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철 그리고 1987년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
1987 영화를 보았습니다.
어두었던 그러나 민중의 뜨거운 외침을 기억합니다.
책상을 탁 치니까 억하고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군부 독재의 서슬 퍼런 강압통치를 눈 앞에 보면서
아니다, 아니다라고 가슴속 응어리가 있었습니다.
그후 삽심여년이 흐른 오늘 참혹한 고문의 현장을 찾았습니다.
(이해를 돕기위해 다음백과에서 옮겨 온 글을 싣습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박종철이 고문으로 사망한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
4·19혁명과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 이어 현대 정치사의 한 획을 그으면서 20세기 후반 한국사회 변동의 복잡한 성격을
보여준 사건으로서 이른바 '1987년 6월민주화운동'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이 사건의 진행 과정은 박종철의 사망 경위가
은폐·조작되었음이 밝혀지고 고문 가담자가 드러나기까지의 1단계와 재차 행해진 축소·조작의 전모와 그 관련자들이
밝혀지기까지의 2단계로 나눌 수 있다.
1987년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에 다니던 박종철은 서울대학교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 관련
주요수배자인 박종운(朴鍾雲)의 소재를 알기 위한 참고인이라는 이유로 1987년 1월 14일 하숙집에서
치안본부 대공수사관들에 의해 영장 없이 불법으로 강제 연행되었다.
1월 15일 경찰은 조사받던 박종철이 자기압박에 의해 충격사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박종철의 부검의였던 중앙대학교부속 용산병원 내과전문의 오연상의 '고문치사일 가능성이 높다'는
증언이 알려지자, 1월 19일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박종철의 사망원인이 '물고문'에 의한 질식사이며 고문에 가담한
사람은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 2명이라고 다시 발표했다.
그러나 경찰의 정정발표에도 불구하고 고문 가담자인 두 수사관을 참여시키지 않은 채 사건현장이 치안본부
대공분실이라는 이유로 비공개 현장검증을 실시함으로써 연행시간과 결정적인 사망 경위, 고문 가담자의 수 등에
대한 의혹들이 그대로 남겨진 채 이 사건의 1단계가 마무리되었다.
박종철고문치사사건의 2단계 은폐·조작 경위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끈질긴 추적과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법의학 8과장 황적준의 일기 증언에 의해 드러났다.
'경부압박에 의한 질식사일 가능성이 높다'는 자신의 부검소견서가 당시 강민창 치안본부장의 요청으로
'외상 없음'으로 조작되었다는 황적준의 증언은 온 국민의 충격을 자아냈으며, 언론은 최초의 고문 가담자 2명에 대한
경찰간부들의 회유과정을 끈질기게 추적했다.
결국 여론의 압력에 밀려 고문치사의 은폐·조작에 관련했던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사임하고, 강민창
치안본부장을 비롯한 박처원 치안감, 유정방 경정 등 다수의 경찰간부가 구속됨으로써 이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박 열사의 어릴적 사진을 봅니다.
그의 유품도 봅니다.
발걸음을 옮길 수 없었습니다. 이를 본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친구들의 가슴은....
주인을 잃은 안경과 손목시계 그리고 그가 쓴 글들...
이러한 세월이 이 땅에 있었습니다.
먹먹함을 넘어 울컥 치미는 분노에 눈시울을 닦았습니다.
아이러니라고나 할까 경찰학교 생도들이 왔습니다.
너희들 선배들이 20여년 전에 이런 끔찍한 일을, 천인공로할 짓을 했음을 기억하라고 말하진 않았습니다.
방명록에 "기억하겠습니다."라고 썼습니다. 손이 흔들렸습니다. 마음도 흔들렸구요.
그리고 주먹을 쥐었습니다(옹이야님이 대표로 방명록을 썼음).
인권. 소중한 인권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바로 열사가 숨을 거둔 509입니다.
경찰생도 대표들이 거수경례를 합니다.
이들이 졸업하여 일선에 배치되어 오늘 이 자리의 그 자세로 근무해 주리라 믿어 봅니다.
아~ 509호
박종철열사 기념관이면서 경찰청인권센터이기도 합니다.
5층의 창문을 보셨는지요.
유독 5층의 창문은 좁습니다. 창문이라기 보다는 환기통이라고 해야 하나요.
그 이유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아시겠지요?
오늘은 답사 온 셈치고 다음에 다시 꼭 찾아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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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동광장으로 가는 길입니다.
벽화를 봅니다. 김구 안중근 선생을 비롯한 애국지사들의 그림이 있습니다.
청파동은 부자 동네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유명인사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동네라는 글이 보이더군요.
백성희 장민호 두 분의 이름이 붙은 국립예술극장입니다. 정확히 여기는 용산구 서계동이지요.
이 자리는 군 특수부대가 있던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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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세워진 서울역역고가 다리가 지난해 차가 없는 공원으로 조성되었지요.
추위 속에서도 모란은 빠알간 새순이 돋아 나더군요.
봄은 위대합니다.냉혹한 추위를 감내하고 일어어서니까요.
당신의 봄, 우리의 봄도 활짝 피우셔야지요.
아름답고 찬란한 님들의 봄, 봄을 빕니다.
박종철 열사, 그분은 이제 우리 가슴에 봄으로, 희망으로 기억되어야 겠습니다.
오늘 함께한 길동무는...황금님 제니님 아옹이님 소녀풍님 미풍님입니다.
일총에다 출입증을 대표(?)로 달고 방명록을 쓰신 아옹이님.
감기몸살살임에도 오시어 7017고가를 함께 못하고 자리를 뜨신 소녀풍님.
명동예술극장 3월의 눈 연극관람으로 식사를 같이 못하신 제니님.
왕언니(?)로 분위기를 이끄신 황금님.
명동의 맛집(청와대 김여사가 다녀간)을 안내해 주신 미풍님.
모두모두 수고하셨습니다^^^
다음 저녁걷기는 21일(수) 한강 함상공원입니다.
한강에 떠있는 군함에 올라 노을을 감상합니다.
첫댓글 1987 영화가나온후 사람발길이 많지않을까싶네요 지기님에글과 그때를떠올려 보는 시간을
우리횐님들과함께하셨네요
후기보며 숙연해지네요
수고하셨습니다 ^^
1987 영화를 보고나서 방문객이 부쩍 늘었다고 합니다.
고문 현장을 보는 순간 말살 수 없는 분노,그리고.,. 말은 잃었답니다.
마음이. 아파습니다
숙연해지고
1987년도 최루탄.
그때가 떠올라서...
아~ 황금님도 마음이 짠하셨군요. 결코 잊을 수 없는 어두운 역사의 단면이였습니다.
함께한 저녁걷기 또다른 의미가 있었습니다. 다음 저녁도보에서도 뵈옵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