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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12월 22일 주일
[(자) 대림 제4주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오늘은 대림 제4주일입니다. 이스라엘의 목자이신 주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보잘것없는 이들 가운데서 당신의 종 마리아를 선택하시어 주님의 거처로 삼으셨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보여 주신 주님의 순종과 섬김을 우리도 배워, 언제나 주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따릅시다. 주님께서 이루신 구원을 성모님과 함께 기뻐하며 영원한 찬미의 노래를 부릅시다.
말씀의 초대
미카 예언자는, 베들레헴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나오리라고 한다(제1독서). 하브리서의 저자는, 그리스도께서는 두루마리에 기록된 대로 하느님의 뜻을 이루러 오셨다고 한다(제2독서). 엘리사벳은 자신을 찾아온 마리아를 보고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하고 외친다(복음).
제1독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
▥ 미카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5,1-4ㄱ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
그의 뿌리는 옛날로, 아득한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2 그러므로 해산하는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까지 주님은 그들을 내버려두리라.
그 뒤에 그의 형제들 가운데 남은 자들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돌아오리라.
3 그는 주님의 능력에 힘입어
주 그의 하느님 이름의 위엄에 힘입어 목자로 나서리라.
그러면 그들은 안전하게 살리니 이제 그가 땅끝까지 위대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4 그리고 그 자신이 평화가 되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10,5-10
형제 여러분, 5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제물과 예물을 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저에게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6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당신께서는 기꺼워하지 않으셨습니다.
7 그리하여 제가 아뢰었습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8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제물과 예물을”, 또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당신께서는 원하지도 기꺼워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하고 말씀하시는데,
이것들은 율법에 따라 바치는 것입니다.
9 그다음에는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 것을 세우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첫 번째 것을 치우신 것입니다.
10 이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9-45
39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40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42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43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44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45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의 첫 문장(루카 1,39)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 무렵 마리아는 일어나 서둘러 산악 지방에 있는 유다의 한 고을로 갔다.’ 태중에 계시는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시면서 성모님께서는 지금 있는 자리에서 ‘일어나’ 엘리사벳에게 ‘서둘러’ 가십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다녀간 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믿음으로 순명하셨지만, 오해와 근거 없이 떠도는 이야기들로 힘드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께서는 ‘일어나셨습니다.’ 시선을 아래로, 문제가 있는 쪽으로 향하신 게 아니라, 위로, 하느님께서 계신 쪽으로 향하십니다. 그리고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지 생각하신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도움을 주어야 할지 생각하십니다” (프란치스코, 대림 제4주일 삼종 기도, 2021.12.19.).
출산을 앞둔 엘리사벳을 도우시려고 임신하신 몸으로 약 150킬로미터나 되는 거리를 ‘서둘러’ 가십니다. ‘일어나다’, ‘서둘러 가다’. 성모님의 이 행동으로 태중에 있던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첫 만남이 이루어지고,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충만해져서 행복 선언을 합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 신약 성경에서 처음으로 이루어진 이 행복 선언은 많은 오해와 어려움 속에 계시던 성모님의 입에서 ‘마니피캇’(마리아의 노래)이라는 하느님을 향한 기쁨의 찬미가가 터져 나오게 합니다(1,46-55 참조).
절망스러운 상황일수록 성모님의 본보기를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때일수록 ‘그 자리에서 일어나’ 오히려 이웃에게 다가가 도움을 주는 신앙인이 됩시다. 우리는 이때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마태 25,40) 안에 계신 주님을 만나며, 그분께서 마련하신 특별한 은총과 위로를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루카 1,39). 아멘.(김재덕 베드로 신부)
이웃을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봅시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인간적 시선으로만 바라보면 아인카림에서 있었던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은 참으로 비극적인 동시에 희극적인 모습일 것입니다.
이제 겨우 열서너 살 된 천진난만한 소녀 마리아가 아이를 가져 난감한 상태였습니다. 나자렛에 그대로 있자니, 동네 우물가 아낙네들의 입방아를 견뎌낼 수 없을 것 같았겠죠.
엘리사벳 역시 삶을 잘 마무리해야 할 노년기에 아이를 가져 배가 점점 불러오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기상천외한 일이었기에, 엘리사벳은 바깥출입도 않고 숨어지냈습니다.
이런 두 여인이 오늘 아인카림에서 만나 기쁨과 환희로 가득 찬 노래를 주고 받습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이 광경을 목격했다면, 둘 다 맛이 갔구나, 하면서 혀를 찼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루카 복음사가는 믿을 수 없는 일을 믿는 소녀와 놀라운 기적을 이루신 하느님을 찬미하는 노파를 경이로운 시선, 기쁨과 찬미의 시선으로 바라보라고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이 특별한 사건을 성령의 바람을 탄, 단순하고 가벼운 시선으로 바라볼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복잡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참으로 이해하지 못할 특별한 체험을 한 그들이었지만, 이렇게 따져보고 저렇게 따져보며 잔머리를 굴리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모든 것을 내어 맡기며, 복잡한 마음을 단순화시켰습니다.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인류 구원을 위한 청사진에 기쁜 마음으로 호응하며, 전폭적으로 신뢰하였습니다.
그 결과 맑은 정신, 깨어있는 마음으로 안갯속같이 희미한 자신의 신앙 여정을 기쁘게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순탄하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이 가벼워야 합니다. 단순해야 하고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때 삶에서 마주치는 작은 것들 안에서도 주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의 본보기가 되어주신 마리아와 엘리사벳에게 깊은 감사와 찬미를 드립시다.
우리도 이웃을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봅시다. 때로 너무나 나와 다른 그이기에 잘 이해되지 않을지라도 경이로운 시선으로 그들을 유심히 바라볼 때, 그 안에 현존해계시는 하느님을 명확히 뵐 수 있을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가톨릭 신자임을 드러내는 도구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묵주’라고 생각합니다. 신자들은 자동차 안에 ‘묵주’를 걸어 놓기도 합니다. 손가락에 ‘묵주반지’를 끼기도 합니다. 레지오 단원들은 주해를 하면서 ‘묵주기도’를 바칩니다. 꾸르실료 교육의 봉사자들도 늘 손에 묵주를 들고 기도하면서 봉사합니다. 저도 손에 묵주반지를 끼고 있습니다. 매일 아침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하루를 시작합니다. 성지순례를 할 때면, 버스 안에서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성모님의 전구로 안전한 성지순례가 될 수 있도록 청하였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2002년 "묵주기도의 신비"라는 회칙을 발표하며 "빛의 신비"를 추가하였습니다. 이제 묵주기도는 20개의 신비(환희, 빛, 고통, 영광)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예수님의 공생활,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 예수님의 부활을 묵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서울 대교구는 2027년 세계 청년대회를 위해서 묵주기도 10억 단을 봉헌하기로 했습니다.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주님의 탄생을 기다리면 좋겠습니다.
대림 시기는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지난 3주간 대림 시기의 말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대림 제1주일의 주제는 ‘깨어있음’입니다. 신앙인은 두 가지 차원의 시간 속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는 물리적인 시간입니다. 우리는 이 물리적인 시간을 기준으로 우주의 역사는 150억 년, 지구의 역사는 45억 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물리적인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집니다. 다른 하나는 의미의 시간입니다. 가치의 시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탄생을 기억하며, 구세주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것은 물리적인 시간이 아닙니다. 그것은 의미의 시간입니다. 가치의 시간입니다. 우리가 깨어있다는 것은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가난한 이들의 모습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깨어남입니다.
대림 제2주일의 주제는 ‘인간의 권리’입니다. 교회는 대림 제2주일은 ‘인권 주일’로 정했습니다. 사람은 성별, 이념, 세대, 피부색, 계층으로 차별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는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가난한 이, 가장 헐벗은 이, 가장 아픈 이, 감옥에 갇힌 이에게 사랑을 주면 그것이 바로 주님을 사랑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성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산과 언덕은 평평해지고, 골짜기는 메워질 것입니다.’ 원의 중심에서 원의 둘레는 모두 같은 거리에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 우리는 모두 같습니다. 지위도, 능력도, 업적도, 학력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교만, 욕심, 허영, 이기심이라는 언덕과 산을 깎아내려야 합니다. 믿음, 희망, 사랑으로 골짜기를 채워야 합니다. 나눔, 헌신, 희생으로 골짜기를 채워야 합니다. 편견과 선입견을 버리고 오직 사랑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대림 제3주일의 주제는 ‘자비’입니다. 자비의 또 다른 말은 ‘공감’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어 오시는 이유는 바로 ‘죄, 악,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이유도 나의 죄를 대신해서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자비이고,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자비로운 마음을 가진다면, 공감의 능력이 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자선은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자선은 신앙인이라면 꼭 해야 하는 의무입니다. 나누는 것은 많이 가진 사람만의 몫이 아닙니다. 나누는 것은 많이 배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구원은 특정한 사람만이 받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께 의지하는 사람만이 나눌 수 있고, 그 안에서 기쁨을 얻을 수 있고 그런 사람만이 우리에게 구세주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대림 제4주일입니다. 대림 4주일을 지내면서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는 ‘신비’를 묵상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는 것은 바로 나를 위한 것입니다. 부족하고, 죄를 많이 지었고, 별로 잘한 것도 없는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모든 권능과 모든 권세를 가지진 분이 아주 연약한 아이의 모습으로 비천한 마구간에 태어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모여 기도하고, 주님께서 하신 약속들이 꼭 이루어지리라고 믿는다면, 주어진 하루하루를 감사하며, 기쁘게 생활한다면 바로 이곳에도 분명 주님께서는 오실 것입니다. 2000년 전에 엘리사벳과 마리아를 사랑하셨던 그 주님은 이 자리에 있는 우리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벗에게>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께서 내 안에
내가 하느님 안에
비할 데 없는 행복에
머물고픈 바로 그 순간
외로운 벗 하나
더욱 눈에 밟혀온다네
서둘러 달려가
품에 안을밖에
내 안의 하느님께서
하느님 안의 내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걸음에 달려갈밖에
오늘의 성인
성 플라비아노 (Flavian)
활동년도 : +4세기경
신분 : 순교자
지역 :
같은 이름 : 플라비아누스, 플라비안
5세기 때 로마(Roma)에 성녀 비비아나(Bibiana, 12월 2일)를 기념하는 성당이 세워졌고, 그녀의 어머니인 성녀 다프로사(Dafrosa, 1월 4일)에 대한 공경이 보편화되었지만 그녀의 생애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전설에 따르면 성녀 비비아나는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신앙 때문에 고문을 받고 아콰팡당트로 추방당한 로마의 전 지사인 성 플라비아누스(Flavianus, 또는 플라비아노)의 딸이었다. 성 플라비아누스가 죽은 뒤에 그의 아내 성녀 다프로사도 참수를 당했고, 그들의 딸인 성녀 비비아나와 동생 성녀 데메트리아(Demetria, 6월 21일) 역시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다시 체포되었다. 성녀 데메트리아는 이때 바로 죽었고, 성녀 비비아나는 후에 매를 맞고 순교하였다.
성녀 프란치스카 사베리아 카브리니 (Frances Xaveria Cabrini)
활동년도 : 1850-1917년
신분 : 설립자
지역 : 미국(USA)
같은 이름 : 방지가, 프란체스까, 프란체스카, 프란치스까, 프랜시스,
하비에르 프란체스카 사비에 카브리니는 미국 시민 중에서 최초 시성된 사람이었다.
하느님 사랑의 보살핌에 대한 그녀의 깊은 신뢰는 그녀가 그리스도의 업적을 수행하는 용감한 부인이 될 수 있는 힘을 그녀에게 주었다.
그녀는 자기를 교사가 되도록 교육시킨 수녀원에서 입회를 거절하자 이탈리아의 카도뇨에 있는 설립의 집 고아원에서 자선 사업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그녀는 1877년 9월에 허원을 하고 수도복을 받았다.
1880년에 주교는 고아원의 문을 닫고 프란체스카를 성심 전교 수녀회의 부원장으로 임명하여 고아원에서 나온
일곱 명의 젊은 부인들이 그녀와 함께 일하도록 했다.
프란체스카는 이탈리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낼 때부터 중국의 선교사가 되기를 원했었다.
그러나 교황 레오 13세의 말에 따라 동쪽이 아닌 서쪽으로 갔다.
그녀는 여섯 명의 수녀들과 함께 뉴욕시로 가서 그곳에 살고 있는 수천 명의 이탈리아 이민들과 함께 일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하는 일마다 좌절과 어려움을 맛보게 되었다.
그녀가 뉴욕에 도착했을 때 미국에서의 첫 고아원으로 만들고자 했던 집은 쓸모없는 집이었다.
대주교는 그녀에게 이탈리아로 되돌아가도록 권고했다.
그러나 참으로 용감한 프란체스카는 고아원을 세우기로 한층 더 마음을 굳히며 대주교의 저택을 나왔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성공했다.
35년 동안 프란체스카 사비에 카브리니는 가난한 사람들과 버림받은 사람들, 무식한 사람들과 병자들을 돌보기 위해서 봉헌된 67개의 기관을 설립했다.
신앙을 잃어 가고 있는 이탈리아 이민들 사이에서 교육의 크나큰 필요성을 느낀 그녀는 학교와 성인 교육을 위한 단체를 만들었다.
그녀는 어렸을 때 언제나 물을 보고 놀랐으며 혹시 물에 빠져 죽지나 않을까 하는 공포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30번 이상이나 바다를 건너 여행했다.
그녀는 시카고에 있는 자신의 콜롬버스 병원에서 말라리아로 세상을 떠났다
프란체스카 사비에 카브리니 원장의 동정과 헌신은 오늘날 병원이나 요양소 또는 국가 기관에서 병자들을 돌보고 있는 그녀의 수십만 명의 동료 시민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풍족한 사회에서 나날이 증가하는 병원 비용에 대해 불평한다.
그러나 매일매일의 뉴스는, 의료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거나 부족하게 받고 있으며 그들의 땅에 와서 시민의 봉사자가 될 수 있는 새로운 카브리니 원장을 찾고 있는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1946년 7월 7일 프란체스카 사비에 카브리니의 시성식에서 비오 12세는 이렇게 말했다.
"그녀가 이룬 것은 대단히 미약하지만 그녀의 정신은 하느님의 뜻이 자기에게 있음을 알고 여인의 힘으로는 어렵다고 생각되는 것을 성취시키는 데 있어 그녀를 가로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할 만큼 독특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각국의 인구증가와 더불어 이민 문제가 시끄럽게 논의 되는 이때에 '이민(移民)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한 성녀의 생애를 이야기함은 무익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분은 1917년에 세상을 떠난 마리아 프란치스카 하비에르 동정녀이다.
그녀는 1850년 7월 15일, 북 이탈리아의 로디지아노에서 태어나, 같은 날 세례를 받고 본명을 마리아 프란치스카라 했다.
거기에 하비에르(사베라) 붙은 것은 그녀가 장성하여 전교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됨에 따라 전교의 대주보인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사모하는 의미에서 자원하여 붙이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