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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년전 대학공부 한답시고 보따리 싸서 뭍에 나왔을 때 대학친구들은 사투리가 묻어있는 말씨와 촌스러운 행동때문만이 아닌, 단지 출신이 제주도라서 장난 섞인 농담을 해댔다.
“한라산 백록담에서 공차면 바다로 그대로 빠지냐?”, “제주도에는 전기도 안들어 오지?”, “제주도에선 뒷처리를 돼지가 다 해결해준다며?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가끔씩은 진짜 모르는지 진지하게 질문하는 친구도 있었다.
“제주도에 버스가 다니냐?”, “해안을 따라 길은 다 연결되었느냐?”, “포장은 되어 있느냐?”
처음엔 이 질문 역시 농담으로 생각하여 아무렇게나 대답했는데, 한 친구가 집요하게 질문하는게 놀리는 것으로 생각되어, “그래 다 되어 있다. 넌 고향이 어디길래 유치하게 그딴 걸 질문하냐?”고 하자, 몇 번 멈칫 거린 후 울릉도라고 하였다.
에라이, 촌노무자슥!!
아무렴 비교할 것을 비교해야지, 지도만 봐도 알텐데.. 이 녀석은 제주도를, 버스도 없고 해안선따라 도로도 연결되지 않은 울릉도와 비교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 친구가 제주 200km 울트라마라톤에 참가하여 30여시간을 해안도로 따라 달려 보기라도 하였다면 제주도 땅덩어리가 결코 작지 않다는 것과 해안도로 따라 펼쳐지는 풍광을 보면 장쾌한 기분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예측불허의 날씨까지 더해진다면 아마 까무러쳐 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제주도에 살았던 시간보다도 훨씬 더 많이 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고향은 언제나 그리움의 대상이다. 내 기억은 그저 20대 초반의 모습으로 고향을 그리고 있지만 제주도는 내가 생각하는 그 모습보다도 2~30년은 앞서서 변하고 있다.
더 늦기 전에, 아직까지는 튼튼한 다리가 버텨주고 있을 때 내 고향땅을 돌아보고 싶다.
시간의 흐름을 세월이라 한다면, 세월의 지남을 추억이라 해야겠지. 가슴 속에 남기려 하는 시간은 추억이 되어 생의 마지만 순간까지도 이 시간을 기억하고 싶다.
해안가 도로를 따라 뿌려질 내 땀방울과 거친 숨이 쏟아져 나올수록, 나는 절절하게 이 시간의 내 고향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제주울트라마라톤을 신청하고 나서 대회가 있기까지 소풍날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가슴이 콩닥거리며 설레인다.
그러나 그 기다리던 소풍날에는 여지없이 비가 오듯이 국토횡단 때와 비슷한 기상상황이 연출되었다. 작년 추석 연휴 때, 강화도에서 출발하여 김포를 지나자 지리하게 비를 뿌렸던 것과 마찬가지로 4월 1일, 새벽 네시 출발당시부터 곧 쏟아질 것같은 하늘은 구엄리를 지나자 간간히 빗방울을 뿌리며, 악천후가 전개될 것을 예고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외도에서 애월까지는 익숙한 곳이라 지나치는 곳마다 어느 한 곳 정이 들지 않거나 추억이 없는 곳이 없다. 그 추억의 클라이맥스는 가문동의 허름한 슬레이트집, 30년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 하나없는 중학교 때 첫사랑이었던 그 여자아이의 집(15km 지점)을 지나칠 때였다.
중학교 2학년 때 우물가에서 물을 길던 큰 눈망울의 1년 후배를 짝사랑한 후부터 가끔씩 늦은 시간까지 서성거렸던 그 기분으로, 바로 그 집앞을 지나가고 있노라니 마치 30년전의 그 모습으로 그 아이가 나를 보기 위하여 집 밖으로 튀어 나올 것만 같다.
8시경, 30km 지점을 지나자 고내봉도 보인다. 4년전 교통사고로 비명횡사하여 젊은 나이에 저 세상으로 갔지만 살아오면서 가장 존경하고 따랐던, 산악인이자 철학자이면서 로맨티스티인 홍성민 선배가 영면하고 계신 곳이기도 하다. 홍선배와 함께 백두대간과 정맥줄기를 타고 넘던 그 시절이 사무치게 그리워진다. 그 선배를 생각할 때마다 간간히 뚝뚝 떨어지는 빗방울과 찬 바람결에 온몸에 닭살이 돋아나는 것처럼 머리털이 곧추서고 코가 시큰거리며 눈물이 고인다.
9시가 되자 강한 바람과 함께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비바람은 대각선으로 내 얼굴을 할퀴며 눈조차 못뜨게 하고, 발목에 쇠덩어리를 메달은 것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
정확하게 6시간만에 50km CP에 도착하지만, 고개를 숙여서 진행하여야 하기 때문에 그 진행은 더욱 힘들다. 이 지점부터 모슬포까지는 바람의 강도와 빈도가 제주도의 다른 여느 지역하고는 다르다.
바람 때문에 밭이라고 해도 흙보다는 차라리 돌이 더 많아 오죽하였으면 “보름코지 빌레왓디”(바람이 지나가는 길목의 돌밭이라는 제주도 방언)라고 하였을까? 이 비바람이 시련일 수도 있지만 척박하기 그지없었던 그 땅을 유일한 삶의 터전이라고 살아온 내 부모님과 조부모님의 치열했던 삶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불끈 힘이 솟는다.
나무가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꺾여있다. 그래서 내 누이에 이어 어머니와 할머니가 강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대정(모슬포) 여자가 앉았다가 일어난 자리는 왜 잡초도 자라지 않는다고 했는지 이해할만 하다.
10시 20분, 출발지점으로부터 52km 지점의 차귀도 해안가의 어느 식당에서 성게국을 아침겸 점심삼아 식사를 하였다. 식사를 하는 동안 스트레칭도 하고, 물도 보충하면서 다음 레이스를 대비하여 시간을 절약하여야 하지만 많이 지체되는 느낌이다.
11시경 다시 100km CP를 향하여 진행하여 보지만 수월치가 않다. 산방산 앞길을 걸어올라 비탈진 내리막을 시간을 아끼기 위하여 조금 빨리 달리는데, 78km 지점에 이르러 평촌마라톤클럽 동호회원인 종열님(227번)이 갑자기 오른쪽 발 복숭아뼈 아래 인대에 통증을 호소하기 시작한다.
액체파스를 꺼내 맛사지하며 문지르고 진통제를 먹게 하였지만, 과연 완주할 수 있을지 의문이 생긴다. 120km 이상을 더 달려야 하는데, 그 고통이 어떠한 것인지를 잘 알고 있다. 이제부터는 한걸음 한걸음이 송곳으로 살덩이를 푹푹 찔러대는 것 같은 고통의 연속일 것이다.
지난 여름 국토횡단 때 80km 지점에서 근육통이 나타나 그 아픈 다리를 질질 끌며 120km 이상을 달려갈 수 있었던 것은 스포츠맨쉽도, 체력도 아닌 그 알량한 자존심이었다.
206km 지점까지라도 나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이 자존심이라니.... 이제부터 종열님이 어떻게 버틸 지 두고 볼 일이다.
16시, 오랫동안 나를 괴롭히던 비바람이 잦아 들며 청정한 안덕계곡은 하얀안개를 모락모락 토해낸다. 서귀포로 향하는 널다란 길에는 벌써 어둠이 내리면서 안개는 요리저리 떠돌며 주로위를 방황하고 있었다.
서귀포시에 이르자 천지연폭포의 물줄기를 가로지르는 다리가 웅장하게 버티고 서 있고, 그 밑으로는 시원한 물줄기가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바다로 향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걱정이 되는 지 전화를 하셨다.
아마도 이 시간 이런 날씨에 밤새도록 뛰고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집사람에게도 전화가 왔다. 두사람이 상상하는 것은 가끔씩 반대일 경우도 있다. 물론 두 사람 모두 제발 무리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같다는 것을 내 어찌 모르겠는가?
제한시간을 54분 남긴, 18시 6분에 100km CP에 도착하여 시간확인하고 천막 안으로 들어갔지만 당연히 있을 것이라 생각한 가방은 여전히 출발지점의 팔레스호텔에 있다는 것이 아닌가?
이런 낭패가 있나?, 사타구니 쓸린 부위를 치료하고 양말을 바꿔신고 롱타이즈와 긴팔로 교체하여야 할 뿐만 아니라 불빛이 약한 해드렌턴을 교환하여야 하는데...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제는 어떻게든 현재의 상태를 최대한 완화시킬 수밖에 없다.
밧데리가 거의 방전이 된 상태에서 헤드랜턴을 다시 착용하였다. 가로등이 없거나 불빛이 없는 곳에서만 사용하도록 하고, 100km 이후의 레이스에 돌입하였다.
아직 배는 고프지 않아 남원을 지나 저녁 9시경 식사를 하게 된다면 늦은 밤과 새벽까지는 버틸 수 있기에 그 즈음해서 식사할 수 있는 장소가 나타나길 바랐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남원에 도착하자 복통과 매스꺼움 증상이 지속되고 식욕도 생기지 않았다. 마을 어귀의 마트에 들러 소화제와 함께, 스프로 식사를 대신하였다.
국토횡단 때 만났던 제천의 여장부 최란씨가 마트 바닥에 앉아 요기를 하며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아들이 군복무 중이라 하는데, 도대체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그 활력은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하다.
종열님도 해병대 출신답게 아픈 발목에 압박붕대를 칭칭감고 그들의 신조대로 “악과 인내”를 곱씹으며 다행히 잘 달려준다. 130km 지점에서 늦은 시간임에도 자꾸 걸려오는 전화 때문에 종열님이 달릴만하면 멈춰서자 앞으로 가서 적당한 지점에서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불가피하게 걷다가 뛰다가를 반복하는데, 그러다보면 자칫 내 페이스를 놓칠 수 있기 때문에 혼자서 달릴 수 있을 때 달려 보기로 했다. 다행히 종열님도 큰 시간차없이 따라 붙었다. 170km지점까지 이런 방식으로 달리다보니 시간절약에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성산에 가까워지자 제주크라이슬런 회원들이 물과 쵸코파이 등으로 요기를 하게 하고 여기저기 맛사지를 해주고 있었다. 10여분간의 긴 휴식을 취하고 성산일출봉 14km 전 교차로에 이르러 ?F은 쉼을 한 후 전혀 다른 느낌이 드는 편도 1차로의 호젓한 길로 접어들었다.
어둠이 깊어 질수록 새벽이 가까워진다는 그 사실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새벽을 앞둔 어둠은 두껍게 쌓여만 가는데. 가로등 불빛조차 없고 밧데리 잔량이 얼마남지 않은 해드렌턴의 희미한 불빛에 의지하여 달려온 피로가 눈으로 몰린 걸까? 눈가가 시리게 아파오며 게슴치레 눈이 감겨진다.
그리고 150km CP를 불과 1~2km 남기고는 오른쪽 엄지발가락과 발바닥의 상태가 썩 좋지 않은 느낌이 왔다. 아마 이번에도 엄지발가락은 여지없이 피멍이 들었을 것이다.
충분하게 테이프로 보강을 했음에도 젖은 양말을 오랫동안 신고 있어 테이프가 둘둘 말리며 마치 돌맹이가 신발안에 들어가 울퉁불퉁한 느낌이 전해지며 발가락에 충격을 더 주는 것 같았다.
100km부터 150km 지점까지는 8시간 38분이 걸렸다. 새벽 2시 44분, CP가 있는 식당에서 전복죽을 주문하자 이내 종열님이 도착한다. 밀려드는 졸음 때문에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고 싶다고 했지만 말렸다. 3시 30분을 넘겨 이제 마지막 10시간을 꽉 채워 달려가야 하기 때문에 잠을 잘 수는 없었다.
이 밤이 지나면 나는 하루라는 시간을 내 생애 보태게 되고 여느 날과 달리 이날을 오랜 기억 속 추억으로 남아있게 될 것이다. 아름다운 추억을 위해 힘들어도 참아야 한다.
잠이 쏟아지더라도 어느 정도 비몽사몽 걷다보면 또 정신이 말짱하게 회복되기 경우가 많기 때문에 160km 지점까지 또 걸었다. 2시간이 훨씬 더 지난 것 같다. 바로 뒤에서 종열님도 꾸벅꾸벅 졸며 따라오고 있었다. 해안가 도로가 소나무 숲길과 같이 포근한 느낌을 준다. 그 순간 다리의 고통도 없는 것 같다. 졸다가 옆으로 꼬꾸라지며 깜짝 놀라 넘어지지 않으려고 투다닥 뛰어나가기도 한다.
어둠의 끈질긴 횡포를 뿌리치자 세화바닷가는 그제야 세상을 열어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해오름의 벅찬 연출도 없이 어제 이 시간과 동일한 기상상황으로 변하며 비바람이 발악하기 시작한다.
170km 지점에서도 5분 정도를 기다리자 종열님이 나타났고, 이제부터는 종열님도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충분히 완주가 가능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에 먼저 간다고 하고는 앞서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 즈음 회사 마라톤 동호회 회원이 제주지사로 발령이 나서 제주도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응원차 오고 싶다고 하며, 25km를 남긴 김녕근처를 지나자 전화가 왔다. 아직 20여킬로를 더 가야하기 때문에 집에 들어가라고 함에도 굳이 동반주를 하겠다고 한다.
자칫 연맹에서 오해할 수도 있으니 떠나라고 하자 사진 몇장을 찍고는 굉장히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한참을 제자리에 서서 쳐다보고 있었다. 그 편치 않은 심정을 이해할 만하다. 같이 땀흘리며 고생했던 회원이 이렇게 멀리 떠나와 고생을 하는데, 같이 거들지도 못하고 그냥 돌아서야 하는 것이 마음의 부담이 많이 되는 모양이다. 땀과 비에 절은 흉측한 몰골은 더욱 더 그 친구의 마음을 아프게 했을 지도 모르겠다.
오른쪽 발바닥과 왼쪽 발목의 통증이 심하게 느껴진다. 바람은 숫제 나를 바다로 빠트릴 양 모든 에너지를 쏟아 내고 있었다. 종열님에게 빌린 옷만으로는 그 한기를 막을 수가 없다. 겉모양이 이상하더래도 어제 비에 젖은 반팔티를 그 위에다 걸치고, 비옷도 입었다.
9시경, 함덕해수욕장을 지나 어느 분식집에서 영업을 시작하지는 않았는지 김밥을 해 줄 것을 부탁하자 건성건성 만들어 준다. 입맛이 없는 것인지 밥맛이 없는 것이지 밋밋하고 먹기가 곤란하다. 몇개를 입속으로 집어넣어 물과 함께 억지로 삼켰다.
이제 15km가 남았다. 속력을 내 보기로 하였다. 이상하리만치 몸이 가벼웠다. 출발할 때 속도인 6~7분주로 달리기로 하였다. 하긴, 종열님과 같이 움직이면서 많이 먹고 많이 쉬어서 남아있는 에너지는 충분한 것 같다.
삼양을 지나 화북에 이르자 모교인 오현고등학교가 보인다.
학교앞에서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격려를 한다. 나도 모르게 “제 모교입니다”라고 하며 얘기하는 순간, 갑자기 슬퍼진다.
3년이란 짧은 시간이긴 하지만 애증이 많이 남아있는 곳이다. 십대후반 얼룩무늬 교련복에 까까머리를 한 채 M1소총을 둘러매고 교련선생의 워커발에 얼굴을 차이며 군사훈련을 받던, 그런 때가 있었다. 오히려 ROTC 시절보다도 더 잔혹하였지만 그때가 그리워 지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모교는 많이 변해 있었다. 옛날의 그 건물은 그대로이지만 거창한 대문이 생겼고, 외벽도 모두 철거되어 있었다.
교대를 지나 건입동에 이르자 둘째 제수(민영엄마)로부터 전화가 왔다. 피니쉬라인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나타나지 않자 걱정되는 모양이다. 탑동에 거의 다왔다하고 얘기하는데, 중앙로가 아니고 바로 산지부두로 빠져나가는 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동문로타리와 중앙로부근은 오래전부터 익숙한 곳이라 너무 자만한 것이 원인이었을 것이다. 바닥을 확인하지도 않고, 내 판단대로 달린다는 것이 그만 한참을 우회하고 말았다.
31시간 52분 54분의 긴 여정은 끝났다. 141명이 참가하여 85명이 시간내 완주하였고 나는 25등에 해당한다고 한다. 이상하리만치 마음은 평정심을 잃지 않고 있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지지도, 격한 감정이 밀려오지도 않는다. 기분좋은 느낌이 잔잔하게 다가온다.
종열님도 33시간 7분으로 고통스런 여정을 마쳤다. 80km 지점에서 도저히 헤쳐 나갈 수 없을 것 같은 절망감 속에서도 두려움을 이겨낸 의지에 박수를 보내며, 결국 그 난관을 뚫고 행복한 미소를 짓는 것을 보니 나 또한 행복해진다.
연회장에서 민아엄마, 민영엄마 그리고 어린 조카들과 음식을 들고 맥주두잔을 걸치자 주체할 수 없는 졸음에 빠져든다.
이제 제주도 일주 마라톤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이다. 그동안 주말을 반납하고, 남편을 도와준 규민이 엄마와, 아빠를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규민이, 병민이에게 고맙고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그리고 큰 아들이 50이 다 되어 가는 나이에 너무 운동에 몰입하여 몸을 상하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이것저것 준비하고 챙겨주신 어미니께도 역시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끝>>
첫댓글 아빠 수고하셨어요.
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내 개인적인 일만 챙기느라 마중 못나간게 내내 좀 걸리네요. 수고많았습니다.
이제야 얘긴하는 건데, 니 우비 갖고 나갔다가 다 찢어져서 버렸다. 우짠다냐?
글을 읽다보니 마음이 찡해지네요.. 무사히 잘 마시셨다니 다행이네요.. 그날 날씨가 안좋아서 걱정했는데 제주도도 날씨가 별루였나보네요..
그냥 별로인 정도가 아니였지...
이글을 일부 수정, 보완하여 부산아마츄어마라톤연맹의 마라톤 참가후기 공모에 출품했는데, 4등으로 입상했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