면 두 번째 세 번째의 경우는 이미 말씀드린 바 있는 교회에 덧 뿌려진 가라지에 대한 말씀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모양 저 모양으로 교회에 찾아와서 말씀을 듣고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돌밭과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는 그리스도인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경고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인정하시는 경우는 열매 맺는 사람들, 즉 네 번째의 경우밖에는 없습니다.
주님은 이 비유를 이어지는 천국 비유들의 서론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이제부터 선포되는 ‘천국 말씀’ 혹은 천국 비밀을 있는 그대로, 즉 주님이 가르치시는 대로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선포하시는 말씀이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선포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밭의 상태에 따라서 그 말씀은 결실 보는 좋은 나눔과 되기도 하고 아예 흔적조차 없는 길가가 되기도 합니다. 이들 모두가 말씀을 들었다는 측면에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나타내는 결과에서는 완전히 다른 결과를 초래하고 있습니다. 특히 돌밭과 가시 떨기의 경우는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환난, 핍박, 유혹, 근심을 극복하는 단호한 결심과 지혜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씨 뿌리는 자는 좋은 씨를 세상에 뿌려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그 말씀을 듣고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씨 뿌리는 자가 좋은 씨를 뿌렸음에도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천국은 이렇게 세상에 좋은 씨를 뿌려 놓은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깨닫지 못하는 길가와 같은 자들도 있고 그리스도인 흉내를 내는 돌밭과 가시덤불 위에 떨어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씨 뿌리는 자가 의도하신 것은 그런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모두 좋은 열매를 맺기 원하는 것이 씨 뿌리는 자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고난과 환난과 유혹과 핍박을 이겨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관찰이 여기서 끝나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저는 타락한 인간에게 원래부터 좋은 밭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좋은 밭이 될 수 있습니까? 우리 마음 밭을 기경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작업이 성경적 세계관으로 거듭나는 과정이라고 믿습니다. 길가와 같은 마음 밭을 갈아엎어야 합니다. 그래서 좋은 흙이 나올 때까지 갈아엎어야 합니다. 가시떨기를 제거하고 돌을 걷어내서 30배 육십배 백배의 결실을 맺을 만한 좋은 밭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 주어진 숙명입니다. 그렇게 좋은 밭이 되지 못하면 결국은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국은 심판밖에 기다릴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네 가지 밭의 비유가 하나님 나라 비유의 가장 첫 번째에 나오는 이유를 하나님 나라는 좋은 밭을 가진 사람의 나라라고 느낍니다. 그러나 그 좋은 밭은 우리 마음 밭을 진리의 말씀으로 기경해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들을 올바르게 깨닫고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밭은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 백배의 결실을 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코로나 19 바이러스로 우리교회로는 20년 만에 처음, 아마 우리 기독교 역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가정 주일 예배를 드리는 주일 아침입니다. 저는 가정에서 드리는 예배에 참석하는 성도가 길가와 같은 마음으로 예배할까봐 동영상 예배가 아니라 각 가정의 가장들이 예배 인도자가 되어 스스로 예배하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이 직접 베푸신 기적과 치유와 귀신을 내쫓는 사역을 보고, 주님의 가르침을 직접 들었어도 주님을 죽이려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하물며 우리 시대에 길가나 돌짝 밭, 가시떨기 밭과 같은 마음의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악성 전염병이 염려되기도 하고 두려울 수 있지만 우리는 이 사회 속에서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결실을 진리의 말씀으로 맺어야 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세상 사람과 똑같이 행동하거나 더 이기적인 결정으로 세상의 지탄을 받지 않도록 마음을 써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여전히 우리 시대를 향해 말씀합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