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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방송에 관한 글을 쓰다보니 그 시절의 영화나 연극, 문학, 음악등과 연계되는 경우가 많지만 자료를 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자료를 구하다가 좋은 자료를 만나면 저도 볼겸 춘하추동방송 블로그를 찾는 분들도 쉽게 볼수 있도록 옮겨 놓는경우가 있습니다. 이 글은 1931년 7월 5일에 발행된 동광 제 23호에 올라있는 글로 상록수로 널리 알려진 심훈님이 쓴 글입니다.
심훈님은 1931년 한사람을 선발하는 경성방송국 아나운서 시험에 응시했다가 성적은 우수했지만 음성이 뒤져 당시 축구중계방송의 원조라고 불리는 박충근 아나운서가 합격되었다고 했습니다. 그 뒤 방송국 생활을 한적이 있지만 생각이 달라 방송국을 뒤로 했다고 했습니다. 심훈님의 형님 심우섭님은 1936년부터 1939년 초까지 우리말 방송전담 제2방송과장을 지내신 분이고 중일전쟁 이후 우리말 방송에 일본말을 섞으라는 일본의 지시를 따를 수 없다면서 방송국을 떠나신 분입니다. 심훈님과 심우섭님에 관한 글은 아래 영문자 주소를 클릭하셔서 보실 수 있습니다.
최용신과 심훈 그리고 상록수와 최용신 기념관 http://blog.daum.net/jc21th/17780431
경성방송국 제 3 대 제2방송과장 沈友燮님 http://blog.daum.net/jc21th/17780406
일제 강점기 우리말을 지킨 沈友燮방송과장(이장춘이 사우회보에 제공한 글) http://blog.daum.net/jc21th/17780182
朝鮮映畵人 언파레드 沈熏
연극인부터 써야 옳겟으나 필자의 형편으로 우선 가까운 영화인을 爲始하야 評傳도 아니요 「꼬싶」도 아닌 人名行進에 지나지 못하는 것을 끄적여 보려 한다. 인물평이란 본시 재칫하면 오해받기 쉬운 노릇 이지만 더구나 만평 비슷하게 되면 當者에 대하야 적지 않은 실례다. 그러타고 「正」字를 달아가며 똑바른 평을 하자니 필자의 책임이 과중하다. 그러므로 각 개인에게 일일히 예를 가추어 정중히 또는 정확히 쓰기도 어려운 일이다. 나는 아래에 나열해 보려는 영화인 여러분에게 평소에 鴻毛만한 私感도 없으려니와 따라시 인격을 中傷하려는 악의는 물론 없다. 그러나 鐵筆끝이란 원체 뾰죽한 것이라 조히 우를 달리다가는 따끔하게 찔를지도 모르겟고 탈선을 하면 충고 비슷한 言句가 튀어 들어갈는지 그역 예측키 어렵다.
찔리워 앞은 사람은 모름직이 반항할 일이요 아니꼬운 충고를 받은 분은 맛당히 「엑기 건방진 놈!」 하고 욕할 것이다. 어쨋든 선구적 영화예술가로서 시대의 첨단을 걷는다느니 보담 빈궁과 질곡의 첨단을 걷고 잇는 우리 朝鮮의 영화인인지라 한 동지의 寸鐵쯤으로는 과히 노염을 타지 않을 만한 아량이 잇을 것만 믿고 비교적 솔직한 의견을 토막을 처서 적어보려는 것이다.
總指揮者
先覺者의 1인으로 爾來 民衆劇團 <56> ―朝鮮키네마주식회사 ―白南푸로덕슌―최근의 선전영화 「정의는 이긴다」를 제작하기까지 數十年來 극계, 영화계의 許多한 풍파를 겪으며 적지 않은 제자를 양성하고 음으로 양으로 梨園을 가꾸어 온 분이다. 朝鮮서 맨 처음으로 작품의 형태로 제작된 체신국 선전영화 「月下의 盟誓」(李月華 주연)가 氏의 작품이요 개인의 이름으로 푸로덕슌을 일으킨 것도 氏로써 嚆矢다.
沈淸傳, 開拓者가 그때의 所産이엇으니 생각하면 벌서 아득한 옛날이다. 氏는 日本의 高商 출신으로 명철한 두뇌의 주인공이라 理財治産에도 밝을 듯하나 어대까지 才子型이요 多感한 성격이 珠盤질 만하고 늙지를 못하게 한 것이다. 適材일 듯하다. 淸貧한 그는 생활의 방편으로 野談放送을 시작한 것이 어느듯 全朝鮮을 다리에 걸치고 입심을 부리며 다니는 野談大家가 되고 筆料를 견양하고 붓을 들다가 슬그머니 대중소설가가 되고 말앗다. 그러나 그것은 氏의 本道가 아니다. 기회가 손아귀에 잡히기만 하면 素志를 관철하고야 말 결심을 지금도 가지고 잇을 것이다. 氏의 捲土重來的 활동을 기대하거니와 氏는 보리밭도 못 지나가는 不酒黨이면서 佯酒酊의 名人이라하고 坐談은 入堂한 것이라 막론하고라도 日本의 落語나 「浪花節」같은 소리는 日人도 명함을 못드린다고 한다. 그러나 年齒가 이미 불혹을 域을 넘은지라 여간한 자리에서는 그 隱才의 주머니 끈을 끌르지 안는다 한다.
개작하야 「長恨夢」으로 이름을 날리고 尹白南氏 等과 같이 圓覺社 舞臺에서 「不如歸」의 中將으로 분장하야 環刀바람에 연극감기가 들기 시작한 이후 鷄林映畵協會를 창립하고 「長恨夢」, 「山寒王」, 「먼동이 틀 때」등 數多한 작품을 제공하얏다. 자본주도 아니요 실지로 메가폰을 잡은 것도 아니나 배후에서 모든 일을 籌備한 總指揮者엿다. 신장이 6척이요 성격이 寬厚하기 大國 사람 같아서 발등 우에 벼락 불똥이 떠러저도 왼눈 하나 깜작거리지 않는 長者의 風度가 잇고 따라서 무슨 일이든지 한번 붙잡으면 끈기잇게 잡아느리는 힘이 대단하다. 「鷄林」이 경영상 실패를 거듭하는 중 氏 홀로 빈 간판을 수호신과 같이 지키고 오기 數3년에 이르럿섯다. 그는 영화가 專業的으로 유망하고 사회적으로 喫緊한 가치가 잇는 것은 이해하면서 예술적으로 영화에 대하야서는 문외한과 같이 무심하다. 어쨋든 과거에 잇어서 斯界를 위하야 많은 고생과 아울러 적지 않은 공로가 잇는 분이다. 斗酒를 오히려 사양해 본 적이 없는 大飮家로 가끔 바지 속에서 박연폭포가 흘르고 네려도 泰然自若히 盞을 기우린다고-.
興行師다. 錢主도 아니요 예술가도 아니나 朝鮮映畵에 「총지휘...朴晶鉉」이란 첫 자막에 여러 번 올른 사람이라 빼어 놀 수 없는 존재다. 이익을 볼 눈치를 약속 빨리 차려서 자본을 융통해 주는 것이 그의 역할이엇다. 그의 손으로 만들어진 작품이 枚擧키 어렵도록 많다. 얼굴이 검어서 아푸리카 태생 같으나 皓齒를 드러내어 노상 생글생글 웃으며 接人한다. 그의 풍부한 경험만으로도 興行界의 제1자다.
조감독 노릇을 한 것을 필두로 「沈淸傳」, 「開拓者」, 「長恨夢」, 「山寒王」, 「鳳凰의 冕旒冠」, 「淑英娘子傳」 최근 上海서 제작한 「楊子江」등 許多한 작품을 감독한 촬영감독으로서 고참이요 또한 선배다. 그의 작품이 모주리 걸작이라고 찬사를 올릴 수는 없으나 영화의 處女地를 개척하느라고 가진 고난을 겪어온 斯界의 공로자로서 그의 이름이 길이 남을 것이다. 그러나 新感覺派的인 그의 성격은 鳥合之衆을 統御할만한 포용성과 통제력이 <57> 적다. 그러므로 실제사무가로 제1선에 서기에는 適材가 아닌 감이 없지 않다. 그를 대할 때마다 찹프린을 연상시킨다. 汽船의 뽀이, 전도사, 교원, 순회배우...등, 崎嶇한 그의 半生을 보아도 그러커니와 短軀瘦身의 風?쫓아 찹프린과 倣似하다. 고독한 그는 또다시 유랑의 길을 떠낫다. 「楊子江」 1편은 그가 夢寢間에도 잇지 못하는 고국의 동지들에게 보낸 선물 이엇다. 장래의 촉망이 크거니와 그가 중요작가로서 주옥같은 작품을 발표한 것은 기억하는 사람이 적을 것이다.
소개자요 또 「雙玉淚」 時代爾來 近者에 「僧房悲曲」 최근에 「守一과 順愛」에 이르기까지 적지 안은 작품에 배후에서 「메카폰을 들고」, 「레디」 「아잇!」을 불른 사람이다. 본격적으로 감독을 하는 것보다는 대개는 合議制로 일을 해 온 것이나 영화에 관한 평론도 적지 않앗다.
女役을 맡아온 무대경험도 잇고 釜山 朝키네 제1회 작품 「海의 秘曲」에 주연 하얏든 것도 우리의 기억에 새롭다. 尹白南 氏의 제자로 朝鮮映畵藝術協會를 조직하야 그 中樞分子가 되엇고 「假花商」과 「노래하는 시절」을 감독하얏다. 노력한데 비하야서는 감독 수법에 잇어서 아직 볼만한 것이 없는 것은 유감이다. 방금 촬영중인 「싸구려」傳士를 고대한다.
평론도 하고 또 감독도 하는 신인이다. 평론이나 소개는 外誌의 푸린팅이 많으나 이론을 실천하려고 不絶히 노력하는 사람이다. 서울키노를 통솔하고 「火輪」을 감독하얏다. 日本의 푸로레타리아 영화들과 연락하야 각 촬영소를 순례한 후 얻은 바가 많앗다 한다. 「火輪」에 잇어서 그의 감독으로서의 기교는 미숙한 것이 사실이요 작품의 내용을 통일도 시켜놓지 못하얏스나 좋은 체험을 얻엇을 것이다. 앞으로도 「푸로레타 리아리즘」에 입각을 더욱 튼튼이 하고 나서 실지의 활동이 잇기를 바란다. 그의 나이로 보아서도 장래가 멀다.
才氣가 넘치는 그는 스크린 뒤에서 목청을 파는 일에만 만족치 못하는 듯 각색도 하고 자신이 나서서 「장화홍련전」, 「세 동무」, 「落花流水」, 「約婚」, 「젊은이의 노래」등 여러 작품의 촬영을 감독하얏다. 映畵小曲도 작곡하야 항간에 유행시킨 것도 적지 않다. 行有餘力이든 本職 以外의 활동도 못할 배 아니나 앞으로는 映畵解說을 전문으로 더욱 硏鑽을 거듭해 가기를 권하고 싶다. 一時는 哀傷的이요 또한 정열적인 그의 해설로 滿都의 무비팬에게 많은 환영을 받은 터이요 관중도 또한 새로운 해설자를 요구하는 터임으로 不絶의 노력으로 斯界의 권위를 잡기를 바란다. 근래에 와서는 家內의 거듭 닥치는 불행으로 건강까지 잃고 精進도 못하는 듯 그를 위하야 유감 됨이 적지 않다. 이밖에 「地下村」을 감독한 姜湖氏 等이 잇으나 첫 작품이 완성되지 못하얏으니 후일을 기대할 밖에 없다.
쓰는 사람이 없으나 氏는 朝鮮 씨나리오 작가협회에 가담하야 「火輪」의 일부와 「노래하는 시절」 「출발」 그리고 현재는 영화소설「인간궤도」를 朝鮮日報에 발표하고 잇다. 신문기자로 편집자로 삽화로, 만화로 소설로, 詩로, 씨나리오로 그는 실로 坐不安席의 <58> 多角的 활동가요 精力人이다. 재주덩어리인 氏는 참신한 감각과 날카로운 신경이 움즉이는대로 吐雲生龍의 기세를 보인다. 성격상 한가지 일을 고집하지 못하고 주위가 또한 화필만 붓잡고 앉지 못하게 하는 사정을 양해치 못함은 아니다. 그러나 才華와 정력을 뜯어 벌려서 濫費하지 말고 외골수로 집중시키면 어떠한 걸작이 나올는지 모를 것이다. 새로운 의식의 把持者요 文武(?)를 雙全한 그의 장래야 말로 바라는 배 크다. 氏여 모름직이 한 길을 뚫고 파 나아가라.
徐光齊 서광제
많이 써 왓다. 그리고 「火輪」일부와 「뻐쓰 걸」등 씨나리오도 발표하얏다. 아직까지 정면의 활동이 없으나 혈기가 괄하야 사상과 행동이 불온하다고 일껀 맡아 두엇든 자동차 운전수 免許狀까지 빼앗겻다고 두덜두덜. (이밖에 몇 분이 잇엇으나 이번에는 사정상 割愛한다.)
李明雨 이명우
작품도 박여냇지만 「鐵人都」 「僧房悲曲」 최근에는 「守一과 順愛」의 같은 佳作을 촬영하야 캐메라, 웍으로 朝鮮映畵의 레-벨을 올리엇다. 재조 잇는 사람이니 기사로서 일류가 되기에 부끄럽지 않다. 그러나 井中蛙로서 만족하지 말고 용기를 내여 修業의 길을 떠낫으면 事半功倍일 것이다. 새로히 설립한 玄聖完 푸로덕슌에서 敏腕을 휘둘르는 중이라고.
羅雲奎 푸로덕슌, 「젊은이의 노래」, 「約婚」에 이르기까지 촬영기사로서 가장 많은 작품을 박히고 풍부한 체험을 軟骨에 쌓은 斯界의 1인자다. 두뇌가 명철하야 더욱이 타산에 밝고 매사에 綿密周到하다. 영화인으로서 酒草를 가까이 하지 않는 것도 드믄 일이다. 지금은 생각한 바 잇서 多年 宿望이든 유학생의 길을 떠나 京都帝키네에서 鈴木重吉監督의 지도하에 業을 닦고 잇는 중. 벌서 적지 않은 수확이 잇는 소식이 온다. 괄목상대할 날만 손꼽아 기다린다.
「椿姬」이전부터 「바다와 싸호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다년간 촬영에도 종사하엿거니와 현상과 푸린틩으로 그를 따를 사람이 없다. 자기가 암실과 기계를 가지고 잇는 관계로 남몰래 연구를 싸아왓고 「守一과 順愛」만 하드래도 거이 그의 손을 거처서 그만큼이나 선명하게 씻어진 것이다. 아직 24세의 청년,<59> 그의 前途야 말로 洋洋하다. 천성이 굼띄어 膽汁質인데다가 술을 마시면 호기가 대발, 잔소리를 퍼붓는 것이 한 버릇.
上海로 뛰어 나가서 慶孫氏와 「楊子江」을 박혀가지고 와서 일약 朝鮮의 일류 기사로 자처하는 친구. 요지금 그 사진을 가지고 間島까지 가서 흥행하는 중이라 한다. 눈이 사팔뜨기라 속칭 벤다-핀이라는 별명을 듯는데 벼룩이와 같이 톡톡 튀기 잘하고 참새 외딴치게 잘 떠드러 댄다. 그도 퍽 젊은 축이다. 처신을 좀 더 신중히 하얏으면... 閔又洋 민우양
후자는 出世치 않앗스니 논할 배 못되나 「火輪」에 잇서서는 더욱 공부 할 여지가 많다고 보앗다. 뎃상을 ?忽히 하고서 표현파나 구성파 그림을 본뜨려는 것은 망녕된 생각이다. 뛰기 전에 거름발을 타는 것이 순서가 아닐는지? 그밖에 李鎭權, 李信, 金在龍君 等 諸君이 잇는 것을 기억하자.
「雙玉淚」도 그의 손으로 된 것이요. 「東洋映畵社」를 창립한데도 그의 배후의 노력이 컷다. 日本 가서 「토-키-」를 연구하고 방금 裴龜者와 羅雲奎 출연의 「10년 후」를 촬영하는 중이라 한다. 작년에 上海에 건너갓다가 그곳 촬영소에서 밴앤호엘 機를 다룰 줄 몰라서 뒤통수를 긁엇다는 것은 朝鮮의 기사로는 勇惑無怪인 그의 逸話다.
간주할 수는 없다. 적어도 2회 이상 출연한 사람으로 필자의 기억되는 대로 소개하려고 한다. 대단 복잡 함으로 「가나다」순으로 列記한다.
남성미의 權化인 듯한 당당한 체구와 명랑하고 저력잇는 음성과 그리고 원숙한 그의 연기는 그야말로 錦上添花다. 시기와 천재를 발휘할 장소를 얻고 그를 잘 이해하는 협력자만 잇으면 에밀야닁쓰란 하늘에서 떨어진 사람이 아닌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日活의 전속배우로 잇다가 귀국하야 「먼동이 틀 때」에 주연한 이후 硏劇舍와 관계를 맺어 지금은 同團體의 무대감독의 重任을 맡아 활약 하는 중이다. 무용가 石井漠氏의 최초의 秘藏弟子엿든 것을 아는 사람이 드믈 것이요, 지금은 세계적 성악가가 된 ?原義汪이와 淺草時代에 같은 무대를 밟으면서 성악으로도 伯仲을 다투든 나 어린 가수엿든 것은 더구나 기억하는 사람이 적을 것이다. 그는 테-너엿다. 카루소 밖에는 흉내도 내지 못한다든 High C까지 뽑아 올리는 것을 들은 石井漠氏는 그의 천재에 혀를 빼물고 제자를 삼아 친동생과 같이 愛之重之하엿섯다. 그가 만일 도중에 轉落하지 아니하고 사생활을 견제하야 성악에만 精進하엿든들 오페라 씽거-로서 출세한지도 오래엿을 것이다. 제3자로도 생각할사록 可惜한 일이다. 그는 全玉孃과 同捿한 뒤로부터 과거에 좀 방종하얏든 생활을 버리고 극계의 중진이 되어 주야로 무대 우에서 땀을 흘리고 잇다. 그에게는 좋은 각본과 배후에 연출자가 필요하다.
「開拓者」와 「아리랑」등에 출연하야 순진한 藝風을 보이고 각색으로 자막으로 퍽 오래 고생해 온 사람이다. 단아한 성격이 <60> 실지 운동 보다는 文士型에 가깝다. 光州서 「지지말아 順伊」를 박히다가 여의치 못하야 咸興鄕第로 돌아간 뒤에 소식이 묘연하다.
한 몸으로 原, 脚, 監, 自主演하고 그 중에도 「아리랑」과 같은 名篇을 제작하야 全朝鮮映畵팬의 인기를 독점하든 斯界의 寵兒다. 지금 새삼스러히 장황하게 그를 소개할 필요와 지면이 아울러 없거니와 그가 밟아온 족적은 과연 컷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업적을 냉정히 따저 볼 것 같으면 功罪가 상등하다. 「따그러쓰」나 「탈매지」의활극을 흉내내어서 일반 관중의 低級興味를 교묘히 이용하야 뛰고 달리고 숨박굽질하는 것으로 우선 俗衆의 갈채를 받엇다. 奇智縱橫하야 한 작품을 손 쉽게 얽어서 꾸그려 놋는데 능하고 장기가 잇으나 그 내용인 즉 千篇一律 小英雄主義로 일관하얏다.
규모는 크게 잡으나 표현이 거칠고 그의 액슌, 내지 독특한 「유모어」까지도 결코 고상한 것이 아니엿다. 험상스러운 그의 용모와 5척 남짓한 倭軀가 처음부터 미친 사람이나 불구자 이외에는 適役이 없는 특수배우에 불과하다고 본다. 「아리랑」前篇과 「벙어리 三龍」이가 그 중의 백미인 까닭이다. 그가 그만한 인기를 독점하고 잇섯든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니 그 원인을 캐여보면 무슨 시국에 대한 大志나 품은 듯한 룸펜의 써-커스적 활약과 鳴咽而不鳴하는 곳에 어떠한 사상의 암시가 숨은 듯이 深刻?痛을 가장한 일종 흥행가치에 잇섯든 것이 아닐까? 내 말에 불평이 잇다면 과거의 수십개나 되는 작품을 통하야 그 내용에 잇서서 일관되는 어떠한 주의와 사상의 조류가 흘르고 잇엇든가를 스스로 반성, 검토해 볼 일이다.
거꾸로 달리고 잇다. 日本國粹會의 支會長이 돈을 대는 「金剛嵐」에 劍劇俳優 遠山滿이와 공연하야 羅雲奎의 「羅」字가 떨어지고 「미나도」座로 裵龜子一行을 딸아다녀서 「雲」字까지 잃어버렷다는 말이 들리게까지 된 것은 참으로 애석하다. 일반에게 배우들이 가장 천대를 받는 제1조건인 남녀관계에 잇어서도 斯界의 거두로서 마땅이 삼가야 할 바가 잇지 않을가? 羅君이어 君에게 케케 묵은 문자 하나를 바친다.
선입견이 잇어서 그런지 그는 아모려도 얌전한 문인 같은 인상을 준다. 「約婚」에서 깨끗한 연기를 보엿고 「젊은이의 노래」에도 주연하얏다. 최근 「바다와 싸호는 사람들」 에는 適役이 아니기 때문에 실패하엿다고 본다. 출연 보다는 씨나리오를 썻으면 한다.
연기는 織細하고 경쾌하야 간들어진 품이 「애돌프멘쥬」를 私淑한 보람이 잇다. 몸을 자유로 움직여만 독특한 技藝를 발휘할 터인데 스테지가 없다. 상체의 스타일이 어색한 듯하니 주의할 일. <61>
「아리랑」에는 판박이 朝鮮老人의 분장이 좋앗다. 그러나 「紅戀悲戀」과 「悔心曲」의 僧과 소위 자유기자는 완전한 실패라느니 보담 이제까지도 우슴꺼리가 되어 잇다. 老役이 귀하니 배우로만 나아가야 餘望이 잇지 다른 욕심을 부린다면 결국 자신의 손해일 것이다.
유도 잘한는 活劇俳優「세 동무」, 「落花流水」와 「종 소래」에서 남성적 연기를 보여 준 快男兒다. 계획이 뜻대로 안 되는 듯. 近者에는 별 소식이 없다. 그러나 活劇도 좋지만은 「탈매지」같은 넌센쓰 작난 꾼의 모방은 이비 시대에 뒤떨어 진 일이다.
자신이 출연한 「流浪」, 「昏街」는 들어서 再論할 그 무엇이 하나도 없다. 「地下村」을 기대하엿으나 역시 페-드, 아울-. 젊은 맑쓰뽀이라면 君의 자존심이 펄펄 뛸 일, 타인의 포폄으로 일을 삼든 과거를 거울 삼아 자아의 동향에 ?目하기 바란다.
林雲鶴 임운학
「춘희」, 「풍운아」의 「급행열차」와 「守一과 順愛」의 구루마꾼은 매우 인상적이엇다. 불운하야 아직껏 重役의 차레가 가지 못하얏스나 장래를 촉망할 만한 소질이 풍부하다. 李錦龍 이금용
매우 원숙한 연기를 보엿다. 「御史 朴文秀」를 감독 주연하려다가 선전까지 해 놓고 事不如意하야 많은 고생을 하고 물질의 손해도 적지 아니본 모양. 신혼생활이 그의 고민을 어루만저 주기에 넉넉할까?
영화로 무대로 노인 역의 분장은 몸에 제 격으로 걸맞는 것부터 그를 따를 사람이 없엇다. 사람된 品이 好好爺라 是非틈에 끼이지 않고 부즈런이 技藝를 연마하야 왓다. 그러나 목소리가 濁聲이요 몸 가지는 것이 너무 뻑뻑한 것이 흠이다.
色敵役으로 좋은 타잎을 보이나 의외로 동작이 판에 박은 듯이 부드럽지 못하다. 영화는 캐메라와 인물이 함께 유동하는데 美가 잇다. 무대극을 많이 해 본 버릇인 듯.
속단할 수는 없다. 前記作品에는 감독의 책임도 잇겟지만 위선 분장 메잌엎 같은 초보의 공작부터 유의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연기는 오이려 <62> 後日의 문제다.
孫孝雄 손효웅 스포츠 배우로 마끼노에 입사하야 近者에는 주연까지 하고 日本人間에 상당한 인기가 잇는 모양이다. 6척 장신의 늠름한 偉丈夫다. 물론 운동을 밥보다 질겨하는 사람, 고국에 돌아와 활동하는 날을 기대한다.
여러 작품에 출연하얏고 그 후의 활동은 枚擧키 어렵다. 堅忍沈重한 그의 성격은 스크린에서도 엿볼 수 잇다. 「僧房悲曲」중 살수차를 땀을 흘리며 끌고가는 몇 커트를 보아도 특히 푸로레타리아 영화에 틀이 꽉 들어맞아 실감을 주는 배우다. 그 리알한 점이 그의 생명이다. 더구나 도시노동자로는 앉앗다가 그대로 렌즈 앞에 나서면 고만일 것이다. 在來의 미남형보다는 尹君과 같은 타잎의 출연자가 금후로는 더욱 필요할 것이다. 朱仁圭 주인규
「개척자」의 性哉役을 필두로 「아리랑」 기타 여러 작품과 「먼동이 틀 때」 최근에는 「도적놈」에 나왓다. 악역으로 1인자엿고 眞迫力이 잇는 그의 연기는 특출한 것이엇다. 말하자면 너무 무겁고 액슌이 좀 과장적인 嫌이 없지 않다. 모스크바의 쏘브키노를 목표로 수업의 길을 떠낫다가 중도에 돌아온 후 지금은 모든 것을 단념한 듯이 咸興窒素會社에서 一個 筋肉勞?者로서 快快不樂의 생활을 하고 잇다고.
출연한 이후 자비로 「鳳凰의 冕旒冠」을 박히고 「춘희」에 주연하얏다. 다시 上海로 뛰여 나가 呂運亨氏의 소개로 大中華百合影片公司에서 安重根의 최후를 스토리로 한 「愛國魂」, 「黑衣의 騎手」등을 감독 각색 주연하야 일시 中國人間에 환영을 받고 막대한 수입까지 받앗든 영화계의 풍운아 중의 한 사람이다. 무대는 큼직하게 잡엇스나 아모런 주의 주장과 斯道의 蘊蓄이 적은 그는 그만 미천이 긁히고 말앗다. 그리고 보니 활동 사진 난봉이 나서 「멋」을 부려보앗다는 이외에 더 달리 평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지금은 李創用君과 같이 京都 帝키네에서 연구중이라 한다.
그 작품을 제작하는 데도 표면으로는 물론, 배후의 활동이 커서 그만한 것을 만드러 놓앗다 한다. 그의 연기는 과장 안하고는 못박이는 中國 팬에게는 몰라도 부자연한 동작을 삼갈 일이다. 고국의 동포를 위하야 앞으로 佳作을 보내여 달라.
그러나 그는 의식주며 언어까지 朝鮮사람으로 융화해 버리고 말앗다. 「심청전」의 왕 노릇으로 출세한 후 <63> 이제까지 청년역(소위 2枚目)로 적지 않은 인기를 끌어 왓다. 그러나 진취할 정열이 적은 것은 그의 性格所致다.
오래 출연도 하고 조감독 일을 보앗고 각본도 꾸몃다. 성미가 콸콸하야 싸홈이 나면 맥주병을 깨트려 자기 팔을 한 一字로 거어서 댓줄기 같이 뻐치는 鮮血을 뿌려 적을 퇴치하는 의협아요 호걸이다. 신문선전에는 「明日의 女性」을 박힌다더니 앞으로 얼마든지 明日이 잇으니까 어느 明日에 완성될는지 모른다고.
문학청년 같은 느낌을 준다. 그의 시를 가끔 대한 적이 잇다. 「僧房悲曲」과 「노래하는 시절」에 출연하얏다. 처음이라 무리는 아니나 동작에 제버릇을 벗지 못하얏고 화장은 물론, 표정까지도 ABC로부터 공부할 필요가 잇지 않을가? 한 개의 「스타-」가 되기에는 실로 故心慘憺한 노력이 잇은 뒤라야 비로소 두각이 나타나지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咸君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한 두 영화에 얼골만 내여 밀면 금새로 영화배우 然하는 사람이 없지 않기로 蛇足을 달아두는 것이다. 方漢駿君과 朴正攝, 朴昌赫, 洪燦君 等 新舊人을 차레로 歷訪치 못함은 유감이다.
女俳優
女優로 고참이요 제일 많이 출연하엿으니 「長恨夢」부터 치드래도 「火輪」에 이르기까지 열 손가락으로도 꼽을 수 없을 만치 나오고 또 나왓다. 독특한 연기가 잇는 것보다는 여배우가 귀한 조선 영화계의 특수사정이 여기 저기 출연하게 된 「챤스」를 지은 것이라고 함이 정직한 말일 것이다. 性愛關係로도 波瀾이 重疊하얏든 모양. 지금은 羅雄君과 同捿中이라 한다.
獨壇場인 감이 없지 않을 만큼 새 작품은 거이 다 도맡아 놓고 출연하얏다. 그 역시 이러타할 만한 독특한 장기가 없다. 平平 凡凡 앉으라면 앉고 서라면 설 뿐, 곡선, 더구나 각선미가 없는 것은 모던 껄로서 아까운 일이다. 무대극으로도 상당한 지위를 점령하고 잇다. 아직도 독신으로 그야말로 滿都愛活家의 欽慕의 的이 되어 잇다고.
同君과 손을 잡고 上海로 가서 <64> 그와 결혼까지 하고 여러 중국영화에 출연하야 지금도 인기가 남앗다 한다. 영화인의 생활이란 轉變無雙하야 지금은 鄭君과도 이별하고 서울 와 잇다고. 매우 소질이 잇든 사람이다. 부활한 생각은 없는가?
故 王德星氏의 안해로 그의 작품 「悔心曲」에 최후로 출연하얏다가 大邱서 일을 꾸미든 중 王氏의 去世로 失意落膽하야 눈물로 그날그날을 보내고 잇다고.
尹白南氏의 「月下의 盟誓」를 비롯하야 「海의 悲曲」이래 극단까지 조직하얏든 여걸(?), 지금은 上海 어느 카페에서 땐써로 뚱뚱한 몸이 아조 절구통 같이 팽대해 젓다는 소식을 전한다.
卜惠淑 복혜숙
가지고 무대의 여왕 노릇을 하얏다. 飮酒無量 하사대 必及亂이요 懸河의 웅변이 여간 사내는 그의 앞에서 머리를 들지 못하얏다. 時不利兮하야 糊口之策으로 방금 仁川서 기생영업을 한다고. 그의 주연한 작품은 「籠中鳥」 「落花流水」, 「세 동무」... 等
팬은 막론하고 朝鮮的으로 떠들어대든 여자니 새삼스러히 ??할 흥미가 없다. 솔직히 말한다면 얼골의 윤곽은 선명하나 밀 童子와 같이 무표정이요 연기를 이해하는 것 같지도 않앗다. 다만 나이가 28이요 그만큼 깨끗이 생긴 女優가 없엇든 까닭에 소위 인기라는 것이 輕氣球같이 올라갓든 것에 不外하다. 「먼동이 틀 때」를 마지막으로 출연하고 陵州 靑年富豪엿든 梁某의 제2 부인으로 벌서 사랑의 결정을 둘이나 안는 신세가 되엇다 한다. 이미 과거의 사람이요 甦生도 餘望이 없으나 빼어 놀 수 없기에 두어 줄 여백을 채운다. 全玉 전옥
주로 羅雲奎 작품에 나와서 無垢한 연기를 보엿다. 一身上의 곡절이 많앗다가 姜弘植君을 맞나 지금 硏劇舍의 퀴인의 玉座를 차지하고 잇다. 스테지와 스크린을 통하야 가장 장래가 유망하다. 姜君과 같은 지도자가 잇는 것도 믿엄성 스럽거니와 在來의 여배우 틔가 보이지 않고 진지한 태도로 技藝을 연마하기에 여념이 없는 모양이다.
「도적놈」, 「큰 무덤」에서 처음 출연으로는 매우 장래 잇는 연기를 보엿다. 미끈한 肢體의 주인공 尹逢春君의 뻬터, 하프다.
뛰여 나와 「사나히」, 「벙어리 삼룡」등에 나왓다가 다시 還元하엿다고. 毒婦 役으로 쓸만 한 사람이엇다. <65>
얼골을 보이다가 다시 학교에 다니드니 近者에는 아모개 氏와 살림살이를 한다고.
에 나와서 「밤프」로 한손 뽑내든 女優 카페-웨트레스 노릇을 하다가 지금은 아마 애인을 쫓아 日本에 가 잇는 모양이라고. 金鈴?, 朴環玉, 金마리아...等 諸女史, 諸孃이 잇으나 지면초과로 다음 기회로나 미룰 수밖에 없다. 편집인의 독촉이 성화 같어서 하로 동안에 붓을 달리느라고 누락된 분도 많고 내용도 빈약한 것을 自認하면서 붓을 던진다. 활동하고 잇는 李瑞求, 柳志永 兩氏가 잇는 것을 追記한다. 구햇으나 印刷臨時하야 동판에 잘 오르지 못하야 부득이 실리지 못한 것이 많음을 독자와 필자와 또 映畵人諸氏에게 사죄한다.) <66> <56-66>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