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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6. 묵상글 들 (연중 12주 금요일-우리의 사랑이 구원의 사랑이 되도록.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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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6.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연중 12주 금요일-우리의 사랑이 구원의 사랑이 되도록
마태오 복음 5장에서부터 7장은 산상수훈, 곧 산 위에서의 가르침입니다.
이제 산에서 내려오신 주님은 사람들의 구체적인 필요에 응답하시는
기적을 공생활 내내 행하시는데 오늘 나병 환자의 치유가 그 첫 번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무엇을 하시든 다 사랑이십니다.
가르치심도 사랑이요 치유도 사랑입니다.
이 두 사랑을 구분하는 것이 쓸데없는 짓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데
가르침과 치유 중 어떤 것이 주님께서 더 주시고자 하신 사랑,
그러니까 우리에게 더 유익하다고 생각하신 사랑일까요?
마태오 복음을 보면 공생활 후 제일 먼저 하신 것이 산상수훈이고
그런 다음 치유의 기적을 일으키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이 마태오 복음이 생각하는 유익함의 순서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시급성으로 보면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내고,
지금 너무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을 치유해주는 것이 더 필요한 사랑이겠지만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인생을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주는 것이 더 필요하고 유익한 사랑이 아닐까 생각이 된다는 얘기입니다.
아무튼, 주님께서는 공생활 내내 많은 사람의 고통을 지나치지 않으시고
치유해주시는데 오늘 제일 먼저 나병 환자를 고쳐주시는데
그렇다고 모든 사람을 치유해주신 것은 아닙니다.
이것을 놓고 왜 누구의 병은 고쳐주시고, 누구의 병은 고쳐주지 않으시는지
공평치 않다고 공평성의 차원에서 얘기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무병장수케 하는 것이 주님 사랑의
최종 목적이요 완성이라면 정말 모든 사람을 치유해주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사랑의 최종 목적이요 완성은
우리의 전인적이고 신앙적인 구원이지요.
그래서 주님의 모든 치유는 우리가 치유를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고,
그보다 먼저 병을 통해서도 하느님을 만나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주님께서 의사와 다른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께서 하느님을 만나게 해 주시지는 않고 병만 고쳐주신다면
일반 의사와 다른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늘 하느님을 만나게 하는 것이 목적이십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날 우리 신앙인들이 반성해야할 점이 있습니다.
요즘 들어와서 그냥 직업적으로 의사생활을 하고
돈벌이를 위해 의사생활을 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는 가운데
우리 신앙인들 중에서 숭고한 사랑을 실천하는 분들이 있지요.
내일 저는 우리 프란치스칸 의료인들과의 만남을 할 예정인데
이분들은 매달 한두 차례 이주민들을 위해 무료의료봉사를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분들이 만일 아무리 숭고한 사랑을 실천할지라도
그것이 하느님을 만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사랑에 참 아쉬움이 많지요.
그런데 의료인들이 그렇다면 영혼의 의사라고 할 수 있는 저와 같은 성직자,
수도자들은 어떠해야겠습니까?
성직자들이 신자들의 구원을 생각지 않고 그저 사목만 한다면,
수도자들이 신자들의 영성생활은 도모하지 않고
그저 자기의 영성생활만 신경쓰고 더 나아가 수도자답지 않게 산다면
아무리 독신생활을 하고 하느님 사랑한다고 해도 자기만족일 뿐일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랑이 그저 인간적인 사랑에 그치지 않고,
하느님을 만나게 하는 구원적인 사랑이 되어야 함을
주님의 치유 기적 안에서 배우는 오늘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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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6. 이영근 신부님.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태 8,2)
오늘 <복음>은 나병환자의 치유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의 치유를 통해 예언자 ‘엘리사의 활동’을 완성함으로써(2열왕 5,1-27),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드러내십니다.
나병환자는 <레위기>(13,45-46)에 따르면, 옷을 찢어 입고, 머리를 풀고, 윗수염을 가림으로써 자기가 죽은 사람과 다를 바 없음을 드러내야 했고, 공공장소나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에 나타날 수도 없었고, 다른 사람과 접촉할 수도 없었습니다(민수 5,2-4). 그래서 혹시 누군가가 저기에게 접근해 오면, “나는 부정한 사람이오. 나는 부정한 사람이오.”(레위 13,45)라고 외치면서 접근하지 못하도록 경고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오늘 <복음>에서는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피해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가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구약의 법과 예수님의 복음의 차이를 극렬하게 엿볼 수 있습니다. 곧 구약의 율법은 나병환자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할 뿐 그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율법의 한계라 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에서는 나병환자이기 때문에,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 와서 치유 받습니다.
이처럼, <복음>은 우리가 죄인이고 불결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예수님께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병들었고 죄인이기에 때문에 오히려 감싸주시고 치료해주십니다.
<복음>은 이 처럼, 규정을 제시하기보다, 사랑과 호의를 제시합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청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태 8,2)
이는 주님의 치유의 능력, 곧 권능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능력의 행사는 자신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달려있기에, 오로지 주님의 처분에 온전히 의탁한다는 뜻입니다. 나아가, 당신의 원의에 순명하겠다는 뜻입니다. 마치 겟세마니에서의 예수님께서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신 대로 하십시오.”(마태 26,39) 라고 하신 것처럼,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도 자신의 뜻이 아니라 주님 뜻에 순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한다면’ 이라고 하면서, ‘나의 바람이 아니라 당신의 바람이 이루어지소서!’ 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하는지요? 우리는 진정 나의 바람을 하느님께 원하고 있는지요?
아니면 하느님의 바람이 나에게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병혼자를 만지셨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나병환자를 만지거나 접촉하면 부정을 타게 됩니다(레위 14,46).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만지셨습니다. 예수님의 손은 구원의 힘을 드러내며, 그분의 신체적 접촉은 우정과 사랑을 드러냅니다. 우리 주님 예수님께서는 불결한 나병환자와 직접 접촉하심으로써, 그에게 사랑을 베푸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정을 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사랑은 부정을 피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져 깨끗하게 하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율법을 완성하시러 오신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규정보다도 율법의 정신인 사랑을 더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그리하여, 당신께서는 불결함에 더럽혀지지 않는 “거룩하신 분”이심을 드러내십니다. 곧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십니다. 당신이 “구원자”이심을 드러내십니다. 마치, 호렙산의 불꽃 속에서도 타지 않는 떨기나무처럼(탈출 3,2), 아기를 낳으면서도 동정성을 잃지 않은 성모님처럼, 불결한 이를 만지면서도 불결해지지 않으시고 오히려 불결한 이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참으로, 당신께서는 거룩하신 분이시오, 사랑이신 우리, 주님 구원자이십니다. 아멘.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태 8,3)
주님!
불순함으로 제 온 몸이 부스럼투성입니다.
죄와 상처로 속이 문드러지고, 마음이 병들었습니다.
불결하기에 저는 망설이지만, 당신은 오히려 불결하기에 다가오라 하십니다.
죄인이기에 저는 숨지만, 당신은 오히려 죄인이기에 용서받을 대상이라 하십니다.
당신께서 원하신 바를 이루소서.
제가 하고자 한 바가 아니라, 당신이 하고자 한 바를 이루소서!
저의 희망이 아니라, 당신의 희망을 제게서 이루소서.
당신이 원하신 것을 제가 원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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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6.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연중 제12주간 금요일
오늘 미사의 말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저마다 "우리의 병고를 떠맡으시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신"(복음 환호송 참조) 예수님을 투영합니다.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태 8,2).
나병에 걸린 이가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말합니다. 원인도 치료법도 모르던 시대에 나병(한센병)은 가뜩이나 고통스런 환자를 소외와 고립의 처지로 내모는 형벌과도 같았지요
그런데 이 환자의 말을 귀담아 들어보십시오. 그의 표현은 단순하지만 깊은 신학적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즉 주님의 "하고자 하는" 의지와 "하실 수 있는" 능력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는 원하시고 바라시는 자체가 곧 이루어짐입니다. 창조 때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진 것처럼 말입니다.
하느님의 의지는 사랑의 의지이고 그 사랑은 멈추거나 고착되지 않고 움직입니다. 환자는 이를 알기에 예수님께, 당신이 원하시면 나를 낫게 하실 수 있다고 일깨워 드립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태 8,3).
예수님은 누구보다 환자의 고통과 슬픔을 알고 연민하시기에 기꺼이 당신의 원의, 바람을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정말, 뱃속 저 깊이에서부터 그의 치유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이 바람과 말씀은 세상 창조 때, "빛이 생겨라"(창세 1,3) 하셨던 하느님 말씀과 맥을 같이하는 창조의 선포입니다.
예수님이 그 환자의 치유를 기꺼이, 적극적으로 바라신 것은 그의 병고를 당신이 모두 짊어지시려는 마음에서였고 또 그에게서 당신을 보셨기 때문일 겁니다. 세상 모든 죄악과 질병 고통을 짊어지실 모습을 일찌기 이사야 예언자도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에서 이렇게 언급한 바 있지요. "사람들에게서 멸시받고 배척당한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였다 ...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이사 53,3-4).
제1독서에서도 차마 읽어내려가기 어려울 정도로 처참한 형벌을 당하는 한 인물, 치드키야가 등장합니다. 치드키야는 바빌론 임금이 유다 임금 여호야킨을 바빌론으로 끌고 가면서 세운 유다의 임금이지요.
유다 임금인 그는 호위군사에게 버림받고 바빌론 임금에게 끌려가, 아들들의 죽음을 목도한 뒤 두 눈마저 빼앗깁니다. 그러고는 청동 사슬에 묶여 바빌론으로 끌려가지요.
그뿐입니까? 예루살렘은 적에게 철저히 유린당합니다. "주님의 집과 왕궁과 예루살렘의 모든 집은 불태워지고 성벽은 허물어"(2열왕 25,9-10 참조) 지지요. 하느님의 신부인 예루살렘 역시 오늘 말씀 속의 인물들처럼 비참한 처지에 이릅니다.
"치드키야는 ...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질렀다 ... 주님께서는 마침내 그들을 당신 앞에서 쫓아내셨다"(2열왕 24,19-20).
성경 저자는 유다 왕국의 멸망에 대해 이렇게 신학적 성찰을 제시합니다. 그렇다면 치드키야와 예루살렘은 (예루살렘이 의인화한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들의 죄로 무너진 것이지요.
반면 예수님은 자진해서 스스로 백성의 죄를 떠안고 수난과 죽음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이는 자기 죄로 멸망하는 이와 주님의 종 메시아 사이의 결정적 차이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오늘의 말씀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련한 나병 환자, 그의 허물어진 육신과 고통은 당시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듯 자기의 죄나 부모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지요(요한 9,3 참조). 우리가 감히 이해한다고 쉽게 말해서는 안 되는 고통의 시기를 거쳤지만, 그의 치유와 회복은 이스라엘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 자비와 사랑의 "증거가"(마태 8,4) 될 것이니까요.
이 인생의 순례 여정에서 우리는 누구도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육체적, 정신적, 관계적, 공동체적으로 통제와 조절이 불가능한 고통에 압도되는 힘든 시기를 맞이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 고통 한가운데 있을 때는 수긍하기 어렵지만, 분명 그 안에 하느님의 뜻이 존재하고 의미가 있지요. 예수님은 그 고통을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으로 전환해 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 덕분에 고통도 존엄성을 얻게 되었지요.
"그러자 곧 그의 나병이 깨끗이 나았다"(마태 8,3).
이 말씀은 "... 하시자 빛이 생겼다"(창세 1,3)라는 말씀과 동일하게 들립니다. 희망의 서광이고 회복과 새 창조의 서막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일부 남겨 포도밭을 가꾸고 농사를 짓게 하였다"(2열왕 25,12).
그 어둡고 황폐한 도륙의 시간 끝에도 희망의 싹은 남겨집니다. 한다한 이들, 재능과 기술이 출중한 이들은 거의 대부분 바빌론으로 끌려가고, 어디에도 끼지 못한 그저 단순하고 소박하며 별 쓸모없이 가난한 이들이 유다 땅에 남겨지지요. 하느님께서 이 가난한 이들을 통해 예루살렘을 재건하시리라는 희망은, 새 예루살렘을 고대하는 우리 모든 믿는 이들에게도 영적 희망을 선사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오늘 말씀 안에서 만난 고통에서, 또 그 고통을 통해 떠오른 나의 고통에서 오히려 새 희망의 불씨를 뒤적여 찾아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쉽지 않지만 예수님께서 앞서 가시니 힘을 내고 용기도 내어 봅시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우리 안에도 "신랑을 위해 단장한 신부처럼 차린 새 예루살렘"(묵시 21,2 참조)이 깃들어 있답니다. 오늘 저의 기도 지향은 질병으로 고통받는 모든 이들, 특히 나환우들입니다. 그들 안에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시길 빕니다. 아멘.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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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6.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연중 제12주간 금요일.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태8,2)
'나병 환자의 믿음!'
'그리고 나의 믿음?'
마태8,2의 말씀은 예수님께 대한 전폭적인 신뢰를 보인 나병 환자의 외침입니다.
이 외침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그의 나병이 깨끗이 나았다고 오늘 복음은 전합니다.
요르단 강에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후 시작된 예수님의 공생활은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부터 치유받은 많은 병자들의 공통점은 오늘 나병 환자가 보여준 모습처럼 예수님께 대한 전폭적인 신뢰, 곧 저 분이야 말로 나를 꼭 낫게 해 주실 분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로 향해 있는 나의 신뢰, 나의 믿음은 어떠한가?
오늘 독서는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에 이어 유다 왕국이 멸망함으로써 예루살렘이 완전히 파괴되는 모습과 바빌론으로의 유배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계시의 중요한 원천인 구약과 신약성경 전체 73권이 전하는 핵심 메시지는 하느님을 떠나면 죽음이고, 하느님 안에 머물면 산다는 메시지입니다.
기원전(BC) 587년에 선택된 이스라엘 민족이 완전히 멸망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그들이 하느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의 신뢰를 그들 스스로 무너뜨렸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의 본질은 나와 하느님과의 신뢰관계, 곧 믿음의 관계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살려면, 하느님과의 신뢰관계를 반드시 유지해야 합니다. 하느님 만이 나를 살 수 있게 해 주실 분이시라는 확고한 신뢰와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삶의 자리에서 늘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지만, 믿는 이들에게는 그것이 진리이니 인내심을 갖고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애쓰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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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6.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연중 제12주간 금요일]
2열왕기 25,1-12
마태오 8,1-4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만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에서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씀드립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도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원하시면 다 이루실 수 있는 능력을 지니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일치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마치 운전자가 내비게이션과 운전을 일치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것을 청하면 거의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먼저 내가 원하는 것을 그분이 원하시는지 물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분께서 원하실법한 것을 내가 원해도 잘 들어주시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떠한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기도 합니다.
이 차이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방향을 분명히 잡고 있었지만, 액셀을 충분히 밟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나병 환자는 엑셀을 끝까지 밟을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원하는 것을 그것 하나로 집중해야 합니다.
1895년 미국 남부 앨라배마주는 비통한 슬픔에 잠겼습니다.
목화재배로 유명한 이곳에 갑자기 목화 바구미가 들끓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목화 수확은 절반으로 줄었고 설상가상으로 전염병까지 나돌았습니다.
도시는 삽시간에 실직자와 결식자의 탄식 소리에 휩싸였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밭에서 목화를 뽑아내고 그곳에 땅콩을 심었습니다.
20년 후, 이곳은 ‘땅콩의 수도’로 불릴 만큼 풍요로운 도시로 변모했습니다.
엔터프라이즈 마을 입구에 세워진 목화 바구미 기념탑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습니다.
“우리는 목화 바구미에 감사한다.
그날의 시련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오늘의 풍요를 누릴 수 없었을 것이다.
목화 벌레여, 그대들이 준 고난에 감사하노라.”
우리는 목화마을을 만들려고 하는지, 풍족한 마을을 만들려고 하는지 명확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원하는 것이 확실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들어주실 가능성이 크지만, 본인도 무엇을 원하는지 명확하지 않으면
주님께서 이끌어주셔도 따라가지 못할 수 있습니다.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은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먼저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25가지 적어보십시오.
그리고 그중에서 더 중요한 5가지만 정하십시오.
그리고 그것에 모든 에너지를 쓰십시오.
그 5가지에 힘을 쏟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머지 20가지에 에너지를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워런 버핏이 투자의 귀재가 되었다면 주식만을 생각하며 그것에 모든 에너지를 쏟았음이 틀림없습니다.
김연아 선수에게 어떻게 그런 경지까지 올랐느냐, 선천적인 것 아니냐고 질문하면 반드시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전 그 목표만을 위해 달렸습니다.”
어떤 미국인이 허리케인이 자신의 집을 다 날려버렸을 때 걱정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중요한 가족과 함께 피신했기 때문입니다.
나머지는 다 날아가도 됩니다.
그러나 집에 두고 온 물건을 되찾으려다가는 가족까지 잃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을 찾고 그것만을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을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할머니는 환갑이 넘은 늦은 나이에 정원을 가꾸기 시작하여 여든이 되어서는 전국 각지에서 그 정원을 보기 위해 찾아오게 만드는 훌륭한 정원을 꾸몄습니다.
지금부터라도 하나에 집중하면 평생 뿌듯해할 무언가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이것저것 원하지 말고 정말 나도 원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구체적인 것 한 가지를 찾읍시다.
그리고 마치 경주하는 말이 다른 곳을 보지 못하게 앞만 보도록 눈가리개를 한 것처럼, 그 방향으로만 나아갑시다.
스티브 잡스는 원하는 것을 이루려면 원하되 절실하게 원하라고 했습니다.
진정 내가 원하고 주님께서 원하는 것이라면, 3개월만 지나면 나의 희미한 믿음을 확신시켜 주는 일들이 하나둘씩 일어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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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6.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2주간 금요일]
2열왕기 25,1-12
마태오 8,1-4
은혜로운 만남
직장생활, 수도생활을 위해 일찌감치 고향을 떠났던 저는 늘 합숙소, 내무반, 기숙사, 수도원 등, 공동 생활시설에서 살아왔습니다.
요즘은 훨씬 덜한데 과거 집단 생활시설은 외부로부터 유입되는 전염성 강한 병균, 특히 피부질환 병균 앞에 거의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한번은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기숙사에 원인도, 증세도 잘 파악되지 않는 강력한 피부병이 침입했습니다.
아마도 새로 입소한 아이를 통해 들어온 듯 했습니다.
당시 피부병이 지닌 특징은 신속한 전염성, 지독한 간지럼 증세이었습니다.
저도 예외 없이 전염되었는데, 정말이지 죽는 줄 알았습니다.
피부병은 즉시 온 몸으로 번졌습니다.
밤낮없이 긁어댔는데, 특히 간지럼증세는 밤이 되면 더 심해졌습니다.
자다가 자신도 모르게 긁다보니 온몸이 상처투성이였습니다.
다양한 피부질환을 겪어왔던 저이기에, 복음에 등장하는 나병 환자들의 심정을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시 나병은 오늘날의 나병(한센병)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적용되었습니다.
잘 치료되지 않는 악성 피부병들을 통칭해서 나병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에야 워낙 의술이 발달되어 아무리 강한 악성 피부병이라 할지라도 신속하게 치료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 당시 악성 피부병은 치명적이었습니다.
마땅한 치료제가 없다보니 효능도 제대로 검증도 안 된 다양한 민간요법으로 치료를 시도했습니다.
그러다 더 증세가 악화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습니다.
당시 나병 환자들이 겪었던 고통 중에 병의 증세가 가져다주는 고통도 큰 것이었지만, 더 큰 고통이 있었습니다.
율법규정에 따른 격리와 추방으로 인한 고통이었습니다.
당시 나병진단은 ‘추방명령서’ 혹은 ‘사망진단서’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나병 진단과 동시에 환자들은 즉시 집을 떠나 성 밖으로 나가 살아야했습니다.
그들은 인적이 드믄 숲속에서, 어두컴컴한 토굴 속에서 짐승처럼 살아갔습니다.
누군가로부터의 치료나 보살핌은 기대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살아있었지만 이미 죽은 사람들처럼 그렇게 힘겹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던, 삶 전체가 우울한 회색빛이었던 한 나병환자가 오늘 기적적으로 예수님을 만납니다.
이 나병환자가 지닌 특징은 적극성이었습니다.
당시 수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습니다만 유독 이 환자 한명만이 강한 적극성을 지녔습니다.
동시에 그에게는 예수님께서 전지전능하신 그리스도 메시아라는 강렬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꼭 치유되어 제대로 된 인간으로 살아보고 싶은 강한 원의가 있었습니다.
그 강한 원의는 당시 나병환자들이 넘어서는 안 되는 한계선, 저지선마저 넘게 했습니다.
나병환자는 율법의 규정 상 군중들 사이로 들어오는 것이 절대 금지되어있었습니다.
그러나 앞 뒤 정황이 살필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죽으면 죽지!’하는 심정으로, 마지막 희망을 안고, 체면도 다 던져버리고, 예수님 앞에 털썩 무릎을 꿇습니다.
엎드려 절하면서 외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태오 복음 8장 2절)
그를 대견스럽게 바라보시던 예수님께서 이윽고 행동을 개시하십니다.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태오 복음 8장 3절)
하루하루 지옥과도 같은 삶을 마지못해 살아가던 나병환자였습니다.
치유, 회복, 귀향 같은 긍정적인 측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그의 일상이었는데, 비참하고 어두운 그의 삶에 한 줄기 강렬한 빛이 찾아온 것입니다.
은혜로운 예수님과의 만남은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오늘 우리도 기억해야겠습니다.
나병환자의 적극성을 눈여겨봐야겠습니다.
꼭 치유되어 사람답게 살아보고자 하는 강한 의지가 그에게 구원을 가져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꼭 자신을 치유시킬 능력을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확신이 그를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건너오게 한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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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6. 연중 12주간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깨끗하게 되어라
어떤 나병환자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자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하시며 깨끗이 낫게 해 주셨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든 병의 원인이 무조건 환자 자신의 죄나 부모, 또는 조상의 죄로 말미암은 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병자나 불구자는 그 자체로 죄인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이들은 육체적으로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괴로움을 받았습니다. 더구나 나병환자는 격리되어 지내야 했습니다. 가족은 물론 사회에서도 소외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불치의 병이고 전염성이 높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소록도, 안양 나자로 마을, 대구 칠곡 등에 따로 모여 살아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철저히 소외시키고 외면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의 몸에 대시면서 고쳐주셨습니다. 보통사람이면 감염의 위험 때문에 결코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결핵이 한참 유행할 때 ‘폐병’이라고 해서 그의 곁에서 음식을 먹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넘어서서 환자들에게 치유의 손길을 내밀어 고쳐주셨습니다. 이는 단순히 육체적인 고통을 거두어 준 것이 아니라 죄인이라는 종교적 단죄에서 그리고 사회적 소외에서 해방시켜준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덕분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치유방법은 고통 중에 있는 그 사람의 한 부분만이 아니라 몸과 마음 모두를 치유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까지 치유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할 일도 생각합니다. 능력의 주님께서 기적을 보여주셨는데 그 바탕에는 나병환자의 믿음이 한몫 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하고자 하시면’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는 말에 예수님께서“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라고 응답하시며 고쳐주셨으니 나병환자는 자신의 믿음으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도와드린 것입니다. 믿고 구할 때 주님께서는 그 간절한 청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내가 바라는 시기와 그분께서 은총의 열매를 허락하시는 시기가 다를 뿐입니다.
외적인 나병을 치유 받아야 하지만 우리 영혼의 치유가 선행 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꼬이면 그것이 겉으로 드러납니다. 드러난 병보다 마음의 병이 더 무서운 것이고 그래서 그 병을 깨끗이 치유 받아야 합니다. 알게 모르게 쌓여만 가는 교만함과 나태함, 이기적인 습성들을 인정함으로써 새로 나야하겠습니다. ‘하고자 하시면 낫게 해 주실 수 있는 분’을 모시고 산다는 것이 우리의 큰 기쁨이기를 바랍니다. ‘보통의사는 병의 증세를 보고 그것을 다스리지만 명의는 병의 뿌리를 다스린다.’고 합니다. 뿌리를 다스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있으니 죄의 용서를 통해 마음의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죄의식으로 말미암은 병은 죄의식을 없애서 고쳐야 하고, 잘못된 생활습성 때문에 생긴 병은 그것을 바로잡아서 고칠 일’(이현주)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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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6. 연중 제12주간 금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8,1-4: 한센병 환자의 치유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2절) 예수님을 뵙고 예수님께 드린 말씀이다. 이 환자는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긴다. 자신이 치유되든 안 되든, 모든 것은 예수께 달린 것이다. 그 치유의 권한은 주님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3절)고 하시면서 치유를 해 주신다. “내가 하고자 하니”라는 말씀은 당신의 권한을 확증해 주시는 말씀이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3절) 이 말씀은 당신의 권한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며 한센인의 추정을 확인해 주시는 것이다. 이 치유사화를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께서 인간들에 대하여 가지신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다. 그분은 우리 인간이 어떤 경우에 있더라도, 어떤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하더라도 당신의 자녀로서 사랑하고 계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여라.”(4절) 환자가 깨끗이 나으면 그 사실을 개인적 판단에 맡기지 말고 사제에게 몸을 보여야 하는 것이 율법이었다. 사제가 그것을 확인하면 깨끗한 삶이 될 수 있었고 사람들이 모여 사는 가족들의 품으로 갈 수 있었다. 사제에게 그런 확인을 받는 것이 당신께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기적은 당신이 행하셨지만, 그에 대한 사실 확인을 사제에게 맡겨 당신이 행한 기적을 판단하도록 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이 환자의 믿음을 볼 수 있다. 많은 소문을 통해 들었던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하나의 인격체로서, 인간으로 받아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주님께 대한 이러한 믿음을 우리도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그는 겸손한 자세로 예수님께 말씀드린다. 강요도 하지 않고 요구도 하지 않았다. 다만,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하고 말씀드린다.
이 한센병환자와 같이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인정하는 가운데 그분께 나아갈 수 있다면 우리 역시 이러한 은총을 체험할 것이다. 몸이 썩어가는 한센병이 아니라, 우리 전 인간을 모두 썩게 하는 무서운 죄 중에 있을 때에도, 우리는 오늘 복음의 한센병환자처럼 주님께 나아가는 자세를 잃지 말아야 한다.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분 앞에 나아가지 못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용서를 벋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항상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를 사랑하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로 정립하고 그분 안에서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우리 되도록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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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6. 한상우 신부님.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태 8, 3)
우리의 모습
우리의 믿음을
보게됩니다.
믿음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우리들 삶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곳은
언제나
우리 삶의
자리입니다.
우리 삶의
자리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는
주님을 만납니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의 실천이
건강한 인격으로
바꾸어줍니다.
믿음은
깨끗하지
않은 것을
밀어냅니다.
믿음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뛰어넘게 합니다.
지금부터 시작하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믿음 안에
치유가 있습니다.
주님께로
가야 할 믿음은
언제나 우리
자신입니다.
믿음이 썩으면
우리의 인격도
썩습니다.
예수님 마음에
비친
우리의 믿음은
어떠한지요?
삶의 생명력은
다름아닌
감사와 기쁨의
믿음임을
믿습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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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6. 연중 제12주간 금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그때에 어떤 나병 환자가 다가와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곧 그의 나병이 깨끗이 나았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마태 8,1-4)”
여기서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라는 말씀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나는 원한다. 깨끗해져라.”입니다.
그리고 병자가 한 말을 예수님의 말씀에 맞추어서,
“저는 주님께서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저를 깨끗하게 하기를 원하십니까?”로 바꿀 수 있습니다.
병자는 예수님의 권능은 믿고 있었지만,
예수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은 부족한 상태입니다.
“나는 원한다.” 라는 예수님의 대답은, 그 병자가 간청하지 않았어도
예수님께서는 그를 깨끗하게 해 주고 싶어 하셨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병자들이 간청을 하든지 안 하든지 간에 모든 병자를 고쳐서
건강을 되찾아 주는 것은 예수님께서 원래 바라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병자가 간청하지 않았는데도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 주신 일이 실제로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벳자타 못 가의 병자’를 고쳐 주신 일과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눈먼 사람’을 고쳐 주신 일이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세상에 오신 것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신 일이고,
동시에 예수님 자신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하신 일입니다.
(‘순종’도 순종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하신 일입니다.)
“나는 원한다.” 라는 말씀에서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
이 말씀에서 ‘알고 계신다.’ 라는 말에는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것을 제때에 주신다.”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만일에 알고 계시기만 하고 그것을 제때에 주시지 않으면,
알고 계신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무의미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하나이신 분이기 때문에(요한 10,30),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또 그것을 언제 주는 것이 좋은지를,
아버지께서 알고 계신 것과 똑같이 알고 계시고, 그것을 제때에 주십니다.
그런데 그 은총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는 우리 쪽의 문제입니다.
하늘에서 ‘만나’가 내렸을 때, 하느님께서는 ‘만나’를 땅에 내려주시기만 했고,
그것을 거두어들여서 음식으로 만든 것은 사람들이 한 일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것도 먹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만나’를 직접 먹여주신 것은 아닙니다.)
용서와 회개의 경우,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용서하셨는데,
그 용서가 나의 것이 되기를 바란다면 회개해야 하고, 이웃을 용서해야 합니다.
회개하지도 않고, 이웃을 용서하지도 않으면,
이미 주어진 ‘용서의 은총’을 나의 것으로 만들지 못합니다.
여기서 ‘깨끗하다.’ 라는 말은 일차적으로는 병이 치유된 상태를 뜻하는 말인데,
이 말을 상징적인 말로 생각하면, ‘구원의 은총을 받은 상태’(예수님께서 주신
은총을 받아서 구원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한 상태)를 뜻하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석하면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요한 15,2-4).”
예수님께서 몸의 병을 고쳐 주신 일은 ‘몸의 병’만 고쳐 주신 일이 아니라,
치유의 은총을 통해서 구원의 길로 인도해 주신 일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 덕분에 병이 나은 모든 병자들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그러나 만일에 병자 자신이 ‘몸의 병’이 나은 것에만 만족하고서
그냥 예수님을 떠나버린다면, 그래서 영혼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지 않는다면,
몸의 병이 치유되었다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립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인도를 거부하는 것과 같고,
구원의 은총을 스스로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깨끗해진 것은 구원의 시작일 뿐입니다.
신앙의 열매를 맺어야 구원의 완성이라는 마지막 목적지에 도착하게 됩니다.)
물론 몸의 병을 고치는 것은 중요한 일이고, 필요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몸의 병을 고친 다음에는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즉 영혼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예수님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루카복음 17장에 나오는 열 명의 병자 이야기가 좋은 예입니다.
그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 덕분에 병이 나은 병자 열 명 가운데
한 사람만 되돌아와서 예수님께 감사를 드렸고,
다른 아홉 사람은 그냥 가버렸습니다(루카 17,11-19).
그냥 가버린 아홉 명은 몸의 병이 나은 것에만 만족하고서
그것으로 그친 사람들로 해석되고,
되돌아온 사람은 영혼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기 시작한 사람으로 해석됩니다.
(오늘날에도 눈앞의 작은 소원만 빌고, 그 소원이 이루어지면 그것으로 만족하고서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가장 큰 은총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예리코의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는 우리에게 좋은 모범이 됩니다.
그는 예수님께 간청해서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는데, 눈을 고친 다음에 새 직업과
새 인생을 찾아서 떠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마르 10,52).
예수님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분이었고,
또 바르티매오를 만났을 때에는 수난 직전이었습니다.
바르티매오가 예수님의 사정을 몰라서 예수님을 따른 것은 아닐 것입니다.
아마도 그가 희망했던 ‘새로운 인생’은,
새 직업을 얻어서 편안하고 부유하게 사는 것이 아니고,
메시아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 바로 그것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바르티매오를,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라는 예수님 말씀을
온전히 실천해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은 신앙인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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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6. 연중 제12주간 금요일 / 한재호 루카 신부님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나병 환자와 예수님의 대화가 인상적입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과연 예수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무엇이든지 다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세상은 왜 여전히 고통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일까요?
왜 우리 삶은 아쉽고 부족한 것이 많을까요? 그분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다 채워 주실 텐데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소원을 예수님께서 들어주시느냐, 그렇지 않으시냐는 사실 중요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분과 우리의 관계가 가까워지느냐, 그렇지 않으냐입니다.
단순히 소원을 들어주는 것만으로 우리가 만족한다면, 그분께서는 그냥 기도를 들어주는 기계나 부적에 지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이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당신과 가까워지고 인격적으로 관계를 맺어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단순히 소원을 들어주시는 것에 우리는 만족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분께서는 만족하지 못하십니다.
부모와 자녀들만 보아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부모가 자녀에게 생일 선물을 주고, 용돈을 주는 것은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그런 부모님의 마음을 모른 채 선물이나 용돈에만 관심을 둔다면, 그 자녀는 아직 부모님의 마음을 모르는 철없는 자식일 것입니다.
어느 책에서 이런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단순히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분이 아니시라, 우리의 소원을 정화시켜 주시는 분이시다.” 그렇습니다. 소원을 빌고 그에 대한 응답을 바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소원을 들어주시는 바로 그분과의 관계에 더 충실합시다.
- 한재호 루카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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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6. 연중 제12주간 금요일/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롱아일랜드 끝에 있는 몽탁(Montauk)엘 다녀왔습니다. 일기예보에는 비가 올 거라고 했는데 다행히 조금 흐렸지만 비는 오지 않았습니다. 아름다운 바다, 해안 절벽, 고운 자갈이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두 번째로 오래되었다는 등대(Lighthouse)가 있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Lightower'가 맞는 것 같은데 영어로 등대는 ‘Lighthouse'라고 하네요. 번역은 쉬운 것이 아니라는 걸 새삼 느꼈습니다. 바닷가에 의자가 있었고, 의자 옆 바위에 몽탁을 사랑했던 사람의 동판이 있었습니다. 동판에는 ’I've been around the world nine times and I don't want to be anyplace else but right here in Montauk.(나는 세상을 아홉 번이나 여행했지만 머물고 싶은 곳이 없었다. 그러나 이곳 몽탁에서는 머물고 싶었다.)' 여행을 많이 한 사람이 머물고 싶은 곳을 찾았다니 정말 좋았던 것 같습니다.
몽탁을 다녀오면서 ‘길’에 대해서 잠시 생각했습니다. 길은 ‘길들이다.’라는 의미도 있다고 합니다. 길이 원래 있던 것이 아니라, 걷다 보니 길이 되는 거라고 합니다. 대관령도 미시령도 새로운 길이 나면서 옛길은 차량 통행이 적어지고, 그러다 보니 길이 잊혀지는 걸 보았습니다. 산보할 때도 그렇습니다. 매일 같은 길을 걷다보면 익숙해지고, 익숙해지니 덜 피곤하고, 덜 피곤하니 산보가 즐겁습니다. 인류는 살아오면서 가축을 길들였습니다. ‘개, 양, 소, 말, 낙타, 닭, 고양이, 돼지’는 인류가 길들여서 같이 지내는 가축입니다. 신발도 처음에는 발에 익숙하지 않지만 자꾸 신으면 길이 들어서 편하게 신을 수 있습니다. 사제복도 처음에는 어색하지만 자꾸 입으면 사제복이 편하게 느껴집니다. 사람들은 편하고, 기능이 좋은 것을 선택하지만 때로는 조금 불편해도 익숙한 것을 선택할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면 서로 닮는다고 합니다.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잘 키운 부부는 닮은 모습이 많습니다. 그만큼 서로에게 맞추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선한 눈빛이 비슷하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말투가 비슷하고, 항상 감사하는 마음이 비슷합니다. 신앙은 어쩌면 하느님의 사랑에 길들여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에 길들여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은 먼저 신앙의 길을 걸었던 성인, 성녀들의 삶에 길들여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에 길들여졌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함께 하시지 않지만, 길들여진 제자들은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치유되기를 원했던 나병환자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치유되기를 원했던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해 주셨습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가까기 갔기 때문에 치유되었습니다. 외모는 건강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들은 모두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영혼의 나병환자’인지도 모릅니다. 주님의 자비를 청하면서 우리들 또한 나와 다른 사람들과 공동선을 위해서 연대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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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6.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치유의 은총 -천형天刑이 천복天福으로-
“네 근심 걱정을 주께 맡겨 드려라. 당신이 너를 붙들어 주시리라.
의인이 흔들리게 버려둘리 없으리라.”(시편55,23).
-“꽃이 꽃을 가져오다니요
그냥 오세요
당신은 꽃보다 더 예뻐요”-
오랜만에 면담성사차 오신 분이 꽃을 들고 와서 다시 되뇐 시 한구절입니다. 정말 주님의 마음은 그러할 것입니다. 또 한 분의 아랫집 수녀님은 몇시간 기도와 정성의 사랑을 다해 실로 뜬 받침대를 선물하여 성모님 이콘 밑에 놓았습니다. 참으로 주님께 가까이 있는 영혼들이야말로 꽃보다 더 예쁜 영혼들입니다. 어제 읽은 어느 건축가(조진만)의 글도 의미심장했습니다.
“나는 건축물이 사진처럼 특정 순간 동결 보존된 상태를 진정한 의미의 완성이라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에 따른 피할 수 없는 변화의 조건들을 슬기롭게 받아들이되 그것들이 더욱 본연의 의미를 풍성하게 만드는 과정이라고 본다. 마흔이 지나면 자기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링컨의 말은 건축에서도 마찬가지다. 좋은 건축은 세월을 받아들이고 시간으로 완성된다.”
공감합니다. 마흔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삶이나 건축이나 나무나 원리는 똑같습니다. 좋은 삶은 세월을 받아들이고 시간으로 완성됩니다. 하여 노승老僧과 노목老木은 절의 자산이라 하는가 봅니다. 바로 여기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이 주님과 사랑과 신뢰의 관계입니다. 치유의 은총도 전적으로 주님과의 관계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 본기도 내용 역시 은혜롭습니다.
“주님, 저희를 한결같이 사랑하시고 끊임없이 보살피시니, 저희가 하느님의 거룩한 이름을 두려워하며, 언제나 사랑하게 하소서.”
주목되는 말마디가 ‘한결같이’, ‘끊임없이’, ‘언제나’라는 부사입니다. 바로 항구한 하느님의 사랑과 우리 믿는 이들의 사랑을 뜻합니다. 참으로 이런 주님을 깨달아 관계를 깊이함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우리 교황님께서 고통중인 분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주실 때 자주 사용하는 표현을 발견했습니다.
“I am very close to you(나는 너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
흡사 주님의 말씀처럼 들립니다. 얼마나 주님과 가까이 계신 교황님이심을 봅니다. 이런 주님의 마음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다가가시는 교황님이십니다. 우리보다 더 우리 가까이 있는 주님이십니다. 바로 이를 깨달은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의 참 깊은 믿음입니다.
이제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의 주님의 산상설교의 가르침이 끝나고 오늘 8장부터는 주님의 권위있는 행동으로 하느님 나라의 위력을 드러냅니다. 바로 그 첫 대상이 나병환자입니다. 불치의 천형天刑이라 칭하는 나병의 치유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 그의 깊은 믿음이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사실입니다.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청이 간절하고 합당할 때 주님은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삼박자 치유 원리가 여기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가엾이 여기는 마음, 사랑의 스킨쉽, 권능의 말씀입니다. 주님은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얼마나 은혜로운 말씀인지요.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우리의 모든 더러움을 치유해주시는 주님의 미사 은총입니다. 참으로 주님과 깊은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과연 날로 주님과 가까워지는 사랑과 신뢰의 관계인지요. 아플 때 마다 간절히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치유 받았다는 인도의 성자 간디의 말이 생각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더불어 그의 나병은 깨끗이 나았습니다. 천형의 나병이 주님을 만나 치유되어 천복을 누리게 되었으니 오히려 전화위복입니다. 나병의 치유와 더불어 주님과의 관계도 더욱 깊어졌으니 말입니다.
예수님의 다음 조처도 참으로 신중하고 지혜롭습니다. 군중의 헛된 인기와 열광을 피하려는 의도와 더불어 율법에 충실한 주님이심을 반영합니다. 율법을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는 예수님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하여 율법에 따라 사제에게 가서 치유로 깨끗해진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라 하십니다. 나병환자를 치유하여 원래의 자기 공동체로 다시 복귀시키는 주님이십니다.
바로 복음의 나병환자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제1독서 열왕기 하권의 유다 임금 치드기야입니다.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질렀음은 물론 하느님의 사람, 예례미야 예언자의 말에 순종치 않은 교만으로 자초한 재앙입니다. 마침내 하느님 징벌의 도구인 바빌론의 임금인 네부카드네자르의 공격으로 예루살렘은 함락되고 성전은 완전 초토화되고 대부분 포로로 끌려갑니다. 마지막 대목이 비참한 상황을 잘 보여줍니다.
“친위대장은 그 나라의 가난한 이들을 일부 남겨, 포도밭을 가꾸고 농사를 짓게 하였다.”
완전 재기불능 상태로 전락한 유다입니다. 바로 이 모든 재앙은 치드키야의 불순종으로 자초한 것입니다. 그가 만일 하느님께 순종하여 유연하게 예레미야의 조언(예레37-39장)대로 항복했다면 이런 재앙은 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새삼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의 겸손한 순종의 믿음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주님은 무엇이든 하고자 하시면 다 하실 수 있으신 분입니다. 참으로 주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우리의 소망은 다 이뤄질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께 믿음을 고백하는 우리의 모든 영육의 병을 깨끗이 치유해 주십니다.
“하느님 내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내 안에 굳센 정신을 새로 하소서.”(시편51,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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