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탐방
비바람의 풍상을 고스란히 맞으며 길게는 1,500년의 세월을 버텨온 탑과 부도 그리고 마애불….
제아무리 단단한 돌로 만들어진 석조문화재들도 시간의 흐름 앞에서는 영원할 수 없는 법. 노환에 따른 크고 작은 질병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국방방곡곡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석조문화재들은 끊임없는 관심과 애정으로 보살펴줘야 하는 존재다.
그런 점에서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연구실 석조문화재보존팀장 김사덕 씨는 전국 1,200여 점의 석조문화재를 보살피고 있는 ‘석조문화재 전문의’인 셈이다. 그는 1992년 문화재연구소에 입사한 후 10여 년 째 전국의 현장을 누비며 문화재 수리와 보수를 하고 있다.
그는 일단 석조문화재에 뭔가 잘못됐다는 신고가 들어오면 출동한다. 병세가 가벼우면 진단 후 보수방법에 대한 처방을 내리고 돌아오지만 긴급한 상황이면 즉시 치료하고 수술까지 마쳐야 한다. 도굴꾼에 의해 훼손된 경기도 여주 고달사터 부도(국보 4호)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현존하는 부도 중에서 역사적 예술적으로 가장 가치가 높다고 평가 받은 고달사터 부도는 그야말로 처참한 모습이었다. 부도 상륜부의 보주(구슬 장식)와 보개(덮개 장식)는 조각났고, 옥개석 귀퉁이를 장식하는 귀꽃장식 한 개도 부러진 상태였다. 상륜부를 보수하고 귀꽃장식을 제 위치에 붙이는 작업은 며칠동안 계속됐다.
이렇듯 문화재 보수작업 대부분이 현장에서 진행되는 탓에 지난 한 해 김 씨의 출장일수는 150여 일에 달한다.
“세월의 더께를 피할 수 없는 석조문화재 파편들은 쉬 부서집니다. 이런 기존 부재를 될 수 있으면 많이 사용해서 복원하는 게 이상적입니다. 그러려면 파편에 대한 경화처리가 필요하고 그에 따라 약품처리가 필수적입니다. 하지만 약품을 너무 많이 바르면 석재가 숨을 쉴 수 없습니다. 곧바로 숨이 끊어지고 금방 떨어져 나갑니다. 기존 부재를 얼마나 많이 쓰느냐도 중요하고, 복원된 석재가 제대로 붙어 있어야 하므로 ‘어려운 수술’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작업들의 연속이지만 목숨이 위태로운 문화재들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제 몸 하나 불편한 것은 기꺼이 감내해야죠.”
김 씨가 하는 일은 크게 정기적인 현장 답사로 문화재 훼손 요인을 제거하는 예방작업과 당장 치료가 필요한 문화재의 보존처리 작업으로 나눌 수 있다.
현재 8년째 진행하고 있는 경천사 10층탑(국보 86호) 보존처리작업은 후자에 속하는 것.
지난 1995년부터 시작된 복원작업은 높이 13.5m에 무게만도 100여 톤에 달하는 탑의 정밀 실측작업과 해체작업을 거쳐 오염물 제거와 균열 및 파손부위를 메우는 보존처리작업이 진행 중이다.
일본으로 무단 반출됐다 원래 부재의 30%를 잃은 채 되돌아온 경천사탑. 1960년에 와서야 시멘트로 보강해 가까스로 복원했으나 95년 다시 해체됐다. 워낙 탑의 손상이 심한 데다 산성비와 대기오염의 피해가 커 석탑 이곳저곳에서 균열과 부식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탑신에는 부처와 보살, 용, 연꽃 등 섬세하고 아름다운 조각이 수 놓여 있지만 재질이 약한 대리석이기 때문에 복원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따른다.
탑 복원의 관건은 옛 부재를 최대한 사용하면서도 더 이상 부식되지 않도록 처리하는 것. 균열이나 부식 부위는 합성수지의 일종인 에폭시 수지를 이용해 보완하고 일부분이 떨어져 나간 곳은 탑과 같은 재질의 대리석으로 만들어 접합한다. 현재까지 75%가 마무리됐고 복원이 완료되면 새로 지어질 용산 국립박물관 내에 전시될 예정이다.
“유달리 수난을 많이 겪은 경천사 탑이 상처를 치유하고 안전한 곳에 세워지게 돼 다행입니다. 원래 있던 자리를 떠나게 된 것은 아쉽지만 오래 그리고 건강하게 지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죠.”
‘재미있고 보람있기 때문’에 문화재 복원수리 작업을 하고 있다는 김 씨. 그 동안 해인사 길상탑, 연곡사 부도, 감은사탑, 원각사지 10층탑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석조문화재들이 그의 손을 거쳐 새 생명을 얻었다. 이 가운데 왕년의 보수 잘못으로 순서가 바뀐 채 복원됐던 연곡사 부도를 철저한 고증을 통해 바로잡은 것이 가장 기억난다고 김씨는 말한다. 또한 그는 3년 전 지역유지에 의해 잘린 백룡굴 종유남근석에 대한 접합수술을 해 화제를 낳기도 했다. 스테인레스 봉으로 지지하고 접착제로 붙인 남근석 수술은 대성공이었다.
문화재 복원 작업을 할 때면 각 부재마다 장인들의 숨결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느낀다는 그는, 선조들의 장인정신을 오늘날 제대로 이어가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죄스럽기만 하다. 늘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지만 훗날 어떤 평가를 받을까 생각하면 한 순간도 방심할 수 없다고 한다.
지금 그와 함께 경천사탑 복원에 참여하고 있는 이주완(35), 김진형(30), 신은정(30) 씨도 비정규직 직원으로 보장되지 않는 신분, 열악한 근무조건 등을 ‘사명감’ 하나로 이겨내고 있다.
하지만 정작 그를 허탈하게 하는 것은 문화재 훼손현장에서 일어나는 ‘어이없는 일(?)’이다. 문화재를 관리하는 측에서 부서진 문화재의 파편을 깨끗이 쓸어버리거나 기념물로 가져가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어느 절에서는 연등이 달린 줄을 묶어 탑의 부재가 파손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탑은 국가재산이나 문화재이기에 앞서 부처님이 머무시는 곳인데, 다른 곳도 아닌 사찰에서 함부로 다룬다는 사실이 안타깝습니다. 문화재가 훼손됐을 때는 현장을 그대로 보존하거나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부재를 잘 수습해 유실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빠른 신고는 필수겠죠?”
병이 생기기 전에 예방하는 것이 가장 좋은 치료책이듯, 문화재 주변에 갑갑하게 놓여 있는 시설물들을 말끔히 치워 훼손요인을 제거하는 것도 또 다른 문화재 보존법이라고 그는 말한다.
“경천사탑의 복원작업이 끝나면 불국사 다보탑(국보20호)과 석가탑(국보21호), 그리고 감은사지 서탑(국보112호)의 보수 작업에 들어간다”고 말하며 기대를 감추지 못하는 김 씨의 모습에서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큰 보답이나 공이 돌아오지 않아도 묵묵히 문화재를 보살피는 또 다른 ‘장인’의 모습을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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