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인간혁명 30권 제4장 曉鐘(63~68)
<효종 63>
야마모토 신이치가 뉴욕을 출발해 캐나다 토론토국제공항에 도착한 때는 6월 21일 오후 4시(현지시간)가 지나서다.
공항에서는 캐나다 이사장인 루 히로시 이즈미야와 의장이자 그의 아내인 데루코 이즈미야를 비롯해 많은 멤버가 꽃다발과 캐나다 국기를 들고 일행을 맞이했다.
캐나다는 신이치는 1960년 10월, 첫 해외방문 때 토론토를 방문한 이후 21년만이다.
생각해보면 그때 공항에서 일행을 맞이한 사람은 아직 입회하지 않은 데루코 이즈미야 한 사람뿐이었다.
데루코는 그해 3월, 일본계 2세 캐나다인으로 상사에 근무하는 히로시 이즈미야와 결혼해 4월에 캐나다로 건너왔다.
그리고 신이치가 도착하는 날 아침, 일본에 사는 학회원 어머니에게서 항공우편을 받았다. 거기에는 야마모토 회장이 캐나다를 방문한다는 내용과 함께 ‘꼭 공항에 마중을 나가달라’고 씌어 있었다.
그러나 데루코는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였다. 임신 중이라 몸 상태도 좋지 않고 ‘만약 절복하겠다고 나오면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어머니에게 들은 공덕 같은 이야기는 시대에 뒤떨어지는 미신이라고 생각해 신심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가지 않으면 어머니의 부탁을 거역하고 불효를 저지르는 것 같아 결국 공항으로 행했다.
신이치는 마중을 나와 준데 진심으로 고마워하며 가정 상황 등을 묻고 ‘왜 인생에서 신앙이 중요한지’를 설명한 뒤 불법(佛法)은 생명의 법칙이라고 말했다.
이후 1년 7개월이 흘러 병치레가 잦던 데루코는 건강해지고 싶어 스스로 신심을 시작했다. 건강 때문에 남편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입회해서 어머니를 안심시켜 드리고 싶었다.
마음속에 심은 묘법(妙法)의 씨앗은 때가 되면 반드시 싹튼다. 중요한 것은 자신과 관계된 사람들에게 불연(佛緣)을 맺어주고 씨앗을 심는 일이다.
<효종 64>
‘나는 홀로 선다’ ‘내 두발로 엄연히’는 캐나다의 화가이자 작가인 에밀리 카가 품은 기상이다.
신심을 시작한 데루코는 오직 홀로 활동을 시작했다. 일본에서 받은 ‘세이쿄신문’을 의지해 지인들을 찾아가 불법대화를 나눴다.
회합에 참석하려면 장거리버스나 비행기를 타고 국경을 넘어 미국의 버팔로나 뉴욕까지 가야 했다. 남편은 신심의 좋은 이해자로 자동차로 자주 태워다 주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신심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남편 히로시 이즈미야는 1928년 캐나다 벤쿠버섬에서 태어났다. 히로시의 아버지는 와카야마현에서 캐나다로 건너와 고기잡이를 해 가족의 생계를 유지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영국연방인 캐나다 측에서 보면 일본은 적국이었다. 이듬해 일본계 사람들은 로키산 속에 있는 수용소로 끌려갔다. 한겨울에는 영하 20도까지 내려갔다.
캐나다에 충성을 다하기 위해 군대에 지원하는 청년도 있었다. 그것을 ‘배신’이라며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다. 일본계 사람들끼리 서로 으르렁거리며 마음까지도 찢어 놓았다.
전쟁이 끝났다. 그러나 돌아갈 집이 없었다. 일본계 사람들은 일본에 돌아갈지 동부로 이주할지 어려운 선택을 해야만 했다.
히로시의 아버지는 이미 일흔이 넘어 ‘일본에서 눈감고 싶다’고 생각했다. 가족은 아버지의 고향인 와카야마현으로 돌아왔다.
이윽고 히로시는 도쿄로 나왔다. 대학진학을 결의하고 미군 기지가 있는 가게에서 일하면서 공부에 힘썼다. 서투른 일본어도 열심히 공부해 게이오대학교 경제학부에 진학했다. 졸업한 뒤 외국계 은행에서 근무하다 ‘캐나다로 돌아가 일본과 캐나다를 잇는 다리가 되자’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히로시는 토론토에 출장소를 둔 일본 상사에서 일했다.
전쟁으로 고통 받은 사람에게는 평화를 위해 꿋꿋이 살아가야 할 사명이 있다.
<효종 65>
1960년 히로시 이즈미야가 근무하는 일본상사가 캐나다에 현지법인을 설립했다.
이때 히로시는 일본에서 알게 된 데루코와 결혼했다. 데루코는 이해 봄 캐나다로 건너와 신이치가 처음 캐나다를 방문했을 때 토론토 공항에서 신이치 일행을 맞이한 것이다.
그 후 입회한 데루코는 ‘캐나다 광포를 위해 살아가자’고 마음먹었다. 또 학회활동에 힘쓰는 속에 협조적이긴 하지만 신심을 하지 않는 남편이 마음에 걸렸다.
1964년 가을, 일본에 간 데루코는 카렌이라는 귀여운 여자아이를 데리고 신이치가 있는 학회본부로 찾아갔다. 4년 전, 데루코 뱃속에서 함께 신이치를 맞이한 딸이다.

캐나다에서 신심을 시작한 데루코에게는 분명 힘들고 괴로운 일이 많았을 것이다. 데루코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하기 시작했다. 신이치는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듣고 나서 힘주어 말했다.
“날마다 힘든 일뿐이군요. 그러나 경문에, 어서에 비추어 보면 당신은 구원(久遠)이라는 옛날에 스스로 광선유포를 서원해 지용보살(地涌菩薩)로서 캐나다 땅에 출현했습니다.
이 지용의 사명을 자각하고 끝까지 완수하겠다고 결의해야 합니다. 그 인생이 곧 가장 존귀하고, 가장 환희차고, 가장 충실하고, 가장 행복하다는 점을 확신하기 바랍니다.
사람에게는 갖가지 숙명이 있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또 아무리 유복해 보이는 사람도 늙고 병들고 죽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마음에 불안이나 고뇌를 안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사람에게 흔들리지 않는 절대적 행복경애를 확립하는 길을 가르쳐 사회와 국가 그리고 인류의 숙명을 전환하는 이제껏 아무도 이루지 못한 성업(聖業)을 위해 열심히 힘쓰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고생이 따르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미혹은 사람을 겁쟁이로 만듭니다. 마음을 정해야 합니다. 그때 무한한 용기기와 힘이 솟구칩니다.”
<효종 66>
마음을 정하면 삶을 살아가는 축이 생긴다. 그 한 사람이 조직의 축이 되면 광선유포의 톱니바퀴가 회전하기 시작한다.
신이치는 또한 남편 히로시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말했다.
“남편에게는 신앙을 강요하듯 말하지 말고 좋은 아내가 되어 행복한 가정을 구축해야 합니다. 아내로서,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당신의 행동과 삶의 자세가 신심의 훌륭함을 보여줍니다.
화목한 가정을 구축하기 위해 총명하게 성실하게 남편을 대하면 반드시 신심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데루코는 이 지도를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이후 캐나다 국적을 취득해 아름다운 단풍과 인화(人華)로 가득한 캐나다 땅에 뼈를 묻겠다고 각오했다. 아무리 슬퍼도, 아무리 힘들어도 남편에게 불평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꾹 참고 힘들 때는 어본존 앞에 앉아 한 결 같이 창제했다.
아내로서 가정을 지기고 어머니로서 세 아이를 키우면서 밝고 생기발랄하게 캐나다 광포의 길을 단호히 열었다. 홍교의 유대도 착실히 넓혔다.

남편 히로시가 신심을 하기로 결의한 때는 1980년 3월이다. 데루코는 남편에게 ‘함께 열심히 신심해 당신과 함께 행복해지고 싶다’고 차분하게 밤이 깊도록 이야기했다.
마침 히로시는 무척 사랑한 누나 두명을 잇달아 병으로 떠나보내며 숙명이라는 난문(難問)에 직면해 있었다. 전쟁으로 소년 시절에 수용소 생활을 강요한 일도 떠올랐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부조리한 일에 갑자기 직면했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운명’이나 ‘숙명’이라 부르고 초월적인 작용으로 여겼다. 불법(佛法)은 생명의 인과(因果) 법칙에 따라 그 원인을 규명하고 전환하는 길을 설한다.
남편은 아내보다 18년 늦게 창가(創價)의 길을 걷기로 결정했다. 그날 밤, 부부는 처음으로 함께 근행했다. 창밖에는 많은 눈이 내리고 방 안은 환희로 감싸였다. 데루코의 뺨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효종 67>
1980년 10월, 신이치는 북미 지도 차 캐나다를 방문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시카고공항을 출발하기 직전, 엔진에 문제가 생겨 방문을 중단해야 했다.
기다리고 있을 모든 동지를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그때 신이치는 의장인 데루코 이즈미야에게 시를 선사했다.
“잊지 못할 / 캐나다 땅에 / 그대 일어나 /
광포의 여명은 / 드디어 도래했노라”
또 방문지 로스앤젤레스에 캐나다 대표를 초대해 대화할 기회를 만들었다. 그중 데쿠코 이즈미야와 함께 남편 히로시 이즈미야의 모습도 보였다. 온화하고 말끔한 모습을 한 신사였다. 신이치와 동갑이라고 한다.
신이치는 굳은 악수를 나누고 신심을 시작한 히로시를 진심으로 축하한 뒤 둘이서 기념촬영을 했다. 남편의 옆모습을 바라보는 데루코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이후 8개월이 흘러 신이치가 캐나다를 방문하자 이즈미야 부부가 신이치 일행을 맞이하려고 토론토국제공항에 나온 것이다.
신이치는 캐나다에 머물면서 히로시와 함께 움직이려고 애썼다. 캐나다 법인의 운영을 책임져야 할 이사장 히로시가 멤버를 꿋꿋이 지키는 정신을 철저히 배우고 몸에 익히기 바랐기 때문이다.
또 조직의 중심자로서 광포의 길을 단호히 열어 온 의장 데루코에게 신이치가 이렇게 말했다.
“남편이 협조하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올 수도 없었습니다. 캐나다 조직은 남편 덕분에 크게 발전했습니다.”
사람은 어떤 일을 성공하면 아무래도 자신의 힘으로 이루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성공하기까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힘쓴 수많은 사람의 노력이 있기 마련이다.
늘 이점을 잊지 않고 겸허하게 모든 사람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 비로소 상승(常勝)의 리더가 된다.
신이치는 캐나다에 머문 지 이틀째가 되는 22일, 토론토 시내에 있는 호텔의 큰 홀에서 동지 약 1000명이 모여 캐나다 광포 20주년을 기념하는 총회를 성대하게 열었다.
이것은 새로운 세기를 향해 희망을 가득 안고 새롭게 출발하는 모임이 되었다.
<효종 68>
캐나다 광포 20주년 기념총회에 참석한 신이치는 약 21년 만에 캐나다를 방문한 기쁨을 말하고 첫 방문을 떠올리면서 홀로 서는 정신이 중요하다고 외쳤다.
“숫자 ‘0’은 아무리 큰 수를 곱해도 ‘0’입니다. 그러나 그 숫자가 ‘1’이면 거기서부터 무한히 발전합니다.
캐나다 광포의 역사는 이즈미야 의장이 광선유포를 위해 엄연히 일어선 데서 크게 발전해 바야흐로 약 1000명이나 되는 동지가 모이기에 이르렀습니다.
모든 것은 한 사람에서 시작합니다. 그 한 사람이 사람들에게 묘법이라는 행복의 법리(法理)를 가르치고 전해 자신을 능가하는 사자(師子)로 육성해 인재의 진열을 만든다. 이것이 지용(地涌)의 의(義)입니다.
이러한 어서 말씀을 하나하나 현실에서 실천하는 일이 바로 우리 창가학회의 사명이고 이로써 어서를 몸으로 읽는 것이 됩니다.”

여기서 신이치는 이번에 소련을 비롯한 방문국에서 정부요인이나 지성인들과 거듭 회담한 일을 말했다.
“회담에서 저는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평화라고 계속 주장했습니다.
만인이 동등하게 ‘부처의 생명을 갖추었다고 설하는 불법이야말로 생명존엄을 바탕으로 한 철리(哲理)이자 평화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것입니다. 또 거기에는 타인에 대한 관용과 자비 정신이 맥동합니다.
이 사상은 전쟁을 찬미하고 민중을 예속시켜 죽음으로 내모는 세력과는 원리상 대결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학회는 제2차 세계대전 중, 국가신도를 정신적 지주로 삼아 전쟁을 수행하는 군부정부로부터 탄압을 받았습니다.
저는 정치가도 아니고 외교관도 아닙니다. 또 경제인도 아닙니다. 그러나 평범한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불법을 근저로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계속 대화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모두 똑 같은 존엄한 존재라고 설하는 불법정신을 모든 나라 사람이 함께 공유하고 국적을 뛰어넘어 우정의 연대를 강하게 다지는 일이 바로 평화를 위한 가장 확실한 길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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