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스는 외롭다. 우리나라에서의 블루스는 더더욱 외롭기 그지없다.
우리가 듣고 즐기는 음악의 절대다수가 블루스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는 무척이나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저 시대가 그렇다며, 세상이 더 이상 원류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며
아쉬움을 달래기엔 석연치 않은 상실감이
자꾸만 고개를 치켜든다.
블루스를 이야기하면 질퍽한 분위기의 손 맞잡은 춤을 떠올리거나
흑인들의 퀴퀴한 땀 냄새만 연상하는 이들이 대부분인 것도
우리의 블루스가 감춰진 언더그라운드로 침잠해버린데 한몫 했을 게다.
그렇다고 이를 열악한 우리 음악계의 상황에 대한 우려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블루스를 낳은 미국에서도 현재 이 음악이 대중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은 블루스로 인해 오늘날의 음악이 존재할 수 있었음을 확연하게 인지하고 있으며,
그것이 그들의 힘이라면 힘이다.
웅산의 새 앨범이 갖는 의미와 가치는 이런 상황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블루스를 기반으로 록 음악을 연주한 몇몇 중진급 음악인들이 아직 건재하다지만,
지난 20년 동안 신촌블루스를 중심으로 한 몇몇
프로젝트와 기타리스트 김목경, 그리고 이제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윤명운 같은 명인들을
제외하고 우리가 만들어 낸, 혹은 재생산
한 블루스가 존재하기는 했던가. 아니 그들에게 최소한 작품 발표의 기회가 주어지기는 했던가.
하지만 조금 냉정하게 들릴지라도 이 역시 블루스의 운명을 감지하고 있던 그들 스스로 선택한 자신의 길이다.
문제는, 바로 이 시점에서 새삼스런 블루스 앨범을 들고 세상에 얼굴을 내민다는 것이
과연 어떤 의도와 지향에서 비롯됐느냐는 점으로
지난 2003년에 발표한 첫 앨범 'Love Lotter'가 팬들의 비상한 주목을 끌면서
그녀에게 최고의 재즈 보컬리스트 중 한 사람이라는
화려한 찬사가 주어진 뒤라면 말이다.
웅산의 첫 앨범에 실린 'Misty Blue'는 지금도 즐겨 듣는 나의 애청곡 중 하나이다.
비록 꾸준한 활동 경력에 비해 때늦은 감이 없지
않은 작품이었지만 그녀의 앨범은 이미 원숙미를 얘기하게 할 만큼의 완성도를 보여주었고,
곳곳에서 가슴을 파고드는 절절한 감성은
비로소 웅산이 자신의 목소리를 찾았다는 더없이 반가운 확신을 갖게 했다.
과연 두 번째 앨범이 어떤 음악을 담게 될지 무척이나 궁금해하며 나는 지난 2년의 세월을 보냈고,
그녀가 선택한 음악이 다름 아닌
블루스라는 말을 듣자마자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웅산에게 블루스는 어머니였으며 가장 외로울 때 마지막으로 손을 뻗어 움켜쥘 수 있는 진리였다.
물론 그녀가 처음 블루스를 발견하게 된 것은 록 음악과 훵키를 경유해서였겠지만,
아마도 시간이 흐를수록, 나이를 먹어갈수록 자신도
모르는 새 블루스의 향취가 몸 속 깊이 자리하게 됐다는 걸 깨닫지 않았을까.
그렇다고 섣불리 결정을 내릴 수는 없었으리라. 심정적으로 이에 동의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은
그녀가 음악적 색채를 변화시키려는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피력햇을 지도 모르고, 단지 소신만으로 달려들기에 블루스는
결단코 만만한 음악이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웅산이 블루스를 부르는 것이 과연 타당한지
우리는 가능한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면서 음악적인 관찰을 꾀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그녀가 재즈 보컬을 지향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재즈로 가는 길은 이미 여러 갈래임이 확연해졌고 웅산에게는 블루스를
통한 길이 가장 설득적으로 보였을 법하다.
'Love Letter'의 성공에 편승해 소재만 다른 또 하나의 'Love Letter'를 만들 수도 없는 노릇이며,
요즘 대중적으로 각광받는 이른바
팝재즈의 말랑말랑함을 택하기엔 그녀의 목소리가 지닌 개성과 매력이 너무나 아깝다.
무엇보다 이미 블루스와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 것을 자각한 상태라면 말이다.
앨범의 곡들이 모두 정격 블루스의 진행을 취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웅산의 새 작품은 우리나라 음악계가 시도하지 못했던
온전한 블루스 앨범의 재래라는 가치를 부여받아 마땅하다.
음악계의 선배들이 남긴 두 곡이 먼저 시선을 끈다.
어쿠스틱 기타의 선택이 적절한 신중현 선생의 '잊어야 한다면'과 편곡의 묘미가 돋보인 '
청량리 블루스'. 이 곡은 1985년에 명혜원이
처음으로 발표했던 바로 그 노래이다.
많은 음악 팬들에게 잊지 못할 감상을 불러일으킨 곡으로 남아 있지 않을까.
(명혜원이 블루스 음악인 이엇던 것은 아니다. 그녀의 음악은 전체적으로 포크의 성향이 강했다.)
이 두 곡과 '눈가림'이라는 우리말 제목을 붙은 블루스의 고전 'I'd Rather Go Blind'.
그리고 비릴 할리데이가 남긴 명곡중의 명곡 'Fine And Mellow'를 포함한 네 곡을 제외하면,
나머지 여덟 모두 웅산이 만든 창작곡이다.
결론적으로 앨범의 성과를 논하
자면 그 구성에서부터 연주,
그리고 결정적으로 노래 그 자체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 부분 아쉽다고
느껴지는 구석이 없다.
최근 들어 미국에서도 신흥 레이블을 통해 블루스 음악인들이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는데,
그중 적지 않은 이들이 감성의 조절에
실패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오히려 웅산의 노력은 여러면에서 매우 세심해 보인다.
특히 하나의 프레이즈를 마무리하며 다음 소절로 넘어가는 부분의 음색과 호흡은
그 어느 때보다 인상적이며 오랫동안 블루스를
유심히 관찰했다는 심증을 굳히게 한다. 실례를 찾으면 한둘이 아니지만,
"W-O-M-E-N의 좀 더 달콤하게, 좀 더 로맨틱하게,
사랑이라는 게 어렵지 않잖아." 같은 부분이나 "I'd Rather Go Blind'의
중간에 나오는 나지막한 내레이션에서 다시 멜로디를 치고
나가는 순간, 그리고 끝 곡인 '비새'에서의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바이브레이션을 들어보라.
웅산의 톤은 또한 어떠한가. 앨범 구성상 마치 서주의 역할을 하는 듯한
'Call Me'와 대중적으로 가장 좋은 반응을 얻을 것으로 보이는
'몽상'-이 곡은 트럼펫이 가미된 재즈 편곡으로 다시 소화해도 매우 좋을 것이라는 판단이다-
를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난 현상이지만,
웅산의 톤은 결코 따스하거나 포근하지 않다.
오히려 듣는 이를 한없이 외롭게 만드는 차갑고 싸늘한 톤이 바로 웅산이
지닌 최고의 매력이자 특성이라 굳게 믿는다.
그러고 보면 이 작품은 역설적으로 '외로운 노래를 들으며 외로움을 달래는
' 우리들에게 더없이 좋은 선물이지 않을까.
사실 웅산이 성취한 이 톤이 처음 발현한 것은 전작인 'Love Letter'에서였지만,
이는 블루스 앨범을 염두에 두었던 그녀에게 결과적
으로 매우 적합한 조건을 제공한 셈이다.
그럴리는 전혀 없겠지만, 웅산이여, 세속의 꾐에 빠져 팜재즈의 달콤함에 시선을 주지 말라.
행복하게도 그대가 부를 노래는 너무도
첫댓글 맞나? 내 한테는 생소한 가수라서
맞다^^
이 가수 재즈 엄청 잘부른다.
드라마곡도 많이 불렀지..TV에 잘 안나오는 가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