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의 성종 치적과 문안공 김양감.
⁕ 유교를 정치 이념으로하고 여러 가지 제도를 정비하여
중앙집권제도의 기 반을 다졌다.
⁕유교가 널리 퍼졌으나 유교의 교리에 의해 국가를 통치해 나갔다.
⁕정치와군사 조직을 강화 하여 국가를 안정시겼다.
⁕국자감을 정비하고 과거제도를 정착시켜
유교적 지식과 윤리관을 지닌 관 리를 등용했다.
⁕전시과(田柴科 관리의 등급에 따라 임야와 토지를 나누어 주는 규정을
정비하고 관리들의 경제적 뒷 받침으로 농토와 임야를 지급하였다.
⁕농민들의 생활 안정을 위해 여러 가지 시설을 운영했다.
⁕유교의 윤리를 규법화하고 불교에대한 행사도 많았으며
토속 신앙과 결부 된 의식으도 널리 행해졌다.
7세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종사(宗師) 휘 양감
고려 전기의 문신이며 유현. 아버지는 평장사 정준이며
시호는 문안공이다.
문종 6년(1051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문종 25년 「상서우승 간의대부」와 「서북로 병마부사」가 되었고
이듬해 「상서좌승 지어대사」로 제수되었다.
문종 27년 태복경이 되어 송나라에 사은사로 다녀왔다.
문종 29년(1074년) 산기상시를 역임하고 동지중추원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호부상서로 송나라 사신의 접반사가 되었다.
판상서병부사와 서경유수사주국을 겸하고
중추원사를 거쳐 좌복야가 되었다.
1083년 중서시랑 평장사로서 시정의 득실을 따졌다.
선종 4년(1086년) 문하시랑 평장사가 되어
이듬해 다시 시정의 득실을 진주하였으며,
판상서 호부사로서 그해 7월
선덕전에서 또다시 시정의 득실을 진주하였다.
12월에 수태위가 되고 여러 요직을 거쳐
수태보 문하시중 감수국사에 이르렀다.
일찍이 송나라에 사은사로 갔을 때
학문을 널리 알리고 예절을 지키는 법도를 배웠고,
심오한 글과 깊은 뜻을 정자문에서 배웠다.
태묘(왕가의 사당)와 태학(최고 학부 대성전)을 그려오고
경전(사서삼경)을 싣고 돌아와 성현의 연원을 알렸다.
공자의 사당을 집 뒤에 세워 봄․가을 제사 지내니
동국문묘가 시작된 것이 처음이고 이로서
「동박이학(東方理學)의 종사(宗師)」가 되었다.
송나라에서 돌아올 때 시인 소동파가 공에게 전별시를 지었다.
부 소학사 식 창화시 호 동파(附 蘇學士 軾 唱和詩 號 東坡)
알거라 금마의 손님이 때로는 벽계방에 꿈꾸더라(似知金馬客時夢碧雞坊).
빙설은 난잡에 살아지고 연좌는 고향으로 풍기더라(氷雪消殘臘烟波瀉故鄕).
우는 말 방울소리 위의를 갖추었고 서서 있는 말은 오래도록 배회하네
(鳴鐢自容與立馬久回).
비노니 삼한의 사신은 신도가 낙랑에 도착하리니(翔乞與三韓使新圖到樂浪).
유문(遺文) 1
병든 손이 한적한 절에 들리니(炳客投肅寺)
시원한 그늘이 상쾌하도다(淸陰滿意凉).
스님을 만나도 침묵이요(逢僧無一語)
바람은 푸른 연꽃 향기를 보내주네(風送碧荷香).
시2
세상일이 유유하니 마침내 무엇이 될꼬.(世事悠悠意若何)
부질없이 낙서대로 창파만 희롱하네.(謾將漁竹弄滄波)
이제 강남에서 또 이별하니.(如今又作江南別)
석양에 뱃노래 소리 더욱 구슬프다.(落日難堪廳槕歌)
서찰(書札)
밤사이 집안 모든 형편이 어떠하냐? 내 오늘 돌아거려 하였더니
이시중(李侍中)의 만류로 뜻과 같지 못하였다.
소학사(蘇學士)와 창화(唱和)한 시(詩)가 윗 사랑에 있으니 보내어라. 그만 쓴다.
성리학을 고려 사회에 실용학문으로 널리 보급한 공으로
「동박이학의 조사」로 불리는 회헌 안유 선생께서
문안공에 드리는 감모시가 있다.
향과 등불을 밝혀 곳곳마다 부처에게 빌고(香燈處處皆祈佛)
집집마다 통소와 젓대로 신령을 섬기도다.(簫管家家盡事神)
두 어 칸 공부자(孔夫子)의 사당이 홀로 서 있는데(獨有數間夫子廟)
봄 나무들은 뜰 안에 가득하고 인적은 적막하네.(滿庭春草寂無人)
실기 출화해사 전동방 사문 연원록
김문안 선생의 이름은 양감이요 광주인이니
벼슬은 문화시중 감수국사요, 평장사 정준의 아들이다.
원운곡이 말하기를 “기자께서 동방에 온 후
설총(홍유후)이 있었고 그 뒤에 최 문헌공(치원)이 중흥하였고
김문안공이 끊어져 가는 계통(系統)을 잇고 성현 연원의 묘를 세우고
중국에 들어가 경전을 가지고 와서
우리 동방후학의 길을 열어준 공이 컸다.
그 실천 궁행한 공부는 문집에 기재되어 있을 것인데
문집간행이 넓지 못하여
홍유후와 문헌공의 유집은 널리 전하여지지 못하였는데
또 정중부의 난리에 불타 없어졌다.
선비들도 그 유고를 얻어보지 못하였거늘 천박한
나의 식견으로 잘 알 수 없으니
중부사가 사문에 해를 끼침이 어찌 그리 혹심하였던고....”하였다.
김정이 범복애(북송 때 명신)께 보내는 글에 말하기를
“아! 나는 이유현 선생과 선고(先考:영리(英利))에게 들었고,
선생님과 선고는 운월재 문정 선생에게 들었으니, 그 글이 이르되
”우리 동방에 성도는 단군께서 아들을 도산에 조회하였으므로
처음 전하여 크게 밝았으니 오랑캐를 면하였다.
기자(箕子)께서 처음 오셔 중국의 도통을 전하고 오륜을 밝히므로
도를 지키고 진리를 탐구하는 자가 많았다.
홍유후와 문원공의 도학이 가장 뛰어나서
학문의 탁월함이 적지 않으나
그 마음은 기자의 유풍, 여운에서 깨달았고
그 도는 경전에서 넓혔으나 이에 유지(遺旨)가 요령에 대강일 뿐이다.
김문안공은 송나라에 사신으로 들어갔을 때 자세한 말과 깊은 뜻은
정자의 문하에서 받았으니 귀로 듣고 직접 배웠다.”
그러므로 문안공은 일찍이 말씀하시되
“내가 심법[心法:송대에 유학자가 심체(心體)를 존양(存養)하고
심용(心用)을 성찰(省察)]하는 도(道)는 본래
우리나라 선생에게 배웠으나,
그 학문이 넓고 간략하며
자상하고 깊은 뜻은 송나라 정자 문하에서 친히 배웠고
소식(호 소동파) 선도(仙道)와 술석(불도)을 하니
이름은 유자(儒者)이나 행하는 것은
묵적(전국시대의 노나라 사람으로 이단학설인 겸애설을 주장)이라,
진리를 좀먹고 문란케 하는 줄 알았으나 제후국(작은 나라) 사람으로 감히
그에게 거슬리지 못한 것은,
그는 대국인(중국인)이라 서로 틈이 생기면
우리 나라에 근심을 끼칠까 염려하여 극히 겸손한 태도로 대하여 주었다.
그러나 그의 문장과 충절은 가상함으로 내가 사랑하였고
소식(소동파)도 또한 나를 아껴준 일이 많았다 하였으니
한자(漢子: 유자)가 소주에서 수십일
곽주에서 태전당과 술 마신 일이
한자의 본뜻에 무슨 손상이 되겠는가 하였으니
이 말은 대개 문안공을 사문의 정통이라 함이 지나침이 아니다.
그러나 불행이 정중부의 난이 일어나
문안공의 유결(遺訣)이 불에 타고 전하여지지 못하였으니
사문(斯文)에 미친 화액이 어찌 그리 심한고.
간재 선생이 제자들을 명하여 노선생(불원재)이 원나라에 갔을 때
문안공이 송나라 정자와 문답한 말과 또
최문헌의 일을 수집하여 온 것을 <화해대사전>에 기입하였는데
사전(師全)도 또한 여러 번 난리를 겪었으므로
비슷한 말 한마디도 세상에 남아있지 아니하였다.
다행히 들으니 법문정(복애)이 원처사(元處士)와 같이
약간 남은 글을 보관한다 하기에 글을 올린다 하였다.
비록 문안공의 사적에 그럴 만한 문헌은 얻지 못하였으나
편말에 기록하여 사문에 만 분의 일이라도 발명될까 한다.
주(註) 설총(유후) 최충 (문헌) 원천석 (운곡) 범세동 (부애)
신현 (문정) 신득청 (이유헌)
광산김씨사 및 광산김씨 약사.
2023년 5월 편집자 선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