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탕 여행3 - 수향 서당의 시탕구전에서 운하를 따라 걸으며 옛거리를 구경하다!
2023년 10월 29일 저우좡(周庄 주장 ) 에서 택시를 타고 50분만에 시탕(西塘 서당)에 도착해 Ji 호텔 자싱
시탕에 체크인후 정문인 남문으로 들어가니 유객복무중심이 나오고 입장료 문표는 95위안
이나 60세 이상과 20세 미만은 절반인 47.5 위안이며 70세 이상과 초등학생(145cm 미만) 은 무료입니다.
시탕구전(西塘古镇 서당고진) 은 절강성(浙江省) 에 속하며, 고대 오월(吴越) 문화의 발상지 중의 하나
라고 하니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마을로 입장후 먼저 남쪽인 호수에 이르러 구경을 하고
나와 올라가니 옛 거리가 보이는데..... 운하가 흐르니 우린 다리를 건너서 왼쪽 길 탑만가로 들어갑니다.
시탕(西塘) 은 중국 6대 수향마을 중 하나로 천년의 역사를 가진 오래된 수향 마을이니
망명에서 돌아온 오나라 대부 오자서가 소금을 운반하기 위해 오자당이라는
연못을 파고 인근 서산 북쪽 물을 끌어들여 만들었으니 고대에는 쉬탕이라 하였답니다.
상해에서 90km 떨어진 곳에 자리한 시탕(서당)은 수나라 때 대운하 건설시 운하 가 지나는 길목에
자리하여 번영을 누렸으며 원나라 때 진(鎭) 으로 승격되었다고 합니다만 그후 개발을 거의
하지 않아 오히려 독특하고 이국적인 수로 마을 본연의 모습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마을 입니다.
여기 시탕(서당0 운하변에 줄지어 선 건물들은 지붕이 있으니 비를 맞지 않고
다닐수 있어 좋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른바 연우장랑 (烟雨長廊) 인가 합니다.
"연우장랑" 은 서당의 메인 로드로 수로를 따라 1km 에 조성된 상점 거리이니 찻집,
식당, 기념품점, 군것질 가게들이 몰려 있어 돌아보는 재미가 쏠쏠 합니다.
강남 수향 마을은 비가 많이 내리기로 유명한 데 비와 햇볕을 막기 위해 설치한 넓은
지붕인 랑붕(기와지붕) 이 가장 아름답게 설치된 곳도 바로 이 연우장랑
이니... 궂은 날씨엔 운치 있게, 맑은 날엔 그늘을 피하며 산책할 수 있는 명소입니다.
여기 길게 이어지는 연우장랑(烟雨長廊) 은 종이 파는 사람이 처음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그래서 나온 구절이 "랑붕일야차풍우, 적선인가호운래" 라던가요?
운하를 구경하면서 연인들이 배를 타고 떠내려가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이준식 성균관대
교수가 동아일보 ‘이준식의 한시 한수’ 칼럼에 쓴 “ 영웅 회고” 라는 글이 떠오릅니다.
승패는 군대에서 예측하기 어려운 법, 수모와 치욕을 견뎌야 진정한 대장부.
강동 젊은이 중에 인재가 넘쳤으니, 권토중래할는지는 그 누구도 몰랐으련만.
(勝敗兵家事不期, 包羞忍恥是男兒. 江東子弟多才俊, 捲土重來未可知.)
― ‘오강정에서 짓다 (제오강정·題烏江亭)’ 두목 (杜牧· 803∼852)
시황(始皇) 의 통일 제국 진(秦) 이 스러진 후 한왕 유방(劉邦) 과 초왕 항우(項羽) 의 패권 다툼은 치열했다.
해하(垓下) 전투에서 궁지에 몰린 항우는 애첩 우희(虞姬) 와 작별한 후 유방의 포위를 뚫고 오강
(烏江)에 다다른다. 당초 8000여명의 강동 젊은이를 이끌고 전투를 치렀던 항우에게 남은 병사는 수백명뿐.
마침 오강의 관리가 배를 준비해 두고는 지금 강동으로 건너가서 후일을 도모하라고
권유한다. 하지만 패배의 치욕을 견디지 못한 항우는 그 길로 적진으로
뛰어들어 생을 마감한다. 실패한 영웅의 장렬한 최후에 대해 역사는 포폄이 엇갈린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는 패왕(霸王)을 자처하며 초나라의 부흥을 도모했던 항우를 제왕의 치적
으로 기록한 반면, 두목은 불세출의 지도자가 허망하게 무너진 것이 너무나 실망스러웠다.
‘강동 젊은이 중에는 인재가 넘쳤으니, 권토중래할는지는 그 누구도 몰랐으련만.’
영웅의 자포자기를 못내 애석해하며 시인은 재기의 다짐을 뜻하는
‘권토중래 (흙먼지 일으키며 다시 쳐들어온다)’ 라는 신조어 까지 만들어 썼다.
그로부터 약 200년 후 두목의 시를 읽은 왕안석의 생각은 달랐다. ‘수많은 전투에
지친 장수는 사기 떨어지고, 중원의 패배는 만회하기 어려웠지. 비록
강동 젊은이들 여태껏 남아 있다 해도, 기꺼이 군왕과 권토중래하려고 했을까.’
(‘다시 오강정에서 짓다’· ‘첩제오강정·疊題烏江亭’) 천하대세는 이미 기울었고 그간
독단적으로 행동해온 항우에게서 민심은 멀어졌으리란 게 왕안석의 판단이었다.
운하 왼쪽 길을 구경하고 다리를 건너 운하 오른쪽으로 오니 저쪽 보다 훨씬 더 붐비는데.... 95위안 짜리
입장권을 끊으면 여러 박물관 등을 모두 자유롭게 이용할수 있으며 동양의 베네치아 라고 불리웁니다.
운하에서 세계 각지에서 몰려온 여행자들을 바라보다가 문득 임용한 역사학자가 동아일보
‘임용한의 전쟁사’ 라는 칼럼에 쓴 “쿼드와 대만해협” 이라는 글이 떠오릅니다.
중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다. 가이드가 중국은 대만 침공 준비가 다 돼 있다고 말했다. 바닷가에 군대가
대기 중이며 “주석님께서 명령만 내리시면” 이라는 분위기라는 것이다. 그 뒤로 30년이 지났다.
요즘 자주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겠냐는 질문을 받는다. 생각해보니 30년간 그런 질문을 받고 있다.
“아니요. 그런 질문을 30년 동안 들었지만,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라고 한다면 어리석은
답이다. 300년 동안 아무 일이 없었어도 내일 벌어질 수 있는 것이 전쟁이다.
게다가 지금 상황은 그 어느 때보다 긴장도가 높다. 중국은 30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게 강해졌고,
국제적인 위상도 높아졌다. 미국과는 각을 세우며 대립하고 있고, 제3세계에서
지지를 모아가고 있다. 누군가는 위안화가 이제 달러 패권을 위협하고
있다고 말한다. 반면 미국과 유럽은 우크라이나 전쟁만 해도 버겁고, 경제 상태는 위태위태 하다.
30년 사이에 대만의 정치 경제도 격동을 겪었다. 군대와 국민들의 국방 의식은 많이 약해졌다. 지금 반성
하고 각오를 다지고 있다고 하지만, 전쟁 준비는 하루아침에 되지 않는다. 다만 중국의 확장과 해양
진출에 대한 우려는 몇년 전 부터 충분히 감지되고 있었다. 그래서 결성한, 아니 결성했다기
보다는 결성되어 가고 있는 전략이 미국, 일본, 호주, 인도가 참여하고 있는 집단 방위동맹인 쿼드다.
쿼드는 처음 탄생할 때 부터 한국에 양날의 검이고, 어려운 선택이었다. 미국은 가입을 요구하고,
중국은 눈을 부라린다. 이미 국론은 분열되어 있고, 미국과 중국의 사이에서 중립적인 입장
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진짜 문제는 이 상황이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의 국력은 이미 새우 수준이 아니며, 대만 문제는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
평화를 유지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 화목한 상태를 유지하는
군자의 방법과 치열하게 견제하고 다투며 서로를 억제하는 호랑이와 늑대의 방법
이다. 군자의 방법이 최선이지만, 따지고 보면 가식일 뿐 인류 역사에 그런 순간이 있었나 싶다.
그리고 걸어서 너무나도 작은 골목길이 보여 들어가 보는데 여기가
"미션 임파서블"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더 유명해진 곳입니다.
미션 임파서블3 톰크루즈가 부인 줄리아를 찾기 위해 달린 장면인 석피농(石皮弄)
인가 했더니 표지판을 보니 여긴 즙가농 (汁家弄) 이고 석피농은 더 아래쪽 입니다.
여기서 어찌할까 잠시 망설이는데 우리 호텔은 저 아래쪽 방향에 있으니 여기서 위로 올라가 위쪽
운하를 먼저 보고 내려오면서 석피농(石皮弄) 을 구경하자고 결정하고는 위로 올라갑니다.
문득 국제신문 기사에 “‘싱가포르다움’ 을 위한 그들의 선택” 이란 글이 있으니 중국 남부 고광성과
복건성의 중국인들이 바다 건너 남쪽으로 이민을 가서 건설한 나라 싱가포르의 이야기 입니다.
싱가포르는 신비한 나라다. 적도에 근접하니 12월과 1월을 제외한 평균기온이 30도를 오르내리는 국가
임에도 1인당 GDP가 약 9만 달러(2023년)로 아시아 1위이고, 국제 경쟁력은 전 세계 3위이다.
정말 작지만 강하고 또 부유한 국가이자 도시다. 여기서 왜? 어떻게?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우리에게 싱가포르는 ‘독재에 가까운 강력한 통치체제 아래에서 공공의식이 매우 높은 사람들이 사는
도시이며, 국제금융에 기반 한 중계무역이 발달한 국가’ 정도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가까이
에서 만나 본 싱가포르는 세계 최고의 국가를 향한 다양한 미래실험이 행해지는 도전의 도시국가였다.
놀라운 점은 그 도전의 중심에 언제나 ‘고유한 싱가포르의 것’ 과 ‘창의적인 싱가포르
정신’ 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필자의 관심사에 들어온 몇 가지를 적어본다.
영국 식민지 시절의 근대 유산들과 마천루 풍경을 조화롭게 구성한 수변지대, 국제 명소의 반열에
오른 조류공원과 동물원, 세계유산이 된 식물원, 전 계층이 즐길 수 있는 복합리조트 등은
기본이다. 물을 수입하여 생수로 되팔고, 도심 한복판에서 ‘F1 그랑프리’ 라 부르는
스포츠카 경기를 개최한다는 사실 앞에서 비로소 그들의 특별함에 호기심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꾸불꾸불한 도심의 도로 위에서 굉음을 내며 달리는 자동차 경연에 열광하다 돌아선 그 자리에서 쇼핑과
숙박이 가능한 도시는 전 세계에 그리 흔치 않다. 언급한 예들 모두 싱가포르의 한계이자 장애로
지적되는 것을 기회의 자산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지역 밀착적인 그들만의 역발상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또 하나! 조금 다른 면에서 인지되는 것이 있다. ‘완벽에 가까운 형평성과 일관성’ 이다.
빈부격차는 있어 보이지만 빈곤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화려한 쇼윈도는
있지만..... 도심에서 외곽으로 이어지는 주거 지대의 모습이 크게 달라 보이질 않는다.
도시의 모든 미래가 치밀한 마스터플랜에서 나오기에, 갑작스럽거나 변덕이 전혀 없다. 우왕좌왕
하지도 않는다. 필자가 알고 있는 도시설계(urban design) 의 가치가 가장 잘 발현 중인 도시
라 여겨진다. 어떻게 이리 참하고도 멋진 매력이 쉴 새 없이 뿜어 나오는 도시가 될 수 있었을까?
여기서 리콴유(이광요) 초대 총리를 등장시키지 않을 수 없다. 싱가포르는 1819년 이래 영국 영향권에
속하며 오지에서 벗어났다. 1963년과 1965년, 영국과 말레이시아로부터의 두 차례 독립
과정에서 그는 싱가포르의 역사 전면에 등장했다. 자료를 찾아보니 리콴유에 대한 평가가 엇갈린다.
‘죽어있던 싱가포르를 살려낸 위대한 지도자 vs 31년의 독재 또 세습의 길을 걷게 한 독재자’ 로 요약된다.
이렇게 대조적인 평가의 원인이 된 리콴유의 선택들은 마치 롤러코스트를 탄 듯 극과 극을 달렸다.
집권 초기 그는 정적들은 물론 측근 지지자들도 숙청이란 이름으로 멀리했다고 한다.
자신의 오른팔과 왼팔들마저도 잘라냈다는 사실을 확인하니
나도 모르게 낮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그에게는 ‘오직 싱가포르’ 밖에 없었던 것이다.
생산 기반이 전무한 불모지 싱가포르를 위한 두 번째 선택은 ‘중계무역’ 이었다.
20세기 이후 싱가포르만큼 중계무역을 꽃피운 나라는 없으리라.
세 번째 선택은 ‘국민 기강 잡기’ 였다. 싱가포르의 문화는 융합으로 대변된다.
중국계 말레이계 인도계 사람들이 모여 독특한 싱가포르 스타일의 문화를 만들며 살고
있다. 이렇게 다양한 인종들을 마치 단일 성향의 국민처럼 통합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무지막지하다(?)고 알려진 벌금 제도가 탄생했나 보다.
리콴유는 왜 그런 길을 택했을까. 분명 외로운 길이었을 것이고, 그런 통제 가운데 살아온 국민도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아시아 제일로 평가받는 그들의 얼굴 이면에서
약간의 어색함이 느껴졌다. 설명하긴 어렵지만 ‘뭔지 모를 어두워 보이는
표정’으로 요약할 수 있다. 누적된 스트레스일 수 있고 동양인의 전형적인 특성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더 어색한 것은 그 통제가 국민들에게 억압이나 구속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통제에
젖어들어 즐기며 살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통제와 순응의 과정 속에는 ‘국가에
대한 국민의 무한한 신뢰’와 ‘국민을 최고로 만들겠다는 올바른 신념’이 내재되어 있는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싱가포르 전역에서 흘러넘치는 친환경적인 청결함과 글로벌과 로컬을 넘나드는 경제와
문화의 활력을 설명할 수가 없다. 최근의 추세라면 수년 내 싱가포르는 세계 최고의 국가 반열에 오를
것으로 보인다. 더위, 작은 섬, 연약지반, 다우(多雨), 먹는 물 부족, 식민시대, 다인종 등의 제약들을
빛나는 싱가포르다움으로 대전환시켰고, 지금 또다시 상상할 수 없는 위대한 대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선진국가가 된다는 것은 지도층과 국민 모두의 가치관과 관심이 선진적으로 바뀐다는 것을 뜻한다.
비록 통제와 규제에 기반 한 선택이었지만 변화를 향한 싱가포르의 관심은 오직
‘싱가포르에서 살아갈 세대와 미래’ 에만 집중했다. 무엇보다 ‘올곧은 공의와 진정한 사랑’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