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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유럽 여행 유감 (2019. 6. 1. ~ 11.)
나이 60에 은퇴한 후 짬짬이 유럽여행을 했었다. 패키지 형태로 서유럽, 동유럽, 북유럽을 차례로 둘러본 것이다. 그러나 짧은 기간에 여행사 계획대로 주마간산 하는 방식으로 다녀온 것이라서, 여기저기 여유를 가지고 더 둘러보고 싶은 소망이 늘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었다.
그런 소망을 이루려면 적어도 한 달 이상의 시간 여유를 가지고 렌트카를 직접 운전하며 돌아다녀야 할 것 같은데, 아무래도 친구 한 부부와 동행해야 할 것 같다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친구들 대부분이 이미 유럽여행을 다 마쳤거니와 장기간의 렌트카 운전에 적합한 마땅한 친구도 없어 그동안 그렁저렁 시간만 허송한 셈이 되었다.
그러던 차에 내 소망을 알고 있는 아내가 뜻밖의 제안을 했다. 그동안 자기가 생활비에서 좀도리 방식으로 저축한 돈이 약간 있으니 그 돈으로 남들이 다 다녀온 스페인/포르투갈 구경이나 가자는 것이었다. (좀도리: 옛날 어머니들이 한 끼분 식량에서 조금씩 덜어 모아 두었다가 나중에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던 지혜로운 방식인데, 좀도둑질이란 말에서 생겨난 사투리?)
스페인/포르투갈은 내 렌트카 여행 꿈속에 포함된 나라들이긴 하나 그것이 패키지 투어일 수밖에 없어 얼른 내키지 않은 제안이었다. 하여, 결정을 미룬 채 간혹 얘기만 주고받았는데, 아내의 주장은 나도 이제 장기간 운전은 무리라는 것이었고 또 마땅한 동반 친구도 없지 않으냐는 것이었다. 내게 운전은 아직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확고한 믿음으로 살고 있지만, 동반 친구는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던 차에 조금은 매력적인 패키지 투어를 발견하게 되었다.
아부다비/두바이와 스페인/포르투갈, 남프랑스, 모나코를 연하는 여행코스인데, 비록 내가 원하는 아름다운 오스트리아나 스코틀랜드, 등을 포함한 것은 아니지만, 스페인/ 포르투갈은 물론이고 지중해 연안을 많이 둘러볼 수 있고, 또 덤으로 신흥 아랍 관광지인 아부다비와 두바이가 포함된다는 게 매력이 아닐 수 없었다. 하여, 내 소망을 줄여서 아내의 제안을 실행하기로 결정하게 되었다. 인생은 어차피 선택의 연속인 데다, 내 자신의 그림자도 이제 점점 길어져 감을 느끼고 있는 판국이니, 마냥 전부가 아니면 안 된다고 버틸 수도 없지 않은가!
남유럽이라고 분류할 때 유엔에서는 프랑스를 제외하고 이베리아반도와 이탈리아 반도, 그리고 발칸반도를 포함하는 모양이지만, 나는 임의로 프랑스 남부를 포함하는 아래 지역을 지칭하는 것으로 구분, 사용하고자 한다.
1일 차: 아부다비행 - 아부다비/두바이 관광 10시간 가까이 밤 비행기를 타고 아부다비 공항에 내리니 해 뜨는 아침이었다. 최단 항로로 히말라야산맥 아래를 통과해 왔고 지구 자전과는 반대 방향으로 비행했는데도 그만큼 많이 걸린다는 게 얼른 이해가 안 되었다. 더구나 같은 항공사 비행기로 귀국할 때는 1시간 정도 빨라진다고 하니 말이다.
생각할 수 있는 해답은 비행기 고도인 10km 이상의 상공에서 서에서 동으로 흐른다고 하는 Z 기류에 있는 것 같긴 하다. 그 기류가 얼마만큼 강력하냐에 따라 비행기 속도가 크게 좌우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나중에 한 번 확인해 볼 일이다. 아무튼, 한국 시각보다는 현지 시각이 5시간 느리다는 것만 확인했다.
첫날 주요일정으로 세이크 자이드 그랜드 모스크라는 이슬람 사원을 구경했는데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이 될 것 같다. 워낙 강력한 인상으로 남았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 비행기 안에서 좌석 뒤에 설치된 모니터를 통해 그 건설과정 소개영화를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그 아름다움과 웅장하고 정교한 건설과정에 대해서는 별도 사진으로 더 소개할 생각이다.
이어서 두바이로 이동해서 우리가 TV 등을 통해 보던 초고층 건물들을 먼 거리에서 외관으로만 살펴본 후, 시내 건물들로 둘러싸인 인공호수에서 야경과 분수 쇼를 감상할 수 있었다. 그런대로 볼 만 했지만, 소위 선택 관광이라는 명목으로 비용이 만만치 않아서 70불이나 되었다.
아랍에미리트는 7개 아랍 토후국들의 연방 국가인데, 1958년 페르시아만에서 석유가 발견됨으로써 벼락부자가 된 셈이다. 현지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두바이는 이미 석유생산이 끝났다고는 하나 이미 부를 축적했을 뿐만 아니라 위정자들이 그들의 장래에 면밀히 대비하고 있는 듯하니 다시 보잘것없던 옛날로 쉽사리 추락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취약한 사회구조가 문제가 될지도 모른다. 현지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토호 아랍인들은 사회의 최상층에서 정치와 경제를 틀어쥐고서 국가 시스템의 하부구조는 거의 전부를 해외 빌려온 손에게 맡기고 통제만 한다고 하니, 마치 수많은 아랫것과 머슴들을 부리며 군림하던 우리의 양반사회와 닮은 꼴이 아닌가! 이런 시스템이 과연 얼마나 오래 지탱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2일 차: 마드리드행 – 마드리드 및 톨레도 관광 첫날 저녁에 출발하는 마드리드행도 8시간 정도의 야간 비행! 마드리드 도착 시각도 해 뜨는 아침 시간이었다. 여행사들이 비행요금을 낮추면서 낮 시간에 여행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이렇게 계획했으리라. 둘째 날 첫 일정으로 세계 3대 미술관이라고 하는 프라도미술관을 구경했는데, 역시 카메라 사용을 허용하지 않으니 수신기의 이어폰에서 들리는 현지 가이드의 설명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미술은 물론이고 다방면에 박식한 것 같았는데, 목소리가 너무 가느다랗고 단락이 없이 속사포로 말을 이어가는 바람에 아무리 정신 차려 들어도 따라갈 수가 없어 그림 설명을 이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현상은 그녀가 우리와 동행했던 5일 동안 내내 계속되었다. 의문이 생겨 나중에 두어 번 가이드에게 질문을 했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이미 다 들어서 알고 있다는 걸 내가 발견했을 때의 황당함이라니!
그동안 인정하기를 거부해온 내 청력의 문제가 현실에서 강력하게 주목받는 경험을 이번에 하게 된 것이다. 장교 임관 직후 김신조식 특수훈련 중 “격동 후 사격”이라는 이름으로 M-16 소총을 무지막지하게 연속사격하던 시절이 있었고 또 사격훈련시 사선에서 밀접하게 지도한 일이 많았는데, 그때 이미 청력에 문제가 생겼을 거라는 자가진단을 해놓은 상태이긴 하다.
둘째 날 일정 중 마요르 광장을 둘러보았다. 사람들 수에 비하면 광장이 좁은데도 따로 축구장을 마련하고 그물을 쳐놓았을 뿐 아니라, 곳곳에 설치된 극소형 축구장 안에 두 사람씩 들어가 플레이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는데, 스페인 사람들의 축구 열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극소형 축구장: 몇 개의 철제 기둥에 그물을 두르고 2개의 작은 골문을 설치한 것인데, 협소한 공간에서의 볼 처리기술 연마에 효과적일 듯)
오후에는 중세 도시 톨레도를 탐방했는데 난공불락의 성곽도시였다. 도시 전체가 유네 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고 1560년 마드리드로 옮기기 전까지 스페인의 수도 로서 정치와 문화의 중심이었다고 한다. 또 1493년 완공된 톨레도 성당은 그 내부의 시설과 장식의 아름다움이 엄청나며 그 규모도 웅장함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차후 여정에서 보게 되는 세비아 대성당 등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성당을 이 만큼 웅장하고 화려하게 건축, 유지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재원이 필요했을 텐데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콜럼버스 이후로 신대륙에서 유입된 황금의 양이 대단하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충분했을까요? 중세 이후로 극심한 빈부 격차와 교회세력의 비대(전 국토의 1/3 정도 소유)가 사회불안 요소로 상존해오다가 여러 해의 내전을 거쳐 프랑코 독재정치가 있었음에도 아직도 사회안정을 이루지 못한 채로 남아 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쉽게 답할 성질의 것은 아니겠지요.
3일 차: 리스본행 – 카보 다 로카 관람 어제부터 대형 버스를 타고 관광에 임하고 있는데 좀 낡긴 했어도 승차감이 꽤 좋아서 만족이었다. 벤츠 제품이었는데, 이래서 “썩어도 준치”라는 속담이 있는 모양이다. 여정의 마지막 밀라노에서 비행기를 탈 때까지 이놈 신세를 지게 되었는데, 운전 기사도 괜찮아 보였다. 오늘은 국경을 넘어 포르투갈 리스본까지 700㎞ 정도를 6시간 이상 줄곧 달려야 한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주 52시간 근무제가 시작되고 있는데, 스페인 운전기사들의 경우 태코미터(Tachometer) 제도를 엄격히 준수해야 한다고 한다. 간단히 말하면, 4.5시간 운전 후에는 45분의 휴식을 해야 하며, 매일 24시간 중 최소 12시간은 쉬어야 한다는 것이다. 버스에 운행 자동기록 장치인 태코미터가 있고 거기에 기록용 카드가 꽂혀 있는데, 경찰이 요구하면 언제든지 그 카드를 보여 주어야 하므로 단속되지 않으려면 위의 휴식 규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나중에 확인한 것이지만, 종일 달리다 보니 다음 날 운행 시작 전까지 12시간 휴식이 어렵다고 판단되자 미리 여행사에 협조 요청을 하여 대리 버스와 기사를 구하고 자기는 휴식에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우리 운수업계에서도 시급히 도입해야 할 제도라고 보았다.
메리다에서 내려서 로마 유적지(야외극장?)를 잠깐 구경한 것 말고는 포르투갈의 땅끝이라고 하는 까보 다 로까(Cape of Roca)까지 일로매진이었다. 창밖으로 지나쳐 가는 풍경을 조용히 구경하면서 색다른 풍경이 나타나면 카메라에 담기에 바빴다. 그동안 스페인이 “태양의 나라”라고 많이 들어왔는데, 어제와 오늘 경험해보니 역시 태양의 강렬함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베리아반도의 중심부인 대평원을 지나면서 “태양의 나라”라는 찬사 뒤에 가려진 물 부족 현상을 쉽게 느껴볼 수 있었다. 드넓은 평원에 파랗게 자라는 것이라곤 올리브 나무가 대부분이고 포도나무와 일부 야채가 조금 재배되고 있는 정도로 보였으며, 누런 목초와 잡초가 평원을 채우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런 관찰은 다음 날 안달루시아 지방을 통과할 때도 지속되었으며, 나무 분포비율이 조금 완화되긴 했으나 식물 다양성은 여전히 빈약해 보였다. 올리브 나무는 우리나라 야산 소나무처럼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다! 큰 강도 별로 안 보이고 강우량도 적어 땅에 물이 많지 않으니 풀도 누렇게 되어서 6월인데도 벌써 건초 수확기인 것 같았다.
국경을 통과해서 포르투갈에 들어서도 풍경은 큰 변화가 없어 보였다. 차이라면 소나무가 좀 더 많아지고 그 품종도 다양하며, 방목되고 있는 소와 말이 더 눈에 많이 띄는 정도!
4일 차: 리스본 투어 – 세비야행 리스본은 타구스(Tagus)강 하구 안쪽에 아늑하게 자리 잡은 천혜의 항구도시 같았다. 15세기부터 해외 식민지로부터 들어오는 재물 덕에 급격한 성장을 이루어 전성기를 누리다가 1755년 리스본 대지진으로 도시 대부분이 파괴되었다고 한다. 이후 도시 부흥을 위해 진력하여 지금은 구시가지와 신시가지가 공존하고 있는 상태라고.
리스본 항구 연변에 하차하여 제로니모스 수도원과 벨렘탑을 외관으로만 보면서 오래된 항구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어서 로시우 광장을 둘러보았는데, 여기에는 현지인들과 관광객들이 많고 그럴싸한 건물과 상점도 많아서 비교적 대도시다운 면모가 보였다. 그러나 포르투갈에는 관광자원이 별로 없어서인지, 아니면 많이 있어도 우리 여행계획에 포함이 안 되어서인지 몰라도, 기억에 남을 만한 곳을 포르투갈에서 못 보고 떠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점심으로 “바깔라우”라고 하는 대구포와 감자, 양파, 등을 으깨어 만든 요리를 먹은 후 스페인 세비야를 향해 발길을 돌렸다.
어제 왔던 길을 되돌아 스페인 국경을 넘어선 후 남으로 기수를 돌려 세비야를 향해 달렸는데, 아무리 달려도 어제 본 중부 대평원의 계속이었다. 중심부에서 동서남북 어느 방향으로 달리든 이른 아침부터 종일 부지런히 달려야 겨우 산 같은 형태를 발견할 수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넓은 미국의 대평원 정도는 아니어도 스페인의 대평원도 그 규모가 대단해 보였다. 그러나 넓은 평원에 강다운 강도 안 보이고 똑바로 고개를 쳐들고 선 나무 한 포기도 안 보이는 가운데 올리브와 포도 그리고 채소 농장만 계속 나타나거나 가축 방목장이 이어질 뿐이었다.
이렇게 변화가 없는 풍경의 연속이다 보니 어느새 동행하는 여행객들은 가이드가 내려서 화장실 갔다 오라 하면 갔다 오고 타라면 탔다가는 이내 졸고, 다시 내려서 구경하라면 구경하는 식이 되어버려서 우리 자신이 마치 잘 길든 가축의 무리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런 현상은 이후의 여정에서도 계속되었는데, 장거리 여행에서 이렇게 관광 거점 만을 점검하듯이 짚고 넘어가는 것은 여행의 진정한 즐거움을 스스로 줄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비록 버스를 이용한 패기지 여행이라고는 하지만, 관광 거점 사이사이 차창을 통해 비치는 무한한 풍경의 변화 속에서 사람들의 생활상을, 예를 들어 집의 형태나 색깔, 농사 방식, 등을 보고, 식물과 토양, 기후 등, 자연의 모습도 욕심내어 확인하는 것이 여행의 즐거움을 더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비야에 도착, 저녁을 먹은 후 선택 관광으로 플라멩코(Flamenco) 쇼를 관람할 수 있었다.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 집시(Gypsy)들의 음악과 춤을 지칭하는데, 15세기 이곳에 유입된 집시들의 사랑과 열정, 슬픔을 담아 음악과 춤으로 발전시킨 것이라고 한다. 사진 촬영을 위해 앞줄 좋은 자리를 탐냈으나 여의치 않아 좋은 영상을 많이 담지는 못했지만, 어두운 환경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동영상이 조금 있는데, 따로 제시해볼 생각이다. (참고로, 집시란 동유럽 지방에 많이 거주하는 인도아리안계 유랑민족을 말하며, 플라멩코 춤은 홍학/Flamingo 하고는 상관이 없는 것 같다.)
5일 차: 세비야 관광 – 론다 – 미하스 유럽에서 세 번째로 큰 교회라는 세비야 대성당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 되었다고 한다. 성당의 아름다움과 화려함에 대해서는 이미 톨레도 대성당을 소개할 때 이미 언급한 바 있으니 생략하기로 하되, 다만 이 안에 신대륙 발견의 유공자 콜럼버스의 유골이 안치된 묘가 있다는 것만 짚어드린다.
시내에 있는 스페인 광장은 1929년 박람회를 위해 지어진 건물이라는데, 반원형의 건물이 대칭으로 되어 있고 그 양쪽 끝에는 높은 종탑을 세워둔 모양이다. 앞에는 물이 흐르고 광장 중앙에는 분수가 있으며, 바닥은 물론 벽화 곳곳이 타일로 장식된 것을 볼 수 있었다. 여기에서 출발하는 마차 투어가 있는데, 물론 선택 관광으로 잠시나마 시내의 모습을 둘러보고 싶다면 이용할 만하다. (4인승, 1인당 50유로)
세비야에서 가장 높다고 하는 히랄다 탑은 그 높이가 98m라고 하는데, 옛날 이슬람 세력이 건축했던 당시에는 종탑까지 계단 없이 왕이 말을 탄 채로 올라갈 수 있도록 했다는 설명이었다. 대충 이렇게 세비야 투어를 마치고 점심 후 2시간을 달려 론다(Ronda)로 이동했다.
론다는 투우로 유명하다는데, 우리가 갔을 때 투우 행사가 없어서인지 투우 구경은 못 하고 새로운 다리라는 뜻의 누에보 다리를 관람하게 되었다. 협곡에 걸쳐져 있는 아치형 다리로 그다지 특별할 것은 없는데, 사진작가들이 많이 선호하는 곳이라고.
그보다는 헤밍웨이 관련 얘기가 더 흥미로울지 모르겠다. 스페인 내전 당시 프랑코 군대에 맞서 자유 민주세력을 지원하기 위해 헤밍웨이가 스페인에 건너와 이곳 론다 지역에서 한동안 지냈던 것 같은데, 그 무렵 착수하여 집필한 게 바로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라는 것이다.
소설 속의 배경도 스페인 내전이며 소설의 주인공인 조던은 헤밍웨이 자신을 상정한 것이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조던은 프랑코 군대로부터 부모를 잃고 자신도 폭행을 당한 후 무장한 산속 집시 무리 속에 피신하고 있던 마리아와 사랑에 빠지게 되지요.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조던의 임무인 다리 폭파 장면이 나오는데, 그 다리가 바로 이 누에보 다리를 상정한 묘사일 것이라는 추측을 해봄 직하다.
소설 속에서 조던은 이 다리 폭파 후 후퇴하다 적의 포탄에 맞아 쓰러진 자신의 말에 깔려 치명상을 입게 된다.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한사코 안 떨어지려는 마리아를 다독이는 조던의 대사를 인터넷에서 찾아보았다. “당신이 가면 나도 가는 거야. 당신이 있는 곳엔 어디에나 내가 있어. 자, 가는 거지? 우린 작별인사를 할 필요가 없어. 우린 헤어지는 게 아니니까.”
간신히 마리아를 다른 대원들과 함께 떠나보내고, 밀려오는 적군을 저지할 요량으로 혼신의 힘으로 총부리를 겨누면서, “하느님, 마리아를 보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저는 아무 거리낌이 없습니다.”
긴장과 죽음의 공포가 엄습해올 그 무렵 가물가물해지는 의식 속에서 멀리 교회당 종소리(참고: 조종 弔鐘)를 들으며 이어가는 그의 마지막 독백: “누가 죽었든 그건 나를 약하게 만드는 거야. 왜냐하면, 나도 인류에 속해 있으니까. 그러니 저 종이 누구를 위하여 울리는지 알려고 하지 말라. 바로 너를 위해 울리는 거야.” (Any man’s death diminishes me, because I am involved in mankind. And therefore never send to know for whom the bell tolls. It tolls for thee.)
엉뚱하게 소설 얘기로 빠져들어 갔군요. 누에보 다리에 관련해서 한 가지 얘기만 마저 더 해보지요. 절벽 넘어 멀리 펼쳐지는 풍경을 감상하고 사진을 촬영한 다음 황급히 동료들과 합류하기 위해 발길을 옮기던 중에 팔각정 모양의 정자 안에서 하프((Harp) 형태의 악기를 뜯으며 노래하는 묘령의 여인을 볼 수가 있었는데, 얼른 발길을 돌리기가 어려웠던 것은 그 곡이 구슬픈 데다 너무나 청아하면서도 애조 섞인 목소리가 여운을 길게 남겼기 때문이었다. 동전이라도 좀 던져주고 올 것을---.
산 밑에 수많은 흰 집들로 이루어진 미하스 마을에서 이번 여행 중 처음으로 지중해를 굽어볼 수 있었다. 날씨가 맑으면 멀리 아프리카도 보인다는 곳인데, 우리는 지브롤터 지역만 멀리 확인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6일 차: 그라나다 – 발렌시아 1492년까지 약 250년 동안 이슬람 세력의 마지막 거점이었다고 하는 그라나다에서는 알함브라 궁전을 놓칠 수가 없다. 음악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으로도 유명하거니와, 1984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관광객이 많이 몰린다고 한다. 참고로, 관광객이 많은 곳에는 으레 사람들에게 접근해서 몰래 금품을 노리는 무리가 있기 마련이라는 것은 여행 시 늘 유념해야 할 사항이다. 그래서 관광을 할 때는 늘 한 덩어리 그룹으로 다니는 게 현명한 것 같고, 우리는 여기서도 그렇게 했었다.
먼저 이슬람 왕의 여름 별궁이었다는 헤네랄리페 정원을 둘러보았는데, 정원이 잘 꾸며져 있을 뿐만 아니라 건물도 이슬람 양식으로 지어져 아치와 창문, 벽 문양 등이 모두 특색이 있었다. 또 이 정원과 궁전에서 쓸 물을 끌어오는 데도 심혈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었다. (알함브라 궁전은 영어로 옮기면 The Red Palace.)
궁전 쪽으로 건너가서 보니 궁전의 곳곳이 허물어져 있었는데, 세월 탓인지, 아니면 옛날 기독교도의 공세로 파괴된 것인지는 확인해 보지 못했다. 궁전 망루 탑에 올라 섰을 때는 사면팔방이 확 트여 주변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는 조망을 제공해주어서 아주 좋았다. 여기서 눈에 들어오는 경치란 시내의 전체 모습을 말함인데, 낮은 구릉을 따라 지어진 크고 작은 주택들이 아름답게 색칠되고 서로 조화를 이룬 모습들이 사진을 찍어도 눈에 확 들어오는 그런 경관이었다.
알함브라 궁전 관광을 마치고 또 버스를 타고 숙박지인 발렌시아로 향했는데, 6시간 동안 달리는 여정이었다.
7일 차: 시체스 – 몬세라트- 바르셀로나 어려서 바닷가 부근에서 살아서 그런지 개인적으로 지중해 해변을 많이 둘러보고 싶었는데, 시체스(Sitges) 해변이 그 첫 번째 경험이었다. 지중해의 푸른 파도가 밀려오는 그곳에 모래밭이 길게 뻗어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고, 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해변에 내려서자 토플리스(Topless) 차림의 여자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그렇지. 해변에는 아름다운 몸매가 있어야 제격인 거지. 젊잖지 못한 줄은 알지만, 놓칠 수가 없을 것 같아 슬쩍슬쩍 몇 컷을 찍어 두었다.
스페인 전통식 해물 빠에야라고 하는 신통치 않은 요리로 점심을 때운 후 인근 몬세라트 수도원으로 향했다. 실은 식당으로 가는 길에 고속도로상에서 멀리 톱니 처럼 들쭉날쭉한 산이 어슴푸레 보여서 사진을 찍어 두었는데, 그게 바로 몬세라트 (Montserrat, 영어로는 Serrate mountain)임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 산에 있는 수도원을 찾아간다는 것이 우리의 계획. 구불구불 올라가는 과정에 잠깐씩 보이는 산의 자태가 범상치 않음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현지 가이드가 버스 세울 생각을 안 하는 바람에 애를 태워야만 했다. 관광객들을 위한 관망 포인트가 그 근처 어딘가에 분명 있을 법한데, 결국 산을 정면에서 바라볼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산을 넘고 말았고, 넘어간 뒤로는 다른 길로 내려간다는 걸 알게 되어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대형 울산바위라고 할 만한 몬세라트산의 모습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하고 놓친 것은 이번 여행에서 정말 아쉬운 것 중 하나가 되었다.
바르셀로나에 접근하면서 이미 현지 가이드가 바뀌었는데, 새로 바뀐 현지 가이드 에게 잠깐의 시간 여유를 왜 안 주었느냐고 불만을 쏟아내 봐야 별수 없는 일이었다. 산을 넘어가서 보는 산의 모습은 전면에서 본 것에 비할 바가 못 된다는 생각이 머리에 가득 차, 웅장한 바위 밑에 자리 잡은 수녀원의 모습은 내 안중에서 멀어져 별 의미가 없었다.
몬세라트에서의 서운한 감정을 추스르는 데는 바르셀로나 관광이 약이 되었다. 바르셀로나는 가우디의 도시라고 할 만하다는데, 우선 성가족성당을 보게 되자 감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동안 사진으로는 여러 번 익혀 왔지만 시커먼 사진에서는 아무런 감흥도 못 받았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실제 와서 둘러보니 이런 거대하고 뛰어난 예술작품이 또 있으랴 싶었다. 건물 외관의 웅대함과 정교함도 물론 좋지만, 특히 아름다운 것은 내부의 모습이었다. 쭉쭉 뻗은 기둥들이 천정에 이르러 우아한 곡선으로 마무리되고 그 곡선들이 한데 어울려 조형의 아름다움을 이룰 뿐만 아니라 자연 채광으로 드넓은 홀과 내부 모든 공간을 밝게 비춰주는 걸 보면 누구나 그의 천재성을 인정, 찬양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가우디의 천재성은 구엘 공원에서도 그대로 나타나 보였다. 직선과 직각과 대칭을 추 구하기보다 곡선과 비대칭으로 오히려 과감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그의 발상과 안목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려서 몬세라트 지역에서 자라면서 그 산의 아름다움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하는 가우디 자신의 고백이 수긍되는 대목이다.
저녁을 먹은 후 바르셀로나 시내 관광은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거리는 현지인들과 관광객을 구분할 수 없이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어서 함께 어울려 보고 싶은 충동이 생겼지만, 그 감정을 억제하면서 투어 동료들과 보조를 맞추는 데 신경 쓸 수밖에 없어 또 다른 아쉬움으로 남았다.
8일 차: 토사 데 마르 – 지로나 – 아를 카탈루냐 지중해의 숨은 보석이라 불리는 토사 데 마르는 지중해와 중세 마을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해변 휴양도시이다. 새파란 바다 물빛과 그 위에 둥실 떠 있는 하얀 요트들, 반짝이는 모래밭과 비치 파라솔 밑의 휴양객들---.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이 아닐 수 없고 그 그림은 내 머릿속에 오래도록 남아 있을 것 같다.
유적 도시 지로나도 한 번 둘러볼 만한 곳이다. 여기저기 골목에는 음악가들이 악기를 가지고 연주하거나 목청을 뽑아 노래를 부르며 관광객들의 주의를 끌기도 한다.
바르셀로나를 주도로 하는 카탈루냐 지방을 지나오면서 강렬하게 느꼈던 점은 이곳 카탈루냐 사람들의 강한 독립 의지와 마드리드에 대한 강한 거부감과 대립각이다. 독립 카탈루냐 깃발을 내걸고 있는 집이 부지기수이고 노란 리본이 곳곳에 포스터로 걸리고, 심지어 전봇대에도 그려져 있었다. 물론 도시 청사나 공공건물에는 민주 투사를 억압 말고 석방하라는 대형 현수막이 걸려 있음도 확인했다.
이쯤에서 한 가지 생각나는 게 있었다. 프로축구 구단 FC바르셀로나와 Real마드리드가 그것이다. 스페인 사람들이 축구를 좋아하고, 위 두 구단이 세계적인 구단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세계적인 스타 플레이어들이 이 두 구단에 포진하고 있는 데는 어떤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장담할 수는 없어도, 이런 축구 열풍의 저변에 카탈루냐와 마드리드 사람들의 반목, 경쟁이 자리 잡고 있는 것 아닐까? 스페인은 중세 이후로 분리주의 경향이 있어 왔고 근세에 들어서도 근본 문제인 토지개혁에서 실패하자 늘 사회적 불안 상태가 지속되었다고 한다. 이런 상태에서 프랑코를 내세운 반란이 발생했고 1936년부터 4년 동안 내전을 겪으면서 왕권보수파, 카톨릭 교회, 지주, 자본가, 등의 지원을 받은 프랑코가 승리하면서 그에 의해 ”빨갱이“라고 낙인찍혔던 자유 민주주의 공화파는 대량 학살을 면할 수 없었다. 내전 중 사망자만 50만 명 정도인데, 내전 후 승리한 반란군에 의한 숙청과 보복이 뒤따라 그 희생 또한 엄청나다는 것이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가진 스페인에서 지금도 군림하는 마드리드 세력과 오랫동안 그에 대항하며 핍박과 불이익을 받아온 카탈루냐(바르셀로나) 세력 사이의 원한과 적대 감정은 우리의 반일 감정을 뛰어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감정의 토대 위에서 이들은 각각 축구 구단을 세우고 서로 경쟁적으로 우수선수를 스카우트하여 대리만족을 취하려 하는 것 아닐까? 또 이런 현상이 지속되다 보니 세계 축구선수 시장에서 선수 몸값만 자연히 올라가게 되는 것 아닐까?
아무튼, 스페인은 머리 아픈 나라임이 틀림없다. 피레네산맥을 넘어 프랑스에서 맨 먼저 도착한 곳은 아를(Arles). 반 고흐가 빛을 찾아 이곳에 와서 살았다는데, 그가 살았다는 방과 즐겨 찾았다는 카페도 볼 수 있었다. 또 로마 시대의 콜로세움이 유적으로 남아 있으며, 시내에는 강다운 강, 론강이 흐르기도 한다.
9일 차: 칸느 – 니스 – 모나코 – 베르첼리 유명한 항구 마르세이유를 보지 못한 채 고속도로를 달려 칸느에 도착했다. 나폴레옹이 엘바섬을 탈출하여 상륙한 항구라고 하는데, 지금은 국제영화제와 카지노 도박장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매년 5월엔 국제영화제가 열리는데, 올해 5월엔 우리나라 영화감독이 황금종려상을 받기도 한 곳이다. 해변은 역시 아름다웠으나 오래 머무르지 못하니 또한 아쉬움만 남는다.
칸느로부터 30분 거리에 있는 니스도 아름다운 해변을 자랑하는 곳이다. 그러나 해변이 모래가 아닌 자갈로 이루어진 게 다른 데와 차이가 나고, 비치 파라솔 숫자가 다른 데 보다 더 적고 사람들은 많아도 더 평화스러워 보인다는 느낌이었다.
높은 곳에서 지중해를 내려다볼 수 있는 에즈(Eze)에서는 좋은 조망권을 차지하고 있는 주택들에 가려서 바다를 내려다보기가 어려운 게 큰 흠이었다.
다시 30분 정도를 또 달려 모나코에 도착했다. 프랑스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면적 2㎢가 채 안 되는 나라로서 세계에서 가장 작은 바티칸 다음으로 작은 나라이다. 작지만 예쁜 항구도시라고 보아도 될 정도인데, 영화배우 그레이스 켈리가 왕비로 시집온 곳으로 유명하기도 하다. 왕궁 앞에서 항구를 내려다보면 아름다운 항구가 펼쳐지고 눈을 들어 보면, 지중해 연안을 따라 두 개의 산 능선이 바다를 향해 내려 오는 게 보이는데 첫 번째 능선은 프랑스 땅이고 두 번째 능선은 이탈리아 땅이라 했다!
이제 이번 여행도 거의 다 마무리된 셈이다. 저 지중해를 내려다보며 해변 고속도로를 따라 밀라노로 가서 하룻밤을 자고 난 후, 비행기로 아부다비로 갔다가 다시 인천행 비행기를 타고 귀국하면 그동안 피곤해진 몸을 편안히 눕힐 수 있을 것 아닌가!
그놈들 다 잘 사는 것 같은디, 그래도 내 집이 지일이여! |
첫댓글 알차게 렌즈에 담아낸 남 유럽, 지중해 연안의 기독교와 이슬람교 혼합문화 사진들~~
다필 덕분에 공짜여행 잘 하였어요!!
찐하게 체험하고 오신 귀한 인류유산들 음미함서 더욱 건강하고 다복하시길 기원합니다
안젤로/안젤라 가정에 하늘의 축복이 늘 함께하실 것입니다
~평 화~
엄청 고마습니다, 두리.
함께 할 수 있었다면 내가 공부를 훨씬 더 많이 했을 텐데-!
혹시 내가 너무 나간 대목은 없는지, 조금은 염려되기도.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
종이 "조종(弔鐘 )'이었음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소설을 못 읽고 영화로만 보아서 건성으로 넘어 갔는데 이제서야 마지막 장면의 의미를 확실히깨닫게 되었습니다.
역시 영문학도는 여행을 해도 남다른 데가 있습니다.
무심코 넘어가기 십상인 부분도
눈여겨 깊이 음미하는 집중력이 크게 돋보이는군요.
감탄하며 갈채를 보냅니다.
영문본을 읽기 전에 한글 번역본을 고교시절에 읽었었는데,
그 번역 소설의 맨 마지막 부분이 다음과 같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종이 누구를 위해 울리는지 묻지를 마라.
언젠가는 너를 위해 울릴 수도 있을지니."
그 앞 부분은 기억이 안 되지만,
조금은 엉뚱한 번역이었던 것 같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