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교구 청년성서모임의 봉사자재교육때 강의 입니다
주제 강의
‘성가정상’의 재정립: ‘성가정’을 살아가는 그룹봉사자
교 육 부
들어가며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 주 하느님께서 사람에게서 빼내신 갈빗대로 여자를 지으시고, 그를 사람에게 데려오시자,
사람이 이렇게 부르짖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 (창세 2:18,22-24)
창세기에서 남녀의 결합은 창조의 일부분으로 드러난다. 창조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며 부르심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창조와 연결되는 혼인 역시 우리 삶의 부르심이며 그 자체로 '고귀함'이라는 가치를 잉태한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사랑이신 당신을 닮아갈 수 있도록 성사로서 우리를 초대하시는데, 가톨릭 신자라면 누구나 받는 세례 성사를 비롯한 7성사의 은총은 하느님의 그 거룩한 초대이다. 세례 받은 사람들끼리의 혼인 또한 그리스도께서 성사의 품위로 올리신 혼인 성사로서, 남녀의 자연스러운 결합을 넘어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의 표지이자 혼인을 통한 가정 공동체에게 베푸시는 큰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의 결혼관에서 '고귀함'이라는 가치는 찾아보기 힘들다. 3포 세대 혹은 5포 세대라고 불리는 요즘의 청년들에겐 취업과 마찬가지로 연애나 결혼 또한 과제처럼 느껴진다. <대학 내일> 20대 연구에 따르면 지금의 젊은이들은 결혼을 원하면서도 동시에 결혼에 대한 심적 부담감을 느끼고 있는데, 이는 가톨릭 청년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가톨릭 청년들에게도 결혼, 바꿔 말해 성가정을 이루는 것은 모두가 희망하는 꿈이다. 많은 그룹 봉사자들이 그룹원들에게 나눠주는 기도문도 보통은 “가정을 위한 기도”, “부모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배우자를 위한 기도문”이다. TV만 보아도 그렇다. 요즘 대한민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TV 프로그램은 “슈퍼맨이 돌아왔다”와 같은 육아 프로그램이다. 그 안에서 보여지는 가정의 모습은 경제적으로 풍요로우며, 충분하게 여가를 즐길 수 있는 능력 있고 자상하기까지한 새로운 세대의 아버지 상을 보여준다. 아마도 이것이 지금의 한국 사회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가정’의 모습일 것이다. 우리의 인식 속에서도 알게 모르게 그런 가정의 상이 이상적인 가정의 모습으로 각인되어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미디어를 통해 각인된 가정 상은 예수님을 따르는 십자가를 짊어진 성가정이 아니라 현실의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환상의 도피처일지도 모른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공동체인 ‘가정'
많은 형제 자매들에게 어떤 가정, 혹은 성가정 이루고 싶은지에 대해 물으면 성가정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해보지 않은 경우가 많거나, 그리스도인 배우자를 만나 성당에서 혼인성사를 통해 혼인을 하며, 주일에는 손을 잡고 성당을 가는 행복하고 단란한 가정이라고 대답하곤 한다. 로마 미사 경본에 따르면 성가정은 '아기 예수와 그의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 그리고 마리아의 남편이자 예수의 양부인 성요셉으로 구성된 가정'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성가정은 단순히 ‘예쁜’ 가정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그리스도인으로서 혼인 법규를 지키며, 행복한 가정을 꿈꾸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런데 혼인성사를 통해 부부가 된 가정을 모두 성가정이라고 할 수 있을까?
혼인성사를 올리는 것은 성가정의 시작이 될 수는 있지만 성가정의 완성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되기는 어렵지 않지만,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 것처럼 모두의 축복 속에서 시작한 성가정을 잘 유지하며 살아나가는 것 역시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욱 예수님의 성가정과 성경 속 성가정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성경은 오래된 이야기가 아닌 바로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하는 방향이며 해답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성경에 나오는 성가정은 오직 하느님께 순종하며 하느님의 진리를 따르고 실천하는 믿음의 공동체로서의 덕목을 충실히 보여주는 성가정이다. 먼저, 나자렛 성가정의 경우를 보면, 우리가 성령에 의한 거룩한 잉태라고 믿는 마리아의 예수님 잉태사건은 요셉의 눈에는 거룩한 일이 아닌 마리아의 외도로 보였을 수도 있다. 또한, 성모님의 눈에 요셉은 마굿간에서 아들을 낳을 수밖에 없게 한 가난한 남편, 경제적으로 무능력한 남편이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요셉과 마리아의 입장에선 예루살렘에서 갑자기 성전으로 사라진 12살의 예수님은 타지에서 가출하고, 사흘을 헤맨 후 찾으러 온 부모에게 이유 없이 반항하는 아들로 보였을 수도 있다. 그리고 마리아와 요셉은 하나 뿐인 아들의 고난과 죽음이라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까지 겪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성가정은 그 어느 가정보다 모범적인 성가정으로 불린다.
나자렛 성가정 외에도, 아브라함은 백 살에 얻은 귀한 아들 이사악을 하느님에게 바치려고 했고, 엘리사벳은 유다인들에게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이 수치스러운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늦은 나이까지 아이를 낳지 못하는 불쌍하고 기구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끝내 마리아는 부활의 영광을 체험하고 천상 모후의 관을 쓰게 되며, 아브라함은 믿음의 아버지가 되고, 엘리사벳은 세례자 요한을 잉태하여 하느님의 자비를 증거하는 여인이 된다. 이들을 현실적인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본받기 보다는 멀리 해야 할 사람들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았을 때 이 성가정들은 성실한 믿음의 본보기 그 자체이다.
이처럼 성경 속 성가정의 모습은 안정과 평안보다는 때때로 가난하고, 불우하며, 고난을 겪는 등 현실적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느님에 대한 신의를 잃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삶이 고통스러울수록 하느님과의 대화를 끊임없이 시도하고 그 모든 것을 자신들의 소명,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임'의 태도를 보여준다. 따라서, 성가정이란 그리스도인 남녀가 만나서 화목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가정만이 아닌, 가족 구성원들이 함께 하느님 안에서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가정이라고 할 수 있다.
성가정, 작은 교회
나자렛 성가정을 닮아 가는 것,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를 가족의 일원으로 초대해, 예수 그리스도가 가정의 중심인 삶을 살며,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공동체를 이루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이상적인 그리스도교의 가정이 되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까?
예수님께서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 15,11-12.17)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말하시는 사랑은 성가정을 이루기 위한 바탕이 되어야 한다. 가정의 본질적 요소인 사랑은 자녀의 출산을 가져오고 또 자녀 교육의 전제가 된다. 이 사랑을 통해 자녀는 가정 안에서 인간적으로 성숙해지는 것이다. 또한, 교회는 가정의 기본 임무가 생명에 봉사하는 것이며 출산을 통해 하느님 모상을 사람에게서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사랑과 더불어 생명 존중 또한 전제되어야 한다. 가정은 생명의 존엄성을 지켜야 하며 자녀 교육에 있어서도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을 중시하는 마음을 심어 주어야 한다. 그를 통해 자녀들은 개개인의 존엄성을 인식하고, 동시에 상대의 소중함을 알게 된다. 이처럼 가정은 사랑의 공동체, 생명의 공동체이자 하느님의 뜻을 구현하는 기초적인 교회이다.
그리고 가정은 사랑과 생명 존중을 바탕으로 기도와 대화를 통해 그 가치를 실현하려 노력해야 한다. 기도는 신앙을 성장시키는 데 있어 꼭 필요하다. 따라서 부모는 모범이 되어 신앙과 기도로 어려운 일을 헤쳐 나가는 모습을 자녀에게 보여 주어야 한다. 이처럼 가정 구성원이 함께 모여 기도하는 것은 그리스도적 가정을 이루기 위한 가장 본질적인 것이다. 어찌보면 현대 그리스도교 가정의 위기는 ‘바빠서, 피곤해서’라는 핑계로 가정에서 기도가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생겨나는지도 모른다. 또한, 가족 간의 불일치나 갈등, 이해 불균형 등을 풀어나가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은 대화이며 갈등을 느끼는 가족 구성원이 가족과 대화를 나누면 자신의 아픔을 치유하고 원만한 인간관계를 재생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기도와 대화는 성가정을 이루기 위한 방법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물론 말처럼 간단치 않다. 우리는 때로 가족들에게 큰 상처를 받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가족들과 회복되기 어려운 관계를 갖고 있기도 하다. 때문에 대화와 기도를 통해 성가정을 이루는 것은 가족 구성원 모두의 노력을 필요로 한다.
마지막으로, 성가정은 가정 안에서 복음화를 이루고 이웃에게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그리스도인 가정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신앙 안에서 성숙하는 만큼 타인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다. 가정 안에서 복음화를 이루고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밖으로의 복음 선포, 곧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자신 있게 선포하는 교회의 삶과 사명의 참여하고, 이를 통해 우리는 평신도의 역할을 완수하게 된다. 따라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하느님의 백성인 동시에 하느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는 넓은 의미의 가정이라 생각할 수 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냐?”고 반문하신 그리스도처럼 가정이 가족 간의 사랑은 물론 나아가 교회를 통해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질 때 그 가정은 이상적인 그리스도교 가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 성가정은 사회를 구성하는 단위이자, 하나의 소공동체이다. 성가정은 전통적인 가족관, 즉 두 남녀가 혼인성사를 통해 맺어져 자녀를 양육하는 가정만을 뜻하지 않는다. 더 근본적으로 성가정은 예수 그리스도를 공동체의 일원으로 초대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살아있는 공동체이다. 윤리신학자인 리사 카힐은 ‘그리스도교 가정이란 자기 가족 구성원들의 복지, 행복에만 관심을 두는 핵가족이 아니라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 가족, 즉 공동선과 이웃 사랑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윤리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라고 넓게 해석한다. 예수님 또한 당신 복음을 듣기 위해 둘러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이렇듯 그리스도교 가정이란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의 구성원 뿐 아니라, 하느님께 자신의 어려움을 고백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고자 노력하고 서로 다독여주며, 그를 통해 희망과 용기를 얻어 사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가정이란 신앙을 살고 가르치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실천으로 보여주는, 그리스도가 살아서 숨 쉬는 공동체이다.
성가정의 역할은 ‘성서모임의 정체성과 영성’에 등장하는 평신도 사도직, 그룹봉사자의 역할과 같다. 그리스도교 가정은 교회의 역할인 예언직, 사제직, 왕직을 수행하는 공동체이다. 성가정의 예언직은 혼인과 가정 생활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이웃 가정에도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또한 성가정은 사제직을 이어받은 교회의 일부분으로 먼저 기도와 성사 생활을 수행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성가정의 왕직은 인간에게 봉사하는 것이다. 성가정은 사회 전체에 대한 책임 의식을 가짐은 물론이고, 가난한 자에게 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이처럼 성가정은 교회의 모습을 지니고 교회가 수행하는 역할을 가정에 맞게 행하는 ‘작은 교회’이다.
함께 모인 성가정, 말씀을 살아가는 공동체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매일 조금씩 그리스도를 닮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가정을 이루는 것 또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과정이다. 때문에 혼인성사란 단순한 혼인이 아닌, 하느님을 가족 공동체의 일원으로 초대하고 모시는 일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성가정의 가치는 내가 속해있는 가족 뿐 아니라 하느님이 함께 하시는 모든 공동체와 사회 전체에서 실현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청년들이 이러한 성가정의 가치를 실현하며 살기란 참으로 어렵다. 가장 가까운 사람인 나의 가족을 마음껏 사랑하는 것, 나의 공동체에 하느님의 자리를 비워두는 것, 기도 생활 속에서 타인을 이해하는 일 중 무엇 하나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그럴 때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떠올리며 사랑할 수 있는 용기를 청해야 한다.
청년 성서모임 그룹 봉사자는 청년 신앙인으로서 자신이 머무르는 모든 곳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지금 속해있는 가정, 우리가 앞으로 만들어갈 가정, 그리고 우리가 머무르는 모든 공동체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젠가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럼 형제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자신을 바로잡으십시오. 서로 격려하십시오. 서로 뜻을 같이하고 평화롭게 사십시오. 그러면 사랑과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 (2코린 1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