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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성의 파괴(8-12)
젖과 꿀이 흐르는 영광의 땅일지라도 하나님께서 떠나시면 황량한 폐허가 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없는 부요보다 하나님을 모신 가난이 더 큰 축복입니다. 바벨론은 예루살렘을 침공한 후에 다시 일어설 수 없도록 성전과 왕궁 그리고 귀인 집에 불을 질러버립니다.
8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열아홉째 해 오월 칠일에 바벨론 왕의 신복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9여호와의 성전과 왕궁을 불사르고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귀인의 집까지 불살랐으며 10시위대장에게 속한 갈대아 온 군대가 예루살렘 주위의 성벽을 헐었으며 11성 중에 남아 있는 백성과 바벨론 왕에게 항복한 자들과 무리 중 남은 자는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모두 사로잡아 가고 12시위대장이 그 땅의 비천한 자를 남겨 두어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와 농부가 되게 하였더라(8-12)
시드기야 왕을 잡은 바벨론 왕은 5월 7일에 그의 부하인 느부사라단을 예루살렘으로 보냅니다. 이때는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나서 한 달 정도 지난 후로 주전 586년 7월 어간입니다. 그는 예루살렘 함락 후 정리하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오자 성전과 왕궁을 불사르고, 예루살렘의 민가들과 귀족들의 집까지 모조리 태워버렸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벽을 모두 헐어버렸습니다. 성벽이 없으면 전혀 보호를 받을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느부사라단은 예루살렘을 더 이상 사람들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런 예루살렘에 대한 철저한 파괴는 이미 예언서에 예고되어 있었습니다(예, 이사야 3:16-26; 에스겔 7장). 예루살렘에 있는 백성들과 항복한 자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이전처럼 가난한 백성들만 그 땅에 남겨두어 포도원 관리인과 농부가 되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 땅에서 경작하는 것은 허락하고, 완전히 사람이 살지 못하는 폐허로 두자는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13-17)
건물이든, 장식이든, 책이든, 관습이든 그 안에 복임이 없고 하나님께서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추구해야 합니다. 그것만 영원한 것입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전쟁의 승자가 패자국의 신상을 훔쳐가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유다에는 신상이 없었기 때문에 대신 성전 기명들을 탈취해 갔습니다.
13갈대아 사람이 또 여호와의 성전의 두 놋 기둥과 받침들과 여호와의 성전의 놋 바다를 깨뜨려 그 놋을 바벨론으로 가져가고 14또 가마들과 부삽들과 부집게들과 숟가락들과 섬길 때에 쓰는 모든 놋그릇을 다 가져갔으며 15시위대장이 또 불 옮기는 그릇들과 주발들 곧 금으로 만든 것이나 은으로 만든 것이나 모두 가져갔으며 16또 솔로몬이 여호와의 성전을 위하여 만든 두 기둥과 한 바다와 받침들을 가져갔는데 이 모든 기구의 놋 무게를 헤아릴 수 없었으니 17그 한 기둥은 높이가 열여덟 규빗이요 그 꼭대기에 놋 머리가 있어 높이가 세 규빗이요 그 머리에 둘린 그물과 석류가 다 놋이라 다른 기둥의 장식과 그물도 이와 같았더라(13-17)
느부사라단은 여호와의 성전을 부수고 야간과 보아스로 불리던 성전의 두 놋 기둥과 받침들과 성전의 놋 바다를 부수어서 바벨론으로 가져갑니다. 갖고 가기에는 너무 크기 때문에 조각내어 들고 간 것입니다. 14절에서는 가마들, 부삽들, 붑집게들 등 성전에서 제사드릴 때 쓰던 모든 놋그릇을 가져갔다고 기록합니다. 불 옮기는 그릇들과 금과 은으로 만든 모든 그릇을 가져갑니다. 여호야긴 때 가져가고 남은 것을 이번엔 놋그릇과 함께 모두 가져가버렸습니다. 16-17절은 여호와 성전의 두 기둥인 야긴과 보아스와 놋 바다에 대한 부연 설명으로, 화자는 그것들의 놋 무게가 셀 수 없다는 것과 그 크기와 모양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합니다. 이것은 솔로몬 시대의 영화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이제 그 영화가 사라지고 철저히 파괴되고 있다는 것을 대조함으로써 이스라엘이 왜 이 지경까지 오게 되었는지 반성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장엄하던 성전 기둥이 무너지고 조각조각 잘려나가는 것을 보면서, 그 시대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영광이 사라진 것과 여호와께서 더 이상 그들을 돌보시지 않는다는 아픔에 통곡하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두 기둥의 파괴는 이스라엘에 있던 영광이 사라졌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화자는 두 번이나 반복해서 기록한 것입니다. 이런 여호와 성전의 파괴는 이미 예레미야 선지자나 에스겔 선지자에 의해 예언된 것이 성취된 것입니다. 에스겔 8장에서 에스겔은 환상을 통해 예루살렘 성전에서 행해지는 온갖 우상숭배를 보았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부정하게 된 예루살렘 성전을 헐어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십니다. 고대 사회에서 전쟁에서 지고 신전이 헐리는 것은 그 땅의 신이 패배하고 수치를 당한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해 범죄하고 부정해진 유다와 예루살렘과 성전을 버리고 심판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인간의 손에 파괴되고 모욕당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종교 지도자들과 정치 지도자들의 죽음(18-21)
짧은 영화와 권력을 누리다가 영원한 멸망을 자초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에 힘 있는 사람들의 눈치나 보고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들을 원수의 손에 붙잡히고 처형하도록 버려둡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사람을 의지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18시위대장이 대제사장 스라야와 부제사장 스바냐와 성전 문지기 세 사람을 사로잡고 19또 성 중에서 사람을 사로잡았으니 곧 군사를 거느린 내시 한 사람과 또 성 중에서 만난 바 왕의 시종 다섯 사람과 백성을 징집하는 장관의 서기관 한 사람과 성 중에서 만난 바 백성 육십 명이라 20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그들을 사로잡아 가지고 리블라 바벨론 왕에게 나아가매 21바벨론 왕이 하맛 땅 리블라에서 다 쳐죽였더라 이와 같이 유다가 사로잡혀 본토에서 떠났더라(18-21)
예루살렘과 여호와 성전을 파괴한 시위대장은 대제사장과 부제사장과 성전 문지 지 등 종교 지도자들을 체포합니다. 예루살렘 성중에 남아있는 위협이 될 만한 인물들은 모두 잡아들입니다. 군사를 가진 내시나 왕의 시종들과 군대 장관의 서기관과 군사 60명 등 끝까지 저항하고 반란을 꾀하며 남아있는 자들을 모두 잡아들이고, 이들을 데리고 립나에 주둔하고 있는 바벨론 왕에게 갑니다. 바벨론 왕은 이들을 모두 죽여 버립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은 반란 세력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느부사르단과 바벨론 왕은 마지막 반란의 불씨까지도 완전히 제거합니다. 21절 하반절은 유다 멸망의 결론으로 이렇게 유다가 그들의 땅에서 떠났습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께서 가나안 민족을 쫓아내고 주신 그들의 땅에서 쫓겨나고 제거된 것입니다. 이것은 신명기 28장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앞에 놓아주신 축복의 길과 멸망의 길 중에서 멸망의 길을 택한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신명기 28:30-37;47-57;63-67에서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그 땅에서 쫓겨날 것이 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경고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고, 자기 눈에 좋은 대로, 주변 나라들이 하는 대로 우상을 따르며 불의를 행하고, 약자를 억압하고 수탈하며 지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서 날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여호와께 제사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지만, 삶은 여호와와 무관하게 살았기에 하나님께서 주신 땅도 하나님의 백성이란 이름도 빼앗기게 된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에 대한 결론입니다.
그달리야의 반란(22-26)
세상이 다 끝나버린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베어죽은 그루터기와 같은 곳에서도 다시 희망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벌하셨지만 그 중에서도 새로운 희망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희망을 보여주신 것은 다윗에게 하신 영원한 나라에 관한 약속을 잊지 않으셨다는 징표입니다.
22유다 땅에 머물러 있는 백성은 곧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남긴 자라 왕이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달리야가 관할하게 하였더라 23모든 군대 지휘관과 그를 따르는 자가 바벨론 왕이 그달리야를 지도자로 삼았다 함을 듣고 이에 느다니야의 아들 이스마엘과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느도바 사람 단후멧의 아들 스라야와 마아가 사람의 아들 야아사니야와 그를 따르는 사람이 모두 미스바로 가서 그달리야에게 나아가매 24그달리야가 그들과 그를 따르는 군사들에게 맹세하여 이르되 너희는 갈대아 인을 섬기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이 땅에 살며 바벨론 왕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가 평안하리라 하니라 25칠월에 왕족 엘리사마의 손자 느다니야의 아들 이스마엘이 부하 열 명을 거느리고 와서 그달리야를 쳐서 죽이고 또 그와 함께 미스바에 있는 유다 사람과 갈대아 사람을 죽인지라 26노소를 막론하고 백성과 군대 장관들이 다 일어나서 애굽으로 갔으니 이는 갈대아 사람을 두려워함이었더라(22-26)
22-30절은 열왕기의 부록으로 그달리아의 반란과 여호야긴의 석방이라는 두 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22절에서 바벨론 왕이 유다 땅에서 살게 한 사람들을 위해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달리야를 총독으로 세웁니다. 바벨론이 유다의 통치권을 갖고 그 지역의 관리자를 임명한 것입니다. 그달리야는 예레미야 26:24에 예레미야를 여호야김의 손에서 지켜낸 인물이며, 그 뒤에 예루살렘에서 친바벨론 그룹을 대표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총독으로 적합하다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달리야가 총독으로 입명되자 그 땅에 남아 있던 군대 장관들과 군인들이 그를 중심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이것은 그달리야를 중심으로 유다를 다시 일으키고 안정시키려는 시도입니다. 그달리야는 이들에게 바벨론 왕을 섬기며 사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을 섬기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합니다. 즉, 반란을 일으킬 생각을 하지 말고 현 상태에 순응하여 살면 안전하게 살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예레미야 40장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포도주와 과일과 기름을 모아 저장하며 얻은 성읍에서 살 수 있다고 보장해줍니다. 그런데 왕족, 즉 남아있던 다윗의 후손인 이스마엘이 그달리야의 친바벨론 정책에 반감을 품고 부하 열 명을 데리고 와서 그달리야를 죽이고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바벨론 사람들을 죽입니다. 이스마엘이 달랑 열 명으로 바벨론에게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해 유다와 예루살렘에 남아 살면서 후일을 기약하고 있던 유다 사람들, 즉 군인들과 군대 장관들은 바벨론의 보복과 응징을 두려워하여 모두 애굽으로 도망가 버립니다. 소위 다윗의 후손인 이스마엘의 어리석은 반란 사건으로 그나마 유다 땅에 남아있던 희망마저 산산이 부서지고 이들은 애굽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유다 역사의 마지막이 이렇게 역출애굽으로 끝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신들의 땅에서 쫓겨나 다시 애굽에서 거류민으로 이방인으로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살게 된 것입니다.
여호야긴이 37년 뒤에 풀려남(27-30)
다 죽어가는 썩은 고목에서도 꽃이 피는 것은 새로운 희망에 대한 단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징계하시면서도 자비를 베푸십니다. 여호야긴의 복권은 형벌의 때가 저물고 회복의 여명이 서서히 밝아오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의로운 해가 떠오를 것입니다(말라기 4:2).
27유다의 왕 여호야긴이 사로잡혀 간 지 삼십칠 년 곧 바벨론의 왕 에윌므로닥이 즉위한 원년 십이월 그 달 이십칠일에 유다의 왕 여호야긴을 옥에서 내놓아 그 머리를 들게 하고 28그에게 좋게 말하고 그의 지위를 바벨론에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왕의 지위보다 높이고 29그 죄수의 의복을 벗게 하고 그의 일평생에 항상 왕의 앞에서 양식을 먹게 하였고 30그가 쓸 것은 날마다 왕에게서 받는 양이 있어서 종신토록 끊이지 아니하였더라(27-30)
이 단락은 37년 뒤의 이야기로 열왕기 저자는 갑자기 시간을 건너뛰어 여호야긴 왕이 감옥에서 풀려나온 이야기를 합니다. 여호와긴은 감옥에서 풀려나 왕의 호의를 받으며 왕의 식탁에서 식사를 하며 좋은 대접을 받게 됩니다. 이렇게 여호야긴의 신세가 좋은 쪽으로 바뀌는 것을 통해 열왕기 저자는 하나님께서 유다의 포로 생활도 끝내시고, 곧 그들의 땅에 돌아가게 하실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열왕기 저자는 비록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 멸망했지만,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끝나지 않았다는 희망의 메시지로 열왕기를 끝내고 있는 것입니다.
열왕기 사가(史家)는 열왕기서를 마감하면서 어설픈 희망의 결론을 내리지 않습니다. 너무 크게 희망을 말하지도 많습니다. 열린 결말, 열린 희망입니다. 참된 희망은 모든 가짜 희망과 긍정의 힘 따위를 버릴 때 비로소 시작됩니다. 철저한 절망 속에서 피어난 가느다란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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