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태국, 홍콩 세 나라가 공포라는 틀에 각각의 이야기를 전작 <쓰리>에서 자유스럽게 담아냈다면 이번 <쓰리, 몬스터>는 ‘귀신이 나오지 않는 공포’라는 범주를 미리 정해주었다. 아시아의 공포영화가 원혼을 빼고는 제작되지 않는 요즘 경향을 본다면 <쓰리, 몬스터>의 기획은 참신하기는 하나 흥행에 허덕였던 전작의 바톤을 이어받을만한 소지가 다분히 있어 보인다.
그러나 흥행의 악조건을 명망이 드높은 감독들이 대신함으로써 <쓰리, 몬스터>는 내외적으로 관객에게 흡입력 있게 다가갈 수 있는 필요조건을 만족시킨다. 태국이 빠지면서 그 자리를 대신 한 일본의 미이케 다카시, 홍콩의 프루트 챈 그리고 박찬욱 감독. 참여한 감독의 실력을 미루어 짐작해 <쓰리 몬스터>를 기대한 팬들도 많을 것이다. 막상 뚜껑을 열어본 영화는 귀신이 나오지 않는 공포라는 제약에 충실하면서도 공포의 스펙트럼을 한층 넓게 의미확장 시켰다.
인간이 다른 종족과 다름을 보여주는 상대가치는 ‘증오’,’질투’,’탐욕’이라는 3가지 감정에서 비롯된다. <쓰리 몬스터>는 인간임을 증명해주는 세가지 감정이 공포로 치환돼 역으로 돌아오는 과정에 무게중심을 잡음으로써 장르의 컨벤션을 장르적 속성으로 비껴나간다.
“공포는 내 안에 있고 적은 나다.”
● 미이케 다카시, 그가 말하는 판도라의 비밀. <BOX>
<쓰라 몬스터>의 본 편 광고를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미이케 다카시의 <box>의 영화카피는 시쳇말로 쥑인다. “17년 전 죽은, 쌍둥이 언니가 찾아왔다” 상투적인 듯 하면서도 ‘공포’를 확실히 보여주겠다는 단호한 의지가 배어 나온다. 그러나 필터 처리한 몽환적인 화면과 난해한 대사로 말미암아 예상외의 ‘아트영화’로 탄생 된 <BOX>. 우리의 의중을 비껴나간 데서 오는 적지 않은 실망감과 당혹감만 따지고 본다면 ‘미이케 다카시’표 영화지만 독해가 어려운 그만의 영화문법은 우리가 알던 미이케 다카시마저 부정한다.
의붓아버지 히키타(와타베 아츠로)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경쟁적으로 서커스 묘기 연습에 열중하는 쌍둥이 자매 쿄코와 쇼코. 쿄코(하세가와 쿄코)는 히키타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쇼코를 질투하여 그녀를 상자에 가둔다. 그러나 불의의 화재로 인해 쇼코는 상자에 갇힌 채 죽고 쿄코는 자폐적인 생활을 하는 소설가로 성장한다. 매일 밤 비닐 포대에 쌓여 매장되는 꿈을 꾸는 쿄코, 그런 그녀에게 도착한 초대장과 흰 장미꽃은 설원에 과거 그대로의 모습으로 자리한 서커스 장에서 쇼코와 히치타를 재회하게 만든다.
악몽이 현실로 체현되는 순간 '공포'라는 감정으로 급작스레 전환되는데, 미이케 다카시 감독은 그것을 좀더 여백의 미가 많이 느껴지는 유장함으로 대신한다. 꿈 속의 꿈이라는 이중구조로 인해 복잡하게 얽힌 영화의 실타래는 과거와 현실, 진실과 거짓, 환상과 기억을 상호대칭점으로 병행하여 굴절된 욕망의 자화상을 불러들인다. 과거가 없다면 현실도 없듯이 진실이 없다면 거짓도 없다. 또한 질투가 없다면 사랑도 없다. 쿄코가 마주한 실체가 질투에 의해 봉인된 상처라면, 그녀에게 없는 무언가를 봉인된 실체가 가지고 있다는 말로 바꿔 말할 수 있다. 질투는 나에게 없는 것을 상대방이 가졌을 때 생기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히키타의 말처럼 쿄코와 쇼코는 같이 있어야만 그에게 완전한 사랑이 된다. 마치 거울에 반사되듯이 상대적인 개념들이 있어야 완벽한 하나의 객체로 인정 받는 것들이 있듯이 말이다. 때문에 어느 한쪽이라도 부재한다면 나머지 하나의 존재마저 희미해지기에 인간은 불안하다 못해 공포감에 휩싸인다.
'공포는 없다'. 단지 성장의 트라우마를 마주선 인간의 나약한 허기만이 화면을 가득 채울 뿐이다.
● 프루트 챈, 그가 말하는 헤라의 비밀. <만두>
<쓰리 몬스터>의 감독 라인 업 중, 프루트 챈은 이례적인 선택으로 보여진다. <메이드인홍콩>, <리틀청>만 본다면 그에게 장르적 특성이 강한 공포영화를 떠올리기는 힘들다. 그러나 감각적인 편집과 느와르 풍의 색감은 장르의 경계를 널뛰기하며 홍콩의 자화상을 스케치하듯 영화 속에서 그려냈다. 프루트 챈은 홍콩의 정치적/역사적 현실을 영화 속에서 낮게 묘사하는 대신 아우라는 넓게 담아내는 독특한 스타일을 소지한 감독이다.
때문에 장르의 이탈 점에서 방향키를 놀렸던 그가, <쓰리 몬스터>에서 장르적 속성이 강한 ‘공포’에 나침반을 맞췄다는 사실은 색다른 영화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충분히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만두>는 ‘귀신이 나오지 않는 공포’라는 취지에는 걸맞지만 인간내면에 상주하는 몬스터를 끄집어내기에는 너무 관습적이다. 따라가는 형식 안에 틀을 깨는 이미지는 없다. 대신, 프루트 챈은 중국과 홍콩 사이에서 생기는 경계의 틈에 ‘모성’을 삽입해 공포를 시각화한다.
과거 유명배우였던 칭(양천화)이 젊어지기 위해 태아로 만든 인육만두를 먹는다는 설정은 그리 색다를 건 없다. <만두>에서 특이한 것은 모성 즉, 여성성을 ‘젊음’으로 규정하고 접근하는 감독의 영화적 시선이다. 만두를 먹음으로써 남편의 사랑까지 되찾은 칭. 그러나 그녀의 존재는 이런 사회적 관계(가족,친구,사회적위치)에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젊음’을 간직한 육신을 통해서 확인된다. 칭은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신체적 결함이 있는 여성이다.
칭의 남편 리(양가휘) 또한 그녀에게 아이를 요구하지 않는다. 남편이 원한 것은 젊은 육체뿐이고 칭이 원한 것은 젊음을 통해 보상 받는 사랑이다. 애초부터 그녀에게 모성은 부재(不在)한 것처럼 묘사된다. 여기서 감독은 자궁의 생산기능을 젊음과 맞바꿈 하는 칭을 통해, ‘모성’만이 여성의 존재를 의미화 시킨다는 그간의 통념을 거부한다. 점자 개인주의로 변모해가는 사회에서 가족의 토대를 만들어준다는 모성은 더 이상 여성을 설명해주는 기준점이 될 수 없다. 대신, 감독은 부재한 모성의 자리에 상대를 매혹(or 굴복)시키는 여성의 젊은 육체를 우위에 놓는다.
젊음을 위해 모성을 가차 없이 버리는 칭과 모성을 상품화시켜 만두 장사를 하는 메이(베일링)는 인간본성의 잔혹함을 형상화하는 캐릭터들이다. 또한 태아로 빚은 만두를 ‘오도독~’ 씹는 칭의 얼굴에서, ‘탐욕’만이 다른 종족과 인간을 구분하는 확실한 감정임을 목도할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로 급변하는 중국과 거기에 동승하게 된 홍콩의 사회적/정치적 충돌을 낙태문제로 묘사한 공포코드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관습적이다. 그러나 거부된 모성을 공포의 시발점으로 삼지 않고 부재(不在)한 모성을 이미지화 시킨 데서 불러 온 공포라는 점이 영화<만두>를 섬뜩하게 만든다.
젊음만이 그녀의 위치를 유일하게 ‘보호’해줄 것이라 믿는 칭의 탐욕스러운 표정은 그래서 더더욱 잔혹하다.
● 박찬욱, 그가 말하는 부르주아의 비밀. <Cut>
박찬욱은 <쓰리 몬스터>에 참여하면서 장난 끼가 발동한 모양이다. 그는 강한 자와 약한 자의 역할 바꾸기부터 어순 바꾸기, 공간 구조 비틀기 등, 다양한 방법으로 영화감독만이 누릴 수 있는 전지전능한 특권을 <컷>에서 펼쳐 보인다. 그러나 박찬욱 감독은 여기서 만족하지 못하는 듯 하다. 피 말리는 분위기에 코미디적인 요소를 포장함으로써 관객의 심리마저 조종하려 드니 말이다. 관객은 피아노 줄에 매달린 류지오(이병헌)의 부인처럼 조종하는 자의 의지대로 울고 웃는 꼭두각시로 전락한다.
이처럼 스크린의 안팎에서 강력한 통제권을 행사하며 육중한 존재감이 느껴지는 감독을 만나보기란, 쉬운 ‘영화보기’ 경험이 아닐 것이다. 멋진 표현을 빌려 이 상황을 빗대어 정리하자면, ‘감독과 관객이 한판 벌이는 지적 게임’이고, 필자의 경험을 가감 없이 여기에 쓰자면 ‘관객의 보는 권리마저 빼앗긴 무조건 진 게임’으로 회자된다. 박찬욱은 <복수는 나의 것><올드보이> 그리고 앞으로 제작 될 <친절한 금자씨>까지 복수3부작을 연작하는 중이다. 그에게 <컷>은 ‘복수’의 밑바탕이 되는 감정 즉, ‘증오’에 관한 보충설명서 격인 외전(外傳)이며, 아울러 다른 영화와 전혀 관련 없는 쉬는 시간 같은 장르영화이기도 하다.
오리지널 킹카에 마음마저 비단결인 잘나가는 인기영화감독 류지호. 진정한 성공을 상징하는 화려한 집과 아름다운 부인은 그에게 주어진 ‘부상’이 아니라 ‘본상’일 것이다. 영화 속 영화인 <뱀파이어>를 찍고 스태프와 일일이 인사하며 촬영장을 벗어나는 류지호의 모습도 가식이 아님이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자신의 집 거실을 카피한 촬영세트가 통째로 실제 인생 전체를 부정하는 ‘복습장’이 되는 순간부터 류지호는 또 한명의 류지호를 만들어야 하는 게임으로 빠져든다.
거기에 테러리스트(임원희)와 강혜정(류지호의 아내역)의 존재가 확실해질수록, 박찬욱이 말하고자 하는, ‘증오’의 스펙트럼도 영역을 표시한다. 뮤지컬, 엽기, 공포, 코미디까지 장르의 특성을 한 줄기로 엮어 논, <컷>은 인간내면에 도사리는 몬스터를 강렬한 이미지들로 끄집어낸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대결구도는 심리의 전복을 통해 심화되지 않고 물리적 힘의 지배논리에 의해 폭발한다. 엄밀히 따지자면, 계급드라마구조에 공포를 추가한 <컷>은 테러리스트와 류지호의 현재 삶을 거짓이라고 규정하지 못한다. 아내와 아이를 살해했다는 임원희의 말이 사실인지 영화는 해명하지 않을뿐더러 류지호가 가식의 늪에 빠진 인물임을 긍정하지도 않는다.
착해서 죄송한 남자와 처음부터 못난 놈이어서 억울한 남자의 대결은 가짜 공간에 펼쳐지기에 결론적으로 현실을 바꾸지 못할 것이다. 때문에 인물의 내면보다 <컷>이라는 영화자체가 ‘증오’를 품고 있다. 다시 말해, 점점 계급은 고착화될 뿐, 역전되지 않음으로 <컷>에서 그것을 예증하는 캐릭터보다 현실을 방증하는 영화자체가 공포가 된다.
<컷>은 장르끼리 맞닿는 꼭지점에서 날카로운 이미지들의 충돌을 일으키지만 오히려 변하는 않는 존재들만 확인시켜준다. 이것을 게임이라는 방식으로 실현한 <컷>의 놀이는 근원적 ‘증오’를 불러들인다.
사실, 여성(강혜정)의 입을 다물게 한 설정만 보더라도 감독과 관객의 게임은 처음부터 불공평했다.
전혀 다른 이야기이지만 인간본성을 상징하는 감정을 소재로 한 점에서 <쓰리 몬스터>안의 세 작품은 통일성을 보여준다. <쓰리 몬스터>가 지칭한 공포의 대상이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이기에, 리얼한 인간드라마일수록 가장 무서운 이야기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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