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엥겔스 탄생 200주년 : 가족, 편지, 혁명 동무
<편집자 주>
‘엥겔스 탄생 200주년’을 맞아 올가을 예정된 평가와 계승에 대한 토론에 앞서 혁명 동무 맑스와의 마지막 우정을 보여주는 편지글, 맑스 저서에 대한 공적 책임을 다하자는 엥겔스의 글을 소개한다.
「가족·사유재산·국가의 기원」, 프리드리히 엥겔스
마르크스가 죽은 다음해인 1884년 10월 출간된 책은 미국 인류학자 모건(1818~1881)의 <고대사회>와 모건의 원시사회 저술의 문단을 인용한 마르크스의 노트에 의존했다. 엥겔스는 ‘루이스 H 모건의 연구에 비추어’라는 부제를 붙였다. 여성해방에 대한 사회주의 운동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다.
모건은 인간 사회의 네 가지 본질적 특성으로 발명과 발견, 정부, 가족, 재산을 든다. 엥겔스는 이들 특성을 가족, 사유재산과 국가 발전의 통합된 연결 주제로 삼았다. 여성, 가족, 노동계급 재생산에 대한 역사적·이론적·포괄적 분석을 시도한다. 그는 사유재산을 기초로 한 자본주의사회에서 가족이 가부장제와 연결된다고 봤다. 국가는 곧 억압·착취에 기반을 둔 자본주의국가라고 통찰한다. 앞서 모건은 재산을 ‘관리할 수 없는 권력’이라고 결론냈다.
엥겔스는 국가 출현에 대한 자신과 마르크스의 관심에 따라 ‘야만으로부터 문명으로 이행에 초점’을 맞추었다. 자본주의 대규모 역사적 영향 분석에 기반을 둔 마르크스 <자본>의 관점, 여성해방·인간해방 조건인 집합적 노동과정 참여를 통한 정치적 권리라는 엥겔스 관점이 일치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여성과 노동자에 비유하면 ‘실질적 사회평등’에 대한 투쟁을 통해 두 집단은 법적으로 평등권을 가져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자본에 의한 착취가 철폐되고 가사노동이 공공산업으로 전환될 때 진정한 남녀평등이 이뤄진다는 분석은 엥겔스의 탁월한 업적으로 꼽을 만하다. 가족과 국가를 지배와 착취 이데올로기로 삼는 한국 자본주의 현실을 비판하려면 필요한 책이다. 올해는 엥겔스 탄생 200주년이다. 마르크스에 가려진 그를 기리려면 읽어야 할 책이다.
「오세철의 내 인생의 책」, 2020년 1월 14일, 경향신문
「알제리에서의 편지」, 칼 마르크스
병마에 고통받던 마르크스는 1883년 3월14일 영원한 혁명 동무 엥겔스 곁에서 눈을 감았다. 65세 때다. 서한집은 사망 한 해 전인 1882년 봄과 여름, 요양하러 간 알제리와 리비에라에서 딸 예니와 사위 롱게 등 가족과 엥겔스에게 쓴 편지를 모은 것이다. 질베르 바디아는 서한집의 해설에서 마르크스의 심경을 헤아리며 “끝마쳐야 할 많은 일들에 대한 감정으로 그냥 산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탕탈(Tantal)의 욕망에 의해 고통당한다는 것을 우리의 마르크스는 절대 수용하지 않았으리라”고 썼다.
편지 대부분의 수신자는 엥겔스였다. 두 혁명가의 인간적 관계가 편지에서 드러난다. 햇볕 때문에 예언자 같은 수염과 모발을 제거했다(1882년 4월28일)는 일상·일신의 변화를 알렸다. 자신을 괴롭히는 병, 죽음 같은 슬픈 상념에 관한 암시를 딸들에게는 하지 않았다. 그 고통과 상념은 오직 둘도 없는 동무 엥겔스에게만 숨기지 않고 토로했다.
엥겔스에게 쓴 마지막 편지에서 “자연스럽게 인간은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영원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매사에 무관심해진다네”(1882년 5월8일)라고 적었다. 마르크스는 항상 편지를 끝내면서 ‘자네의 늙은 무어인’이라고 적었다. 엥겔스는 12년을 더 살며 마르크스가 남기고 간 저술들을 완성하는 일에 몸과 마음을 바쳤다.
번영하는 자본주의의 끝자락에서 파리코뮌을 보았던 마르크스는 1914년 제국주의 전쟁의 시작으로 쇠퇴하는 자본주의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혁명가나 노동계급이나 자신들의 생물학적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다. 마르크스의 마지막 서한집은 병들어 고통받는 위대한 혁명가의 인간적인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다. 혁명의 객관적·필연적인 과제를 다시 곱씹어보는 계기이기도 하다.
「오세철의 내 인생의 책」, 2020년 1월 13일, 경향신문
「알제리 체류의 마르크스」, 질베르 바디아
칼 마르크스는 1882년 초 마르세이유 항에서 출발하여 알제리로 가 그곳에서 3개월가량 머물렀으며, 5월 4일 프랑스로 되돌아와 프랑스 리비에라에서 한 달을 보냈다.
이 여행의 동기는 순전히 건강상의 이유에서다. 마르크스는 그의 가벼운 늑막염상태가 어느 정도 회복되고는 있었으나, 기관지가 좋지 않은 상태에서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런던의 여러 의사와 그의 친구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알제의 햇볕이 마르크스가 전에 머물었던 와이트 섬의 기후보다 좋아 그의 병세의 회복과 완쾌를 효과적으로 빠르게 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런던에서 마르크스를 돌보고 있던 엥겔스와 의사 돈킨은 마르크스가 알제에 가도록 강력히 권고하였다. 당시 영국에서 프랑스 리비에라처럼 요양지로 이름난 곳이 알제리였다. 1865년과 1870년 사이에 천명 이상의 영국인들이 겨울 시즌의 몇 주 또는 몇 달을 알제리에서 보냈다.
1882년 겨울은 특별히 포근하지도 않았고, 3월 날씨치고는 비가 계속 내렸다. 항해조건이 그의 건강상태를 더 나빠지게 하였다. 3월 6일 피를 토해 내었고, 각혈은 일주일동안 멈추지 않았었다. 유능하고 적극적인 의사 스테판이 마르크스의 병의 재발(늑막염)을 진단하였는데 또 다시 진료를 받을 수 있을는지, 마르크스에게 산책을 하지 못하게 하고, 독서와 담소도 줄이라고 권고하였다. 마르크스가 도착하자 즉시 오랜 산책을 한 페르메에게 마르크스가 중환자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고 의사선생은 충고하였다.
이와 동시에 마르크스의 지적활동은 거의 중단상태에 있다. 일은 하면 안 되고 신판을 내기 위한 “자본론”의 손질은 엄두도 낼 수 없다.
그의 서신교류는 직계가족과 친구인 프리드리히 엥겔스에 한해서 2월말부터 6월까지 3개월에 걸쳐서만 이루어졌다. 마르크스는 그의 곁에 손자들을 두고 싶어 했고, 그들의 놀이 광경에서 재미있는 경탄과 놀람의 연극에도 참여하는 상상을 하고 제일 큰 외손자 죠니(장래의 쟝 롱게)에게 특별한 애정을 나타냈다. 그는 늘 초조하게 세 딸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특히 9월에 딸을 출산할 예니(롱게)에게 주어질 가사노동과 그녀에게 딸린 네 아이의 교육 등에 대해서도 안쓰러워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오래전부터 마르크스 가족의 일원이었다. 절친한 친구로 베푸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고, 마르크스의 각종 병 치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마르크스가 건강의 실상을 들어내려고 노력하지만 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그의 건강에는 이상 징후가 없다고 얘기하였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두 번씩이나 엥겔스에게는 듣기 거북한 말을 내뱉고 있다. 너희들을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까지도 너희들은 희생시킬 수 있어, 회복기에 있는 환자에게 이것보다 위험한 것은 없지! 라고.
그의 친구에게 무엇이 불만인가? 엥겔스가 자신을 알제리로 보냈고, 프랑스 리비에라에 가서 지내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마르크스의 불만은 근거가 희박하다. 어느 누구도 그 해 알제의 봄 날씨가 그 정도로 엉망일 줄은 예측할 수가 없었다. 더 나아가 본래 겨울철 프랑스 리비에라 날씨는 대개 건조한데 1882년은 이상한 해로 마르크스가 이곳에 갔을 때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두 번째 불만은 엥겔스(사위인 라파르그에게도 같은 불평을 하고 있다)가 마르크스 보고 하루 종일 거실이나 서재에 있지 말고 좀 오랫동안 걷기도 하고, 바깥공기도 마시고 하라고 종용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마르크스는 자기가 뭘 하든 내버려 두라는 것이었다. 10년 전 마르크스의 영애가 쿠겔만에게 보낸 편지(1870년 11월 19일)에 다음과 같이 썼다. 아빠(마르크스)의 건강이 보통 생각하는 것보다 모든 면에서 양호합니다. 이는 무엇보다 우리의 엥겔스 박사가 신경을 써준 덕택이지요… 그는 무어인(마르크스의 별칭)에게 장시간 걷게 함으로써 약 이상의 더 좋은 처방을 한 것입니다. 라고.
엥겔스에게 한 마르크스의 불평불만을 보면서, 1차 세계대전 때 로자 룩셈부르크가 옥중에서 쓴 서신 중 다음과 같은 한 구절을 생각하였다. “지난날 나는 심술궂고, 불행하고, 그리고 병들었다. 이를 거꾸로 배열해보면 어떨까? 나는 병들었고, 불행했으며, 고약했을까?” 그렇다. 마르크스가 생애 처음으로 그의 친구에게 부당한 태도를 보이는데, 이는 그가 중병을 앓고 있기 때문이리라.
「알제리에서의 편지」, ‘질베르 바디아의 해설’ 중에서
엥겔스에게
친애하는 프레드,
이 엽서에 앞서 자네에게 전보를 쳤었다. 이 엽서가 쓸데없는 걱정을 줄 것 같아서 염려된다. 사실 별로 중요치 않지만 일련의 좋지 않은 일들(항해를 포함해서) 때문에 2월 2일 알제 도착했을 때 뼈 속까지 얼어 내 몸이 많이 상해있었어.
1881년 12월 날씨는 엉망이었으나 1월은 화창했다고 하네. 공교롭게도 2월부터 날씨가 춥고, 습기 차 제일 추웠던 2월 20, 21, 22일 3일간 아주 혼이 났다네, 불면, 식욕저하, 심한 기침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할 지경이고, 덩치 큰 돈키호테처럼 심한 우울증으로 이리저리 헤매고 있다네.
쓸려고 가져온 경비로 다시 유럽으로 돌아갈까도 생각했는데, 선실에서 보낼 두 밤 동안 지겨운 기계소리 때문에 머리가 깨질 것 같은 것을 상상하면! 이런 날씨를 피해 사하라 사막 초입에 있는 비스크라로 곧 바로 떠나볼까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나 연락관계나 교통편을 생각해보면 이런 새 여행이 7~8일은 잡아먹고 아주 고통스러울 것 같아 여행 시 여러 어려운 점을 알고 있는 사람들 얘기로는 비스크라에 도착하기도 전에 사고*가 날 경우 한 순간이라도 부상자에게는 여간 불편한 게 아니라고 그러네!
2월 22일 오후가 되자 온도계가 따뜻한 날씨를 일러주고 있었지. 내가 도착하던 날 마음씨 좋은 페르메 판사가 도와줘 함께 알제 동쪽* 성벽 외곽 언덕에 위치한 빅토리아 팬션 호텔로 짐을 꾸려 올라가면서 오리엥 그랜드 호텔을 떠났어. (글쎄 이 호텔에 밥 맛 없는 급진주의 철학자 애쉬턴 딜키가 묵고 있었고, 영향력 있는 신문 「프티콜롱」”이나 알제 지역신문의 종사자*들, 모든 영국인은 귀족이라는 인상을 주며 브래드로그에서 왔다는 귀족들도 투숙하고 있다네). 내 방 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광경, 지중해로 둘러싸인 알제항만, 언덕을 타고 계단식으로 늘어선 빌라들 (언덕아래 계곡이나 언덕위의 협곡에 자리 잡고 있는)*. 더 멀리는 많은 산들이 보이는데, 마티푸산 넘어 카빌리산맥의 눈에 쌓인 쥬르쥬라*산 정상이 보인다네(앞서 얘기한 것처럼 모든 산은 석회질 성분이라네). 아침 8시에 보는 이러한 파노라마 이상 더 좋은 경치가 어디 있겠나 싶다. 공기, 초목, 유럽 아프리카의 경이로운 혼합 등등. 매일 아침 10시나 9시에서 11시 사이 내 방* 위쪽에 있는 계곡과 언덕 사이를 산책하네.
이 모든 생활에 먼지는 빠지지 않지. 2월 23일과 26일 사이에는 화창한 날씨였으나, 지금은 여기서 폭풍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천둥 번개가 없이 한바탕 소란만 피우는 바람이 닥치고 있다네.(여기 알제에서도 내가 입고 있는 옷은 와이트섬에서 입었던 것과 다르지 않네. 지금까지 빌라 안에서 얇은 외투를 코뿔소 가죽 옷으로 바꿔 입었을 뿐, 그 외에 현재까지 아무것도 변한 게 없어.) 원주민들도 그 위력에 놀라 위험하고 할퀴는 날씨라고 부른다네(2월 27일부터 9일 정도는 계속 될 거라고). 그러니까 지금까지 3일만 좋은 날이었어. 이런 조건에서 내 기침은 고약한 가래*와 함께 갈수록 더 심해졌어. 내 몸 왼쪽 부위는 병의 악화에도 별 이상이 없었는데 요즈음은 잠도 설치고, 정신적으로 혼미한 상태에 있어. 그래서 스테판 의사를 불렀지(알제에서 최고의 의사라네). 어저께와 오늘 두 번에 걸쳐 나를 진찰하였다네. 무엇을 해볼까?
그가 해준 처방전으로 약을 사러 알제시내로 가는 중이야. 청진기로 자세히 검진한 후 이 의사의 처방전은 다음과 같다.
1. 솔을 이용하여 칸다지스 콜로디온*을 바르고, 2. 적당한 양의 물에 탄 비산염 소다를 식사할 때 스프 한 숟가락 정도로 해서 들고, 3. 밤에 기침이 심할 경우*에만 코데인과 물약*을 섞어 스프 한 숟가락 정도와 먹을 것. 8일후 다시 왕진 오겠다고 했네. 나보고 체력단련은 적당히 하라고 하였네. 소일거리의 독서 외에는 진정한 의미의 지적활동은 아무것도 못하고 있네. 상태가 안 좋아 예정보다 빨리(아니 오히려 늦게)런던으로 돌아 갈 수가 없을 것 같아! 환상을 가지거나 장밋빛으로만 사물을 보아서는 안 될 것 같네.
편지 쓰는 것을 멈춰야 할 것 같네, 알제 시내 약국에 가야 하기 때문에.
그건 그렇고 소수의 사람들만이 나보다 더 감정표현을 싫어한다는 것을 자네는 알고 있지. 내 아내에 대한 추억을 내 머릿속에 간직하고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 하는 것이겠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어! 런던의 내 딸들에게 이 늙은 닉에게 편지쓰라고 일러주게. 애비가 먼저 편지를 보내기를 기다리지 말고.
인간창조라는 주요한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펌스는 어디 있나? 내 안부를 전해 주게.
헤렌, 무어 셜머, 모두에게도.
나의 고우에게
자네의 무어인
아참! 나의 친애하는 돈킨 의사에게처럼 스테판 의사선생에게 줄 코냑*을 잊지 마!
1882년 3월 1일
빅토리아 호텔 팬션, 알제시 봉아퀘이대로 상 무스타파로
「알제리에서의 편지」, 칼 마르크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