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BC 성서연구 - 제21B강 역대기상하 메시야 왕국의 대망
(13) 다윗에게서 확인하는 예배의 원형 역대상 16:1-6
지난 시간 저희는 역대기가 주목하는 다윗의 성정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누군들 흉내조차 낼 수 없을 만큼 정성껏 준비하고 진행한 행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받아주지 않으셨지요? 누가 떠오릅니까?
창세기에 등장하는 가인과 아벨입니다. 형제였습니다. 두 사람이 모두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가인은 정성껏 농사지은 것으로 예배를 드렸고 아벨은 양을 잡아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거절하셨습니다. 그때 어떤 일이 벌어졌지요? 하나님이 내 정성을 받지 않으시니 분노합니다. 그리고 그 분노는 동생 아벨을 향하죠? 내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것이 다 저 동생 때문인 것처럼, 내 마음을 거절한 하나님을 향해 분노하고 자기보다 약자에게 분풀이를 했던 것입니다. 성경이 처음부터 기록한 이 일이 바로 오늘날 이 땅에 온통 벌어지고 있는 일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도 이 모양이니, 그 어떤 일인들 분노와 미움이 없겠느냐는 것이지요. 그것을 잘 다스려야 하는데, 최초의 인간보다 오늘 우리가 나아진 것이 없습니다. 우리네 악한 인간은 여전히 종로에서 뺨 맞으면 한강에 눈을 흘기게 되어 있습니다. 요즘은 눈을 흘기는 정도가 아니지요? 눈을 흘기며 씩씩거리긴 했어도 잘 참아냈다면, 지금은 참질 못합니다. 우리보다 약한 이들을 찾아서 내 감정의 하수구로 만들고 있습니다.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극복해내지 못하고, 조금도 여과되지 않고 정화되지 않은 내 속에 더러운 오염수를 막 쏟아 부어버리는 것입니다. 때로는 말로, 때로는 폭력으로, 때로는 살인으로 말입니다. 나만 죽으면 될 일을 다른 사람들을 죽게 만드는 일로 확대시켜 버리고 있는 것이지요.
종로에서 뺨을 맞았으면 내가 왜 뺨을 맞았는지를 돌아보고 고쳐야 하는데, 아뇨, 나는 결코 뺨맞을 일이 없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드린 제사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법궤를 옮긴 정성과 수고는 더할 나위없이 최고였다고 생각을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오늘 다윗은 어떻게 했다고요? 왜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셨는지, 자기를 돌아봅니다. 밖으로 향할 혈기와 분노를 잘 통제하고, 오히려 그 에너지를 가지고 철저하게 어디에서부터 문제가 생겼는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하나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있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일이 될 수 있도록, 다시는 이런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수정하고 보완해 가는 것이지요.
“너희가 메지 아니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웃사를 찢으신 이유를 성경에서 확인하였습니다. 그래서 수레가 아니었음을 확인합니다. 그래서 말씀에 정하신 대로, 저 레위인 고핫자손, 그것도 그들의 가장 어른들 지도자들로 하여금, 오늘 이 법궤를 어깨에 메게 했던 것이지요? 그들도 어깨에 법궤를 메어본 적이 없을 것입니다. 벌써 법궤는 70년 이상 90년 가까이 산속에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저들도 연구하고 공부하고 준비했을 것입니다. 가장 성경적으로 말씀대로 하나님을 모시는 연습을 했을 것입니다. 여섯사람이 호흡을 맞추어서 힘을 분배하여서 13킬로를 걸어가는 연습을 수도없이 했을 것입니다. 그래요. 하나님은 필요할 때 가져다놓고 옮겨다 놓는 짐짝 같은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가장 중심에, 가장 귀한 곳에 올려모시야 마땅한 이 세상과 나의 주인이신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다윗은 성경대로 제사장과 레위인들 모두를 성결하게 하지요. 법궤를 메고가야 할 여섯사람만 정결하면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두가 정결하게 준비할 때, 레위사람 여섯 사람의 걸음을 하나님이 받아주셨던 것이지요? 나 하나쯤이야라는 생각이 큰일 날 생각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거룩하고 성결하게 서 있어야, 저 헌신된 소수의 수고를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손놓고 구경꾼이 되어서는 안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 모두 주인 의식을 가지고, 우리가 모두 한 마음이 되어야 오늘 우리의 걸음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걸음이 되는 것입니다. 갑자기 대통령실에서 전화가 와서 연수원과 기숙사를 준비하라고 했다. 이런 갑질이 어디있느냐고 할것이 아니라, 잼버리를 바라보며 우리가 해야할 일을 찾았어야 했고, 대통령실에 먼저 연락을 했어야 하는 것이지요? 결국 구경만 하고 비판만 하는 것, 대통령부터 우리 모두의 문제인 것을 확인해보는 것입니다. 그나마 우리 한국 교회가 제일 먼저 움직여서 교회와 기도원을 지친 대원들에게 내어주고 음식을 준비하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이 일을 시작으로 더욱 주변을 돌보고 살피는 우리 한국교회, 우리 하일교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래요. 우리 하일교회의 모든 걸음은, 어느 누가 어떤 일을 하여도, 그 사람들만 준비하고 그 사람들만 고생하고 그 사람들만 책임지는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일이요, 우리 모두가 준비하고 우리 모두가 마음을 모으고 우리 모두가 책임지는 일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요. 그렇게 다시 법궤를 메어 올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여전히 부족했고, 여전히 완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부족한 섬김을, 당신을 향한 피조물의 최선을 다한 사랑의 고백을 하나님이 인정해주셨습니다. 레위인 지도자들이 법궤를 멥니다. 찬양팀을 재정비 하였습니다. 드레스 코드도 맞추었습니다. 모두가 말씀으로, 말씀대로 성결하게 몸도 마음도 준비하였습니다. 그렇게 모두가 간절하게 한 마음이 되어 생명을 걸고 하나님 앞에 내딛은 여섯 걸음, 하나님께서 도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아주셨습니다. 진노를 멈추시고 이들의 행진을 기뻐해 주셨던 것이지요.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너무나도 감사해 덩실덩실 춤을 추었습니다. 오벧에돔의 집에서부터 다윗이 마련한 장막까지 13킬로미터, 다윗은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습니다. 1.3킬로처럼 아니 130미터처럼 오게 되었을 것입니다. 왜요? 사랑하는 이와 함께 걷는 길, 오히려 짧게 느껴지는 것이지요. 조금 더 오래 걷고 싶은데 말입니다. 그렇게 다윗성까지 한 걸음 한 걸음 하나님 앞에 행여 실수가 있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행진이 안전하게 이뤄졌던 것이지요. 그리고 드디어 이제 이 행진의 마지막 단계입니다. 그러니 더욱 마음이 모든 신경이 집중이 되는 것이지요. 다윗은 창문열고 삐죽거리는 미갈을 볼 수도 없었습니다. 오직 그의 시선은 온통 하나님이 가득 차지하고 계셨기 때문이지요. 자, 이 행진의 마지막 단추, 하나님의 궤를 드디어 다윗성에 마련한 곳에 올려 모시는데, 바로 이 장면으로부터, 우리가 회복해야 할 예배의 원형을 한번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자 첫 번째,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하나님되시는 예배이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중심에 바로 계셔야 합니다. 본문 1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메고 들어가서 다윗이 그것을 위하여 친 장막 가운데에 두고 번제와 화목제를 하나님께 드리니라”(대상16:1)
끝까지 하나님의 궤를 메고 들어갑니다. 그리고 다윗이 마련한 장막 가운데에 하나님을 모시는 것이지요. 영어성경을 보니 하나님의 궤를 그 장막의 정중앙에 바르게 위치시켰다(placed it right in the center of the tent)고 기록을 합니다. 드디어 70년이 넘도록 이스라엘의 변방에 계시던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의 정중앙에 임재하시는 순간이었던 것이지요. 드디어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우리를 지키시며, 우리를 도우실, 우리의 진정한 왕께서 무사 귀환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모시자마자 가만히 있을 수 없었지요? 다윗은 하나님 앞에 번제를 드리고 화목제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예배로 제사로 고백해드렸던 것이지요.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에게 평화를 주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아시는 대로 번제는 제물을 온전히 다 태워 모든 것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제사,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희생과 헌신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되길 원한다는 고백입니다. 참된 하나님의 종으로 하나님의 기대와 명령대로 쓰임받기를 원한다는 선언이었던 것이지요. 이제부터 더욱 모든 일에, 내 생각대로, 내 눈과 사람들의 눈이 보기 좋은 대로가 아니라, 말씀대로,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 일들을 행하겠노라는 청지기요, 종으로서의 다짐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화목제는, 지금껏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셨으므로 평화를 누리지 못했다는 저 70년의 세월을 거친 깊은 곳 DNA에서부터 나오는 한맺힌 고백이었을 것입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을 모시고,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 속에 하나님 다스리시는 나라 이스라엘을 세워주시기를 구하는 간절한 제사였을 것입니다. 아니, 예배를 드리고 있는 지금 이 순간부터, 예배를 드린 후의 모든 예배자의 삶은 하나님과 화목하고, 이웃과 화목하고, 피조세계와 화목한 삶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왜요? 지난 주일저녁 말씀처럼 화평하게 하는 자, 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도 하나님은 정 중앙에 바르게 모셔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위한 온전한 삶을 살 수 있고, 하나님 기대하시는 평화를 누리고, 평화를 만드는, 깨어지고 단절된 곳에 다리를 놓는 사람으로 살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요.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이 우리의 중심에 계심으로 이뤄집니다. 그분께서 우리의 삶의 구심점이 되고, 중심이 되고, 전부가 되시는 것이, 오늘 다윗이 온 이스라엘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하나님의 위치요, 하나님과 우리와의 참된 관계인 것입니다. 늘 하나님을 우리 삶의 가장 귀한 자리에 모시고, 늘 그분께 합당한 예배를 드리는 삶을 살게 되는 우리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자, 두 번째, 하나님을 모시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는 것이 예배의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렸으면, 백성들에게 복을 비는 것입니다. 오늘 역대기는 계속해서 다윗이 감당하고 있는 새로운 역할을 주목합니다. 무엇이지요? 16장 2절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 드리기를 마치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고”(대상 16:2)
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역할, 이미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에 잘 드러나고 있는 목동, 악사, 전사, 예언자의 모습을 반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역대기는 어떤 다윗, 예, 하나님 앞에서 제사를 드리고 백성을 축복하는, 제사장으로서의 다윗을 소개합니다. 왕 같은 제사장, 제사장 같은 왕의 모습으로 오늘 다윗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지요.
특별히 이 모습은 지난 시간에 이미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 장면에서부터 보여집니다. 왕복을 입지 않았지요? 세마포 옷을 입었습니다.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이 입던 옷을 입었고, 또 거기에 무엇을? 예, 베 에봇을 입었던 것이지요. 물론 판결흉패, 우림과 둠밈까지 들어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늘 제사장들이 하나님 앞에 서서 그분을 섬길 때 입던 에봇을 입고 저 13킬로미터의 행진을 했던 것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그렇게 오늘 성경 역대기는, 귀환공동체를 다시 영광스러운 공동체로 세워낼 이상적인 인물로, 다윗왕을 소개하는데, 저 다윗왕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고 백성을 축복하는 모습으로, 거룩한 제사장으로 존재했던 왕이었음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여쭈어 백성에게 전하고, 백성의 아픔과 고통을 하나님께 아뢰어 올리는 중보자, 오늘 그가 감당했던 제사장의 역할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궁금해지지요. 다윗이 뭐라고 축복을 했을까요? 아론더러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축복의 원형은 이러합니다. 아마 다윗도 여기에 준하게 백성들을 축복하였지 싶습니다. 제가 한번 읽어드리겠습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민수기 6:23-27)
아론이 복을 빌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제사장이 복을 비는 일을 멈추지 말아야할 이유 였습니다. 제사장이 복빌기를 멈추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실 수 없으셨기 때문이지요.
그래요. 제사장은 목회자는 그리고 나아가 성도는, 다른 많은 일들에 함몰되어 살아가도, 꼭 잊지말고 감당해야 하는 것이 바로 “복을 빌어주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복을 주시기를, 그 사람을 지켜주시기를, 그 사람에게 은혜 베푸시기를, 그 사람에게 평강 주시기를 빌어주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복을 빌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신 것이 바로 아론계열 제사장이었던 것이지요.
여러분, 다른 일들 하시느라 이 일을 못하시면 안됩니다. 우리들의 마음과 생각이 온통 복잡하고 고통스럽고 혼란스러워도, 오늘 우리가 해야할 일은, 내가 만나는 사람들, 아니, 오늘도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들, 하나님이 바라보시며 마음 아파하는 사람들을 위해 ‘복을 비는 것’입니다. 미워하고 멀리하고 시기하고 외면하고 무시하고 못본 체하고, 없는 존재 취급하며 사는 게 아닙니다. 오늘도 부지런히 내 생명을 소진해가며 우리는 저를 위해 복을 비는 것입니다. 마치 대 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는 물론이요, 죽어가는 강도를 위해서, 그리고 자신을 때리고 못박고 악한 판결로 십자가에 내어주는 이들을 위해서, 당신을 배반하고 뿔뿔히 흩어지는 제자들을 향해서도 복을 빌며 간구하고 기도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의 중심에 하나님이 바르게 임재해 계십니까?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예, 그렇다면 복을 빌어주게 되어있습니다. 내 안에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분노하고 미워하고 척지고 서 있게 내버려두질 않으시기 때문이지요. 오늘도 복을 빌어주지 못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지 않던지, 아니면 여전히 저 아비나답의 집에 쳐박아 두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늘 하나님을 중심에 모신 자 답게 ‘복을 빌어주는 사람’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세 번째, 예배는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사람들에게 복을 빌어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함께 먹을 것을 나누는 것이 예배의 완성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중심에 모신, 제사장으로 서게 되니, 또 하나의 모습이 등장하게 되는데, 무엇입니까? 예, 입술로만 축복하지 않습니다. 내 가진 것을 기꺼이 다 베풀고 나누어주게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중심에 계신 사람은, 복을 빌어주는 사람은 타인의 것을 탐내고 움켜쥐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 것을 나누어주게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니, 내가 복을 빌어주어야하는 제사장인 것을 모르니, 오늘도 손을 펴지 못하고, 내어주지 못하고 도리어 빼앗으려 하고 훔치려 하는 것이지요. 오늘 저와 여러분은 저 다윗처럼 모두에게, 신분고하 빈부귀천을 떠나서 우리의 귀한 것을 나눌 수 있는 복된 종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2-3절을 이어서 읽어보겠습니다.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 드리기를 마치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고 이스라엘 무리 중 남녀를 막론하고 각 사람에게 떡 한 덩이와 야자열매로 만든 과자와 건포도로 만든 과자 하나씩을 나누어 주었더라”(대상 16:2-3)
그래요. 우리의 축복은 말뿐인 축복이 아니면 좋겠습니다. 말만 하니 춥고, 말만하니 배고프고, 말만 하니 달라지는 것이 없다고 야고보서가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까? 확인해보죠. 야고보서 2장 15-16절입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쵸? 다윗은 오늘 말로만 축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백성들에게 복을 빌며 먹을 것을 나누지요? 언약궤를 옮기느라 고생한 사람들, 지지하고 힘을 보탠 이들에게만 나누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무리 중 남녀를 막론하고 각 사람에게 공평하게 먹을 것을 나눠주었던 것이지요. 어때요? 예수님이 보이고, 초대교회가 보이는 것입니다. 늘 하나님과 교제하셨던 예수님이 그러하셨고, 성령님이 뜨겁게 임했던 초대교회가 바로 이 나눔의 축복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요. 예수님은 늘 당신을 찾아와 말씀을 듣고자 하는 군중을 긍휼히 여기시고 음식을 공급하셨습니다. 초대교회는 자기의 것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없이 그 소유를 다 나누는 공동체였던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경험하는 장소,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사는 성도들이 머문 곳에는, 언제나 이토록 나눔이 풍성하게 실현이 되는 것이지요. 우리 하일교회가 또한 그러한 곳이 아닙니까?
죽도록 농사를 지어서, 열심히 개발하고 노력해서, 또 감사와 기쁨으로 준비해서, 모두 다 아까운 내 것이지만, 그것을 온 교우들의 것으로 이웃들의 것으로 나누고 흘러 보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중심에 계신 분들, 성령님이 충만한 분들, 오늘도 은혜로 살아가는 분들이신 것을 우리는 바로 여기, 음암 하일교회에서 확인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곳이기에 보여지는 특징이 또 하나 있는데, 언제나 찬양이 가득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기쁨의 찬양이요, 또한 우리에게 귀한 것을 나누는 일들을 위한 복을 비는 기도요. 우리 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지키심과 돌보심, 지금까지 우리를 위해 일하신 놀라운 일들을 기리는 노래와 연주가 가득한 것이지요. 오늘도 찬양 한 소절 부를 수 없는, 안타까운 시간들로 우리들의 삶이 채워지지 않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궤 앞에서, 하나님을 칭송하고 감사하고 찬양하는 삶, 나 혼자 말고, 모두가 함께 알라못에 여덟째 음에 인도자의 제금소리에 맞추어 힘껏 찬양하고 노래하는 삶, 오늘 하나님을 우리가 마련한 곳 정 중앙에 바르게 모셨기에 비로소 누릴 수 있는 복된 삶, 우리 모두가 살아가실 수 있으시길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고 끝이 아닙니다. 예배의 마지막은, 예배당에서 마치지 않습니다. 예배당에서의 축복을, 집으로 가지고 가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 4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이에 뭇 백성은 각각 그 집으로 돌아가고 다윗도 자기 집을 위하여 축복하려고 돌아갔더라”(역대상16:43)
‘to bless his family’ 는 뭇백성에게도 다윗에게도, 모두에게 걸리는 구절입니다. 복을 받고 멈추면 안됩니다. 백성들도 다윗도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복을 가지고 자기 집을 축복하기 위해 나아가는 것이지요. 하나님께 예배드렸으니, 이제 가족을 축복하러 가시는 것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교회에서는 하나님께 잘하시시고 성도들에게 잘하시는 분들이, 집에 가서 가족들에게 못하시는 분들이 왕왕 있습니다. 둘 다 잘하셔야 합니다. 가족들을 우리 집을, 잘 축복하시고, 그 축복을 우리 주변으로 더욱 확장해 가시길, 오늘도 하나님께 예배를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드리기에 나누고 흘려보낼 은혜와 복이 충만한 우리 모두가 다들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런데, 아시는 대로, 다윗은 이것을 완수해내지 못했습니다. 실패했습니다. 집에 돌아갔더니 아내 미갈이 다윗을 향해 입을 삐죽거렸던 것이지요? 축복하려고 내려간 간 집에서 오히려 실컨 아내와 싸우고 쏘아붙이고 저주를 했던 것이지요? 그 아내를 다시는 보지 않고 살았던 것입니다. 마귀에게 진 것입니다. 쏘아붙이는 아내를 긍휼히 여기고 백성들을 축복하듯, 축복하려고 온 마음을 잃어버리지 말고 잘 축복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사람 때문에 말 때문에 선한 마음을 하나님 주신 마음을 잃어버리고 말았던 다윗을 역대기는 말하지 않고 있지만, 우리는 이미 사무엘서를 통해서 확인하여 알고 있는 것이지요 ㅠㅠ
그래요. 하나님의 집에서의 섬김과 찬양이 우리에게 주신 집에서의 섬김과 찬양으로, 일터에서와 배움터에서의 섬김과 찬양으로까지 이어져야 합니다. 남편이 자식이 아내가 부모님이 예배 잘 드리고 온 내 마음을 상하게 해도, 직장 동료와 상사와 부하가 입을 삐죽거려도, 친구들이 예수님 모르는 선생님들이 꼴보기 싫게 깐족거려도, 네, 여러분,바로 그때입니다. 나는 다윗이 아니지롱! 나는 다윗보다 낫지롱! 하면서 지지 마시고, 축복하십시오. 우리가 해야 하는 일 말씀드렸지요? 하나님께 제사만 잘 드리면 되는 것 아닙니다. 빌어주는 것입니다. 복을 주시길, 지켜주시길, 은혜 주시고, 평강 주시길 빌어주시는 것입니다. 말로만 말고 먹을 것을 나누며 비는 것입니다. 먹을 것을 나누며 축복하는 것입니다. 끝까지 이 일에 승리하는 우리 하일의 식구들이 다들 되시길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