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힘 - 무공훈장과 12.12 반란군. 5.18 계엄군
전두환의 쿠데타로 야기된 광주의 소용돌이 당시 나는 전두환에 의해 소장 직급의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차장으로 발령 됐다. 따라서 육군의 당연직 공적심사위원장이었다. 광주의 소요가 끝난 직후 참모총장 이희성과 참모차장 황영시로 부터 12.12와 ‘광주에서의 폭동 진압 작전 유공 장병에게 무공훈장을 수여하도록 조치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무공훈장은 적과 교전하여 전공을 세운 장병에게 수여하는 것이므로 무리’라고 건의하자, 총장은 "폭도는 적이 아닌가?" 라며 단칼에 필자의 건의를 묵살하였다.
이윽고 얼마 후 필자의 책상 위에 서류뭉치를 올려놓으며 "조속히 공적심사위원을 소집하여 완결하도록 하라"고 말하며 독촉하는 인사참모부장 김홍한의 차가운 눈초리를 맞았다. 잠깐 내용을 훑어보니 전두환의 태극무공훈장을 비롯해 을지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 등 수없이 많은 전투 유공자 명단이 스쳤다. 이에 내가 "무공훈장은 합당하지 않으며, 만약 꼭 이들을 포상하려면 보국훈장이어야 한다"고 반론을 제기하자, 그는 "이미 무공훈장으로 결정이 났으니 서류만 완결하도록 하라"는 차가운 말을 남기고 나의 사무실에서 나갔다.
나는 천장을 응시하며 만감에 빠지고 있다가 마침내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역사에 죄인으로 각인되는 길보다 정의의 길을 선택하기로 마음을 굳히고 끝까지 나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 결과 다음날 인사참모부장으로부터 차장직 해임 통보를 받았다. 나는 그렇게 하여 군복을 벗었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났다. 내가 예측한 대로 당시 무공훈장을 주라고 지시한 장본인과 그로 말미암아 훈장을 받은 거의 대부분의 당사자들은 쇠고랑을 찼다. 기세등등하여 "폭도는 적이 아닌가?"라고 호령하던 그들의 모습이 법정으로 향하는 피의자의 초라한 꼴로 변해 있던 광경을 보면서 역사와 훈장의 의미를 되새기지 않을 수 없었다.
상훈법에 의하면 훈장수여 당시의 공적이 사실이 아니거나 허위일 때에는 국가에서 훈장을 회수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렇다면 광주시민을 적으로 하여 수훈한 공적 내용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이미 밝혀졌으므로 무공훈장은 회수되어야 한다. 더구나 12.12 군사 반란 주동자에게 준 무공훈장은 천인공노 할 패착이 아닌가. 당연히 회수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무공훈장으로 다시 그 빛을 보게 될 것이다. 만일 그들의 무공훈장이 그대로 그들에게 계속 주어진다면, 그 무공훈장이야말로 쇠붙이로 추락하는 훈장이 아닐까. 잘못되었다고 인정할 때 그 잘못을 시정하는 일은 빠를수록 좋다. 나는 치열하게 그들의 무공훈장 회수 작전에 돌입했다.
제일 먼저 홍익출판사를 통해 박경석 군사에세이집 '빛바랜 훈장'을 출간 불을 댕기고 청와대를 비롯 훈장 삭탈에 영향을 끼칠 요로에 선언서를 보냈다. 빛바랜 훈장은 그해 배스트셀러가 되면서 정치군인의 초법적 비행이 세상에 알려졌다. 노무현 대통령이 마침내 칼을 뽑았다.
나의 끈질긴 노력과 당국의 역사의식이 일치하는 희망의 빛이 노무현 대통령에 의해 정의와 진리로 매듭지어 졌다. 노무현 대통령이 결단을 내려 정치군인에 의해 주어졌던 모든 무공훈장이 삭탈되었다. 그 심사 과정에서 나는 검찰에 소환되어 공적심사위원장으로 심사 내용의 문의가 있었다. 나는 사실대로 심사를 거부하고 서명하지 않았음을 밝혔다. 그후 법적 조치가 일사불란하게 진행 되면서 나의 현안 하나가 해결 되었다.
공적심사가 끝나고 다음주에 소장 진급 발령이 예정 돼 있었지만 책임자인 내가 심사를 거부했기 때문에 진급 발령이 무효 됐음을 알려 왔다. 결국 별 하나 더 다는 기회를 정의와 바꾼 셈이었다. 한편 검찰 심문에서 육군본부 공적심사 위원장인 내가 공적심사 서류에 100명 가까운 무공훈장 심사 서류에 서명을 했더라면 현장 구속은 물론 재판에 회부되어 재판 결과 2등병 강등을 비롯 징역형에 처해질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의 운명은 언제나 외줄타기 신세에서 용케 살아남았다. 정의의 길은 험난하지만 선택을 주저한다. 그렇다고 불의의 길이 달콤한 사탕 맛은 아니다. 꼭 후과(後果)가 따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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