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지가 선정한 이 한 편의 시 후보작품
슬퍼할 자신이 생겼다 *
정해영
아침에 눈을 뜨면
밭이랑의 고추모종처럼
슬픔이 자라 있다
백년 전에 뿌린 씨앗도
자라 있다
어젯밤에 심은 낱알도
싹이 보인다
할머니는 해가 뜨면
밭고랑에 납작 붙었다
종일 엎드린 기도로
가지며 호박이며 고추를
가꾸었다
어느 날은 바람 속에서
어느 날은 햇빛 아래서
손발이 저리도록 가꾸는 일은
거두어들이게 하는 일
오래 가꾼 이 일은
할머니 농사와 같아
가꾸는 손놀림에 신귀가 붙어
반질하다
슬픔도 오래 가꾸면
거두어들이는 것이 있어
한들한들
비바람 앞에서도
가볍게 흔들리다
꼭두서니 빛으로 온 하늘을
물들인다
*최문자 시집 자서에서 차용
바다 시금치
김도우
아이는 봄을 기다렸다
집나간 엄마를 기다렸고
고기잡이 나간 아버지를 기다렸다.
우물에서 물을 길어
밥 짓고 동생을 돌보는
고사리 손이 얼고 부르텄다.
엄마가 보고 싶을 때면
하늘을 바다에 펼쳐놓고
새끼 돌게와 놀았다
해풍이 거칠게 밀려올 때마다
발톱에 피가 맺히도록 흙을 파고들었다.
꼬부라진 다랭이 밭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납작 엎드렸던 아이
파랗게 질려
불그죽죽한 시금치
엄마의 젖처럼
깊고 달다
얼다 녹다 온몸이 붉어져도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다
푸른 화살
신혜진
사마귀 한 마리
화살나무 위에서 다리를 버둥거리고 있다
시퍼런 톱날 다리로
노랑배허리노린재를 움켜잡고 씨름하고 있다, 아니
노랑배허리노린재가 뜯어먹히고 있다
머리가 사라지고
노란 몸통이 사라지고
마침내
사력을 다 한 노랑배허리노린재 긴 다리가 파르르 사라진다
화살나무 잎이 붉게 흔들리고
11월이 흔들리고
내 발밑이 흔들리고
한 세계가 사라진다
송도공원
노랑배허리노린재는 푸른 화살을 맞은 것이다
----2020년 {애지}로 등단
쌍둥이
길상호
아픔과 슬픔처럼 닮아서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상현달과 하현달은 어둠의 방향이 다른데도
엄마는 매번 똑같은 옷을 두 벌 샀다
그럴 바에야 그림자를 입고 다닐 거예요,
그때부터 우린 서로 달라지는 게 지상의 목표가 되었다
동생이 폭식을 즐기면
나는 거식이 즐거웠다
동생이 심장에 불을 가져다놓으면
나는 배꼽에 얼음을 채워놓았다
참다못한 엄마는 우리를 사진관에 데려가
하나의 액자 속에 나란히 앉혀 사진을 찍었다
플래시가 터지고 빛이 둘을 묶어놓는 동안
나는 몰래 한쪽 눈을 감았다
너는 도대체가 말을 듣지 않는구나,
엄마가 나의 감은 눈을 칼로 긁어낼 때
일란성 아픔과 슬픔 사이에
불구의 형제가 하나 더 태어났다
코네티컷 이야기
권혁웅
코네티컷(Connecticut),
Connect(연결하라)―I(나는)―cut(자른다)라고
꼬마 조이가 외친다
―들뢰즈・가타리, 안티 오이디푸스
코네티컷, 뉴욕과 보스턴 사이에 자리 잡은
미국에서 세 번째로 작은 주
인디언들이 살던 땅에 청교도들이 배를 타고 쳐들어왔지
‘긴 강이 있는 땅’이란 뜻의 ‘Quinnehtukqut’을 듣고 가는귀먹은 청교도들이 ‘Connecticut’이라 불렀다지
연결해라―나는―자른다
잇고 자르고 잇고 자르고…… 나(I)는 그 사이에 있는 도관이거나 리코더예요
아래위층 물 내리는 소리로 존재하는 화장실 귀신이거나
강물과 쥐 떼를 연결하는 피리 부는 사람이죠
그냥 텅 비었다는 얘기에요
태양왕 루이 14세의 총애를 받은 작곡가 륄리는 왕의 건강을 축원하는 곡을 짓고 직접 연주하다 발을 찧었다 당시의 지휘자는 작고 가벼운 지휘봉 대신 길고 무거운 막대기로 바닥을 내리치며 박자를 맞추었다 그러다가 그만 자기 발을 찍은 것
쿵, 악! 쿵, 악!
풍악을 울리려다가 륄리는 파상풍에 걸려 죽었다
발을 자르면 살 수 있었는데
그럼 춤을 못 추잖아?
잘라라―나는―잇겠다 이거지
코네티컷, 산맥―들판―산맥으로 이루어진
네모반듯한 땅, 처음에는 농사를 짓다가 그만두고
광산이 여기저기 들어섰다가 우르르 폐광되고
울창한 숲은 싹 밀어버리고 (어마 뜨거라 다시 심고)
손대는 것마다 말아먹는 종갓집 둘째 같고
머리는 좋은데 수완은 없는 예일대 수재 같고
원주민들을 처음 본 콜럼버스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그들은 똑똑한 하인이 될 것 같다 우리가 해준 말들을 빨리 익힌다 우리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여섯을 잡아가서 국왕께 보여드리고 말하는 법을 익히게 해야겠다”
그런데 왜 여섯이었을까?
요일마다 하나씩 잡되 주일은 쉰다는 건가?
로빈슨이 금요일에 잡은 프라이데이처럼?
코네티컷, 저들을
우리 땅으로 연결해라―나는―이 땅에서 잘라내겠다
저들이 주5일 근무제를 지켰다면
인디언들의 불행이 6분의 1은 줄었을까
코네티컷, 자가에서 월세로 다시 노숙으로 밀려난
알곤킨 족과 모히칸 족이 입을 모아 외친다
우리를 자르고―아이들까지 전부―너희를 이어 붙였잖아
그리고 몇 번을 말해
우린 인도 사람 아니라니까
노독路毒
한이나
물에 파묻힌 길 찾아 구례 산꼭대기 사성암,
절로 간 소들
새벽마다 울려 퍼지던 절벽 위의 사원
사시 예불 목탁소리의 진동과 진폭을
뜬잠에 자주 들었음이야
마을 외양간에서 통증을 잊고 위로를 받았음이야
장마에 둑 무너져 물바다 된, 혼몽 속
축사 탈출해 장대비 맞으며 오산 자락에 오른
한 무리 소들,
아랫마을에서 한 시간 뚜벅뚜벅 걸어 왔을까
간적면에서 문적면까지 이십 리 떠내려가며 헤엄쳐 왔을까
목마름에 찾던 49 선지식 비로소 약효를 알았는지
누구 하나 절마당에서 뛰놀거나 울음소리 내지 않고
얌전히 쉬다가 떠났다,
세상의 한끝에서 마음의 등불을 찾아
어두워져서야 빈손으로 내려왔던
사성암 산속의 먼 길,
굽이도는 구름 길,
소들도 그 어둠을 믿음으로 건넜으리
벨루가
이 수
아무도 몰래 아쿠아리움에 다녀온 날 저녁
꿈에서 난 한 마리 고래가 되었지
얼굴은 웃는 듯 우는 듯하면서
곡선의 지느러미가 길을 내고 있었지
구석에서 숨을 고르고 있는 내가 보이고
물살에 가르마가 생길 때마다
소음에 어지러운 흰 몸짓을 보았지
예민한 청역으로 불면이 따라붙었지
불면에 시달리는 주파수 앞에서
나의 이야기는 벽을 넘지 못하고 물거품으로 사라지고
바깥소리에 난청을 가지게 되었지
제자리를 모두 바꾸고 있는 바람 부는 날
몸에 생채기를 내면 그 사이로
우수수 붉은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지
아름다운 노래는 최후에 꽂는 깃발이라고 생각했지
투명한 감옥에 갇혀 있다는 것은
꼬리가 빙빙 도는 비명의 나날들만큼이나
가끔씩 숨쉬기조차 버거울 때가 있지
마지막 날숨을 참는 날이 오기라도 한다면
죽을 권리가 내게 있다는 것은 축복일까 재앙일까
아무도 모르게 흘리는 물방울 보호색
뱃속에 가득히 쌓여가는 불발탄들
꿈에서 깨었을 땐 엉덩이 근처가 간질거렸지
가지, 가지, 가지
윤지양
머리를 땅 속에 묻었다 슬퍼할 새도 없이
자랐다 길게 가늘게
다리가 자랐다
신발이 자랐다
너무 자란 다리는 잘렸다
누가 잘랐는지 따질 겨를도 없이
자랐다 계속 자랐다
신발끈이 자라 발목을 휘감았다
자랐다
매달린 매듭들
자랐다
잘했다
누군가는 사진을 찍고 갔다
떨어진 잎을 움켜쥐고 뿌리를 물고
끅끅 거렸다 나는 잘 웃고 잠을 잘 잤다
자랐다 나는 계속 자랐다
히파티아
오 현 정
여성은 우주
철학자는 드물지만
어머니라는 이름은 가장 깊고 높은 철학이다
그림 속 유일한 여성 히파티아
마녀가 아닌 철학자로 오늘도 신플라톤주의를 설파하는 듯
당당하게 정면으로 관람객을 주시하고 있다
얘야, 아무 거침없이 나아가
부조리와 모순에서도 꽃을 피워야지
절대 헤어지지 않겠다고 맹세해도 이별의 날은 온다
그때 너는 무얼 할 수 있지
라파엘로는 어머니를 생각하고 ‘아테네 학당’을 그렸다
평화와 사랑은 언제까지나 미완성
르네상스 시대의 두 눈이었던 히파티아가 내게 속삭인다
사다리가 높을수록 네 안의 낮은 것들은 끓어오른다
앎의 무량함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나란히
바티칸 성 베드로 성당의 안과 밖을 넘나든다
술래잡기
기혁
바다에 숨어있던 파도가 고독을 알아차렸네
사랑인척 웅크렸던 설렘이 발자국만 남기고 떠나버렸네
파라솔 그늘 아래 술래를 잊은 낮잠이 모래를 터네
꿈속에서 만난 인연도 슬픔인척 기다리다 바람에 흩날리네
멀리멀리 바닷가 건너 소녀의 눈 속으로 티끌처럼 들어갔네
감긴 눈꺼풀 안에서 불러도 대답하지 않았네
실눈을 뜰 때마다 거센 풍랑이 몰아쳤네
아프고 시린 일상 속으로 더듬더듬 손을 뻗었네
술래만 남은 가슴께 물이 차오르고 있었네 아무도 모르게
난파선 같은 한 사람 밀려와 그 손 잡아주었네
----이상 애지, 2021년 봄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