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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팝꽃 필 무렵, 선생을 생각하며
— 유동수 선생 소천 2주기에 즈음하여 —
평안에 이르셨습니까.
2026년 4월, 제가 머무는 동네 골목에는 이르게 개화한 이팝나무 꽃이 새하얗게 올라왔습니다. 오래전 배곯는 이들에게 이 이팝꽃이 쌀과 비슷하여 보는 것만으로도 위로와 희망이 되던 꽃이라는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소망은 싱거운 삶에서든, 죽겠다 싶을 만한 고통에서든 우리를 살아가게 만드는 힘이 있음을 살아갈수록 터득해 갑니다. 그래서겠죠. 지운(知雲)님의 말씀이 지금도 귓전에 맴돕니다.
"과거는 용서하고, 현재는 사랑하고, 미래는 소망하라."
함께 인용하시던 성구도 함께 떠오릅니다.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2001년 5월 5일, 인성개발원 주최 일반인 대상 3박 4일 감수성훈련집단 마지막 시간이었습니다. 뭐든 할 말 있으면 해보라시는 말씀에 저는 "연륜인가요?" 하고 물었습니다. 저로서는 중요한 물음이었습니다.
1987년, 만 19세의 여름을 함께 보낸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 이후 인문학, 철학, 신학에 본격적으로 젖어 들어갔지만, '존재로서의 삶을 지향하나 소유의 삶에 머무는 불일치'는 한동안 이어졌습니다. '다양성 속의 조화와 일치'를 삶과 목회의 중요 과제로 삼았던 그 시기에, 첫 집단의 경험은 한 줄기 빛과도 같았기 때문입니다.
지운님은 답 없이 담담한 눈빛으로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시간, 카드 피드백에 한 마디 남기셨습니다.
"늘 지금만 같으십시오."
그 순간을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합니다. 일상의 시간 속에서 다른 결의 시간이 열렸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지운님과의 만남 이후, 지난 23년의 소감을 남깁니다.
하나. 감정이 진실의 통로라는 것
지운님은 말했습니다. 한국인은 이성보다 감성 중심의 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서양인들이 이성을 바탕으로 문화를 만들었다면, 한국인은 감성에 기반을 둔 문화를 만들어 살아왔다고.1 그래서 감정을 다루는 상담이 한국인에게 더 깊이 닿는다고.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며, 오래전 비슷한 말을 했던 서양 신학자 슐라이어마허(F. Schleiermacher)를 생각했습니다. 그는 차갑고 이성적인 신학에 맞서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종교의 본질은 교리나 이성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무한자에 대한 직접적인 자각,삶의 가장 깊은 자리에서 올라오는 절대의존의 감정이다."2
슐라이어마허는 19세기 유럽 학계에서 '현대신학의 아버지'로 불립니다. 계몽주의가 이성을 모든 것의 척도로 삼던 시대에 그는 인간의 종교적 경험과 감정을 신학의 출발점으로 선언했습니다. 당시로선 혁명적인 주장이었습니다.
한상담 역시 '지금-여기에서 느끼는 감정'에 초점을 맞춥니다. 감정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만나는 진실의 자리입니다. 이 자리에서 비로소 존재의 만남이 일어납니다. 지운님의 현장과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이 시대와 대륙을 넘어 같은 자리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이 공부 중에 저는 이런 통찰을 만났습니다. '감정은 영혼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둘. 깊이 들어갈수록 만나게 되는 것
지운님이 가르쳐 주신 수직분석이 있습니다. 표면감정에서 이면감정으로, 다시 본심을 찾아 내려가는 여정입니다. "그 밑에는?", "그리고 그 밑에는?" 하시며 함께 찾아가시다 일어나는 저항에서는 "여기까지라도 어딘데" 하시는 모습에 몇몇 벗들이 묻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내면 가장 깊숙한 곳에는 한없는 사랑이 있다."— 유동수3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저는 신학적으로 충격을 받았습니다. 슐라이어마허가 똑같은 구조를 이렇게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감정의 가장 깊은 자리에 닿으면, 거기서 무한자, 하나님을 만난다고. 그것이 그가 말하는 '절대 의존의 감정(das schlechthinnige Abhängigkeitsgefühl)'입니다.
슐라이어마허가 말하는 감정과 무한자의 관계를 하나의 도식으로 그려본다면, 이것은 '수면 위로 드러난 현상'을 넘어 '바다 깊은 곳의 근원'으로 침잠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우리 의식의 표면에 찰랑이는 개별적인 감정들이 실은 거대한 바다(무한자)와 맞닿아 있으며, 그 깊은 곳으로 내려갈수록 나라는 존재가 하나님이라는 무한한 근거 안에 품어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구조입니다.
한알 사람들에게는 참 낯익은 표현입니다.
이 표현은 오해받기 쉽습니다. '절대 의존'이라니, 주체성을 포기하라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4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여기서 '의존'은 결정론적 의존이 아니라 목적론적 의존, 즉 도덕적이고 자유로운 방향성을 담은 것이라고. '감정'은 심리적 감정이 아니라 지성과 의지, 주관과 객관을 초월하는 직접적 자각이라고. 틸리히는 이것이 자신의 '존재의 근거에 대한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과 같은 뜻이라고 말합니다.
저에게 슐라이어마허의 '절대 의존의 감정'은 한상담이 수직분석의 가장 깊은 자리에서 만나는 '한없는 사랑'과 같은 자리를 가리킵니다.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만나게 되는 것. 어떤 이는 그것을 하나님이라 부르고, 어떤 이는 사랑이라 부릅니다. 지운님은 뭐라 하셨을까요. 둘 다 옳다고 하셨을까요?
셋. 만남은 존재와 존재로서
슐라이어마허에서 시작된 '종교적 감정', 이에 맞선 칼 바르트5의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그 긴장을 실존의 언어로 다시 읽은 불트만(R. Bultmann)의 '실존적 사건'——이 세 흐름은 방법론에서 크게 달랐지만, 인간이 자기 한계에 부딪히는 자리가 만남의 자리라는 것만큼은 나란히 가리키고 있습니다.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1884–1976)은 슐라이어마허의 절대 의존감정을 하이데거의 실존 분석과 결합하며 복음이 정보가 아니라 사건이며, 인간에게 닿을 때 자기이해 자체를 변형하는 실존적 사건으로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불트만에 따르면 인간은 자기 힘만으로 자기 삶의 의미를 완성할 수 없습니다. 불안과 자기집착, 관계의 상처 속에서 인간은 자기 한계를 드러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 한계가 드러나는 자리에서 복음이 들어옵니다. 그 만남은 인간이 자기를 새롭게 이해하게 하고, 자기집착에서 벗어나 진정한 실존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복음은 인간의 자기이해를 변형하는 실존적 사건이다.그 사건은 인간이 자기 한계에 직면하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 불트만 (필자 요약)6
저는 이 말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인간은 자기 주체성만으로 자기 삶의 의미를 완성할 수 없습니다. 마음의 흔들림과 관계의 상처 속에서 자기 한계를 드러냅니다. 그런데 만남은 바로 그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자신과의 만남, 타인과의 만남에서 주체성, 관계성의 조화를 이루며 실제적 자아를 회복하면서 더 넓은 관계 속에서 대아(大我)로 나아가는 과정. 이 끝없는 길을 가는 것이 성장이라고 말입니다.
불트만의 '실존적 변형'과 한상담의 '소아에서 대아로의 성장'은 구조가 같습니다. 둘 다 인간이 자기 한계를 직면하는 자리를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둘 다 그 한계의 자리에서 외부로부터의 만남이 일어난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 만남이 자기이해를 근본적으로 바꾼다고 말합니다.
지운님이 하시던 말이 있습니다. 내담자가 가져오는 문제는 더 이상 내담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가 된다고. 불트만은 진정한 실존이란 자기집착에서 벗어나 타자를 위한 존재(Sein-für-andere)로 전환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상담자가 내담자의 문제를 자기 문제로 함께 짊어지는 순간, 그것은 불트만이 말하는 그 전환의 살아있는 형태입니다.
넷. 주체성과 관계성, 그리고 인간상
지운님은 관계론에서 독특한 표현을 쓰셨습니다. 근대 서구 상담의 한 흐름이 '나는 나이고 너는 너이다'라는 상대관(相對觀)으로 인간을 보는 반면, 한상담은 '너는 너이면서 나이고, 나는 나이면서 너이다'라는 상즉관(相卽觀)으로 본다고 하셨습니다. 내담자의 문제는 상담자의 문제가 되고, 나와 너를 넘어 '우리'가 되는 것. 한상담이 지향하는 관계입니다.
진정한 주체성은 자기 자신과 만나 확고히 서는 것에서 시작해, 온 세상 모든 사람들, 나아가 자연만물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것으로 나아갑니다. 소아(小我)를 벗어나 너와 우리, 자연만물, 온 우주를 담은 대아(大我)로 성장해 가는 것, 그것이 한상담이 바라보는 인간의 길입니다.
"나는 나이면서 너이고, 너는 너이면서 나이다.나는 너와 더불어 너에게 말하고, 너는 나와 더불어 나에게 말한다."— 유동수
슐라이어마허와 불트만은 각자의 방식으로 이 진실을 신학화했습니다. 슐라이어마허에게 하나님의 속성은 언제나 '신과 우리의 관계의 표현'입니다. 자기의식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성립합니다. 불트만에게 진정한 실존은 자기집착을 벗어나 타자를 향해 열리는 것입니다. 복음이 주는 자유는 자기로부터의 자유, 즉 타자를 위한 자유입니다. 주체성과 관계성이 별개가 아니라는 것, 이것이 두 신학자가 공유하는 인간론의 핵심입니다.
한상담의 이 인간상은 신학과도 같은 구조 위에 있습니다. 자아는 관계를 끊고 혼자 서는 자아가 아닙니다. 허구적 자아로 가려진 진짜 나를 회복할 때, 그 나는 동시에 타자를 향해 열려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자아의 회복은 하나님 형상(imago Dei)의 회복일 수 있습니다. 주체성을 잃은 것은 하나님 형상의 왜곡이고, 관계성을 잃은 것은 삼위일체적 교제의 단절입니다. 한상담이 두 가지를 함께 회복시키는 것은 신학적으로 의미 있는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다섯. 같은 자리, 다른 언어
슐라이어마허, 불트만, 그리고 한상담. 세 흐름이 다른 자리에서 출발하면서도 같은 인간 경험의 구조로 수렴합니다. 감정이 진실의 통로라는 것, 인간은 자기 한계의 자리에서만 진정한 만남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 그 만남이 자기이해를 변형하고 관계 속에서 더 큰 자기로 성장하게 한다는 것.
물론 차이도 있습니다. 슐라이어마허는 종교적 경험을 출발로 삼으면서도 보편적 신학 구조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방식으로 재구성하고자 했습니다. 불트만은 복음의 사건이라는 수직적 초월을 강조했습니다. 한상담은 아래에서 위로, 한국인의 구체적 정서와 감정에서 출발해 관계 회복과 대아 성장으로 나아갑니다. 신학자들이 신학적 의식화에 방점을 찍는다면, 한상담은 감정에서 자신을 만나고 관계를 실제로 변화시키는 실천으로 나아갑니다.
그런데 이 차이는 결핍이 아닙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두 신학자는 한상담에 신학적 깊이와 보편적 근거를 제공하고, 한상담은 그들에게 구체적 문화 현장과 실천적 방법론을 제공합니다.
"슐라이어마허가 19세기 유럽에서 살아있는 경험으로부터 신학을 재구성했듯이,불트만이 실존의 자리에서 복음을 다시 읽었듯이,한상담은 21세기 한국에서 그 작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 연결이 가능한 것은 세 흐름이 처음부터 같은 인간 경험의 구조 위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감정의 가장 깊은 자리에 닿는 것, 자기 한계를 직면하는 것, 만남이 실존을 변형하는 것. 이 공통 구조는 우연이 아닙니다.
여섯. 지금 여기 느낌
소감문을 마치기에 앞서 한 마디를 더 남깁니다. 이 글에서 신학자들의 이름을 꺼낸 것이 불편하셨을 수도 있고, 반대로 종교와 거리를 두고 한상담을 공부해 오신 분들께는 낯선 언어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23년 동안 이 공부 안에서 거듭 경험한 것이 있습니다. 지운님이 수직분석에서 찾아가시던 '한없는 사랑'의 자리, 슐라이어마허가 감정의 심층에서 만난다고 한 그 자리, 불트만이 한계의 자리에서 실존이 변형된다고 한 그 자리——이것들이 서로 다른 언어로 같은 곳을 가리키고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그 자리를 무엇이라 부르든 상관없습니다. 각자의 언어로,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멈춰있지만 않으면 된다" 하시며 속도가 아닌 삶의 태도를 가리키시던 지운님을 기억하면 말입니다.
일곱. 인사를 고합니다
이제 5월이 되면 골목마다에는 이팝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가지가 휘엉청 땅에 닿을 듯하겠지요. 지운님이 떠나신 지도 2년이 됩니다.
한 뿌리에서 다양하게 가지를 치고 나온 신학 사조들도 사실 사람을 향하고 있고, 사람을 위해 있기에, 이 다양성은 사람을 향해 조화를 이루고, 사람으로 일치에 이릅니다.
지운님이 그래보였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서로 다른 한 사람을 오롯이 각각의 모습으로 온전히 그 사람으로 만나오셨습니다. 존재로서의 삶으로, 그저 있음으로.
선생이라 불리길 저어하시던 지운님은 어느 날 '너희가 그렇게 부르길 원해서 생각해보니, 필요한 사람에게는 도움되겠다' 하시며 허락해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제겐 언제나 선배였고, 큰 형님이었고, 어른이시자 청년이셨습니다.
"만남이란 나와 너를 넘어서서 우리가 되는 것이다." — 유동수
이 땅의 어떤 사상도 거부하지 않는 '한사상'은 시나브로 우리 깊숙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각양의 철학, 사상, 종교 그리고 서로 다른 우리의 삶과 대화하면서 평안에 이르기까지.
"네가 있는 자리가 최고의 자리다." 지운님과 마지막 만남에서 해주신 말이 마음에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이팝꽃이 채 지기 전에, 지운님과의 만남을 마음에 담습니다.
과거는 용서하고, 현재는 사랑하고, 미래는 소망하라.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2026년 5월을 향하는 날, 이팝꽃을 바라보며
인간 권 대 원
1 유동수의 감성 문화 설명 중 보충 예시. 마땅히 해야 하는 옳은 일이라도 내 기분이 내키지 않으면 안 한다거나 뒤숭숭한 꿈을 꾼 날이면 행동거지를 조심한다거나, 안 해도 될 일을 기분에 취해 저지르기도 한다. 이는 감성 중심 문화의 특징적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는 이성 중심 문화와 다른 감성 중심 문화의 작동 방식을 보여주는 예시로, 긍정·부정의 가치판단과 무관하다
2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Friedrich D. E. Schleiermacher, 1768–1834). 『종교론』 제2강연 종교의 본질에 대하여 (최신한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자유주의 신학의 원류이자 현대 해석학을 태동시켰으며, 인간의 종교적 경험을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그의 주관적·경험적 접근은 이후 현대신학의 다양한 흐름을 촉발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3 유동수, 「한상담 모델 소개」, 『한상담연구』 2권 1호 (2007).
4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 1권), p 42 이 부분은 저의 해석이며, 틸리히 사상의 번역·해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칼 바르트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신학'을 강조했다면, 틸리히는 '땅에서 하늘을 향해 묻는 신학'을 펼친 현대 개신교 신학의 거장. 대표 개념으로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 '존재의 용기', '상관관계의 방법'이 있다.
5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 20세기 개신교 신학의 지형을 바꿔놓은 신정통주의(Neo-orthodoxy)의 창시자. 슐라이어마허의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경험신학에 맞서, 하나님은 인간의 경험이나 감정이 아닌 '위에서 아래로' 오시는 전적 타자(Wholly Other)라고 선언했다. 대표작: 『로마서 강해』(1919), 『교회 교의학』(13권). 바르트와 슐라이어마허의 긴장 속에서, 불트만은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을 끌어들여 제3의 길을 모색했다.
6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1884–1976). 칼 바르트가 '말씀'을, 폴 틸리히가 '문화'를 강조했다면, 불트만은 현대인이 성경을 읽을 때 마주치는 지성적 걸림돌을 제거하려 했던 '비신화화(Demythologization)'의 기수. 이 단락의 내용은 그의 사상을 필자가 요약한 것임. 참조: 『신약성서와 신화론』(CLC), 32–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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