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리모프 대통령, 박 대통령에게 위로 서한
우즈베키스탄의 이슬람 카리모프 대통령은 지난 17일 박근혜 대통령 앞으로 여객선 침몰과 관련된 위로 서한을 보냈다. 카리모프 대통령은 서한을 통해 “최근 남서해에서 발생한 ‘세월호’ 침몰 사건으로 많은 인명이 희생된 것에 깊은 슬픔을 같이하며, 유가족에게 애도를 표하고 부상자들의 조속한 쾌유를 기원한다.”고 밝혔다. 수학여행 학생들을 태우고 운항중이었던 ‘세월호’는 지난 16일 오전 8시 55분쯤 침수되고 있다는 신고가 접수된 후 2시간 20여 분만에 완전히 침몰했다. 세월호에는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난 안산 단원고 학생과 교사, 선원, 승선원 보조 아르바이트 학생, 선상 불꽃놀이 행사 업체 직원 등 475명이 승선하고 있었다. 20일 오후 4시 현재 179명이 구조됐으나 58명이 사망하고 237명이 실종 상태다. 사망자는 안산 단원고 2학년 정치웅군, 교사 최혜정씨, 승무원 박지영(22)씨 등이다. 해군과 해경은 침몰 초기 헬기 18대와 선박 34척 등을 긴급 투입해 구조작업에 나섰다. 특히 해군은 선체 안에 승객이 갇혀있을 가능성에 대비해 해난구조대(SSU) 42명과 해군 특수전 전단(UDT) 14명을 투입했다. 해군은 이와 함께 유도탄고속함 1척과 고속정 6척, 해상 초계가 가능한 링스헬기 1대 등도 사고 해역으로 급파했다. 이와 함께 경남 진해에서 정박 중이던 독도함도 사고 해역으로 보내 구조, 수색 작업에 참가시켰다. 세월호는 18일 오전 11시50분쯤 완전히 바다 속으로 침몰해 보이지 않게 됐다. (취재 = 한인일보 편집국)
우즈벡, 500억원대 폐수처리시설 공사 발주
우즈베키스탄이 중소형 수처리 시설을 발주한다. 17일 해외건설협회에 따르면 우즈베키스탄 정부가 폐수정화시설에 대한 발주를 진행 중이라고 전했다. 이번 프로젝트는 우즈베키스탄 Bukhara에 폐수정화시설을 EPC 방식으로 건설하는 것으로 550만달러 규모로 진행될 예정이다. 프로젝트에 대한 PF(Project Financing)는 WB(World Bank)가 차관을 제공하면서 진행되게 됐다.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오는 26일까지 입찰을 진행할 예정이며 동일 16시에는 개찰을 실시해 낙찰 업체를 선정한다는 계획이다. (출처 = engdaily)
[연재] 고려인 ‘미하일 안’을 아시나요? (1부) 러시아 축구의 별칭은 ‘스보르나야(Сборная)’다. Collection(수집)이라는 뜻이다. 소련 시절 각국의 최고 인재들의 집합을 유래로 한다. 인종과 출신을 구분하지 않고, 최강의 전력을 만들겠다는 소련 축구의 모토였다. 이런 이유에서 고려인 축구선수들도 예외 없이 소련 각 클럽에서 맹활약했다. 드미트리 안 형제, 올레그 박, 비체슬라브 김, 니콜라이 환, 발렌틴 김 등의 선수들이 대표적 예다. 일반적으로 고려인들이 차별 대우를 받았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러나 대표팀에서의 활약을 이야기 할 경우 활약 선수들의 범위는 국한된다. 당시 소련 축구대표팀의 주류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선수들이 차지했다. 고려인 출신 선수들에게 대표팀 선발은 ‘보이지 않는 장벽’ 이었다. 소련 체제의 기반 사상이 ‘평등’이라 하더라도, 은연중에 존재하던 편견을 깨기에는 어려워보였다. 하지만 단 한명의 고려인이 그 벽을 넘었다. 짧은 생에 소련 축구에서 한 획을 그었던 미하일 안의 이야기다. 미하일 안은 1952년 11월 19일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주 스베르드로브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축구와 가까웠다. 형 드미뜨리가 축구 선수였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안은 어려서부터 축구를 좋아하게 됐고, 64년에는 마을의 어린이 축구팀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미하일 안이랑 어린이 축구팀 생활을 했던 현 우즈베키스탄 축구 협회 대표인 루스탐 아크라모브는 미하일 안을 이렇게 추억한다. “미하일 안이랑은 스베르드로브 어린이 축구팀에서 같이 뛰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재주가 뛰어났고 다른 아이들보다 확연히 차이를 보였다. 물론, 그때는 아직 체력이 많이 부족했고 기술적인 면에서 다듬어야 할 부분이 있었지만 필드를 느끼고 게임의 흐름을 볼 줄 알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는 뛰어난 선수가 되었고 그의 성격을 고려해보면 차차 훌륭한 코치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1968년 미하일 안은 수 많은 인재들을 배출한 티토브 전문 스포츠 학교에 입학한다. 그 해에 미하일 안은 소련 청소년 대표팀의 선수로 뽑혔다. 당시만 해도 우즈베키스탄 출신이, 그것도 17세의 ‘고려인’이 소련 대표팀 유니폼을 입는다는 건 당시로서는 소련 축구계에 엄청난 이슈였다. 19살이 된 미하일 안은 친청팀 FC 폴리토트델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우즈베키스탄의 FC파흐타코르로 둥지를 옮겼다. 적응기는 없었다. 미하일 안은 매 경기 동료 선수들에게 결정적인 패스를 해주며 팀에 녹아드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체력 문제에서 약점을 보이기도 했다. 클럽 입단 당시 왜소했던 미하일은 체력적으로 완성되지 못했었다. 하지만 미하일 안의 넓은 시야와, 정확한 패스 능력은 그 단점을 상쇄할 만한 수준이었다. 파흐타코르로 이적한 후 미하일 안은 소련에서 가장 핫한 미드필더로 자리 잡았다. 당시 소련 연방은 국가를 구분하지 않고, 리그를 운영했는데 현재의 디나모 키예프(우크라이나), CSKA 모스크바(이하 러시아), 로코모티브 모스크바등이 1부 리그의 강팀이었다. 파흐타코르는 지리학적으로 변방이라 할 수 있는 우즈베키스탄에 위치했고, 영향력이 미미했었다. 굳은 땅에서 자라야 더 빛이 나는 법. 미하일 안은 1972년 2부 리그로 떨어진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다시 1부 리그로 올려놓으며 전성기를 예고했다. 주 포지션 ‘하프백’ 지금의 ‘볼란치’ 역할을 맡았던 미하일 한은 득점력에서도 절정의 기량을 선보였다. 그는 1974년에는 29경기에 출전 11골, 이듬해에는 27경기에 출전 8골을 터뜨리며 3시즌 연속 팀 내 득점왕에 이름을 올렸다. 당시 소련 최고의 축구 스타이자 1974 시즌 20골을 기록하며 득점왕에 이름을 올렸던 올레그 블로힌조차 미하일 안의 득점력에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는 것이 전언이다. 미하일 안은 득점 뿐 아니라 주 임무인 ‘연계’ 부문에서도 최고의 기량을 선보였다. 당시 소련 전문가들은 미하일 안이 컴비네이션 플레이를 재해석하고, 자신의 기술과 경험을 바탕으로 동료들의 게임을 살필 줄 아는 선수라고 평가했다. 특히 팀 동료인 표도로프와의 연계가 인상적이었다. 미하일 안-표도로프 컴비네이션 플레이는 우크라이나 축구 역사상 최고의 공격 루트로 회자 되고 있다. 이런 활약 덕분에 두 선수는 전 소련 연방 축구선수 33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맞물려 미하일 안의 파흐타코르는 소련 리그의 ‘핫 클럽’으로 떠올랐다. 영향력은 점진적으로 넓어져갔다. 1976년 미하일 안은 U-23 유럽청소년선수권대회에 소련 청소년 대표팀의 일원으로 활약을 이어갔다. 그는 8강 프랑스전, ‘세계 최강’ 헝가리와의 결승전에서도 맹활약하며 우승컵을 안겼다. 당시 투지 넘치는 플레이, 융화력이 뛰어났던 미하일 한은 팀의 주장을 맡았고 동료들로부터 신임을 얻고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미하일 안은 청소년 대표팀을 거쳐 성인 대표팀에도 발을 담그게 된다. 1978년 미하일 안은 이란과의 평가전을 통해 소련 성인 대표팀 데뷔전을 치렀다. 1980 유로 예선 그리스전에서도 활약하며 세계적인 선수로 인정받았다. 미하일 안의 축구 인생은 그렇게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2부로 이어집니다. (출처 = spotal)
‘땅끝을 가다’ - 타지키스탄
중앙아시아의 지붕이라고 불리는 파미르 고원을 병풍삼아 광활한 대지를 누볐던 유목민의 나라 타지키스탄은 남한 면적의 한배 반 정도 되는 중앙아시아의 가장 작은 공화국이다. 1991년 소련이 붕괴되면서 독립을 선언했지만 곧바로 내전에 들어가 지금까지도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오랜 내전으로 자유와 평화를 갈구하고 해발 3천m 고지대의 높고 푸른 초원과 광활한 사막이 공존하는 땅이다. 타지키스탄은 1991년 구소련이 붕괴한 후에 현 정부와 이슬람 근본주의와의 내전이 발발해서 1997년 평화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많은 기반시설들이 파괴됐다. 내전으로 5만 명 이상이 사망하고 100만 명 정도가 난민이 돼서 러시아나 우즈베키스탄, 멀리는 파키스탄까지 건너갔다. 현재 타지키스탄 사회가 안정되기는 했지만 아직도 불안감이 많이 남아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입국도 쉽지 않다. 한국내에는 타지키스탄 대사관이 없고 비자를 발급받기 위해서는 우즈베키스탄이나 카자흐스탄 등 인근 국가에서 받아야 한다. 타지키스탄은 4개의 주로 된 나라이지만 주의 독립성향이 강해서 사실상 4개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주를 넘을 때마다 허가증을 지녀야 하고, 이곳을 통과하는 모든 사람들은 여권이 있어야 한다. 자신의 나라를 여행하는데도 여권을 지녀야 하는 상황이다. 게다가 거의 모든 국경에는 러시아 군인들이 지키고 있다. 최근 중앙아시아지역에 미국의 영향력이 확대되자 위협을 느낀 러시아가 타지키스탄의 부채를 일부 갚아주고 러시아 주둔 기간을 연장했고 최근에는 2042년까지 아무런 보상 없이 연장하는데 합의했다. 그러다보니 국경을 넘어가는데 검사가 무척 까다로운 편이다. 타지키스탄은 중앙아시아와 동유럽을 통틀어서 가장 가난한 국가이다. 2011년 GDP가 700달러 정도밖에 안된다. 자국에서 일자리가 없다보니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등 해외로 나가 일하고 있는 노동자가 7명 중에 1명 꼴이다. 이들이 벌어들이는 외화 덕분에 높은 경제성장률을 유지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어려운 상황이다. 젊은이들이 외국에서 돈을 벌어 가족들에게 보내면 가족들이 생계를 위해 생필품을 구입해서 결국에는 외국에서 벌어들이는 이익이 국내에 모이는 게 아니라 다시 외국으로 빠져나가다 보니 자생적인 경제발전이 어렵다. 형편이 이렇다 보니 사람들도 살기가 힘들 수밖에 없다. 요즘 시대에도 지방의 경우에는 현지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뭐냐고 물으면 ‘당나귀’라고 대답한다. 당나귀가 많은 짐을 운반할 수 있고, 또 산악지대도 별 문제 없이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타지키스탄은 목화도 수입원 중에 하나인데, 이 목화생산을 하고 노동자들이 하루에 받는 일당이 1달러도 안되고, 게다가 땡볕에서 하루 종일 허리를 굽히고 일하는 중노동이라 옛날에는 노예들이 전담했던 것을 지금은 목화 수확철이 되면 어린이들도 학교를 쉬고 수확을 돕는다고 한다. (사진=타지키스탄 사람들에게 당나귀는 중요한 수입원이다.) 타지키스탄은 이슬람 국가이긴 하지만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고 오히려 이곳 정부는 이슬람 근본주의를 정권에 대한 위협으로 보기 때문에 경계를 한다. 그래서 이웃 아프가니스탄에 비해서 사람들이 자유롭고, 특히 여자들은 아프가니스탄과는 달리 전통 옷을 입어도 얼굴을 가리거나 남자들이 피하지는 않는다. 최근에는 타지키스탄에 50년 만에 불어 닥친 한파로 100여 명이 사망한 사건도 있었다. 한파도 계속되는데다가 국제 식량가격이 상승되는 바람에 식량가격이 3배 이상 오르고, 비축된 에너지도 없어서 전국적으로 전기 공급도 제한된다. 수도권 마저도 하루에 전기가 몇 시간 밖에 공급되지 않아서 주민이 난방과 물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는 상황이다.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사회 문제가 대두되기도 한다. 타지키스탄은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큰 마약 통과국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제조된 마약이 러시아로 이동하는데 타지키스탄이 중간 통과지로 이용되고 있다. 경제가 어렵다 보니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일이긴 하지만 거금이 생기는 일이니까 타지키스탄 사람들에게는 뿌리치기 힘든 유혹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마약이 타지키스탄 사회에 미치는 악영향이 크다. 그래서 정부가 마약사범을 찾는데 공을 많이 들이고 있지만 쉽지가 않다. 수송 방법들도 다양해서 이불솜 안에 넣기도 하고, 석류나 과일 속을 빼내고 안에 넣기도 하고, 구두 뒤축이나 심지어는 봉투를 삼켜서 위 속에 넣어서 나르기도 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예전 구소련시절에 KGB로 불렸던 비밀경찰들도 많고 외국인에 대한 검문검색도 심한 편이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어려움이 많긴 하지만 사람사는 세상에서 오락이 없을 수는 없는 법. 타지키스탄에서 가장 인기있는 오락은 투견이다. 타지키스탄은 유목민 시절부터 양떼를 지키던 개를 용감하고 용맹스럽게 단련을 시켜서인지 투견이 아주 인기가 많다. 송아지만한 개들이 서로 목덜미나 귀를 물고 피 튀기며 싸우는 것을 보면 비위가 약한 사람은 웬만해서는 보기 힘들지만 이곳 사람들은 아주 열광적으로 투견을 즐긴다. (출처 = gnmaeil)
해외 창업 1순위 ‘치킨 전문점’
해외 각국의 한인들 사이에서 치킨전문점 창업이 열풍이다. 세계 각국에 다양한 치킨메뉴가 존재하지만 ‘한국’만의 맛으로 한국형 치킨이라는 독보적 아이템이 만들어진 것은 K-푸드 열풍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치킨전문점은 외식창업아이템으로써도 적합하다. 후라이드 치킨과 양념치킨을 기본으로 전기구이, 오븐구이, 바비큐 치킨, 닭강정 등 다양한 메뉴 스타일이 존재해 선택의 폭이 넓다. 여기에 주방설비와 동선이 심플하고 조리가 쉬운 장점이 있어 국내 외식시장의 70%이상을 점유할 만큼 손꼽히는 인기 창업아이템이다. 이처럼 창업의 핵심요소를 갖춘 치킨전문점이 한류열풍을 타고 국내를 넘어 해외에서까지 전성기를 맞이한 것으로 보인다. (출처 = 아크로팬)
해외 출장중 ‘회식’도 업무상 재해
국외 출장 중 회식에 참여했다가 갑자기 숨졌다면 사망원인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어도 업무상 재해로 인정할 수 있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서울행정법원 행정4부(부장 최주영)는 중국 출장 중 회식 자리에서 갑자기 사망한 LG디스플레이 사원 A(38)씨의 유가족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유족보상 및 장의비 부지급 처분 취소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했다고 18일 밝혔다. (출처 = 서울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