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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大學의 삼보三寶 도덕민道德民과 삼주인과三周因果
서문
대학大學은 유학에서 독특한 지위를 갖고 있다. 평상인平常人 범부의 지위에서 곧바로 성현에 이르는 길을 체계적으로 밝혀놓은 유일한 문헌이기 때문이다. 특히 송조에 이르러 논어 맹자 중용과 함께 사서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이는 정주程朱가 주창한 성리학의 필요에 의한 산물이라 말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아전인수로 견강부회하여 해석한 사례가 없지 않다. 특히 명명덕과 친민 지어지선의 삼강령이 그러하다. 삼강령은 대학이 주체가 아니고, 대학의 도가 주체이다.
그러나 나는 대학의 도를 주체로 보지 않고, 대학을 주체로 삼으며, 그 도와 덕 그리고 인민을 대학의 삼보로 정의하고자 한다. 그 주체가 대학의 도일 때와 대학일 경우 어떻게 다른가? 명명덕은 덕이 명명을 한정하고, 친민도 또한 민이 친을 제약한다. 덕과 민이란 혹을 떼어내면 명명과 친의 본의가 남음이 없이 드러날 수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지어지선의 수용자를 성왕이나 사대부의 지식인계층으로 특정하지 않고, 모든 백성을 표방하는 민民 곧 인민人民 평민平民 상인常人 평상인 등으로 확장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삼주인과三周因果는 나의 안목이고, 삼주인과는 대학의 새 지평이며, 또한 삼주인과는 대학의 모든 난제를 일시에 해소하는 조화권造化權이기도 하다. 나무 위에 서서 광활한 지평을 조망하시라. 이것이 친親자의 본의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소제명小題名은 아래와 같다.
서문
1. 삼주인과三周因果
2. 제일주第一周 근본인과根本因果
1) 대학大學이란 무엇인가?
2) 도덕민道德民 삼보三寶
3) 대학大學의 도道는 명명明明에 있다
4) 그 덕德은 친근親近에 있다
5) 그 인민人民은 지선至善에 이름에 있다
6) 지선止善을 알고 난 다음에야 정정正定이 있다
7) 정정이 있고 나서야 평정平靜할 수 있다
8) 평정한 다음에야 편안便安할 수 있다
9) 편안한 이후라야 정려靜慮할 수 있다
10) 정려한 다음에야 득의得意할 수 있다
11) 사물事物의 본말本末과 시종終始
3. 제이주第二周 구경인과究竟因果
1) 구경인과究竟因果와 안락인과安樂因果
2) 덕어천하德於天下
3) 성지聖知를 이루는 것은 격물格物에 있다
4. 제삼주第三周 안락인과安樂因果
5. 결어
1. 삼주인과三周因果
통현장자의 화엄경론에 오종변주인과五種遍周因果나 삼종인과三終因果 또는 이종상도二種常道란 말이 있다. 이 삼종인과를 후인이 삼주인과라 말하기도 한다. 이를 차용하여 소제명을 삼았다.
인과는 인연과因緣果라 말하기도 하고, 어떤 사안事案의 자초지말自初至末을 포괄한다. 예를 들면 십이인연은 무명지無明支에서 시작하여 행지行支 식지識支 명색名色 육처六處 촉지觸支 수지受支 애지愛支 취지․取支 유지有支 생지生支 노사지老死支로 마치는 것과 같다. 이를 유전문流轉門이라 말하고, 역순을 환멸문還滅門이라 말한다.
대학도 또한 구경인과究竟因果가 있고, 안락인과安樂因果가 있다. 덕천하德天下로 시작하여 치국治國 제가齊家 수신修身 정심正心 성의誠意 치지致知 격물格物은 대인군자大人君子의 구경인과이고, 물격物格에서 시작하여 지지知至 의성意誠 심정心正 신수身修 가제家齊 국치國治 천하평天下平은 태평성대太平聖代의 안락인과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인과가 있으니, 바로 근본인과根本因果이다. 명명明明에서 시작하여 친親 지선至善 유정有定 능정能靜 능안能安 능려能慮 능득能得이 그러하다.
이 근본인과는 그 주체자主體者가 인민 곧 평민이고, 그 전개 양상이 제삼주 안락인과와 유사하다. 이 때문에 명명明明과 물격物格을 동일시해도 좋고, 또한 친親을 지지知至로 해석해도 또한 옳다. 그러하다면 지선至善은 의성意誠과 상응할 것이고, 유정有定도 또한 심정心正과 상통할 것이다.
제이주 구경인과를 역순逆順하면 격물로 시작하여 치지 성의 정심 수신 제가 치국 덕천하가 된다. 삼주인과는 모두 수신 신수 평정平靜을 근본으로 삼고 보면, 그 이전 정심 성의 치지 격물이나 물격 명명 등은 신내사身內事로 지혜가 선도先導하고, 그 이후는 덕천하 천하평 득의得意까지 모두 신외사身外事로 복덕이 주관한다. 곧 전반은 이기행이고, 후반은 이타행이며, 능정 이후 능안 능려 능득 등도 모두 후자에 속한다. 능득 또는 득의는 국록을 받지 않는 처사處士의 덕만경계德滿境界이다.
공부자는 사십에 불혹不惑하고, 맹자도 또한 사십에 부동심不動心을 얻었다고 한다. 근본인과의 유정과 안락인과의 심정 그리고 구경인과의 정심을 불혹으로 볼 수 있다. 이를 준용하면, 지선과 의성 성의는 지천명知天命에 상당하고, 친과 지지 치지는 이순耳順과 상응할 것이니, 명명이나 물격 격물은 또한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의 경계가 아니겠는가. 이는 대대待對가 끊어졌기 때문이다. 바로 대학의 불이법문不二法門이 이와 같다.
근본인과가 태극이라면, 구경인과와 안락인과는 음양에 상당할 것이다. 또 근본인과가 대학의 본체本體라면, 구경인과는 대학의 덕용德用이고, 안락인과는 대학의 과물果物이다. 이를 나무에 비유하면, 본체는 뿌리와 줄기이고, 덕용은 잔가지의 잎과 꽃이며, 과물은 열매이다. 이와 같이 삼주인과로 대학의 전체 문장을 조감해야 비로소 그 본지풍광本地風光이 명백히 드러난다.
2. 제일주第一周 근본인과根本因果
본문: 대학大學의 도道는 명명明明에 있고, 그 덕德은 친근親近에 있으며, 그 인민人民은 지선至善에 이름에 있다. 지선止善을 알고 난 다음에야 정정正定이 있고, 정정이 있고 나서야 평정平靜할 수 있으며, 평정한 다음에야 편안便安할 수 있고, 편안한 이후라야 정려靜慮할 수 있으며, 정려한 다음에야 득의得意할 수 있다. 품물品物은 본말本末이 있고, 사상事相은 시종始終이 있으니, 선후가 되는 소이를 알면 대도大道와 친근할 것이다.(大學之道在明明 德在親 民在止於至善 知止而後有定 定而後能靜 靜而後能安 安而後能慮 慮而後能得 物有本末 事有終始 知所先後 則近道矣)
1) 대학大學이란 무엇인가?
주자는 “대학이란 대인의 학문이다.”(大學者 大人之學也)라고 주창한다. 감산노인憨山老人도 또한 그의 몽유집夢遊集에서 “대학이란 말하자면 이것이니, 바로 한량없는 대인의 학문이다.”(大學者 謂此乃沒量大人之學也)라고 정의한다.
대학은 큰 학문이다. 대인에 국한한 학문은 큰 학문이라 말할 수 없다. 대인이나 중인 소인을 막론하고, 공부하고자 하는 뜻이 있다면 누구나 공부할 수 있는 학문이라야 비로소 큰 학문이라 말할 수 있다. 불교의 보문普門이 그러하다. 백성이 나날이 쓰는 도를 어찌 대인에 한정시키려 하느냐? 논둑길은 둘이 나란히 걸어갈 수 없다. 소로 중에 소로이기 때문이다. 대학을 소학화小學化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된다.
배우고 때때로 수습修習하니 또한 즐겁지 않는가? 대학大學의 대大는 유교로 말하면 천리天理일 것이고, 불교로 말하면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이다. 유가에 지고지상의 과제는 극기복례克己復禮이고, 이는 “예가 아니면 보지를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를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말라.”(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라는 사물四勿을 벗어나지 않는다. 생사해탈도 또한 “모든 악행을 짓지 말고, 일체 선행을 받들어 행하라.”(諸惡莫作 衆善奉行)라는 경구를 벗어나지 않는다. 한량없는 대인이라도 배우고 실행하지 않으면 이를 수 없고, 8세 어린아이라도 배워서 실행하기만 하면 이를 수 있다. 누구나 할 수 없는 것이 아니고, 하지 않아서 이르지 못할 따름이다. 대학의 경계가 이와 같다.
2) 도덕민道德民 삼보三寶
나는 한국어를 모국어로 쓰고, 주자는 중국어를 모국어로 쓴다. 내가 “주자는 한국어를 모른다.”라고 말하면, 아마도 심중팔구는 긍정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내가 “주자는 중국어를 독해하는 능력이 부족하다.”라고 말하면, 천만 명 중에 한 명도 긍정하는 이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다시 독해하는 그 본문이 평문平文이 아니고 경문經文 또는 도문道文이라면 어떠할까? 또다시 가정한다. 경안經眼이나 도안道眼이 내가 주자보다 더 높다면 어떠할까? 주자의 대학 장구章句는 아래와 같다.
大學之道在明明德
(大學之道)在新民
(大學之道)在止於至善
대학의 도는 명덕을 밝힘에 있고,
대학의 도는 신민에 있으며,
대학의 도는 지어지선에 있느니라.
논어에 부지생不知生 언지사焉知死라는 명구가 있다. 이를 통상 “생을 알지 못하는데 어찌 사를 알랴.”라고 해석한다. “생을 알지 못하면, 어찌 사를 알랴.” 이는 탄허스님의 해석이다. 생과 사의 차서를 일러준 것이다. 생사를 모른다면, 먼저 사를 묻지 말고, 생부터 물을지니라. 후자의 해석에서 공부자가 생사를 모른다는 견해를 도출할 수 있는가? 공부자를 전자는 범부로 만들고, 후자는 성인으로 추앙한다. 도학자의 해석이 이와 같다.
대학 수장도 또한 그러하다. 동일한 글이지만,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도학의 글이 될 수도 있고, 위정자들을 위한 정치학의 글이 될 수도 있다. 이 대학의 수장을 3개 목적어를 주체로 삼고 삼강령으로 해석하면 정치학의 범주에 속한다. 대학의 도가 명덕을 밝히고 신민하는 방법으로 전락하고 말기 때문이다. 도와 덕 그리고 인민이란 삼개 주어를 주체로 삼고 해석하면 대학이 곧 도학의 영역이다. 이를 대학의 삼보라 명명한다. 나의 장구는 아래와 같다.
大學之道在明明
(大學之)德在親
(大學之)民在止於至善
대학의 도는 명명明明에 있고,
대학의 덕은 친근親近에 있으며,
대학의 인민은 지어지선에 있느니라.
3) 대학大學의 도道는 명명明明에 있다
나의 대학 장구에는 삼강령이 없다. 오로지 삼주인과만 있을 뿐이다. 이 때문에 초주인과初周因果의 이 명명明明도 또한 제이주의 격물格物이나 제삼주의 물격物格과 동일한 위상位相에 있을 따름이다.
대학의 도는 명명에 있다.(大學之道在明明) 품물이 감통感通한 이후에야 성지聖知가 이른다.(物格而後知至) 성지를 이루는 것은 격물格物에 있다.(致知在格物) 이 명명明明은 두 가지 뜻이 있다. 명사와 동사로 보면 물격物格과 같고, 동사와 명사로 보면 격물格物과 같다. 삼자는 동일한 위상이기 때문에 “대학의 도는 물격에 있다.” 또는 “대학의 도는 격물에 있다.”라고 말할 수 있다. 단지 제이주 인과와 제삼주 인과는 상호관계를 밝혔는데, 초주는 대학의 도만 밝혔기 때문에 명명과 친근을 함께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물격과 격물은 아래에서 자세히 설명하겠다.
이 명명明明을 유학의 용어를 발려 해석하기는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심학心學이기 때문이고, 또한 지금까지 명명덕明明德이 명명의 본의를 가려버려서 명명이 하나의 단어로 정립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단 명명을 청초清楚나 현연顯然 또는 명백明白으로 본다. 확연무성廓然無聖의 확연과 같은 현연이고, 통연명백洞然明白의 명백이다.
다시 명명을 광명변조光明遍照나 고일려천杲日麗天으로 볼 수 있다. 밝은 해가 천지를 두루 비춰준다. 앞은 명사이고 뒤는 동사이다. 이는 나무 위에 올라서서 조망한다는 친親자의 원의와 부합한다. 이를 내면으로 돌이키면 어떠한가?
만일 무명無明이 있다면, 이와 대응하는 용어로 원명圓明 또는 광명光明이 있을 수 있다. 태어날 때부터 모든 사람이 갖추고 있는 근본광명이 있다. 화엄경 여래출현품을 인용한다.
“또다시 이르노라. 불자여, 여래 응공 정등각이 열반을 보이실 때 부동삼매不動三昧에 들어가시니라. 이 삼매에 들어가고 나서 낱낱 불신佛身에서 각각 한량없는 백천억 나유타 대광명大光明을 놓으시고, 낱낱 광명에서 각각 아승지 연꽃을 드러내셨느니라. 낱낱 연꽃에서 각각 말할 수 없는 미묘한 보배꽃술이 있고, 낱낱 꽃술에는 사자좌가 있으며, 낱낱 사자좌 위에는 모두 여래께서 결가부좌하고 계셨느니라. 그 불신의 수가 바로 일체중생의 수와 같고, 모두 최상의 미묘한 공덕과 장엄을 갖추셨으니, 본원력本願力으로부터 생기生起한 것이니라. 만일 어떤 중생의 선근이 성숙한 이라면 불신을 보자마자 곧바로 모두 교화를 받을지니라. 그러나 저 불신은 미래세未來世가 다하도록 구경까지 안주安住하시고, 방편을 따라 일체 중생을 제도하시지만, 일찍이 일시一時도 실기失期하지 않으셨느니라.”(復次 佛子 如來應正等覺示涅槃時 入不動三昧 入此三昧已 於一一身各放無量百千億那由他大光明 一一光明各出阿僧祇蓮華 一一蓮華各有不可說妙寶華蘂 一一華蘂有師子座 一一座上皆有如來結跏趺坐 其佛身數正與一切衆生數等 皆具上妙功德莊嚴 從本願力之所生起 若有衆生善根熟者 見佛身已 則皆受化 然彼佛身 盡未來際究竟安住 隨宜化度一切衆生未曾失時)
일체중생의 수와 같은 불신을 여래의 화신불로 볼 수도 있지만, 나는 일체중생 각각의 본신불本身佛로 본다. 이 본신불이 나의 몸에도 있고, 일체 유정이나 무정에도 있으며, 또한 수시로 끊임없이 일어나는 생각마다 모두 본신불이 있다고 본다.
이 본신불이 방광한다. 명명明明 중에 전자는 본신불이고, 후자는 빙광이다. 물격物格도 또한 그러하다. 명명明明을 명사와 동사로 보는 것은 사의할 수 있는 경계이고, 동사와 명사로 보는 것은 부사의한 경계이다. 이는 격물格物에 상당하기 때문이고, 또 본신불을 방광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또한 물격에 시비하는 것은 옳고, 격물에 왈가왈부하는 것은 옳지 않다. 범부의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구경인과에서 관행에 따라 “그 성지聖知를 이루고자 하는 이는 먼저 그 품물을 감통感通시키고자 했다.”(欲致其知者 先格其物)라고 말하지 않고, “성지를 이루는 것은 격물格物에 있다.”(致知在格物)라고 한 것이 하나의 증거이다.
4) 그 덕德은 친근親近에 있다
친근親近의 친親도 치지致知나 지지知至와 상응한다. 대학의 도는 명명明明에 있고, 그 덕德은 친근親近에 있다.(大學之道在明明 德在親) 품물이 감통感通한 이후에야 성지聖知가 이른다.(物格而後知至) 성지를 이루는 것은 격물格物에 있다.(致知在格物) “광명이 변조한 이후에야 덕상德相을 친근하고, 덕상을 친근하는 것은 명명에 있다.”라고 말할 수 있다.
대학의 도와 덕 그리고 인민을 체상용體相用으로 조감照鑑할 수 있다. 도체道體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이라 말이나 글로 그 실체를 드러낼 수 없다. 그러나 덕상德相은 말이나 글에 지혜를 머금기만 하면 마음대로 풍광을 드날릴 수 있다. 친근親近의 친親자가 그러하고, 치지致知나 지지知至의 지知자도 또한 그러하다. 이 때문에 이 지知를 왕양명 선생은 양지良知라 명명했고, 감산스님은 진지眞知라 칭명했으며, 나는 성지聖知라 천명하고, 또한 하택스님도 “안다는 한 글자는 중묘의 문이다.”(知之一字衆妙之門)라고 갈파한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무엇을 친근할 것인가? 바로 덕상이고, 또한 명명이다. 위에서 친親자를 “나무 위에 올라서서 광명변조光明遍照의 광명이나 고일려천杲日麗天의 고일을 조망한다.”라고 파자했다. 중생의 근기가 8만4천 가지라 불법도 또한 8만4천 법문이 있다. 그러나 간추리고 다시 간추리면 부처님이나 선지식을 친근하라는 친親자 일법一法만 남는다.
명명明明에서 친근하는 관觀을 취한다. 통현장자의 보광명관寶光明觀이 그러하다. 나의 몸과 나의 생각마다 본신불이 있고, 언제나 이 본신불은 중천의 태양보다 더 밝게 방광하고 있다. 이 관은 물격의 명명이 아니고, 격물의 명명이다. 돌이켜 보기 때문이다. 이를 회광반조迴光反照라 한다. 부사의한 경계이다. 백호상이 있는 미간에 밝고 맑은 생각을 모으고, 이 생각으로 본신불의 광명을 되비치는 것이다. 어째서 되비친다고 말하는가? 나의 생각이 광명이고, 반조하고자 이 생각을 돌이키는 것을 회광이라 한다. 밝은 생각이 원래 본신불의 광명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본신불을 관하는 생각이 바로 양지이고 진지이며, 성지이다. 무엇보다 명지明知라 말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겠다. 이를 의거하면, 격물의 격이 바로 성지이고, 명지인 줄을 알 수 있다.
5) 그 인민人民은 지선至善에 이름에 있다
이 지어지선止於至善도 그 취지를 의성意誠이나 성의誠意와 함께 구명해야 한다. 그 인민人民은 지선至善에 이름에 있다.(民在止於至善) 성지聖知가 이르고 나서야 의지가 성실해진다.(知至而後意誠) 그 의지를 성실하게 하려는 이는 먼저 그 성지를 이루고자 했다.(欲誠其意者 先致其知) “덕상이 친근해지고 나서야 지선에 이르게 되고, 그 지선에 이르려고 하는 이는 먼저 그 덕상을 친근하고자 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지선과 성의의 상호 관계를 중용을 의거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성誠이란 것은 천도天道이고, 그 의지를 성실하게 하려는 것은 인도人道이다. 성자誠者는 애쓰지 않아도 적중하고, 심사숙고深思熟考하지 않아도 이루어지며, 여유작작餘裕綽綽해도 천도에 들어맞으니, 성인이기 때문이다. 그 의지를 성실하게 하려는 이는 선을 간택하고 고수固守하려는 자이다.”(誠者 天之道也 誠之者 人之道也 誠者 不勉而中 不思而得 從容中道 聖人也 誠之者 擇善而固執之者也) 전후의 성자誠者 중에 후자는 천도를 성취한 성인으로 보았고, 또 성지자誠之者 중에 지之자를 성의誠意의 의意자로 해석했다. 중용의 “그것을 성실하게 하려는 이”(誠之者)와 대학의 “그 의지를 성실하게 하려는 이”(欲誠其意者) 는 글자가 많고 적을 뿐이고, 그 대의는 동일하다. 지선至善이 바로 지성至誠이다. 선을 간택하고 고수固守하면 지선에 이르기 때문이다.
대학의 삼보를 도덕민이라 정의했다. 체상용으로 보면 도체와 덕상 그리고 민용民用이다. 주자의 장구로 삼강령을 확립한 이후 지어지선의 수용자는 성왕이나 사대부로 한정되었다. 특히 제이주 구경인과와 제삼주 안락인과가 그러하다. 그러나 나는 대학의 삼보와 삼주인과를 제창提唱하며 지어지선의 수용자를 일체 평상인으로 확장했다.
6) 지선止善을 알고 난 다음에야 정정正定이 있다
지선止善을 알고 난 다음에야 정정正定이 있다.(知止而後有定) 의지가 성실해진 이후에 일심이 올바르게 된다.(意誠而後心正) 그 일심을 올바르게 하려는 이는 먼저 그 의지意志를 성실하게 했다.(欲正其心者 先誠其意) 지어지선止於至善을 간단히 지선止善이라 했다.
지止와 정定의 심천深淺을 논하기는 쉽지 않다. 후문의 능정能靜과 능안能安의 정靜자와 안安자를 더하면 더욱 갈피를 잡기 어렵다. 일단 지止자와 정定자의 심천은 지止자를 우위優位에 두고자 한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위치가 상위上位에 있기 때문이다.
초주 근본인과는 대학의 체상용 삼보를 드러내고자 하여 먼저 도와 덕 그리고 인민을 따로 설명했다. 이 때문에 제이주 구경인과나 제삼주 안락인과처럼 8조목의 상호 인과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이 장에서는 제이주나 제삼주 인과처럼 제3조목과 제4조목의 관계를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 지선止善을 알고 난 다음에야 정정正定이 있다.(知止而後有定) 의지가 성실해진 이후에 일심이 올바르게 된다.(意誠而後心正) 지지知止와 의성意誠이 대대하고, 유정有定과 심정心正이 상응한다. 이하도 모두 동일하다. 삼주인과를 서로 대조하여 비교하지 않으면 그 취지를 분명하게 알 수 없다.
앞에서 유정有定의 경계를 불혹에 대비했다. 주역에 “적연히 부동하여 감응하면 드디어 천하의 연고緣故를 통명通明한다.”(寂然不動感而遂通天下之故)라는 명구가 있다. 이 적연부동寂然不動은 명명이나 친근 지어지선 유정에 모두 통용되지만, 유정을 우선하고자 한다. 적연부동한 경계가 바로 심정心正이고, 정심正心이며, 유정有定 곧 정정正定이기 때문이다.
7) 정정이 있고 나서야 평정平靜할 수 있다
정정이 있고 나서야 평정平靜할 수 있다.(定而後能靜) 일심이 올바르고 나서야 일신이 수양하게 된다.(心正而後身修) 그 일신을 수양하고자 하는 이는 먼저 그 일심一心을 올바르게 했다.(欲修其身者 先正其心)
정정이 있고 나서야 평정平靜할 수 있다. 정심의 정정을 수신은 평정으로 이어받았다. “수신이란 무엇이냐?” “신심을 도야하고 덕성을 함양하는 것이다.”(陶冶身心 涵养德性) 또는 “몸은 도로 닦고, 도는 인으로 닦는다.”(修身以道 修道以仁)라고 한다. 광의廣義의 수신은 정심 이상의 신내사를 모두 포함한다. 여기서는 정심과 대비되는 협의狹義의 수신을 말한다. 이 몸의 이목구비를 통하여 정심이 발현하는 것을 수신이라 말한다. 예를 들면 극기복례의 사물四勿이 이에 상당한다. 이 때문에 정정이 있고 나서야 이목구비가 평정平靜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이목구비가 그 대상에 현혹되지 않고 정심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 평정이다.
정심과 수신은 불교와 유교의 비중이 같지 않다. 불교는 정심을 중시하고, 유교는 수신을 근본으로 삼는다. 하문에 “천자天子부터 서민庶民에 이르기까지 일체가 모두 수신修身을 근본으로 삼는다.”(自天子以至於庶人 壹是皆以修身爲本)라는 구절이 있다. 어째서 그러할까? 유학은 현실세계가 중심이고, 불교는 삼세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능정能靜은 신수身修나 수신修身과 상응한다. 세 용어를 그대로 쓰면, 수신은 신수身修하면 능정能靜한다고 말할 수 있다. “정정이 있고 나서야”는 조건이고, “평정平靜할 수 있다”는 결과이다. 수신의 일이다.
8) 평정한 다음에야 편안便安할 수 있다
평정한 다음에야 편안便安할 수 있다.(靜而後能安) 일신이 수양된 이후에 일가가 고르게 다스려진다.(身修而後家齊) 그 일가를 고르게 다스리려는 이는 먼저 그 일신一身을 수양했다.(欲齊其家者 先修其身)
능안能安은 가제家齊 제가齊家와 상응한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 하니, 제가는 화합이나 화목이 으뜸인가 하다. 제가 이하는 포덕布德이다. 내가 평정하지 못한다면 어찌 남을 편안하게 할 수 있으랴. 차안의 무명 중생을 피안의 해탈세계로 건네주고자 하면 내가 먼저 건너갈 수 있어야 하고, 일체중생을 성불시키고자 하면 내가 먼저 성불해야 한다. 일의 선후가 이와 같다.
9) 편안한 이후라야 정려靜慮할 수 있다
편안한 이후라야 정려靜慮할 수 있다.(安而後能慮) 일가가 고르게 다스려지고 나서야 일국이 통치된다.(家齊而後國治) 그 일국을 통치하고자 하는 이는 먼저 그 일가一家를 고르게 다스렸다.(欲治其國者 先齊其家)
능려能慮는 국치國治 치국治國과 상응한다. 수신과 제가는 능정能靜과 능안能安으로 표방했는데, 치국과 덕천하德天下는 능려와 능득能得으로 대대했다. 주역에 “천하는 귀착점이 동일하나 길을 달리하고, 이르는 곳은 하나이나 생각은 백 가지이다.”(天下同歸而殊塗 一致而百慮)라는 명문 중에 백려와 같다. 치국의 요결이다.
10) 정려한 다음에야 득의得意할 수 있다
정려한 다음에야 득의得意할 수 있다.(慮而後能得) 일국이 통치된 이후에 천하가 태평하게 된다.(國治而後天下平) 고성古聖이 명명明明으로 천하를 덕화德化하고자 하는 이는 먼저 그 일국一國을 통치統治했다.(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 先治其國)
위에서 능득 또는 득의는 국록을 받지 않는 처사處士의 덕만경계德滿境界이다. 복덕이 충만하다. 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면 바로 이루어진다. 혜충국사의 경계가 그러하다.
능득能得은 천하평天下平 덕어천하德於天下와 상응한다. 능득能得의 득得은 득천하得天下와 상응하고, 이를 덕치德治로 미화하면 덕천하德天下라 덕칭德稱한다. 우리는 통상 치국 덕천하를 치국 평천하라 말한다. 이 평천하는 전쟁을 수반한 법치法治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대학에서 말하는 평천하나 득천하 덕천하 또는 천하평은 모두 덕치의 산물이다.
11) 사물事物의 본말本末과 시종終始
품물品物은 본말本末이 있고, 사상事相은 시종始終이 있으니, 선후가 되는 소이를 알면 대도大道와 친근할 것이다.(物有本末 事有終始 知所先後 則近道矣)
본말은 경중輕重이고, 종시는 선후이다. 이 문단은 제일주 근본인과의 총결總結이고, 동시에 제이주나 제삼주 인과의 총결이기도 하다. 삼주인과가 모두 일관되게 팔강목八綱目의 상호 본말과 선후의 관계를 밝히고 있다.
예를 들면 “대학의 도는 명명에 있다.”라는 명명明明은 대학의 근본 강목이라 최우선으로 제출한다. 그의 뒤를 이어 “그 덕은 친근에 있다.”라고 하며, 명명에 이를 수 있는 방편으로 친근親近을 제시한다. 연이어 “그 인민은 지선에 이름에 있다.”라고 하여, 그 수용자가 평상인이라는 사실을 명백하 천명하고 있다. 이 대학의 삼보 도와 덕 인민은 삼주인과의 팔강목 중에 근본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수장에 안치한 것이다.
“지선止善을 알고 난 다음에야 정정正定이 있다.” “정려한 다음에야 득의得意할 수 있다.” 등은 모두 팔강목의 선후가 되는 소이를 밝히고 있다. 이 팔강목을 팔층보탑八層寶塔에 비유하면, 지선은 3층 탑신塔身에 상당하고 정정은 4층 탑신과 상응할 것이다. “삼층 탑신을 세운 다음에야 4층 탑신을 올릴 수 있다.” 팔강목의 선후가 이와 같다. 이 때문에 “선후가 되는 소이를 알면 대도大道와 친근할 것이다.”라고 결론한 것이다.
근도近道는 대학의 도 명명과 대학의 덕 친근이다. 명명을 친근함이 근본 공부이고, 이 때문에 근도는 전체 팔강목을 관통한다. 초주인과는 대학의 도 명명에서 시작하여 근도로 끝마쳤다. 수미일관首尾一貫한다. 아름답도다.
3. 제이주第二周 구경인과究竟因果
본문: 고성古聖이 명명明明으로 천하를 덕화德化하고자 하는 이는 먼저 그 일국一國을 통치統治했고, 그 일국을 통치하고자 하는 이는 먼저 그 일가一家를 고르게 다스렸으며, 그 일가를 고르게 다스리려는 이는 먼저 그 일신一身을 수양했고, 그 일신을 수양하고자 하는 이는 먼저 그 일심一心을 올바르게 했으며, 그 일심을 올바르게 하려는 이는 먼저 그 의지意志를 성실하게 했고, 그 의지를 성실하게 하려는 이는 먼저 그 성지聖知를 이루고자 했고, 성지를 이루는 것은 격물格物에 있다.(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 先治其國 欲治其國者 先齊其家 欲齊其家者 先修其身 欲修其身者 先正其心 欲正其心者 先誠其意 欲誠其意者 先致其知 致知在格物)
1) 구경인과究竟因果와 안락인과安樂因果
구경인과는 덕천하德天下로 시작하여 치국治國 제가齊家 수신修身 정심正心 성의誠意 치지致知 격물格物에 이르고, 안락인과는 격물을 이어받아 체용을 뒤집고 물격物格으로 시작하여 지지知至 의성意誠 심정心正 신수身修 가제家齊 국치國治 천하평天下平에 이른다. 이 천하평을 구경인과의 덕천하로 다시 건네준다. 이에 구경인과와 안락인과는 시작과 끝이 서로 맞물려 순환한다. 격물과 물격 그리고 덕천하와 천하평은 서로 시종을 갖추었다. 수미首尾가 상접相接하여 순환이 무궁하고, 종천지심從淺至深이나 종본지말從本至末에 자재하다. 제이주 구경인과는 격물로 구경을 삼고, 제삼주 안락인과는 천하태평天下太平으로 안락을 삼는다.
2) 덕어천하德於天下
고성古聖이 명명明明으로 천하를 덕화德化하고자 하는 이는 먼저 그 일국一國을 통치統治했다.(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 先治其國) 복희伏羲와 문왕文王 공자孔子를 상고上古와 중고中古 하고下古라 한다. 이에 고古자를 고성古聖이라 해석했다. 대학의 도는 명명이다. 도덕으로 다스리는 세상이다. 이에 평천하平天下는 어울리지 않고, 득천하得天下는 무방하며, 덕천하德天下라야 정확히 계합한다. 득得과 덕德은 통용한다.
만일 이 문장을 “옛날에 명덕을 천하에 밝히고자 하는 이는 먼저 그 일국을 통치했다.”라고 해석하면 어떠한가? 순환 구조가 파괴된다. 아래 안락인과의 천하평天太平과 수미가 상접하여 무궁한 순환이 바로 끊어진다.
3) 성지聖知를 이루는 것은 격물格物에 있다
대학의 도는 명명에 있고, 그 덕은 친근에 있다.(大學之道在明明 德在親) 품물이 감통感通한 이후에야 성지聖知가 이른다.(物格而後知至) 성지를 이루는 것은 격물格物에 있다.(致知在格物) 격물과 물격은 명명과 상응하며, 모두 대학의 도이다. 이 때문에 일체 언어로도 연설할 수 없는 곳이며, 오직 방편으로 열어야 비로소 보일 수 있다. 격물과 물격 그리고 명명의 삼자 관계는 “3) 대학大學의 도道는 명명明明에 있다” “4) 그 덕德은 친근親近에 있다” 장에서 상세히 설명했다.
주역에 “적연히 부동하여 감응하면 드디어 천하의 연고緣故를 통명通明한다.”(寂然不動感而遂通天下之故)라는 명구가 있다. 품물이 감통感通한 이후에야 성지聖知가 이른다.(物格而後知至) 상호 연관성이 있다. 물격物格을 품물이 감통한다고 해석한 것은 삼구三句를 쓴 것이다. 일구一句로 해석하면 바로 명명이다.
“그 의지를 성실하게 하려는 이는 먼저 그 성지를 이루고자 했다.”(欲誠其意者 先致其知) 이 논법을 그대로 적용하면, 구경인과의 결구를 “그 성지聖知를 이루고자 하는 이는 먼저 그 품물을 감통感通시키고자 했다.”(欲致其知者 先格其物)라고 써야 옳다. 그런데 어째서 “성지를 이루는 것은 격물格物에 있다.”(致知在格物)라고 변용했을까?
품물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를 물상物相이라 한다. 품물의 본성은 무엇인가? 이를 물성物性이라 한다. 불교용어로 대체하면, 물상이 곧 법상法相이고, 물성이 바로 법성法性이다. 이 법상과 법성을 바로 알면 그 품물의 묘용인 격의 뜻도 또한 곧 알 수 있다. 무정설법을 알아야 비로소 격물이나 물격을 논할 수 있다. 일체 유정과 무정은 법성이 있고, 또한 동시에 불성이 있다. 이에 일체 품물은 방광하고, 설법하며, 자기 본지풍광을 드러낸다. 이를 물격物格이라 한다. 격물格物할 수는 없다. 적연부동하면 감응하여 천하의 연고를 통명하는 것이다. 이에 일체 품물은 명명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명명은 광명이 밝게 비춰준다, 물격은 품물이 감통한다고 명사와 동사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격물은 품물을 감통시킨다고 해석할 수 없다. 명명도 또한 그러하다. 동사와 명사로 해석하면, “광명을 밝게 비춰주게 한다”가 되는데, 누가 어떻게 할 것인가? 격물을 도체로 보지 못했기 때문에 만용을 부려 격물을 논한 것이다.
4. 제삼주第三周 안락인과安樂因果
본문: 품물이 감통感通한 이후에야 성지聖知가 이르고, 성지가 이르고 나서야 의지가 성실해지며, 의지가 성실해진 이후에야 일심이 올바르게 되고, 일심이 올바르고 나서야 일신이 수양하게 되며, 일신이 수양된 이후에야 일가가 고르게 다스려지고, 일가가 고르게 다스려지고 나서야 일국이 통치되며, 일국이 통치된 이후에야 천하가 태평하게 된다. 천자天子부터 서민庶民에 이르기까지 일체가 모두 수신修身을 근본으로 삼는다. 그 근본이 문란하지만 지말이 다스려진다는 것은 옳지 않고, 그 후덕하게 할 이에게 박덕하게 하고, 박덕하게 할 이에게 후덕하게 하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된다. 이를 근본을 안다고 말하고, 이를 성지가 이른 것이라 일컫는다.(物格而後知至 知至而後意誠 意誠而後心正 心正而後身修 身修而後家齊 家齊而後國治 國治而後天下平 自天子以至於庶人 壹是皆以修身爲本 其本亂而末治者否矣 其所厚者薄 而其所薄者厚 未之有也 此謂知本 此謂知之至也)
5. 결어
나의 대학 장구는 삼주인과가 핵심이다. 초주 근본인과는 명명 친근 지선 유정 능정 능안 능려 능득이고, 제이주 구경인과는 덕천하 치국 제가 수신 정심 성의 치지 격물이며, 제삼주 안락인과는 물격 지지 의성 심정 신수 가제 국치 천하평이다. 능득을 덕천하가 이어받고, 격물을 물격이 이어받아 순환한다. 초주인과는 근본 팔강목八綱目을 제시한 것이고, 이주인과와 삼주인과는 사례를 들어 팔강목의 실체를 구현한 것이다. 제이주 구경인과를 역순하면 우리 귀에 익숙한 격물 치지 성의 정심 수신 제가 치국 덕천하가 된다.
삼주인과는 모두 신내사와 신외사로 양분되며, 그 양상이 ∨자의 고저를 나타내고 있다. 신내사를 이체理體로 보고, 신외사를 사상事相으로 볼 수 있다. 귀에 익은 이주인과의 역순을 사례로 들면, 정점 격물에서 치지 성의 정심으로 하강하고, 밑바닥 수신에서 상승하여 제가 치국 덕천하의 정점에 이른다. 삼주인과가 모두 동일하다.
이 글의 제명 ‘대학의 삼보 도덕민과 삼주인과’에 전문의 요지가 집약되어 있다. 대학의 비밀장秘密藏을 주자가 명명덕의 덕과 친민의 민이란 석문으로 막아버렸다. 명명과 친근의 본의를 드러내고, 대학 수장의 전문을 삼주인과 팔강목으로 정의함에 비로소 대학의 본지풍광이 명백하다.
2023년 3월 13일 길상묘덕일吉祥妙德日 75세 효산심일曉山心日 정덕성鄭德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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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제이주 구경인과를 역순逆順하면 격물로 시작하여 치지 성의 정심 수신 제가 치국 덕천하가 된다. 삼주인과는 모두 수신 신수 평정平靜을 근본으로 삼고 보면, 그 이전 정심 성의 치지 격물이나 물격 명명 등은 신내사身內事로 지혜가 선도先導하고, 그 이후는 덕천하 천하평 득의得意까지 모두 신외사身外事로 복덕이 주관한다. 곧 전반은 이기행이고, 후반은 이타행이며, 능정 이후 능안 능려 능득 등도 모두 후자에 속한다. 능득 또는 득의는 국록을 받지 않는 처사의 경계이다.
이상을 추가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