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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면을 응시하는 깊은 눈길, 오똑한 콧날 그리고 하나로 붙은 듯한 굵고 짙은 눈썹의 얼굴.
초현실적인 상상의 이미지들로 가득찬한그림.
68운동 이후 급격히 대두된 페미니즘 운동의 물결 속에서 새롭게 조명된 자의식의 화가 프리다 칼로.
'일생 동안 나는 두번의 심각한 사고를 당했습니다.
하나는 18살 때 나를 부스러뜨린 전차입니다.
부서진 척추는 20년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죠. 두번째 사고는 바로 디에고와의 만남입니다.'
프리다는 삶이 아니라 고통과 고독을 살아낸 비범한 인물이다. 고통 그리고 고독은 삶의 본질이 아니던가!
1097년 프리다는 이 해, 7월 6일에 19살 나이로 독일에서 멕시코로 이민온 유태계 독일 출신 사진 작가인 아버지 기예르모 칼로와 멕시코 원주민 혈통의 어머니 마틸데 칼데론의 네 딸중 셋째딸로 코요아칸에서 태어났다.
태어나면서 원래 막달레나 카르멘 프리다 칼로 이 칼데론이라는 긴 이름을 받지만, 그는 프리다 칼로라는 간결한 이름을 썼고, 프리다라고 불렀다. 프리다(Frida)는 평화를 뜻하는 독일어 말 Friede를 바꾸어 만든 말이다.
그가 태어난 집, '푸른저택'이라 불리는 이 집은 나중에 프리다 기념관이 된다.
프리다 자신은 멕시코 혁명이 발생한 1910년에 태어났다고 사람들에게 즐겨 말하곤 했다는데, 이는 당대 공산주의의 지향에 동질감을 느끼던 자신의 정서를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였다.
아버지 기예르모 칼로는 우울한 눈빛의 유태계 독일인 사진사로 예술적 감수성이 강했고, 어머니 마틸드 칼데론은 스페인과 토착 원주민의 피를 이어 받은 강인하고 현실적인 성품의 소유자였다. 프리다의 삶에서 결정적인 요소 둘, 즉 예술과 삶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는 각각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받은 셈이다. 디아스 시절 관공서의 사진사로 일했던 아버지는 멕시코 혁명으로 인해 직장을 잃었고, 간질을 앓고 있었다. 그는 멕시코 시티 중싱부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면서 낡은 휘장을 배경으로 영성체 받는 여인들의 모습이나 신혼 부부들의 사진을 찍어주는 일로 생계를 유지해갔다.
그다지 건강하지 않았을 뿐더러 몽상적이었던데다가 간질마저 앓고 있던 아버지를 프리다는 깊이 흠모하고 헌신적이었으며, 아버지 기예르모도 자식들 가운데 프리다를 가장 사랑했다.
1952년 프리다 칼로가 그린 <아버지의 초상>이란 작품 하단에는 이런 헌사가 적혀 있다.
유태계 독일 출신으로 예술가이자 전문 사진사였고, 성품이 너그러웠으며 명석했던 나의 아버지 기예르모 칼로의 초상이다.그는 성실하고 용기있는 사람이었다.
60년 동안 간질로 고생하면서도 결코 일을 멈추지 않았고, 히틀러에 맞서 싸웠다.
깊은 애정을 담아 ... 딸 프리다 칼로.'
나의 탄생, 1932, 금속판에 유채, 30.5x35cm
1913년(6세)
젖 먹던 어린시절, 동생 크리스티나를 돌보느라 유모에게 맡겨져 자라난 프리다는 6살이 되던 해에 소아마비에 걸려 9개월 동안 방에 갇힌 채로 생활하게 된다. 어린시절 겪어야 했던 병과 외로움은 그녀의 자의식에 깊은 흔적을 남긴다. 평생 오른쪽 다리를 혐오해, 말라비틀어진 이 다리를 감추기 위해 긴 치마를 즐겨 입었으며, 외로움은 그의 삶의 방향에 하나의 이정표와 같은 역할을 한다.
고통과 고독은 그에게 언제나 함께 있으며, 무엇이든 함께 하는 가장 가까운 친구마냥 평생을 동행한다.
고통과 고독은 프라다가 자신의 전 생애에 걸쳐 태워야 할 삶의 에너지이자, 일용할 양식이나 다름 없었다.
고통과 고독은 내면에 있는 자신의 또 하나의 모습을 찾도록 이끄는 인도자가 된다.
프리다의 그림에는 자화상이 유별나게 많다.
자화상은 고독이라는 호수의 수면 위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다.
분신의 형태로 자신의 모습을 둘로 설정한 그림, <두 명의 프리다>를 보면 고독은 그의 자의식의 형성에서 핵심적인 토대를 구축하고 있다는걸 알수 있따. 프리다는 육신의 고통과 영혼의 고독을 이겨내기 위해 평생에 걸쳐 자기내면의 또 하나의 자기와 가장 은밀하고 가장 깊은 대화를 나눈 셈이다.
유모와 나 , My Nanny and I, 1937, 금속판에 유채, 30.5X34.5cm
1921년 (14세)
멕시코 최고의 명문인 국립예비학교에 입학한다.
2000여명에 달하는 신입생들 가운데 여학생은 프리다를 포함하여 30여 명에 불과했고, 이곳에서 프리다는 첫사랑이었으며, 평생 이어가는 우정의 친구 알레한드로 고메스 아리아스를 만난다.
1925년 (18세)
9월 17일, 프리다와 알레한드로가 탄 버스가 전차와 충돌하는 대형사로를 맞게 된다.
알레한드로 고메스는 가벼운 상처를 입었으나, 프리다는 온 몸의 뼈를 퍼즐 조각처럼 맞추어야 할정도로 심각한 부상을 입는다. 버스기사의 실수로 발생한 순간적인 이 사고로 인해 프리다는 평생 헤어나지 못하는 고통의 후유증을 안고 살게 된다.
손잡이들이 달린 쇠파이프로 그의 몸은 한복판 관통당한다.
파이프는 옆가슴을 뚫고 들어와 골반을 통해 이어진 질으 뚫고 허벅지로 나왔고, 의사들은 세 군데의 요추 골절과 쇄골, 골절, 제3, 제4 늑골골절, 세군데의 골반골절, 어깨뼈의 탈구, 그리고 오른쪽 다리의 열두군대 골절과 비틀리고 짓이겨진 오른발을 발견했다.
이사고로 프리다는 오랜 동안 석고로 만든 전신 깁스 틀 속에 갇혀 지내야 했고, 퇴원 뒤에도 학교에 간다는 것은 생각할수 없는 일이었다.
프리다는 이처럼 고통이 전신을 덮고 있을때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침대에 누운 채 머리맡에 붙여놓은 거울을 들여다보며 그녀느 자신의 자화상을 그렸다. 몰핀으로도 감당하지 못하는 고통을 프리다는 그림작업으로 이겨냈다.
이시절의 고통과 행복을,
'나는 병이 난것이 아니라 부서졌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는 동안만은 행복했다'고 훗날 술회한다.
부서진 기둥, 1944년, 캔버스에 유채, 40X30.5cm
뒷날 가죽 코르셋으로도 더이상 지탱할수 없어 철제 코르셋으로 바꾸어 착용해야했고, 무너져 내리는 척추의 교정과 ,통증때문에 수차례의 거듭된 수술을 감내해야 했던 시절에 그린 이 그림은 바라보는 눈을 아프게 할 정도로의 직관적 통증을 가져와 온몸을 감는다.
1926년(19세)
사고의 후유증으로 고통의 나날을 지내며 첫사랑 알레한드로에게 끊임없는 사랑의 편지를 보낸다.
계속 침대에 누워있는 동안 지루한 나머지 무언가 해보기로 결심한 그에게 가족들은 침대의 천장에 거울을 설치해주고 침대에 부착할수 있도록 특수 이젤을 제작해 설치해준다. 첫번째 그림 '자화상'을 완성후 알레한드로에게 보내지만, 그는 나중에 결국 파리로 떠나게 된다.
붉은 옷을 입은 자화상, 1926, 캔버스에 유채, 79.7x60cm
1928sus (21세)
그의 집의 손님으로 드나들었던 좌익계 활동가 티나 모도티의 소개로 공산당 조직에 참가한다.
이때 디에고 리베라와 두번째 만나게 된다. 처음 그를 만난것은 1923년 당시 벽화화가로서 이미 명성을 얻고있던 디에고가 프리다의 학교 국립예비학교에서 교육부 주문으로 <창조>라는 타이틀의 프레스코 벽화작업을 하고있을 무렵이다. 최초의 만남을 디에고는 이렇게 회상한다.
'그녀는 보기 드문 품위를 지녔고, 확신에 찬 모습이었다. 눈에는 기묘한 불길이 타오르고,
가슴은 봉긋 솟아 오르기 시작하여 마치 아이 같지 않은 매력을 갖추고 있었다."
디에고의 초상 Portrait of Diego Rivera,1937
목판에 유채,18x12.1/2 in
프리다와 디에고, 1931, 캔버스에 유채, 100x78.8cm
1929년 (22세)
22살이 되던 이 해 8월 21일, 프리다는 42세의 디에고 리베라와 결혼하여 그의 세번째 부인이 된다. 스므살 이상의 나이 차이와 복잡한 여자 관계 때문에 어머니를 비롯한 주변의 많은 반대가 있었지만 프리다의 치료비 지출로 심한 재정압박을 받고 있던 아버지의 동의로 혼인을 결행한다. 같은 해에 디에고가 공산당에서 제명당하면서 프리다도 당적을 버린다.
헨리포드병원 Henry Ford Hospital
금속판에 유채, 30.5x38cm
1923년 (23세)
첫번째 임신으로 아이를 가지지만, 끔찍했던 교통사고와 선천성 자궁이상으로 낳을수 없어 임신 중절을 한다. 이해에 록펠러 재단와 벽화제작 초청을 받은 디에고와 미국으로 이주한다.
영혼을 바쳐 디에고를 사랑한프리다는 사랑의 완성을 위해 아이의 출산을 간절하게 기구하지만 아이를 낳을수 없는 자신의 상태에서 깊이 실망하고, 이로 인한 좌절감에서 떨치지 못한다.
프리다와 유산 혹은 유산, 1932, 종이에 리도그래피 31.7x23.5cm
1923년 (25세)
두번째 아이를 임신하지만 유산하고, 이해에 어머니가 폐암으로 사망한다. 필경 천성이엇을 디에고의 악명높은 방탕한 성정이 다시 발동하면서 디에고를 향한 사랑에서도 프리다는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으며 겹쳐지는 불운과 불행에서 비롯된 우울증의 늪 속으로 깊이 침잠하여 좀처럼 헤어나오지 못한다.
1934년 (27세)
다시 멕시코로 돌아온 뒤 세번째로 임신을 하게 되지만, 디에고는 출산을 원하지 않는데다 난소 발육부진으로 임신한지 석달 만에 결국 다시 중절 수술을 거쳐 출산을 포기하게 된다. 이런 와중에도 디에고는 프리다의 막내 동생인 크리스티나와 깊은 관계를 맺는다.
이사실을 알게된 프리다는 이전의 그 어느때와는 비교할수 없늘 만큼 큰 충격을 받고 디에고가 좋아하던 긴 머리를 잘라내고, 그를 떠나기로 작심하여 별거에 들어간다.
그러나 이 별거는 불과 수 개월에 그치고 얼마지나지 않아 프리다는 다시 디에고와 합류한다.
하지만 이때 프리다의 정신적 고통과 상실감은 대단히 큰 것이었다.
디에고는 프리다의 사랑으로 그녀의 모든것이자 삶 그 자체와 동격인 존재인데다 크리스티나는 어린 시절부터 애증의 관계로 얽혀 있지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는 치매에 걸려 있는 어려운 가족 상황속에서 프리다에게 남은 거의 유일한 혈육이면서 마지막 친구이자 믿을을 맡기고 싶은 동지나 다름없는 사람인 셈이었다.
이시절의 깊은 상실감과 고통도 프리다는 그림으로 묘사해낸다.
배신자 디에고에게 보내는 한장의 편지와도 같은 이그림에서 배반의 칼날로 자신의 후벼 쑤셔대는 그 남자를 가리키며 프리다는 이렇게 묘사한다.
침대앞에 서있는 남자는 자신의 옷소매를 피로 물들인 채 말한다.
'그냥 몇번 칼로 살짝 찔렀을 뿐입니다. 판사님. 스무번도 안 된다구요.'
몇달의 별거 생활을 보낸 프리다는 다시 디에고의 곁으로 돌아가고, 디에고는 이일을 자랑삼아 떠벌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이들의 사랑이 완전히 회복된것은 아니었다.
몇개의 작은 상처들. 1935, 금속판에 유채, 29x39.5cm
머리카락을 자른 자화상, 1940, 캔버스에 유채, 40x27.9cm 여동생 크리스티나, 1928
1935년 (28세)
디에고에 비할수는 없지만 프리다의 연애 이력에도 언급할만한 것들이 적지는 않다.
이 해 프리다는 일본 태생의 조각가인 이사무 노구치와 사랑에 빠진다.
마침 디에고는 크리스티나와의 관계를 청산한 후였고, 그는 프리다와 이사무의 비밀스런 만남을 눈치챈다.
프리다의 연애를 마땅치 않게 여겼던 디에고의 협박으로 결국 그들의 만남은 마감된다.
1937년 (30세)
스탈린의 숙청과 암살 위험을 피해 망명객의 신세로 떠돌던 러시아의 풍운의 혁명가 트로츠키 부부에게 거처를 마련해주면서 일시적이나마 그의 활발한 교제 끝에 서로 사랑하는 관계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시절 프리다는 왕성한 작품활동을 전개한다.
두 세계 사이에서. 1932
내 치마가 저기 걸려있다, 1933, 목판에 유채, 46x50cm
죽음의 마스크와 소녀, 1938
1938년 (31세)
이 해 11월 뉴욕의 줄리앙 레비 화랑에서 첫번째 개인전을 갖게 된다. 이를 계기로 프랑스 초현실주의의 거장으로 이미 명성을 떨치고 있던 앙드레 브루통과 만난다. 브루통은 아래에 소개된 그림, <물이 내게주는 것>을 보고 격찬을 아끼지 않고 프리다를 파리로 초청한다.
뉴욕에서 프리다는 사진작가 니콜라스 머레이를 알게되어 사랑에 빠지고 수개월간 함께 지내면서 학생시절의 밝고 신명찬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니콜라스 머레이가 이 시절에 프리다 칼로를 촬영한 사진들에서 프리다의 순수하고 열정적인 아름다움의 표현들을 많이 찾아볼수 있다.
이시절 디에고와 프리다는 서로에 대해 애써 무관심한 척하고 있었지만. 프리다가 자신의 일기장에 적은 심경의 표현을 보면, 그가 디에고를 얼마나 절절하게 사랑하고 그리워 했는지, 그리고 그녀 앞에 펼쳐진 현실이라는 망망대해의 파도에 휩쓸린 자신의 존재의 고독감이 얼마나 무겁고 비장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프리다는 삶을 거부하지도 피해가지도 않는다.
'살아가는 동안 결코 당신의 존재를 잊이 않으리라.
당신은 지친나를 안아주었고 어루만져 주었지. 너무나도 작은 이세상에서 시선을 어디로 향해야 하나?너무 넓고 깊어라! 이제 시간이 없다. 더이상 아무것도 없다. 아득함, 오직 현실만이 존재한다. 그랬다. 항상 그랬다.
1937년 프리다는 더이상 디에고에게 얽매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프랑스 파리의 피에르 콜르 화랑에서 열린 멕시코전에 초청을 받아 디에고의 곁을 떠난다.
물이 내게 주는것. 1938. 캔버스에 유채. 91x70.5cm
1939년 (32세)
앙드레 부르통의 후원으로 파리의 피에르 콜르 화랑에서 전시회를 가진다.
이 전시회에서 프리다는 칸딘스키와 피카소 등 당대의 저명한 화가들로부터 극찬을 받는다. 칸딘스키는 그녀를 포옹한 채 눈물까지 흘렸다고 한다.
이런 활동의 성과로 라틴 아메리카 출신의 화가로서는 처음으로 루브르 박물관에서 그녀의 그림을 구입하는 성과를 얻기도 한다. 한때 몰두 했던 머레이와의 연정도 식어 이별을 고하고, 디에고와의 관계도 악화되어 결국 이혼에 이른다.
그리다는 그림에 한층 더 몰두한다.
꿈, 1941
이 작품을 보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앙드레 브루통의 집에 머물면서 초현실주의자들이나 이브 탕기, 피카소 등과 같은 저명한 화가들에게 열렬한 찬사와 환대를 받았고, 바실리 칸딘스키는 그녀의 그림에 감동한 나머지 눈물을 흘리며 전시장의 모든 사람들 앞에서 그녀를 포옹하기도 한다.
하지만 프리다는 디에고와 함께 했던 뉴욕의 생활에서와 같은 행복감을 파리에서는 느끼질 못했다.
그녀를 맞이하는 브루통의 준비도 소흘했고, 그의 집에서 마난게 된 초현실주의자들에게도 실망한다. 파리의 지식인들에게 대한 깊은 혐오감을 프리다는 머레이에게 보내는 편이에서 이렇게 적는다.
'그들이 얼마나 썩어 있는지 더이상 참기 어렵군요. 정말 너무 심한 편입니다.
파리에서 예술가인 척하는 이 멍청이들과 일을 하느니 차라리 롤루가 시장바닥에 앉아 옥수수전이나 부쳐 파는게 나을겁니다. 나는 디에고나 당신이 이렇게 어리석은 수다와 현학적인 토론에 시간을 낭비하는 모습을 본적이 없어요...
무엇때문에 유럽이 이지경으로 곪아 터지게 되었는지. 무엇때문에 이 무능력자들이 히틀러나 무솔리니 일당을 불러들이게 되었는지를 이젠 정말 잘 알수 있을것 같습니다."
내 마음속의 디에고. 1943
온몸을 얽어매다시피 꽁꽁 둘러싸 보는 이로 하여금 당장 절로 단추 하나를 풀게 만들것 같은 질식감을 주는 복식과 분노를 감추고 있는 듯 무심하지만 섬뜩한 눈초리, 게다가 일체의 움직임을 거부하는 듯 완강하게 닫혀진 태도. 코밑의 선명한 수염자국과 더불어 단정하지만 짙게 부각된 눈썹 위 이마한가운데 자리잡은 디에고의 얼굴.
갓 잡아 올려져 퍼덕이는 물고기의 비늘에 반사되는 햇살의 번뜩이는 광채마냥 이토록 선명하게 삶의 한가운데 자리 잡은 의식을 표현해낸 그림은 드물다.
두명의 프리다. 1939, 캔버스에 유채. 173.5x173cm
희망의 나무, 1946
Roots (Raices), 1943, 금속판에 유채, 11 7/8 x19 3/8 in
1953년 (46세)
멕시코에서 회고전이 열린다. 침대에 실린 채 개막식에 참석한다.
이미 건강은 크게 악화되었고, 오른쪽 발이 썩어들어가 무릎 아래까지 절단한 프리다의 몸은 그림(부서진 기둥)에서 보는 것처럼 무너질 때로 무너져 더 이상 추스르기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녀의 불타는 투지와 열정을 가로막을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프리다는 1950년과 51년 사이에 오른쪽 발이 썩기 시작하여 무릎 아래까지 다리를 절단해야 했고, 영국에서 골수 이식수술을 받다가 세균감염으로 1950년 3월부터 11월까지 무려 여섯 차례나 수술을 받아야 했다.
이 시절 디에고는 프리다의 곁에 머물면서, 그녀를 위해 할수 있는 일이라면 어떤것이건 다 해주려고 했다.
'내게 날아다닐 날개가 있는데 다리가 왜 필요하겠는가?"
프리다의 육신은 자신의 말마따나 부서질대로 부서진 처참한 몸뚱아리 였지만 그녀의 영혼은 삼의 그 어느순간보다도 맑게 그리고 강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부서진 기둥. 1943 ' 을 그리는 프리다
- 영화 <프리다칼로>에서
프리다는 고독을 채워야할 캔버스였으며,
고통은 곧 물감이었으며, 그림은 사랑이었다.
그녀에게 사랑은 언제나 새로이 출산하는 탄생이었으며, 삶 그 자체였다.
프리다는 물감 대신 자신의 몸의 피를 쥐어 짜내었으며, 그녀가 화필을 휘저은 공간은 캔버스 위가 아니라 고독의 허공이었다. 태어난 그림은 프리다의 삶을 향한 열정의 과실. 곧 사랑의 출산이다.
프리다의 기념회고전은 멕시코 전역에서 쏟아지는 열광에 젖을 만큼 큰 성공으로 마무리 되었다.
프리다와 디에고는 이 전시회를 계기로 서로의 사랑을 다시금 확인한다.
가슴아픈 기억 Recuerdo. 1937. oleo sobre tela. 40x28.3cm
1954년 (47세)
페렴에 걸렸지만 6월에 접어 들면서 프리다의 건강은 이시적으로 호전된것처럼 보였다.
프리다는 디에고와 함께 6월 2일 공산주의자 시위에 참여한다.
이 반미 시위는 미국의 과테말라 정국의 개입에 반대하는 운동이었지만 공산주의체제라는 새로운 세계의 도래와 확산을 위한 투쟁이기도 했다. 시위가 있던 날 내리는 비를 피하지 못한 프리다는 발병한 폐염을 더이상 이겨내지 못한다. 세상을 떠난 프리다는 화장되었다.
상처 입은 사슴. 1946. 캔버승에 유채. 22.4x30cm
프리다의 사망일은 1954년 7월 13일인데, 마침 그녀가 전 날 쓴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세상을 떠나기 전 날은 프리다와 디에고의 결혼일로부터 25주년 기념일을 17일 앞둔 날이다. 프리다는 17일 뒤에 다가올 결혼 25주년 기념 반지를 디에고에게 미리 건넨다.
왜 반지를 미리 주는가를 디에고가 묻자 ' 머지 않아 당신 곁을 떠날 것 같아서 그래요.' 라고 말한다.
지구와 나, 디에고, 솔로들이 어우려지는 사랑의 포옹, 1949, 캔버스에 유채, 70x60cm
첫댓글 프리다 칼로의 인생을 느껴보라. 그녀를 느껴보라. 당신도 한 때 그였을 것이다.
슬퍼요 불쌍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