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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딤후4:1-2
요절: 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오늘부터 우리는 사도 바울의 마지막 서신의 마지막 장을 배웁니다. 그는 곧 올 죽음 앞에서 그의 가장 가까운 동역자요 제자인 디모데에게 유언을 하고 있습니다. 디모데는 그가 죽은 후에 사도 바울이 시작한 일을 부분적으로라도 계속해서 이어나갈 사람입니다. 그는 무엇을 유언으로 남겼습니까? 위대한 사도는 그의 제자, 혹은 후세의 신자에게 어떤 말을 남기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죽어가는 사도의 유언이 우리 마음속에 심어지기를 바랍니다.
1.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 두고 엄히 명하노니: 디아마르튀로마이는 맹세하다는 말입니다. 문맥에 따라서 „엄숙하게 명하다“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과, 심판자로 오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맹세하고 있습니다. 맹세할 때에는 증인이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이 말은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바로 앞에 서 계신 맹세의 증인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이름으로 하는 맹세는 단순히 무엇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이 삶과 죽음을 가르는 매우 진지하고 중요한 것일 때 사용됩니다.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심판은 누구에게나 닥칠 현실입니다. 다시 오실 그리스도의 주된 임무 중의 하나는, 산 자와 죽은 자를 구분하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도 예외 없이 벌거벗은 몸으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그러나 산 자, 즉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여서 그의 삶을 예수님의 제자로 살았던 자는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예수님께서 우리가 받을 심판을 대신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죄를 묻는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즉 우리는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이 심판에서 제외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자들은 이 심판에서 면제를 받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죄를 가릴 만한 것이 없어 그들의 죄가 모두 하나님 앞에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신자들은 아무런 절차를 거치지 않고 영생을 누리게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고후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이곳에서는 사도 바울이 인간이면 예외 없이 그리스도 심판대 앞에 선다고 가르칩니다.
그는 다른 곳에서도 신자의 심판을 말합니다:
고전4: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우리는 해 받는 신자의 구원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고전3:15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그러므로 신자들도 구원을 받았으되 예수님에 대해서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고후5:11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어졌으니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어지기를 바라노라“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을 단지 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일종의 해결사적 신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시며, 우리를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으로부터 구원하셨지만, 또한 두려우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구원받은 자들을 나름대로 심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신자의 심판을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그 심판은 어떤 성격을 가졌을까요?
그 심판은 우리의 잘잘못은 모두 드러내어 그것에 대응하는 벌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심판대 앞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죄가 가려져 있으므로, 그러한 구원의 여부에 대한 심판에서는 우리가 벌을 받지 않습니다. 신자들의 심판은 불신자의 심판과 성격이 다릅니다:
마25: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신실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예수님께서는 상급의 심판을 말씀하십니다. 판정의 기준은 우리가 예수님 말씀에 얼마나 신실했는가입니다. 우리가 큰일을 해서 칭찬받는 것이 아니고, 각자 받은 은사의 분량대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우리의 상급을 결정합니다.
우리가 물론 예수님께 근본적인 두려움을 갖되, 그의 심판을 지나치게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미 생명으로 옮겨졌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영원한 주님이시요, 목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우리에 대한 사랑은 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를 자신을 희생하시어 구원하시고 사랑하시는 그분이 우리를 결코 무섭게 심판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우리를 생존 시에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 많은 고난 속으로 인도하시는 것들을 통해, 일종의 심판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요15:2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사도 바울은 1절에서 디모데에게 매우 엄숙하게 경고한다고 했는데, 2절에서는 그 경고의 내용이 나옵니다. 이것은 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복음 전파의 핵심은 가르치는 일입니다. 신자가 회개하여 주님께 완전히 돌아올 때까지, 그리고 그가 계속해서 주님의 말씀대로 살도록 가르치고, 때로는 꾸짖고 앞으로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모든 신자가 해야 할 일이며, 특히 목사나 교사는 더 큰 책임을 집니다. 이러한 일은 사도 바울이 하나님을 증인으로 세워서 디모데에게 엄숙하게 맹세할 정도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올바른 가르침과 그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 기독교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말씀을 전하는 것은 단순히 „예수를 믿으시오!“, 혹은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 전파란,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주시며, 우리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시어,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시러 다시 오신다는 내용을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니다. 내용이 없는 말씀 전파는 오히려 부작용을 낳습니다. 거짓 신자만 양산할 수 있습니다.
또한 말씀을 아무에게나 전파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완강히 거절하는 자에게는 더 이상 전파할 필요가 없습니다. 돼지 앞에 진주를 던지면 안 된다는 비유도 있습니다. 말씀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자에게 전할 필요가 없습니다. 복음 전파는 사람들을 화나게 하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양심에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지도록 진지하게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2절의 후반부를 보면 말씀을 전파하라는 명령이 주로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죄를 확신시켜라: 엘렝쇼. 말씀을 전하는 가장 큰 목적 중의 하나는, 듣는 이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를 불러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의 가장 중요한 용도입니다:
딤후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딛1:9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
설교란 죄인이 하나님 말씀을 듣고 자기 죄를 깨달아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하는 일입니다. 말씀은 사람의 양심을 두드립니다. (오랫동안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회개를 하지 않는 자는 교회에 출석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연약한 자를 출교시키라는 말은 아닙니다) 죄를 확신시키는 것은 당사자의 영생을 위한 것이므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진정으로 회개한 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마음과 양심에 평안을 얻습니다. 공개적인 회개는 다른 교인에게 경각심을 주기도 하고, 또한 교인들 사이가 영적으로 돈독해집니다.
꾸짖어라: 에피티마오. „이러한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는 것이 마땅하도다“ 고후2:6
꾸짖는 것은 죄를 확신시키는 것보다, 한 단계 더 나간 것입니다. 죄가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회개를 하지 않거나 방자한 행위로 형제에게 피해를 주었을 경우에는 꾸짖음이 있습니다. 꾸짖음을 받고도 회개하지 않는 경우에는 징계를 받게 됩니다. 교회의 징계는 단순한 개인의 징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징계입니다. 교회의 징계를 겸손하게 회개하는 자세로 받아들이지 않는 자에게는 천국의 문이 닫힙니다. 징계를 받고 상처를 받아도 안 됩니다. 징계를 당한 자에게는 회개 외에는 길이 없습니다.
출교당한 자가 회개하여 자신의 교회에 돌아가지 않고 다른 교회에 가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를 멸시하는 가증한 행위이며, 이는 본인의 죄를 더하는 것이므로, 이러한 자에게는 회개의 기회가 없습니다. 그를 받아주는 교회도 하나님 말씀을 무시하는 것이므로, 같은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러한 교회는 망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교회에서 온 교인이 있으면, 그의 전 교회에서의 행적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러나 만약 그가 회개하고 돌아온다면, 교회는 기꺼이 사랑으로 받아주어야 합니다. 징계의 목적은 회개이기 때문입니다.
훈계하라: 파라칼레오. 훈계란, 훈계를 받는 자의 개선을 목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훈계는 때에 따라서 부드러울 수도, 엄할 수도 있습니다. 훈계는 직접 개인에게 할 수도 있고, 아니면 설교를 통해 교인 전체에게 향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성경 말씀을 중심으로하는 설교는 주로 훈계가 주된 내용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3:16)
모든 인내와 가르침으로: 죄를 깨닫게 하고, 꾸짖고 훈계하는 일은 그 자체가 매우 무거운 일이므로, 당하는 사람은 용기를 잃고 주저앉기 쉽습니다. 이것은 훈계의 목적이 아니므로, 그러한 결과가 오지 않도록 훈계자는 감정을 품지 말고 인내로 해야 합니다. 엄하면서도 부드럽게 해야 합니다. 이러한 일은 매우 어려우므로 아무나 훈계를 하면 안 됩니다. 훈계의 목적은, 그가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나서 멸망의 길로 가고 있으므로, 이 사실을 알려주어 그를 죄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죄인의 마음은 일반적으로 딱딱해져서 좀처럼 회개를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훈계자는 큰 인내로 이 일을 감당해야 하며, 방법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의 훈계는 우리에게 좋은 예를 보여준다:
행20:31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행악자가 훈계를 받아들이지 않고 교회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 그도 멸망하고 교회도 큰 피해를 보므로, 훈계를 게을리하면 안 되며, 훈계를 받아들이지 않고 교회를 떠나면 스스로 하나님의 교회와 단절하여 멸망을 자초하는 것이므로, 행악자를 미워하지 말고 불쌍한 마음으로 인내를 가지고 그가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러한 일을 하는 데 있어서 항상 동반되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가르침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자가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형제의 죄를 들추어내고 꾸짖는 것은 그 형제가 하나님의 가르침대로 살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사람의 징계를 받고 자신을 바로잡는 것이 심판 시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기 가벼우므로, 신자라면 형제의 가벼운 사랑의 징계를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는 주로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좇아 사는 성도들의 모임이 됩니다.
오늘, 죄를 확신시키고, 꾸짖고, 훈계하는 것이 목회자의 주 임무이며, 모든 성도가 이 일에 참여해야 함을 배웠습니다. 이러한 일이 있기 위해서는 교회에서 늘 하나님 말씀이 선포되어야 하며, 성도는 말씀을 듣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아야 하며, 교회에서는 말씀에 순종하는 분위기가 잘 형성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것이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 바울의 유언을 마음에 새기며, 말씀으로 교회를 세워나가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