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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보(梁山甫:1503∼1557)가 1530년 경 담양에 별서(別墅)원림인 소쇄원을 지었다.
별서란 선비들이 세속을 떠나 자연에 귀의하여 은거생활을 하는 곳으로, 일상생활을 하는 저택에서 조금 떨어져 산수가 빼어난 장소에 지어진 별저(別邸)같은 곳을 말하며, 원림(園林)은 동산과 숲의 자연 상태 그대로에다 적절한 위치에 인공적인 조경과 더불어 정자를 배치한 것을 원림이라고 한다.
또한 조선 중기 오희도(吳希道:1583~1623)가 자연을 벗삼아 살던 곳에 그의 아들 오이정(吳以井:1574∼1615)이 건물 앞뒤로 네모난 연못을 파고 주위에 꽃나무를 심어 아름답게 가꾼 명옥헌을 지었는데 이 또한 원림이라 부른다.
양산보와 오이정이 자연상태 지형에 별서 원림인 소쇄원과 명옥헌을 지은 것에 비해 광주광역시 서구 세하동에 있는 장창우(張昌雨)의 만귀정은 그 두곳과는 달리 정원이다.
장창우(1704~1774)는 1750년 경 이곳에서 후학을 가르쳤는데 그 옛 터에 1934년 인공적으로 땅을 파 연못을 만들고 파낸 흙으로 동산을 만든 다음 그 위에 정자를 중건하였다고 한다. 소쇄원과 명옥헌이 자연상태에서 약간의 인공미를 가미했다면, 만귀정은 극락강이 바라보이는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곳에 정자를 짓기위해 연못을 파고 인공적으로 동산을 만들었으니 그 두곳과는 전혀 다른 정원이라고 하겠다.
처음 만귀정은 극락강이 바라보이는 이 곳에 후학을 가르치기 위해 초당으로 지어졌지만 언제인가 없어진 것을 훗날 이곳에 동족마을을 이루며 살고 있는 장창우의 후손들이 선조가 후학을 가르쳤던 옛터에 그 유덕을 기리기 위하여 정면 2칸, 측면 2칸 팔작지붕의 만귀정을 1934년에 중건하였고 그 후 1945년에 중수하여 현재에 이르렀고 지금은 시 문화재자료 5호에 광주광역시 서구8경 중 하나이다.
만귀정은 광주에서 송정리 가는 광송간 도로 극락교 교차로에서 좌회전하여 순환도로 옆길로 서창방향으로 가면 되며, 송정리에서 온다면
광주비행장 지나 나오는 극락교에서 우회전하여 서창방향으로 가면 되겠다.
동하마을이라는 입석과 만귀정입구라는 조그만 비석이 있지만 도로표지판이 커다랗게 걸려있기에 찾기는 어렵지 않다.
만귀정 바로 앞에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넓기에 차량을 주차하고 만귀정을 한 바퀴 돌아보는 것이 만귀정 여행의 시작이다.
무릇 정자는 정자 안에서 밖을 바라보는 것이 최고의 멋이지만, 만귀정은 연못가를 빙 돌며 바라보는 정자의 모습이 더 좋다.
그리고 한 바퀴 빙 돌아 다시 주차장쪽으로 와서 만귀정에 올라 영산강을 바라보고 습향각, 묵향정사로 정자를 하나씩 건너는 것이 좋다.
만귀정 둘레길..^^
만귀정은 언듯보면 명옥헌을 닮기도 하고 남원의 광한루를 닮기도 했다.
9월 24일 볼일이 있어 지나가는 길에 들렀지만 아직 꽃무릇이 시들지 않았다.
블친 소국님 블로그에 올려진 만귀정 꽃무릇에 취해 얼른 와 보고 싶었지만 차일피일 미루다 번개처럼 이루어진 만귀정으로의 여행.
이 만귀정은 지난 겨울에 블친 초희님도 걸었으며, 올 여름엔 친구 Hoony도 걸었던 곳이다.
연못의 면적은 4,600㎡(약1,400평)으로 둘레를 걸으며 꽃무릇 사이로 보이는 만귀정이 너무 아름다워 발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만귀정은 연꽃과 꽃무릇 필 무렵이 제일 아름답다고 하며,
일제강점기 기간에는 “만귀정시회”라는 선비들의
모임이 있어 풍류와 오락을 즐기는 시인묵객들의 장소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만귀정은 40년 전인 1974년 신성일 윤정희 주연의 꽃상여가 촬영된 곳이다.
허장강이 상여 앞에서 소리를 하고 꽃상여는 이 동네 사람들이 모두 엑스트라로 나서 맸다고 하며, 당시 허장강은 이 영화로 제13회 대종상 남우조연상을 받기도 했다. 주연이었던 신성일과 윤정희는 앙끗도 못 받았던 영화 꽃상여.
또한 1960년에는 박복남, 복원규, 김해연 주연의 탈선춘향전을 찍었다고 한다.
이처럼 만귀정은 영화로도 널리 소개될 정도로 유명한 곳이었다.
봄이면 벚꽃, 여름엔 연꽃, 가을엔 꽃무릇, 겨울엔 소나무 위의 눈꽃이 아름답게 피어나는 만귀정.
한 바퀴를 빙 돌아 이제 만귀정 부터 차례로 세 개의 정자를 만나러 가 본다.
만귀정은 터만 남은 자리에 후손들이 장창우의 덕을 기리기 위해 1934년에 세운 정자다.
만귀 장창우(晩歸 張昌雨)의 처음 이름은 한규(漢圭)이고 자(字)는 자칠(子七), 호(號)는 효우당(孝友堂)이며 부(父)는 세영(世英), 조(祖)는 익한(翊漢), 증조(曾祖)는 봉린(鳳麟)이다.
본성(本性)이 효우(孝友)하여 부모에게 정성을 다하고 양친의 상사 때에는 3년 동안 여묘(廬墓)하고 밤낮으로 호곡(號哭)하여 슬피 우니 지나가던 사람들이 효자라고 칭송하였다고 한다. 여묘(廬墓)하던 자리에 눈물이 하염없이 떨어져 풀이 자라지 못할 만큼 효성을 다하니 이에 감동한 산 속의 큰 짐승들이 신변을 지키기 위해 주위를 호위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만년에 지금의 서창 동하(洞荷) 마을 앞에 조그마한 정자를 짓고 학문에 전념하였고 자질이 뛰어난 향중(鄕中)의 수재를 모아 교육에 전심하였는데 그 정자의 이름이 바로 만귀정(晩歸亭)이다. 정자 이름을 만귀(晩歸)라 한 것은 늙은 만년(晩年)에 이곳에서 한가로이 풍류(風流)를 즐기자는 뜻으로 붙였다고 한다.
만귀정에 가면 꼭 빼먹지 말아야 할 볼거리가 있다.
만귀정에서 두 번째 정자 습향각 쪽을 향해 제단처럼 생긴 기다란 석재 하나가 놓여 있는데, 석재의 앞뒤로는 취석(醉石), 성석(醒石)이라는 두 글자를 한자로 새겨 놓았다.
즉, 습향각으로 들어갈 때는 취하고, 나올 때는 깨서 나오라는 말로 만귀정에 흠뻑 취하여도 돌아서 갈 때는 깨서 가라는 뜻이다.
지금 우측으로 보이는 돌에 쓰여진 글자가 ‘성석’(醒石)이과 뒷면에는 ‘취석’(醉石)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그럼 취해서 건너볼까?
다리 건너 보이는 것이 습향각(襲香閣)
만귀정 계단을 취한 채 내려와 오작교 같은 연못의 다리를 건너면 습향각이 나오는데,
습향각은 효우당 장창우의 7세손이자 송정읍장이었던 묵암 장안섭이 1940년에 지었는데 사방 1칸의 팔각지붕으로
주위의 연꽃 향기가 정자로 엄습하여 온다는 뜻이라고 한다.
습향각을 지나면 묵암정사(默菴精舍)
묵암정사는 효우당 장창우의 7세손 장안섭 송정읍장의 공로와 덕행을 기리기 위해 1960년 광산군민들이 성금을 모아 건립한 것이다.
이제 만귀정에서부터 취해 습향각과 묵암정사를 거쳐 나왔으니 만귀정 연못을 다시 한번 빙돌아 서서히 깨어날 차례이다.
연못에 세 개의 정자가 마치 서로 그리워하는냥 서있는 풍경.
드라마속 낯익은 풍경처럼 보인다. 언제인가 기억속 한 켠에서 스멀스멀 기어나올 것 같은 만귀정은 정자로서는 참 보기 드믄 정자이다.
瑞石明月(무등산에는 밝은 달이 떠 있고)
龍江漁火(용강에는 어부들의 불빛이 있네)
馬山淸風(마산에는 맑은 바람 산들거리며)
樂浦農船(낙포에는 농사를 위한 배가 오간다)
漁燈暮雲(어부들의 등불에 저녁 구름 피어나고)
松汀夜雪(송정에는 흰눈이 밤을 밝히며)
錦城落照(금성에는 아름다운 저녁 노을)
野外長江(들 밖에는 길고 긴 강물이 흐르네)
만귀정 현판에 걸려있는 효우당의 만귀8경을 보면 당시 얼마나 이 주변이 아름다웠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첫댓글 송정리에서 광주를 수 없이 들락 거렸는데
정작 이곳은 한번도 가지 못했네..
금성은 나주를
용강은 황룡강인가?
마산은 어디며?
낙포는 어느곳일까?
아~~ 너무 멋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